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박미숙씨는 아들 또래 군의관들이 찾아와 사과하는 모습에 자세한 속 사정은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 벌 줘서 뭐 하겠나 싶은 마음이 들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씨는 이날의 일을 지금도 후회한다.
군은 박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용서가 아닌 '책임 없음' 쯤으로 인식했던 모양인지 진상규명은 나 몰라라였다. 이때만 해도 홍 일병 부모는 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된 정확한 경위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뒤늦게 한 방송국 시사교양프로그램에 의해 홍 일병이 군의 부실 의료, 진료 지연으로 사망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씨의 오랜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군은 군의관 2명을 감봉 1개월과 3개월로 솜방망이 징계한 사실을 부모에겐 알리지 않았고, 징계 관련 서류 사망자 이름에 엉뚱한 홍 일병 형 이름을 적어 이후 여러 조사기관과 법원이 홍 일병 관련 징계 기록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뒤늦게 국가배상 사건 1심 재판부에서 징계 기록을 받아내 잘못 기재된 까닭을 묻자 '실수'였다고 대답한 것이 고작이다. 박씨는 군이 일부러 책임을 감추기 위해 이름을 잘못 써둔 것으로 의심한다. 실제 국가 책임이 인정되는 방향으로 국가배상 재판이 급물살을 탄 것은 이 징계 기록을 발견했을 때부터다. 군이 의도를 갖고 징계 기록을 쉽게 찾지 못하게 할 의도로 엉뚱한 홍 일병 형 이름을 써뒀던 것이라 생각하는 이유다.
1심 재판부는 국가의 명백한 과실이 인정되는 사건인 데다 이러한 참극이 재발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행법을 무시하고 판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2023년 우회적으로 '화해권고'를 결정했다. 국가가 홍 일병 유가족에게 2500만 원 상당의 위로금을 지급하고,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는 것이 권고의 취지였다.
이때 정부 소송대리를 맡은 법무부 장관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당대표다. 법무부는 현행법상 화해권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수용을 거부했지만, 이중배상금지의 문제점에 공감한다며 국가배상법 개정 추진을 약속하고 정부 입법안을 발의했다. 다만 이 법안은 21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다 임기 만료 폐기되었다.
그러나 박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군 사망사건 유가족들에게 국가배상은 단순히 배상금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군과 국가로부터 책임을 인정받는 중요한 과정이다. 박씨는 아들 홍 일병을 포함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군인들의 죽음에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를 반드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국회를 찾아 여야 주요 인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당시 한동훈 국민의힘 당대표를 위시하여 지금은 국무총리가 된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수석최고위원, 당대표가 된 정청래 법제사법위원장, 조국 조국혁신당 당대표를 만나 22대 국회에서 반드시 법 개정을 이뤄달라 호소했다. 2024년 12월의 국가배상법 개정은 이러한 피눈물 나는 호소의 결과였다.
재판부 탄핵 국민동의 청원 올린 이유
하지만 마냥 판결을 미룰 수 없었던 1심 재판부는 법 개정 전에 원고 패소를 결정했고,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 제9-3부는 법 개정 논의가 마무리될 때까지 재판 일정을 추정해 두었다. 때문에 법 개정 이후 재개된 홍 일병 국가배상 사건 항소심 재판은 군 사망 사건 유가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법 개정의 원인이 된 사건이기도 하고 향후 법원이 복무 중 사망한 군인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가늠자 사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홍 일병 사망의 국가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배상금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초라한 결정을 내놨다.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가 배상금을 이와 같이 책정한 원인 중 하나는 '백혈병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는 때로부터 불과 11일이 지난 2016. 3. 24. 사망한 점'이다.
부모 입장에선 예후가 좋지 않아 병원에 보냈어도 오래 살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로 읽힐 법한 문장이다. 하지만 이는 가정일 뿐이다. 병원에 안 보내서 무슨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합병증으로 사망한 사람을 두고 예후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 국가의 과실 책임을 줄여주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또 재판부는 '망인의 아버지인 원고 홍성원이 구 군인연금법, 보훈보상자법에 따른 사망보상금 및 보훈보상금을 수령한 점'을 고려사항으로 꼽았다. 이미 보상을 받았으니 배상은 적게 책정하겠다는 뜻이다.
국가배상법의 개정 취지가 보상과 무관하게 국가의 과실이 인정될 경우 군경에게도 배상청구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법 개정 취지를 몰각하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자격 요건만 갖추면 당연히 받는 보상과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 배상은 엄연히 개념이 다르지만 법원은 오랫동안 보상을 받은 경우 그에 맞춰 배상금을 적게 책정하는 관행을 따르고 있다.
박씨는 재판부에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하며 법정을 찾아간 적도 있지만, 판사들은 소란을 피우지 말라며 퇴정을 명령하곤 본인들이 법정에서 나가버렸다고 한다. 이 판결을 이대로 두고 넘어가면 앞으로 사망 군인에 대한 배상청구권 인정 기준이 상식 밖으로 과소하게 굳어질 것이란 걱정이 박씨가 재판부 탄핵 국민동의 청원을 올린 이유다.
10년을 싸워가며 얻어낸 800만 원으로 아들 죽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퉁치고 가라는 말을 납득할 부모는 세상에 없다. 박씨는 "군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나라에 징집할 자격이 없다"며 국회가 재판부를 탄핵할 자신이 없으면, 그냥 징집을 포기하고 징병제를 폐지하라는 입장이다.
나라 지키려고 데려간 자식을 어이없이 죽이고, 제대로 예우도 해주지 않으며, 책임조차 인정하지 않는 국가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운운하기란 얼마나 면구스러운 일인가. 5만 국민동의 청원 성사로 홍 일병 어머니의 절규가 법원과 군에 경종을 울릴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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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김형남의 갑을,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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