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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호, 가해의 진실을 말하라

<베트남 나비평화기행③> 빈딘성 민간인 학살 현장을 가다

빈딘성=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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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2.05  22: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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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은 베트남전쟁 종전 40년입니다. 그리고 한국군 전투병 파병 50년입니다. 지금까지 학자들과 언론인들은 베트남전쟁이 왜 발발했고, 어떻게 진행됐는가에 대해 천착해왔습니다.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고, 베트남전쟁 피해자들과 참전 군인들의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있을 뿐, 가해자는 진실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베트남전쟁이 왜'라는 물음을 넘어서 한국사회는 "왜 민간인을 학살했는가", "어떻게 사죄해야 하는가"에 대해 늦었지만 답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어야 합니다.

<통일뉴스>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나비기금>이 마련한 '베트남 나비평화기행'(2~9일)에 함께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학살에 당사자가 사죄하고 해결에 나서기를 바라며 평화를 찾는 동행기를 마련했습니다.

 

   
▲ 베트남 빈딘성 고자이마을 중앙 위령비 뒤에는 1966년 음력 2월 26일 당시 맹호부대의 학살상황이 모자이크벽화로 묘사되어 있다. 군인 오른쪽 팔에 맹호부대의 상징인 호랑이 그림이 선명하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1966년 1월 9일 낌따이촌 37명 학살
1966년 음력 1월 23일부터 2월 26일 빈안사 1,004명 학살
1966년 9월 24일 쯔엉탄마을 58명 학살

'학살'(虐殺, massacre), 가혹하게 마구 죽임'. 1965년 10월 25일 한국군 전투병으로 구성된 맹호부대가 베트남 중부 빈딘성 뀌년시에 있는 항구에 상륙했다. 상륙 1년도 안된 이들에 의해 민간인들이 학살됐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마련한 '2015 나비기금과 함께하는 나비평화기행' 참가자 20여 명이 4일과 5일 베트남 빈딘성 일대에 있는 민간인 학살 현장을 찾았다.

4일에 방문한 맹호부대 주둔지역인 빈딘성 낌따이촌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소위 베트콩)이 쏜 총에 한국군 1명이 사망한다. 이에 복수라는 명분을 가장한 한국군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공터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여기서 43명이 죽었고 이 중 37명이 낌따이촌 사람이다.

주민들이 학살된 곳에 1976년경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졌다. 증오는 혐오감과 분노가 같이 느껴질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여기에는 싫은 감정과 비난하려는 의도도 담겨있다. 한국군에 대한 분노를 고스란히 담은 구조물이다.

현재 일부 구조물은 마을 어귀에 서있고, 2016년 학살 50년을 앞두고 새로운 '증오비' 건립 공사가 한창이다. 가해의 진실에 답을 얻지 못한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한국군을 증오할 수밖에 없다.

이 마을에는 정대협이 '나비기금'으로 지원하는 찐 티 남 할머니가 생존해 있다. 남 할머니는 학살로 다섯 명의 가족을 잃었다. 지금도 학살 당시 방공호에서 나와 한국군에게 전투화로 차이고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았던 순간, 가족의 시신이 불타는 광경이 선하다.

   
▲ 낌따이촌 입구에 세워져 있는 '한국군 증오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낌따이촌에서 학살된 이들이 묻힌 무덤에 나비평화기행 참가자들이 4일 향을 피우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떠이선현 떠이빈사 고자이마을. 맹호부대가 이 곳에서 학살을 하기 전까지 빈안(平安)사였다. 하지만 이후 떠이빈(西英)으로 이름을 바꿨다. 더 이상 편안할 수 없다는 반증이다.

한국군의 대표적인 민간인학살로 손꼽히는 빈안지역에서는 1966년 음력 1월 23일부터 2월 26일까지 15개 지역에서 총 1,004명이 학살됐다. 학살의 마지막 날에 고자이마을에서는 1시간만에 380명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학살된 주민들이 묻힌 땅 위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위령비에는 '이곳에서 1966년 2월 26일 남조선 괴뢰군이 미 제국주의의 지휘아래 무고한 주민 380명을 학살하다'라는 문구와 함께 피해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리고 '미 침략 적군에 대한 증오를 깊이 새긴다'라는 구호가 새겨졌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위령비 뒷편에는 맹호부대가 민간인을 학살하던 당시의 장면이 묘사된 모자이크 벽화가 있다.

학살당시 생존자인 런 아저씨의 눈에는 한국군이 쏜 총알이 빗발치고 수류탄의 파편으로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의 모습이 여전히 또렷하다. 그리고 엄마와 여동생의 죽음도 목격해야 했다.

   
▲ 고자이마을 중앙 위령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고자이마을 학살 피해자들이 묻힌 무덤 위에 세워진 위령비. 참가자들이 분향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5일 나비기행 참가자들은 푸깟현 쯔엉탄 마을과 프억흥(福興)절을 찾았다. 한국군은 한 주민의 집 마당으로 마을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영문을 모른 채 주민들은 총을 맞고 수류탄에 이어 박격포의 공격을 받았다. 

조그만 마을에 14가구 58명이 몰살됐다. 인적이 사라진 쯔엉탄마을, 가족들을 반겼을 한 주민의 집 마당은 거대한 무덤으로 변했다. 그리고 무덤 뒤 위령탑 옆에는 '참살'이라는 단어와 함께 '남한 병사들은 58명의 양민 주로 노인,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을 살해하였습니다'라고 한글로 적혀있다.

나비평화기행 참가자들이 쯔엉탄 위령비를 참배하는 도중 한 할머니가 들어왔다. "가족 8명을 여기서 잃었다. 한국군이 왔다. 모조리 쐈다. 수십 명이 죽었다.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 여기 있으면 너무 힘들다"라고 나즈막히 말하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

쯔엉탄마을을 내려다보는 할머니산이라는 뜻의 '누이바'의 품에서 태어난 틱 동 꾸아 스님은 4살에 출가해 참살, 뜻 그대로 비참하고 끔찍한 상황을 면했다. 스님은 참살된 고향주민들을 위해 프억흥절에서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매일 천도제를 지내고 있다.

   
▲ 쯔엉탄마을 위령비. 위령비 앞 푸른 잔디는 무덤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쯔엉탄위령비에는 설명문구가 한글로 적혀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증오', '학살', '참살'. 혐오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로 비난하게 만드는 가혹하게 마구 죽여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벌인 자는 누구인가. 세 지역에 있는 구조물은 '남조선 괴뢰군' '한국군', '남한 병사'를 지목한다. 바로 '맹호부대'이다.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당시 채명신 주월사령관이 말했다. 맹호부대원들은 사령관의 명령을 어긴 것인가. 아니면 채 사령관은 부하들의 행위를 감추려고 한 말인가.

진실은 단 하나다. 한국정부와 참전군인들은 민간인 학살행위가 없었다고 주장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50년이 되도록 한국군을 증오하는 생존자와 목격자들이 있다. 생존자와 목격자들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한국군을 지목하고 50년 가까이 증오하고 있는가.

낌따이촌은 1966년 1월에 벌어진 학살로 "'따이한'이 온다"는 말에 지금도 울던 아이도 눈물을 그친다. 그리고 베트남전쟁 당시 남베트남군으로 미군을 도운 응우옌 꾸앙 안 할아버지는 위령비 재조성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안 할아버지는 "베트콩이 쏜 총에 한국군 한 명이 전사했다. 한 명이 죽었다고 우리 마을 주민들을 무참하게 죽였다고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끔찍하다"라고 말했다. 한국군 편에 섰던 할아버지가 한국군의 학살을 부인할 법한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주민들의 넋을 달래는 일에 팔을 걷어부치고 있다.

   
▲ 낌따이촌에서 위령비 재조성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응우옌 꾸앙 안 할아버지.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쯔엉탄마을 출신인 틱 동 꾸아 스님은 프억흥절에서 매일 천도제를 지낸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한국인도 잘 찾지 않는 외진 곳에 위치한 쯔엉탄 민간인 참살 위령비는 다른 위령비와 달리 한글이 적혀있다. 쯔엉탄 위령비는 국제 공용어도 아닌 한글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 틱 동 꾸아 스님은 한국정부가 외면하는 58명의 피해자를 위해 왜 천도제를 지내고 있는가.

'증오', '학살', '참살'의 진실의 물음에 한국정부가 답해야 할 차례다. 용맹한 호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맹호는 침묵의 나약함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용기를 내야 한다. 그리고 진실을 통한 진정한 평화의 길에 함께해야 한다.

빈안사 민간인학살 생존자 런 아저씨가 말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학살 속에 있던 사람이고 내가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직접 몸으로 겪은 이야기고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들춰서 또다시 한국과 베트남에 증오나 원한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비평화기행 참가자들은 "당 티 카오, 응옌 티 바..팜 반 노" 쯔엉탄 위령비에 적힌 58명의 피해자 이름을 읽으며 진실을 위한 초혼을 불렀다.

   
▲ 프억흥절에 있는 쯔엉탄마을 학살 피해자 영정.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빈딘성박물관에 전시된 고자이마을 학살자들이 숨어있던 방공호에서 발견된 유물. 학살자들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소위 베트콩)이 아님을 증명한다.[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빈딘성박물관. 1969년 맹호부대와 한진(현 대한항공)에 의해 지어진 한월문화회관으로 베트남이 승전한 뒤 접수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런 아저씨 이야기

베트남 나비평화기행 참가자들은 4일 오후 고자이마을 위령비에서 당시 생존자인 런 아저씨와 조우했다. 애초 그와 만남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는데, 한국인들이 왔다는 소식에 한 걸음에 달려왔다. 

응우옌떤런이 본명인 런 아저씨는 빈안사 깐븜 학살이 벌어진 2월 15일 15살에 맹호부대원들을 마주해야 했다. 65명이 살해당한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수류탄 파편이 몸 안에 박혀 밤새 뛰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할 정도다. 그의 이름이 달리다라는 영어 '런'과 닿아있다.

다음은 런 아저씨의 증언이다.

   
▲ 빈안사 학살 당시 살아남은 런 아저씨.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사실 그날 하루가 굉장히 길었어요. 학살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졌지요. 그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하기가 쉽지 않지만 간략하게 들려줄께요.

그때가 음력 2월 15일이었지.. 이른 아침 5시경부터 마을 사방에서 폭격이 시작됐어요. 그때는 아침 5시 경이라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였지요. 포탄소리에 자다가 깨서 폭격을 피하려고 다들 방공호로 들어갔어요. 아침 6시 정도에 들어갔는데 포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다시 마을 입구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라구요. 총소리가 아침 6시경부터 점심때까지 이어졌어. 아 그런데 점점 우리 집쪽으로 가깝게 다가오는게 느껴지더라구. 점심 때쯤 되니까 총소리가 우리집 가까이에서 들렸죠. 

연발로 '다다다다' 조금있다가 다시 '다다다'... 총소리와 총소리 사이에 신음, 비명, 고함, 울음.. 너무 참혹한 소리들이 총소리 사이사이로 들렸어요. 아이들, 노인들, 아줌마들의 끔찍한 소리더라구요.

다행히 총소리가 우리 집을 비켜가길래 아 멀어졌다, 살았구나 싶었는데 오후 4시경 마을 끝에서 다시 총소리가 올라오데요. 우리 가족이 숨어있는 방공호에서 발자국 소리가 멈췄는데, 뭐라고 막 외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리고 나서 저희가 숨어있는 방공호 속으로 총을 겨눴어요. 말 소리를 알아들 수 없는데 손짓을 하더군요. 올라오라고. 그래서 나왔어요.

올라가서 보니까 한국군이더군요. 한국군이 엄마, 여동생 저를 끌고 가는데 가는 길에 집을 만나면 다 뒤져서 노인을 끌어내오고 가다가 또 사람을 만나면 끌고 가고 그런 식으로 우리를 끌고 어디론가 데려갔어요.

어느 논 귀퉁이더라구요. 거기가서 보니까 20여 가구 가족들이 끌려와서 모여있어요. 한국군인들이 마을사람들을 가운데로 모이라더니 고개를 숙이래요. 쳐다보지 말라고. 

마을사람들이 둘러앉아서 고개를 땅에 쳐박고 있는데 그 주위를 한국군이 둘러쌌어요.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어느 한 군인의 외침소리를 들었어요. 그소리에 맞춰서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하는데...

   
▲ 고자이마을 위령비 앞에서 참가자들이 런 아저씨의 증언을 듣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포연이 가득했지만 똑똑히 봤습니다. 총알이 빗발치고 수류탄이 터지는데, 어떤 아이는 머리가 터져서 뇌수가 흘러나오고 어떤 사람은 배가 터져서 창자가 나오고 어떤 사람은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는 광경을 지금도 또렷이 선명하게 기억해요.

다행히 그때까지 우리 가족은 총에 맞지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뭐 하나가 내 발 뒷굼치에 탁 떨어지더라구요. 그런데 본능적으로 수류탄이다 싶어 몇 발짝 나갔는데 터졌어요. 파편들이 나를 덥쳤죠. 온 몸을 떨었던 기억까지 납니다. 의식을 잃어서 다음부터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가 의식이 다시 들고 보니 컴컴한 밤이더라구요. 깨어나니까 여전히 약하지만 사람들의 신음을 들었죠. 이 소리들이 점점 작아지더니 사라졌어요. 사위가 고요해졌는데 다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워있는데 밤 10시 정도인가 그때서야 한국군을 피해서 달아난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돌아왔어요.

부상자는 옮기고 시신은 수습하고 그랬죠. 우리 집은 포격으로 다 불이타서 마을사람들이 저를 숙부집으로 실어갔어요. 거기로 옮겨가서 보니까 이미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더라구요. 어머니는 하반신이 날아갔어요. 그리고 몸에도 부상을 심하게 입었요. 어머니는 기력이 없어서 고함을 지르거나 말을 하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자그마하게 신음소리를 내더라구요. 여동생은 머리에 수류탄을 맞아서 사람의 음성이 아닌 짐승같은 비명을 계속 질었어요.

밤 12시쯤인가 여동생이 먼저 죽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여동생을 돗자리에 말아서 나갔어요. 저도 그때 부상이 심해서 다리는 온통 수류탄 파편으로 피투성이고... 따라갈 수 없더라구요. 마을사람들이 묻고 돌아왔는데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를 돗자리에 말아 나가는 순간 나는 다시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이 들었는데 나 혼자 남았어요. 어머니가 없고 여동생도 없고 집은 불탔고 옷도 먹을 것도 없고, 참 막막했어요. 세상에 혼자남았구나. 혼자서 한참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학살은 내게 굉장히 큰 슬픔인데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내가 학살 속에 있던 사람이고 내가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직접 몸으로 겪은 이야기고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역사 속 진실, 학살의 진실을 내가 알려주는 것이 산 자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은 진실입니다. 사실이에요.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들려주는 것이 과거를 들춰서 또다시 한국과 베트남에 증오나 원한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실을 알아야만 한국과 베트남이 상처를 극복하고 정말 좋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들이 같은 청년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야합니다. 여러분 같은 청년들이 베트남 청년들을 만나야 해요. 한국과 베트남의 새로운 역사를 써가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한국에 가서 친구들에게, 청년들에게 많이 알려야 해요.

나는 시민들의 사과를 많이 들었습니다. 직접 들었어요. (4월) 한국에 갔을 때에도 내 손을 잡고 그랬어요. 문제는 한국정부가 사과해야 합니다. 문제는 참전군인과 한국정부가 인정하고 사과해야죠.

[정리=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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