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7/06/02 07:34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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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현판식 당시 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과 이상욱 현대자동차지부 지부장. 두 사람 모두 현대차노조 위원장을 두 번씩 역임한 실리파와 현장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지만 하청노조 운동에 대한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등장 (1996~2002년)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3.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4~2005)
 

4.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와 비정규직노조
(1)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
(2) 3자 협의체로 변질된 원하청 공동투쟁

 

5. 하청노동자들의 처우개선과 비정규직조합주의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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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와 비정규직노조



노조 건투와 불법파견 투쟁을 거치면서 많은 비정규직노조들이 현장에 조합원들이 없는 식물노조로 전락했다. 이 속에서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은 2006년 이후 수 년 동안 현장 조합원들이 일정정도 이상의 규모로 존재하는 기아차 화성공장과 현대차 울산·전주·아산 공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대공장 하청노조 운동이 완성차 공장 중에서도 현대차 자본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공장 비정규직 노조건설 투쟁의 출발점이자 하청노동자의 비중이 가장 높은 조선 산업에서 비정규직노조를 조직하려는 시도들은 거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2000년대 들어서자 조선소에는 어용노조가 속속 들어섰다. 다른 제조업들보다는 건설업에 가까운 개별적인 작업방식과 비정규직의 높은 비중은 실리주의·협조주의 의식이 더 쉽게 침투될 수 있는 여지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용이 장악한 열악한 현장 상황에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에서도 배제되며 조선 산업에서는 오랫동안 새로운 하청노조 건설 시도가 등장하지 않았다. 현중하청노조의 경우에도 2003년 8월 노조건설 투쟁 이후 소지공 투쟁과 박일수 열사 투쟁이 있었지만 조직 확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06년 단협체결 투쟁을 마지막으로 현중하청노조는 더 이상 현장 사업을 전개하지 못하고 최근까지 간부들의 공장 밖 활동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운동질서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 철강과 반도체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한국노총 소속인 하이닉스매그나칩 정규직노조는 사측에 협조하여 현장에 어용 하청노조를 건설했다. 비정규직지회와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현대하이스코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에 대해 전혀 연대투쟁을 하지 않았다. 같은 자동차사업장이지만 2007년 GM대우 부평공장의 비정규직지회도 정규직노조의 엄호와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현장 밖으로 밀려났다.
 

현대차 3사와 기아차의 경우, 좌파 현장조직의 활동가들은 하청노조에 대해 표면적으로나마 비교적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정규직노조가 가진 강한 교섭력과 특유의 중층적인 교섭구조에 기인한 중재능력은 하청노동자들에게 때로 최소한의 방어막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에서 강한 교섭력을 가진 정규직운동질서의 존재는 비정규직노조의 성장에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⑴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
 

한라하청노조에서 캐리어하청노조에 이르기까지 정규직운동질서와 하청노동자들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발생해왔다. 구조조정 시기 고용에 대한 불안감은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을 위축시켰으며 공장 내 비정규직 동지들을 투쟁의 동지라기보다 고용의 보호막으로 보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해도 금호타이어, 현대차 전주공장, GM대우 창원 공장 등에서 정규직노조가 하청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사례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구조조정 투쟁 이후 금속대공장 현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갈수록 보수화되고 있었다. 전투적 대공장 활동가들의 구심 역할을 하던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2002년 무렵 사실상 해체되었다. 민주노총 소속의 조선사업장에는 경우 대부분 어용노조가 들어섰다. 대공장의 임단협 투쟁은 점차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 마저도 많은 경우 무쟁의로 들어섰다.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이러한 정규직 조합원들의 보수화를 우려했지만 대개 구조조정의 패배가 불러온 고용불안 정서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 당시에 작성된 어느 비합법 사회주의 조직의 문서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보수화는 “미래의 고용에 대한 불안감”에 기한 것이며 아직 물질적인 개량의 여지는 충분치 않다고 주장했다.56)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의 정서가 갈수록 보수화·원자화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비정규직 운동을 고민하는 전투적 현장주의자들 사이에서 하청투쟁을 통해 정규직 운동질서를 혁신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기도 했다. 2003년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건설투쟁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나온 「비정규직운동을 넘어 계급투쟁으로, 대공장운동의 혁명적 전진으로 - 남한 비정규직운동에 대한 평가와 전망」라는 문서는 대공장에 비정규직 투쟁을 도입함을 통해 해체되고 있는 선진노동자 운동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7) 이 글은 대공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공통의 이해는 적어도 노동조합 차원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이 벌어질 때 이에 연대하는 정규직 조합원들은 실천적으로 가장 계급적인 의식을 가진 부위일 것이며, 하청노조 건설을 통해 이들을 결집하고 대공장에 새로운 계급적 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8)
 

그러나 현실에서 등장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대공장에서 자본과 정규직운동질서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노조 차원은 고사하고 현장조직 같은 활동가 조직 차원에서도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연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청노조 건설이 추진된 대공장들에서 형식적인 연대를 넘어 그 투쟁에 계급적으로 연대하는 활동가들의 수는 그야말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현대중공업에서, 현대차에서, 기아차에서 이른바 가장 전투적이라는 정규직 활동가들조차 대부분 하청노조의 투쟁을 회피했다. 따라서 하청 투쟁을 통해 정규직 운동질서를 혁신하겠다는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들은 정규직운동질서의 탈계급화가 얼마나 깊이 진행되어 있는지 확인사살 하는 역할을 했다.
 

구조조정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공장노조의 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한 포섭은 미래의 고용보장을 기제로 한 포섭을 넘어 회사와 실질적으로 이윤을 나누는 형태로 발전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주요한 수출제조업인 조선·자동차·철강·전자 산업은 초국적 독과점체제의 최상층부에 편입되었고, 지난 15년 동안 이들 산업에서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의 임금은 2배 가까이 올랐다. 현대차와 기아차 정규직 조합원들은 수년 전 평균연봉 1억을 넘었으며 다른 주요제조업의 정규직도 그에 버금가는 상당한 임금 수준에 올랐다. 비록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것이긴 했지만 2000년대 이후 전반적인 저임금·불안정 노동의 확대에 이러한 고임금은 제조업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중산층적인 생활양식과 의식을 확산시키는 기제로 작용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성과급과 잔업·특근 수당이 총임금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임금체계에 의한 것이었지만,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임금은 기형적 임금체계와 그에 기초한 장시간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을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성과급과 우리사주 등 회사의 이윤과 연동된 임금구조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이해와 회사의 이해를 밀착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제조업은 전반적으로 자동화와 탈숙련화의 길로 넘어갔다. 한국의 제조업은 국제적으로도 자동화의 첨병이었으며, 자동차 산업의 경우는 특히 더 그러했다. 자동화로 인한 숙련의 해체는 동시에 제조업에서 비정규직을 대규모로 고용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대부분의 제조업 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숙련의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회사의 호황과 노사 간의 협약뿐이었다. 그리고 이 협약은 비정규직에 대한 희생 요구 위에서 이루어졌다. 자동차산업에서 자본은 정규직 조합원들을 고임금으로 길들이는 한편, 소위 “단가 후려치기”를 통해 하청 및 부품사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강제하여 가격경쟁력을 제고했다. 정규직노조는 대개 이러한 회사의 정책에 협조했으며, 대공장의 정규직노조들은 원청 자본에 대해 산업 전체 노동자들의 노사관계를 조정하는 브로커 역할을 맡으며 이른바 “담합적 노사관계”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 속에서 정규직 조합원들은 사실상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자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완성차 공장의 맨아워 협상은 사실상 정규직노조 대의원들이 조합원들의 해고를 방어하기 위해 하청노동자들의 투입과 해고를 결정하는 체계였다. 생산직 전원이 비정규직인 현대모비스에서는 실제로 현대자동차에서 파견된 정규직 조합원들이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소에서 정규직 조합원들은 사실상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관리·감독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성과급에 연동된 고임금과 주식보유자로서 정체성은 정규직 조합원들 사이에 자산보유계층과 유사한 개인주의 정서를 확산시켰으며, 연대성이 핵심인 계급의식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중반에 건설된 대공장 하청노조들은 매우 적대적인 환경에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노조 같은 공식적 차원이든 현장조직 같은 비공식 차원이든 정규직 운동질서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절실히 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청노조 건설 초기에 나타난 정규직 운동질서의 방관적인 태도는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될수록 아예 노골적인 적대로 바뀌어 갔다.
 

2004년 2월 16일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가 분신 자결했다. 하청노조 조합원 3인이 지프크레인을 점거하고 고공농성을 시도했으나 수 시간 만에 경비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끌려 내려왔다. 정규직노조 어용 집행부는 열사 대책위 참여를 거부하고 오히려 하청노조의 투쟁을 탄압했다. 2월 25일 어용 대의원 100여 명이 열사의 시신이 있는 병원에 쳐들어와서 행패를 벌이는 만행을 저질렀다.59) 이후 민주노총은 결국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상징이었던 현대중공업노조를 제명했으나, 현대중공업에서 어용의 집권은 201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청노조는 열사투쟁 직후 소지공 투쟁을, 2006년 토요일 무급방침 때문에 나타난 대중적 불만을 바탕으로 단협체결 투쟁 등을 벌이며 대중적 조직화를 꾀했지만 고립 속에서 사측의 극심한 탄압에 의해 패배했다.
 

GM대우 창원공장은 김학철 집행부가 사퇴한 이후 어려움을 겪던 비정규직지회가 2006년 3월 고공농성에 들어갔지만, 새로 들어선 정규직 집행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연대중단을 선언했다.
 

이런 행태들은 이른바 ‘어용’ 세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2005년 9월 4일 공장 앞 골목 비정규직노동조합 사무실 건물 옥상에서 비정규직 해고자인 류기혁 조합원이 목을 매 자결했다. 소위 ‘현장파’로 분류되는 현장조직 민투위 출신 이상욱 집행부는 다음 날 꾸려진 대책위 회의에서 류기혁 조합원을 열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60)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소모적인 열사논란을 벌이는 사이 사측의 회유에 넘어간 유족들은 시신을 화장했다. 이상욱 집행부는 불법파견 문제에 아무 진전이 없는데도 임단협 종결을 선언했고, 혼란 속에서 열사투쟁은 흐지부지되었다. 이상욱은 당시 좌파 정치조직 <노동자의 힘> 회원이었으나 소속 조직은 이런 행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민투위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현재까지 이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나 사과를 제출한 적이 없다. 적어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어용 및 노사협조주의 세력과 좌파나 전투파가 별반 구별이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반동화 된 공장의 운동질서를 조직력이 취약한 하청노조의 힘으로 뚫고 나가기는 극히 어려웠다.
 

⑵ 3자 협의체로 변질된 원하청 공동투쟁
 

이런 금속대공장 정규직 운동의 상황에서 초기 하청활동가들이 제기했던 계급의식적인 원하청 공동투쟁61)이 현실화 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기아차 화성공장의 “현장공투”는 원하청연대의 모범적 사례로 꼽혔으나, 이 역시 고비마다 한계를 드러내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원하청 공동투쟁이라는 구호는 하청노조 투쟁에 대한 정규직노조의 개입과 통제, 관리에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2005년 불파투쟁 과정에서 등장한 원하청 연대회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5년 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농성투쟁이 시작되었지만 정규직노조 집행부의 지원과 연대는 거의 없었다. 1월 24일 현자비정규직노조 한 조합원이 정규직노조 화장실에서 분신을 시도하자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노조에 비로소 원하청연대회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 기구는 사실 ‘원하청연대’라는 말이 무색한 통제기제에 불과했다.
 

정규직노조는 원하청연대회의에서 “공동합의, 공동투쟁, 공동결정”이라는 3원칙을 내세웠다. 이는 정규직노조의 허락 없이 비정규직노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원하청 공동투쟁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노조의 독자적인 투쟁을 가로막고 사측과 중재하는 브로커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비정규직노조 내부에서 제안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지만 당장 정규직노조의 연대가 아쉬운 처지에서 원하청연대회의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하청연대회의는 본사와 노동부 항의 방문 등 사회여론화 활동에 치중하며 공동투쟁 기관으로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흔히 원하청연대회의의 성과라고 이야기되는 2005년 6월의 비정규직노조 집단가입 캠페인도 알려진 것과 달리 노조차원에서가 아니라 공장별 대의원회와 비정규직노조가 추진한 것이었다. 정규직노조 집행부는 비정규직노조의 조직화 사업이 원하청연대회의 결정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불파교섭의 성과가 없음에도 임단협을 일방적으로 마무리 지은 이상욱 집행부는 비정규직노조의 독자파업 시도가 “3원칙”에 대한 위반이라며 비정규직노조에 오히려 사과를 요구했다.
 

2005년 9월 기아 화성공장에서도 비정규직노조의 독자적인 파업투쟁에 대해 정규직 노조는 원하청 연대회의를 통해 현대차노조가 제기한 것과 동일한 3원칙을 내세워 통제에 나섰다. 9월 28일 구사대 침탈을 자발적인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격퇴하고 비정규직 투쟁이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자 정규직노조 집행부는 긴급대의원 대회를 열어 정규직 연대 대오를 해산시켜버렸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조합원 총회를 소집하여 쟁의행위 찬반을 묻는 총투표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청노조와 전투적 활동가들은 총회 개최를 반대했지만 정규직노조는 총회를 강행했다. 집행부는 비정규직노조의 독자 파업을 비난하며 부결을 유도했고, 그 결과 10월 7일 총회와 함께 진행된 ‘노동탄압 분쇄와 원하청 공동투쟁 승리를 위한 쟁의행위 찬반투표’는 투표 대비 39.75%의 찬성률로 부결되었다.
 

정규직노조는 원하청연대회의를 통해 비정규직지회의 파업 계획을 원하청 공동문화제로 바꾸게 하는 등 투쟁을 통제하면서 사측과 교섭을 중재했다. 그러나 교섭은 진전이 없었고, 오히려 10월 20일 비정규직지회의 핵심기반이었던 신성물류에 대한 계약해지가 예고되고, 다른 6개 업체에 대해서도 계약해지 위협이 확대되면서 조합원들의 탈퇴가 시작되었다. 10월 25일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하청 활동가들과 정규직 활동가들이 기습적인 라인 점거투쟁을 벌인 것에 대해 정규직노조는 3원칙을 위배한 지회의 독자적인 투쟁은 책임지지 못한다고 압박했다. 이미 조직력이 많이 해체된 비정규직노조는 결국 정규직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하청업체와 집단교섭을 체결했다. 대공장 비정규직노조들 중 최초의 단체협상 체결이라는 성과를 남기긴 했지만, 원청을 끌어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2·3차 노동자들이 단협에서 배제되고 외주화를 허용하는 등 한계를 남기는 결과였다.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에서 정규직 운동질서의 중재로 교섭이 성사되는 사례는 초기부터 흔히 나타나는 사례였으며, 노동3권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취약한 상황 때문에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원하청연대회의를 시초로 하는 3자 협의체들은 공히 예의 “3원칙”을 내세우며 노골적으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종속시키려 했다. 이런 3자 협의체에 비정규직노조는 참여할 수밖에 없었지만 원하청연대회의는 비정규직지회의 무능력과 정규직운동질서에 대한 의존성을 키우는 것으로 결과했다. 정규직운동질서의 방해로 조합원이 늘거나 강화되지도 않았고 하청노동자들로 하여금 정규직 조합주의에 의존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각주> ----


56) 「주5일제와 혁명적 노동계급의 투쟁방향」, <노동자권력을 향한 전진> 제 1호 (2002.11.)

57) 9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대공장의 현장조직 운동은 구조조정 분쇄 투쟁의 패배 이후 빠르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본래 어용에 맞서는 민주파 활동가들의 결집체라는 모호한 성격을 갖고 있던 현장조직은 구조조정 분쇄 투쟁을 겪으며 급속히 분화하기 시작했다.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도 경향 상 차이 때문에 회의 자체가 공전되고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일이 점차 잦아졌다. 누구의 눈에도 분화와 재결집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으며, 때문에 2000년 무렵 각 정파별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와 현장조직에 대한 다양한 재편론이 제출되고 있었다. 

58) <노동자권력을 향한 전진> 제2호 (2003. 5)

59) 이를 시작으로 54일간 열사투쟁 기간 동안 7차례나 폭력 침탈을 자행했으며 열사 대책위의 교섭도 방해했다. 하지만 대책위는 투쟁이 장기화 되자 현대중공업노조를 대책위에 참여시켜 교섭 타결을 꾀했다. 당사자인 하청노조는 정규직노조의 대책위 참여에 반대하다가 오히려 대책위에서 배제되었다. 대책위는 4월 7일, 현장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하청노조의 호소에도 합의를 하고 열사투쟁을 끝냈다. 

60) 현대차 노조는 고인의 해고사유가 근태문제이며, 부당해고에 맞선 복직 의사가 있었는지 파악되지 않고 유서가 없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참세상, 「정권과 자본에 향할 분노의 정방향을 막는 것은 누구인가」, 2005. 9. 13.)

61) 하청활동가들이 제기했던 원하청 공동투쟁은 정규직이 우월한 위치에서 베푸는 시혜적안 지원과 연대가 아니라 같은 계급, 같은 노동자로서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함께 투쟁하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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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5/25 16:27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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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과 2006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제조업 전반으로 퍼져나갔지만 대부분 패배로 결과했다. 


이태영


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등장 (1996~2002년)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3.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4~2005)

(1) 실패한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
(2)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으로 전환
(3) 불법파견 투쟁의 한계


4.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와 비정규직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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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4~2005년)


2003년에 건설된 대공장 비정규직노조들은 건설과 동시에 자본의 엄청난 탄압에 직면했다. 노무현 정권의 친노동 행보는 채 반년도 못 가서 끝났다. 2003년 6월 30일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정권이 노동탄압 정책으로 회귀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정부는 이전 정권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자본의 불법 탄압을 방관했다. 정규직 운동질서도 손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차 아산·울산공장에서 건설된 비정규직노조들은 이전의 하청활동가 모임보다는 확대된 형태로 살아남았다. 2000·2001년에 벌어진 비제조업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과 달리 이 시기 하청노조 건설 운동을 주도한 것은 좌익 정파들에 소속된 직업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현장에서 밀려나 생계에 곤란을 겪으면서도 노조를 유지하며 활동을 지속했다. 중소규모 사업장과 달리 대공장에 존재하는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하청노동자들은 일시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가능성으로 보였다.
 

⑴ 실패한 비정규직 노조의 안정화
 

노조 건설투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대공장 비정규직노조들에서는 내부로부터 노조 안정화 계획이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2003년 노조 건설투쟁 이후 현자비정규직노조 1기 집행부가 제출한 조직 계획이었다. 맥락은 다르지만 현중하청노조에서도 2004년 초 일용직이던 소지공들이 노조에 집단 가입하여 투쟁에 나서자 교섭권 확보라는 문제의식이 등장했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대개 노조체계를 안정화시켜 정상적인 노조 활동을 통해 조합원 확대를 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상적 조합 활동을 통해 노조를 대중적으로 안정시키겠다는 계획은 사측의 탄압과 정규직 운동질서의 방관으로 쉽지 않았다.
 

현자울산비정규직노조는 열사투쟁 국면에 열린 2003년 노동자대회에서 투쟁의 선봉에 선 결과,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 핵심지도부에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51) 이런 상황에서 울산비정규직지회는 2004년 상반기를 대중적 조직화를 위한 준비기로 설정했다. 약화된 노조 조직을 추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무모한” 현장투쟁은 자제하고 조합원 확대에 집중해야한다는 집행부의 기조는 또 다시 정규직노조로의 직가입만 바라보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4년 2월 정규직대의원 대회에서 직가입은 또 다시 무산되었다. 찬반투표에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면서 기대를 모았던 7월 임단투 역시 정규직의 빠른 임단투 종료와 관리자들의 통제로 인해 독자 파업이 사실상 실패하면서 노조체계의 안정화를 통한 대중적 확대는 사실상 실패했다. 오히려 업체의 자생적인 현장투쟁으로 소규모 나마 조합원들이 늘어났고, 정규직의 대리교섭 관행으로 인해 1차 하청 조합원들의 파업 참여가 저조했던 반면 현대세신 등 2·3차 업체 노동자들의 투쟁이 커다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가장 먼저 노조를 설립한 현대차 아산공장은 테러 사건으로 서둘러 노조를 설립한 뒤, 미처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청소 용역업체인 동서다이너스티를 비롯한 자생적인 투쟁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비정규직노조는 뒤늦게 찬반투표를 거쳐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선언했지만 이미 노조 간부들과 조합원들에 대한 해고·손배소 등 탄압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정규직노조가 특별임단협을 통해 하청노동자들의 기본급을 인상하고 정규직 신규채용 시 40% 이상을 하청에서 채용한다는 합의를 체결하자 조합원 규모는 백 명 대로 급감했다.
 

현대차 전주공장과 GM대우 창원공장은 불법파견 캠페인을 통해 노조를 설립했고 건설 초기 상당수의 조합원을 조직했다. 그러나 불파투쟁이 사측의 탄압과 정부의 방관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노조의 조직력은 급속히 해체되었다. 전주공장에서는 그나마 현장 사업이 가능할 정도로 조합원들이 유지되었지만 창원의 경우는 현장 조합원을 거의 다 잃고 활동가들은 해고되었다.
 

대중적인 노조로 안정화에 가장 성공한 것은 2005년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건설된 기아비정규직지회였다. 2003년 4월에 건설된 기아비정규직지회의 전신인 ‘비정규직 합의권‧교섭권 쟁취를 위한 투쟁단’은 공장에 들어온 하청 활동가 두 사람과 정규직 활동가 두 사람이 초동주체로 참가했다. 투쟁단은 정규직노조가 임투에서 비정규직 특별요구안을 상정하는 국면을 앞두고 하청노동자에 의한 교섭권·합의권 쟁취를 내걸고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투쟁단의 캠페인은 정규직 임협이 관료적·형식적으로 진행되면서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에 투쟁단은 자기 기반을 만들기 위해 업체 조직화에 들어가 몇 군데 업체에서 처우개선을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들은 정규직 활동가들의 중재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투쟁단의 대중적 기초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투쟁단은 현장조직 정규직 활동가들과 공동투쟁체를 결성하고 사실상 준 노조 질서로 발전해 들어갔다.
 

임투 말미에 상시 투쟁체로 전환한 현장투쟁단은 2003년과 2004년 투쟁의 성과로 노조 결성 전에 이미 350여 명을 회원으로 조직했다. 직가입 추진사업이 거듭 실패하면서 독자노조 건설로 방향을 결정한 현장투쟁단은 정규직 대의원들과 함께 업체를 순회하며 비교적 순조롭게 노조 가입사업을 진행했고, 2005년 6월 4일 450여 명의 조합원으로 창립총회를 진행했다. 창립총회 직후 19개 하청업체들에서 대규모 조합가입이 이루지면서 조합원 수는 1000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 설립된 기아차비정규직지회가 단협체결 투쟁에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정규직 운동질서와 연대가 이완되는 모습을 보이자 사측은 본격적으로 탄압에 나섰다. 비정규직지회는 8월 26일 금속연맹 파업에 정규직노조와 공동파업을 성사시키려 했지만 정규직노조가 불참을 선언하면서 무산되었다. 9월 중순 정규직노조가 임투 종료를 선언하자 파업을 지속하던 비정규직지회는 사측의 탄압에 홀로 노출되었다. 추석 연휴 동안 비정규직지회 간부들과 투쟁에 적극 연대하던 정규직 활동가들에 대한 고소고발이 자행되고, 9월 28일 급기야 파업 대오를 깨기 위해 공장 안으로 용역깡패 4백 여 명이 난입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정규직 운동질서의 위기의식을 자극하여 원하청 연대투쟁이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규직 조합원들과 하청 조합원들은 함께 공장 안으로 들어온 구사대들을 격퇴했고, 이는 결국 하청노조 최초의 단협 체결로 이어져 비정규직노조가 대중적 노조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사측의 탄압을 방어한 기아차 비정규직노조의 사례는 매우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하청노조의 안착은 실패했다. 사측의 탄압에 대해 정규직운동질서는 방관으로 일관했고 오히려 노조 확대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현자 울산정규직노조는 노조설립 이후 빠르게 조합원이 확대되었으나 정규직노조에서 하청노조 건설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노조는 이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조합원 수가 5, 6백에서 2천 명 정도까지 큰 폭으로 오르내렸다. 그러나 노조 설립 무렵 가입대상이 9,000여 명에 이르렀던 것을 고려하면 조직화 성과가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다. 기아비정규직노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하청노조들은 조직대상의 10~30% 정도를 조직하는 소수노조로 살아남았다.
 

⑵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으로 전환
 

조직 확대의 벽에 부딪친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에 돌파구로 떠오른 것은 2004년 금속노조의 불법파견 집단 진정 캠페인으로 시작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었다.
 

2003년 SK 물류센터에서 용역회사 인사이트 소속으로 시설관리 업무를 했던 화섬연맹 소속 SK인사이트코리아노조52) 조합원 4명이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지 3년 만에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을 받아내고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2001년 캐리어에서도 불법파견 시정요구 덕분에 총 102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이 두 사례는 노조 운동에서 불법파견 진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민주노총과 각 연맹 차원의 실태조사로 이어졌다.
 

2003년 3월, 좌파 성향의 집행부가 당선된 광주 금호타이어노조는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기획하여 비정규직 주체를 발굴하는 한편 불법파견 진정을 위한 증거수집에 들어갔다. 정규직노조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2003년 11월 22일 건설된 금호타이어비정규직노조는 조직 대상 대부분을 조직하고 노조 결성과 함께 불법파견 진정을 집단적으로 제출했다. 그 결과 2004년 4월 28일 금호타이어비정규직노조 조합원 282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성과를 목격한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2004년 여름 임단협을 앞두고 지역에서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을 준비했다. 이는 곧 금속노조 차원의 전국적 캠페인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초기에는 사내하청운동 주체들 사이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에 대해 부정적인 문제의식이 있었다. 이전 사례를 봤을 때, 정규직이 된 비정규직 출신 조합원들이 활동을 지속하지 않는 등 부작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호타이어의 경우에도 282명이 우선 정규직화 되면서 80여 명의 조합원들은 오히려 합법도급으로 판정받고 정규직화의 길이 막히는 부작용이 있었다. 또, 미화·경비·운수·식당 조합원들의 처우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이후 비정규직노조의 존속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지도부와 하청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노조 안정화 사업에 실패한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집행부는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이 시작되자 태도를 바꾸었다. 불법파견 진정에 예상보다 많은 노동자들이 호응했을 뿐 아니라, 9월 불법파견 울산 공장에서만 8000명, 전주·아산공장을 합치면 만여 명의 하청노동자들에게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고무된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1기 집행부는 2005년 1월 15일 주력기반인 5공장에서 잔업거부 투쟁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많은 활동가들은 불법 판정이 떨어지면 금호타이어처럼 대규모 정규직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노동조합

불법파견 진정시기

불법파견 판정인원

노조 대응 및 결과

금속노조 경주지부

2004년

195명

▪ 단계적 정규직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 (울산)

8,000여 명

▪ 원하청연대회의 구성하여 대응.

▪ 2006년 9월 3자교섭. 불파 문제는 성과 없음.

현대자동차 아산 사내하청지회

1,200명

현대자동차 전주 비정규직지회

8,00명

GM대우 창원 비정규직지회

2005년

850명

▪ 노조와해. 불파문제는 성과 없음.

기아자동차 화성 비정규직지회

42명

▪ 임단협에 집중. 불파 대응 안 함.

타타대우상용차

130명

▪ 단계적 정규직화


그러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시작하자마자 자본의 강력한 탄압에 부딪쳤다. 회사는 투쟁에 동참한 다른 공장 하청노동자들에게 징계 경고장을 발송하는 등 강력하게 대처했고 5공장 조합원들의 투쟁은 고립되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1월 22일 비정규직노조 최남선 조합원이 “탄압중단, 원하청 단결투쟁”을 요구하며 분신을 시도했고, 이를 계기로 정규직노조와 원하청연대회의가 꾸려졌다. 하지만 정규직노조는 “공동논의, 공동교섭, 공동투쟁”이라는 이른바 3원칙을 내세우며 비정규직노조의 활동을 통제하려 했을 뿐 탄압받는 하청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엄호하지 않았다. 비정규직노조 간부들이 무더기로 해고당하고 수십 억대의 손해배상과 고소소발, 징계가 떨어졌다. 투쟁에 연대하던 정규직 활동가들에게까지 탄압이 퍼부어졌다.6월 하순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들은 정규직 활동가들과 함께 흔히 “부흥회”라고 불린 대대적인 집단가입 캠페인에 들어갔다. 이 결과 울산공장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2000명에 육박할 정도로 증가했다. 전주·아산공장까지 합치면 노조로 조직된 현대차 하청노동자들은 3000명을 넘어섰다. 7월 20일 울산공장 비정규직노조 집행부는 2005년 임단투에서 불법파견 투쟁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임단투 시기를 불파투쟁 단일전선으로 돌파한다는 집행부의 계획은 2·3차 업체 투쟁 등 다른 현안 투쟁 사안들과 충돌하며 실제화 되지 못했다.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의 파업에 대해 현대차는 관리자들을 현장에 투입하여 작업자들을 감시하고 대체인력을 투입했다. 비정규직노조 간부들의 현장 출입은 통제됐고 주요 간부들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9월 8일 이상욱 집행부는 불파 문제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에도 임단협을 종결시켰다. 그 직전인 9월 4일 2공장 비정규직 조합원인 류기혁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비정규직노조 내부 사정이 혼란한 와중에 노조 차원의 대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53) 이미 6월부터 향후 투쟁 전망을 놓고 벌어지던 비정규직노조의 내부 논쟁은 9월 9일 쟁대위에서 불파투쟁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집행부의 입장과 현장을 추스르면서 다음 투쟁을 준비하자는 입장의 충돌로 표출되었다. 결국 후자가 쟁대위 다수 입장으로 확인되자, 비정규직지회 1기 집행부는 곧바로 사퇴를 표명하고 차기 집행부 선거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10월 새로운 집행부가 선출되어 현장을 추스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울산공장의 불파투쟁은 막을 내렸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불파투쟁이 시작된 1월부터 9월 4일까지 101명이 해고되고, 100여 명 이상이 징계를 받았다.54) 1기 집행부는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장외투쟁을 이어갔지만 초기 노조건설과 불법파견 투쟁을 주도한 5공장 현장 기반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상황은 불법파견 투쟁을 주요 사업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불법파견 투쟁을 계기로 노조를 건설한 다른 사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전주공장도 부흥회로 조합원이 크게 증가했지만 불법파견 교섭이 성과 없이 마무리되며 조직은 급속히 해체되었다. GM대우 창원공장도 한때 조직대상의 과반이 넘는 600여 명을 조직했지만, 사측의 악선동과 정규직노조가 불파투쟁에만 신경 쓴다는 정규직조합원들의 불만이 고조되며 9월 30일 정규직 집행부가 중도 사퇴하자 급격히 붕괴하게 된다. 비정규직노조를 옹호하던 김학철 집행부가 물러나자 사측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고 중심 활동가들은 해고되었다.

2004년 10월 설립된 반도체 업체 하이닉스매그나칩 하청노조는 노조설립 후 조합원들이 집단 해고되면서 해고자 복직을 내건 장기투쟁으로 전화되었다. 하이닉스매그나칩사내하청지회는 2년 6개월 동안 고공농성 두 차례를 비롯한 처절한 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복직을 쟁취하지 못했다. 결국 2007년 4월 26일 금속노조가 위로금을 받는 것으로 직권조인 합의를 하면서 투쟁은 허무하게 끝났다. 2005년 6월 설립된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역시 노조 설립 후 조합원 120여 명이 집단 해고를 당하고 2년 간 고공농성을 세 차례나 단행한 끝에 간신히 복직을 쟁취할 수 있었다.
 

⑶ 불법파견 투쟁의 한계
 

2005년 불파투쟁은 금속대공장·제조업 비정규직 운동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자동차 뿐 아니라 철강, 반도체 등 다른 업종으로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도 금호타이어 같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사측의 거센 탄압으로 새로 조직된 노조들은 조직력이 붕괴되며 빈사상태에 몰렸다. 2006년에도 불파투쟁을 이어가는 사업장들이 존재했지만 그해 하반기가 되자 이 투쟁의 패배는 확실해졌다.
 

당초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부정적이던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불파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중의 열띤 호응 때문이었다. 하청노조가 실질적인 교섭권을 쥐지 못한 현실에서 국가기관이 내린 불법파견 판정은 정규직화를 비정규직 철폐 같은 머나먼 전망이 아니라 손에 쥘 수 있는 현실적인 요구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불파투쟁이란 본질적으로 국가기관의 판정을 자본에게 강제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투쟁의 전망 자체가 법률적 판정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당연히 자본의 편일 수밖에 없는 국가기관은 최종 판결을 유예함으로써 사측에게 시간을 확보해주었고, 그 사이 자본은 가차 없이 투쟁 주체를 탄압했다. 불법파견 정규직화가 당장의 목표라는 것은 오판이었다.
 

더욱이 불파투쟁은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대한 즉자적인 호소에 기반 했기 때문에 계급적 단결의식이나 연대의식 보다는 일종의 신분상승 욕구로 왜곡될 소지가 많았다. 이미 불파투쟁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이 점에 대한 우려는 많았지만, 비정규직노조가 정규직 활동가들과 함께 진행한 조직화 사업인 “부흥회”는 조직 확대를 우선시하여 일단 노조로 들어오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쪽에 선동의 방점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신규 조합원들에게 정규직화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불법파견 투쟁이 노조 주체들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불파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사업장들과 비교해 봤을 때 불파 투쟁은 조합원들을 크게 늘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불파 투쟁은 노조의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상 투쟁, 현안 투쟁과 결합하여 상승효과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충돌되는 양상을 보였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노동자들에게 정규직화 이외의 다른 모든 요구는 사소한 것이 되었다. 다른 노동자들에게 정규직화 투쟁은 자신들의 처우개선 요구투쟁을 부차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결국 불파투쟁이 패배로 돌아가고 나서 조직력과 노조의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법기관에 의한 불법파견 판정은 불법성이 가장 명확한 곳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청노동자가 가장 많은 조선소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불법 판정 캠페인에서 배제되었다.55) 같은 사업장의 2·3차 하청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정규직노조 초기만 해도 2·3차 하청에 대한 고민을 쥐고 가려는 노력이 있었다. 실제로 울산공장 비정규직노조에서처럼 2·3차 하청노동자들이 투쟁의 선봉에 나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불파투쟁이 대공장비정규직노조의 중심과제로 등장하며 2·3차 하청노동자에 대한 문제의식은 점차 유실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대공장의 비정규직 투쟁을 완성차 공장 1차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협소화시키는 면이 있었다. 이 사안을 전체 비정규직노동자의 투쟁과 연결시키는 프로그램이 부재하거나, 생각은 있더라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각주> -----------------


51)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였던 2003년 노동자대회에서 총 연행자 113명 중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만 16명이었다. 

52) 2000년 3월 20일 노조를 건설했으나 노조 설립 시 40명이던 조합원들은 3일 후 4명만 남고 모두 탈퇴했다. 남은 조합원들은 노조를 해산하라는 회사의 회유를 뿌리치고 2000년 8월 18일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서를 제출했다. 

53) 9월 5일 새벽 4명의 조합원이 철탑에 올라가 열사투쟁의 불씨를 살리려했지만 태풍으로 인해 만 하루 만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54) 투쟁과정에서 총 4명이 구속됐고, 4명이 3수배를 받았으며, 손배 1억과 400만 원의 가압류가 집행되었다. 

55) 라인 작업을 하는 자동차와 달리 팀제로 운영되는 조선소는 사내하청이 합법적으로 판정될 가능성이 적지 않은데다 이직률이 높아 정규직화 대상이 되는 2년 이상 근속자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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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5 16:27 2017/05/2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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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5/18 10:10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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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사측이 자행한 하청 활동가에 대한 잔혹한 폭행사건은 대공장비정규직노조 건설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태영


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등장 (1996~2002년)
(1)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의 결성 (1996~1997년)
(2) 한라중공업 하청노조 건설 (1999년)
(3) 전국모임과 한라하청 투쟁의 의미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1) IMF와 구조조정 이후 금속 대공장의 상황
(2) 제조업 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위한 초기 시도들 (2000~2002)
(3)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의 본격적인 등장과 확산 (2003~2005)
(4) 정규직운동질서의 방관과 독자노조 건설 


3.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4~2005)


------------------

⑶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의 본격적인 등장과 확산 (2003~2005)


대공장 하청업체 취업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비교적 용이한 편이었다. 한라하청을 비롯하여 INP중공업, 캐리어, 기아차 광주공장 등에서 건설된 하청노조들은 모두 현장에 취업한 활동가들이 주도하여 건설된 것이었다. 2000년대 초, 상당수의 활동가들이 주요 대공장에 하청노동자로 들어갔으며 이들은 대개 노동운동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좌익 정파들에 소속된 젊은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현대차 아산·울산공장, 기아차 화성공장과 현대중공업 등에서 하청활동가 모임을 만들었고, 이 모임들은 2003년 이후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건설의 주체가 되었다.
 

대개 반(半)공개 모임으로 존재하고 있던 이 모임들은 현장조직 등 정규직 운동질서와 소통을 하고 있었지만 하청 조직화에 대한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응은 대부분 미온적이었다. 정규직 운동질서의 싸늘한 반응과 주도적인 현장 활동이 힘든 상황에 처한 하청활동가들은 흔히 ‘뿌리 내리기’라고 불린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조직화 사업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하청 이직률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하청활동가들의 모임이 하청노동자들을 조직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하청모임들의 활동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03년이 되자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IMF 경제위기 직후 집권한 김대중 정권은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갓 등장하고 있던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을 철저히 탄압했다. 2000년 6월 29일 롯데호텔 비정규직노조의 파업투쟁에 경찰 특공대를 투입한 사건은 요행으로 사상자가 없었을 뿐 자칫 큰 참사를 빚을 수도 있었던 무리한 진압이었다.46) 반면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취임 전부터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고 공언했고, 인수위 시절에 벌어진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투쟁에서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집권 후 유화적인 노동정책을 펼칠 것을 예고했다. 민주노총 역시 2000·2001년 비정규직 투쟁 이후 비정규직실을 설치하고 실태조사에 나서는 등 산하조직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본격적인 조직사업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서 2003년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벌어진 하청활동가에 대한 테러 사건은 잠복해 있던 대공장 하청노조 건설 운동이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3년 3월 19일,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하청노동자모임의 송성훈 활동가가 월차 신청을 했다가 관리자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진단서를 끊기 위해 인근 병원에 간 송성훈 활동가를 관리자와 폭력배 2명이 병원까지 쫓아와 식칼로 두 다리의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테러를 자행했다. 사측의 만행은 하청노동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날 송성훈 활동가가 속한 업체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했고, 정규직 대의원의 연대로 아산공장 라인이 전면 중단되었다. 당황한 사측은 업체 폐업 시 고용승계, 정규직 신규채용 시 40% 하청에서 충원을 골자로 한 합의서를 작성했다. 하청모임 활동가들은 3월 28일 서둘러 노조를 설립했고 설립 두 달 만에 조합원 수는 300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2003년 4월 28일 현대차 울산공장에서는 하청노동자로 취업한 안기호 활동가가 “비정규직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라는 유인물을 현장에 배포했다.47) 나중에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유인물은 하청노동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4일 뒤인 5월 2일 현자노조 임단투 출정식에 하청노동자 100여 명이 참여하여 이 유인물에서 제기한 대로 현대자동차비정규직투쟁위원회(이하 ‘비투위’)를 결성했다. 억눌려 있던 하청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투위는 여러 곳에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비투위 활동가들은 정규직노조로 직접 가입을 원했지만, 노조와 현장조직 등 정규직 운동질서는 “조합원 정서”를 구실로 난색을 표했다. 결국 비투위는 조직 발전전망을 놓고 내부적으로 격론을 벌인 끝에 6월 27일 독자 노조건설을 결정하고, 7월 8일 비정규직노조를 설립했다. 비투위 시기에 2백 명이 채 안 됐던 숫자는 노조 설립 이틀 만에 500명으로 늘어났다.
 

8월에는 97년 외주노동자모임의 결성에서부터 하청활동가 모임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현대중공업에서 마침내 하청노조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회사는 하청노조가 결성되자 즉시 공개 조합원이 소속된 업체들을 대부분 폐업하여 노조 확대의 싹을 잘랐다. 하지만 노조 건설 투쟁 이후에도 2인의 조합원이 현장에 남아 이후 활동의 여지를 남겼다. 기아차 화성공장에서도 2003년 4월 임단협을 앞두고 정규직 활동가들과 하청 활동가들이 현장투쟁단을 결성하여 하청노조 건설을 향한 첫걸음 떼었다.
 

2003년 11월에 건설된 금호타이어비정규직노조는 최초로 조합원들의 집단적인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쟁취하여 제조업 비정규직 투쟁에서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다. 노조 설립과 함께 집단적으로 조합원들의 불법파견 진정을 제출한 금호타이어비정규직지회는 2004년 4월 28일 불법파견으로 판정된 조합원 282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금호타이어의 성과에 고무되어 금속노조가 주도한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은 하청노동자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현대차 등에서 대규모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하청노조 건설 운동을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기존 하청노조들은 불파투쟁에 나섰고, 미조직 사업장에서는 새로운 하청노조들의 건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자동차·조선에 비해 하청 운동이 미약했던 반도체·철강 등 사내하청을 사용하는 제조업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2004년 10월에는 반도체공장인 하이닉스매그나칩에서 104명의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판정을 받는 것을 계기로 사내하청지회가 건설되었다. 2005년 2월 23일 현대차 전주공장, 4월 10일 GM대우 창원공장, 6월 13일 철강사업장인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에서 불법파견 진정캠페인과 불법파견 판정의 결과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조가 세워졌다.
 

이밖에 기아차 화성공장의 현장투쟁단도 2005년 6월 4일 비정규직지회로 전환했으며, 서울의 전자업체 기륭전자와 생산직 노동자가 전부 사내하청노동자로 구성된 기아차 모닝을 생산하는 충북 서산의 동희오토 공장에서도 하청노동자들의 노조가 건설되었다.
 

⑷ 정규직운동질서의 방관과 독자노조 건설
 

하청노동자들의 노조건설은 대부분 격렬한 투쟁의 양상을 띠었다. 자본은 노조가 건설되면 바로 주력 업체를 폐업시키는 등 강력한 탄압을 가했다. 정규직 운동질서는 대부분 이런 탄압들을 방조했다. 금호타이어와 GM대우 창원공장 등에서처럼 정규직노조가 하청노동자들을 조직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대개 좌파 성향의 정규직노조 집행부가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을 벌리는 과정에서 하청노조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하청노동자들의 노조 건설에 대해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했다. 대공장 하청활동가들은 이전의 하청노조 건설 경험들을 통해 정규직 운동질서의 변화 없이 하청노조의 건설 전망이 어둡다는 데 누구나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개 섣부른 노조 건설보다 한편으로 정규직 운동질서와 소통의 끈을 놓지 않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 ‘뿌리내리기’처럼 점진적으로 기반을 형성 해나가는 방향을 취했다.
 

하지만 아산 공장의 예에서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가들이 사측에 노출되어 탄압의 표적이 되는 등 무작정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하청활동가 모임이 존재하며 반공개적으로 활동해왔던 현대중공업의 경우에도 정규직 운동질서의 어용화가 심해지면서 노조 설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48) 특히 어용노조가 2003년 초 별다른 저항 없이 해고자들을 청산하며 장기집권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하청모임은 일부 활동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노조 건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49)
 

현대차 울산공장의 경우에도 하청활동가들의 현장기반이 미약한 상황에서 몇몇 활동가들이 비투위 투쟁으로 치고 나간데 대해 기존 하청활동가들의 태도는 엇갈렸다. 그러나 비투위가 기대 이상으로 대중적 호응을 얻자 비투위 초기에 참여를 주저하던 하청활동가들도 빠르게 합류하여 대다수의 공장에 모임이 형성되고 대표자가 선출되었다.
 

비투위 활동가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정규직노조 직가입을 원했다. 아산과 달리 노조가 아니라 투쟁체를 먼저 건설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비투위는 독자적인 요구를 내걸지 않고 정규직노조가 임단협에 제시한 사내하청 처우개선 요구의 “100% 쟁취”를 핵심 요구로 내걸었다. 이 역시 독자적인 요구를 내세울 경우 정규직노조와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사측은 비투위 동력의 핵심인 5공장 하청업체들을 7월 11일 부로 계약해지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위기에 몰린 비투위는 정규직노조에 집단 가입을 요청했으나 노조와 정규직 운동질서는 “조합원 정서”를 이유로 직가입 추진을 외면했다. 정규직운동질서의 이런 태도는 비투위에 긴급하게 조직발전 전망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초기 비투위의 주요한 현장기반은 5공장과 1공장과 3공장이었다. 비투위 건설을 주도한 5공장과 다른 공장들은 각기 주도 활동가들의 정파가 달라 초기부터 서로에게 서로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불신은 고비마다 투쟁 방향에 대한 갈등으로 드러났고, 2008년 무렵까지 고질적인 문제로 꼽혔던 공장별 연방제적 운영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조직발전 전망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내부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탄압에 직면한 5공장 활동가들은 즉각적인 독자노조 건설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1공장 활동가들은 비투위 체제를 유지하며 계속 직가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3공장에서는 5공장 계약해지가 확실시 되면 노조를 건설하되 그렇지 않을 경우 임단투 시기에 최대한 각 공장별로 원하청 공동투쟁을 만들어내며 노조를 건설하자는 입장을 제출했다. 1안과 2안은 명확히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각기 기반하고 있는 공장에서 정규직 운동질서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른 상황 판단의 차이가 있었을 뿐, 둘 다 정규직 질서와 직가입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6월 27일 열린 비투위 총회에서 투표 결과, 즉각적인 노조건설 안이 152표 중 105표를 획득했다.50) 이에 따라 비투위는 7월 8일 독자노조로 전환하여 <비정규직 인간선언>을 제안하고 비투위 대표를 지낸 5공장 하청노동자 안기호 활동가를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독자노조 건설했던 반대했던 활동가들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새로 건설된 비정규직노조의 조합원은 이틀 만에 500명을 돌파할 정도로 빠르게 증가했다. 조직전환 논의의 단초가 되었던 5공장 계약해지 건도 정규직노조와 사측이 전환배치를 통한 고용보장을 합의하면서 최악의 사태는 일단 막아내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노조 건설 직후 이를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비정규직노조의 확대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정규직노조는 “적정한 때”가 되면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직가입으로 대거 조직화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비투위의 “성급한” 독자노조 건설을 비판했지만, 이후에도 비정규직노조의 거듭된 직가입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단순히 비정규직노조의 확대를 막기 위한 여론플레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독자노조 건설을 반대하며 비정규직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던 1공장 하청 활동가들도 다음 해 2월 정규직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직가입이 무산되자 결국 하청노조에 합류했다.
 

기아차 화성공장과 현대차 전주공장, GM대우 창원공장의 하청노동자들도 울산공장처럼 투쟁체 형태로 먼저 조직을 띄웠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기아차 화성공장에서도 현장투쟁단이 노조 설립 이전 정규직노조로 직가입 캠페인을 추진했었지만 정규직운동질서의 별다른 호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정규직운동질서의 이러한 태도는 하청노조의 형태를 독자노조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이었다. 금호타이어, 현대차 전주공장, GM대우 창원공장처럼 정규직노조의 적극적 지원 속에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을 펼친 사업장에서도 당장 기존 노조로 가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청노동자들의 호응을 담아내기 위해 독자적인 비정규직노조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각주> ---------------

 

46) 당시 경찰특공대는 고층인 36층과 37층에 모여 있는 조합원들을 연행하기 위해 장애인과 임산부가 포함되어 있는 농성대오에 연막탄을 쏘며 진입해 강제 진압했다. 

47) 안기호 활동가는 90년대 초반 울산 효성금속 위원장을 역임하고 해고된 중견 활동가였다. 

48) 현중하청모임은 2001년 1월부터 정규직노조 노보 한 면을 할당받아 하청 문제를 다루는 내용을 싣고, 이를 통해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화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2002년 6월 비리문제로 정규직노조 집행부가 중도 사퇴하고 보궐 선거로 당선된 어용 집행부가 하청모임과 연대 단절을 결정하면서 벽에 부딪쳤다.

49) 보궐선거를 통해 당선된 어용 최윤석 집행부는 11월 8일 조합원 총회를 통해 ‘해고자 문제 정리 합의서’를 59%의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해고자 13명 가운데 오종쇄 등 4명을 복직시키고 김대환, 이갑용, 조돈희 등 나머지 9명은 3년분 임금을 받고 현대중공업과의 관계를 완전 ‘정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매년 해고자 문제 때문에 임단협 협상이 늦어져 조합원들이 불만이 크다는 이유였다. 이 합의서는 “불복하는 해고자에 대해 노조는 생계비를 지급할 수 없으며 추후 회사에 어떤 요구도 거론하지 않는다”고 명문화해 재론의 여지마저 봉쇄했다. 투쟁과정에서 해고된 조합원들의 복직투쟁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현대중공업에서 민주노조 운동이 사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최윤석 집행부 이후 현대중공업은 12년 동안 어용노조가 장악했다. 

50) 노조건투 시기 이후 울산공장 비정규직노조의 조합원 수는 700여 명까지 늘어났지만, 실제로 조합비를 내는 진성 조합원은 2~300명 선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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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8 10:10 2017/05/1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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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5/12 07:45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3)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517일 간 투쟁하며 2000~2001년 비정규직투쟁의 구심이 되었다. (사진 출처 : 참세상)

517일 간 투쟁하며 2000~2001년 비정규직 투쟁의 구심이 되었던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사진출처 : 참세상)


이태영


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등장 (1996~2002년)
(1)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의 결성 (1996~1997년)
(2) 한라중공업 하청노조 건설 (1999년)
(3) 전국모임과 한라하청 투쟁의 의미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1) IMF와 구조조정 이후 금속 대공장의 상황
(2) 제조업 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위한 초기 시도들 (2000~2002)

(3)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의 본격적인 등장과 확산 (2003~2005)
(4) 정규직운동질서의 방관과 독자노조 건설 
________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한라하청노조 건설 투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2000·2001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처음으로 폭발적으로 벌어졌다. 99년 한라하청노조, 재능교육교사노조, 애니메이션노조 등 비정규 고용형태를 가진 몇몇 노조들의 투쟁이 벌어지고, 통계청 기준으로 임시직과 일용직을 합친 비상용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50%를 넘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비정규직 문제가 마침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다.32) 2000년 초부터 서울대시설관리노조, 이랜드비정규직분회, 방송사비정규직노조, 한국통신계약직노조 등 수십 여 개의 비정규직노조들이 잇따라 건설되었다.
 

이 노조들은 대개 수도권과 비제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비제조업에서도 90년대 중반 외주화가 상당부분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노동조건의 차이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순순히 이를 받아들였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IMF 경제위기를 이유로 노동조건의 큰 하락을 경험했다. 99년부터 경기가 뚜렷이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하락한 노동조건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재계약 시기를 앞두고 이에 대한 불만이 노조 건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기에 2000년 7월 파견법 제정 만 2년째가 되면서 정규직화 의무를 피하기 위한 집단해고 조짐이 나타나자 이 역시 노조건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노조들의 투쟁을 지도·지원한 것은 주로 민주노총 지역본부들이었다. 대부분의 투쟁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특히 서울본부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초기 서울본부는 재능교육에서 성공의 경험,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사회적 이슈화에 고무되어 비정규직 투쟁에 의욕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이 시기 조직된 노조들은 장기투쟁 끝에 대부분 유실되었다. 노조가 건설되면 파업에 나서 이를 통해 간부층을 발굴하고, 파업 동력이 최고점에서 하락하는 시점에 어느 정도 교섭 안이 나오면 파업을 접고 노조를 안정화한다는 민주노총의 신규노조 조직 매뉴얼은 이 사업장들에 통하지 않았다.
 

파업 투쟁이 수십 일을 넘어가고 있는데도 자본은 전혀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당혹한 민주노총 관료들은 많은 곳에서 스스로 요구를 낮추거나 왜곡시켰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자본은 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고 투쟁은 장기화되었다. 경험이 없는 신규 비정규직노조들은 결국 장기투쟁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 스러져 갔다. 2002년 5월 13일, 517일 동안 투쟁하며 비정규직 투쟁들의 구심이 되었던 한국통신계약직노조가 큰 성과 없이 투쟁을 마무리 했다. 이는 2000년 초에 시작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물결이 일단락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2000·2001년 비정규직 투쟁의 폭발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투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활동가들에게 각인시켰다. 이전까지 비정규직  문제는 조직형식의 문제로 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노총 관료들은 비정규직 조직화는 산별노조로 전환되어야 풀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산별노조로의 전환은 요원해 보였다. 또 정규직 중심의 연맹질서가 산별체제로 전환된다 해도 비정규직의 조직화에 적극적으로 나설지는 매우 의심스러웠다. 비슷한 시기 또 다른 대안으로 일반노조나 지역노조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지역노조는 이미 상근자 중심의 캠페인 활동, 다시 말해 노동조합이라기보다 운동단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문제를 조직형식으로 접근하는 경향은 항상 비정규직 문제를 현재의 투쟁이 아니라 미래의 조직화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2000·2001년의 수도권 비제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많은 활동가들에게 조직형식 논의를 넘어 비정규직 투쟁의 현실적 가능성을 확인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였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비제조업 투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 제조업 특히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으로 파급시키지 않으면 비정규직 투쟁은 전망이 없다는 인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투쟁을 대공장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


⑴ IMF와 구조조정 이후 금속 대공장의 상황

 

80년대 이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조직노동과 협약을 통해 노동유연화를 확대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1982년 체결된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을 필두로 90년대 들어 많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고용보장·노동시간 단축 등 조직노동의 이해와 노동유연화의 확대가 맞교환 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한국에서도 97년 노동법 개악을 통해 민주노총은 복수노조 허용, 노조의 정치참여 허용 등 조직노동에 유리한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개선과 정리해고제·파견법·변형근로제 등 노동유연화 악법 도입을 맞교환했다.
 

98·99년 많은 대공장에서 정리해고·희망퇴직 같은 인원 구조조정이 추진되었다. 대공장 정규직노조들은 격렬하게 투쟁했지만 패배했다. 정리해고의 기억은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으며, 고용안정이 노동조합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틈타 비정규직의 이해와 정규직의 이해를 맞바꾼 사회적 합의는 사업장 차원으로 내려왔다. 2000년 당시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정갑득은 반대하는 조합원들에게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비정규직을 받겠다”고 강변하며 이른바 ‘완전고용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총고용을 보장 받는 대신 사측의 사내하청 사용을 묵인하겠다는 합의였다.
 

이 합의는 1998년 기준인 정규직 대비 16.9%까지 하청노동자의 사용을 제한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00년 당시에도 현대자동차에서 하청비율은 이미 24%를 넘어서고 있었다. 완전고용 합의는 정규직노조가 하청노동자들을 고용보장의 방패로 공식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합의 이후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1차 하청노동자들은 2004년까지 가파르게 증가하여 한때 거의 10000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후 많은 대공장에서 유사한 합의들이 이루어졌다.
 

96~06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1차 하청 인원 및 직영대비 비율(%) 추이

 

96

98

99

00

01

02

03

04

05

06

인원

4,700

4,034

5,249

6,315

7,381

8,581

9,246

9,571

7,620

6,244

비율

 

16.9

20

24.2

28.3

31.8

33.2

33

-

27.4

「금속노조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 전략에 대한 진단과 대안 연구 (2011. 9)」에서 인용)


노조 상층부 차원의 고용합의는 현장단위에서의 일상적 합의구조가 형성되며 더욱 아래로 내려왔다. 구조조정 이후 2000년대 들어 완성차 공장에는 근로자참가제33)에 기초한 노사공동위원회나 고용안정위원회 같은 노사협의체가 등장했다. 이런 노사협의체들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시적·부분적 구조조정에 대한 합의권을 현장 대의원 체계까지로 내리는 것을 제도화했다. 정규직 중심의 시야에 갇힌 전투적 현장주의자들은 완성차 공장의 맨아워 협상34) 같은 현장 합의구조를 현장권력의 맹아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역할은 매우 이중적이었다.

그것은 상시적인 구조조정에서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방어하는 강력한 보루로 기능한 반면, 정규직의 고용보장을 위해 하청노동자들을 투입과 해고를 용인하는 비정규직 배제 메커니즘의 핵심을 이루었다. 완성차 공장처럼 제도화된 합의구조가 형성되진 않았다 하더라도 철강, 조선 등 다른 산업에서도 정규직노조와 조합원들은 암암리에 비정규직 투입을 묵인해왔다. 대공장의 정규직 활동가들은 겉으로는 비정규직 투쟁들에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진 못했지만 실제로는 조합원들의 정서를 핑계 삼아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⑵ 제조업 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위한 초기 시도들 (2000~2002)
 


전국모임은 한라하청노조 건설 이후 99년 말 창원의 볼보건설기계코리아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지원했고, 2000년 10월에는 울산모임 회원들이 지역의 중소 조선사업장 INP중공업35)에서 사내하청노조를 건설했다. 그러나 업체폐업 등을 내세운 극심한 탄압에 밀려 모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0년 여름에는 거제도 대우조선소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하청노동자 두 사람이 투쟁에 나섰다. 투쟁 주체들이 잇따라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활동이 어려워진 가운데 투쟁에 연대하던 정규직 현장조직이 노조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이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더 확대되거나 조직화로 이어지진 못했다.36)
 

2001년 광주에서 벌어진 두 개의 하청노조 건설 투쟁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당시 사회당과 전국노동자회 활동가들이 주도한 캐리어사내하청노동조합(이하 ‘캐리어하청노조’) 건설 투쟁은 이전의 사례들과 달리 노조 건설 전부터 정규직노조 집행부와 소통하며 협조를 받아 건설되었다. 광주에 자리 잡은 대우캐리어는 당시 정규직 조합원 800여 명과 하청노동자 650여 명이 일하고 있던 에어컨 제조업체였다. 대규모 사업장은 아니지만 캐리어노조는 지역에서 가장 건실하고 투쟁적인 노조로 평판이 높았다.
 

2001년 2월 18일 캐리어하청노조 활동가들은 정규직노조 간부들 및 대의원들과 함께 현장을 순회하며 하청노동자들로부터 가입원서를 받았다. “그 결과 노조설립 보고대회 3시간 만에 350명이, 일주일 만에 전체 하청노동자 650명 중 70%인 450명이 노조에 가입”했다.37) 그러나 하청노조가 예상외의 조직성과를 보이자 정규직노조는 점차 하청노조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월 9일 민주노총이 조직한 비정규직 전국순회 투쟁단이 캐리어 공장 진입을 시도하다가 정문을 크게 파손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규직노조 집행부는 이를 문제 삼아 하청노조에 연대 단절을 선언했다. 
 

4월 들어 하청노조가 전면파업에 들어가 생산을 중단시키고 사측이 공장이전계획과 매각설을 흘리며 고용불안 정서를 자극하자 정규직 조합원들의 하청노조에 대한 감정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정규직노조 집행부의 태도는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변했다. 급기야 2001년 메이데이 새벽 정규직 조합원들이 하청노조 농성장을 폭력 침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노조로 꼽혔던 캐리어노조는 결국 민주노총에서 제명되었다. 캐리어하청노조는 현장에서 밀려나 공장 밖에서 농성 투쟁을 이어갔다.
 

7월 13일 캐리어하청노조가 석 달 전에 제기한 불법파견 진정의 결과로 캐리어 관리이사와 하청업체 대표가 법규 위반으로 구속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하청노동자 102명이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조합원들은 정규직화에서 배제되는 등 하청노조가 확대되는 계기는 되지 못했다.38) 캐리어하청노조는 이후에도 2년 넘게 투쟁을 이어갔지만 결국 2004년 1월 4일 회사와 “10억 손배 취소, 정규직 입사 후 집행유예를 받아 해고된 4인의 복직, 끝까지 투쟁한 조합원에게 일부 위로급 지급”에 합의하고 투쟁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캐리어 투쟁은 하청노조 건설 초기에 정규직 운동질서의 지원이 중요하며 그러한 지원이 있을 때 하청노동자들의 대규모 조직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준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2001년 12월, 기아차 광주공장에서 하청노조가 건설되었다. 광주공장은 아시아자동차 시절 하청노동자 1,400여 명 전원을 해고했으나 기아차로 통합되고 물량이 늘어나면서 다시 비정규직을 투입하기 시작했다.39) 광주공장에서 하청노동자가 급속히 늘어나자 2000년경부터 지역 활동가들이 사내하청으로 현장에 취업하여 비밀리에 모임을 구성하고 노조 건설을 준비했다.
 

2001년 초, 같은 지역에서 벌어진 캐리어하청노조의 투쟁을 목도한 회사는 하청노조 건설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하청 활동가 2인을 적발하여 해고했다. 그리고 하청계약 기간을 1년에서 3개월로 변경하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업체들을 미리 계약해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동안 비정규직 투입을 용인하며 하청 증가에 공헌해 온 정규직노조는 이런 상황에도 아무런 대응조치를 하지 않았다.40) 7월 캐리어에서 2년 이상 근무자들이 정규직화 되자 회사는 사내하청에 대한 대량해고 방침을 세웠고, 이를 접한 하청 활동가들은 노조 건설을 결의했다. 11월 말 회사는 7개 하청업체 소속 하청노동자 401명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한다. 12월 1일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 사무실에서 기아자동차사내하청노동조합이 창립되었다.
 

하청노조는 설립 직후 정규직노조에 “사무실 공동사용, 하청노조 현장 순회 시 보호, 투쟁기금 지원, 하청 조직화” 등의 요구를 전달했다. 10월에 정규직노조 집행부가 현장파로 교체되었지만, 하청노조의 요구는 12월 7일 개최된 정규직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모두 부결되었다.41) 반면 회사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정서를 이용해 하청 해고는 정규직 고용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선동하여 정규직노조의 연대를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청노조의 초기 조직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12월 31일부로 하청노동자 401명은 전원 정리해고 되어 공장을 떠났다.
 

하지만 이것이 무리한 조치였다는 것은 곧 드러났다. 인원부족으로 조립라인이 중단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1월 3일 회사와 정규직 노조는 인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하청을 더 늘리지 않는 대신 정규직을 50명 추가 채용하고 이중 절반을 정리해고자들로 충원할 것을 합의했다. 하청노조는 정리해고자 401명의 전원 복직 등을 요구하며 1월 9일 ‘기만적인 정리해고 규탄 및 고용보장을 위한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이는 지역연대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4월 12일 회사와 정규직노조는 남은 하청노동자 526명 가운데 130명을 정규직화하고 300명을 계약직으로 직접고용하며 남은 96명은 직접 생산라인에서 간접부서로 전환배치 하는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대신 6개월 계약직과 실습생 도입을 합의해 280명의 비정규직이 새로 충원되었다.
 

하청노조는 4.12 합의에서 정규직이나 계약직으로 전환되지 못한 하청노동자 96명의 고용보장과 해고 조합원 6인의 복직, 신규 투입된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마련 등을 걸고 천막농성을 계속했다. 하청노조는 임단협 시기에 간부 2인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는 등 헌신적으로 투쟁했지만, 비정규직 관련 단협 합의에 대한 하청노조의 공개적인 비판, 불법사찰 문건 폭로시기에 대한 이견 등으로 정규직노조와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하청노조가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내고 비정규직에 대한 불법 사찰 문건42)을 폭로하면서 회사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으며, 8월 사내하청 문제 해결을 위해 회사·정규직노조·하청노조의 3자 대표자회의가 구성되었다.
 

11월 20일, 3자 회의를 통해 해고 조합원 2인을 직접 고용하고 남은 3인의 조합원에 대해서는 2004년 5월에 다시 논의한다는 합의에 도달하면서 하청노조는 1년 가까이 유지하던 천막농성을 마무리했다. 2004년 7월, 생산부문의 남은 계약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기로 하는 노사 합의가 이루어졌고,43) 9월 해고자 2인의 정규직 채용이 합의되면서 기아차 광주공장에서 사내하청 문제는 사실상 종결되었다.44)
 

기아차광주사내하청노조의 투쟁은 상당수의 하청노동자들을 정규직이나 직접고용으로 전환시켜 공장 내 비정규직 확대를 크게 제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45) 그러나 하청노조가 대중적 기반을 잡는데 실패하면서 노숙농성, 단식농성 등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 정규직노조를 강제하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며 비정규직 주체를 강화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그 결과 일부 정규직화 이후에도 광주공장에서 비정규직은 다양한 형태로 존속되었지만 하청노조는 더 이상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는 향후 보다 대중적인 하청노조 투쟁이 전개되는 시기에 나타날 문제들을 선행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각주> -------------
 

32) 상용직·일용직·임시직은 통계청에서 사용하는 고용기간을 기준으로 한 고용분류로 상용직은 1년 이상, 임시직은 1년 미만 1개월 이상, 일용직은 1개월 미만의 고용관계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99년 4월 말 통계청에서 상용직이 처음으로 50% 이하로 떨어졌다고 발표하자 많은 언론들이 상용직을 정규직과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하여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을 넘었다고 보도했다. (99년 6월 1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정규직노동자 절반 이하로”) 이후 정부는 고용기간이 아니라 실제 근무 계속 가능성을 기준으로 독자적인 비정규직 통계를 도입하여 임시·일용직에서 상당부분을 비정규직 수치에서 덜어내 통계상 비정규직 수치를 크게 줄였다. 2016년 8월 현재 통계청은 비정규직노동자를 전체 임금노동자 1,963만 명 가운데 32.8%인 644만 명(32.8%)이라고 발표했다. 

33) 98년 노동법 개정을 통해 기존의 노사협의회법이 근로자참가제(‘근로자의 참여 및 협력증진에 대한 법률’)로 강화되었다. 이 법은 30이상 사업장에 노사협의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협의권을 부여했는데, 대공장에서 고용안정위원회나 노사공동위원회의 같은 회의체의 구성 근거는 바로 이것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차 단협은 “신기술 도입, 신차종 개발, 작업공정 개선, 사업의 확장, 합병, 공장이전” 등의 사안을 노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의 의결하도록 하고 있다. 

34) 맨아워(M/H) 협상은 노사공동위원회 같은 노사협의체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협상이다. 맨아워(Man Hour)란 3년 이상의 숙련자가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작업분량을 뜻하는데, 자동차 산업에서 생산인력과 생산시간·임금수준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때문에 “신기술 도입, 신차종 개발, 작업공정 개선, 사업의 확장, 합병, 공장이전” 등의 변화는 대부분 맨아워 협상을 수반한다. 노사공동위원회는 통상 공장·부서 단위로 구성되고 분기별로 열리는데, 최종합의는 노동조합 집행부가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지만 실질적인 협상권은 공장·부서별 대의원회에서 선임된 대의원들이 갖고 있다. 

35) 생산직 노동자 300여명 전원이 사내하청으로 채워진 사업장이었다. 

36) 당시 외부적으로 정규직 운동에서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한 모범사례로 널리 알려졌으나 노조 선거 국면에서 하청노동자들의 문제를 이슈화하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37) 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지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비정규직 투쟁 평가 자료집」

38) 구속 사태가 벌어지자 캐리어 사측은 7월 18일 “2년 이상 근무한 74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전격 발표했지만 하청노조와 대화는 전혀 없었다. 이후 한 달 정도 기간 동안 102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채용됐지만, 모두 2년 이상 근무자로 하청노조 투쟁에 적극 참여한 2년 미만 하청노동자들은 배제되었다. (조돈문, <비정규직 주체형성과 전략적 선택>, 매일노동뉴스)

39) 2001년 후반, 광주공장에는 18개 하청업체에 소속된 사내하청노동자 92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하청노동자들은 2001년 기준으로 평균 기본금 56만원(시급 2,366원), 상여금 400%의 임금수준으로 잔업, 특근을 포함하여 월 평균 75만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저임금에 시달렸다. 이는 연봉을 기준으로 정규직 대비 약 3배가 차이나는 액수였다. 또한 평균 근속기간도 1년이 넘지 못할 정도로 이직률이 높았다.”(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지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비정규직 투쟁 평가 자료집」)

40) 2000년 11월 광주공장에서는 비정규직 투입을 정규직 대비 15%로 상한선을 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같은 해 7월 현대차의 16.9% ‘완전고용합의’처럼 비정규직 확산을 오히려 묵인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비정규직 탄압에 대한 침묵에 비판이 일자 정규직노조 집행부는 캐리어 투쟁을 반면교사 삼아 무리한 비정규직 사업보다는 하청노동자에 대한 “처우개선투쟁”을 우선 전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41) 이전 기아차노조 15대 집행부는 NL 성향의 현장조직 기노회(기아자동차노동자회)였고, 2001년 10월 1일 임기를 시작한 16대 집행부는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소속 현장추(이후 화성·소하리의 현장조직과 ‘현장의 힘’으로 통합)였다.

42) 회사는 2001년 2월 비정규직 조직화 원천 봉쇄를 위해 “비정규직 노조 설립 관련 관리 방안”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문건에 따르면 회사는 각 용역업체에 프락치를 2명 씩 침투, 하청노동자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문제 인물을 퇴출시키는 등 노조 건설을 최대한 사전에 차단하고 하려고 했다. 이 문건은 5월에 입수되었으나 발표 시기를 놓고 임단협 중에 공개를 부담스러워 한 정규직노조와 갈등이 표출되었다. 이 문건은 임단협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른 7월 22일 시민대책위를 통해 발표되었다. 

43) 2004년 7월 회사가 노조의 비정규직 관련별도 요구사항을 수용하면서 생산부문의 계약직에 대해서는 계약만료 시점에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이후 계약직 채용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000여 명의 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광주공장에서는 생산부문 계약직이 사라지게 되었다. 

44) 2004년 5월이 되자 처음에 회사는 약속과 달리 3인에 대한 복직협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하청노조가 다시 노숙, 천막농성, 단식농성 등 투쟁에 나서자, 결국 2004년 9월 24일 남은 해고 조합원 3인 중 2인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사내하청 문제는 모두 종결된 것으로 한다”는 최종합의를 했다. 

45) 기아차 광주공장에서는 2004년 7월 회사가 노조의 비정규직 관련별도 요구사항을 수용하면서 생산부문의 계약직에 대해서는 계약만료 시점에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이후 계약직 채용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000여 명의 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광주공장에서는 생산부문 계약직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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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2 07:45 2017/05/12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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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5/05 17:1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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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현대자동차 구조조정 분쇄투쟁. 이 당시에도 많은 하청노동자들이 소리소문없이 잘려나갔다.


이태영


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등장 (1996~2002년)

(1)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의 결성 (1996~1997년)

(2) 한라중공업 하청노조 건설 (1999년)

(3) 전국모임과 한라하청 투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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⑵ 한라중공업 하청노조 건설 (1999년)


99년 3월 29일, 금속대공장 최초의 비정규직노조로 알려진 한라중공업하청노동조합(이하 ‘한라하청노조’)이 건설되었다. 노조를 건설한 주체는 전국모임 회원 2인과 지역 활동가 1인, 짧은 현장 활동을 통해 조직된 현장노동자 1인이었다. 활동가들이 현장에 들어간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조직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서둘러 노조를 건설한 것은 당시 1000명 정도 남아있던 하청노동자들에게 대량 해고가 임박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19)
 
엄밀히 말하자면 한라하청노조가 최초의 대공장 사내하청노조는 아니다. 87년 노동자 투쟁의 영향으로 포항제철을 비롯한 몇 개의 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조가 만들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노조들은 한라하청노조와 달리 하청업체의 기업노조라는 형태를 취했으며, 전노협에 대한 탄압 속에서 90년대 초반 사멸했다.20) 하지만 한라하청노조는 최초라는 타이틀 보다 이후 대공장 비정규직노조들의 원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전국모임과 한라하청노조 건설 주체들은 앞서 존재했던 하청노동자들의 노조들과 달리 하청업체가 아니라 원청 대자본을 대상으로 하는 대공장에 고용된 비정규직노동자 전체를 조직하는 노조를 구상했다. 그래서 노조 명칭에 원청 자본인 ‘한라중공업’을 명시했지만, 실제로는 공장부지 내 정규직을 제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전부를 가입대상으로 하는 지역노조 형식으로 규약을 만들었다.21) 
담당 기관인 영암군청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노조 설립필증 교부를 주저했으나, 하청노조 간부들이 군청에 들어가 항의농성을 벌인 끝에 창립총회 이틀만인 3월 31일 설립필증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건설된 거의 모든 제조업 하청노조들은 한라하청노조 규약을 기본 골격으로 삼았다.22)

 
한라중공업에서 하청노조를 건설하기로 계획한 것은 98년 10월 정규직노조에 전투적인 집행부가 들어선 것도 한 이유였다. 98년 구조조정을 앞두고 현대차, 기아차, 대우차, 한라중공업 등 주요 대공장에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소속 현장조직이 노조 지도부로 당선되었다. 그 중에서도 한라중공업의 권성원 집행부는 가장 전투적인 집행부로 꼽혔다. 그러나 실제 노조 건투 과정에서 한라하청노조는 정규직노조의 협조를 거의 얻지 못했다. 


99년 3월 29일 하청노조 건설 주체들은 “체불임금 완전청산”, “무급휴직 철폐” 등을 핵심요구로 내세우며 한라중공업 현장에서 기습적으로 창립총회를 열었다. 하청노조 간부들은 현장 내의 하청노동자들에게 가입원서를 배포하고, 정규직 노조 사무실에 들어가 임시 사무실로 삼고 하청노동자들의 가입을 기대했다. 그러나 다음 날 하청업체 사장들과 관리자들 70여 명이 사무실에 쳐들어 와서 하청노조 간부 네 사람을 납치해서 공장 밖으로 끌어내고 이들이 소속된 업체들을 모두 계약해지함으로써 집단적인 현장조직화의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개인으로 연대하는 정규직 활동가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수는 적었고 하청노조 간부들에 대한 방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결과였다. 하청노조는 이후 공장 출입조차 금지당한 채 공장 밖 농성투쟁으로 활동을 유지했다.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이 우선 정리 대상이 되어 대부분 공장을 떠나는 과정에서도 현장 출입이 금지된 하청노조 활동가들은 이들을 조직하지 못하고 더욱 고립되었다.23)
 

99년 8월 18일, 정규직노조가 마침내 구조조정에 맞서 전면적인 공장 점거파업에 들어갔다. 한라하청노조는 정규직노조 투쟁요구에 하청노조의 요구도 삽입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정규직노조는 현실적으로 책임질 수 없으니 교섭과정에서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는 미온적인 입장을 밝혔다.24) 그러나 72일 간 계속된 대공장 노동운동 사상 가장 전투적인 파업 중 하나였던 이 투쟁에서 하청노조의 요구 삽입은커녕 원하청 공동투쟁의 단초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9월 7일 한라중공업 노조는 모든 출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옥쇄 파업에 돌입했다. 출입문 밖에 농성장을 유지하고 있던 하청노조도 농성장을 공장 안으로 옮기고자 현장 진입을 시도했으나, 사측에게 교섭 결렬 명분을 줄 것을 우려한 정규직노조 간부와 실랑이가 벌어진 끝에 좌절되었다. 정규직노조의 공장점거 파업이 진행 중인데도 하청노조의 공장 내 진입이 가로막히고 말았던 것이다. 

하청노조 투쟁의 연대단위들을 중심으로 온라인상에서 공개적으로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으나 이 사태에 대해 운동진영은 대부분 침묵했다.25) 
PC 통신상의 논란이 확대되자 연대 활동가들과 정규직노조 위원장의 면담이 주선되어 파업 프로그램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교육을 배치하겠다는 등 몇 가지 약속을 받았지만 얼마 뒤 파업이 끝나면서 이는 흐지부지 되었다. 한라중공업노조가 벌인 72일 간의 공장점거 파업은 1998~2000년 벌어진 대공장 구조조정 분쇄 투쟁에서 가장 전투적인 파업이었다. 원하청 공동투쟁의 첫 단추를 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오히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최초의 갈등사례를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⑶ 전국모임과 한라하청 투쟁의 의미


전국모임은 금속대공장 하청 활동가들의 조직인 동시에 ‘비정규직’을 명칭으로 내건 최초의 운동단체였다. 한국에서 비정규직이란 용어는 90년대 초에 최초로 등장했다. 92년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비정규노동에 관한 연구>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문서는 자본의 입장에서 90년대 초에 나타난 제조업 노동력 부족 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비정규 고용의 활용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취지로 씌어졌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비정규노동”이라는 개념을 정규직이 아닌 나머지라는 반정립적·잔여적·포괄적인 개념으로 제시함으로써 이후 한국에서의 특수한 비정규직 개념화에 단초를 제공했다.26) 북미나 유럽에서는 2000년대 들어 ‘프레카리아트(precariat)’ 같은 용어가 등장하기 전에는 종신 고용된 전일제 노동자들에 대당하여 고용이 불안한 노동자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합의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27) 한국에서 특수하게 나타나는 ‘비정규직 노동’이라는 일반적 개념화는 80년대 중반의 호황과 특히 87년 노동자투쟁을 거치며 형성된 고용안정이 90년대 들어 급속히 붕괴되는 것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28)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90년대 초부터 한국 정부와 노동유연화의 도입과 확대를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90년 상공부가 발표한 「노동관계법 검토안」이라는 자료는 “87년 노동법 개정 과정에서 폐지된 변형근로제의 재도입, 법정 노동시간 연장 등 개별 근로관계에서 유연화를 다시금 제고하는 내용”을 이미 포함하고 있었으며, 93년부터 정부는 파견법 제정을 노동법 개정의 주요 의제로 제기하기 시작했다.29)
 

이러한 정책기조와 함께 90년대 중반 경기가 후퇴 국면으로 접어들자 제조업·비제조업을 막론하고 비정규직이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서비스업에서는 시설관리 등 기존 직접고용이었던 분야들이 상당 부문 용역업체로 외주화 되었다. 제조업에서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줄어들었던 사내하청이 다시 확대되었다. 96년 초,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은 「비정규노동자의 실태와 노동운동」이라는 130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문서는 파견·사내하청·시간제 등 비정규직 고용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으며 노조 운동의 조직화가 시급하다고 진단했다.30)
 

이런 영향으로 90년대 중반부터 비정규직이라는 아직은 낯선 용어가 선도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노동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 차츰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는 전국모임이 ‘비정규직’이라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배경이 되었다.
 

대개 금속대공장을 활동공간으로 삼는 현장 지향성이 강한 전투적 활동가들이었던 전국모임 활동가들은 비정규직 증가를 동시대 한국 자본주의, 나아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인식했다.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를 단순히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라는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에 반대하는 전투적인 투쟁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노동운동의 선도부분인 금속대공장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러한 운동의 최전선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국모임의 결성이 전국회의에서 이루어진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은 96년 총파업 이후 대공장에서 등장한 주요한 경향인 전투적 현장주의의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했다. 전국모임은 2000년에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 가입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 경향적 친화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90년대 중반을 거치며 현장조직으로 결집한 대공장의 전투적 활동가들은 자본의 신경영전략과 구조조정에 맞서 “현장권력 쟁취”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현장조직 운동은 흔히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으로 알려진 민주노총 주류의 사회개혁투쟁 캠페인에 맞서 현장에서의 일상적인 노자대립과 생존권 투쟁에 직접 기초한 전투적인 투쟁으로 노조운동을 혁신하려 했으며, 90년대 말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건설을 통해 전국적 질서로 결집했다.31)
 

전국모임 역시 형식주의·조합주의를 반대하고 현장에서 공동투쟁을 통한 실질적인 계급적 단결을 주장했다는 면에서 이러한 전투적 현장주의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비정규직 확대의 원흉인 대자본에 대해 현장에서 전선을 치고 함께 싸운다는 개념으로 “원하청 공동투쟁”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전국모임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자본에 의한 구조조정이라는 정세 속에서 현장으로부터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공세를 저지한다는 의미에서 “비정규직 철폐”, “원하청 공동투쟁”을 중심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장 전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원청 자본을 대상으로 투쟁하는 대공장 비정규직노조의 원형을 제공했다.
 

한라하청노조 건설 투쟁의 실패 이후 제조업 부문에서 비정규직노조 건설시도가 잇따라 실패하고 2000·2001년 수도권 비제조업 부문에서 비정규직 투쟁이 분출하던 시기에 오히려 무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전국모임은 2002년 경 사실상 해체되었다. 하지만 전국모임 회원들은 이후에도 기아차·현대차·현대중공업·GM대우 등 주요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건설 투쟁에 참여하며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각주>-----------------
 

19) 전라남도 영암에 소재한 한라중공업은 97년 12월 모기업 한라그룹의 경영악화로 부도를 내고 98년 3월 회사정리절차 개시결정을 받았다. 부도 이후 희망퇴직과 임금삭감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99년 8월 파업 돌입 당시 정규직 조합원은 4000여 명 중 1300명만, 하청노동자들은 4000여 명 중 400명만 남은 상황이었다. 파업 중이던 99년 10월 현대중공업이 한라중공업의 자산 및 부채를 인수하여 삼호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위탁경영을 시작했다. 2002년 위탁경영을 끝내고 현대중공업그룹에 편입되어 현대삼호중공업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20) 손정순, 같은 글. 대부분의 문서들에서 한라하청노조가 최초의 사내하청노조로 언급되는 이유는, 전노협 해체와 민주노총 건설 이후 이 노조들의 존재가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완전히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21) 가입대상 지역에 한라중공업이라고 기입했다. 
 

22) 한라하청노조의 규약은 당시 복수노조 금지규정을 회피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었다. 또 이전처럼 업체노조를 설립할 경우 계약해지나 업체 철수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고민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99년 11월에 건설된 볼보건설기계코리아비정규직노조의 경우에는 모든 조합원이 ‘아림’이라는 한 업체 소속이었다. 창원시청에서 볼보건설기계코리아비정규직노조 이름으로 설립필증은 받아냈지만, 원청 사측은 노조 이름에서 ‘볼보’를 빼지 않으면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조합원들을 압박했다. 결국 아림노조로 이름을 변경했지만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아림노조는 원래 명칭으로 되돌아갔다. 2000년 5월 기아차 부품사인 카스코의 하청업체 ‘동명’ 소속 노동자들이 광주지역금속노조 동명분회를 건설했다. 카스코는 동명을 위장폐업하고 다른 용역업체와 계약을 맺는 것으로 대응했다. 동명분회는 공장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며 계속 투쟁을 이어나갔지만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한라하청노조의 규약이 제조업 하청노조 규약의 모범규약이 된 것은 설립필증을 받는 데 성공했다는 점과 아울러 이러한 경험들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3) 유일한 예외가 99년 6월 한라중공업 내에서 폐기물을 처리하는 업무를 수행하던 서남종합환경 노동자들 16명을 조직한 것이었다. 하청노조의 교섭으로 체불임금과 산재처리 문제는 해결했으나 사측은 곧 노조탈퇴 공작과 계약해지 공격을 가해왔다. 이에 맞서 3개월 동안 투쟁했지만 고용승계는 끝내 이뤄내지 못했다. 파업 돌입 당시까지 한라중공업에 남아있던 하청노동자 400여 명은 9월 3일 전면무급휴가가 실시되며 모두 쫓겨났다. 

24) 당시 한라하청노조의 3대 요구는 “부당노동 행위 근절·체불임금 청산 및 임금 회복·노조활동 및 노동3권 보장 등 하청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할 것, 실직된 지역노동자들을 우선 고용할 것,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었다.

25) 오히려 한라 투쟁의 정세적인 중요성을 이유로 공개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연대단위들을 질책하는 분위기가 더 컸다. 당시 좌파 정치조직 <노동자의 힘>의 한라중공업 투쟁 평가는 이런 인식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비정규직노동자가 증가하고 있고 그 조직화가 중요한 과제임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대공장의 정규직노동자가 대중운동의 주요한 동력이며, 대중운동의 무게중심을 미조직 노동자운동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 통신상에서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정세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태도를 표명하고 여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문제를 결합하는 접근 방식이 아니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라는 점을 과도하게 부각하면서 한라투쟁은 별로 언급하지 않는 모습이 나타났다.” <한라중공업투쟁평가 자료집 – 결코 꺾이지 않은 미완의 투쟁>, 노동자의 힘(준), p.50~51

26)  “비정규노동의 개념은 정규노동과의 대비 속에 비교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채택된 비정규노동의 개념이 없으므로 정규노동의 일반적 특징들을 서술하면서 그것들과의 대비 속에서 비정규노동을 정의하는 것이 현재로서 가능하다. 정규노동의 전형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피고용자의 지위는 고용주와의 관계 속에서 종속적(dependant)이다. 즉 고용주와 피고용자가 계약을 맺으면 피고용자는 고용주의 지시를 수행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② 고용계약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기간을 정하지 않는 상용고이다.

③ 근로시간은 전일제(full-time)이다.

④ 근로일수는 통상노동일에 준한다.

⑤ 임금은 월급으로 지급한다.

⑥ 법과 단체교섭에 의해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고 해고 등으로부터 고용관계의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예: 노동조합, 노사조정위원회 등)가 있다.

⑦ 임금의 수준은 기술과 기업 내 근속연수에 의한다.

⑧ 피고용자의 이해관계는 대표체제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보호받는다.” <비정규노동에 관한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1992)

27)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Workers in a Lean World — Unions in the International Economy, 1997)>의 저자 킴 무디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게다가, 더욱더 혼돈스러운 것은 시간제 노동이나 임시직 노동 등과 같은 것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들의 다양성이다. 미국에서는 이를 ‘임시적(contingent)’이라고 부르고 영국에서는 ‘비전형적(atypical)’ 혹은 ‘반사회적(anti-social)’이라고 부르며, 다른 언어들에서는 다른 단어들을 사용한다.”(킴 무디,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 사회진보연대 옮김, 문화과학사, p.21)

 

28) <비정규노동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상용·비상용(임시고, 일고 포함)의 개념 대신에 정규·비정규노동으로 구분한 이유는 현재 증가하는 각종 새로운 고용형태가 기존의 상용·비상용의 범주 내에 포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고용형태는 고용계약 기간의 장단(長短)만으로 구별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상시고용에 대비되는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기존에 통념적으로 존재해 오던 전형적인(typical) 정규고용형태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비정규노동’으로 정의하려고 한다.”

29)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123

30) 권혜자, <비정규노동자의 실태와 노동운동>,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1996. 1)

31) 대공장의 현장조직은 대공장 민주노조 운동 건설기에 나타난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의 활동가조직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관료화되고 있는 노동조합을 현장에 직접 기초한 투쟁으로 혁신하려고 했던 측면에서 유럽에서 벌어진 직장위원회 운동이나 공장평의회 운동 등 평조합원 운동과 유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 들면서 현장조직은 노조 집권을 위한 공장 내 유사 정당조직으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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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17:11 2017/05/0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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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27 16:19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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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1996년 광주·마창·울산 등지에서 벌어졌던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들과 그것을 계기로 결성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을 출발점으로 본다면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의 역사는 어느새 20년을 훌쩍 넘어섰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처음부터 ‘비정규직 운동’이라는 일반적 운동을 지향하며 등장한 한국의 비정규직 운동은 금속대공장 하청노동자들의 전투적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90년대 후반 대공장의 전투적 현장주의 전통 속에서 등장한 최초의 하청활동가들은 자신들을 전체 비정규직 운동의 일부로 인식했으며 이 운동의 전위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은 어느 사이엔가 부터 완성차 대공장 1차 하청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하 ‘불파투쟁’)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 7월 22일 현대차 울산공장 하청해고자 최병승 활동가에게 하청업체가 아닌 현대차가 실사용주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이후, 현대차 울산·아산·전주공장에서 벌어진 비정규직노조들의 불파투쟁은 지난 몇 년 간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을 규정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들의 수년에 걸친 치열한 투쟁의 결과로 불법파견 판정 범위는 크게 확대되었다.1) 또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2014년과 2016년 두 차례의 불파 합의를 통해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을 포함한 총 6000명의 현대차 하청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 되는 성과도 얻었다.2) 이로 인해 다른 사업장과 다른 산업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불파투쟁을 준비하는 주체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십여 년의 투쟁을 통해 그 성과만큼이나 많은 약점과 한계를 노출한 불파투쟁이 과연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보인다. 
 

불법판정 범위가 확대되면서 대공장에서 사내하청 고용이 줄어들 것은 분명하다. 이미 촉탁계약직 같은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 고용형태가 나타나고 있으며 제조업에서 기존의 하청노조 형태와 다른 새로운 비정규직 투쟁들도 벌어지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지난 20년 동안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을 평가하고 전망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1.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의 등장 (1996~2002)


흔히 비정규직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 전체를 볼 때 정규직이라고 불리는 특정 기한을 정하지 않는 전일제 고용이 중심이 된 시기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에 불과했다. 산업 자본주의 초기에 노동자에 대한 고용보장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20세기로 넘어와서야 중공업과 대규모 공장제도의 발전, 노동조합의 성장 등의 요인이 결합하여 이른바 ‘정규직’이 비로소 중심적인 고용관계로 확립되었다.3)


금속 대공장의 발전이 정규직 고용관계가 안착되는 계기가 된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 대공장의 비정규 고용은 1970년대 중공업과 대규모 공장제가 도입될 때부터 상당한 비중으로 존재했고 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철강과 조선 산업에서는 현재의 사내하청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간접고용이 널리 활용되었다. 1973년 포항제철(현 포스코) 고로가 처음으로 가동을 시작했을 때 이미 ‘협력업체’라고 불리는 사내하청업체 16개에 2,7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었다.4) 현대중공업의 전신인 현대조선소에서는 설립 다음 해인 1974년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화가 추진되는 것에 반발하여 직영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5)


이처럼 한국의 대공장에서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인 비정규직 고용 형태는 사내하청이다. 원래 하청 혹은 하도급이란 생산과정 일부를 다른 업체에 위탁하는 계약 관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원칙상 하청업체는 독자적인 생산시설 혹은 노동과정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자동차·조선·철강·반도체 등 한국의 주요 제조업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 사내하청은 대공장 생산과정에 노동력만 공급하는 단순 인력파견 형태를 띠고 있다.

산업별 하청노동자 현황 (2010년)

업종

점검대상

원청

노동자 수

하청

업체 수

하청

노동자 수

원청대비 비율

자동차

기아, 르노삼성, 현대, 타타대우, GM대우

56,682

146

10,221

18%

조선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한진중공업, 현대중공업, STX조선

53,780

504

51,427

97%

철강

동국제강(포항), 동부제철(아산), 세아베스틸, 포스코, 현대제철

11,924

57

4,677

39%

전자

노키아TMC, 동우화인켐, 삼성전자(탕정), 하이닉스반도체

59,560

40

7,676

13%

정보

통신

동부CNI, 동양시스템즈, 삼성SDS, 한국휴렛팩커드, SK C&C

16,023

40

5,297

33%

합계

29개 기업

197,969

787

79,298

40%

자료: 고용노동부(2010년), 한겨레신문 2011년 4월 20일자에서 재인용


유럽에서 사내하청제도와 유사한 간접고용은 공장제 형성 초기에 널리 나타났다. 노동력을 통제·관리하고 생산과정을 단일하게 조직하는 자본의 능력이 아직 미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공장제의 확립과 함께 한편으로 자본의 노동력 관리 능력이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발전하면서 이런 고용관행은 점차 소멸되었다. 이와 더불어 20세기에 들어서자 대부분의 산업 국가에서 인력파견을 법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과도한 중간착취, 업체들 사이의 뇌물과 협잡, 지역 사회에서 범죄 등 여러 사회 문제들을 빚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조합의 힘이 강한 제조업에서 단순 인력파견은 많은 나라들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었다.6)
 

후발 산업국가인 일본 역시 2차 대전 이후 간접고용을 전근대적인 고용관계로 규정하고 간접고용을 통한 중간착취를 금지하는 노동기준법 및 직업안정법을 제정했다.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법제도를 모방한 한국도 97년 이전까지 원칙적으로는 인력파견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제조업에서는 지금도 금지하고 있다.7) 하지만 일자리를 알선·소개하는 인력 파견 및 용역업은 어느 나라에서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고, 인력파견의 필요성이 관습적으로 널리 인정된 건설·항만 및 일부 서비스 산업 등을 통해 존속되었다. 노동조합 운동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후발 산업국의 경우 제조업에서도 이를 활용하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5~6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구내하청’이나 ‘사외공’으로 불리는 한국의 사내하청과 유사한 위장 인력파견이 조선 및 철강 산업을 중심으로 널리 활용되었다.8)
 

한국은 1973년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선언’ 이래 국가 정책으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일본을 벤치마킹했고, 설비 운용 기술은 물론 노동력 편제와 관리·운용까지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도입했다. 따라서 사내하청제도 같은 하도급으로 위장된 인력파견 방식은 이 과정에서 한국의 철강 및 조선업에 도입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한국의 사내하청 제도에 대해 연구한 손정순에 따르면 한국에서 70년대 대공장의 도입과 함께 등장한 “사내하청노동은 과거 산업화 이전시기부터 존재해 왔던 일용 청부공제 노동이 산업화 과정에서 변용된 것이라기보다 단절적으로 외부로부터 도입, 형성된 측면이” 큰데, “이 시기 중화학 공업의 대공장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내하청 노동은 여타 부분에 널리 활용되어 왔던 임시공과도 다르며, 건설업종이나 부두 하역 업무에서 활용되어 왔던 청부제와도 다른, 현재 금속산업 부문의 사내하청 노동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등장한 것이다.”9) 한편 70년대 말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80년대 한국의 대공업에서 하청계열화가 정책적으로 적극 추진되며 당시 막 대규모 제조업으로 도약하고 있던 자동차 산업10)에서도 하청업체로부터 파견되어 완성차 작업장에 상주하면서 부품의 납품 및 서열11)을 전담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이는 완성차 공장에서도 사내하청이 도입·확대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대공장 형성 초기부터 상당한 비중으로 존재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크게 줄어들었다. 87년 당시 사내하청 직영화·사내하도급제 개선·일용직 처우개선 등이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 노동자들의 주요 요구였다는 것은 분명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사내하청은 정규직화 되어 일시적으로 없어지거나 하청업체들에도 노조가 건설되어 노동조건이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많은 대공장들에 이른바 ‘신경영 전략’이 시행되면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경영 전략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공장에 등장한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 및 파괴 전략에서 벗어나 노조를 인정하는 한편, 아래로부터 조합원들을 포섭하고 장기적으로 노조의 투쟁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정부와 자본은 89년 무렵부터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중소영세사업장 중심으로 조직된 전노협의 경우, 이러한 탄압에 의해 많은 사업장에서 노조가 무너지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대공장에서도 정부와 자본의 강경한 노동탄압은 90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 등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의 탄압은 대공장에서 민주노조의 기세를 꺾어놓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자본은 방향을 선회하여 대공장 민주노조의 존재를 인정하고 단협을 정례화 하는 등 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포섭을 시도하는 한편, 소사장제 등을 통해 직접 관리하던 생산·라인 공정을 분리하여 하도급화 하는 방식으로 사내하청노동자들을 다시 늘리기 시작했다.12) “이처럼 89~90년부터 소사장제로 시작된 자본의 신경영 전략의 확산 속에서 … 현대중공업 및 현대자동차 등에서도 작업장 내 사내하청 노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현대중공업을 포함한 조선업종의 경우 90~96년 기간 동안 전체 조선업종 생산 기능직의 34%를 사내하청 노동이 차지할 정도로 증가하면서, 조선업종의 직영 기능직을 대체해 갔으며, 대부분의 금속 대공장에서 신경영 전략이 본격화한 93년도 이후부터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13)
 

때문에 흔히 비정규직 확산의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 되는 IMF 사태와 98·99년의 구조조정 공격 이전에도 조선·철강·자동차 등 금속대공장에는 상당한 규모의 하청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조선소에서는 90년대 말 하청노동자들의 비율이 전체 현장 노동자의 40%를 넘어섰다. 완성차 공장에서도 현재 기아차 광주공장인 아시아자동차에서 97년 16개 업체에 하청노동자 1400명이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현대자동차도 구조조정 시기이던 98·99년에 정규직에 대비한 하청노동자들의 비율이 이미 20%에 육박하고 있었다.
 

⑴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의 결성 (1996~1997년)
 

90년대 중반을 거치며 금속대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정규직과 노동조건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87년 이전에도 정규직과 하청노동자들은 물론 처우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었다.14) 일의 종류에 따라 하청의 임금이 더 높은 경우도 꽤 있었다. 90년대 이후 정규직과 하청의 노동조건이 벌어지게 된 것은 노동조합의 존재 여부에서 기인한 면이 컸다.
 

90년대를 거치며 자동차·조선 산업의 거의 모든 대공장에 민주노조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하청노동자들은 기업별로 조직된 정규직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다. 87년 투쟁의 여파로 포항제철 등 몇 군데에서 사내하청업체 노조가 만들어졌지만, 전노협 소속이었던 이 노조들은 90년대 초 대대적인 탄압으로 존속되지 못했다. 반면 금속대공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협상과 단체협상의 제도화를 통해 노동조건을 착실하게 개선해나갔다. 하청노동자들은 이러한 노조의 울타리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며, 이는 고스란히 노동조건의 격차로 나타났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90년대 중반 몇몇 대공장에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졌다.
 

96년 6월 마산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서 같은 하청업체 소속 하청노동자 60여 명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투쟁을 진행했다. 두 달 동안 투쟁했으나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 거의 전부가 해고되며 패배로 끝났다.
 

같은 해 10·11월에는 현대중공업에서 상선이라는 하청업체 노동자 70명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 투쟁에 나섰다. 하청노동자에게도 단협을 적용하라는 요구에서 출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규직과 차별적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투쟁이었다. 10일 파업 끝에 시급 인상, 격려금 등의 성과를 냈으나 노조 건설이나 가입 같은 조직적인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97년 8월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 광주공장) 용역하청노동자 200여명이 집단 해고되었다. 이들은 체불 임금과 용역문제 해결을 위해 아시아자동차 용역노동자 대책위원회(이하 ‘아시아용역대책위’)를 구성해서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정규직노조와 지역 노동·시민 단체들이 “회사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었고, 정규직 조합원들 사이에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우선 해고와 체불임금에 대해 “회사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15)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용역대책위는 노조 설립을 포기하고 퇴직금과 체불임금을 받아내는 선에서 투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16)
 

한국중공업 투쟁과 아시아용역대책위의 투쟁은 공장에 위장 취업한 활동가들이 주도했다. 현대중공업 투쟁은 자생적으로 일어난 투쟁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현장에 하청노동자로 취업해 있던 활동가들이 현대중공업 외주노동자모임을 조직했다.
 

최초의 하청 활동가들은 대부분 급진적 정파운동과 연결된 전투적인 활동가들이었다. 96·97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장에 잠복하고 있던 이들이 스스로를 하청 활동가로 규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17) 이 시기 형성되고 있던 대공장의 선진노동자 운동질서는 이들에게 결집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97년 9월 대전 가톨릭 농민회관에서 진행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 울산 현대중공업 외주노동자모임과 아시아자동차 용역노동자 대책위원회 활동가들이 만나 상호교류를 약속했다. 그 결과 97년 11월 9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사내하청·파견노동자가 전국의 노동형제에게 드리는 긴급제안서>라는 유인물을 공동으로 발행하여 배포했다.
 

이 유인물을 본 몇몇 지역 활동가들이 더 결합하고 몇 차례의 논의를 거쳐 98년 1월 ‘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준비모임’이 발족했다. 이후 이 모임은 ‘비정규직노동자전국모임’으로 명칭을 개정했다가 다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이하 ‘전국모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초 전국모임의 설립 목적은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받아 안도록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전국모임의 초기 활동은 조직 노동자들과 민주노총 및 그 산하 연맹들에 비정규직노동자의 조직화의 중요성을 알리고 이에 대해 공동의 대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이슈 파이팅 활동이 중심이었다.18) 98년 이갑용 전 현대중공업노조위원장이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당선되면서 비정규·미조직 조직화를 전담할 조직 2국이 설립되고, 민주노총에서도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이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애초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자 98년 말 전국모임은 향후 모임의 전망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이 논의에 제출된 한 입장은 전국모임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하는 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자기 전망으로 잡아야 하며,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특수한 조건, 즉 고립성·분산성·유동성 때문에 초기업적인 비정규직일반노조 건설을 목표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 지역에서 지역 비정규직노조를 만들고 이를 기초로 전국적인 비정규직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국모임의 회원 다수는 이런 주장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를 심화시키는 형식주의·조합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으며 현장에서 원하청 공동투쟁을 우선적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의 결과 비정규직노조 안은 철회되었고, 대신 전국모임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하는 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로부터 전남 목포‧영암 지역에 소재한 조선사업장인 한라중공업(현 삼호중공업)에서 하청노조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비정규직노동자의 투쟁이 정규직노동자들과 함께 대공장 자본을 타격하는 공동투쟁을 지향해야 한다는 전국모임 회원 다수의 경향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전국모임의 첫 번째 비정규직노조 건설 사업은 목포‧영암지역비정규직노조가 아니라 최초의 대공장 비정규직노조인 한라중공업하청노동조합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계속)

 

<각주>----

 

1) 2014년 9월 18·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현대차 하청노동자 1,247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선고는 2010년의 대법원 판결보다 더욱 확대된 사실상 현대차에 근무하는 모든 하청노동자가 불법파견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 9월 25일 기아차 하청노동자 499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선고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동일한 취지의 후속 판례가 계속 등장하고 있어 적어도 자동차산업에서 사내하청의 불법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2) 2014년 8월 18일 현대차와 정규직노조, 현대차 아산공장사내하청지회, 전주공장사내하청지회가 맺은 불파 합의(소위 ‘8·18 합의’)는 현대차가 여전히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이미 채용된 2000명을 포함 4000명의 하청노동자들만을 정규직 ‘전환’이 아닌 정규직으로 신규채용 하는 것을 정당화함으로써 서울중앙지법의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판결을 앞두고 현대차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또 체결권자인 금속노조가 빠진 상태에서 합의가 이루어져 합법적 효력도 논란이 되었다. 2016년 3월 21일 현대차와 현대차비정규직지회(울산공장)이 체결한 불파합의 역시 ‘8·18 합의’의 문제점들이 극복되지 않은데다 합의 체결을 앞두고 비정규직지회가 신규 조합원 가입을 거부하면서 많은 논란을 낳았다. 

 

3) 이태영, 「비정규직 운동 : 조합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사회주의노동자> 4호 (2006.8)

4) 당시 사무직을 포함한 포항제철 전체 정규직의 수는 3,793명으로 정규직 대비 하청노동자의 비율은 이미 69%에 이르렀다. (손정순, 「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2009. 9. 9))

 

5)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 논문(2009. 6) 

6) “본질적으로 ‘사람을 사고 파는’ 이러한 인력공급업 성격의 간접고용에 대한 법·제도적 규제는 이후 1919년 ILO 설립 당시의 핵심적 원칙이 되었다.” (손정순, 「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7) 따라서 제조업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사내하청은 산업과 업종을 불문하고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이는 실제로 불법파견 진정 이후 대다수의 판례가 증명하고 있다. 불법파견 입증이 어렵다는 조선 산업에서도 2010년 3월 노조 활동으로 해고당한 현대중공업하청노조 이승열 전 사무국장에 대해 “현대중공업은 사내하청 노동자의 사용자”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8) 이하 사내하청의 역사와 한국에서 도입과정에 대한 서술은 손정순의 논문들(「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을 요약한 것이다. 

 

9)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88

 

10)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88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88

 

11) 서열이란 부품사로부터 공급된 부품들을 완성차 라인에서 조립하기 용이하게 배치해 주는 작업을 말한다. 

 

12) “90년대 초에 주로 활용된 (소사장제의 — 인용자) 방식은 ‘기존 공정을 분리 → 기존 공정(라인)의 책임자인 조·반장 퇴사 후 신규 사업주로 등록 → 하도급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경우 기존 공정(라인)의 생산 기능직까지도 해당 사업주 소속으로 이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사장제의 경우, 대부분 원래 담당하던 업무를 소속 사업체만 변경된 채 수행하기에 전형적인 노무 용역만을 제공하는 사내하청 업체화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손정순, 같은 글, p.145)

 

13) 손정순, 같은 글, p.148

 

14) 현대중공업의 경우에도 87년 이전에는 “내주하청, 임시일용공 등으로 통칭되는 비정규직노동자와 정규직노동자의 노동조건, 작업장 내 지위 등에 있어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손정순, 같은 글, p.141) “그때(87년 이전 시기)는 다른 거라고는 월급봉투 색깔밖에 없었어요. 작업 지시도 현중에서 했고, 승진, 근태 모든 게 직영하고 똑같았고, 다 현중에서 했죠. … 실제로 내주 사람들(사내하청 소속 노동자)하고 직영하고 지금처럼 거리감이라든가 그런 거도 전혀 없었고요. 그냥 다 현중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02. 10월 현대중공업 정규직노동자 인터뷰 자료, 같은 글, p.111에서 재인용)

 

15) 당시 아시아차 노조와 지역 노동·시민단체들은 대부분 ‘아시아자동차 살리기 범시민대책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16) 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지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비정규직 투쟁 평가 자료집」

 

17) 대략 95년경부터 금속대공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길이 극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전에 안정적인 정규직 취업 루트로 여겨졌던 공장 부속 직업훈련원이 더 이상 정규직 입사로 직결되지 않게 되었다. 직업훈련원을 수료해도 직영이 아닌 하청으로 채용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문에 90년대 중반 이후 금속대공장에 취업하고자 하는 활동가들은 하청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대개 당시 대공장에 형성돼 있던 현장조직 같은 선진노동자 운동질서에 개입하거나 활동을 드러낼 계기를 엿보며 잠복하고 있었을 뿐, 아직 스스로를 ‘하청 활동가’로 자각하진 못하고 있었다.

 

18) 사회진보연대,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위기: 불안정노동 연구>,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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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18 19:08

[붉은글씨 5호][서평] 추방된 자들의 신세계

어슐러 K. 르귄, <빼앗긴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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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인|가사노동자

 

<빼앗긴 자들>은 커트 보네거트나 필립 K. 딕의 소설들과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는 SF 소설이며, 또한 많은 이 장르의 소설들과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걸작이다. 이 소설은 어슐러 K. 르귄의 헤인(Hein)연대기들 중 하나다. 오랜 옛날 헤인이라는 문명은 우주 곳곳으로 흩어져 식민지를 개척하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헤인 문명은 멸망하고 인류는 자신들이 정착한 행성에서 각기 (정치·사회·경제적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서로 다르게 발전한다. 헤인 연대기는 오랜 세월이 지나 은하계 사이를 여행할 정도로 문명을 회복한 인류가 우주 곳곳에 고립되어 발전하고 있는 다른 인류들을 찾아 교류하는 것을 중심 이야기 줄기로 가져간다.
 

<빼앗긴 자들>은 행성 우라스와 그 위성 아나레스를 배경으로 한다. 행성 우라스의 사회체제는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와 유사하다. 이 사회는 차이와 차별(부자와 빈자, 자본가와 노동자, 남성과 여성, 그리고 기타  등등)을 기초로 세워진 사회이다. 수 백 년 전 행성 우라스에는 오도라는 여성 사상가가 나타나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사상을 퍼트린다. 오도니언이라고 불리는 오도주의자들은 박해를 피해 척박한 위성 아나레스로 떠나 자신들의 이념에 따라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한다.


아나레스에서 태어난 물리학자 쉐벡은 동시성 이론이란 새로운 이론을 수립하지만, 먹고살기도 힘든 아나레스 사회에서 그의 이론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쉐벡은 오히려 우라스에서 자신의 이론이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뼛속까지 오도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교류를 위해 우라스로 떠날 결심을 한다. 소설은 쉐벡이 우라스에서 겪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빼앗긴 자들>의 원제는 “The Dispossessed”이다. 이 제목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첫째는 추방된 자들이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소유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세 번째는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의 영어제목 “the possessed”의 패러디로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바쿠닌의 제자인 무정부주의 혁명가 네차예프가 조직의 배신자를 살해한 유명한 사건을 보고 <악령>을 썼다. 그에게 당시 러시아 청년들을 사로잡고 있던 혁명사상은 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possessed”라는 것은 귀신들린 자들,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악령>으로 번역되었다. <악령>은 귀신들린 돼지들이 미쳐 내달리다가 강물에 빠져죽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고, 혁명사상에 경도된 젊은이들이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죽이다가 모두 파멸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the dispossessed”라는 원제는 혁명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귀신에 들린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들, 깨어있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사실 <빼앗긴 자들>이라는 한국어 번역은 그다지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오도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은유로 생각되지만, 사실 마르크스주의라기보다는 19세기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나 프루동, 바쿠닌 류의 아나키즘과 더 유사해 보이며, 르귄도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나레스와 우라스의 관계가 미국과 소련의 비유로도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자본주의 사회와 어디 먼 오지에서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와 더 유사하다. 우라스가 사실 아나레스를 별로 위협적으로 느끼지도 않는다는 것을 볼 때 더 그렇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훌륭한 점은 1960~70년대 급진주의가 제기한 새로운 문제들을 받아들인 사회주의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었다는 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등장한 정치적 급진주의 운동과 유토피아주의를 계승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전반적 틀은 1848년 혁명 직전 <공산주의자 당 선언>으로 처음 구체화되었는데, 이는 자신이 빚지고 있는 전통들과 여전히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략 1880년대 말에서 90년대 마르크스주의가 실제로 현실 노동운동과 결합해 들어가면서 그러한 급진적 이상주의의 상당부분은 삭감되었다.
 

마르크스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며 대중정당이 된 독일 사민당은 가족, 여성문제 있어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의 당면 실천과제는 무엇보다도 보통선거제와 8시간 노동제의 쟁취였다. 독일 사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의 해설에서 강령 전문의 작성자이자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을 주도하는 이론가였던 카우츠키는 국가 사회주의적 색채를 분명히 했고, 가족의 유지, 여성노동 금지 등을 정당화했다. 또한 보통선거제에서도 독일 사민당과 제2 인터내셔널은 남성들만의 보통선거제 확대를 받아들였다. 이는 초기부터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운동을 분리시키는 주요한 쟁점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가족은 점차 사멸할 것이며 그 기초는 자본주의의 기계제 공업의 발전으로 여성/아동과 남성 성인의 육체능력의 간극이 좁혀짐에 따라 사회성원 전체의 노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원칙적으로 여성/아동의 노동참여를 반대하지 않았다. 국가에 대해서도 단지 과도적 형태의 준국가를 인정했을 뿐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사멸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무정부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말의 제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적 보수화는 1840년대와 1890년대 노동자계급의 상황의 차이에서 기인했다. 실제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0년대 영국의 공업단지에서 보았던 것은 프롤레타리아 가족 성원의 전반적인 노동참여와 그에 따른 가족의 해체였다. 그들이 본 당시 영국 노동자계급의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일가족은 쪽방에서 집단 거주를 했으며 아이, 여성, 남성 가리지 않고 모두 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부르주아 역시 생활형태가  점차 귀족화되며 초기 부르주아의 도덕적·가정적 건실함은 점차 사라지고 부르주아 혁명 전야의 귀족들처럼 성윤리가 해체되고 있었다.
 

<당 선언>은 공산주의자가 성윤리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비판에 대해 부인공유제를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부르주아들이라고 비판의 칼날을 거꾸로 돌렸다. 비록 엥겔스가 남성 1인과 여성 1인의 배타적 관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것을 독단화한 적은 없으며, 과연 마르크스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기존 가족의 해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분명 자본주의 발전의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경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890년대 독일 노동자들은 1840년대 영국 노동자들 같은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진 않았다. 그것은 동시대 영국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엥겔스는 1891년에 이미 영국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장기적인 노동조건의 개선에 의해 귀족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빅토리아 시대말 영국 노동자들과 동시대 독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적 가정적 견실함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는 흔히 ‘가족임금’이라고 불리는 것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19세기 말에 면방직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에서 기계, 철강 등 중공업으로 자본주의 산업재편이 이루어지면서 여성과 아동은 대거 가정으로 축출되었다. 이는 성인 남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조직적 투쟁을 통해 가족을 부양할 만큼 고임금을 확보 받은 것과, 공장법과 보통교육  같은 제도의 도입과 궤를 같이 했다. 이 속에서 성인 남성 노동자들의 의식은 급속히 부르주아화/보수화되었다. 결국 보수화된 사민주의는 혁명을 지향하는 정당이라기보다 체제 내의 개량주의 정당으로 발전했다. 1차 대전으로 빚어진 유럽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국면 속에서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급진적 이상주의는 치머발트 좌파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 판네쿡,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제2 인터내셔널의 국가주의, 의회주의에 의해 억눌린 코뮨주의를 복원시키고자 했다.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맞선 혁명적인 페미니즘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런 이상주의의 부활은 1921년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후퇴와 자본주의화에 의해 다시 압살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라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윤색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장기호황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보수화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기존 사회주의 정당들의 관료화·보수화도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 위기에서 다시 대중운동으로 등장한 급진주의적 이상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성, 가족, 동성애, 인종에 대한 문제제기를 기존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68년의 대중운동에 대한 기존 사회주의 정당의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노동자계급에 기반 하지 않고 경제적 분배의 문제보다 사회적 소수의 민주적 권리 확보를 중심 과제로 삼는 새로운 좌파, 즉 신좌파 운동을 등장시켰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나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를 자신들의 이론적 기초로 받아들였다. 모든 문제를 일상에서 개인의 저항으로 환원하는 신좌파의 경향도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신좌파가 제기한 문제들을 배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주로 조직된 노동자계급에 기반 하고자 하는 구좌파 세력들은 점점 더 조합주의·국가주의적 성격으로 빠져 들어갔다.
 

<빼앗긴 자들>은 초기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가 가졌던 급진적 이상주의의 비전을 구체적 상상력을 통해 풍부하게 보여준다. <빼앗긴 자들>이 제시하는 가족과 국가가 없는 사회운영의 가능성과 자유로운 성윤리는 많은 영감을 준다. 이것은 분명히 르귄 자신이 경험했던 60년대 후반과 70년대 대중운동의 이상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단순히 이러한 사회를 이상화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이러한 사회가 폐쇄적이 되지 않고 발전적이 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쉐벡은 오도주의의 이상을 믿지만 외부와의 교류를 거부하는 아나레스 사회의 경직된 구조 속에서 관료주의와 사회적 퇴행이 이미 나타나고 있음을 직시한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결국 쉐벡은 아나레스 사회체제 자체가 위협받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교류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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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8 19:08 2017/04/1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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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17 14:43

[붉은글씨 5호][문화] 다큐집단 유랑을 만나다

김수목 감독님 인터뷰
인터뷰 및 정리 : 붉은글씨를만드는사람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큐유랑이라는 다큐 작가들의 공동체가 있다. GM대우 부평공장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한 <니가 필요해>의 김수목 감독, 재능교육 투쟁을 기록한 <명자 나무>의 김석 감독 등이 소속돼 있다. 다큐유랑에서 활동하는 김수목 감독을 만나 다큐유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다큐라는 장르가 포함된 독립영화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독립영화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A 독립영화를 말하기에 앞서 ‘독립’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지에 따라 설명은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저와 다큐유랑 그리고 독립영화 진영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온 ‘독립’의 정의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도 각 제작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본주의와 권력이라는 ‘외부적 압력으로부터의 자유로움’으로 해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독립’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들이 ‘독립영화’가 되겠습니다.

이러한 독립영화의 의미는 무엇보다 각양각색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함에 있습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의 가치는, 비록 가난하고 그 영향력이 작다고 해도, 각양각색의 작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전달하고 함께 나누면서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인 한 사회가 어느 한쪽으로 경도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소소한 몸부림에 있습니다.

 

Q 다큐 유랑의 탄생 과정과 활동을 소개해 주세요.

 

A 우선 저 역시 <니가 필요해>를 만들고 몇 번의 상영 이후 앞으로 어떻게 상영‧배급을 해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중 먼저 <자전거, 도시> 마지막 편집 중이던 서울영상집단 공미연 감독 및 김청승 감독이 속한 신다모(신나는 다큐모임)에서 배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며 제안을 했고 그 제안에 솔깃한 몇몇의 제작자들이 모였습니다.

<자전거, 도시> 의 서울영상집단, <니가 필요해>의 저와 배급 PD, 부산영화제 상영 이후 배급로를 고민 중이던 <불안한 외출>의 다큐창작소, <늘샘천축국뎐>을 배급 중이던 늘샘, 영화제 상영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던 <바보들의 행군> 제작팀이 그 멤버들입니다.

각자의 상영‧배급에 대한 고민 및 새로운 배급 방식에 대한 생각들을 모으고 어떤 형태의 배급을 하고 싶은지 의견을 모으며 이름을 <다큐유랑>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극장을 벗어나 각 지역의 관객을 직접 찾아가서 웃으며 즐기며 함께 영화 보기를 꿈꾸는 유랑 상영단이 되기를 희망하며, 다큐유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2015년 2월 첫 모임 및 본격적인 회의를 거쳐 2015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활동소식을 처음 알렸고, 강릉 봉봉방앗간에서 다큐유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한편씩 5편의 다큐를 처음 상영하였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인천여성영화제, 대구사회복지영화제 등 영화제를 다니며 다큐유랑 홍보 및 소식을 알리기도 했구요. 텀블벅 후원모금을 통해 작년 8, 9월에는 본격적으로 전국 13개 지역을 다니며 다큐유랑의 원래 취지에 맞춰 지역의 관객을 만나고 수다 떨며 각 다큐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016년에는 장편 7작품과 단편 2작품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2~4월 다양한 상영을 마련하기 위해 각 팀별로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 현재 서울, 순천, 강릉, 천안, 안산 등에서의 유랑상영을 진행 중이며 준비 중에 있습니다.

 

Q 영상활동가에서 다큐 감독으로 변신(?)하셨는데 달라진 점이 있다면? 김수목 감독과 같은 과정을 겪은 분들도 계신가요?

 

A 저는 그냥 저입니다.(흐흐) 영화제에서 상영을 하면 감독이라는 호칭이 붙고 영화제 상영을 하지 않으면 많은 시간 현장에 있어도, 영상을 아무리 만들어도 그냥 영상활동가로 불리어지므로 밖의 시선에서 보면 저는 영상 활동가에서 다큐 감독으로 변신(?) 했다고 보여 질 수도 있겠지만, 저는 단지 짧은 영상, 중편 영상을 만들던 사람에서 장편을 만들고 영화제 및 좀 더 많은 곳에서 상영을 많이 다니게 된 것이 달라진 점일 뿐입니다. 그랬더니 주변의 시선과 호칭이 달라지네요. (흐흐) 저와 같은 과정을 겪은 분들은 많으실 것 같아요. 현장에서 늘 촬영 및 편집하다가 장편을 만들려고 하면 작업 시간을 확보해야 하므로 현장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 영상이 완성되면 상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주변의 좋은 반응을 얻게 되면 이곳저곳에서 또 계속 상영을 하게 되면서 감독으로 불리어지게 되고, 그러면서 또 현장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지요.

 

Q 다큐유랑에서 상영하는 방식은 기존의 극장상영과 어떤 차이와 의미가 있나요?

 

A 다큐유랑 상영은 우리가 선택하고 기회를 열어보고자 합니다. 자본의 시스템에 의해 선택받기를 기다리고 배제됨에 실망하며 수동적으로 상영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어보고자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상영공간을 뚫고 관객을 찾아가려 합니다. 공간과 관객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 활용이 가능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아니라 원하는 만큼 충분히 소통하고 공감하며 우리의 시간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Q 다큐멘터리 영화(독립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는 데 있어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A 안정적으로 작업에 매진할 수 없도록 하는 ‘돈 문제’가 일차적이겠지요. 제작지원이 늘어나긴 했지만, 거대기업에서 주는 자본의 제작지원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공적인 제작지원은 한정되어 있구요. 그리고 독립영화, 독립다큐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사회의 보편적인 시선도 어려움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보이고 소통하고자 함인데 보려는 사람들이 없고 상영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고, 이런 과정들이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 없게 하는 주요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Q 노동자 투쟁을 영화로 제작하는 일이 주는 의미는 특별할 것 같은데, 본인과 주인공들, 관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A 상영을 하면서 관객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이 ‘감사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예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거나, 언론에서 몇 줄의 글과 몇 장면만으로 보여 지던 현상들이 구체적인 인물을 통해 자세하게 그려지다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투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노동자 투쟁뿐만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영화로 담아낸다는 것 자체가 모두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그저 제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비정규직 문제를 한 편의 영화로 완성하여 계속 보여줄 수 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나의 상처와 고민이 치유되고 소통된다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제가 이후에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은, 글쎄요 … (흐흐) 어떤 영향이 있었을까요? 상영을 할 때마다 마지막에 꼭 이분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도 현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고 이들의 현실은 여전히 불안하다고. 그래서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이 늘 필요하다고! 노동자의 투쟁을 담은 영화가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또 끼칠 수 있는지 관객들을 통해 그 답이 보여지기를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인공들은 영화와 상관없이 지금도 그 자리에서 치열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니가 필요해 2>를 찍으라는 듯이 …

 

Q 영화를 관람한 관객의 반응이 다양할 텐데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 소개해 주세요.

 

A 위에서도 말했지만 ‘감사하다’라는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그리고 90년대 말에 대우자동차를 다녔거나 2001년 대우자동차 구조조정 투쟁에 함께하셨던 분들이 영화를 보고 울분을 터트렸던 일, 자신도 비정규직이라며 본인의 노동에 대해 하소연하던 분도 기억에 남구요.

모든 상영들이 다 소중하고 행복했는데, 작년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상영할 때 SK, LG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체관람을 하셨었어요. 당시 명동 CCTV에서 두 분이 고공농성을 하고 계셨구요. 영화를 본 당일, 조합원 분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농성장에 와줄 수 있냐고. 일정을 마치고 11시가 넘은 늦은 밤, 농성장에 찾아갔습니다. 우리하고 상황이 너무 똑같다며, 우리 회의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고. 본인들의 답답하고 속 터지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같이 속 터졌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첫 관객이면서 영화 속 주인공이기도 했던 친구가 “우리는 이제 그 시간을 벗어나서 살고 있는데 수목은 여전히 그 시간 속에 있다”며 울먹이며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친구의 말이 맘속에 크게 남아 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A (흐흐) 뭔가 작업을 계속하고 싶은데 쉽사리 시작되지가 않네요. 내 역할이 무엇일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Q 다큐 유랑의 멤버로써, 다큐 영화감독으로써 관객들에게 당부의 한마디?

 

A 방송에서 보여지는 다큐가 다큐의 전부는 아닙니다. 유랑 상영을 하다 보면 이런 다큐가 있는지 몰랐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이런 다큐 많이 있으니까요!! 상업영화, 개봉되는 영화도 보지만 작은 영화제, 소소한 상영, 각양각색의 다양한 영화에도 관심을 많이 가져주세요.

페이스북에서 다큐유랑 치시면 페이지가 떠요. ‘좋아요’도 눌러주시고, 다큐유랑 활동 및 지역상영에도 많이 와주세요. 살기 힘든 세상, 서로서로 응원하고 지지하며 같이 살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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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7 14:43 2017/04/1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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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13 20:01

[쟁점]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묻는다

 

[기고]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에 맞선 투쟁
 

2012년 7월 20일 창립주주총회를 연 울산저널 [출처] 울산저널 페이스북 [출처: 울산저널 페이스북]


관계는 끊임없이 묻는 것이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의 균형을 잡는 일이라고 난 생각한다. 특히 삶-운동에 있어 비판과 논쟁은 관계의 균형을 잡는 핵심적인 수단과 방법이다. 

전 울산저널 윤태우 기자가 지목하여 폭로하고 항의했던 울산저널 경영진들은 나와는 오래된 인연이다. 이 자리에서 이 인연을 다 적을 필요는 없지만 그들은 어느 한 시기 같은 투쟁의 자리에 있었고 함께 했다. 그들은 내게 도움을 주고 나를 지지하고 존중해줬다. 내 마음의 한 자리, 아직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남아 있다. 난 이 오래된 인연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여기 하나의 사건이 있고 입장은 첨예하다. 지금은 오래된 관계를 중지시키고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내가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에 맞선 윤태우 기자의 투쟁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박일수 열사 기일을 맞아 울산에 내려온 직후, 한 동지가 보여준 윤태우 기자의 글모음이었다. 난 윤태우 기자를 전혀 몰랐지만 울산저널 경영진들과의 오래된 인연에도 불구하고 윤태우 기자의 항의와 요구는 정당해 보였다. 또 한 편에서는 내 오래된 인연의 사람들이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를 못 견뎌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쟁점들은 드러난 현상이었을 뿐이고, 서로 모욕당하고 상처 받은 마음을 다스려주지 않으면 이 문제는 더 거칠어지고 잔인해질 것이라 예감했다. 서로의 감정을 덧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이 문제를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동지가 울산지역에 있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울산을 떠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시 이 문제가 내 삶에 다가온 건 윤태우 기자의 해고가 일정에 오르고 울산지역에서 항의성명서 연서명을 조직하기 위해 연락이 오면서다. 난 기본 입장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고 연서명에 참여했다. 그러나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악화되어 갔고 더욱 거칠어지고 잔인해졌다. 

윤태우 기자의 요구는 지극히 소박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달라는 호소였으나 울산저널 경영진은 솔직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았다. 말을 바꾸고 변명했다. 심지어 숙소문제를 제기하는 윤태우 기자를 숙소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로 모욕하기까지 했다. 이 초기 대응 과정을 보면서 왜 이따위로밖에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좌파꼰대가 따로 없었다. 아마 이즈음에서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태우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힘이 있고 자기 행위를 성찰했다면 문제 해결의 수단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은 끝까지 솔직하지 않았고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를 못 견뎌하면서 그의 요구를 ‘거짓비방’, ‘명예훼손’으로 몰아가기 바빴다. 단체협상 과정에 있는 윤태우 교섭위원을 경찰에 고소하고 징계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업무규정을 신설해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직장 내 따돌림과 집단 괴롭힘, 쌍욕과 폭행을 자행하고 마침내 부당해고 하고 복직한 그를 또 다시 부당정직까지 시켰다. 부산지노위는 울산저널 경영진의 행위가 부동노동행위, 부당정직이라고 판정했지만 이 전체 과정은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태우 기자의 항의를 진압하기 위한 조직된 폭력이자 정서적 학대였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사용자의 지위가 낯설고 또한 서고 싶지 않았지만 사용자의 지위를 분명히 자각하면서부터 드러난 특징들이 있다. 첫 번째는 비판을 못 견뎌하고 직장 내 문제가 울산지역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으며 공격의 가시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비판을 억압하고 파괴하기 위한 정치적 무기들을 유능하게 사용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는 “거짓비방”으로 몰아가고 울산지역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모든 비판자들은 “울산저널을 죽이기 위한 배후”로 낙인찍었다. 모든 비판은 울산저널을 죽이기 위한 배후·음모론으로 대체되었고 쌍욕과 집단적이고 물리적인 위력을 발휘해 “침묵”을 강제하려 했다. 

그 절정은 2016년 5월 3일 울산이주민센터에서 조돈희 동지에 쌍욕과 집단적인 위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난 이날 울산저널 경영진들의 말과 행위를 보면서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이 종교적 색채를 띠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울산저널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동지적 관계로, 서로 존중하는 선후배로 쌓아 온 우정도 가차 없이 폐기할 수는 광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울산저널을 비판하는 울산이주민센터 조돈희 소장은 동지도, 존중과 우정을 나눈 선배도 아니었다. 다만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적이었을 뿐이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그들의 표현대로 “날조된 음해”, “무섭게 번지는 독버섯 같은 음해를 끊고자 했던”, “단호한” 투쟁을 조직한 것이었고 울산저널을 살리기 위한 신념의 집행이었지만 이 신념의 집행은 울산저널 경영진이 살아온 자기 삶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인간관계의 처참한 폐허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울산저널이 사용한 정치적 무기들은 소위 진보 혹은 운동의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정치적 무기들은 위계를 통해서만 작동하고 차별을 제도화함으로써 유지되며 비판을 억압하고 명령을 완성함으로써만 실현되는 부르주아 정치이기 때문이다. 배후·음모론은 부르주아 정치가 자신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정치적 거울이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자신의 숨겨져 있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윤태우 기자는 깊은 상처를 입고 울산을 떠나갔고 울산지역 운동사회 다수의 침묵을 이끌어냄으로써 진보언론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산저널 경영진의 모든 행위는 좌파란 이름도, 진보란 이름도 이미 부르주아 정치의 일부분이 됐다는 걸 명징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들이 사용한 모든 정치적 행위는 무엇보다 노동운동가로서의 자기 삶을 배반한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에 자기 운명을 건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들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망해 보인다. 

이 글은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 눕고 싶은 마음 다독이며 돌탑처럼 쌓아 올린 것이다. 울산을 떠난 윤태우 기자가 다른 삶을 시작하는 데 이 글이 지지와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때늦어 미안하다. 


난 글을 시작하면서 윤태우 기자의 인간선언이 나의 “배후”임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해 달라”
이것이 윤태우 기자가 울산저널을 상대로 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내가 울산저널 윤태우 기자를 처음 본 것은 작년 6월 울산이주민센터에서 진행된 ‘노동, 시민, 사회단체 긴급 좌담회 <울산저널 경영진의 폭언, 폭력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자리였다. 화천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울산으로 내려온 직후였다. 

상황은 처참한 폐허였다. 

이날 자리에서는 상황을 공유하고 몇 가지 계획이 합의됐지만 내 문제의식은 <울산저널 경영진의 폭언, 폭력 어떻게 할 것인가>의 출발지였던 윤태우 기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난 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윤태우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인터뷰를 명목 삼아 윤태우 기자와 만날 수 있었다. 함께 점심을 먹고 함께 술을 먹었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난 이 자리에서 윤태우 기자의 자기 투쟁의 뿌리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희생해 온 노동자들은 경영진의 ‘한마디’ 듣고 싶어서 싸움에 나섰다. 불가피하게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때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한 마디 어찌저찌한 이유로 주거를 보장하기 어려울 것 같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가 간절하게 듣고 싶어서 이 악물고 싸우고 있다” (윤태우 기자, [울산 노동계 단상], 2016년 2월 8일) 

“알아서 희생해 온 노동자들이 고민 끝에 기어이 요구한다. ‘약속을 약속으로 인정하기’/ ‘못 지킬 때 이해를 구하기’/ ‘사과하기’/ 이걸 받아들이기가 뭐가 그렇게 힘든가. … 이 사람들에게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기를 요구하기가 뭐가 이렇게 힘겨운 지” (윤태우 기자, [울산 노동계 단상], 2016년2월8일)


그랬다. 울산저널 내에 숙소문제가 발생했을 때 윤태우 기자가 울산저널 경영진에게 듣고 싶었던 한마디는 양해를 구하는 것, “사과”였다. 인간에 대한 예의였던 것이다. 이것을 들어주는 것이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가? 

윤태우 기자는 울산저널 전 편집장과 2014년 8월 12일 면접을 봤다. 이 자리에서 울산저널 전 편집장은 “주거 관련해서 걱정할 필요 없다. 회사 숙소가 있다 거기서 지내면 된다고 약속 했고 울산저널 경영진에게도 보고했던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는 4개월 동안 실제 집행됐다. 

 

○ 울산저널 경영진에게 전 편집장이 이야기한 것도 같은 내용. 
① 노동부 인턴제가 적용되면 저널의 임금부담을 줄이면서도 최저임금 이상 지급가능하다
② 이00 기자의 공백 기간 동안 채용하면 된다. 
③ 숙소는 이00 기자가 쓰던 염포동 아파트(백00 대표의 지인 소유로 매도 때까지 사용 가능)를 제공하자.
(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 [울산저널 12면 파행 발행과 지난 1년의 논란 상황 경과] 중에서)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에게 방을 빼라고 통보했다. 전후 사정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도 하지 않았고 윤태우 기자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았다. 급작스런 통보에 어쩔 수 없이 방을 빼야 했고 주거지 불명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윤태우 기자는 회사의 어떤 대책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하지만 울산저널은 답이 없었다. 윤태우 기자는 울산저널 편집장에게 “집 문제는 회사가 해결할 의지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편집장은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근로계약도 아닌데 내가 왜 지켜야 되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윤태우 기자가 숙소 문제를 제기했을 때 울산저널 경영진의 태도는 먼저 말을 바꾸고 숙소 문제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 “숙소 제공은 회사의 약속이 아니라 편의다”, “왜 회사가 주거지를 지원해줘야 하느냐? 왜 나간 사람(전 편집장) 얘기를 꺼 내냐”, “전 편집국장의 개인적 약속이지 회사의 약속이 아니다”― 이었고 구차한 변명으로 자신을 둘러치는 것 ― 윤태우 기자에게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임금을 올리고 나서 나중에 가서야 숙소 월세 부담이 커질 것을 감안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회사의 약속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월세를 지원하겠다는 방안을 제기하고 복지차원에서 배려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 ―이었고 숙소 문제와는 상관없는 걸 가지고 윤태우 기자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9월 본인은 이00 이사에게 7월말부터 제기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울산저널 운영위원들을 만나 내부 문제를 설명하고 관심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 그는 옥상에서 최근 일어난 사내문제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에 본인은 문제들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취재기자 3인이 앞서 작성한 미발표 성명서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배00 운영위원은 대화 도중 맥락과 상관없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네가 4월에 사내 폭행 폭언 문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을 때 경영진에게 너를 내보내라고 말했었다’, ‘나는 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너는 사진도 제대로 못 찍더라’. 멸시하는 듯 한 시선이었고 냉소적인 표정이었습니다. 너를 내쫒으려고 했는데 봐줬으니 조용히 있으라는 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 본인은 크게 당황했고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본인이 ‘폭행 폭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내쫒으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수차례 문제를 제기하자, ‘지금 생각해보니 미안하다’고 했지만 표정과 말투에서 전혀 미안함이 묻어나지 않았습니다. 본인은 이날 만남 뒤 조합 활동에 있어 적잖게 위축됐습니다. 원래 다른 경영진도 직접 만나 문제 해결을 호소할 계획이었으나 이날 만남 뒤 더 이상 다른 경영진을 만나기가 꺼려졌습니다(윤태우 기자, [울산저널 경영진이 왜곡하는 사실을 바로잡습니다] 중에서)
 

믿었던 선배들과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 방식은 여기서 끝이 났다. 신뢰는 깨졌다. 공동체적 성격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은폐되어 있었던 노사관계가 전면에 등장했다. 울산저널 경영진들의 말과 행동은 윤태우 기자에게 비수가 되어 갔다. 특히 그들의 냉소적인 말투와 멸시하는 듯한 시선에서 숨이 멎는 듯한 모멸감을 느꼈다. 윤태우 기자는 경영진의 무책임한 말과 행동에 희망을 잃고 울산을 떠나려 했으나 그의 발걸음을 잡아 끈 것은 단 한 가지.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것”, 상처 받고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 싶다는 욕구였다. 그래서 모든 투쟁은 “인간선언이었다” 나는 존엄한 인간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력을 생산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았고 끝까지 들어줄 힘도 없었다. 결국 울산저널 경영진은 엉터리 처방전을 들이민다. “회사의 약속은 근로계약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고 복지차원에서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울산저널이 “약속” 혹은 “근로계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숙소 문제를 “무조건 책임져야 한다”는 근거 없는 부담감, 악화되고 있는 재정상황을 고려한다면 책임질 수 없는 사용주로써의 현실적 고려 이외엔 다른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 그리고 만약 숙소문제를 근로계약으로 체결하면 경영진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윤태우 기자가 하게 될 것이라는 의심과 지독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사용주로서의 자각을 더욱 명료하게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태우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힘이 있었다면, 윤태우 기자와 취재기자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고 심사숙고 했다면 “숙소 문제를 무조건 책임져야 한다”는 근거 없는 부담을 지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울산저널의 명예를 스스로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윤태우 기자를 비롯한 울산저널 취재기자들은 회사의 약속임을 인정한다면 숙소제공 방식에 대해서는 회사의 어려움을 고려해 해결책을 찾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약속”과 “배려”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윤태우 기자를 지독하게 불신함으로써 울산저널 경영진이 스스로 건너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의 명예는 스스로가 아니라면 누구도 훼손할 수 없다. 울산저널의 명예훼손의 주범은 울산저널 경영진 자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명예훼손인가? 정당한 노동조합활동인가?

울산저널의 구조는 참 특이하다. 사용주들은 노동운동의 구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윤태우 기자를 비롯한 기자들은 울산저널의 단체협약도 모르고 근로기준법도 모르며 운동의 경력이 대부분 없는 사람들이다. 숙소 문제로 불화가 발생하게 되자 윤태우 기자와 취재기자들은 사용주들이 이미 마련해놓은 모범단체협약을 수단으로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참 기형적이었지만 현실이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자신에게 유리한 단체협약 조항은 탄압을 위해 사용하고 또한 불리한 조항은 탄압을 위해 스스럼없이 위반했다. 그러나 윤태우 기자와 울산저널 분회의 투쟁은 단체협약에 근거를 둔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이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이 마련해 놓은 모범단체협약, 제2장(조합활동)의 제6조(조합활동보장), 7조(조합의 정치활동 보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회사는 조합원의 자유로운 조합 활동을 보장하고 어떠한 이유로도 조합운영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조합 활동을 이유로 어떠한 불이익처우도 하지 않는다”, “회사는 조합 간부와 조합원의 홍보선전물 배포 및 부착 등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하여야 하며, 어떠한 이유로도 그 활동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그 활동을 이유로 조합원에게 일체의 불이익 처우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가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적으로 회사의 대표와 경영진을 음해하고 근거 없이 비방하는 등 울산저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윤태우 기자를 울산남부경찰서에 고소했다. 노사 협상 과정이었다는 걸 기억하라. 조합원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해야 할 울산저널 경영진은 탄압을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든 단체협약을 의도적으로 위반한 것이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의 글이 자신들을 조롱하고 모욕했으며 명예가 훼손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소의 근거가 된 <울산노동계 단상>은 교섭위원인 윤태우 기자가 노사협상 과정에서 벌어진 경영진들의 말과 행위를 폭로하고 항의하는 글이었다. 

윤태우 기자는 울산저널 경영진의 무책임한 말과 행동들 속에서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정말 힘이 없는 입장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루하루 일하는 게 힘들고 살아가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글을 쓴 것이었고 자기가 경영진에게 당한 것 보다 훨씬 적은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점잖은 글이었다. 그런데도 이 글은 울산저널 경영진에게는 “칼을 꽂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윤태우 기자의 문체가 울산저널 경영진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진 것(1)이다. 모욕감을 느낀 울산저널 경영진은 거칠어지고 잔인해져갔다. 거침없는 부당노동행위가 기획됐다. 노사 협상 과정에서 울산저널 경영진의 말과 행위를 폭로하고 항의했던 윤태우 기자의 활동을 “거짓 비방”, “음해”로 몰아갔다. 

그러나 ‘살인자의 손에 피가 마르기전에’ 정치적 폭로를 진행하는 것은 노동조합 활동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활동의 기본이다. 윤태우 기자는 교섭위원이다. 당연히 그의 주요한 활동은 교섭 과정에서 사용주의 말과 행위를 폭로하는 것이다. 특히나 SNS의 영향력이 커진 지금, 페이스북에 폭로와 항의의 글을 쓰는 것은 노동조합 활동의 연장인 것이다. 폭로는 사용주의 말과 행위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주체적 관점(계급적 관점)이 반영된다. 맥락상 사용주의 핵심적인 문장을 추출해 강조하기도 하고, 문장 전체를 비틀 수도 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이러한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해야 하며 그 활동을 이유로 조합원에게 일체의 불이익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직접 만들지 않았는가? 취재기자들이 단체협약도 모른다고 무시하고 비꼬지 않았는가? 그렇게 자부심 강한 단체협약이라면 윤태우 기자의 노동조합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부동노동행위를 저지를 것이 아니라 조합원의 권리를 보장했어야 했다. 또한 울산저널 경영진이 자신의 주장대로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가 “거짓 비방”으로 생각한다면 자신들의 오랜 활동 경험처럼 “공개적인 논쟁을 조직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윤태우 기자의 폭로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다. 아래는 2015년 9월 16일 윤태우 기자를 비롯한 취재기자들과 울산저널 핵심 경영진과의 대화 내용을 녹취하고 푼 것이다. 
 

“배○○ : 기자님들, 자신의 권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계속 어떻게 여기 페이스북에 우롱해놨는지 알아요? 노동운동 해본 자들이 노동운동했다는 사람들이 운동권들이 이따 구라고 써놨잖아요. 그렇게 안 적었어요? 

윤태우 : 그렇게 썼죠.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배○○ : 노동자 권리 얘기하면서 자기가 일하는 노동조합의 단체협약도 모르면서 단체협약에 수준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단체협약과 근로계약의 기준에서 얘기하자고 해도 그건 아니라고 얘기하고. 전 편집장이 약속했던 것이 다 맞는 거라고 얘기하고. 
윤태우 : 단체협약을 알아야 자기가, 본인이 약속받은 걸 책임져달라는 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배○○ : 예. 기본입니다. 
윤태우 : 단체협약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 권리 찾으면 안 되는 거예요? 
배○○ : 근로기준법과 단체협약부터 알아야지 진짜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어요. 

(중략)

배○○ : 이 문제가 계속 고착화되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면 
윤태우 : 이 상황을 즐길 사람이 있을까요? 
배○○ : 난 윤기자가 즐기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요 
윤태우 : 제가 어떻게 즐깁니까? 이 상황을 

(중략)

배○○ : ○기자도 잘 생각하세요. 내가 어디까지 얼마만큼 있을지 고민할 거예요. 여기 계속 있어야 되나. 잘리는 게 고민이 아니라 내 앞길이 고민될 거라고. 평생직장이 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기 때문에. 난 길게 오랫동안 같이 있길 바래요. 그런데 지금처럼 이라면, 신뢰가 깨지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통스러울 거예요. 쥐 잡듯 잡을 수 있어. 일하다 안 맞는 사람 있으면. 반대로 잡혀요. 인생이 그렇거든. 갈등 있는 얘기를 들어요. 다 듣고 있거든. 그러면 누구든 선택해요. ○기자가 어느 신문사 다른 데로 옮기게 되더라도 여기서도 좋은 기자로 있다가 일 년이든 십년이든. 하지만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좋은 기자가 되기 힘드실 거예요”(울산저널 대책위원회,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폭언·폭행 사건 경과] 중에서)


윤태우 기자는 이 녹취록에 근거 해 <울산노동계 단상>에 “단체협약이란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회사에 요구를 하면 안 된다”고 썼다. 녹취록에도 나와 있듯이 경영진 자신이 직접 한 이야기 그대로 썼는데 이것이 뭐가 “거짓 비방”이고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한 것인가?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라. 셀프 명예훼손, 셀프 인격권 침해를 윤태우 기자에게 전가하지 마라 

그렇게 단체협약을 잘 아는 척 했던 한 경영진은 정작 단체협약에 대해 무지했다. 그는 말한다. “단협상의 명시된 부분도 아니고 … 근로계약서 윤태우 기자 거 봤는데 어디에도 주거문제를 해결한다는 부분이 명시되어 있지 않구요”라며 울산저널 전 편집국장의 약속이 회사의 약속이 아니라는 근거로 삼고 있지만 단체협약 제 3조<기존이 노동조건과 조합활동 권리 저하 금지>엔 “회사는 이 협약에 규정되어 있지 않거나 누락됨을 이유로 조합이 기존에 확보하였거나 관행으로 실시해온 조합활동 권리 및 기존의 노동조건을 저하시킬 수 없다”고 한 규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는 윤태우 기자의 투쟁을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는 프락치 행위(“난 윤기자가 즐기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요”)로 유추할 수 있는 발언을 하고 한 취재기자에게는 “쥐 잡듯 잡을 수 있어 일하다 안 맞는 사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좋은 기자가 되기 힘드실 거예요”라며 아주 친절한(?) 협박도 마다하지 않았다. 녹취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은 윤태우 기자가 아니라 노동운동가의 삶을 산 경영진 자신이다. 취재기자들과 울산저널 경영진과의 대화 녹취록엔 이후 처참한 인간관계의 폐허로 가기 위한 징후가 이미 발화하고 있었다. 

취재기자들에게 이날의 경험은 그를 “조합활동을 위축시키는” 경영진으로 각인되게 했다. 그리고 단체협약안에 “배00 사업국장은 단협 26조(조합은 조합 활동을 현저히 해롭게 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력자의 채용을 거부할 수 있다) 2항에 해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회사는 직책 배당을 제고하고 정확한 직제개편 계획을 밝혀 주기 바랍니다. 배00 사업국장이 회사에 문제제기 하는 기자들을 위축시킨 데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요구한다”로 반영 됐고 “구두 및 서면 사과”가 합의됨으로써 2016년 1월 7일, 울산저널 노사는 단체협상안에 잠정 합의했다. 

그러나 부당노동행위의 당사자들이었던 울산저널 핵심 경영진들은 이 요구를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하는 악의적인 잠정합의”라며 울산저널 분회에서 잠정합의 찬반투표를 통해 가결한 안을 뒤집어엎는다. 만약 울산저널 핵심 경영진들이 자신의 말과 행위를 성찰하고 잠정합의안을 받아들였다면 울산저널은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이 전체 과정을 보면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를 “거짓 비방”으로 몰아가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은 윤태우 기자의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것이 분명해 보이고 더불어 자신의 단체협약 위반, 부당노동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 부당정직 과정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조직된 폭력이자 정서적 학대였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난 윤태우 기자의 절망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내겐 이 숨 막히는 절벽 앞에 끝내 좌절하고 울산저널을 자진 퇴사하여 울산을 떠나는 그를 잡을 수 있는 용기도, 수단도 없었다. 난 울산 운동사회로부터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개인이기도 했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의 말과 행동은 내게도 절망이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비수에 꽂힌 윤태우 기자의 내상을 꼼꼼하게 살피는 일이었다. 도대체 울산저널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울산저널 분회는 2015년 12월 10일부터 2016년 1월 6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교섭을 진행하고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1차 교섭부터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핵심 경영진들은 교섭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측 교섭위원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했듯이 의도적으로 교섭 자리를 피한 것이다. 울산저널 분회는 “실질적 권한이 있는 사람이 참석하지 않으면 합의안이 나오더라도 지켜지지 않을 우려를 표명”했지만 실질적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끝내 교섭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울산저널 분회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울산저널 분회는 2016년 1월 12일 총회를 열어 잠정합의안을 가결시켰지만 사측 교섭위원 대표는 회사가 잠정합의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며 교섭위원 사퇴 의사를 노조에 알려왔다. 울산저널 핵심 경영진들이 노사 잠정합의안을 일방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실질적 권한을 가진 핵심 경영진 중 한 명인 편집국장은 기자들에게 신문발행과 관련한 어떤 업무 지시도 없이 한 달간 휴가를 떠나버렸다. 사실상의 업무 거부를 통해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신문발행은 고스란히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의 몫이 됐다. 윤태우 기자를 비롯한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은 편집장 없이 자정 넘어 새벽까지 일하면서 신문을 정상으로 발행했다. 그들은 회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울산저널 편집국장과 경영진들은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이 밤잠 설치면서 신문을 정상 발행하는 동안 깊은 산속에 들어가 노조를 탄압하기 위한 절세 무공을 수련한 것일까? 울산저널 경영진들은 2월초부터 윤태우 기자에 대한 표적탄압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일사천리로 이뤄진 표적탄압 
1월 13일 ~ 2월 10일 편집장 잠적 ⇒ 2월 2일 사측 수정교섭 요구(잠정합의안 파기)
2월 11일 편집회의 ⇒ 2월 15일 편집장 전화, 당일 1차 징계 처분 예비통보
2월 17일 노조 쟁의행위발생 결의를 위한 총회 및 수정교섭
2월 19일 2차 징계처분 예비통보
2월 22일 3차 징계처분 예비통보
2월 23일 ‘업무 규정 신설’ 노측에 통보
3월 3일 4차 징계처분 예비통보
3월 8일 배00이 고소했다며 경찰서에서 연락 옴 
3월 11일 경찰에서 편집장이 고소했다며 연락 받음
3월 17일 해고 통보
(윤태우 기자, [울산저널 경영진이 왜곡하는 사실을 바로잡습니다] 중에서)


울산저널은 노조가 쟁의행위 발생 결의 총회 소집 공고를 하자 재빠르게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목록은 교섭위원인 윤태우 기자를 징계위에 회부하고 이도 모자라 그의 징계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업무 규정 신설’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고 그 두 번째는 단체 교섭 자리에서 울산저널 사측 교섭위원이 노조 교섭위원인 윤태우 기자와 교섭위원들에게 쌍욕과 폭력을 휘두른 것이며 그 세 번째는 단체 교섭 과정에 있는 교섭위원인 윤태우 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경찰에 고소한 것이며 그 네 번째는 경영진의 최종목표인 윤태우 기자를 부당 해고한 것이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2016년 2월 11일 편집회의에서 편집장이 임의로 업무규정을 바꾸려고 하자 이에 항의한 윤태우 기자를 2월 15일 징계위에 회부했다. ‘똥 밟은 놈이 성질낸다’는 문구가 떠오르는 행위이다. 울산저널 단체협약에는 “기존의 노동조건과 조합활동 권리 저하 금지” 조항이 있고 또한 “회사는 취업규칙을 비롯해 조합원과 관련된 회사의 제 규정, 규칙을 제정 또는 개폐하고자 할 때는 사전에 조합과 합의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울산저널은 노사 합의로 ‘자율적인 시간 분배 노동’을 해왔다. 즉 취재기자들은 3년 동안 자율적으로 취재처에 출근하고 각 취재처 등 일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연장근무와 휴일근무를 해왔다. 그런데 편집국장이 임의로 업무규정을 바꾸려 했던 것이고 윤태우 기자는 단체협약에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행사한 것인데 징계라니!


울산저널이 일방적으로 ‘업무 규정 신설’을 도입하고 윤태우 기자를 표적 탄압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치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00씨를 징계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들’에 나와 있듯이 “윤00씨는 24살이다. 편집국장은 54살이다. 30살 차이가 난다. … 타이를 만큼 타일렀고 포용할 만큼 포용했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치자. 그런데 이 ‘싸가지 없는 놈’을 어쩌지 못하고 겨우 생각해낸 것이 윤태우 기자의 징계 근거를 만들기 위해 편집국장의 지위를, 위계관계를, 그 제도화된 차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밖에는 없었는가? 평생을 싸워 왔던 “관료적 명령”을 도입하고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는가? 이렇게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 가야하는가? 

“제 2조 2항 취재기자는 오전 9시 사무실로 출근해 출근부를 작성한다. 오전 10시까지 취재계획서를 작성해 편집국장에게 보고한다. 오후 5-6시 당일 취재한 내용과 출입처 관련 정보를 취합 해 편집국장에게 보고한다. 
제4조 2항 정당한 사유 없이 기사 송고가 지연되거나, 기사 송고 누락과 지연이 되풀이 될 경우 징계 처분할 수 있다”(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 [울산저널 사원 업무규정 신설에 관한 통보 및 의견 정취] 중에서)

 

취재기자에 대한 편집장의 통제는 어떤 제한이 없어 보이고 징계처분 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게 됐다. 업무 규정 신설은 조합원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편집국장의 통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탄압의 칼이었다. 울산저널 편집국장은 탄압의 칼을 자유롭게 휘둘렀다. 

2016년 2월 15일과 16일, 원래 업무상 이유로 전화를 하지도 않았고 숙소문제가 발생하고 나서는 더욱 업무에 대한 전화를 걸지 않았던 울산저널 편집국장은 윤태우 기자에게 수차례에 걸쳐 전화를 걸었다.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윤태우 기자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징계를 받을 것 같아 취재 중이라 통화가 어렵고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한 뒤 취재를 이어갔다. 그런데 이것이 “신문 제작과정에서 편집국장이 수차례에 연락을 했으나 무단 불응”했다는 이유로 징계의 사유가 됐다. 물론 이 날 이후로 윤태우 기자에게 걸려 온 편집국장의 전화는 없었다. 또한 울산저널 편집국은 적은 인력으로 16면을 채우기 힘들어 마감 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지면을 완성하곤 했다. 그런데 2016년 2월 16일 편집국장은 일방적으로 오후 5시 43분에 “기사 최종 마감했습니다. 늦어도 7시까지 교정보고 마무리 짓습니다”라고 편집국 텔레그램방에 올렸다. 지면이 다 채워지지 않았는데 마감을 강행한 것이다. 윤태우 기자는 기사를 완성하지 못했고 이것이 “분담 책임진 기획 기사 등 미송고로 16면 지면 발행이 비정상적으로 12면으로 축소발행”하게 만든 죄를 물어 징계사유로 삼았다. 울산저널 분회와 윤태우 기자는 관행대로 마감을 했다면 기사를 완성 해 지면을 채울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편집국장은 윤태우 기자가 2월 29일과 3월 2일에 걸쳐 원고지 44매에 달하는 기획기사 및 단신기사를 편집국장에게 보냈으나 단 한 꼭지도 싣지 않았다. 울산저널은 2016년 3월 3일 176호를 축소 발행했다. 윤태우 기자가 기사를 작성 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싣지 않고 176호를 축소 발행했으면서 그 책임을 윤태우 기자 에게 묻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참 찌질하고 저열하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업무 규정 신설을 통해 윤태우 기자를 징계위에 회부하고 나서도 징계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탄압을 지속했다. 그 중 하나가 무단결근이다. 울산저널은 창간 때부터 3년 이상 화, 수요일 사무실 출근, 나머지 요일은 취재 처로 출근하는 업무방식을 따라 왔다. 울산저널 분회는 경영진의 업무규정 신설에 반대하며 ‘노사 합의 전까지 상시적이고 관행적으로 해오던 업무 방식을 유지 하겠다’고 밝혔으나 울산저널 편집국장은 2016년 3월 4일 “단체협약, 취업규칙, 근로계약서에 명시한 출근시간 출근 거부에 대해서는 결근처리”하고 “결근 처리된 사원이 임의로 행한 업무는 회사 업무로 인정할 수 없다”고 일방적인 통보 문자를 기자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는 실제 집행됐다. 노동조합의 “합의” 없는 업무 규정 신설은 명백한 단체협약 위반이었다. 윤태우 기자는 노동조합의 방침대로 2월 25일, 26일, 29일, 3월 4일 관행대로 근무를 했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은 이를 무단결근으로 처리하고 징계의 사유로 삼았다. 

 

울산저널 경영진의 윤태우 기자에 대한 적대적 혐오는 극을 향해 나아갔다. 쌍욕과 폭력이 자행됐다. 직장 내 따돌림과 집단적 괴롭힘이 일상화됐다. 울산저널 경영진에 의해 자행된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 과정, 그리고 해고 철회 후 다시 부당정직의 과정은 윤태우 기자의 인간 존엄을 짓밟은 조직된 폭력이자 정서적 학대였다. 

사건 개요 
① 2016년 2월 17일 오후 6시 40분께 울산저널 사무실에서 김모 교섭위원은 노측 윤모 교섭위원에게 “야 이 새끼야”, “개새끼”, “양아치자식아”, “양아치 같은 새끼야”, “개자식아” 등과 같은 욕설을 10여 차례 반복했고, 종이를 돌돌 말아 노측 교섭위원 목을 한 차례 찌르고, 다시 교섭위원 신체에 위해를 가하려는 행위를 했다. 김모 교섭위원은 노조 분회장이 이를 말리면서 영상을 찍자 분회장을 향해 “당신도 마찬가지야, 대표 등에다 칼을 꽂아”, “너도 책임져야 해”, “너도 똑같아” 등과 같은 말을 했다. 
② 김모 교섭위원 외에도 사측 교섭대표와 사측 배모 교섭위원, 편집국장까지 가세해 4명이 취재기자 한 명을 공격했다. 이러한 행위는 30분가량 계속됐다. 
③ 당시 상황은 사측 교섭대표가 노사 단체교섭을 마친다고 말한 직후였으며, 노사 양측 교섭위원 총 7명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은 상태에서 발생했다
(전국언론노조 풀뿌리신문지부 울산저널분회, 직장 내 폭력행위에 관한 건, 2016.2.22.)

 

울산저널 분회 교섭위원들은 이 날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성인 남성이 위협적으로 소리 지르니까 무섭고 심장이 뛰고 그랬다”, “회사 간부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비인간적이다”, “출근하고 싶지 않다”, “사측 교섭위원이 책상을 막 흔들고 하는데 책상을 뒤집어엎거나 할까 봐 공포스러웠다”((전국언론노조 풀뿌리신문지부 울산저널분회, 직장 내 폭력행위에 관한 건, 2016.2.22.)


윤태우 기자는 “퇴근하는데 회사쪽 사람이 쫒아 와서 죽일 것 같은 공포감을 느껴서 주위를 돌아봤고 버스 탈 때도 주위를 살피게 되더라”고 증언하고 있다. 
 

- 4월 20일 윤태우 기자 복직. 그러나 기존에 취재하던 모든 취재처가 없어지고 편집국 텔레그램 방에도 초대되지 않음

- 4월 21일 이사 김00이 윤태우 기자에게 “너는 미끼야. 너를 풀어준(해고철회) 이유가 뭔지 아냐? 걔들 잡으려는 미끼야. 조만간에 양준석이 최병승이 너 다 아웃될 거야 울산에서”, 건방진 놈의 새끼”, 깐죽대고 하면 죽는다. 등의 폭언을 퍼부음 3시간 후 이모 편집국장은 업무 중이던 윤 기자에게 다가와 “사무실에서 나가. 나가서 해!”라고 소리 지르며 윤 기자를 끌어내고, 작성 중이던 문서를 저장 안 함’버튼을 누르고 닫아버리고 컴퓨터 본체 전원 버튼을 수차례 누르고, 가방을 빼앗아 현관에 던지고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고함을 치며 윤태우 기자가 정상적으로 업무를 할 수 없도록 방해함 

- 4월 22일 이사 김00이 윤태우 기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함. 윤태우 기자가 취재 일정 때문에 바쁘다고 하자 고성을 지르며 의자를 박차고 윤태우 기자에게 다가와 이 새끼 이거 뭐 이런 새끼가 있어”라면서 윤태우 기자의 뒷목을 잡고 눌러 상체를 숙이게 만든 뒤 탁자 쪽으로 밀침. 윤태우 기자가 "지금 사람 쳐놓고 앉으라고 하는 게 말입니까”라고 항의하자 편집국장이 다가와 오른손 주먹을 윤 기자 얼굴 앞까지 두 차례 휘두르며 “이렇게 확 친 게 친 거지”라고 말함

(울산저널 대책위,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 사건 경과] 중에서

 

여기 존엄한 한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으면서 함부로 대하는 자들의 기록이 있다. 나이 많은 것이 무슨 정서적 학대 특허권이라도 된단 말인가? 사용주의 지위라는 것이 폭력 면허증이라고 된단 말인가? 적에게도 인권은 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윤태우 기자에게는 악몽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악몽은 깨어나면 사라지는 것이지만 윤태우 기자에게는 매일매일 부딪히는 일상이었다.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 복직 뒤 부당징계 과정을 보면 울산저널 경영진에 의한 윤태우 기자에게 자행된 집단적 폭언, 폭행, 괴롭힘은 하나의 습관적 놀이처럼 보인다. 회사를 망하게 하려는 프락치,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모든 행위는 울산저널을 살리기 위한 신념에 의해 집행되었다. 진보의 이름은 이처럼 타락했다. 그러나 윤태우 기자는 이 악몽과 같은 시간을 견디며 투쟁을 지속했고 나에게까지 접속됐다. 이 투쟁에 참가할 수 있도록 안내해준 윤태우 기자에게 고맙다. 



울산저널의 배후·음모론은 모든 비판을 억압하고 파괴하기 위한 무기였다

모든 투쟁은 주체적인 사유와 결단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소위 배후·음모론은 투쟁 주체를 독립적으로 사유하지 못하며 행동할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투쟁 주체에 대한 이 같은 모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또한 배후·음모론은 활력 있는 비판의 심장을 정조준 하여 침묵을 강제하며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정치적 무기이다. 배후·음모론(조직보위론)이 판치는 곳에서는 비판과 토론이 억압되고 위로부터의 명령과 아래로부터의 수동성이 결합된다. 부르주아 정치(관료주의)는 이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배후·음모론이 울산저널 경영진을 온통 사로잡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자들의 입을 봉할 필요가 있었고 비판을 가장 효과적으로 잠재울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진보언론’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 사람들은 대부분 울산저널에 의해 “배후”로 낙인찍혀야 했다.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은 배후·음모론 없이는 가능하지도 지속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울산저널의 배후·음모론의 첫 번째 희생자는 울산저널 전 편집국장이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000 전 편집장은 울산저널이 곧 망할 것이라고 얘기했고 울산저널에서 일하는 기자를 자신이 빼내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고 하면서 “단순한 노사 문제가 아니라 외부에서 울산저널을 악의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들이 확인됐다. 000 전 편집장은 윤태우 기자와 숙소 문제는 근로조건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했다고 했지만 2월 17일 노사교섭 당시 윤 기자와 통화하면서 숙소 문제에 대한 구두 약속이 회사의 약속이고 8월 이후 숙소가 없어진 것은 근로조건 저하라고 윤 기자에게 확인해줘 최종 합의를 무산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윤태우 기자는 독립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누구에게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직접 행동할 수 있는 투쟁하는 노동자라는 것이다. 숙소 문제가 발생하고 2월17일 노사 교섭까지 6개월 동안 윤태우 기자는 숙소 문제가 회사의 약속이자 자신
이 노동조건이었고 숙소가 사라진 것은 노동조건의 저하라고 말해오지 않았는가? 약속을 약속으로 인정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불가피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양해를 구하고 사과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는가? 울산저널 경영진에게는 왜 그의 호소가 유독 들리지 않았는가? 

윤태우 기자는 이 날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경영진이 숙소관련 약속을 회사의 약속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숙소 제공 약속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문제가 불거지고 나서야 알았다고 주장하다가 제가 전 편집장 증언까지 들이밀자 끝까지 책임 회피하려고 애꿎은 전 편집장한테 뒤집어씌운 거죠”


그래, 진실이 드러나자 그토록 화가 났는가? 그 화풀이로 노사 단체 교섭이 진행됐던 자리에서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자행했는가? “두려움과 공포”를 의식적으로 조직함으로써 또 다시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는가? 최종합의가 무산된 것은 진실에 귀 닫고 눈 감은 울산저널 경영진 자신에게 있다. 그 책임을 울산저널 전 편집국장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은 참 비겁한 짓거리이다. 어느 누구도 울산저널을 악의적으로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다. 진실에 대한 정치적 태도가 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윤태우 기자의 투쟁은 인간 존엄에 대한 자각,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분노, 주체적 판단과 결단, 울산저널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직접행동으로 일어선 인간선언이다. 이 인간선언에 화답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이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배후” 운운하며 윤태우 기자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마라.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배후는 없다. 

2016년 3월 2일 울산노동자공동행동 및 지역 노동 시민 사회 단체 활동가 성명서가 발표되고, 3월25일 울해협에서 윤태우 기자 부당해고 규탄 성명을 발표하자 울산저널 경영진의 배후·음모론은 지역으로 확대됐다. 그 첫 번째 대상은 3월 2일 성명서에 기명한 노동당(구 사회당) 당원들이었고 그 두 번째 대상은 울산노동자공동행동 최병승, 양준석 동지였으며 그 마지막 절정은 울산이주민센터 소장인 조돈희 동지였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 해고 사태를 장기화 시키고 악의적으로 울산저널을 파괴하려는” 배후를 끊임없이 찾아 다녔고 일주일 간격으로 배후를 변경하기도 했다. 윤태우 기자의 부당노동행위 맞선 투쟁이 지역으로 확대되자 똥줄이 타고 마음이 급해졌던 것이다. 울산저널에 의해 배후로 지목된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공개적으로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하고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를 철회하라는 입장을 밝힌 사람들이다. 

 

2016년 3월 21일 저와 조돈희 선배는 울산저널 대표를 만났다. 조돈희 선배의 울산저널 입장 글 이후 대표가 연락이 와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 울산저널 대표는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두 세력이 있다. 하나는 전 편집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심스럽기 때문에 누구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최병승, [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 위원의 “배후세력 규정”에 대한 나의 입장] 중에서)


노동조합 분회장 대신 다른 지역의 활동가(구 사회당 당원)의 조언을 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 노동계에서 처음 나왔던 알바노조 울산지부의 성명서 역시 노동조합 분회장과 일체의 사실 확인이나 협의 없이 나왔다. 알고 보니 윤00씨가 알바노조에 가입한 이중 조합원이었다고 한다. 신문사는 정규직으로 근로계약을 맺은 윤00씨가 알바노조의 조합원의 자격이 되는지는 뒤로 한다 해도 구 사회당 계열이 주도한 알바노조와 관련자들이 지금의 분란을 촉발시킨 것이라 짐작케 한다. 그들은 정당원과 총선 선거운동원, 노동조합 활동가, 지역단체 활동가라는 여러 이름으로 자신들의 배후 행위를 감추고 있다(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 [윤00씨를 징계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들] 중에서)

“울산저널 김00 이사는 4월 4일 현대차지부 김○식 동지에게 “어제 회의에서 양준석과 최병승이 울산저널을 음해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 울산저널 김00 이사는 4월 21일 해고 철회로 복직한 윤태우 기자에게 폭언·폭행을 행사 하는 과정에서 “너는 미끼야 미끼. 양준석이 최병승이한테 내가 3주전에 얘기했다. 내 반드시 양준석이하고 최병승이 둘이 울산바닥에 떠난다고 경고했어. 3주 전부터 납작 엎드려 있지? 지금 너를 풀어준 이유가 뭔지 알아? 걔들 잡으려는 미끼야. 조만간에 양준석이 최병승이 너 다 아웃될 거야, 울산에서”라고 말했다(울산저널 대책위,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 사건 경과] 중에서)


최병승 동지는 자신의 입장 글에서 “울산저널의 ‘배후 규정’은 마치 자본의 외부세력 이데올로기와 다르지 않다. 아니 진보적 가치를 앞세워 현 상황을 비판하는 지역 동지들을 ‘마녀사냥’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울산저널의 배후·음모론은 비판을 ‘마녀사냥’하는 것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울산저널 내부와 울산지역의 토론과 논쟁을 파괴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것, 회사를 망하게 하려고 프락치 행위를 하고 있는 윤태우 기자를 고립시켜 축출하고 진보의 이름으로 울산저널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는 2016년 3월26일 <울해협 하창민 의장 명의의 글에 대하여>란 글에서 “울산저널을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기업과 동일하게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기업과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에 대해서 비판하고 항의하는 것이며 또한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부르주아 정치의 수단인 배후·음모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울산저널이 직접 마련하고 또한 자부심이 있었던 모범 단체협약을 스스로가 위반하며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부당정직을 자행했으며 직장 내 따돌림과 괴롭힘, 쌍욕과 집단적인 폭력을 사용 해 투쟁하는 주체인 윤태우 기자의 존엄을 파괴한 울산저널의 행위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기업”이 노동자를 탄압하는 수단과 방법에 있어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윤태우 기자의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부당정직에 맞선 투쟁을 오로지 배후·음모론으로 보는 울산저널의 관점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기업”이 노동자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유포하는 “외부세력” 혹은 “배후세력” 이데올로기와 무엇이 다른지 답해야 할 것이다. 난 울산저널 경영진의 배후·음모론의 “배후”가 부르주아 정치가 아니길 바란다. 

 

김00은 다음과 같이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조돈희 동지에게 퍼부으며 주먹으로 칠 듯이 협박했다. “야이 개자식아”, “십새끼야 야이 개새끼야”, “개자식아 십새끼야 아이고 요 걸 진짜”, “씨발놈이 한 대 터지고 …”, “임마 이 미친놈아 이 새끼 이거 씨발놈 좆까고 자 빠졌네”, “이 씨발 놈이 진짜”, “니들은 하나 같이 지가 해놓고 말 안했다고 한데이 니 치 매 걸렸냐?”, “이 씨발놈들아 이 더러운 개새끼야”, “니가 양아치야 야이 개새끼야 나이 처먹었으면 어른이 돼야지 늙은이가 되고 자빠졌냐 이 미친놈아 개자식 씨발놈이 아이고 확 죽일 수도 없고”, “씨발놈 좆같은 새끼가 니들 수백 명이 와봐 내 눈 깜작하나 미친놈아 아 이고 나이 처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 “이 새끼 미친놈 아이가? 또라이 아이가 지 정신 아니가?”, “어 씨발놈이 진짜 좆같네”, “이 개새끼가 진짜 좆같네”, “나이 처먹었으면 나이 값 해 나이 값 인마 이 개자식은 진짜”, “앞으로 니 조심해 진짜 죽는 수가 있어 개새끼”, “개자식 좆같은 소리 하고 있네” … 조돈희 동지는 직접 몰매를 맞지 않았을 뿐 김00, 배00, 이00 세 명으로부터 온갖 욕설을 동원한 간접몰매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00은 조돈희 동지에게 “왜 울산저널이 입찰비리를 저질렀다는 말을 김**에게 했다고 대답하지 못하냐?”며 다그쳤고, 김00이 욕질과 함께 조돈희 동지를 치려는 듯이 소리치며 날뛰고 있는데도 이00은 명상 폼을 잡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배00과 이00은 참다못한 조돈희 동지가 김00과 충돌하기 직전에야 김00을 말렸다.(울산저널 대책위,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 사건 경과] 중에서)

 

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난 울산저널 경영진과 조돈희 울산이주민센터 소장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동지적 관계로, 서로 존중하는 선후배로 우정을 쌓아왔다는 걸 알고 있다.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배후세력에 맞서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은 20년 동안 쌓아온 우정조차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며 즉각 폐기처분할 정도로 광기에 가깝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조돈희 소장을 모욕하고 또 모욕했다. 조돈희 소장은 가장 먼저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에 항의하고 윤태우 기자의 투쟁에 연대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현대중공업 해고자로 정년을 맞은 조돈희 소장은 울산저널 경영진과의 20년 우정을 넘어 해고자 윤태우 기자의 손을 잡아줬다. 해고자는 해고자의 마음을 가장 먼저 아는 법이다. 

동지가 오류를 범하고 또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가장 깊은 신뢰는 침묵하거나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동지적 비판과 동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조돈희 소장은 동지적 비판과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20년 우정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은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삼았고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렇게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은 종교적 색채를 띠어 갔다. 이 광기 속에 조돈희 울산이주민센터 소장조차 개입할 여지는 없었고 그도 쌍욕과 집단적 위력을 사용해 침묵을 강제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다. 인간관계의 폐허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것이 울산저널 경영진이 징징 되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진보 코스프레의 민낯”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이 정치다


“울산저널 투쟁이 길어질수록 울산지역 노동계와 시민사회계는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울산 노동 시민 사회계는 울산저널 경영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울산저널의 경영진이 벌이는 횡포를 멈출 수 있다. 애초 울산 시민사회계가 시민주주신문 울산저널을 만들었고, 그들이 수백 명에 달하는 주주다. 울산저널 투쟁은 울산 노동계와 시민사회계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나타내는 지표다(윤태우 기자, [울산 노동계 단상] 중에서)


윤태우 기자의 위 질문은 대공장 정규직 남성 중심의 민주노총 운동, 울산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자 뼈아픈 성찰의 대상이어야 한다. 속 시끄러운 일에 침묵하면서 조금씩 비겁함을 나눠가진 나를 비롯한 울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지 않는가? 운동의 건강한 지표를 보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부끄러움을 안다는 건 아직 심장이 서류뭉치처럼 딱딱하게 굳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낮은 곳에서의 비판적 호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이 남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심장이 사막화되어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들, 왕년에 민주노총에서 한 자리가 차지했던 자들이 부르주아 정당으로 기어들어갔다는 소식을 일하다 휴게시간에 접했다. 난 민조노총 운동의 상층부에 자갈밭처럼 깔려 있는 이 자들보다 윤태우 기자의 호소에 화답하는 것이 백배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투쟁은 젊은 세대의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은 젊은 세대의 것이었고 그들에게 낡고 부패한 한국노총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낡고 부패한 한국노총에 맞서 그들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었고 스스로를 민주주의로 조직했으며 전 계급적인 요구를 중심으로 전투적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한 때 노동운동의 성지라 불렸던 울산은 지금 거대한 반혁명의 진지로 굳어진지 오래다. 민주노조운동의 흔적만이 낡은 형식으로 굳어져 있다. 투쟁의 젊은 세대들에게 민주노총이 과거 한국노총처럼 타도의 대상으로 기울어져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윤태우 기자의 질문에 화답할 필요가 있다.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었고 노동자 민주주의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활력 있는 비판과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울산 노동운동 내부에서는 공개적인 비판과 논쟁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복잡하고 민감한 사안에는 회피와 침묵이 최선이 되었다. 비판은 비난으로 받아들여지고 고슴도치처럼 적대감정만 키웠다. 그렇게 비판과 토론, 실천과 검증, 권위의 구성은 사라진지 오래고 오직 자본가계급과 협력하는 자들의 권력의 배분을 위한 협잡과 거래가 있을 뿐이다. 토론이 사라진 조직은 이미 죽은 조직이다. 비판과 토론이 억압되고 위계적 질서와 관료적 명령이 결합 된 울산노동운동은 오늘, 자본가계급의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됐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언론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 배후·음모론은 특별할 것도, 충격적일 것도 없는 타락하고 부패한 울산노동운동의 일부분이며 그 자양분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독자와 주주들에게는 진보 코스프레로 징징되고 한 편에서는 배후·음모론과 물리적인 위력을 사용해 울산지역의 비판을 잠재우고 침묵을 강제하려 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싸우고 있다. 그들은 해고자고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알며 혁명적 전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운동의 위계는 없다. 윤태우 기자의 인간선언에 화답하고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배후·음모론에 맞서 싸우는 일은 우선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될 것이며 관료적 명령과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폭력의 언어를 우정과 연대의 언어, 노래와 춤과 웃음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에 최적화 된 정치적 언어로 구성되는 것이 노동자민주주의였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우정과 연대의 언어, 노래와 춤과 웃음의 언어로 구성되는 혁명적 전망이며 오직 이 긍정적인 정치적 힘만이 이 운동의 지속성을 강화할 수 있다. 

관료적 명령이 통제하는 울산의 부르주아 노동운동을 노동자민주주의로 대체하기 위한 투쟁은 윤태우 기자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울산노동운동의 건강한 지표를 다시 세워내는 일일 것이다. 인간관계의 폐허로부터 단절하자!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묻자! “진실”은 스스로 행동함으로써 검증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요구다. 
부당노동행위·폭언·폭행에 대해 울산저널 경영진은 공개 사과하라.
책임자를 처벌하라. 



[각주1] 난 울산저널 경영진의 모욕감을 이해할 수 있다. 윤태우 기자와는 다른 입장이다. 난 울산저널 경영진이 살아온 인생 전체가 조롱거리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도 존중받아야 할 빛나는 시기가 있었다. 난 지금 울산저널 경영진의 말과 행위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이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인생 전체가 조롱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윤태우 기자만큼이나 울산저널 경영진도 상처가 깊다고 생각한다. 다만 난 울산저널 경영진이 모욕감을 느꼈다면 분노의 화신이 되도록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비춰 지금의 말과 행위를 되돌아보는 것, 행위를 잠시 멈추고 성찰하며 사과할 일이 있다면 사과할 수 있는 자기 힘을 갖는 것,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오류로부터 배우는 운동가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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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3 20:01 2017/04/1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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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12 10:37

[쟁점] 기본 소득 : 진보의 꿈이 신자유주의의 현실을 충족시키다

존 클라크 | 유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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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인 존 클라크는 온타리오 반빈곤 연합(Ontario Coalition Against Poverty, OCAP)에서 오랫동안 빈곤퇴치 운동을 해온 활동가이다. 


지금까지 기본소득 개념의 역사를 보면 제안은 많이 됐지만 현실화되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제 변화의 시기에 다가서고 있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기본소득 시범사업을 협의 중이다.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의회는 기본소득을 시험해보기로 합의했다. 핀란드,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서도 시범사업이 임박했다.

 

제안되고 있는 기본소득의 형태들은 그 폭이 매우 넓으며, 보통 서로 완전히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로도, 삶을 개선하고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관심이 있는 모델들과 자본주의의 착취 능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모델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범주에 속하는 모델들 사이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소득을 제공하는 ‘보편적 보조금‘이 있고, 어느 정도의 자산수입조사를 수반하는 ‘네거티브 소득세‘ 개념도 있다. 재분배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진영에서 나온 기본소득 제안들은 빈곤과 불평등을 줄이며, 관료주의의 침투를 완화하고자 한다. 위의 온타리오 시범사업 제안은 여기에 속한다. 더욱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목표를 염두에 둔 모델들도 있다. 이 모델들은 기본소득을 통해 일과 소득 사이의 연관성을 끊고 고용주들이 가진 경제적 강제력을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한다. 보통 이러한 아이디어는 아무 조건 없이 안정적이고 적절한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급격한 기술변화 및 ‘노동 없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이 광범위한 무급노동을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논의가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진보적 기본소득 개념들의 공통점은 그 제도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설명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는데 비해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적 기본소득 개념들의 결점들을 더 살펴보고 대안적인 방식을 제시하기 전에,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매달린 칼과 같은 기본소득의 신자유주의 버전을 더 진지하게 고찰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버전
 

찰스 머레이의 매우 반동적 아이디어는 기본소득에 대한 매우 불길한 제안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기본소득 제도는 두 가지 기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의무적으로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대신 연 1만 달러라는 대단찮은 금액이 보편적으로 지급된다. 둘째, 그는 기본소득이 시행되면 다른 모든 복지성 급여제도가 해체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캐나다의 우익 기관인 프레이저 연구소(Fraser Institute)는 최근 블로그를 통해 복지성 급여의 수준이 저임금 노동력의 공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머레이와 동일한 지점을 강조했다.


신자유주의 의제를 강화하는 오늘날의 정부들이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면, 나는 여기에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째, 정당성이라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 특히 기본소득은 ‘진보적‘으로 보이는 포장에 싸여 제공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들을 곧 공통선의 양을 재는 것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온타리오 자유당은 국제적으로 가장 눈에 띈다. 이 당이 사람들을 더 심한 빈곤으로 내모는 동안 기본소득 시범사업 협의는 “보다 나은 방법”이라는 헛된 약속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거짓 논의를 시행할 수 있게 했다 세계은행과 IMF는 긴축 정책과 그 충격에 대한 반발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 점에서 IMF의 경제학자들이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제를 발전시키면서도 진보적인 모습으로 포장할 수 있다. ‘빈곤 감소’라는 신화 이래 세계 자본주의 정책에 있어 가장 좋은 방법 일 수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설계자들이 관심을 두는 것으로 생각되는 기본소득의 두 번째 요소는 가장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기반으로 더욱 탄력적인 노동력을 창출하면서 경제적 압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빈곤법의 전통에서 나온 소득지원제도는 엄격한 규제와 도덕적인 통제를 강조했다. 끔찍한 수준의 부작용과 함께, 이는 전례 없는 규모로 사람들을 저임금 노동으로 몰아넣는 데 매우 유용했다. 이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할 때다. 불안정한 고용시장에서 사람들이 빈약한 임금과 빈약한 복지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경우가 더 잦아질수록, 보다 얌전한 복지제도는 그들을 가장 나쁜 일자리로 더욱 효과적으로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주택을 유지할 수 있을만한 빈약한 소득을 제공하는 사소한 법률 하나가 사람들이 항시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하는데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일종의 추가 임금(wage top up)으로 주어질 기본소득이 고용주들에게 굉장한 지원이 되는 것은 당연히 이 점과 연결되어 있다. 지급액이 빈약하다면 저임금 노동자의 공급은 줄어들지 않겠지만, 이는 고용주들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하거나 임금을 올려줘야 할 의무를 면해주는 보조금으로 기능할 것이다.
 

셋째,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의 가장 큰 장점은, 불충분하며 점점 줄어드는 화폐지급을 받는 이 사람들을 시장 고객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기본소득은 언제나 사회기반시설을 강화하는 최선의 방법은 결코 되지 못할 것이지만, 긴축과 민영화 의제를 강화한다는 맥락에서 재앙적인 처방이다. 이는 사회복지의 상품화에 관한 것이다. 기본소득 지급에 정말 조건이 붙지 않고 그 액수가 꽤 클 수도 있지만, 불충분한 수단과 아주 적은 권리를 가지고 민영화된 옛 사회기반시설에서 상품을 구입해야 한다면 훨씬 더 가난해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본소득의 진보적 지지자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실제로 기본소득 제도와 그 희망을 실현할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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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말했듯이, 대개 기본소득의 재분배 혹은 개혁적 모델들의 제안은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덜 두는 반면, 호감을 키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진보적인 기본소득의 길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판단을 본 적이 없다. 어떤 특정한 기본소득 모델이 채택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정의롭고 공정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본소득을 신뢰할 수 있는 해법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한다.


첫째, 고용주들은 그들의 협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노동자 과잉공급을 반가워하지만 실업문제에 대한 총체적 방기는 사회불안을 가져오기 때문에 소득지원제도가 생겨났다. 고용주들의 마지못한 양보로 제공되었지만, 소득지원 정책들의 필요성은 입증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행되어온 복지성 급여제도는 항상 고용주의 힘이 약화되는 걸 최소화하도록 가능한 한 불충분하게 만들어졌다. 폭넓게 제공되는, 혹은 심지어 보편적이고 적당한 화폐지급은 그 균형을 다른 편으로 크게 기울일 것이다. 이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전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얻어낸 양보가 철회되었다. 노동조합은 약해졌고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되었으며 저임금 노동이 크게 증가했다. 소득지원제도의 약화는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실업자를 위한 혜택뿐만 아니라 다른 제도도, 특히 장애인을 위한 제도들이 악화되어 가장 나쁜 일자리를 위해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회에서 힘의 균형을 바꾸었고, 우리는 대대적인 방어적 투쟁을 하게 되었다. 노동조합과 운동이 우위에 있지 않은 매우 불리한 현 상황을 감안할 때, 현 상황에서 이득을 얻는 자들이 전후 경제호황 시대에 시행된 것만큼이나 전면적인 재분배 사회개혁 제도를 수용할 것이라고 어떻게 가정할 수 있나? 이것을 실현할 계획은 과연 무엇인가?


셋째, 가장 반동적인 사업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우파 정부와 정당들이 기본소득을 고려하고 있으며, 사회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저임금 노동자가 되도록 하는 방식에 중점을 두면서 빈약한 금액을 지급하는 시범사업을 수립하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의 변종이 아닌 진보적 기본소득이라는 상상을 날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관계없이, “노동 없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복지성 급여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일자리에서 쫓겨난 대중들은 급여를 제공받아야 할 것이며, 자본가들은 테슬라 자동차 사장 엘론 머스크처럼 분별 있고 유일하게 합리적인 해결책인 기본소득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미래를 위한 책임 있는 준비를 상상하는 것은 이윤 창출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에 부당한 신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환경재앙에 직면해도 송유관 건설을 중단하지 않는 자본가들이 기술대체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깊이 고민할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가 없다. 포스트-자본주의적 자본주의는 없고 이를 유발할 사회 정책의 혁신도 없다.


최근에 내가 ‘기본소득’ 토론의 패널로 나갔을 때 사회자가 내게 반론을 제기했다. 그녀는 기본소득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아니라고 수긍했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대담한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물었다. 정당한 질문이지만, 우리가 반대하는 것에 대해 현실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여전히 꼭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그것에 일부 진지한 측면들이 있다 해도 말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기가 많은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착취 수준은 높아졌으며 노동계급 운동이 약해졌다. 우리의 요구와 열망은 매우 중요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쟁취할 수 있는가이다. 기본소득으로 경도하고 있는 좌익들의 경향에서 불안한 점은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현실과 그것에 저항할 필요성을 우회하는 사회 정책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영국 노동당과 기본소득


영국 노동당의 제레미 코빈를 둘러싸고 국제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상당한 흥분이 일어났다. 그의 가까운 동맹자이자 노동당의 예비 재무장관 후보인 존 맥도넬은 긴축 합의 파기를 담은 정책의 일환으로 기본소득 채택에 관심을 기울였다. 좌파 사민주의자인 맥도넬은 진보적 기본소득을 위한 ‘최상의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말한 ‘대담한 전망’이 보편적인 화폐지급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하는지 혹은 다른 목적에 헌신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신자유주의에 직면하여 우리가 노동자들과 지역사회의 필요에 기초하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항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목적과 요구들을 생각해서 제기해야 한다고 해보자. 내 생각에 그 때 만일 우리가 보편적인 화폐지급처럼 제한적이며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스스로를 팔아넘기는 짓이다. 기본소득이라는 전망은 뭐든지 팔아먹으려고 하는 부정한 사회의 고객이 되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엄청나게 확장된 무상 의료와 교통 제도를 위해 싸우는 것은 얼마나 대담하고 의미 있는 일인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대부분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주택을 창출하고 확장해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보편적 보육과 많은 종류의 지역사회 서비스처럼 관심을 기울여야할 것들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국가 관료제의 고위관료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힘을 빼앗고, 노동계급이 의존하고 있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기존 소득지원에 있어서 우리는 빈약한 수준의 혜택, 관료주의적 방해,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찌든 도덕적 통제를 잠깐이라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실업자․빈민․장애인이 ‘수치심의 절차’를 통과해야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의 실제 요구에 부합하는 최대한의 재정지원혜택과 프로그램, 생활임금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있다. 이처럼 확장된 서비스에 필요한 비용은 다른 노동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은행 그리고 그 소유주들의 세금 부담을 늘리고 부유세를 징수하도록 압박해서 마련해야 한다.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고 개선하려는 투쟁은 생활임금, 노동현장의 권리, 산업재해 노동자를 위한 실질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노동자 투쟁과 연결되어야한다. 이 외에도 자원 고갈, 오염, 생태적 재앙을 불러오는 ‘기업의 결정들’에 맞서보자.


나는 우리 운동이 신자유주의 질서와 이를 창출한 자본주의 체제와 타협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이 전면적인 개혁 수단이라는 그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기본소득 개념은 체제와 화해하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타협조차 불가능하다. 정부가 사회정책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기본소득 모델은 ‘노동시장의 폭정‘을 끝내기는커녕 더 끔찍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긴축과 민영화 의제는 착취 앞에서 가능한 한 사람들을 힘없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소득지원제도를 필요로 한다. 그 이름을 ‘기본소득’이라고 바꿔 부른다 한들 변하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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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2 10:37 2017/04/1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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