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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적 박근혜, 진화한 민주주의로 가는 진통 과정"

 

[인터뷰]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한국, 아시아 민주주의 허브 되자"

곽재훈 기자,임경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1-01 오전 3:05:09

 

다음 각 호의 행위를 금한다. (…)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학교 당국의 지도·감독 하에 행하는 수업·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예외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 행위,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 이를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한다. (…)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은 이 조치에 저촉되더라도 처벌되지 아니한다. 다만 그 발언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한 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 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며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한다.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또는 음모한 자도 또한 같다.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 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다. (…) 이 조치에 의한 주무장관의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1975년 5월 13일부터 실제로 한국에서 시행됐던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가운데 있는 내용들이다. 이 조치는 조치를 발령한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도 40여일 넘게 살아남아, 1979년 12월 8일에야 해제됐다. 이 조치로 인해 구속된 사람은 1387명으로, 974명이 사법적 제재를 받았다. (☞관련기사 보기)

그로부터 34년 후인 올해 3월 21일,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9호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많은 피해자들이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았고,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게 됐다. 서울대 75학번인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도 그 중 하나다.

조 교수는 김종수 도서출판 '한울' 대표, 김준묵 전 스포츠서울 회장, 변재용 한솔교육 대표이사, 하석태 전 경희대학교 교수 등과 함께 '아시아 민주주의 인권 기금'을 세우는 데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내놨다. 이들 6명은 지난 23일 배상금과 자발적 기부금 등 5억5000만 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탁해 기금으로 운용하기로 했다. 이들의 의기투합에 '제2의 민주화운동'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프레시안>은 지난 12월 27일 조 교수를 만나 기금 설립 취지와 향후 계획, 그리고 아시아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우리의 민주주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이 진행했다. <편집자>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요인은 시민사회 역량 강화"

프레시안 : '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기금' 설립의 과정과 취지를 설명해 달라.

조희연 : 긴급조치 9호 세대가 배상금을 많이 받고 있고, 앞으로도 받는다. 9호 위반자 전체가 1000명이 넘고, 배상액이 상당히 된다. 양민호 '긴급조치 9호 관련자 재심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양춘승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는 배상액 중 5%씩을 모아서 '민주인권평화재단'을 만드는 작업도 하고 있다. 민주인권평화재단은 70~80명이 서약해 규모가 한 40~50억 정도 된다. 그건 우리가 모아서 우리 국내 민주주의를 위해 쓴다는 거다.

저희의 취지는, 이미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있어 꼭 보상을 안 받아도 되는 사람들이 다액을 출연해 좋은 일을 한 번 하자는 것이다. 반독재 세력, 진보세력이 보수의 눈에서 보면 똑같이 돈, 권력, 명예를 가진 집단이고, 때로는 부패 사건도 나면서 보수를 압도하는 도덕성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 점을 반성적으로 보면서 누가 봐도 좋은 일을 하자는 것이다.

원래 1970년대에는 민주주의라는 말 속에 인권이라는 개념도 포함돼 있었다. 법에 의하지 않고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않을 권리가 '인권'이었다. 그런 민주주의 정신을 살리는 일을 하는데, 우리보다 여러 면에서 민주주의나 인권에서 어려운 위치이고 상대적으로 저발전된 아시아를 우리가 보듬어 안고 지원하는 게 그래도 새로운 일이고 누가 봐도 충분히 합의할 수 있는 일이니 그런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실제로 한국도 1980년대까지 (민주화 과정에서) 독일, 일본, 미국 등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다. 우리가 받은 것을 다시 우리보다 민주화가 지체된 곳에 되돌려줄 필요가 있다. 그런 과정이 우리가 지키려 했고 '타는 목마름으로' 소망했던 민주주의 정신을 다음 세대로 넘기고 일반화, 보편화하는 과정이 되지 않겠는가.

프레시안 : 처음에 기금 설립 아이디어는 누가 냈는가? 6명이 5억5000만 원을 모아 '아름다운재단'에 기탁했는데, 이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인가?

조희연 : 아이디어는 제가 냈다. 공감대가 없으면 포기할 생각도 했지만 김준묵 선생 등이 적극 화답하고 공감해 저도 용기를 얻어 의기투합한 셈이다. 기금은 우리가 기탁해 아름다운재단이 쓰게 된다. 그런데 낸 돈을 허물어 사용하고 마는 게 아니라, 그 정신이 좋으니 사회적 캠페인으로 하자는 것이다.

처음 6명이 5억5000만 원을 낸 다음에 14명이 추가로 1차 기부자로 나섰다. 이분들은 배상금 중에 5%는 변호사비로 내고, 5%는 민주인권평화재단에 기탁하셨는데 한 100만 원 정도 출연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말씀을 드렸더니 응했다. 이필렬 방송통신대 교수 같은 경우는 1000만 원이나 내셨다. 이 14분이 내신 것만 2000만 원이 넘는다. 여기에 일반 시민들도 참여하면 일정한 액수가 되지 않겠나? 더 규모를 키워 좋은 일을 하면 어떻겠나 한다.

프레시안 : 일단은 긴급조치 9호 위반자들 보상금으로 시작하지만 피해자 아닌 일반 시민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인 것 같다.

조희연 : 그렇다. (23일) 기자회견도 그런 취지에서 했다. 널리 알려서 기금을 받고, 취지에 동감한다면 같이 해보자는 것이다. 우리 아이한테도 '아빠가 좋은 일 하니 너도 10만 원이라도 같이 해보자'고 해서 확답을 받은 상태다. (웃음) 언론이 주목해 주고 일부 신문에서는 '제2의 민주화 운동'이라고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옷을 입혀주기도 했다. 송구스러운 한편 더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프레시안 : 아름다운재단에서는 기금을 어떻게 활용할지 구체적 계획이 있는 것인가?

조희연 : 몇 가지 예시가 있는데, 아시아 각국 민주주의 지원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나 5.18재단도 하고 있다. 아시아 정치 난민 지원, 대항언론 지원, 시민사회 발전을 위한 인력 및 교육 지원 등이다. 지금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중요하지만 복사기도 중요하니(웃음) 복사기 사서 지원도 한다. 이런 것들을 포함해, 아시아 민중의 인권이라는 게 포괄적 개념이니 좋은 사업을 안출하는 것도 일일 것 같다.

우리는 사실 기금만 기탁하고 끝내려 했는데, 커뮤니티를 만들어 어떤 사업을 할 것인지도 논의해야 하고, 어떤 단체와 파트너로 사업할 건지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의 결정적 요인이 뭐냐 하면, 시민의 힘의 발전이다. 시민의 역량, 시민사회 역량을 강화하는 그런 사업을 많이 개발하면 좋겠다. 또 하나, 아시아 문제에 관심을 갖는 한국의 청소년들이 아시아 민주주의 지원 사업을 하면 지원할 수 있도록, 청소년을 통해 지원하는 일도 이뤄지면 좋겠다. 현재로서는 이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민주주의 지원은 '국익' 관점으로 접근하면 안 돼"

프레시안 : 아름다운재단을 통로로 삼은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

조희연 : 아름다운재단이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국민들에게 공신력을 갖는 재단이 된 것 같다. 그 공신력에 결합하는 의미도 있었고, 더 적극적으로는 아름다운재단이 대한민국의 아름다운재단이 아니라 아시아의 아름다운재단으로 시야를 확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한국 민주주의와 인권 발전을 놓고 우리가 싸우고 갈등하고 있으니 후진적인 것 같지만, 비교사회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싸우되 그 에너지의 20~30%는 아시아에 투영하면 좋겠다. 제가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데, 참여연대에도 예컨대 간사가 50명이면 그 중 30%는 아시아에 투자하자고 하고 있다. 그럴 정도가 됐다고 본다. 참여연대나 아름다운재단 정도면 아시아 국제조직의 성격이 있어야 한다.

프레시안 : 한국이 1987년 민주화 운동을 통해 아시아에서 자력으로 민주화를 이룬 거의 유일한 나라인데, 조 교수는 아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비교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안다. 동남아 등 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와 민주화 운동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조희연 : 물론 민주주의를 서구식, 미국식 기준으로 일렬 종대로 세워 '이 나라는 높이 발전했다', '이 나라는 아니다' 이렇게 비교하기는 쉽지 않지만, 동북아시아의 한국, 일본, 대만은 그래도 일반적인 선거나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보장이라는 점에서 높은 수준에 와 있는 것으로 본다. 동남아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지체돼 있고, 버마 같은 나라는 민주주의 이행 과정에 본격적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그렇게 3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아시아에는 상당한 정도로 한국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러움이 있다. '한류'에 대한 선망 속에는 물론 한국의 문화와 경제 발전에 대한 선망도 있지만, 그 정치적 역동성과 시민사회의 발전, 비정부기구(NGO)의 강력한 힘에 대한 선망도 있는 것 같다.

제가 몸담고 있는 성공회대학교에 '아시아 시민사회 지도자 과정(MAINS)'이라는 석사 과정이 있는데, 전액 장학생으로 10명의 아시아 민주주의 활동가를 초빙해 교육하는 사업이다. 여기 오시는 많은 분들이 한국의 운동에 대한 선망을 갖고 온다. 태국 출신 활동가가 많고, 파키스탄, 필리핀, 인도에서도 오는데, 한국이 상대적 민주주의 선진국처럼 인식돼 있다. 이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선도 국가로 지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프레시안 : 그러나 한 가지 우려는, 이런 민주주의 지원 사업이 피지원국의 민주주의 발전보다 자칫 지원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조희연 : 정당한 우려다.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NED) 같은 경우가 그런데, 저는 그래서 NED 모델을 따르면 안 된다고 본다. 민주주의 지원 사업은 어떨 때에는 오히려 국익과 반대로 가야 한다. 경제적 지원 프로그램인 공적개발원조(ODA)처럼, 정치적인 공적 부조로 민주주의 지원(democracy assistance)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영역이 확장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아시아 민주주의 인권 기금이 거기 기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수출론적인 입장으로 국익이나 기업의 이해와 같이 가면 안 된다고 본다.

예를 들면 한국 기업이 이미 동남아에 가서 많은 돈을 벌면서 노동 착취, 인권 탄압도 해 왔다. 그것을 상쇄하는 역할,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다국적 기업과 싸우는 동남아의 노동자와 빈민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 방금 NED 얘기를 했는데, 지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민주주의 이식'이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민주주의는 '이식'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민주주의를 자력으로 가능하게 하는 민중의 힘을 키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데 고민의 초점을 둬야 한다.

"北도 민주주의 거부 안돼…'북한 특색의 민주주의' 고민해야"

프레시안 : 아시아 민주주의 문제에서 사실 중국과 북한이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중일 갈등의 복판에서 일본은 한국에 '같은 민주주의 국가끼리 힘을 합하자'고도 하고 있다. 국내 보수세력들은 아시아 인권을 얘기하면 '북한 인권부터'라고도 한다.

조희연 : 사실 '민주주의 지원'에서 굉장히 조심해야 하고, 자칫 NED 식으로 갈 수 있다는 부분이 그런 부분이다. 물론 NED도 일부에서는 무슨 미 중앙정보국(CIA) 돈을 받는다느니 하는 편견이 있지만 90%까지는 통상적 지원이고 10% 정도가 미국 국익과 같이 가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실무적으로 지원이 이뤄지고 있고 그런 점은 이해해야 한다.

북한 부분에서 바로 그런 문제가 튀어나올 수 있다. 이게 북한의 딜레마이면서 남한 내 '반미 자주파'의 딜레마이기도 한데(웃음), 1970년대까지는 남북한 체제가 수평적인 경쟁관계였지만 1970년대 후반을 넘어서며 남이 북을 경제적으로 앞서기 시작했고,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정치적으로도 앞서기 시작했다. 체제 경쟁에서 이미 남한이 북한을 굉장히 앞서는 상황이다.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그런 면에서 보면 북한도 인권이 보장되고 북한 특유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맞다고 본다. 따라서 일정 측면에서는 아시아 민주주의 지원 사업에 북한에 대한 민주주의 지원 역시 포함되거나 중첩될 수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북한 민주화 지원은 분리해서 다른 영역으로 하지 않으면 아시아 민주주의 지원의 순수성이 의심받고 국내에서 정치적 쟁투의 대상이 되거나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아시아 민주주의 지원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다른 범주로 분리하는 게 좋다고 본다.

제가 과거에 중국 민주주의와 관련해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democracy with Chinese charactristics)'라는 글을 썼다. 대만에 6개월 정도 강의하러 가 있을 때 쓴 것인데, 중국 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쓴 논문이다. 현재 중국의 가장 큰 딜레마는 경제적인 산업화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민주화의 도전 앞에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북한 지식인들에게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은 것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이식할 수는 없다는 전제에 서되,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체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민주주의에 대한 2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과잉-보편주의'적인 민주주의관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만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잉-특수주의'적인 민주주의관으로, 민주주의를 결국 외부 사람이 자기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로만 보는 것이다. 중국이나 북한 당국자들의 시각이다.

프레시안 : 박정희 유신정권의 '한국식 민주주의'도 '과잉-특수주의'일 것 같다.

조희연 : 그렇다. 저는 그래서 과잉-보편주의나 과잉-특수주의 민주주의관을 넘어서서 '중국 특색의 민주주의'를 고민해 보라는 문제 제기를 한 것인데, 북한에 대해서도 같은 주문을 하고 싶다. 무슨 뉴라이트 단체처럼 '삐라' 뿌려서 체제를 붕괴시키려 하는 식으로 민주주의를 활용할 건 아니다.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라는데, 원래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아니냐. 물론 그 과정에서 인민이 체제 붕괴를 원한다면 그것 역시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것이고 소련이 그 길로 간 것이다.

과거 동아시아에 3가지 국가사회주의가 있었는데, 소련은 민주주의의 도전, 서방식 정치 및 경제적 발전의 요구를 완벽히 거부함으로써 붕괴됐다. 중국은 정치적인 민주주의 요구는 거부했지만 경제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체제는 유지했으나 지금 정치적 민주화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북한은 둘 다 거부한 채 아직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나, 북한에도 여러 경로가 있을 수 있고 나름대로 자기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지난 10월 아시아민주주의네트워크'(Asia Democracy Network, ADN)도 출범했는데 이들과 아시아 민주주의 인권 기금의 역할 차이나 분담이 있을까?

조희연 : ADN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신형식 기획조정실장과 이성훈 한국인권재단 상임이사 등이 실무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2~3개월 정도의 논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데 사무국 역할을 한국이 하게 됐다. ADN에는 아시아개발연대(ADA)부터 아시아 자유선거를 위한 네트워크(ANFREL) 같은 공정선거 감시 단체, ODA 감시 단체, 남아시아 지역협력단체, 동북아 평화단체, 국제투명성기구(TI) 등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제조직이 다 모여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공명선거와 개발, 투명성 등을 다 포괄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인데, 포괄적 의미의 네트워크, '네트워크의 네트워크'인 셈이다. 우리도 기금이 많이 모아진다면 ADN과 협력해 지원사업을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프레시안 :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 운동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조희연 : 그럴 수 있다. 식민지 경험이 우리의 도덕적 자원인 것 같다. 중국이 '아시아'를 얘기하면 바로 과거의 제국, 중화주의의 기억이 살아난다. 일본이 하면? 바로 대동아공영권이다. 그러니 한국이 좀 했으면 한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여기서 북한을 아예 배제하고 붕괴시키려고 하는데, 박은홍 성공회대 교수가 지적했듯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아세안)과 버마의 관계를 따르면 좋겠다. 버마에서 미얀마 정부가 아웅산 수치를 연금하는 등 군사독재를 했지만 아세안은 버마를 배제하지 않았다. 배제하면 할수록 동남아시아 지역 안보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동북아도 그렇다. 북한을 악마화(demonize)하면 한국과 일본의 우익세력은 좋을지 몰라도 모든 국제적 불안정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아세안의 버마 관리 모델을 따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버마는 타협된, 관리된 민주주의의 경로로 갔다. 미얀마 정부의 군부나 집권층들이 체제 붕괴를 염려하지 않고 민주화의 길로 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북한도 초입은 그래야 한다. 동북아 지역안보 체제에 북한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끌어들여야 북한도 그런 길을 갈 수 있다. 체제 붕괴? 그 나라 민중이 판단할 문제이지 한국 뉴라이트가 판단해줄 문제가 아니다.

프레시안 : 동아시아도 북한을 '버마 모델'로 풀어야 한다는 말인데, 동아시아 내 갈등을 풀기 위해서라도 남북 화해가 중요하다는 것은 전문가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국내정치적으로 보면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거치며 반북 정서가 불어났고, 이 반북 정서가 보수의 국내정치적 지지를 동원하는 데 너무 좋은 도구가 됐다. 2010년 이후 계속 반북 정서로 보수가 정치 장사를 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북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조희연 : 북한이 자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력 강화 정책은 일본의 보통국가화, 군사대국화, 군국주의화를 촉진하는 요소가 된다. 북한은 이미 악마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한 번 악마화되면 좋은 행위를 해도 그건 '위장 전술'이 되고, 나쁜 행위를 하면 본질이 발현되는 것이 된다. 뭘 해도 나쁘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북한을 악마화하면 할수록 북한은 또 체제 유지를 위해 핵개발을 하는 등 자폐적인 전략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동북아의 정치군사적 불안정을 낳는다. 그래서 '버마 모델'을 말한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도 어떻게 스스로를 타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타자의 시선, 비판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성찰성이고 역지사지의 능력이다. 북한도 그런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 '북한이 주도하는 햇볕정책' 같은 것도 생각할 수 있다. 북한이 악마화된 자신의 이미지를 해체하기 위한 적극적 전략을 편다면, 동북아 지역협력 체제에 편입돼 자기들 체제 보장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꼭 '미국 주적론'의 관점에서 '미국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으니 내가 취하는 전략은 언제나 정당하다'는 생각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종북' 담론 부상이 문제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에 박정희 정권이 써먹던 '빨갱이' 담론은 지배 이데올로기로써 권력에 의해 강요된 담론인 반면, 지금의 종북 담론은 상당히 의사(擬似) 합의적 담론 같은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2008년 2월 민주노동당 분당 과정에서 진보 세력 일부가 '종북'을 비판하며 이게 국민적으로 확산된 담론처럼 됐다.

이런 가운데 박근혜 정부나 국정원은 수시로 종북 담론을 끌어내 이제 '노조에도 종북이 있다', '공무원 중에도 있다', '교사도 있다' 하면서 정치적으로 악용하려고 한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분당 후에도 2012년 부정 경선을 둘러싼 통합진보당의 악마화 과정이 덧붙여지면서 국정원이 종북 담론을 국내정치에 악용할 수 있는 지반이 확장됐다.

한국에서도 90%가 권력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면, 10%는 스스로의 잘못된 전략과 오류에 의해 확산됐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2008년 분당의 원인이 된 일심회 사건의 경우, 당원 명단을 북한에 넘긴 것은 분명한 범죄적 행위이고, 이를 정정하라는 요구를 조승수, 심상정 의원이 제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종북'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당을 나오게 된 빌미가 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성찰적 자기 전환 같은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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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국정원 대선개입, 한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의 일부다"

프레시안 : 그렇게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한국 민주주의가 선망의 대상이라고 하는데, 그게 체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도 '독불 정치'로 나갔고,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그래도 박 대통령은 원칙을 지키고 사(私)보다 공(公)을 앞세우지 않겠나'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채워지지 않고 있다. 기존에 이룬 민주주의의 성취도 무너지는 느낌이다.

조희연 : 저는 그 점은 약간 여유 있게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촛불집회하면서 싸울 때는 '(박근혜 정부가) 유신 시대로 돌아갔다', '신(新)파쇼체제가 등장했다'고 비난할 수 있지만, 아시아 전체 민주주의의 맥락에서 보면 한국이 겪는 진통은 한 단계 높은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적극적 진통 과정이라고 본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에서 주요한 갈등은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가는 진통이라고 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87년 항쟁으로 이룬) 한국 민주주의를 공습해 무너졌고 '반독재 민주정부'도 그것을 방어 못하고 붕괴했다. 그래서 비정규직, 양극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저는 이게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문제도 과거와 동일한 성격이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 보면 국정원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과정, 더 심화된 형태로 민주주의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과정인 것 같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통제됐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국정원이 정치 영역에서 장막 뒤의 행위자(behind actor)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번의 아주 극단적으로 퇴행적인 정치 개입을 통해 이미 존재해 왔던 국정원 선거개입이 공론장으로 떠오르고 있고, 거기 대해 민주적 규제를 하려고 하는 진통 과정을 겪고 있다고 본다. 형태상으로는 이미 성취한 민주주의가 퇴행한 것을 회복하는 과정인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질적 심화, 사회·경제적 심화라는 한 단계 진화한 갈등의 주제가 결합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즉 현재 한국이 가진 사회·경제적 문제점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고, 이것을 제대로 처리한다면 아시아 민주주의의 새 모델이 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아시아의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아시아에는 본격적인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한 나라가 없고, 싱가포르가 내용적으로는 어느 정도 실현하고 있지만 그건 냉전 시대에 사회주의의 위협 속에서 싱가포르 권위주의 체제가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인 것으로 맥락이 좀 다른 측면이 있다.

프레시안 : 박 대통령 집권 과정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을 내세운 것이 바로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의제가 됐다는 증명인 것 같고, 박 대통령 역시 이것이 시대적 요구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집권 이후 관련 공약들이 파기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조희연 : 2012년 12월의 박근혜가 있고, 2013년 12월의 박근혜가 있다.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2012년 12월의 '전향적 박근혜'는 왜 탄생했느냐, '반독재 민주정부'에 대한 실망과 좌절, 민심의 이반 위에서 '선진화' 담론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가 집권했다. 유권자들은 '선진화'라는 이름에서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와 민생 민주주의를 연상했지만, 5년간 기업 친화적인 정책과 4대강 사업 같은 대형 개발 프로젝트만 하면서 실망과 좌절이 쌓이고 중산층과 자영업자의 삶은 붕괴했다. 여기에서 광범위한 불만이 생겨났다. 보수세력이 권력을 상실할 것 같은 위기 속에서 극약 처방으로 '전향적 박근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처럼, 집권 후에는 본인 스스로가 그런 약속(에 대한 의지)이 약해지는 것이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보수 내부의 반발이다. 기업들이 나서서 '공약은 공약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전향적 박근혜'를 '이전의 박근혜'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이다. 저는 박 대통령이 대차게 나가야 한다고 본다. 진보의 입장에서는 '2012년의 박근혜'가 더 큰 도전이고 어려움이다. 보수가 진화한 만큼 진보도 업그레이드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3년의 박근혜는 '퇴행적 박근혜'다. 대중의 불만과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한 저항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신 권위주의 방식을 취했다는 것은 문제다. 지금 그것이 전면화돼 나타나는 양상이 아닌가 한다.

프레시안 : 불만이 전면화됐다고 하지만, 사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가지는 중대함에 비해 대중의 분노 정도는 약하지 않았나?

조희연 : 한국민들의 전통적이고 관행적 지혜가 집권 1년에서 1년 반 정도 '공약한 대로 마음껏 해 보라'는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게 새 정부와 언론, 새 정부와 국민 간의 밀월이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박근혜 정부는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것 같다. 저는 솔직히 2013년 12월의 '퇴행적 박근혜'의 모습이 어디서 나오는지 고민이다. 정치학자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다 보면 박 대통령 특유의 캐릭터가 있는 것 같고, (박 대통령 주변의) 집단이 가지는 역사적 특성도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등장은 김 실장 개인의 등장이 아니라 많은 지점에서 '70대'라는 집단의 등장이다. 이건 (박 대통령이 김 실장으로 대표되는 집단을 국정 동반자로 선택했다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박근혜 정부 집권세력이) '박근혜를 상징군주로 하는 30년 만의 보수 대연합'이라는 것이다.

이 헤게모니 세력의 성격은 이제 70대가 된 관료 집단과 군(軍), 그리고 검찰이라는 공안 세력이다. 이들은 지난 20년 민주화의 진통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박 대통령 본인도 민주적 쟁투 과정에서 훈련받을 기회가 없었다. 정치 이력을 봐도, 천막 당사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나지 않았나. 그러니 갈등을 조정하고 대중과 소통하고 타협도 하는 그런 리더십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좀 성찰적으로 봤으면 좋겠다. 지금 대중은 과거의 대중이 아니다. 높은 기대를 갖는 대중이고, 독재를 무너뜨렸던 대중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성이 안 찼던 대중이다. 그들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수가 스스로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좀 허물면서 가라고 주문하고 싶다.

"2012년 탄생한 '전향적 박근혜'의 퇴행은 모두의 불행"

프레시안 :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대중의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민영화 이슈에 대해 대중의 반응은 상당히 높은 강도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내면화된 믿음이 있지만,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지표일까?

조희연 : 그런 면이 있다고 본다. 이명박 정부 5년을 거치며 친기업 정책,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대중의 비판적, 저항적 감수성과 분노가 확대된 면이 있다. 이곳 서울 합정동에도 3~4개월 동안 재래시장 상인들이 (대형 마트 입점에 반대해) 천막을 치고 투쟁하기도 했다. 칼 폴라니가 '시장의 지배력이 전 사회적으로 확장되면 사회의 자기 보호 본능이 발현되면서 시장에 저항하게 된다'고 했는데, 재래시장 상인이나 자영업자 같은 전통적 집단들의 저항에는 그런 성격이 있다. 산업·금융 쪽에 있던 대자본이 유통 분야로까지 오면서 자기 삶이 급속히 붕괴되는 데 대한 사회적 저항인 셈이다.

철도 민영화에 대해서도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불가피하다',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정부의 논리가 과거에 비해 이미 폭넓게 수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변화가 있다. 민영화가 세계적 추세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수준의 민영화를 할 거냐, 대중이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느냐는 충분히 다를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봐도 민영화에 대한 굉장히 폭넓은 저항적 감수성이 있는 사회다. 한국의 보수정부도 미국·영국식으로만 할 게 아니라, 한국 대중에 맞게 민영화 정책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철도 민영화가 아니라고 하지만, 설사 민영화가 맞더라도 한국 대중의 태도가 영·미와는 다르니 정부도 거기 맞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달라진 국민적, 시대적 요구에 박근혜 정부가 눈을 떠야 한다는 주문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조희연 : 박근혜 정부가 취하고 있는 강경정책은 굉장히 오래되고 익숙한 통치전략이다. 이런 오래된 전략과 변화된 대중의 인식 간 격차가 있는 것 같다. 만약 박근혜가 MB의 위치에 있었다면,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MB가 아닌 박근혜가 이겼다면, 박근혜 역시 MB의 전철을 밟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2012년 12월의 박근혜'는 정확히 박정희 모델을 따라한 MB가 국민적 저항을 받는 것을 보고 그 모델을 수정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거기서 '전향적 박근혜'가 탄생했다.

그런데도 MB의 실패 경험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려 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로 보나,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측면에서 보나,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하는 아시아 민중의 입장에서 보나 불행이다. 한국의 보수는 중도화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대중은 높은 평등주의적 기대를 갖는 대중이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현실 정치에서 보수의 정치 메커니즘이 민주주의와 친화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희연 : 사회에는 언제나 적대적 갈등과 비적대적 갈등이 있다. 민주주의는 적대적 갈등의 의제를 비적대적 갈등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러려면 공론장이 확장돼야 한다. '너는 빨갱이니 배제한다', 이런 게 아니라 이슈를 공론장으로 끌어와 타협적인 정치 가공을 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 선진국이다. MB가 내건 '선진화'의 진정한 의미가 이런 것이다.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더 많은 협의제 합의제 민주주의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MB 정부는) 정반대로 퇴행하고 권위주의적으로 갔다. 제가 주장하는 '보수의 중도화'란 이런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보수가 진보적 의제를 자기 식으로 융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는 체질상 더 급진화되기 쉽고 보수적 주장을 수용하기는 어려운데, 상대적으로 보수는 편한 위치에 있다. 보수의 중도화가 이뤄지면 오히려 보수의 정치적 기반이 확장될 것이다.

프레시안 : 보수의 중도화는 상당히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전략이고, 지난 대선에서 그 효과가 확인됐는데, 막상 집권 뒤에는 왜 정치적 이득이 되는 그런 통치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는 건가?

조희연 : 제가 진짜 궁금한 게 그거다. (웃음) 왜 그렇게 나가야 하느냐, 그러다 보니 이게 혹시 체질이거나 역사적으로 내재화된 성격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연령적으로 70대인 집권 엘리트들의 문화 속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것 같은 느낌이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의 갈등 구조에 대해 얘기하면서 '공론장'을 언급했는데, 흔히 한국사회를 '기울어진 운동장'에 비긴다. 특히 언론 지형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9:1 정도로 보수 우위가 됐고, 종편 출범에 이어 '지상파의 종편화(化)'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언론 환경이 지금 집권세력에게 자아도취를 주지는 않을까?

조희연 : 공론장에 심대한 왜곡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다. 공론장이 왜곡되면 전반적 여론분포를 보수에 유리하게 해석하게 되고, 그러면 정책 처방이 왜곡돼 보수에게도 독이다. 종편 출범은 보수 언론의 힘을 공중파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이고, 여기 자본의 힘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미 강력한 자본권력의 힘이 언론기업과 결합해 공론시장을 보수적으로 확실히 재편하려고 하는데 이게 문제다. 한 번 허가된 종편을 취소할 수도 없고…. 오히려 다음에 진보적 종편도 만들고 해서 역으로 다원화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한다. 있는 것을 없애기는 어렵다. 저항이 너무 심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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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민주-반민주 구도로는 불충분…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 선도 모델 돼야"

프레시안 :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이 최근 낸 책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민주 대 반(反)민주' 구도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주장을 폈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절차적 민주화에서 연원한 것이지만, 야당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방패가 되기도 했고, 지금에 와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가 되기도 한다. 현재 상황에서 '민주 대 반민주'가 여전히 야권이 제기할 수 있는 효율적이고 타당한 전략일까?

조희연 : 정치학에서 '87년 체제'라고 하는데, 1987년의 시기에는 독재의 유산을 척결하기 위해 '민주 대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 구도가 유효하게 존재했고 정치적 갈등의 지배적 의제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정원 대선개입 문제 등 독재 유산과의 싸움이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저는 지배적 의제의 전환에 착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저는 '포스트 민주화'로의 전환이 있었다고 본다. MB정부부터 시작된 보수정부 10년은 일종의 '민주화 이후 시대'다. 그 시대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민주화 의제도 갖고 있지만 다른 새로운 의제, 새로운 갈등과 분노, 요구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새로운 저항성을 끌어안는 '민주화 이후 시대'의 새로운 전선 구성을 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과거의 파쇼적, 반민주적 유산을 여전히 갖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이른바 민주진영에는 강점이다. 저항의 전선에 '민주주의'라는 국민적 합의담론을 가져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일 뿐, 그것만으로는 박근혜 정부를 이길 수 없다.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한 싸움조차 필요조건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많은 경우 '다시 87년으로' 라고 하면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관점을 취하는데, 새로운 저항의 주체가 나와 새로운 전열, 새로운 대치선이 만들어질 때 박근혜 정부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본다.

충분조건은 이런 것이다. 젊은 세대가 겪는 새로운 모순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로 표출됐다. 이들의 새로운 분노를 끌어안고, 사회경제적으로는 자영업자들의 분노까지 끌어안는 저항의 연합전선, 무지개 전선을 만들어야 박근혜 정부를 넘을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주제로 싸우는 것은 굉장히 소모적인 일일 뿐이다. '보수의 중도화'를 통해 과감한 전환을 해야 하고, 새로운 미래지향적 주제를 가지고 싸우는 게 좋다. 박근혜 정부도 그렇게 앞으로 나가면 좋겠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조희연 : 아시아 각국의 상황을 보면, 선거를 통한 정치적 민주주의는 태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다. 지금 아시아는 한 단계 높은 민주주의의 모델을 누가 만들 것이냐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

여기에는 3가지 모델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민주화된 싱가포르' 모델이다. 싱가포르는 냉전 시대 사회주의의 위협 속에서 국가에 의한 주택 공급 등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가지게 됐는데, 이런 싱가포르 모델이 권위주의를 넘어 민주화될 때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민주화 및 재사회화된 중국' 모델이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했지만 개혁개방 이후 지니계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불평등한 국가가 됐다. 중국 혁명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재정립해야 하고, 정치적 민주화 도전도 겪고 있다. 만약 중국이 이 '병목 지점'을 돌파한다면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

마지막 하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실현한 한국' 모델이다.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저는 한국이 새로운 모델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싱가포르는 시민사회의 힘이 약하고, 중국은 재사회화의 동력이 아래에서만 나올 경우 중국판 자유주의 혁명으로 갈 수도 있다. 시민사회와 노동의 역동성이 있는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새로운 선도 모델을 만들었으면 한다.

 
 
 

 

/곽재훈 기자,임경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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