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지형 변동의 종교적 결과로 “개신교의 급팽창”과 “종교시장 내 개신교의 점유율 확대”가 나타났지요. 1945년 당시 15만이 안되던 신자 수가,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하여 불교에 이어 제2의 교세를 가진 종교로 급성장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는 2대 대선에서 이승만 지지운동을 벌였습니다. “기독교계의 요청을 수용하여 국기경례를 주목례로 대신하도록 고쳤고, 군목제도를 설치했으며, 국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지령하였다”고 설명했습니다.
1952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무소속 함태영 목사가 당선되었고 이기붕이 자유당의 제2인자로 떠올랐는데요. 개신교 인맥이 핵심 실세를 이루면서, 자유당의 지도자들 모두 개신교 신자들로 채웠습니다. 배은희는 장로교 목사, 이승만은 감리교 장로, 이기붕은 감리교 권사였어요.
국가의 제도와 행사, 물적 자산 배분을 기독교 중심으로
1954년 12월 기독교방송이 개국했는데,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높이고 교세를 신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만의 참여로, 1951년 초부터 군종제도가 시행에 들어갔지요. 오로지 개신교에만 허용된 형목제도는 타 종교의 참여가 봉쇄되었습니다. 국가적인 장례식도 개신교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요. 기독교계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국군장병의 ‘위령제’를 ‘추도식’으로 개칭할 것”, “‘충영탑’이란 명칭을 ‘기념탑’으로 변경할 것”, “‘33인 합동추념식’에서 ‘분향’을 실시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49년 당시 문교부 안호상 장관은 국기배례를 거부한 학생들에 대한 퇴학 처분을 옹호했어요. 개신교 측은 배례 방식이 ‘국기의 우상화’를 조장한다면서 변경을 요구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교회의 요구를 수용하였고, 문교장관을 기독교인으로 교체했어요.
1948년 제헌 선거일은 원래 일요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교회는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결국 선거일은 일요일을 피해 5월 10일로 결정된 것이었어요.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일요일과 겹친 ‘제헌절 1주년 기념식’을 월요일에 거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울러 개신교는 이승만의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미국으로부터 달러화로 들어온 선교자금과 관련된 외환정책을 통해서, 그리고 귀속재산 혹은 적산의 처리ㆍ배분 과정에서 천리교 부지를 영락교회를 비롯한 개신교회들이 차지하는 혜택을 입었지요.
국민들 죽어가는데, 독재자 송축한 기독교계
이승만 정부하에서 교회와 신자들은 권력자와 과도하게 일체화되었습니다. 교회는 온갖 영예를 받았고, 신자들에게도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자부심의 원천이었어요. 한국 사회 내의 지배적 종교의 하나로 확고한 위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강성하던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붕괴위기에 직면하자, 교회는 이승만에 대한 동정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 하락과 그에 따른 신자 증가율의 하락으로 나타났어요. 독재와 부패에 대한 개신교의 공동 책임을 추궁 당했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살아있는 권력자의 동상이 남산공원에 있었어요. 25미터에 달하는 당시 세계 최대의 동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쫓겨나자, 동상은 끌어내려졌고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개신교계는 이승만의 개인 우상화 시도에 대해서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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