피케티가 제시하는 "민주적, 생태적, 다원적 사회주의"는 이런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의 역동적, 복합적 진화 과정에 바탕을 두며, 신자유주의와 벌일 대결의 결과에 따라 사회국가가 미래에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피케티가 20세기형 사회민주주의의 단순한 부활이면 충분하다는 순진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결론을 이어받아 <평등의 짧은 역사>에서도 "소유의 재분배만으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한다. 소유 구조를 변혁해야 하며, 그러려면 생산과 서비스가 이뤄지는 현장, 즉 기업에서 권력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평등의 짧은 역사>는 이를 위해 1970년대 스웨덴의 임노동자기금 구상을 새롭게 다시 추진하는 방안까지 제시한다(220-223쪽).
이 대목에서 탈자본주의 이념-운동의 오랜 난제인 개혁과 혁명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세재정국가의 2차 도약이 이뤄지기 전인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개혁 대 혁명 논쟁의 주된 내용은 의회민주주의의 수용 여부를 중심으로 기존 국가를 이어받을 것인가, 단절할 것인가로 나타났다. 하지만 사회국가의 등장과 발전, 후퇴까지 한 차례 경험한 역사적 상황에서 피케티가 제시한 도식에 따르면, 개혁과 혁명의 문제는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는 과제와 이런 사회국가 확대만으로는 자동으로 실현될 수 없는 기존 권력관계의 역전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결합할 것이냐는 고민으로 재정리될 수 있다. 이 경우에 두 과제의 관계는 더 이상 대립이나 양자택일이 아니라 공존과 중첩, 시너지다.
물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경로는 단 하나일 수 없다. 아니, 각 사회가 밟을 경로는 과거보다 훨씬 더 다양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머레이 북친의 지역자치적 코뮌주의(<착취 없는 세계를 위한 생태정치학>, 서유석 옮김, 동녘, 2024)에서 영감을 얻은 쿠르드 자치정부의 로자바 혁명처럼,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의 진화 과정을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경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의 역사적 경로가 열린 사회(한국 같은)에서는 피케티가 제시한 탈자본주의론의 기본 구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지속적인 확대와 활성화를 통해 조세재정국가-사회국가를 복구하거나 새로 구축하거나 확장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계급 세력 관계를 실질적으로 역전시키는 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피케티도 지적하듯이, 21세기에 사회국가를 성장시키는 힘은 무엇보다 기후위기와 인구/돌봄위기 대응에서 나올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최대 과오 - 조세재정국가의 후퇴와 역량 훼손
하지만 생각을 이렇게 굴려가다 보면, 우리의 현재가 더 답답해진다. 윤석열 정부의 실정에 관해서는 이미 지겨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느닷없는 '공산전체주의'에 대한 선전포고부터 핵발전소 복고주의, 정파적 목적에서 시작된 의료 파국, 모험적인 대북 강경 기조와 교조적인 한미일 군사동맹 맹신, 이를 위한 뉴라이트 역사관 맹종까지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한데 그 중에서 정말 심각한데도 그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과오가 있다. 부자 감세를 통한 조세재정국가 역량의 심각한 훼손과 후퇴가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가기구는 오랫동안 조세재정 역량이 국내 자본주의 발전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감세국가'(김미경, <감세국가의 함정>, 후마니타스, 2018) 기조를 이어왔지만, 그래도 윤석열 정부 전까지는, 심지어는 박근혜 정부도 기존 역량을 후퇴시키는 짓까지는 차마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평등의 짧은 역사>를 읽으며 확인한 것처럼, 조세제도는 단지 현대 국가의 여러 정책 영역 중 하나가 아니다. 현대 국가의 요체인 조세재정국가의 존립과 재생산을 위한 기본 토대다. 그리고 피케티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회 개혁(심지어는 혁명까지도)이 출발할 원점이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 이 싹을 짓밟고 있다.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가 수탈당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재정 실패에 대해 더 많이 주목하고 더 많이 공격하며 더 많이 투쟁해야 할 이유다.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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