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인국 신부는 <오마이뉴스> 창간 25주년 기념인터뷰를 통해 12.3내란의 실패 이유에 대해 "윤석열과 반란 세력들이 세상 물정을 몰랐고, 시민들과 군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고려하지 않았다"면서도 "이런 모든 걸 고려하면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 권우성
- 왜 계엄이 일어났다고 보십니까.
"윤석열로서는 그것 말고 다른 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쉬운 한 방을 선택한 것이지요. 윤석열은 뭐든지 제 맘대로 되지 않으면 못 참는 사람이고,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불의만은 못 참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인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아서 먹고 입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척사파도 싫다, 개화파도 싫다, 우리는 개벽파다' 하는 식으로 동학 이래 세상을 뒤집어엎는 실력을 키워왔습니다. 미련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윤석열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계엄을 했습니다. 그런 걸 못 참는 우리는 우리 성품대로 맨몸으로 군을 막고 계엄을 무산시켰습니다.
비상계엄을 발령한 쪽은 총칼을 들여대고 세상을 무법천지로 만들지 않고서는 종래의 '개 버릇대로' 살 수 없어 최후의 수단으로 그랬던 것이니, 12월 3일 이래 지금껏 진압되지 않고 있는 '내란'은 그의 억지와 순리의 격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을 앞세운 수구 기득권세력은 '억지'로 우리에게 대들었고, 우리는 '순리'로 그들에게 응답하는 중입니다. 물론 그들은 계엄을 설렁설렁 준비하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했습니다."
- 준비를 철두철미하게? 그랬는데 왜 실패한 걸까요?
"윤석열과 반란 세력들이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어떻게 반응할 건지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명령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도 빠뜨렸습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하늘이 도왔다고 봅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안 가결도 단전이 이루어졌다면 5분 차이로 불가능했을 수 있다고 하지 않나요? 그 5분을 위해서 헬리콥터 출동이 30분 늦어졌고, 군인들이 좀 뭉그적거렸고, 시민들은 그야말로 초 단위로 달려왔고. 이런 모든 걸 고려하면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죠."
가장 앞에서 윤석열 정권 퇴진을 외친 이유
- 2023년 3월 20일 전북 전주시 풍남문 광장에서 '민주주의 회복과 평화를 염원하는 시국 미사'를 통해 윤석열 출범 1년도 채 되지 않아 윤석열 정권 퇴진을 주장했습니다. 1년도 안 된 정부에 대해 정권 퇴진을 전면에 내건 이유가 무엇인지요?
"'3·1절 기념사'가 도화선이 됐습니다. 기념사를 들으면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선을 넘었다'고 봤어요. 기념사에 담긴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부자와 강자에 대한 지독한 편애가 불러올 결말이 눈에 선했습니다. 빈자와 약자에 대한 하느님의 편애를 아는 우리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3·1절 기념사'와 '강제동원 배상안'은 일본 극우들의 망언·망동에 뒤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습니다. 역사적 면죄에 이어 일본으로 건너가 아낌없이 베풀었는데 빈털터리로, 그것도 가해자 일본의 훈계만 잔뜩 듣고 돌아왔습니다. 무례한 처신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대통령이지만 굴종·굴신으로 온 겨레에게 굴욕과 수모를 안긴 죄는 너무 무겁습니다.
사제단은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1974년 사제단을 창립하던 당시 독재자 박정희와 맞붙던 비상한 각오로 윤석열과 싸우자고 결의했습니다. 그래서 '친일매국 검찰 독재 윤석열 퇴진과 주권회복을 위한 월요시국기도회'를 개막하고 그에게 실격을 선언하고, 퇴장을 명령했습니다.
그때가 사제단 출범 50주년을 1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50년 전에 우리 선배들이 그랬듯이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된다고 한 것이지요. 사제단은 윤석열 정부가 청사에 길이 빛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2022.8.29)했었어요. 이태원 참사로 퇴진 목소리가 드높아졌을 때도 우리의 생활 방식을 먼저 뜯어고치자(2022.11.14)며 기대를 접지 않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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