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무역합의의 후속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고 있는 불평등한 조건의 투자를 수용한다면 결국 국민에게 부담이 돌아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측은 일본이 서명한 대미투자 양해각서처럼 미국이 투자 주도권을 쥐고, 현금을 직접 투자하는 방식을 한국에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제 상황에서 수용 불가능한 조건을 미국이 들이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책상치고 고성지르고..." 한미 후속협의 '난항'
17일 정부에 따르면 한미 무역합의의 세부내용을 다루는 후속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주말 직접 트럼프 행정부를 만나면서 어렵게 협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14일 미국 워싱턴D.C.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협상을 벌이고 돌아온 김정관 장관은 16일 기자간담회에서 "협상이 밀고 당기는 과정에 있다"며 "(협상장에서) 저도 책상도 치고 목소리도 올라가기도 하고 하는 그런 과정에 있다"고 협상장 분위기를 전했다.
한미는 지난 7월 30일 무역합의를 타결하고 상호관세와 자동차 및 부품 관세를 15%로 인하하기로 했으나, 아직 구체적인 이행 방안에 대해서는 최종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다.
한미는 무역합의에서 한국이 약속한 3,500억달러(약 486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과 수익 배분 등을 두고 가장 큰 이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이달 초 일본과 합의한 대미투자 방안과 비슷한 내용을 한국에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일이 서명한 '전략적투자 양해각서'를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투자처를 결정하면 일본이 45일 내에 지정된 계좌에 사용가능한 현금으로 투자금을 입금해야 한다. 일본이 투자를 거부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는 조항도 포함돼 사실상 일본의 거부권을 봉쇄했다. 투자 이익도 일본이 투자금의 원금을 회수할 때까지는 양국이 50대 50으로 가져가지만, 원금 회수 이후 시점부터는 미국 90%, 일본 10%의 비율로 배분된다.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 마음대로 일본 정부의 돈을 쓸 수 있는 '백지수표'를 얻어낸 셈으로,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 측에는 투자 이익 배분에 대해 원금 회수 전까지 한국이 90%를 가져가고, 원금 회수 이후부터는 미국이 90%를 가져가는 것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한국 정부는 지분을 가지는 직접 투자는 5% 내외로 하고, 대부분 정부가 융자보증(credit guarantees)을 하는 방식으로 투자금을 조달한다는 구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융자보증은 민간은행 등이 융자를 할 때 정책금융기관이 보증을 서는 것이다. 국내 자본이 미국으로 이동하는 것을 최소화하려했으나,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이 가진 현금을 직접 입금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 "외환보유고 털어 넣으라는 것...불가능한 조건"
미국의 요구에 대해 전문가들은 "애초에 한국이 실행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이 약속한 대미투자 규모 3,500억달러는 한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20%의 규모에 해당되는 막대한 규모이기 때문이다. 2026년도 예산안(728조원)의 67%에 달한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8월 기준 약 4,163억달러 수준인데, 여기에 80%에 해당하는 3,500억달러를 현금으로 미국에 내놓을 경우 제2의 외환위기 사태가 올 가능성이 크다.
나원준 경북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투자처를) 찍으면 한국 정부가 투자금을 현금으로 쏴줘야 한다는 것"이라며 "미국의 요구대로 하면 우리는 외환이 마르면서 또 외환위기 사태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도 "3,500억달러를 현금으로 달라는 건 외환보유고를 털어넣으라고 하는 건데, 할 수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도 "돈을 주려고 해도 돈이 없다. 한국이 할 수 없는 제안"이라며 "미국이 제안을 바꿔주던가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이 상태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먼저 미국에 '백지수표'를 준 일본과 비교해도 한국의 부담이 더 클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5,500억달러 대미투자를 약속한 일본의 경우, 지난 8월 기준 외환보유고 1조2,406억달러의 42% 정도 수준이다. GDP와 비교해도 13% 수준으로, 한국보다 부담이 덜하다. 여기에 일본은 기축통화국인 데다,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어서 달러 조달이 한국보다 유리하다.
나 교수는 "기축통화인 엔화와 원화의 지위 차이와 외환보유고의 수준을 비교하면 한국이 일본에 비해 큰 부담을 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제한 통화스왑' 대안 될까?..."결국 국민에 돈 걷어 미국 주는 것"
외환위기 우려에 한국 측은 '무제한 통화스왑'을 미국 측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화스왑은 환율변동에 대응해 정해둔 환율로 통화를 교환하는 것이다. 만기 시에는 교환한 통화를 미리 정한 환율과 이자를 적용해 재교환한다. 사실상 원화를 담보로 달러화를 싸게 빌려오는 셈이다.
미국의 요구에 따를 경우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갖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사실상 지난 2021년 종료된 한미통화스와프를 더 강력하게 부활시켜 달라는 요구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무제한 통화스왑' 요구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통화스왑으로 대미투자의 부담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통화스왑으로 달러화 조달은 수월해질 수 있지만, 결국 달러화를 빌려올 재원은 정부가 빚을 내서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교수는 "2026년 예산안을 보면 이미 적자 국채를 발행한다고 했는데, 여기에 추가 자금을 집행한다는 건 추가로 차입을 해야 한다. 3,500억달러만큼이 국가 채무로 쌓이는 것"이라며 "정부가 갚아야 하는데, 세금으로 갚아야 하잖나. 결국 전 국민이 달러 빚을 갚기 위해 투입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건 말만 독립국이지 전 국민이 식민지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도 "통화스왑으로 달러를 제공하는 걸 정부가 구상하는 것 같은데, 현재 같은 상황에서 불가능하다"면서 "결국 국민에게 돈을 거둬서 미국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측 입장에서도 한국의 무제한 통화스왑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 교수는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미국 국채를 팔아서 달러를 만들지 않고, 원화를 증발(增發)해서 100조원을 찍어서 달러로 바꿔 달라고 하면 어떡하겠나"라며 "미국이 한국보고 펀드에 돈 넣으라고 했는데 자기 돈을 넣는 것과 같다.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있겠나"라고 말했다.
만일 한국이 무제한 통화스왑을 이용해 원화를 더 발행해서 이를 달러로 교체하는 것을 미국이 우려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되면 원화 가치가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달러를 제공한 미국 입장에서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자료사진) ⓒ사진=뉴시스
일본 먼저 '자동차 관세 인하'..."서두를 필요 없다...급한 건 한국 아냐"
일본은 일방적으로 자국에게 불리한 대미투자를 합의한 대신 한국보다 먼저 자동차 관세 인하를 받아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일 일본이 대미투자 양해각서에 서명하자 일본산 자동차 및 부품 관세를 기존 27.5%에서 15%로 인하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일본과 경쟁 중인 한국 입장에서는 가격경쟁력에서 불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 한미 후속협상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상황도 계속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협상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조언한다.
이 교수는 "급한 건 우리가 아니다. 실제로 미국이 (자동차 관세 인하) 행정명령을 내려도 실익은 매우 적다. 125억달러도 안 될 것"이라며 "그런 조건에서 협상에 서명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딘 베이커 선임경제학자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를 다시 25%로 증가시킬 경우, 한국의 대미 수출이 125억달러 감소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런데 한국산 자동차 관세 인하를 위해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 서둘러 서명을 한다고 해도 125억달러 이상의 이익을 얻지는 못할 것이란 지적이다. 사실 한국이 자동차 관세 인하를 얻어 낸다고 하더라도 이전처럼 가격경쟁력 면에서 일본보다 유리해지지는 않는다. 기존 한국과 일본의 자동차 관세는 2.5%의 격차를 보였으나, 한미, 미일 관세 협상에서 모두 동일하게 15%의 자동차 관세를 적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우 교수는 "자동차 관세가 문제인데, 현대차 등도 미국 현지 생산 물량을 늘린다든지 방법을 찾을 것"이라며 "(미국에 투자할) 그 돈이 있으면 차라리 국내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게 낫다"고 말했다.
오히려 미국의 요구대로 달러화를 직접 미국에 투자금으로 지급하게 되면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한국을 비롯해 각국의 외환보유액은 실제 달러화가 아닌 미국 국채 등 증권 형태로 보유하고 있는데, 투자금 마련을 위해서는 이를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물량의 미국 국채가 시장에 쏟아지게 되면 국채 금리가 오를(국채 가격 인하) 수밖에 없다. 그동안 금리 인하를 요구한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우 교수는 "국채를 팔기 시작하면 미국에도 도움이 안 된다"면서 "일본이 미국 국채를 많이 들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인데 달러화를 주려면 이걸 팔아야 한다. 한국도 팔아야 한다. 중국도 이때다 하고 팔 수도 있다. 그러면 국채 시장 금리가 뛰게 된다"고 지적했다.
"경제 구조 전환하지 않으면 계속 미국에 종속"..."국민과 함께 대응해야"
3,500억달러를 그대로 미국에 투자금으로 지급하는 대신 차라리 국내 기업을 지원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의 요구를 아예 무시하고 대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한미 관계는 한반도 문제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과의 통상 협의가 풀리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 축소를 포함한 전략적 유연화 등을 통해 정치외교적 압박을 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 교수는 "우리는 한반도 문제가 있다. 미국이 주한미국 축소 등 전략적 유연성을 들고나오면 이재명 정부가 책임론에 몰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부당한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민에 협상 상황을 솔직하게 공유하고 함께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우 교수는 "정부가 이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 알릴려고 하지 말고 국민들에게 정확하기 알려야 한다"면서 "자동차 관세도 엎어질 수 있고, 보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정도는 한국 국민의 이해도도 높으니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며 "협상이 다 될 것처럼 하는 단계는 넘어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우 교수는 "모든 리스크는 한국이 지고, 이득은 미국이 가져가는 그런 협의가 어디 있나. 그런 건 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으로 미국 의존도가 높은 수출 주도의 한국 경제 구조를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나원준 교수는 "한국 경제가 이렇게 미국이 이상한 소리하는 데에 흔들리는 고 있는 것은 미국 중심으로 한국 경제가 종속돼 있기 때문"이라며 "이렇게는 계속 못 간다. 계속 미국에 끌려다니게 된다"고 지적했다.
나 교수는 "점진적으로 수출 주도에서 내수 지향으로 변화해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 다수 대중의 소득을 늘리는 형태로 경제 정책의 패러다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렇지 않으면 트럼프 대통령 같은 사람을 만나면 또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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