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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PC통신…"우린 신인류였어"

[방담] PC통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김봉규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2-10 오전 2:02:42

 

1990년대에 PC통신으로 출발했던 웹 사이트 나우누리가 지난달 31일 문을 닫았다. 급작스러운 소식은 아니었다. 지난해 말 야후 코리아가 철수했고, 초기 온라인 시대의 대표 사이트였던 프리챌도 저물었다. 월드와이드웹(WWW) 시대 이전의 온라인 서비스였던 PC통신은 대부분의 누리꾼에게 이미 추억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나우누리의 종료 선언은 그 희미해지는 추억을 다시 상기시키는 계기였다.
<프레시안> 기자들도 감회에 젖었다. 인터넷 세계로 넘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잊혔던 PC통신의 추억을 다시 곱씹자는 취지로 기자 4명이 모여 수다를 떨었다. 독자들도 설 연휴에 또래 친척과 모여 앉아 PC통신을 추억해보는 건 어떨까. <편집자>


PC통신 뭐 했어요?
 

*참가자: 이텔(37세, 여), 누리(34세, 남), 리안(30세, 남), 니텔(27세, 여)


리안: 지난 일요일(3일) <EBS>에서 심야에 방영하는 '한국영화특선'에 <접속>이 나왔어요.

일동: 아~.

누리: <접속>이 PC통신으로 만나는 이야기였나?

이텔: 네. 유니텔이었어요.
 

▲ 1997년 개봉됐던 영화 <접속>. 현대의 소외된 두 남녀를 이어주던 끈은 당시 청년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PC통신'이었다.

리안:

(나우누리 소식과 관련해) 의도가 있는 편성이라고 보이는데. 먼저, 각자 PC통신을 언제 접했었나요?

이텔: 저는 1996년 말에 처음 접했어요.

리안: 하이텔?

이텔: 아니. PC통신의 초창기여서 큰 규모가 아니라 BBS.

리안: 사설 BBS라고 부르던?

이텔: 응. 참세상이라고…진보네트워크의 PC통신 버전인데, 같이 놀던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접하게 됐고. 당시 접속해서 'all'이라는 명령어를 치면 접속한 사람들이 다 보였어요. 작은 규모라 많지 않았지. 그래서 접속한 사람들에게 말 걸고 놀았는데, 그 당시 문화진보운동 쪽 사람들이 많아서 정보도 많이 접했죠.

그러다가 큰물로 가고 싶어져서 처음 시작한 게 유니텔. 당시
이미지가 '쌔끈'했거든. 하이텔이나 나우누리는 벌써 낡은 느낌이 있었는데 유니텔은 신세대를 겨냥해 만들었다는 느낌이었죠. 나우누리도 동아리 활동 때문에 했고, 나중에 하이텔도 했고.

누리: 저는 199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했어요.

이텔: 고3 때?

누리: 수능 압박을 별로 안 받아서….

리안: 어느 서비스?

누리: PC통신은 닫힌 곳이었잖아요. 가입을 해도 다른 PC통신은 못하고. 뭐 할까 하면서 보니 천리안은 확실히 '노땅'들이 사용하는 이미지였고, 하이텔도 마찬가지. 나우누리, 유니텔 둘 중 하나였는데 고민하다가 나우누리가 갈 만한 데가 더 많다고 해서 들어갔죠. 그 때는 열심히 안 했고 대학 가서 죽어라 했죠.

니텔: 1998~1999년 사이에 시작했어요. 그 '삐삐삐~'(☞듣기) 하는 소리 나던…(누리: 모뎀) 네, 모뎀. 하는 동안에는 전화도 못 받고. 중학교 2학년 때 한 아이돌 그룹을 좋아해서 하이텔 연예 게시판과 그 그룹 팬클럽 헤비유저가 됐죠. 그러다 사람들이랑 채팅하고 친해지면서 나중에는 우리끼리 따로 비밀 소모임을 만들어서 활동했어요. '정모' 같은 거 하면 나중에 인물 게시판에 '인평'(인물 평가)도 올라오고…. 심지어 그곳에서 알게 된 언니 때문에 '티티마' 강세미 팬클럽 시삽까지 했고(웃음).

누리: 티티마, 정말 추억의 이름이다. 시삽이라는 말도….

리안: 저는 1996년에 처음 접했고, 나우누리를 썼죠. ID라는 말의 개념 자체를 잘 몰라서 제 이름 이니셜에 살던 집 호수를 붙여서 만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누리: 전 누나 ID를 썼는데 '상상의별'이었어요(일동 폭소).

리안: 당시 ID 길이가 한글 4글자까지 가능했던 것 같네요.

일동: 맞아, 맞아.

리안: 하이텔은 게스트 ID로 로그인하면 판타지 소설 등이 연재되는 게시판에 접근이 가능했죠. 이영도가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를 연재하던 그 게시판, 거기에서 갈무리를….

일동: 갈무리…흐흐흐.

리안: 갈무리 명령어가 'pr'이었나…. 각설하고, 다들 PC통신을 하던 장소는요?

이텔: 집에서 방해받지 않는 밤 시간. 학교는 PC실 줄이 너무 기니까. 오래 쓰면 눈치 보이고.

누리: 대학 입학한 후에는 자취방에서 주로 사용했죠. 1학년 때 필수교양수업 하나가 오전 8시에 시작했는데, 알잖아요? 대학교 1학년 때 얼마나 인간이 망가지는지? 그 수업 들어간단 핑계로 밤새 PC통신 하고, 결국 뻗어서 학교도 안 가고…. 나뿐만 아니었어, 대학교 1학년 때만 해도 사람들이 PC실에서 그 '삐삐삐~' 하면서 파란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죠. 뒤에는 프린트하려고 온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서 문제 되기도 했고.

리안: 어릴 때라 집에서만 했는데, PC통신 중에는 전화가 통화 중이어서 많이 혼나곤 했죠.

니텔: 그래서 핑계도 만들었죠. 사실은 '팬픽'을 쓰는데 부모님에게 '소설을 쓴다, 나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라'고(웃음). 그 뒤로는 안 혼났어요.

리안: (PC통신 에뮬레이터 프로그램) 이야기, 새롬데이타맨도 기억나세요?

누리: PC통신 확장기가 IMF 환란 때와 겹치잖아요, 그때 새롬데이타맨 주가(새롬기술)가 삼성 주가보다 더 올랐어요. 시가총액이 삼성보다 더 오른 거예요. 김대중 정부도 세금 들여서 땅 까고 인터넷망 깔던 때였고. 젊은 층 상대로 PC통신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니 새롬데이타맨이 나스닥에도 상장한다느니 별 기사가 다 나왔는데, 우리나라 주식 거품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을 거예요. 삼성전자를 넘었으니.

메탈리카가 센가, 메가데스가 센가?

이텔: 당시 PC통신 진입장벽 중에 전화비가 있었나요?

리안: 모뎀 가격도 비쌌죠. 저는 십만 원을 훌쩍 넘게 주고 샀던 기억이 나네요.

누리: 가입비도 내야 했고.

리안: 나우누리가 1만4000원 정도 했었던 것 같네요.

누리: 하이텔이 9900원 정도였고, 천리안이 제일 비쌌었죠.

리안: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현재 집에서 인터넷을 3년 약정으로 월 2만 원 정도에 쓰고 있는데, 당시 이용료와 전화비를 합치면….

누리: 더 비싸죠. 물가 상승을 감안 안 해도. 당시엔 386DX 컴퓨터가 600만 원에 나오고 하던 시절이었으니. 접하기 어려운 고급 문화였던 셈이죠.
 

▲ 요즘도 회자되는 1990년대 컴퓨터 광고.


이텔: 20대 이상에서 문화가 됐다고 보는 게 맞죠.

누리: (고등학교) 반에서는 친구들과 PC통신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으니까.

리안: PC통신을 접하고 느낀 충격은 '아 이렇게 고수가 많았구나'라는 것. 지금보다 더 강하게 느꼈죠. 음악을 좋아했는데 당시 잡지에서 전문가들이 쓰는 글만 보다가 PC통신에 들어가니 '지미 헨드릭스가 최고인가, 잉베이 맘스틴이 최고인가' 하고 싸우고 있더라고요. 글 쓰는 사람들이 모두 표현력도 좋고….

누리: PC통신 문화라는 게 신문, 언론의 권력이 낮아지게 된 첫 시대를 연 게 아니었나 싶어요. 재야의 고수들이 출몰한. <퇴마록> 열풍이 대표적이고. 재야의 고수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방에 알리기 시작했고, 그걸 바탕으로 기성 언론이 따라가지 못하는 동시대의 이야기를 우리의 언어로 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새로운 정보들이 유통되기 시작했고. 그 세대가 인터넷에서도 <딴지일보> 식으로 넘어온 거잖아요.

PC통신이 가장 위력을 떨친 것 중 음악이 있는데, 누구나 인정하는 PC통신 동호회로 하이텔의 '블렉스', 나우누리의 'SNP', '메탈체인' 등이 있었죠. 블렉스, SNP는 힙합 동호회였는데, 당시 거기 있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데모 테이프 만들어 공유하다가 지금 다 현업 뮤지션으로 활동해요. 면면을 보면 블렉스 출신으로 가리온, 주석이 있고 SNP에서는 버벌진트, 휘성이 다 그쪽 사람들이에요. 말 그대로 우리나라 힙합 문화를 만든 곳이죠. 언더그라운드 힙합. 메탈체인 쪽 대표 뮤지션으로는 오지은이나 김윤아가 있고.

리안: 방담 준비하면서 보니 델리스파이스는 하이텔 메탈동 소모임 '모소모'에서 활동했다고 하네요. 모던락 소모임이었던 모소모를 만든 사람이 언니네이발관의 이석원.

이텔: 홍대 언더문화 얘길 하기 시작한 게 1996년부터잖아요. 예전에 이석원 씨 인터뷰할 때 다른 뮤지션들한테도 물어본 게 있어요. 음악이라는 분야가 그런가, 기타를 사서 치면 되지만 영화 같은 경우는 당시로선 엄청난 크기의 카메라가 필요하니 영화 동호회가 있어도 영화를 찍지는 않았어요. 근데 모소모 이런 데 모인 사람들은 그 전까지는 음악을 하지도 않았지만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서 배운 것 말고는 딱히 음악적 훈련을 받지 않았던 친구가 키보드연주하기 시작하고, 이석원은 (음악 한다고) 거짓말하다가 실제로 밴드를 만들었고, 이석원과 친하던 고등학생이 그 밴드에 들어가 기타를 치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봐도 '만날 만나는 사람이 이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이랑 음악 얘기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만 하더라고요.

누리: 우리나라 대중 문화, 개인의 취미 생활이 전혀 환영받지 못하던 시대였죠. 공부·돈 아니면 안 되는 사회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문화가 소중하다는 걸 PC통신을 통해 사람들이 깨달은 거죠.

니텔: 우리가 좋아하던 1980년대 외국 뮤지션들을 보면 그냥 동네에서 만나서 차고에서 합주하다가 밴드 된 예가 많은데, 우리는 PC통신 이전까지는 그렇게 만날 수가 없었던 거죠.

누리: 우리에겐 그 차고 역할을 PC통신이 한 거고.

니텔: 도시에서 합주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만나서 '찌질'대다 뭔가 하나 나오고 그런 거죠.

누리: 판타지 문학도 PC통신에서 나왔고.

이텔: 동호회라는 존재 자체가 획기적인 것 같아요. 지금 보면.

누리: 1990년대 문화 폭발 현상을 우리 세대가 이끈 거죠. 메탈체인에 가면 딴 곳에서는 안 하던 얘기를 우리 언어로 할 수 있었으니까. 메탈리카가 세니, 메가데스가 세니…정말 이런 유치한 논쟁을 각종 자료를 붙여가면서 주고받기 시작한 거죠. 모두 궁금한 거니까.

리안: 메탈체인에서 음악 한 곡을 내려받았었는데, 나중에 찾아봐도 시중 음반으로는 듣기 어려운 일종의 희귀 버전이었어요. 지금도 갖고 있고. 지금과 비교해 PC통신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어도 집중력이 있다는 인상이 있었어요.

걔가 나우누리의 걔였어?

누리: 반대로 대중 문화를 향유하는 취미가 없던 사람들도 대학교에 처음 가거나 할 때 신입생 '번개' 같은 걸 하는 통로로 PC통신을 처음 접했죠. 저도 PC통신으로 동창 만났었고.

니텔: 지금도 존재하는 특정 인간형의 습관이 PC통신 시절 형성되었다고 봐요. 제가 경험한 건 팬덤 문화니까 거기에 국한해 얘기하자면 전통적인 팬덤, 그러니까 JYJ 같은 아이돌 팬덤뿐 아니라 가령 일본 애니메이션 팬이나 영화 <어벤저스>를 가지고 동인지를 생산하는 문화 같은 게 있잖아요. 어떤 것을 매우 좋아해서 '팬질'을 하고, 그게 '덕질'로 이어지고, 그게 2차 창작으로 이어지는. 그런 세계가 있는데 PC통신 때 봤던 게 그대로 이어지고 규모나 질은 더 커진 것 같아요. 주로 여성들의 세계인데….

리안: 동인 문화 같은?

니텔: 그렇지. 현재 많은 '덕질' 혹은 '2차 창작' 하고 있는 여성들은 PC통신을 많이 했었고, 이것저것 건드려 온 계보가 있어요. 생각나는 건 소위 '팬 아트'인데,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 팬 내에서도 팬 아트를 잘 그리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코믹월드 같은 데 나가기도 하고 그랬죠. 그런 사람들이 글 쓰면 같은 팬 입장인데도 환호하고. 정모 때도 인기 제일 많고.

이텔: '존잘'인데(웃음).

누리: 존잘?

이텔: '존나 잘 그린다'의 준말. (웃음)

니텔: 아직도 기억하는 ID가 있는데, 'OOO'님이 정말 잘 그렸는데…(일동 폭소). 나중에 인터넷에서 집요하게 검색해 보니 그 언니가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에 들어갔더라고요(일동: 아~).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전부 아이돌 그룹을 좋아해 모였는데, 그 안에서 인기인과 팬이 또 형성되는 거죠. 그림 잘 그리고 소설 잘 쓴다는 이유로 어떤 ID를 신봉하는 사람이 생기고, 당사자도 2차 창작으로 어딘가에서 암약하고 있고, 21세기 여성들의 규방 문화라고 해야 할지(웃음). PC통신이 그 원류가 아닌가 싶어요. 그 정서는 지금도 인터넷 곳곳, 동인지가 판매되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이텔: 지금 트위터에서 '박원순이 나한테 멘션했다' 이러는 것처럼, PC통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유명 인사와 말을 섞을 수 있는 첫 번째 창구였던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엔 당시 '신세대 작가'라는 명칭으로 수식되던 백민석 씨에 대한 추억이 있어요. <헤이, 우리 소풍간다>라는 소설을 읽고 하이텔 문학동에 감상문을 괴발개발 써서 올렸죠. 그런데 백민석 씨가 '감상문 잘 봤다. 고맙다'라는 메일을 보냈어요. 그날 밤 설레서 잠도 못 잤어요. 그런 식의 동경하던 사람들과 말을 섞게 되고, 만나기도 하고, 그런 가능성 때문에 팬덤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어요.

니텔: 다르게 얘기해보면 그 전까지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만 팬클럽을 이끌 수 있고 소위 셀레브리티(celebrity)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지금 트위터를 보면 바깥에선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 파워 트위터리언이 되어 있어요. PC통신에서도 현실 직함은 백수인데 뭐 하나를 잘한다는 이유로 재야의 고수가 되고 팬을 거느릴 수 있었죠. 그런 '평범한 ID님의 셀레브리티 화(化)' 문화의 시작점이 PC통신이었던 거죠.

이텔: 적어도 동네 노는 형은 될 수 있었던.

니텔: 10년 뒤에 '걔가 나우누리의 걔였어?' 하는(웃음).

누리: 궁금해서 방금 트위터에서 PC통신을 검색해봤는데, 우리가 빼먹은 추억이 있다. PC통신 들어가면 인사가 당시 '방가방가', '하이룽'….

이텔: 안냐세요~.

니텔: 리하이~.

리안: 리하이?

니텔: 채팅방에서 튕겼다가 다시 들어올 때. re-hi.

인터넷, 파란 화면도 아닌데 왜 공짜지?

리안: PC통신을 언제부터 잊었나요?

누리: 전성기가 5년도 못 갔으니까….

리안: 당시 모뎀으로 인터넷을 처음 했는데, 넷스케이프를 통해 천천히 로딩되는 야후 초기화면을 처음 봤을 때 충격이 굉장했죠.

니텔: 당시엔 인터넷 검색창에 뭘 쳐도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결과가 며칠 동안 똑같고 그랬어요. 그래도 뭔가 정보를 얻고 싶어서 계속 썼고.

리안: 저는 '다운족'이었는데 고속 인터넷망이 뚫리고 인터넷에 '와레즈'(warez) 사이트 같은 게 생기면서 PC통신 자료실과 멀어지게 된 것 같아요. 음악 같은 경우에도 소리바다가 생겼었고.

누리: PC통신 단절은 군대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졌어요. 군대 가기 전에는 PC방 가면 한쪽에서는 스타크래프트 하고 한쪽에는 '삐삐삐~'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듬해 휴가를 나와서 PC방에 갔더니 친구들이 '스카이러브'라는 채팅 사이트를 가르쳐줬죠. 전 그걸 새로운 PC통신으로 알고 있었어요. 화면이 깔끔해서 '엄청 비싸겠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가입비도 안 내더라고요. 그냥 하면 된다는 거예요. 공짜라는 개념 때문에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어요. '파란 화면도 아닌데 왜 공짜지' 하는. 적응하는 데 한참 걸렸던 것 같아요.

리안: 고속 인터넷을 쓰면서 비용이 더 늘어났는데, 나우누리만 쓰는 데 1만4000원씩 주기가 아까워지기 시작했죠.

이텔: 저의 경우에는 직장에 들어가 바빠지면서 멀리하기 시작했죠. PC통신은 '잉여'들의 문화였잖아요. 시간이 있으니 정보를 모아 '자랑질'하는 게 PC통신이었는데, 바빠지니까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또 PC통신에서 함께 놀던 또래들이 일제히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영화동에서 놀던 사람은 현장 가서 제작부에 들어가고, 누구는 또 영화 잡지 붐이 일면서 웹진이 생기니 그쪽으로 흡수가 되고, 음악 소모임 하던 애들도 음반회사 들어가고. 취미를 직업의 영역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늘어난 거죠. 일터에서 만나면 되니까 PC통신을 굳이 할 이유가 없고. 한 세대가 공통적으로 PC통신을 하다가 일시에 딱 끊긴 거 같아요.

우린 신인류였어

리안: 현재로 돌아와 봅시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전반기는 인터넷 확장기이고, 후반기에는 일종의 '대세'가 나타났던 시절이라고 봐도 될까요? 검색은 구글, 포털은 네이버, '잉여 문화'는 디시인사이드, 정부 비판하는 사람들은 특정 사이트로 몰리고, 트위터가 출연하는 등 SNS가 현재 인터넷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 되기도 했죠. 오늘 방담 목적이 PC통신의 향수를 나누는 것이지만요, 현재 인터넷과 PC통신의 대비를 통해 우리가 특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니텔: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간 것은 기술 발전과 시대상에 맞춰가는 문제라고 봐요. PC통신에서 놀라웠던 것들이 더는 놀랍지 않고, 사실 PC통신을 그 당시 하지 않던 사람들도 2000년대에 들어와 대부분 인터넷 사용을 했단 말이죠. 자신만의 습관을 터득하고 자신만의 정보 습득 능력, 사람들을 만나는 걸 선택할 수 있게 된 거죠. 그걸 단순히 'PC통신 시절엔 우리만의 문화였는데 아쉽다'거나 '지금은 재밌는 게 없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저 시대 변화에 따라 이런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많아진 거죠.

누리: 나우누리 문 닫는다는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그때가 좋았지'라고 하지만 당시만 해도 PC통신의 언어 파괴 현상 등에 대한 비판도 많았어요.

이텔: 옛날 신문 보면 분명 나올 거야.
 

PC대화 '문법 파괴' 확산

컴퓨터통신이 새로운 대중매체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컴퓨터통신 용어의 '문법 파괴'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13일 정보통신부에 따르면 96년 7월 말 현재 컴퓨터통신 이용자는 270만 명을 넘어섰으며,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에 못지않게 '미디어세대' 간 언어의 장벽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어솨여(어서와요), 안냐세요(안녕하세요), 방가(반가와요), 설사라요(서울 살아요), 잼(재미있었어요), 그럼20000(그럼 이만), 담에 바여(다음에 봐요)" 등을 볼 수 있다. 컴퓨터통신 대화방에 처음 들어간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린가' 의아해 하지만, 청소년들 사이에선 이미 일상용어로 자리 잡은 컴퓨터식 대화법이다. 이런 표현법들은 컴퓨터 통신이 지닌 쌍방향커뮤니케이션 기능에 힘입어 급속하게 전파되고 있다. (<한겨레> 1996년 8월 14일자)


누리: X세대가 삐삐로 통일되는 세대였는데, <동아일보>가 당시 1면 하단 기사로 'Y세대'라는 개념을 내세워 1979~1981년생만을 따로 묶어보려고 하기도 했어요. 그 세대의 특성으로 PC통신을 하고 힙합 바지를 입고 HOT를 좋아하고….

니텔: 트위터에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어요. "지금 이 시대의 모든 매체는 인터넷의 부분집합"이다. 방송을 예로 들면, 과거엔 방송 자체로 권력을 가졌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요. 다시 보고 싶어도 처음 띄우는 건 검색창이고, '방송 반응' 즉 검색어 같은 게 없으면 권위가 휴지 조각이에요. 모든 자료가 검색어 망의 부분집합이 되어버렸죠. 세계가 인터넷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인데.

PC통신과 인터넷은 다르지만, 어쨌든 뭔가 화면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사람을 아이디로 접하고 이런 공통점을 생각해 보면, 과거엔 일부의 습관·생활이었던 게 지금은 모든 사람의 습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 농도는 희석되었겠지만 어쨌든 지금 인터넷 문법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없거든요. 그래서 PC통신에 대한 향수를 갖는다는 건 그런 습관을 소수만 누렸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요? 지금은 다 인터넷형 인간이지만, 그때는 약간의 특권의식과 무언가를 선도한다는 인식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이텔: PC통신을 했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나를 그리워하는 게 더 맞는다고 봐요. <접속> 같은 영화가 어마어마한 흥행을 기록했고 삽입곡도 확 뜨고 했었는데, 영화에 나온 신세대 사랑법, 너무 고독해서 하루키적 인간형이라고 내세워져 컴퓨터로만 대화하던 두 남녀가 막판에 만난다는 그 러브스토리로 지금 세대를 분석하려고 했단 말이죠. 정말 그 시대의 우리는 '신인류'였던 겁니다!(웃음) 무언가 새롭고, 예쁘고, 신선한 감수성을 우리가 독차지했던 시절이었으니. 그때를 그리워하는….

리안: <접속> 얘기도 다시 나오고, 수미쌍관의 멋진 방담이 됐다고 봅니다(일동 박수). 어떻게 끝낼지 계속 고민이었는데 방금 나온 '그 시대의 우리는 신인류'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이텔: 아뿔싸.

누리: 20년 뒤에 지금 '초딩'들도 얘기할 거야. "그땐 아이폰 이런 걸 들고 통신했어" 그러면서.

니텔: 다들 자신이 첫 취향을 형성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거죠.

누리: 그 말 좋다. 첫 취향을 형성하던 도구로서 PC통신.

이텔: 제가 영화 좋아하는 거 엄마가 진짜 싫어했거든요. 항상 구박만 받았단 말이야. 내 취향에 대해.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거 가지고 똑같은 인간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채팅하고, 24시간 영화 얘기만 하고, 거기서 비롯되는 흥분이라는 게…. 취향이 그렇게 형성이 되고 자기 인생의 경로를 결정짓는 순간이 그때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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