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장군의 딸', 결국 괴물이 되는가?

 
[유라시아 견문] 아웅산 수치 : 장군의 딸
 
| 2016.03.15 07:04:49

 

 

 

장군의 딸

'황금의 땅(Golden Earth)'에 내렸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어둠이 깔리면서 거대한 쉐다곤 사원은 더욱 우뚝해졌다. 양곤의 밤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일견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남자들은 긴 치마로 몸을 두룬 론지를 입었다. 여자들은 BB크림이라도 되는 양 다나카를 발랐다. 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인야 호수로 행진했다. 목적지는 대학로(University Avenue)에 자리한 2층 목조 가옥. 그 앞에서 입을 맞추어 'Lady!, Lady!'를 외쳤다. 

환호에 화답하듯 아웅산 수치가 등장했다. 나무 상자로 만든 연단 위에 올라섰다. 가택 연금 시절 토요일 오후 4시면 이런 식으로 연설을 했다고 한다. 자그마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꽃가지를 비녀처럼 꽂은 상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2015년 11월 7일 총선 전야, 마지막 선거 유세였다. 가까이서 보니 옅은 화장 사이로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1945년생, 벌써 일흔을 넘겼다. 'Lady'가 된지도 어언 30년이다. 

1988년이었다. 20년 넘게 지속된 군사 독재에 맞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궐기했다. 8월 8일이 상징적인 날이다. 그래서 '8888', '88 항쟁'으로 기억된다. 마침 아웅산 수치가 귀국해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곁을 지켜드리기 위해서였다. 근 30년 만에 양곤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곳에서 뜻밖으로 아버지와 조우한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두 돌이 못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 정적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 아버지의 초상이 양곤 도처에 널려 있었다. 거리를 메운 수천의 학생들과 수만의 시민들이 손에 들고 있던 것도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그 중 일부는 군홧발에 짓밟히고 총에 맞아 죽어갔다. 아버지의 사진도 찢기고 깨져나갔다.

다급해진 학생들이 수치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간절히 동참을 요구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도 인생도 우연으로 점철된다. 그래서 운명이라 할 것이다. 그녀의 삶도 역사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쉐다곤 사원과 양곤 대학에서 대중 연설을 시작한다. 1947년 아버지의 연설을 빼다 박은 내용이었다. '장군'을 환기함으로써, 'Lady'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환생인 듯하였다.

수치가 미얀마를 떠난 것이 1959년이다. 14살 때였다. 어머니가 인도 대사로 취임했다. 그래서 10대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도 뉴델리이다. 20대에는 영국으로 유학 간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곳에서 만난 이가 티베트 문학 연구자 마이클 아리스이다. 책벌레였던 그는 동양의 불교 국가에서 온 아리따운 학생에게 금세 빠져들었다. 둘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의 국적은 자연스레 영국(미얀마의 식민 모국)이 되었다. 그것이 반세기 후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족쇄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60년대 후반에는 뉴욕에서 생활했다. 유엔(UN)에서 근무하는 영국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당시 미국은 격동기였다. 68 혁명의 한복판이었다. 우드스탁에는 히피들이 집결했고, 유엔 건물 밖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시위가 매일같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그녀의 일상은 당대의 풍조와는 멀찍했다. 가정과 직장을 오고가는 무사한 나날이 이어졌다.

떠들썩한 뉴욕을 떠나 이른 곳은 히말라야의 불교 왕국 부탄이다. 그곳에서 남편은 왕실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박사 학위 논문을 마무리 지었다. 수치는 영국 대사관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영국으로 돌아간 남편은 교수가 되었고, 수치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주부 역할에 충실했다. 1988년까지 그녀의 삶은 평온하고 평탄했다.

'8888' 이후 수치는 세계적인 명망가가 된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이 불과 3년 후, 1991년이다. 마침 소련이 해체된 해였다. '역사의 종언'이 선포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만국이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동아시아도, 동유럽도 민주화의 궤도에 진입했다. 미얀마도 다르지 않으리라. 순식간에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등극한 것이다.

'군사 정부 대 아웅산 수치'라는 프레임이 널리널리 퍼져갔다. 미국과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버마 민주화' 인사들도 가세했다. 언론 활동과 로비를 통하여 미얀마 군사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가중시켰다.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세력은 미국의 네오콘이다. 미얀마를 '폭정의 전초 기지'라고 지목했다. '악의 축' 이라크 후세인의 운명을 지켜본 미얀마 군부는 2005년 양곤에서 네피도로 천도했다. 양곤과 만달레이 사이, 밀림 깊숙이 자리한 이 행정 수도는 지하 벙커로 점철된 인공 요새이다.

10년 만에 그 행정 수도의 주인공이 바뀌게 되었다. 돌아보면 2015년 총선은 아웅산 수치에게 최적기였다. 그해 2월 13일이 아웅산 장군 탄신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웅산을 기리는 기념행사가 연중연시 성황이었다. 그 기세에 힘입어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대승이고 낙승이었다. 아웅산에서 아웅산 수치로,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 아웅산 수치의 마지막 유세. ⓒ이병한


버마식 사회주의 

아웅산과 수치 사이에 네윈(Ne Win)이 있었다. 아버지의 옛 동료이자, 딸의 정적이었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접수한 것이 1962년이다. 1988년까지 장장 26년을 집권했다. 유별난 일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박정희가 등장한 것이 1961년이다. 대만(타이완)도 태국(타이)도 군사 정권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1965년 군사 정변이 일어났다. 필리핀도 독재 정부였다. 

도처에서 군대는 근대의 첨단이었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미국의 암묵적인 지지나 개입이 없었다. 이른바 '근대화' 이론에 기초한 개발 독재를 추진하지 않았다. 네윈이 표방한 것은 '버마식 사회주의'였다. 자력갱생을 주창한 마오쩌둥 사상의 변종이었다.

네윈은 1911년생이다. 수치가 미얀마로 돌아온 1988년에는 이미 노인이었다. 군부 후계자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말년에는 명상과 요가에 전념했다고 한다. 오전과 오후 두 차례씩 영성을 갈고 닦았다. 독재자의 최후는 평화로웠다. 침상에서 숨을 거둔 것이 2002년이다. 근 한 세기를 살아낸 것이다. 

엄혹한 시절이었다. 때어났을 때부터 조국 '버마'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대영제국의 식민지 간에도 위계가 있었다. 양곤(당시 랭군)에는 총독이 없었다. 콜카타(당시 캘커타)의 총독이 버마를 대리 통치했다. 영국과 인도의 중층적 식민지였다.

혈기왕성한 민족주의자였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대동아공영권을 세우자는 일본이 접근해온 것이다. 버마 해방을 선도할 최정예 30명을 선발했다. 중국 최남단 하이난 섬으로 데려가 혹독한 군사 훈련을 시켰다. 그곳에서 군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교육을 받았다. 세계에서 가장 긴 미얀마의 군부 독재가 일본군의 진도지휘 아래 배양되었다. 

미얀마의 '선군 정치'는 최장수일뿐더러 가장 순수한 형태의 군사 독재이다. 민간 정부 위에 군부가 군림하기보다는 군대 자체가 곧 국가였다. 경제와 행정 등 국가 전 영역이 군대와 일체화되었고, 장교들이 장관으로 국사를 처리했다. 네윈 나름으로는 이유가 없지 않았다. 그는 군부가 전권을 쥐지 않으면 미얀마는 산산조각 날 것이라고 여겼다. 근거가 없지도 않았다. 이웃 인도는 파키스탄(1947년)과 방글라데시(1971년)로 차례차례 분할되어 갔다. 동아시아의 분단과 남아시아의 분할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시 상태도 그치지 않았다. 대전이 끝나자 냉전이 닥쳐왔다. 미얀마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대륙에서 공산당에 패배한 국민당 군이 미얀마까지 패주해왔다. 동북부 샨(Shan) 주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윈난성 재탈환의 기회를 노린 것이다. 대만으로 패퇴한 장제스가 무기 공급을 지속했다. 

미얀마 군부로서는 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개의 중국'이 자국 내에서 경합하는 상황을 종식시켜야 했다. 자연스레 군부에 힘이 실렸다. 성과도 거두었다. 1961년 국민당 잔군을 완전히 국경 밖으로 몰아낸다. 라오스와 태국으로 밀어낸 것이다. 작년(2015년) 이맘때 소개했던 태국 고산 지대의 화교 마을이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종식된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샨 주의 소수 민족들이 준독립에 해당하는 자치를 요구했다. 동부서는 카렌 족이 북부서는 카친 족이 일어섰다. 실제로 미얀마는 30개가 넘는 다민족,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 다종교 국가이다. 일종의 '미니 제국'이다. 영토도 영국과 프랑스를 합한 것보다 크다. 그 영토의 절반이 고산 지역이다. 그래서 소수 민족들이 5000만 인구의 4할을 점한다. 인문 지리에서 윈난성과 흡사한 것이다.

네윈은 협상으로 타결될 성질의 사안이 아니라고 여겼다. 우격다짐 소제국의 실상을 국민국가의 틀 속으로 우겨넣어야 했다. 무릇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법이다. 이듬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근다. 자발적 쇄국 정책, 주체 노선이었다.

따라서 1988년의 민주화 운동을 88 항쟁으로만 기억해서는 미진하겠다. 다른 민주화 요구도 있었다. 평야에서 (버마족이 절대 다수인) 시민들이 봉기하자, 산악 지대의 소수 민족들도 덩달아 궐기했던 것이다. 중국과 태국의 국경선을 따라 소수 민족들이 재집결 했다. 윈난 성의 와(Wa) 족들과 생활 세계를 공유하는 미얀마의 70만 와족 들이 가장 먼저 이탈해갔다. 전체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최대 소수 민족 샨 족 역시 태국으로 솔깃했다. 이들도 혈통으로 따지자면 버마 족보다는 타이 족에 더 가깝다. 살림살이 형편도 태국 쪽이 더 나아보였다. 

그리하여 1989년 전격적으로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수정한다. '버마 족 패권'에 저항하는 소수 민족들의 불만을 일부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실은 '버마'라는 이름부터가 영국이 부여한 것이다. 식민지 이전의 마지막 왕조가 '미얀마'였다. 수도의 이름을 '랭군'에서 '양곤'으로 바꾼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일종의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해외로 망명한 민주화 운동가들이 '버마'를 고수하고 있음을 일방으로 편들기가 힘들어진다. 버마 족이 중심이 된 '영국식 민주주의로의 이행'만이 8888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제국의 실제에 부합하는 연방제형 국가로의 전환 또한 88 항쟁의 자명한 요구였다. 

실제로 1989년과 1990년 사이에 미얀마 군부와 소수 민족 간의 다양한 정전 협정이 체결된다. 무려 17개의 반군 조직과 평화 협상을 체결했다. 1960년대부터 봉기하여 가장 강경하던 카친 독립군을 비롯하여, 카렌 민족군과도 화해했다. 독립 이후 근 반세기 만에 항상적이었던 내전 상태가 (일시적으로) 종식된 것이다. 

고산 지역에 살아가는 수백만의 소수 민족도 비로소 일상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비록 불완전했을망정 적지 않은 성과였다. 그럼에도 외부에서는 좀처럼 주목하지 않는다. 오로지 '민주 대 독재'라는 프레임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카메라와 마이크는 늘 아웅산 수치로만 향해있었다. 
 

▲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2015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이병한


미얀마식 자본주의 

내전 상태를 봉합함으로써 미얀마 군부는 개발 독재형 군사 정부로 이행했다. 왕년의 한국, 태국, 대만, 필리핀과 같은 권위주의 정부를 지향했다. 문제는 미국이 더 이상 '개발 독재' 정권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의 세계 전략이 '근대화'에서 '민주화'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민주 정권 아래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킴으로써 개발 독재 정권이 축적했던 국부를 회수해가는 것이 세계화의 목표였다. 이를 거부하는 미얀마에는 봉쇄와 제제를 강화했다. 스스로 자폐를 선택했던 나라를 더 고립시키는 설상가상의 전략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 옆에는 중국이 있었다. 선교의 전통이 없는 이 나라는 남들 내정에는 무심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빨리 성장하는 중국을 우회하여 개발 독재를 실시할 수 있었다. 차츰 중국의 번영이 미얀마 변경까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이웃 태국의 정책도 바뀌었다. 냉전기 CIA의 지원 하에 미얀마의 소수 민족을 무장시켜 군정의 전복을 꾀했던 태국 역시 '민주 정권'이 들어서면서 실리를 선택했다. 미얀마의 풍부한 자원과 노동력을 활용하는 데 군사 정권의 지속이 나쁘지 않았다. 태국의 민주 정부와 미얀마의 군사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곧이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인도 등도 군사정부를 승인했다. 1997년에는 아세안에도 가입했다. 명실상부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자연스레 '버마식 사회주의'가 '미얀마식 자본주의'로 전환되어갔다. 동유럽과는 상이한 동남아식 탈냉전이었다.

당장 양곤의 번화가부터 변화했다. 영국 식민지 시절의 건물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부티크 호텔로 재개장하거나 레스토랑과 바로 변신했다. 미얀마 중산층들은 반세기만에 소비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10대들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을 수 있었고, 장군들은 명품 골프장에서 여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때마침 동북아에서는 한류도 불어왔다. 내가 머무는 동안에도 TV에서는 온종일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었다. 그 덕을 톡톡히 누렸다. 아웅산 박물관의 관장이 몹시 환대해준 것이다. 손자가 <주몽>의 열렬한 팬이란다. 박물관 안내를 자청하여 아웅산 장군의 일대기를 설명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산간의 소수 민족도 이익을 취하는 쪽으로 달라졌다. 미얀마와 중국 간 국경 무역이 재개되자 그들이 가장 먼저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한 손에는 미얀마의 자원을 들고, 다른 손에는 중국의 산업혁명이 생산하는 상품을 쥐었다. 중국식 개혁 개방을 미얀마에 전파하는 전위부대가 된 것이다. 윈난 성에 사는 소수민족들과 핏줄로 연결된 '꽌시' 또한 주효한 전략이 되었다. 

점차 산골의 시골마을이 국제무역도시가 되어갔다. 내가 이틀 밤을 보낸 망라(Mang La)라는 국경 마을은 '작은 중국'에 방불했다. 양곤이나 만달레이보다 더 흥청망청이었다. 24시간 ATM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밤새 문을 여는 술집도 적지 않았다. 쿤밍에서 미처 사용하지 못한 위안화를 마저 사용할 수도 있었다. EXO의 히트곡이 흘러나오는 카페에서 맥주를 홀짝거리며, 북조선의 나진 선봉도 이러할 것인가 잠시 상상해보았다.

인구 이동의 방향 또한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특히 1988년 이후 태어난 신세대들이 대거 북진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위하여 국경 지대로 이주하고 있는 것이다. 부작용도 없지 않다. 향락과 부패도 스며들고 있다. 혼자 앉아 있노라니 유혹의 손길이 다가온다. 'lady boy'라고 불리는 트렌스젠더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여성들까지 섹스 산업이 활황이다. 주 고객은 중국 남부에서 온 사업가들이나 미얀마의 화교 자본가들이라 한다. 그들은 위한 카지노와 보신용 야생동물 식당도 성업 중이다. 

시진핑이 반부패 칼날을 휘두르면서 마카오 출입이 어려워진 부호들이 이곳을 부쩍 찾는다고도 했다. 이 지하경제를 수호하기 위하여 푸젠 성과 광둥 성 출신의 조폭들도 진출하고 있었다. 미얀마의 동북부는 확연히 대중화경제권에 편입된 모양새다. 숙소 직원들도 영어는 알아듣지 못해도 중국어는 곧잘 말했다. 

상부 구조가 하부 구조와 무연할 수 없겠다. '미얀마식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군부 또한 헌법 개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태국과 인도네시아를 참조했다는 후문이다. 군부가 의회에서 일정한 지분을 확보하는 술책을 강구했다. 

양곤에서 만난 BBC 특파원은 더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1920~30년대 영국의 버마 통치를 참고했을 것이란다. 당시 대영 제국은 버마의 의회에 가능한 천천히 권력을 이양하는 방법을 궁리했다. 

과연 미얀마 군부는 '미얀마식 민주주의'로 가는 7단계 로드맵을 발표했다. 2003년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군부와 수치 간의 비밀 협상도 개시되었을 것이란다. 군정에서 민정으로의 '점진적 이행'에 양 세력이 합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제법 그럴싸한 견해이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정작 그가 쓴 기사를 찾아보니 이런 얘기는 한 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추론'에 내가 보탠 것은 중국과의 관계였다. 이미 상징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선거에 앞서 아웅산 수치가 중국을 방문했다. 시진핑과 리커창은 그녀를 '국빈'으로 예우하며 연쇄 회동을 가졌다. 중국이 군부뿐 아니라 야당의 대표도 인정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중국은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한다는 책임대국으로서의 풍모를 과시했고, 아웅산 수치는 미얀마의 최대 투자국인 중국이 자신을 승인했다는 점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내부적으로는 군부와,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일정한 조율을 마친 끝에 11월 총선이 열렸던 것이다. '관리된 민주화'였다. 

역사의 단층 

선거 사흘 후 NLD 당사를 찾았다. 도로 가에 자리한 허름한 건물이었다. 정문이랄 것도 마땅히 없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외국인들이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가운데 말쑥한 양복 차림의 백발 백인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두 팔 벌려 맞아준다. 자기 자리로 안내하여 차까지 대접했다. 나는 <프레시안>에서 파준 명함을 건네고 저널리스트 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베트남전 참전용사였다. 군복을 벗고 목회자가 되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돌아왔다. 총 대신에 성경을 든 것이다. 비록 전쟁에서 졌을망정 복음을 전파해야한다는 사명감마저 저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수단을 바꾸어 공산주의와의 성전을 지속한 것이다.

그의 삶도 고단했다. 베트남에서는 추방되었고, 캄보디아에서는 비자 발급이 중단되었다. 마지막 선교지가 미얀마였다. 주로 고산 지역의 소수 민족에게 선교 활동을 했다. 평야에 내려와서는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다. 그 일념으로 미얀마에서 산 지 20년이 되어간다. 그 사이 기독교를 믿는 소수 민족인 카렌 족 여인과 새 가정을 꾸렸다. 딸은 13살이다.

그는 시종일관 들떠 있었다. 수치의 승리로 말미암아 청년 시절의 회한을 비로소 만회한 듯 보였다. 그녀에게 동지애 혹은 전우애를 느끼는 듯했다.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일흔을 넘긴 어르신과 논쟁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집권 여당을 목전에 둔 NLD 당사 안에서 말이다. 

내 생각은 좀 나르다. 낙관을 금한다. 도리어 걱정이다. 이미 필리핀과 캄보디아를 둘러보고 난 차였다. 이웃나라 태국은 민주화 이후의 혼돈 끝에 군사 정부로 돌아간 상태이다. 더 불길한 것은 '폭정' 이후의 나라들 때문이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의 발칸이 떠오른다. 2000년대 후세인 제거 이후의 이라크가 연상된다. 2010년대 카다피 이후의 리비아도 비슷하다. 

인종 학살과 종족 간 폭력이 분출했다. 미얀마는 건국 이래 70년 가까이 내전 상태를 지속해온 나라이다. 그 내분을 억지로 억눌렀던 군부가 약화되고 다수결로 운영하는 선거제가 가동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인가. '민주 내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련이 떠나고 난 아프가니스탄도 '민주주의 국가'였다. 

외부에서는 이번 총선을 군부와 수치의 대결로 묘사하지만, 실제로 총선에 참여한 정당은 양당만이 아니었다. 무려 100개에 육박한다. 산간 지역에서 소수 민족을 대변하는 지방 정당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의회에서 이들이 차지한 비중은 극히 미미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종교상의 이유로, 안보상의 이유로 참정권이 원천 봉쇄되었다. 그 비중이 20%에 달한다. 그들이 보기에 이번 선거는 '버마족 패권주의'의 압승일지 모른다.

의회를 장악한 버마 족들이 군부와 타협하여 장기 집권을 획책할 것이라는 우려가 없지 않다. 전혀 허황한 전망만도 아니지 싶다. 수치는 선거를 전후하여 서북부 아라칸 주에서 발생한 무슬림 난민 사태에 시종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그들이 정착한 곳은 방글라데시의 난민촌이다. 실제로 로힝야 족은 버마 족과 어울려 살아본 경험이 없다. 차라리 인도양 건너 오만과 더 연결되어 있었다. 스스로를 글로벌 무슬림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는 것이다.

미얀마의 60%를 점하는 버마 족은 독실한 소승 불교 신자들이다. 군사 정부와 결탁해 왔던 불교계에서는 '불교 근본주의'라 할법한 현상마저 불거지고 있다. 스님들이 무슬림에 가장 적대적이다. 버마를 복원하여 불교 정토를 만들자고 한다. 때문에 이슬람과 기독교계 소수 민족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긁어 부스럼이기 십상이다. 수치 또한 표를 먹고 살아야하는 현실 정치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치를 대신할 대통령이 누구이냐에 온통 관심이 집중된 사이에도, 내가 더 주목한 소식은 카렌 족의 일부가 재무장을 시작했다는 뉴스이다. 부디 그녀만은 아버지의 운명을 따르지 않기를 바란다. 

미얀마에 가기 전, '중국과 인도 사이'라고 생각했었다. 막상 가보니 영국풍이 여실했다. 쇄국 정책 탓에 더더욱 영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특히 양곤이 그러하다. '랭군'이야말로 대영제국이 만들어낸 '신도시'였기 때문이다. 벵골 만을 사이로 콜카타와 마주하고 있는 개항장으로 최적의 위치에 자리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와의 연결망으로서도 제격이었다. 즉, 영국으로 말미암아 미얀마의 중심이 만달레이에서 양곤으로 옮아간 것이다.

나라 이름도 다수 민족의 이름을 따서 버마라고 불렀다. 나아가 영국령 인도의 일부로 편입시키기까지 했다. 시종 미얀마의 지리적-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식민 통치가 관철되었던 것이다. '역사적 미얀마'와 무관한 '근대적 버마'가 들어섰던 것이다. 1886년을 기점으로 옛것과 새것 사이에 현격한 낙차가 생겨났다. 미얀마가 싹둑 버마로 동강나서 근대 세계로 내던져진 것이다. 

하여 오늘날 미얀마가 직면하고 있는 산적한 과제 또한 대영제국 시절로 거슬러 오르지 않고서는 그 전모를 온전히 살피기가 힘들다. 물론 '유라시아 견문'에서 미얀마 근대사를 통으로 훑어갈 여력은 없겠다. 하더라도 작금 '민주 내전'의 기운을 되 지피고 있는 분열의 기원만은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여기에는 대영제국만큼이나 대일본제국도 깊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과 서의 두 제국이 충돌했던 역사적 유산이 지금껏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실상은 실로 복잡다단했다. 대일본제국과 대영제국이 최후를 다투었던 임팔 전투를 복기해 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