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치학자 클로드 르포르는 민주주의를 '권력의 공석'을 인정하는 체제로 보았다. 권력이 특정 집단에 고정되지 않고 경쟁과 교체 속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집단은 '제도적 독립성'을 내세워 권력을 폐쇄된 영역에 고정시키며 민주주의의 개방성과 상호 견제를 무력화하고 있다.
'독립성'이라는 명분 아래 제도적 예외를 부여받은 권력 집단은 이를 방패 삼아 공적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 영역을 성역화한다. 이 순간 권력의 특권화는 더욱 견고해진다. 이들은 민주주의에 내재된 절차와 긴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민중의 선택을 중우적 현상으로 경시하는 우월적 시선을 갖는다.
그들에게 권위는 대중의 승인이나 선택이 아닌, 지명과 내부의 인정에서 성립된다. 비판이나 설득에는 응답하지 않고 자격을 앞세우며, 스스로를 대중정치의 소란과 분리된 존재로 간주한다. 경쟁이나 선출보다는 닫힌 세계의 평가와 자격으로 권위를 계승하려는 이들은 민주주의 내부에서 그 원리를 잠식하는 집단이다.
오늘날의 많은 국가에서 사법부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내부 집단의 대표적 사례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을 대중정치의 바깥에 있는 존재로 상정하며, 국민의 위임이나 선출과 무관한 권위를 주장한다.
그 정당화의 논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권력의 독립성'이다. 이 '독립'은 민중(demos)이 지배(kratos)하는, 즉 민주주의 정치구조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삼권분립은, 자신들의 결정권과 접근불가능한 권위 영역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된 채 본래의 사상에서 심각하게 이탈해 있다.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강조한 삼권분립의 목적은 권력의 일방적 행사를 막는 '상호 견제'였다. 그는 "권력이 권력을 제어하게 하라"는 원칙으로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려 했다. 요컨대 삼권분립은 권력 사유화를 막기 위한 공동 통제의 수단이다.
오늘날 사법 권력이 이 원리를 '스스로는 통제 받지 않으면서 타 권력만을 감시하는 일방적 특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삼권분립의 철학적 기초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것이며, 사법 카르텔을 지키기 위한 의도된 왜곡에 가깝다. '전문성'이라는 명분 아래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온 것이다.
사례 1: Trump v. United States (2024)
첫 번째는 2024년 미국의 트럼프 대 미합중국(Trump v. United States) 판결이다. 당시 대법원은 전직 대통령의 '공식 행위(official acts)'에 대해서는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결정했다. 문제는 그 '공식 행위'의 범주를 누가 정하느냐다.
대법원은 이 권한을 전적으로 자신들이 독점함으로써, 대통령의 어떤 행위는 기소할 수 있고 어떤 행위는 면책된다는 선을 자의적으로 그을 수 있게 되었다. 대통령 권력의 범위를 규정하고 정치적 책임의 무게를 조정하는 권한이, 선출되지 않은 소수의 사법 엘리트 집단에 집중된 셈이다. 선거를 통해 대표성을 위임받은 의회가 아니라,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들이 민주주의의 심판자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사례 2: 슬로터 해임 사건 (2025)
두 번째는 올해 있었던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 레베카 슬로터 해임 사건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메일 한 통으로 민주당 성향의 위원을 해임했고, 1심과 2심 법원은 이를 불법이라 판결하며 복직을 명령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결정을 일시 정지시키며 대통령의 조치에 사실상 힘을 실어주었다. 이는 1935년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확립된 '험프리 집행인 사건(Humphrey's Executor)' 판례, 즉 대통령이 독립기구 위원을 정치적 이유로 해임할 수 없다는 90년 전의 원칙을 뒤흔드는 조치였다.
대법원은 과거 의회가 정립한 제도적 독립성을 약화시키며, 대통령 권한과 정치 균형을 재정의하는 위치에 스스로 올라선 것이다. 이로써 사법부는 해석의 범위를 넘어 민주주의 권력 구조 자체를 재설계하는 행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껍데기로 전락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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