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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맞는 사람과 마시면 천 잔도 부족하고

여러분은 ‘또 다른 나’를 찾으셨는지요?
 
정운현 | 2015-02-20 20:43:5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
酒逢知己千杯少(주봉지기천배소) 
話不投机半句多(화불투기반구다)

술은 마음 맞는 사람과 마시면 천 잔도 부족하고 
말은 마음이 맞지 않으면 반 마디도 많은 법이다

중국 당(唐)대의 시선(詩仙) 이백과 시성(詩聖) 두보가 당나라 수도 뤄양(洛陽)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두 천재 시인은 만나자마자 ‘첫 눈에 반한 남녀(一見鍾情)’처럼 한 눈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자 둘은 곧 의기투합하였습니다. 백년을 만나도 손님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천년을 사귄 듯이 친근한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호방한 기백의 낭만파 시인 이백과 고지식한 서민형 시인 두보. 둘은 어찌 보면 닮은 점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詩)를 통해 두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인생과 문학을 얘기하며 밤새 술판을 벌였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다 보니 그들에겐 ‘천 잔의 술’도 아마 부족했을 것입니다. 이날 밤 두 사람은 술에 취해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잤다고 합니다.

                   이백                                 두보

중국 사람들은 오랜 친구를 ‘라오 펑요우’(老朋友)라고 부릅니다. 오랜 벗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흔히 입에 올리는 속담이 바로 ‘지우펑즈지, 첸베이샤오’(酒逢知己千杯少)입니다. 그리고 이 말 끝에 뒤따라 나오는 말이 바로 ‘화 뿌터우지 빤쥐뚸’(話不投机半句多)입니다. 말하자면 대구(對句)인 셈이지요. 반가운 벗과는 천 잔의 술도 작지만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는 반 마디 말도 싫다는 뜻입니다.

술 얘기 나왔으니 이백 얘기 하나 더 보태야겠습니다. 시선(詩仙)보다는 주선(酒仙)으로 더 잘 알려진 이백은 ‘달빛 아래서 혼자 술을 마시다’(‘月下獨酌’)이란 시에서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이유를 두고 “하늘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술별이 하늘에 없었을 것이고(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땅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땅에는 마땅히 술샘이 없었으리라(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라고 했습니다. 역시 이백답군요.


2. 
酒逢知己千杯少(주봉지기천배소) 
人生得己死无憾(인생득기사무감)

술은 마음 맞는 사람과 마시면 천 잔도 부족하고 
살면서 또 다른 나를 찾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

위와 비교할 때 첫 구절은 둘 다 같습니다만, 뒷 구절이 다릅니다. 혹자는 이렇게 댓구로 짝을 짓기도 하더군요. 제가 보기엔 이렇게도 어울리는 듯합니다. 여기서 공통점은 ‘사람’입니다. 전반에서는 ‘마음 맞는 사람’, 후반에서는 ‘나 같은 사람’입니다. 내용이야 그게 뭐가 됐든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밤새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이며, 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아마 그럴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은 많지만 지기(知己), 지우(知友), 즉 나랑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명심보감> 교우편(交友篇)에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풀이하자면, ‘얼굴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나,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은 그 몇이리오.’라는 뜻입니다. 서로 인사하고 같이 밥 먹고 차 마신다고 해서 다 ‘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중에서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요, 한 사람이 일생에 만나는 사람은 대략 5000명 정도라고 합니다. 보기 나름이겠지만 적은 숫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생에서 만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우선 가족과 친인척, 학창시절 스승과 교우, 직장동료, 그 외 각종 인연들... 5000명이라는 숫자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옷깃만 스쳐도’식의 ‘인연’은 물론 대상이 아닙니다.

그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랑 잘 통하는 사람도 적거니와 나와 같은 사람, 즉 ‘또 다른 나’를 찾기란 참으로 어려운 노릇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런 친구 정도는 돼야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친구’란 동성일 수도, 이성일 수도 있으며, 이런 친구를 찾는다면 세상을 얻었다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또 다른 나’를 찾으셨는지요?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1&table=wh_jung&uid=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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