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7/04/27 16:19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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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1996년 광주·마창·울산 등지에서 벌어졌던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들과 그것을 계기로 결성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을 출발점으로 본다면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의 역사는 어느새 20년을 훌쩍 넘어섰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처음부터 ‘비정규직 운동’이라는 일반적 운동을 지향하며 등장한 한국의 비정규직 운동은 금속대공장 하청노동자들의 전투적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90년대 후반 대공장의 전투적 현장주의 전통 속에서 등장한 최초의 하청활동가들은 자신들을 전체 비정규직 운동의 일부로 인식했으며 이 운동의 전위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은 어느 사이엔가 부터 완성차 대공장 1차 하청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하 ‘불파투쟁’)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 7월 22일 현대차 울산공장 하청해고자 최병승 활동가에게 하청업체가 아닌 현대차가 실사용주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이후, 현대차 울산·아산·전주공장에서 벌어진 비정규직노조들의 불파투쟁은 지난 몇 년 간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을 규정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들의 수년에 걸친 치열한 투쟁의 결과로 불법파견 판정 범위는 크게 확대되었다.1) 또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2014년과 2016년 두 차례의 불파 합의를 통해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을 포함한 총 6000명의 현대차 하청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 되는 성과도 얻었다.2) 이로 인해 다른 사업장과 다른 산업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불파투쟁을 준비하는 주체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십여 년의 투쟁을 통해 그 성과만큼이나 많은 약점과 한계를 노출한 불파투쟁이 과연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보인다. 
 

불법판정 범위가 확대되면서 대공장에서 사내하청 고용이 줄어들 것은 분명하다. 이미 촉탁계약직 같은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 고용형태가 나타나고 있으며 제조업에서 기존의 하청노조 형태와 다른 새로운 비정규직 투쟁들도 벌어지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지난 20년 동안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을 평가하고 전망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1.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의 등장 (1996~2002)


흔히 비정규직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 전체를 볼 때 정규직이라고 불리는 특정 기한을 정하지 않는 전일제 고용이 중심이 된 시기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에 불과했다. 산업 자본주의 초기에 노동자에 대한 고용보장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20세기로 넘어와서야 중공업과 대규모 공장제도의 발전, 노동조합의 성장 등의 요인이 결합하여 이른바 ‘정규직’이 비로소 중심적인 고용관계로 확립되었다.3)


금속 대공장의 발전이 정규직 고용관계가 안착되는 계기가 된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 대공장의 비정규 고용은 1970년대 중공업과 대규모 공장제가 도입될 때부터 상당한 비중으로 존재했고 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철강과 조선 산업에서는 현재의 사내하청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간접고용이 널리 활용되었다. 1973년 포항제철(현 포스코) 고로가 처음으로 가동을 시작했을 때 이미 ‘협력업체’라고 불리는 사내하청업체 16개에 2,7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었다.4) 현대중공업의 전신인 현대조선소에서는 설립 다음 해인 1974년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화가 추진되는 것에 반발하여 직영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5)


이처럼 한국의 대공장에서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인 비정규직 고용 형태는 사내하청이다. 원래 하청 혹은 하도급이란 생산과정 일부를 다른 업체에 위탁하는 계약 관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원칙상 하청업체는 독자적인 생산시설 혹은 노동과정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자동차·조선·철강·반도체 등 한국의 주요 제조업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 사내하청은 대공장 생산과정에 노동력만 공급하는 단순 인력파견 형태를 띠고 있다.

산업별 하청노동자 현황 (2010년)

업종

점검대상

원청

노동자 수

하청

업체 수

하청

노동자 수

원청대비 비율

자동차

기아, 르노삼성, 현대, 타타대우, GM대우

56,682

146

10,221

18%

조선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한진중공업, 현대중공업, STX조선

53,780

504

51,427

97%

철강

동국제강(포항), 동부제철(아산), 세아베스틸, 포스코, 현대제철

11,924

57

4,677

39%

전자

노키아TMC, 동우화인켐, 삼성전자(탕정), 하이닉스반도체

59,560

40

7,676

13%

정보

통신

동부CNI, 동양시스템즈, 삼성SDS, 한국휴렛팩커드, SK C&C

16,023

40

5,297

33%

합계

29개 기업

197,969

787

79,298

40%

자료: 고용노동부(2010년), 한겨레신문 2011년 4월 20일자에서 재인용


유럽에서 사내하청제도와 유사한 간접고용은 공장제 형성 초기에 널리 나타났다. 노동력을 통제·관리하고 생산과정을 단일하게 조직하는 자본의 능력이 아직 미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공장제의 확립과 함께 한편으로 자본의 노동력 관리 능력이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발전하면서 이런 고용관행은 점차 소멸되었다. 이와 더불어 20세기에 들어서자 대부분의 산업 국가에서 인력파견을 법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과도한 중간착취, 업체들 사이의 뇌물과 협잡, 지역 사회에서 범죄 등 여러 사회 문제들을 빚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조합의 힘이 강한 제조업에서 단순 인력파견은 많은 나라들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었다.6)
 

후발 산업국가인 일본 역시 2차 대전 이후 간접고용을 전근대적인 고용관계로 규정하고 간접고용을 통한 중간착취를 금지하는 노동기준법 및 직업안정법을 제정했다.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법제도를 모방한 한국도 97년 이전까지 원칙적으로는 인력파견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제조업에서는 지금도 금지하고 있다.7) 하지만 일자리를 알선·소개하는 인력 파견 및 용역업은 어느 나라에서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고, 인력파견의 필요성이 관습적으로 널리 인정된 건설·항만 및 일부 서비스 산업 등을 통해 존속되었다. 노동조합 운동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후발 산업국의 경우 제조업에서도 이를 활용하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5~6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구내하청’이나 ‘사외공’으로 불리는 한국의 사내하청과 유사한 위장 인력파견이 조선 및 철강 산업을 중심으로 널리 활용되었다.8)
 

한국은 1973년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선언’ 이래 국가 정책으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일본을 벤치마킹했고, 설비 운용 기술은 물론 노동력 편제와 관리·운용까지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도입했다. 따라서 사내하청제도 같은 하도급으로 위장된 인력파견 방식은 이 과정에서 한국의 철강 및 조선업에 도입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한국의 사내하청 제도에 대해 연구한 손정순에 따르면 한국에서 70년대 대공장의 도입과 함께 등장한 “사내하청노동은 과거 산업화 이전시기부터 존재해 왔던 일용 청부공제 노동이 산업화 과정에서 변용된 것이라기보다 단절적으로 외부로부터 도입, 형성된 측면이” 큰데, “이 시기 중화학 공업의 대공장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내하청 노동은 여타 부분에 널리 활용되어 왔던 임시공과도 다르며, 건설업종이나 부두 하역 업무에서 활용되어 왔던 청부제와도 다른, 현재 금속산업 부문의 사내하청 노동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등장한 것이다.”9) 한편 70년대 말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80년대 한국의 대공업에서 하청계열화가 정책적으로 적극 추진되며 당시 막 대규모 제조업으로 도약하고 있던 자동차 산업10)에서도 하청업체로부터 파견되어 완성차 작업장에 상주하면서 부품의 납품 및 서열11)을 전담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이는 완성차 공장에서도 사내하청이 도입·확대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대공장 형성 초기부터 상당한 비중으로 존재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크게 줄어들었다. 87년 당시 사내하청 직영화·사내하도급제 개선·일용직 처우개선 등이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 노동자들의 주요 요구였다는 것은 분명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사내하청은 정규직화 되어 일시적으로 없어지거나 하청업체들에도 노조가 건설되어 노동조건이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많은 대공장들에 이른바 ‘신경영 전략’이 시행되면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경영 전략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공장에 등장한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 및 파괴 전략에서 벗어나 노조를 인정하는 한편, 아래로부터 조합원들을 포섭하고 장기적으로 노조의 투쟁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정부와 자본은 89년 무렵부터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중소영세사업장 중심으로 조직된 전노협의 경우, 이러한 탄압에 의해 많은 사업장에서 노조가 무너지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대공장에서도 정부와 자본의 강경한 노동탄압은 90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 등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의 탄압은 대공장에서 민주노조의 기세를 꺾어놓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자본은 방향을 선회하여 대공장 민주노조의 존재를 인정하고 단협을 정례화 하는 등 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포섭을 시도하는 한편, 소사장제 등을 통해 직접 관리하던 생산·라인 공정을 분리하여 하도급화 하는 방식으로 사내하청노동자들을 다시 늘리기 시작했다.12) “이처럼 89~90년부터 소사장제로 시작된 자본의 신경영 전략의 확산 속에서 … 현대중공업 및 현대자동차 등에서도 작업장 내 사내하청 노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현대중공업을 포함한 조선업종의 경우 90~96년 기간 동안 전체 조선업종 생산 기능직의 34%를 사내하청 노동이 차지할 정도로 증가하면서, 조선업종의 직영 기능직을 대체해 갔으며, 대부분의 금속 대공장에서 신경영 전략이 본격화한 93년도 이후부터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13)
 

때문에 흔히 비정규직 확산의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 되는 IMF 사태와 98·99년의 구조조정 공격 이전에도 조선·철강·자동차 등 금속대공장에는 상당한 규모의 하청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조선소에서는 90년대 말 하청노동자들의 비율이 전체 현장 노동자의 40%를 넘어섰다. 완성차 공장에서도 현재 기아차 광주공장인 아시아자동차에서 97년 16개 업체에 하청노동자 1400명이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현대자동차도 구조조정 시기이던 98·99년에 정규직에 대비한 하청노동자들의 비율이 이미 20%에 육박하고 있었다.
 

⑴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의 결성 (1996~1997년)
 

90년대 중반을 거치며 금속대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정규직과 노동조건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87년 이전에도 정규직과 하청노동자들은 물론 처우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었다.14) 일의 종류에 따라 하청의 임금이 더 높은 경우도 꽤 있었다. 90년대 이후 정규직과 하청의 노동조건이 벌어지게 된 것은 노동조합의 존재 여부에서 기인한 면이 컸다.
 

90년대를 거치며 자동차·조선 산업의 거의 모든 대공장에 민주노조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하청노동자들은 기업별로 조직된 정규직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다. 87년 투쟁의 여파로 포항제철 등 몇 군데에서 사내하청업체 노조가 만들어졌지만, 전노협 소속이었던 이 노조들은 90년대 초 대대적인 탄압으로 존속되지 못했다. 반면 금속대공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협상과 단체협상의 제도화를 통해 노동조건을 착실하게 개선해나갔다. 하청노동자들은 이러한 노조의 울타리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며, 이는 고스란히 노동조건의 격차로 나타났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90년대 중반 몇몇 대공장에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졌다.
 

96년 6월 마산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서 같은 하청업체 소속 하청노동자 60여 명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투쟁을 진행했다. 두 달 동안 투쟁했으나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 거의 전부가 해고되며 패배로 끝났다.
 

같은 해 10·11월에는 현대중공업에서 상선이라는 하청업체 노동자 70명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 투쟁에 나섰다. 하청노동자에게도 단협을 적용하라는 요구에서 출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규직과 차별적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투쟁이었다. 10일 파업 끝에 시급 인상, 격려금 등의 성과를 냈으나 노조 건설이나 가입 같은 조직적인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97년 8월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 광주공장) 용역하청노동자 200여명이 집단 해고되었다. 이들은 체불 임금과 용역문제 해결을 위해 아시아자동차 용역노동자 대책위원회(이하 ‘아시아용역대책위’)를 구성해서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정규직노조와 지역 노동·시민 단체들이 “회사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었고, 정규직 조합원들 사이에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우선 해고와 체불임금에 대해 “회사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15)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용역대책위는 노조 설립을 포기하고 퇴직금과 체불임금을 받아내는 선에서 투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16)
 

한국중공업 투쟁과 아시아용역대책위의 투쟁은 공장에 위장 취업한 활동가들이 주도했다. 현대중공업 투쟁은 자생적으로 일어난 투쟁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현장에 하청노동자로 취업해 있던 활동가들이 현대중공업 외주노동자모임을 조직했다.
 

최초의 하청 활동가들은 대부분 급진적 정파운동과 연결된 전투적인 활동가들이었다. 96·97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장에 잠복하고 있던 이들이 스스로를 하청 활동가로 규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17) 이 시기 형성되고 있던 대공장의 선진노동자 운동질서는 이들에게 결집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97년 9월 대전 가톨릭 농민회관에서 진행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 울산 현대중공업 외주노동자모임과 아시아자동차 용역노동자 대책위원회 활동가들이 만나 상호교류를 약속했다. 그 결과 97년 11월 9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사내하청·파견노동자가 전국의 노동형제에게 드리는 긴급제안서>라는 유인물을 공동으로 발행하여 배포했다.
 

이 유인물을 본 몇몇 지역 활동가들이 더 결합하고 몇 차례의 논의를 거쳐 98년 1월 ‘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준비모임’이 발족했다. 이후 이 모임은 ‘비정규직노동자전국모임’으로 명칭을 개정했다가 다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이하 ‘전국모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초 전국모임의 설립 목적은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받아 안도록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전국모임의 초기 활동은 조직 노동자들과 민주노총 및 그 산하 연맹들에 비정규직노동자의 조직화의 중요성을 알리고 이에 대해 공동의 대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이슈 파이팅 활동이 중심이었다.18) 98년 이갑용 전 현대중공업노조위원장이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당선되면서 비정규·미조직 조직화를 전담할 조직 2국이 설립되고, 민주노총에서도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이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애초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자 98년 말 전국모임은 향후 모임의 전망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이 논의에 제출된 한 입장은 전국모임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하는 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자기 전망으로 잡아야 하며,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특수한 조건, 즉 고립성·분산성·유동성 때문에 초기업적인 비정규직일반노조 건설을 목표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 지역에서 지역 비정규직노조를 만들고 이를 기초로 전국적인 비정규직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국모임의 회원 다수는 이런 주장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를 심화시키는 형식주의·조합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으며 현장에서 원하청 공동투쟁을 우선적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의 결과 비정규직노조 안은 철회되었고, 대신 전국모임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하는 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로부터 전남 목포‧영암 지역에 소재한 조선사업장인 한라중공업(현 삼호중공업)에서 하청노조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비정규직노동자의 투쟁이 정규직노동자들과 함께 대공장 자본을 타격하는 공동투쟁을 지향해야 한다는 전국모임 회원 다수의 경향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전국모임의 첫 번째 비정규직노조 건설 사업은 목포‧영암지역비정규직노조가 아니라 최초의 대공장 비정규직노조인 한라중공업하청노동조합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계속)

 

<각주>----

 

1) 2014년 9월 18·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현대차 하청노동자 1,247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선고는 2010년의 대법원 판결보다 더욱 확대된 사실상 현대차에 근무하는 모든 하청노동자가 불법파견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 9월 25일 기아차 하청노동자 499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선고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동일한 취지의 후속 판례가 계속 등장하고 있어 적어도 자동차산업에서 사내하청의 불법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2) 2014년 8월 18일 현대차와 정규직노조, 현대차 아산공장사내하청지회, 전주공장사내하청지회가 맺은 불파 합의(소위 ‘8·18 합의’)는 현대차가 여전히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이미 채용된 2000명을 포함 4000명의 하청노동자들만을 정규직 ‘전환’이 아닌 정규직으로 신규채용 하는 것을 정당화함으로써 서울중앙지법의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판결을 앞두고 현대차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또 체결권자인 금속노조가 빠진 상태에서 합의가 이루어져 합법적 효력도 논란이 되었다. 2016년 3월 21일 현대차와 현대차비정규직지회(울산공장)이 체결한 불파합의 역시 ‘8·18 합의’의 문제점들이 극복되지 않은데다 합의 체결을 앞두고 비정규직지회가 신규 조합원 가입을 거부하면서 많은 논란을 낳았다. 

 

3) 이태영, 「비정규직 운동 : 조합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사회주의노동자> 4호 (2006.8)

4) 당시 사무직을 포함한 포항제철 전체 정규직의 수는 3,793명으로 정규직 대비 하청노동자의 비율은 이미 69%에 이르렀다. (손정순, 「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2009. 9. 9))

 

5)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 논문(2009. 6) 

6) “본질적으로 ‘사람을 사고 파는’ 이러한 인력공급업 성격의 간접고용에 대한 법·제도적 규제는 이후 1919년 ILO 설립 당시의 핵심적 원칙이 되었다.” (손정순, 「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7) 따라서 제조업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사내하청은 산업과 업종을 불문하고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이는 실제로 불법파견 진정 이후 대다수의 판례가 증명하고 있다. 불법파견 입증이 어렵다는 조선 산업에서도 2010년 3월 노조 활동으로 해고당한 현대중공업하청노조 이승열 전 사무국장에 대해 “현대중공업은 사내하청 노동자의 사용자”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8) 이하 사내하청의 역사와 한국에서 도입과정에 대한 서술은 손정순의 논문들(「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을 요약한 것이다. 

 

9)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88

 

10)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88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88

 

11) 서열이란 부품사로부터 공급된 부품들을 완성차 라인에서 조립하기 용이하게 배치해 주는 작업을 말한다. 

 

12) “90년대 초에 주로 활용된 (소사장제의 — 인용자) 방식은 ‘기존 공정을 분리 → 기존 공정(라인)의 책임자인 조·반장 퇴사 후 신규 사업주로 등록 → 하도급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경우 기존 공정(라인)의 생산 기능직까지도 해당 사업주 소속으로 이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사장제의 경우, 대부분 원래 담당하던 업무를 소속 사업체만 변경된 채 수행하기에 전형적인 노무 용역만을 제공하는 사내하청 업체화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손정순, 같은 글, p.145)

 

13) 손정순, 같은 글, p.148

 

14) 현대중공업의 경우에도 87년 이전에는 “내주하청, 임시일용공 등으로 통칭되는 비정규직노동자와 정규직노동자의 노동조건, 작업장 내 지위 등에 있어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손정순, 같은 글, p.141) “그때(87년 이전 시기)는 다른 거라고는 월급봉투 색깔밖에 없었어요. 작업 지시도 현중에서 했고, 승진, 근태 모든 게 직영하고 똑같았고, 다 현중에서 했죠. … 실제로 내주 사람들(사내하청 소속 노동자)하고 직영하고 지금처럼 거리감이라든가 그런 거도 전혀 없었고요. 그냥 다 현중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02. 10월 현대중공업 정규직노동자 인터뷰 자료, 같은 글, p.111에서 재인용)

 

15) 당시 아시아차 노조와 지역 노동·시민단체들은 대부분 ‘아시아자동차 살리기 범시민대책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16) 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지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비정규직 투쟁 평가 자료집」

 

17) 대략 95년경부터 금속대공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길이 극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전에 안정적인 정규직 취업 루트로 여겨졌던 공장 부속 직업훈련원이 더 이상 정규직 입사로 직결되지 않게 되었다. 직업훈련원을 수료해도 직영이 아닌 하청으로 채용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문에 90년대 중반 이후 금속대공장에 취업하고자 하는 활동가들은 하청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대개 당시 대공장에 형성돼 있던 현장조직 같은 선진노동자 운동질서에 개입하거나 활동을 드러낼 계기를 엿보며 잠복하고 있었을 뿐, 아직 스스로를 ‘하청 활동가’로 자각하진 못하고 있었다.

 

18) 사회진보연대,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위기: 불안정노동 연구>,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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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7 16:19 2017/04/2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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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18 19:08

[붉은글씨 5호][서평] 추방된 자들의 신세계

어슐러 K. 르귄, <빼앗긴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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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인|가사노동자

 

<빼앗긴 자들>은 커트 보네거트나 필립 K. 딕의 소설들과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는 SF 소설이며, 또한 많은 이 장르의 소설들과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걸작이다. 이 소설은 어슐러 K. 르귄의 헤인(Hein)연대기들 중 하나다. 오랜 옛날 헤인이라는 문명은 우주 곳곳으로 흩어져 식민지를 개척하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헤인 문명은 멸망하고 인류는 자신들이 정착한 행성에서 각기 (정치·사회·경제적 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서로 다르게 발전한다. 헤인 연대기는 오랜 세월이 지나 은하계 사이를 여행할 정도로 문명을 회복한 인류가 우주 곳곳에 고립되어 발전하고 있는 다른 인류들을 찾아 교류하는 것을 중심 이야기 줄기로 가져간다.
 

<빼앗긴 자들>은 행성 우라스와 그 위성 아나레스를 배경으로 한다. 행성 우라스의 사회체제는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와 유사하다. 이 사회는 차이와 차별(부자와 빈자, 자본가와 노동자, 남성과 여성, 그리고 기타  등등)을 기초로 세워진 사회이다. 수 백 년 전 행성 우라스에는 오도라는 여성 사상가가 나타나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사상을 퍼트린다. 오도니언이라고 불리는 오도주의자들은 박해를 피해 척박한 위성 아나레스로 떠나 자신들의 이념에 따라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한다.


아나레스에서 태어난 물리학자 쉐벡은 동시성 이론이란 새로운 이론을 수립하지만, 먹고살기도 힘든 아나레스 사회에서 그의 이론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쉐벡은 오히려 우라스에서 자신의 이론이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뼛속까지 오도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교류를 위해 우라스로 떠날 결심을 한다. 소설은 쉐벡이 우라스에서 겪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빼앗긴 자들>의 원제는 “The Dispossessed”이다. 이 제목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첫째는 추방된 자들이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소유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세 번째는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의 영어제목 “the possessed”의 패러디로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바쿠닌의 제자인 무정부주의 혁명가 네차예프가 조직의 배신자를 살해한 유명한 사건을 보고 <악령>을 썼다. 그에게 당시 러시아 청년들을 사로잡고 있던 혁명사상은 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possessed”라는 것은 귀신들린 자들, 악령에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악령>으로 번역되었다. <악령>은 귀신들린 돼지들이 미쳐 내달리다가 강물에 빠져죽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되고, 혁명사상에 경도된 젊은이들이 서로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죽이다가 모두 파멸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the dispossessed”라는 원제는 혁명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귀신에 들린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들, 깨어있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사실 <빼앗긴 자들>이라는 한국어 번역은 그다지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오도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은유로 생각되지만, 사실 마르크스주의라기보다는 19세기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나 프루동, 바쿠닌 류의 아나키즘과 더 유사해 보이며, 르귄도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나레스와 우라스의 관계가 미국과 소련의 비유로도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자본주의 사회와 어디 먼 오지에서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와 더 유사하다. 우라스가 사실 아나레스를 별로 위협적으로 느끼지도 않는다는 것을 볼 때 더 그렇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훌륭한 점은 1960~70년대 급진주의가 제기한 새로운 문제들을 받아들인 사회주의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었다는 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등장한 정치적 급진주의 운동과 유토피아주의를 계승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전반적 틀은 1848년 혁명 직전 <공산주의자 당 선언>으로 처음 구체화되었는데, 이는 자신이 빚지고 있는 전통들과 여전히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략 1880년대 말에서 90년대 마르크스주의가 실제로 현실 노동운동과 결합해 들어가면서 그러한 급진적 이상주의의 상당부분은 삭감되었다.
 

마르크스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며 대중정당이 된 독일 사민당은 가족, 여성문제 있어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들의 당면 실천과제는 무엇보다도 보통선거제와 8시간 노동제의 쟁취였다. 독일 사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의 해설에서 강령 전문의 작성자이자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을 주도하는 이론가였던 카우츠키는 국가 사회주의적 색채를 분명히 했고, 가족의 유지, 여성노동 금지 등을 정당화했다. 또한 보통선거제에서도 독일 사민당과 제2 인터내셔널은 남성들만의 보통선거제 확대를 받아들였다. 이는 초기부터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운동을 분리시키는 주요한 쟁점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가족은 점차 사멸할 것이며 그 기초는 자본주의의 기계제 공업의 발전으로 여성/아동과 남성 성인의 육체능력의 간극이 좁혀짐에 따라 사회성원 전체의 노동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원칙적으로 여성/아동의 노동참여를 반대하지 않았다. 국가에 대해서도 단지 과도적 형태의 준국가를 인정했을 뿐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사멸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무정부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말의 제2 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적 보수화는 1840년대와 1890년대 노동자계급의 상황의 차이에서 기인했다. 실제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0년대 영국의 공업단지에서 보았던 것은 프롤레타리아 가족 성원의 전반적인 노동참여와 그에 따른 가족의 해체였다. 그들이 본 당시 영국 노동자계급의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일가족은 쪽방에서 집단 거주를 했으며 아이, 여성, 남성 가리지 않고 모두 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부르주아 역시 생활형태가  점차 귀족화되며 초기 부르주아의 도덕적·가정적 건실함은 점차 사라지고 부르주아 혁명 전야의 귀족들처럼 성윤리가 해체되고 있었다.
 

<당 선언>은 공산주의자가 성윤리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비판에 대해 부인공유제를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부르주아들이라고 비판의 칼날을 거꾸로 돌렸다. 비록 엥겔스가 남성 1인과 여성 1인의 배타적 관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것을 독단화한 적은 없으며, 과연 마르크스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기존 가족의 해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분명 자본주의 발전의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경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890년대 독일 노동자들은 1840년대 영국 노동자들 같은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진 않았다. 그것은 동시대 영국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엥겔스는 1891년에 이미 영국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장기적인 노동조건의 개선에 의해 귀족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빅토리아 시대말 영국 노동자들과 동시대 독일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적 가정적 견실함에 젖어들고 있었다. 이는 흔히 ‘가족임금’이라고 불리는 것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19세기 말에 면방직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에서 기계, 철강 등 중공업으로 자본주의 산업재편이 이루어지면서 여성과 아동은 대거 가정으로 축출되었다. 이는 성인 남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조직적 투쟁을 통해 가족을 부양할 만큼 고임금을 확보 받은 것과, 공장법과 보통교육  같은 제도의 도입과 궤를 같이 했다. 이 속에서 성인 남성 노동자들의 의식은 급속히 부르주아화/보수화되었다. 결국 보수화된 사민주의는 혁명을 지향하는 정당이라기보다 체제 내의 개량주의 정당으로 발전했다. 1차 대전으로 빚어진 유럽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국면 속에서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급진적 이상주의는 치머발트 좌파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 판네쿡,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제2 인터내셔널의 국가주의, 의회주의에 의해 억눌린 코뮨주의를 복원시키고자 했다.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맞선 혁명적인 페미니즘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런 이상주의의 부활은 1921년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후퇴와 자본주의화에 의해 다시 압살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라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윤색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장기호황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보수화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기존 사회주의 정당들의 관료화·보수화도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 위기에서 다시 대중운동으로 등장한 급진주의적 이상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성, 가족, 동성애, 인종에 대한 문제제기를 기존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68년의 대중운동에 대한 기존 사회주의 정당의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노동자계급에 기반 하지 않고 경제적 분배의 문제보다 사회적 소수의 민주적 권리 확보를 중심 과제로 삼는 새로운 좌파, 즉 신좌파 운동을 등장시켰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나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를 자신들의 이론적 기초로 받아들였다. 모든 문제를 일상에서 개인의 저항으로 환원하는 신좌파의 경향도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신좌파가 제기한 문제들을 배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주로 조직된 노동자계급에 기반 하고자 하는 구좌파 세력들은 점점 더 조합주의·국가주의적 성격으로 빠져 들어갔다.
 

<빼앗긴 자들>은 초기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가 가졌던 급진적 이상주의의 비전을 구체적 상상력을 통해 풍부하게 보여준다. <빼앗긴 자들>이 제시하는 가족과 국가가 없는 사회운영의 가능성과 자유로운 성윤리는 많은 영감을 준다. 이것은 분명히 르귄 자신이 경험했던 60년대 후반과 70년대 대중운동의 이상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단순히 이러한 사회를 이상화하는 것을 넘어 어떻게 이러한 사회가 폐쇄적이 되지 않고 발전적이 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쉐벡은 오도주의의 이상을 믿지만 외부와의 교류를 거부하는 아나레스 사회의 경직된 구조 속에서 관료주의와 사회적 퇴행이 이미 나타나고 있음을 직시한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결국 쉐벡은 아나레스 사회체제 자체가 위협받을 가능성을 알면서도 교류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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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8 19:08 2017/04/1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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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17 14:43

[붉은글씨 5호][문화] 다큐집단 유랑을 만나다

김수목 감독님 인터뷰
인터뷰 및 정리 : 붉은글씨를만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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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유랑이라는 다큐 작가들의 공동체가 있다. GM대우 부평공장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한 <니가 필요해>의 김수목 감독, 재능교육 투쟁을 기록한 <명자 나무>의 김석 감독 등이 소속돼 있다. 다큐유랑에서 활동하는 김수목 감독을 만나 다큐유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다큐라는 장르가 포함된 독립영화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독립영화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A 독립영화를 말하기에 앞서 ‘독립’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는지에 따라 설명은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저와 다큐유랑 그리고 독립영화 진영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온 ‘독립’의 정의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입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도 각 제작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자본주의와 권력이라는 ‘외부적 압력으로부터의 자유로움’으로 해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독립’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들이 ‘독립영화’가 되겠습니다.

이러한 독립영화의 의미는 무엇보다 각양각색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함에 있습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의 가치는, 비록 가난하고 그 영향력이 작다고 해도, 각양각색의 작은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전달하고 함께 나누면서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인 한 사회가 어느 한쪽으로 경도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소소한 몸부림에 있습니다.

 

Q 다큐 유랑의 탄생 과정과 활동을 소개해 주세요.

 

A 우선 저 역시 <니가 필요해>를 만들고 몇 번의 상영 이후 앞으로 어떻게 상영‧배급을 해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던 중 먼저 <자전거, 도시> 마지막 편집 중이던 서울영상집단 공미연 감독 및 김청승 감독이 속한 신다모(신나는 다큐모임)에서 배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며 제안을 했고 그 제안에 솔깃한 몇몇의 제작자들이 모였습니다.

<자전거, 도시> 의 서울영상집단, <니가 필요해>의 저와 배급 PD, 부산영화제 상영 이후 배급로를 고민 중이던 <불안한 외출>의 다큐창작소, <늘샘천축국뎐>을 배급 중이던 늘샘, 영화제 상영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던 <바보들의 행군> 제작팀이 그 멤버들입니다.

각자의 상영‧배급에 대한 고민 및 새로운 배급 방식에 대한 생각들을 모으고 어떤 형태의 배급을 하고 싶은지 의견을 모으며 이름을 <다큐유랑>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극장을 벗어나 각 지역의 관객을 직접 찾아가서 웃으며 즐기며 함께 영화 보기를 꿈꾸는 유랑 상영단이 되기를 희망하며, 다큐유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2015년 2월 첫 모임 및 본격적인 회의를 거쳐 2015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활동소식을 처음 알렸고, 강릉 봉봉방앗간에서 다큐유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한편씩 5편의 다큐를 처음 상영하였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인천여성영화제, 대구사회복지영화제 등 영화제를 다니며 다큐유랑 홍보 및 소식을 알리기도 했구요. 텀블벅 후원모금을 통해 작년 8, 9월에는 본격적으로 전국 13개 지역을 다니며 다큐유랑의 원래 취지에 맞춰 지역의 관객을 만나고 수다 떨며 각 다큐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016년에는 장편 7작품과 단편 2작품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2~4월 다양한 상영을 마련하기 위해 각 팀별로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 현재 서울, 순천, 강릉, 천안, 안산 등에서의 유랑상영을 진행 중이며 준비 중에 있습니다.

 

Q 영상활동가에서 다큐 감독으로 변신(?)하셨는데 달라진 점이 있다면? 김수목 감독과 같은 과정을 겪은 분들도 계신가요?

 

A 저는 그냥 저입니다.(흐흐) 영화제에서 상영을 하면 감독이라는 호칭이 붙고 영화제 상영을 하지 않으면 많은 시간 현장에 있어도, 영상을 아무리 만들어도 그냥 영상활동가로 불리어지므로 밖의 시선에서 보면 저는 영상 활동가에서 다큐 감독으로 변신(?) 했다고 보여 질 수도 있겠지만, 저는 단지 짧은 영상, 중편 영상을 만들던 사람에서 장편을 만들고 영화제 및 좀 더 많은 곳에서 상영을 많이 다니게 된 것이 달라진 점일 뿐입니다. 그랬더니 주변의 시선과 호칭이 달라지네요. (흐흐) 저와 같은 과정을 겪은 분들은 많으실 것 같아요. 현장에서 늘 촬영 및 편집하다가 장편을 만들려고 하면 작업 시간을 확보해야 하므로 현장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 영상이 완성되면 상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주변의 좋은 반응을 얻게 되면 이곳저곳에서 또 계속 상영을 하게 되면서 감독으로 불리어지게 되고, 그러면서 또 현장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지요.

 

Q 다큐유랑에서 상영하는 방식은 기존의 극장상영과 어떤 차이와 의미가 있나요?

 

A 다큐유랑 상영은 우리가 선택하고 기회를 열어보고자 합니다. 자본의 시스템에 의해 선택받기를 기다리고 배제됨에 실망하며 수동적으로 상영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어보고자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상영공간을 뚫고 관객을 찾아가려 합니다. 공간과 관객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 활용이 가능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아니라 원하는 만큼 충분히 소통하고 공감하며 우리의 시간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Q 다큐멘터리 영화(독립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는 데 있어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A 안정적으로 작업에 매진할 수 없도록 하는 ‘돈 문제’가 일차적이겠지요. 제작지원이 늘어나긴 했지만, 거대기업에서 주는 자본의 제작지원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공적인 제작지원은 한정되어 있구요. 그리고 독립영화, 독립다큐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 사회의 보편적인 시선도 어려움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보이고 소통하고자 함인데 보려는 사람들이 없고 상영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고, 이런 과정들이 지속적으로 작업을 할 수 없게 하는 주요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Q 노동자 투쟁을 영화로 제작하는 일이 주는 의미는 특별할 것 같은데, 본인과 주인공들, 관객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A 상영을 하면서 관객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이 ‘감사하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예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거나, 언론에서 몇 줄의 글과 몇 장면만으로 보여 지던 현상들이 구체적인 인물을 통해 자세하게 그려지다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투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노동자 투쟁뿐만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영화로 담아낸다는 것 자체가 모두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그저 제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비정규직 문제를 한 편의 영화로 완성하여 계속 보여줄 수 있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나의 상처와 고민이 치유되고 소통된다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제가 이후에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은, 글쎄요 … (흐흐) 어떤 영향이 있었을까요? 상영을 할 때마다 마지막에 꼭 이분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도 현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고 이들의 현실은 여전히 불안하다고. 그래서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이 늘 필요하다고! 노동자의 투쟁을 담은 영화가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또 끼칠 수 있는지 관객들을 통해 그 답이 보여지기를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인공들은 영화와 상관없이 지금도 그 자리에서 치열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니가 필요해 2>를 찍으라는 듯이 …

 

Q 영화를 관람한 관객의 반응이 다양할 텐데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 소개해 주세요.

 

A 위에서도 말했지만 ‘감사하다’라는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그리고 90년대 말에 대우자동차를 다녔거나 2001년 대우자동차 구조조정 투쟁에 함께하셨던 분들이 영화를 보고 울분을 터트렸던 일, 자신도 비정규직이라며 본인의 노동에 대해 하소연하던 분도 기억에 남구요.

모든 상영들이 다 소중하고 행복했는데, 작년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상영할 때 SK, LG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체관람을 하셨었어요. 당시 명동 CCTV에서 두 분이 고공농성을 하고 계셨구요. 영화를 본 당일, 조합원 분에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농성장에 와줄 수 있냐고. 일정을 마치고 11시가 넘은 늦은 밤, 농성장에 찾아갔습니다. 우리하고 상황이 너무 똑같다며, 우리 회의실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고. 본인들의 답답하고 속 터지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같이 속 터졌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첫 관객이면서 영화 속 주인공이기도 했던 친구가 “우리는 이제 그 시간을 벗어나서 살고 있는데 수목은 여전히 그 시간 속에 있다”며 울먹이며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친구의 말이 맘속에 크게 남아 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A (흐흐) 뭔가 작업을 계속하고 싶은데 쉽사리 시작되지가 않네요. 내 역할이 무엇일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Q 다큐 유랑의 멤버로써, 다큐 영화감독으로써 관객들에게 당부의 한마디?

 

A 방송에서 보여지는 다큐가 다큐의 전부는 아닙니다. 유랑 상영을 하다 보면 이런 다큐가 있는지 몰랐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이런 다큐 많이 있으니까요!! 상업영화, 개봉되는 영화도 보지만 작은 영화제, 소소한 상영, 각양각색의 다양한 영화에도 관심을 많이 가져주세요.

페이스북에서 다큐유랑 치시면 페이지가 떠요. ‘좋아요’도 눌러주시고, 다큐유랑 활동 및 지역상영에도 많이 와주세요. 살기 힘든 세상, 서로서로 응원하고 지지하며 같이 살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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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7 14:43 2017/04/1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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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13 20:01

[쟁점]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묻는다

 

[기고]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에 맞선 투쟁
 

2012년 7월 20일 창립주주총회를 연 울산저널 [출처] 울산저널 페이스북 [출처: 울산저널 페이스북]


관계는 끊임없이 묻는 것이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의 균형을 잡는 일이라고 난 생각한다. 특히 삶-운동에 있어 비판과 논쟁은 관계의 균형을 잡는 핵심적인 수단과 방법이다. 

전 울산저널 윤태우 기자가 지목하여 폭로하고 항의했던 울산저널 경영진들은 나와는 오래된 인연이다. 이 자리에서 이 인연을 다 적을 필요는 없지만 그들은 어느 한 시기 같은 투쟁의 자리에 있었고 함께 했다. 그들은 내게 도움을 주고 나를 지지하고 존중해줬다. 내 마음의 한 자리, 아직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 남아 있다. 난 이 오래된 인연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여기 하나의 사건이 있고 입장은 첨예하다. 지금은 오래된 관계를 중지시키고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내가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에 맞선 윤태우 기자의 투쟁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박일수 열사 기일을 맞아 울산에 내려온 직후, 한 동지가 보여준 윤태우 기자의 글모음이었다. 난 윤태우 기자를 전혀 몰랐지만 울산저널 경영진들과의 오래된 인연에도 불구하고 윤태우 기자의 항의와 요구는 정당해 보였다. 또 한 편에서는 내 오래된 인연의 사람들이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를 못 견뎌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쟁점들은 드러난 현상이었을 뿐이고, 서로 모욕당하고 상처 받은 마음을 다스려주지 않으면 이 문제는 더 거칠어지고 잔인해질 것이라 예감했다. 서로의 감정을 덧나게 하지 않으면서도 이 문제를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동지가 울산지역에 있으면 좋겠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울산을 떠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시 이 문제가 내 삶에 다가온 건 윤태우 기자의 해고가 일정에 오르고 울산지역에서 항의성명서 연서명을 조직하기 위해 연락이 오면서다. 난 기본 입장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고 연서명에 참여했다. 그러나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악화되어 갔고 더욱 거칠어지고 잔인해졌다. 

윤태우 기자의 요구는 지극히 소박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달라는 호소였으나 울산저널 경영진은 솔직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았다. 말을 바꾸고 변명했다. 심지어 숙소문제를 제기하는 윤태우 기자를 숙소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로 모욕하기까지 했다. 이 초기 대응 과정을 보면서 왜 이따위로밖에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좌파꼰대가 따로 없었다. 아마 이즈음에서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태우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힘이 있고 자기 행위를 성찰했다면 문제 해결의 수단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은 끝까지 솔직하지 않았고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를 못 견뎌하면서 그의 요구를 ‘거짓비방’, ‘명예훼손’으로 몰아가기 바빴다. 단체협상 과정에 있는 윤태우 교섭위원을 경찰에 고소하고 징계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업무규정을 신설해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직장 내 따돌림과 집단 괴롭힘, 쌍욕과 폭행을 자행하고 마침내 부당해고 하고 복직한 그를 또 다시 부당정직까지 시켰다. 부산지노위는 울산저널 경영진의 행위가 부동노동행위, 부당정직이라고 판정했지만 이 전체 과정은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태우 기자의 항의를 진압하기 위한 조직된 폭력이자 정서적 학대였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사용자의 지위가 낯설고 또한 서고 싶지 않았지만 사용자의 지위를 분명히 자각하면서부터 드러난 특징들이 있다. 첫 번째는 비판을 못 견뎌하고 직장 내 문제가 울산지역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으며 공격의 가시로 자신을 무장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비판을 억압하고 파괴하기 위한 정치적 무기들을 유능하게 사용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는 “거짓비방”으로 몰아가고 울산지역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모든 비판자들은 “울산저널을 죽이기 위한 배후”로 낙인찍었다. 모든 비판은 울산저널을 죽이기 위한 배후·음모론으로 대체되었고 쌍욕과 집단적이고 물리적인 위력을 발휘해 “침묵”을 강제하려 했다. 

그 절정은 2016년 5월 3일 울산이주민센터에서 조돈희 동지에 쌍욕과 집단적인 위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난 이날 울산저널 경영진들의 말과 행위를 보면서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이 종교적 색채를 띠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울산저널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동지적 관계로, 서로 존중하는 선후배로 쌓아 온 우정도 가차 없이 폐기할 수는 광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울산저널을 비판하는 울산이주민센터 조돈희 소장은 동지도, 존중과 우정을 나눈 선배도 아니었다. 다만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적이었을 뿐이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그들의 표현대로 “날조된 음해”, “무섭게 번지는 독버섯 같은 음해를 끊고자 했던”, “단호한” 투쟁을 조직한 것이었고 울산저널을 살리기 위한 신념의 집행이었지만 이 신념의 집행은 울산저널 경영진이 살아온 자기 삶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인간관계의 처참한 폐허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울산저널이 사용한 정치적 무기들은 소위 진보 혹은 운동의 이름으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정치적 무기들은 위계를 통해서만 작동하고 차별을 제도화함으로써 유지되며 비판을 억압하고 명령을 완성함으로써만 실현되는 부르주아 정치이기 때문이다. 배후·음모론은 부르주아 정치가 자신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정치적 거울이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자신의 숨겨져 있던 뛰어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윤태우 기자는 깊은 상처를 입고 울산을 떠나갔고 울산지역 운동사회 다수의 침묵을 이끌어냄으로써 진보언론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산저널 경영진의 모든 행위는 좌파란 이름도, 진보란 이름도 이미 부르주아 정치의 일부분이 됐다는 걸 명징하게 보여줄 뿐이다. 그들이 사용한 모든 정치적 행위는 무엇보다 노동운동가로서의 자기 삶을 배반한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에 자기 운명을 건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들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망해 보인다. 

이 글은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 눕고 싶은 마음 다독이며 돌탑처럼 쌓아 올린 것이다. 울산을 떠난 윤태우 기자가 다른 삶을 시작하는 데 이 글이 지지와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때늦어 미안하다. 


난 글을 시작하면서 윤태우 기자의 인간선언이 나의 “배후”임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해 달라”
이것이 윤태우 기자가 울산저널을 상대로 한 투쟁의 시작이었다


내가 울산저널 윤태우 기자를 처음 본 것은 작년 6월 울산이주민센터에서 진행된 ‘노동, 시민, 사회단체 긴급 좌담회 <울산저널 경영진의 폭언, 폭력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자리였다. 화천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울산으로 내려온 직후였다. 

상황은 처참한 폐허였다. 

이날 자리에서는 상황을 공유하고 몇 가지 계획이 합의됐지만 내 문제의식은 <울산저널 경영진의 폭언, 폭력 어떻게 할 것인가>의 출발지였던 윤태우 기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난 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윤태우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인터뷰를 명목 삼아 윤태우 기자와 만날 수 있었다. 함께 점심을 먹고 함께 술을 먹었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난 이 자리에서 윤태우 기자의 자기 투쟁의 뿌리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희생해 온 노동자들은 경영진의 ‘한마디’ 듣고 싶어서 싸움에 나섰다. 불가피하게 약속을 지킬 수 없을 때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한 마디 어찌저찌한 이유로 주거를 보장하기 어려울 것 같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가 간절하게 듣고 싶어서 이 악물고 싸우고 있다” (윤태우 기자, [울산 노동계 단상], 2016년 2월 8일) 

“알아서 희생해 온 노동자들이 고민 끝에 기어이 요구한다. ‘약속을 약속으로 인정하기’/ ‘못 지킬 때 이해를 구하기’/ ‘사과하기’/ 이걸 받아들이기가 뭐가 그렇게 힘든가. … 이 사람들에게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기를 요구하기가 뭐가 이렇게 힘겨운 지” (윤태우 기자, [울산 노동계 단상], 2016년2월8일)


그랬다. 울산저널 내에 숙소문제가 발생했을 때 윤태우 기자가 울산저널 경영진에게 듣고 싶었던 한마디는 양해를 구하는 것, “사과”였다. 인간에 대한 예의였던 것이다. 이것을 들어주는 것이 뭐가 그렇게 힘들었는가? 

윤태우 기자는 울산저널 전 편집장과 2014년 8월 12일 면접을 봤다. 이 자리에서 울산저널 전 편집장은 “주거 관련해서 걱정할 필요 없다. 회사 숙소가 있다 거기서 지내면 된다고 약속 했고 울산저널 경영진에게도 보고했던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는 4개월 동안 실제 집행됐다. 

 

○ 울산저널 경영진에게 전 편집장이 이야기한 것도 같은 내용. 
① 노동부 인턴제가 적용되면 저널의 임금부담을 줄이면서도 최저임금 이상 지급가능하다
② 이00 기자의 공백 기간 동안 채용하면 된다. 
③ 숙소는 이00 기자가 쓰던 염포동 아파트(백00 대표의 지인 소유로 매도 때까지 사용 가능)를 제공하자.
(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 [울산저널 12면 파행 발행과 지난 1년의 논란 상황 경과] 중에서)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에게 방을 빼라고 통보했다. 전후 사정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도 하지 않았고 윤태우 기자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았다. 급작스런 통보에 어쩔 수 없이 방을 빼야 했고 주거지 불명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윤태우 기자는 회사의 어떤 대책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하지만 울산저널은 답이 없었다. 윤태우 기자는 울산저널 편집장에게 “집 문제는 회사가 해결할 의지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편집장은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근로계약도 아닌데 내가 왜 지켜야 되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윤태우 기자가 숙소 문제를 제기했을 때 울산저널 경영진의 태도는 먼저 말을 바꾸고 숙소 문제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 “숙소 제공은 회사의 약속이 아니라 편의다”, “왜 회사가 주거지를 지원해줘야 하느냐? 왜 나간 사람(전 편집장) 얘기를 꺼 내냐”, “전 편집국장의 개인적 약속이지 회사의 약속이 아니다”― 이었고 구차한 변명으로 자신을 둘러치는 것 ― 윤태우 기자에게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임금을 올리고 나서 나중에 가서야 숙소 월세 부담이 커질 것을 감안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회사의 약속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월세를 지원하겠다는 방안을 제기하고 복지차원에서 배려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 ―이었고 숙소 문제와는 상관없는 걸 가지고 윤태우 기자를 모욕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9월 본인은 이00 이사에게 7월말부터 제기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울산저널 운영위원들을 만나 내부 문제를 설명하고 관심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 그는 옥상에서 최근 일어난 사내문제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에 본인은 문제들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취재기자 3인이 앞서 작성한 미발표 성명서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배00 운영위원은 대화 도중 맥락과 상관없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네가 4월에 사내 폭행 폭언 문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을 때 경영진에게 너를 내보내라고 말했었다’, ‘나는 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너는 사진도 제대로 못 찍더라’. 멸시하는 듯 한 시선이었고 냉소적인 표정이었습니다. 너를 내쫒으려고 했는데 봐줬으니 조용히 있으라는 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당시 본인은 크게 당황했고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본인이 ‘폭행 폭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내쫒으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수차례 문제를 제기하자, ‘지금 생각해보니 미안하다’고 했지만 표정과 말투에서 전혀 미안함이 묻어나지 않았습니다. 본인은 이날 만남 뒤 조합 활동에 있어 적잖게 위축됐습니다. 원래 다른 경영진도 직접 만나 문제 해결을 호소할 계획이었으나 이날 만남 뒤 더 이상 다른 경영진을 만나기가 꺼려졌습니다(윤태우 기자, [울산저널 경영진이 왜곡하는 사실을 바로잡습니다] 중에서)
 

믿었던 선배들과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 방식은 여기서 끝이 났다. 신뢰는 깨졌다. 공동체적 성격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은폐되어 있었던 노사관계가 전면에 등장했다. 울산저널 경영진들의 말과 행동은 윤태우 기자에게 비수가 되어 갔다. 특히 그들의 냉소적인 말투와 멸시하는 듯한 시선에서 숨이 멎는 듯한 모멸감을 느꼈다. 윤태우 기자는 경영진의 무책임한 말과 행동에 희망을 잃고 울산을 떠나려 했으나 그의 발걸음을 잡아 끈 것은 단 한 가지. “사람으로 대해 달라는 것”, 상처 받고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 싶다는 욕구였다. 그래서 모든 투쟁은 “인간선언이었다” 나는 존엄한 인간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력을 생산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았고 끝까지 들어줄 힘도 없었다. 결국 울산저널 경영진은 엉터리 처방전을 들이민다. “회사의 약속은 근로계약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고 복지차원에서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울산저널이 “약속” 혹은 “근로계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숙소 문제를 “무조건 책임져야 한다”는 근거 없는 부담감, 악화되고 있는 재정상황을 고려한다면 책임질 수 없는 사용주로써의 현실적 고려 이외엔 다른 의미를 찾기가 힘들다. 그리고 만약 숙소문제를 근로계약으로 체결하면 경영진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윤태우 기자가 하게 될 것이라는 의심과 지독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사용주로서의 자각을 더욱 명료하게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태우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줄 힘이 있었다면, 윤태우 기자와 취재기자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고 심사숙고 했다면 “숙소 문제를 무조건 책임져야 한다”는 근거 없는 부담을 지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울산저널의 명예를 스스로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윤태우 기자를 비롯한 울산저널 취재기자들은 회사의 약속임을 인정한다면 숙소제공 방식에 대해서는 회사의 어려움을 고려해 해결책을 찾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약속”과 “배려”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윤태우 기자를 지독하게 불신함으로써 울산저널 경영진이 스스로 건너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의 명예는 스스로가 아니라면 누구도 훼손할 수 없다. 울산저널의 명예훼손의 주범은 울산저널 경영진 자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명예훼손인가? 정당한 노동조합활동인가?

울산저널의 구조는 참 특이하다. 사용주들은 노동운동의 구력이 있는 사람들이고 윤태우 기자를 비롯한 기자들은 울산저널의 단체협약도 모르고 근로기준법도 모르며 운동의 경력이 대부분 없는 사람들이다. 숙소 문제로 불화가 발생하게 되자 윤태우 기자와 취재기자들은 사용주들이 이미 마련해놓은 모범단체협약을 수단으로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참 기형적이었지만 현실이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자신에게 유리한 단체협약 조항은 탄압을 위해 사용하고 또한 불리한 조항은 탄압을 위해 스스럼없이 위반했다. 그러나 윤태우 기자와 울산저널 분회의 투쟁은 단체협약에 근거를 둔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이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이 마련해 놓은 모범단체협약, 제2장(조합활동)의 제6조(조합활동보장), 7조(조합의 정치활동 보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회사는 조합원의 자유로운 조합 활동을 보장하고 어떠한 이유로도 조합운영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조합 활동을 이유로 어떠한 불이익처우도 하지 않는다”, “회사는 조합 간부와 조합원의 홍보선전물 배포 및 부착 등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하여야 하며, 어떠한 이유로도 그 활동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그 활동을 이유로 조합원에게 일체의 불이익 처우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가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적으로 회사의 대표와 경영진을 음해하고 근거 없이 비방하는 등 울산저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윤태우 기자를 울산남부경찰서에 고소했다. 노사 협상 과정이었다는 걸 기억하라. 조합원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해야 할 울산저널 경영진은 탄압을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든 단체협약을 의도적으로 위반한 것이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의 글이 자신들을 조롱하고 모욕했으며 명예가 훼손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소의 근거가 된 <울산노동계 단상>은 교섭위원인 윤태우 기자가 노사협상 과정에서 벌어진 경영진들의 말과 행위를 폭로하고 항의하는 글이었다. 

윤태우 기자는 울산저널 경영진의 무책임한 말과 행동들 속에서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정말 힘이 없는 입장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루하루 일하는 게 힘들고 살아가는 것이 힘든 상황”에서 글을 쓴 것이었고 자기가 경영진에게 당한 것 보다 훨씬 적은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도 너무 점잖은 글이었다. 그런데도 이 글은 울산저널 경영진에게는 “칼을 꽂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윤태우 기자의 문체가 울산저널 경영진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진 것(1)이다. 모욕감을 느낀 울산저널 경영진은 거칠어지고 잔인해져갔다. 거침없는 부당노동행위가 기획됐다. 노사 협상 과정에서 울산저널 경영진의 말과 행위를 폭로하고 항의했던 윤태우 기자의 활동을 “거짓 비방”, “음해”로 몰아갔다. 

그러나 ‘살인자의 손에 피가 마르기전에’ 정치적 폭로를 진행하는 것은 노동조합 활동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활동의 기본이다. 윤태우 기자는 교섭위원이다. 당연히 그의 주요한 활동은 교섭 과정에서 사용주의 말과 행위를 폭로하는 것이다. 특히나 SNS의 영향력이 커진 지금, 페이스북에 폭로와 항의의 글을 쓰는 것은 노동조합 활동의 연장인 것이다. 폭로는 사용주의 말과 행위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주체적 관점(계급적 관점)이 반영된다. 맥락상 사용주의 핵심적인 문장을 추출해 강조하기도 하고, 문장 전체를 비틀 수도 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이러한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보장해야 하며 그 활동을 이유로 조합원에게 일체의 불이익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이 직접 만들지 않았는가? 취재기자들이 단체협약도 모른다고 무시하고 비꼬지 않았는가? 그렇게 자부심 강한 단체협약이라면 윤태우 기자의 노동조합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부동노동행위를 저지를 것이 아니라 조합원의 권리를 보장했어야 했다. 또한 울산저널 경영진이 자신의 주장대로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가 “거짓 비방”으로 생각한다면 자신들의 오랜 활동 경험처럼 “공개적인 논쟁을 조직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윤태우 기자의 폭로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다. 아래는 2015년 9월 16일 윤태우 기자를 비롯한 취재기자들과 울산저널 핵심 경영진과의 대화 내용을 녹취하고 푼 것이다. 
 

“배○○ : 기자님들, 자신의 권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계속 어떻게 여기 페이스북에 우롱해놨는지 알아요? 노동운동 해본 자들이 노동운동했다는 사람들이 운동권들이 이따 구라고 써놨잖아요. 그렇게 안 적었어요? 

윤태우 : 그렇게 썼죠.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배○○ : 노동자 권리 얘기하면서 자기가 일하는 노동조합의 단체협약도 모르면서 단체협약에 수준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단체협약과 근로계약의 기준에서 얘기하자고 해도 그건 아니라고 얘기하고. 전 편집장이 약속했던 것이 다 맞는 거라고 얘기하고. 
윤태우 : 단체협약을 알아야 자기가, 본인이 약속받은 걸 책임져달라는 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배○○ : 예. 기본입니다. 
윤태우 : 단체협약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 권리 찾으면 안 되는 거예요? 
배○○ : 근로기준법과 단체협약부터 알아야지 진짜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어요. 

(중략)

배○○ : 이 문제가 계속 고착화되는 것을 즐기는 게 아니라면 
윤태우 : 이 상황을 즐길 사람이 있을까요? 
배○○ : 난 윤기자가 즐기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요 
윤태우 : 제가 어떻게 즐깁니까? 이 상황을 

(중략)

배○○ : ○기자도 잘 생각하세요. 내가 어디까지 얼마만큼 있을지 고민할 거예요. 여기 계속 있어야 되나. 잘리는 게 고민이 아니라 내 앞길이 고민될 거라고. 평생직장이 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기 때문에. 난 길게 오랫동안 같이 있길 바래요. 그런데 지금처럼 이라면, 신뢰가 깨지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통스러울 거예요. 쥐 잡듯 잡을 수 있어. 일하다 안 맞는 사람 있으면. 반대로 잡혀요. 인생이 그렇거든. 갈등 있는 얘기를 들어요. 다 듣고 있거든. 그러면 누구든 선택해요. ○기자가 어느 신문사 다른 데로 옮기게 되더라도 여기서도 좋은 기자로 있다가 일 년이든 십년이든. 하지만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좋은 기자가 되기 힘드실 거예요”(울산저널 대책위원회,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폭언·폭행 사건 경과] 중에서)


윤태우 기자는 이 녹취록에 근거 해 <울산노동계 단상>에 “단체협약이란 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은 회사에 요구를 하면 안 된다”고 썼다. 녹취록에도 나와 있듯이 경영진 자신이 직접 한 이야기 그대로 썼는데 이것이 뭐가 “거짓 비방”이고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한 것인가?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라. 셀프 명예훼손, 셀프 인격권 침해를 윤태우 기자에게 전가하지 마라 

그렇게 단체협약을 잘 아는 척 했던 한 경영진은 정작 단체협약에 대해 무지했다. 그는 말한다. “단협상의 명시된 부분도 아니고 … 근로계약서 윤태우 기자 거 봤는데 어디에도 주거문제를 해결한다는 부분이 명시되어 있지 않구요”라며 울산저널 전 편집국장의 약속이 회사의 약속이 아니라는 근거로 삼고 있지만 단체협약 제 3조<기존이 노동조건과 조합활동 권리 저하 금지>엔 “회사는 이 협약에 규정되어 있지 않거나 누락됨을 이유로 조합이 기존에 확보하였거나 관행으로 실시해온 조합활동 권리 및 기존의 노동조건을 저하시킬 수 없다”고 한 규정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는 윤태우 기자의 투쟁을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는 프락치 행위(“난 윤기자가 즐기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요”)로 유추할 수 있는 발언을 하고 한 취재기자에게는 “쥐 잡듯 잡을 수 있어 일하다 안 맞는 사람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좋은 기자가 되기 힘드실 거예요”라며 아주 친절한(?) 협박도 마다하지 않았다. 녹취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은 윤태우 기자가 아니라 노동운동가의 삶을 산 경영진 자신이다. 취재기자들과 울산저널 경영진과의 대화 녹취록엔 이후 처참한 인간관계의 폐허로 가기 위한 징후가 이미 발화하고 있었다. 

취재기자들에게 이날의 경험은 그를 “조합활동을 위축시키는” 경영진으로 각인되게 했다. 그리고 단체협약안에 “배00 사업국장은 단협 26조(조합은 조합 활동을 현저히 해롭게 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력자의 채용을 거부할 수 있다) 2항에 해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회사는 직책 배당을 제고하고 정확한 직제개편 계획을 밝혀 주기 바랍니다. 배00 사업국장이 회사에 문제제기 하는 기자들을 위축시킨 데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요구한다”로 반영 됐고 “구두 및 서면 사과”가 합의됨으로써 2016년 1월 7일, 울산저널 노사는 단체협상안에 잠정 합의했다. 

그러나 부당노동행위의 당사자들이었던 울산저널 핵심 경영진들은 이 요구를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인격권을 침해하는 악의적인 잠정합의”라며 울산저널 분회에서 잠정합의 찬반투표를 통해 가결한 안을 뒤집어엎는다. 만약 울산저널 핵심 경영진들이 자신의 말과 행위를 성찰하고 잠정합의안을 받아들였다면 울산저널은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이 전체 과정을 보면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태우 기자의 폭로와 항의를 “거짓 비방”으로 몰아가고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은 윤태우 기자의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것이 분명해 보이고 더불어 자신의 단체협약 위반, 부당노동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 부당정직 과정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조직된 폭력이자 정서적 학대였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난 윤태우 기자의 절망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내겐 이 숨 막히는 절벽 앞에 끝내 좌절하고 울산저널을 자진 퇴사하여 울산을 떠나는 그를 잡을 수 있는 용기도, 수단도 없었다. 난 울산 운동사회로부터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개인이기도 했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의 말과 행동은 내게도 절망이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비수에 꽂힌 윤태우 기자의 내상을 꼼꼼하게 살피는 일이었다. 도대체 울산저널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울산저널 분회는 2015년 12월 10일부터 2016년 1월 6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교섭을 진행하고 잠정합의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1차 교섭부터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핵심 경영진들은 교섭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측 교섭위원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했듯이 의도적으로 교섭 자리를 피한 것이다. 울산저널 분회는 “실질적 권한이 있는 사람이 참석하지 않으면 합의안이 나오더라도 지켜지지 않을 우려를 표명”했지만 실질적 권한을 가진 사람들은 끝내 교섭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울산저널 분회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울산저널 분회는 2016년 1월 12일 총회를 열어 잠정합의안을 가결시켰지만 사측 교섭위원 대표는 회사가 잠정합의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며 교섭위원 사퇴 의사를 노조에 알려왔다. 울산저널 핵심 경영진들이 노사 잠정합의안을 일방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실질적 권한을 가진 핵심 경영진 중 한 명인 편집국장은 기자들에게 신문발행과 관련한 어떤 업무 지시도 없이 한 달간 휴가를 떠나버렸다. 사실상의 업무 거부를 통해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신문발행은 고스란히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의 몫이 됐다. 윤태우 기자를 비롯한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은 편집장 없이 자정 넘어 새벽까지 일하면서 신문을 정상으로 발행했다. 그들은 회사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울산저널 편집국장과 경영진들은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이 밤잠 설치면서 신문을 정상 발행하는 동안 깊은 산속에 들어가 노조를 탄압하기 위한 절세 무공을 수련한 것일까? 울산저널 경영진들은 2월초부터 윤태우 기자에 대한 표적탄압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일사천리로 이뤄진 표적탄압 
1월 13일 ~ 2월 10일 편집장 잠적 ⇒ 2월 2일 사측 수정교섭 요구(잠정합의안 파기)
2월 11일 편집회의 ⇒ 2월 15일 편집장 전화, 당일 1차 징계 처분 예비통보
2월 17일 노조 쟁의행위발생 결의를 위한 총회 및 수정교섭
2월 19일 2차 징계처분 예비통보
2월 22일 3차 징계처분 예비통보
2월 23일 ‘업무 규정 신설’ 노측에 통보
3월 3일 4차 징계처분 예비통보
3월 8일 배00이 고소했다며 경찰서에서 연락 옴 
3월 11일 경찰에서 편집장이 고소했다며 연락 받음
3월 17일 해고 통보
(윤태우 기자, [울산저널 경영진이 왜곡하는 사실을 바로잡습니다] 중에서)


울산저널은 노조가 쟁의행위 발생 결의 총회 소집 공고를 하자 재빠르게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목록은 교섭위원인 윤태우 기자를 징계위에 회부하고 이도 모자라 그의 징계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업무 규정 신설’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고 그 두 번째는 단체 교섭 자리에서 울산저널 사측 교섭위원이 노조 교섭위원인 윤태우 기자와 교섭위원들에게 쌍욕과 폭력을 휘두른 것이며 그 세 번째는 단체 교섭 과정에 있는 교섭위원인 윤태우 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경찰에 고소한 것이며 그 네 번째는 경영진의 최종목표인 윤태우 기자를 부당 해고한 것이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2016년 2월 11일 편집회의에서 편집장이 임의로 업무규정을 바꾸려고 하자 이에 항의한 윤태우 기자를 2월 15일 징계위에 회부했다. ‘똥 밟은 놈이 성질낸다’는 문구가 떠오르는 행위이다. 울산저널 단체협약에는 “기존의 노동조건과 조합활동 권리 저하 금지” 조항이 있고 또한 “회사는 취업규칙을 비롯해 조합원과 관련된 회사의 제 규정, 규칙을 제정 또는 개폐하고자 할 때는 사전에 조합과 합의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울산저널은 노사 합의로 ‘자율적인 시간 분배 노동’을 해왔다. 즉 취재기자들은 3년 동안 자율적으로 취재처에 출근하고 각 취재처 등 일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연장근무와 휴일근무를 해왔다. 그런데 편집국장이 임의로 업무규정을 바꾸려 했던 것이고 윤태우 기자는 단체협약에 보장되어 있는 권리를 행사한 것인데 징계라니!


울산저널이 일방적으로 ‘업무 규정 신설’을 도입하고 윤태우 기자를 표적 탄압하는 과정을 보면 정말 치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울산저널 경영진이 ‘윤00씨를 징계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들’에 나와 있듯이 “윤00씨는 24살이다. 편집국장은 54살이다. 30살 차이가 난다. … 타이를 만큼 타일렀고 포용할 만큼 포용했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치자. 그런데 이 ‘싸가지 없는 놈’을 어쩌지 못하고 겨우 생각해낸 것이 윤태우 기자의 징계 근거를 만들기 위해 편집국장의 지위를, 위계관계를, 그 제도화된 차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밖에는 없었는가? 평생을 싸워 왔던 “관료적 명령”을 도입하고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는가? 이렇게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 가야하는가? 

“제 2조 2항 취재기자는 오전 9시 사무실로 출근해 출근부를 작성한다. 오전 10시까지 취재계획서를 작성해 편집국장에게 보고한다. 오후 5-6시 당일 취재한 내용과 출입처 관련 정보를 취합 해 편집국장에게 보고한다. 
제4조 2항 정당한 사유 없이 기사 송고가 지연되거나, 기사 송고 누락과 지연이 되풀이 될 경우 징계 처분할 수 있다”(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 [울산저널 사원 업무규정 신설에 관한 통보 및 의견 정취] 중에서)

 

취재기자에 대한 편집장의 통제는 어떤 제한이 없어 보이고 징계처분 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게 됐다. 업무 규정 신설은 조합원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편집국장의 통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탄압의 칼이었다. 울산저널 편집국장은 탄압의 칼을 자유롭게 휘둘렀다. 

2016년 2월 15일과 16일, 원래 업무상 이유로 전화를 하지도 않았고 숙소문제가 발생하고 나서는 더욱 업무에 대한 전화를 걸지 않았던 울산저널 편집국장은 윤태우 기자에게 수차례에 걸쳐 전화를 걸었다.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윤태우 기자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징계를 받을 것 같아 취재 중이라 통화가 어렵고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한 뒤 취재를 이어갔다. 그런데 이것이 “신문 제작과정에서 편집국장이 수차례에 연락을 했으나 무단 불응”했다는 이유로 징계의 사유가 됐다. 물론 이 날 이후로 윤태우 기자에게 걸려 온 편집국장의 전화는 없었다. 또한 울산저널 편집국은 적은 인력으로 16면을 채우기 힘들어 마감 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지면을 완성하곤 했다. 그런데 2016년 2월 16일 편집국장은 일방적으로 오후 5시 43분에 “기사 최종 마감했습니다. 늦어도 7시까지 교정보고 마무리 짓습니다”라고 편집국 텔레그램방에 올렸다. 지면이 다 채워지지 않았는데 마감을 강행한 것이다. 윤태우 기자는 기사를 완성하지 못했고 이것이 “분담 책임진 기획 기사 등 미송고로 16면 지면 발행이 비정상적으로 12면으로 축소발행”하게 만든 죄를 물어 징계사유로 삼았다. 울산저널 분회와 윤태우 기자는 관행대로 마감을 했다면 기사를 완성 해 지면을 채울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편집국장은 윤태우 기자가 2월 29일과 3월 2일에 걸쳐 원고지 44매에 달하는 기획기사 및 단신기사를 편집국장에게 보냈으나 단 한 꼭지도 싣지 않았다. 울산저널은 2016년 3월 3일 176호를 축소 발행했다. 윤태우 기자가 기사를 작성 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싣지 않고 176호를 축소 발행했으면서 그 책임을 윤태우 기자 에게 묻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참 찌질하고 저열하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업무 규정 신설을 통해 윤태우 기자를 징계위에 회부하고 나서도 징계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탄압을 지속했다. 그 중 하나가 무단결근이다. 울산저널은 창간 때부터 3년 이상 화, 수요일 사무실 출근, 나머지 요일은 취재 처로 출근하는 업무방식을 따라 왔다. 울산저널 분회는 경영진의 업무규정 신설에 반대하며 ‘노사 합의 전까지 상시적이고 관행적으로 해오던 업무 방식을 유지 하겠다’고 밝혔으나 울산저널 편집국장은 2016년 3월 4일 “단체협약, 취업규칙, 근로계약서에 명시한 출근시간 출근 거부에 대해서는 결근처리”하고 “결근 처리된 사원이 임의로 행한 업무는 회사 업무로 인정할 수 없다”고 일방적인 통보 문자를 기자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는 실제 집행됐다. 노동조합의 “합의” 없는 업무 규정 신설은 명백한 단체협약 위반이었다. 윤태우 기자는 노동조합의 방침대로 2월 25일, 26일, 29일, 3월 4일 관행대로 근무를 했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은 이를 무단결근으로 처리하고 징계의 사유로 삼았다. 

 

울산저널 경영진의 윤태우 기자에 대한 적대적 혐오는 극을 향해 나아갔다. 쌍욕과 폭력이 자행됐다. 직장 내 따돌림과 집단적 괴롭힘이 일상화됐다. 울산저널 경영진에 의해 자행된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 과정, 그리고 해고 철회 후 다시 부당정직의 과정은 윤태우 기자의 인간 존엄을 짓밟은 조직된 폭력이자 정서적 학대였다. 

사건 개요 
① 2016년 2월 17일 오후 6시 40분께 울산저널 사무실에서 김모 교섭위원은 노측 윤모 교섭위원에게 “야 이 새끼야”, “개새끼”, “양아치자식아”, “양아치 같은 새끼야”, “개자식아” 등과 같은 욕설을 10여 차례 반복했고, 종이를 돌돌 말아 노측 교섭위원 목을 한 차례 찌르고, 다시 교섭위원 신체에 위해를 가하려는 행위를 했다. 김모 교섭위원은 노조 분회장이 이를 말리면서 영상을 찍자 분회장을 향해 “당신도 마찬가지야, 대표 등에다 칼을 꽂아”, “너도 책임져야 해”, “너도 똑같아” 등과 같은 말을 했다. 
② 김모 교섭위원 외에도 사측 교섭대표와 사측 배모 교섭위원, 편집국장까지 가세해 4명이 취재기자 한 명을 공격했다. 이러한 행위는 30분가량 계속됐다. 
③ 당시 상황은 사측 교섭대표가 노사 단체교섭을 마친다고 말한 직후였으며, 노사 양측 교섭위원 총 7명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은 상태에서 발생했다
(전국언론노조 풀뿌리신문지부 울산저널분회, 직장 내 폭력행위에 관한 건, 2016.2.22.)

 

울산저널 분회 교섭위원들은 이 날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성인 남성이 위협적으로 소리 지르니까 무섭고 심장이 뛰고 그랬다”, “회사 간부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비인간적이다”, “출근하고 싶지 않다”, “사측 교섭위원이 책상을 막 흔들고 하는데 책상을 뒤집어엎거나 할까 봐 공포스러웠다”((전국언론노조 풀뿌리신문지부 울산저널분회, 직장 내 폭력행위에 관한 건, 2016.2.22.)


윤태우 기자는 “퇴근하는데 회사쪽 사람이 쫒아 와서 죽일 것 같은 공포감을 느껴서 주위를 돌아봤고 버스 탈 때도 주위를 살피게 되더라”고 증언하고 있다. 
 

- 4월 20일 윤태우 기자 복직. 그러나 기존에 취재하던 모든 취재처가 없어지고 편집국 텔레그램 방에도 초대되지 않음

- 4월 21일 이사 김00이 윤태우 기자에게 “너는 미끼야. 너를 풀어준(해고철회) 이유가 뭔지 아냐? 걔들 잡으려는 미끼야. 조만간에 양준석이 최병승이 너 다 아웃될 거야 울산에서”, 건방진 놈의 새끼”, 깐죽대고 하면 죽는다. 등의 폭언을 퍼부음 3시간 후 이모 편집국장은 업무 중이던 윤 기자에게 다가와 “사무실에서 나가. 나가서 해!”라고 소리 지르며 윤 기자를 끌어내고, 작성 중이던 문서를 저장 안 함’버튼을 누르고 닫아버리고 컴퓨터 본체 전원 버튼을 수차례 누르고, 가방을 빼앗아 현관에 던지고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고함을 치며 윤태우 기자가 정상적으로 업무를 할 수 없도록 방해함 

- 4월 22일 이사 김00이 윤태우 기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함. 윤태우 기자가 취재 일정 때문에 바쁘다고 하자 고성을 지르며 의자를 박차고 윤태우 기자에게 다가와 이 새끼 이거 뭐 이런 새끼가 있어”라면서 윤태우 기자의 뒷목을 잡고 눌러 상체를 숙이게 만든 뒤 탁자 쪽으로 밀침. 윤태우 기자가 "지금 사람 쳐놓고 앉으라고 하는 게 말입니까”라고 항의하자 편집국장이 다가와 오른손 주먹을 윤 기자 얼굴 앞까지 두 차례 휘두르며 “이렇게 확 친 게 친 거지”라고 말함

(울산저널 대책위,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 사건 경과] 중에서

 

여기 존엄한 한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으면서 함부로 대하는 자들의 기록이 있다. 나이 많은 것이 무슨 정서적 학대 특허권이라도 된단 말인가? 사용주의 지위라는 것이 폭력 면허증이라고 된단 말인가? 적에게도 인권은 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윤태우 기자에게는 악몽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악몽은 깨어나면 사라지는 것이지만 윤태우 기자에게는 매일매일 부딪히는 일상이었다.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 복직 뒤 부당징계 과정을 보면 울산저널 경영진에 의한 윤태우 기자에게 자행된 집단적 폭언, 폭행, 괴롭힘은 하나의 습관적 놀이처럼 보인다. 회사를 망하게 하려는 프락치,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이 모든 행위는 울산저널을 살리기 위한 신념에 의해 집행되었다. 진보의 이름은 이처럼 타락했다. 그러나 윤태우 기자는 이 악몽과 같은 시간을 견디며 투쟁을 지속했고 나에게까지 접속됐다. 이 투쟁에 참가할 수 있도록 안내해준 윤태우 기자에게 고맙다. 



울산저널의 배후·음모론은 모든 비판을 억압하고 파괴하기 위한 무기였다

모든 투쟁은 주체적인 사유와 결단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소위 배후·음모론은 투쟁 주체를 독립적으로 사유하지 못하며 행동할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투쟁 주체에 대한 이 같은 모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또한 배후·음모론은 활력 있는 비판의 심장을 정조준 하여 침묵을 강제하며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정치적 무기이다. 배후·음모론(조직보위론)이 판치는 곳에서는 비판과 토론이 억압되고 위로부터의 명령과 아래로부터의 수동성이 결합된다. 부르주아 정치(관료주의)는 이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배후·음모론이 울산저널 경영진을 온통 사로잡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자들의 입을 봉할 필요가 있었고 비판을 가장 효과적으로 잠재울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진보언론’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 사람들은 대부분 울산저널에 의해 “배후”로 낙인찍혀야 했다.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은 배후·음모론 없이는 가능하지도 지속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울산저널의 배후·음모론의 첫 번째 희생자는 울산저널 전 편집국장이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000 전 편집장은 울산저널이 곧 망할 것이라고 얘기했고 울산저널에서 일하는 기자를 자신이 빼내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고 하면서 “단순한 노사 문제가 아니라 외부에서 울산저널을 악의적으로 파괴하려는 시도들이 확인됐다. 000 전 편집장은 윤태우 기자와 숙소 문제는 근로조건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했다고 했지만 2월 17일 노사교섭 당시 윤 기자와 통화하면서 숙소 문제에 대한 구두 약속이 회사의 약속이고 8월 이후 숙소가 없어진 것은 근로조건 저하라고 윤 기자에게 확인해줘 최종 합의를 무산시켰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윤태우 기자는 독립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누구에게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직접 행동할 수 있는 투쟁하는 노동자라는 것이다. 숙소 문제가 발생하고 2월17일 노사 교섭까지 6개월 동안 윤태우 기자는 숙소 문제가 회사의 약속이자 자신
이 노동조건이었고 숙소가 사라진 것은 노동조건의 저하라고 말해오지 않았는가? 약속을 약속으로 인정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불가피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양해를 구하고 사과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는가? 울산저널 경영진에게는 왜 그의 호소가 유독 들리지 않았는가? 

윤태우 기자는 이 날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경영진이 숙소관련 약속을 회사의 약속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숙소 제공 약속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문제가 불거지고 나서야 알았다고 주장하다가 제가 전 편집장 증언까지 들이밀자 끝까지 책임 회피하려고 애꿎은 전 편집장한테 뒤집어씌운 거죠”


그래, 진실이 드러나자 그토록 화가 났는가? 그 화풀이로 노사 단체 교섭이 진행됐던 자리에서 울산저널 분회 조합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자행했는가? “두려움과 공포”를 의식적으로 조직함으로써 또 다시 진실을 은폐하고자 했는가? 최종합의가 무산된 것은 진실에 귀 닫고 눈 감은 울산저널 경영진 자신에게 있다. 그 책임을 울산저널 전 편집국장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은 참 비겁한 짓거리이다. 어느 누구도 울산저널을 악의적으로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다. 진실에 대한 정치적 태도가 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윤태우 기자의 투쟁은 인간 존엄에 대한 자각,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분노, 주체적 판단과 결단, 울산저널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직접행동으로 일어선 인간선언이다. 이 인간선언에 화답하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이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배후” 운운하며 윤태우 기자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마라.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배후는 없다. 

2016년 3월 2일 울산노동자공동행동 및 지역 노동 시민 사회 단체 활동가 성명서가 발표되고, 3월25일 울해협에서 윤태우 기자 부당해고 규탄 성명을 발표하자 울산저널 경영진의 배후·음모론은 지역으로 확대됐다. 그 첫 번째 대상은 3월 2일 성명서에 기명한 노동당(구 사회당) 당원들이었고 그 두 번째 대상은 울산노동자공동행동 최병승, 양준석 동지였으며 그 마지막 절정은 울산이주민센터 소장인 조돈희 동지였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윤태우 기자 해고 사태를 장기화 시키고 악의적으로 울산저널을 파괴하려는” 배후를 끊임없이 찾아 다녔고 일주일 간격으로 배후를 변경하기도 했다. 윤태우 기자의 부당노동행위 맞선 투쟁이 지역으로 확대되자 똥줄이 타고 마음이 급해졌던 것이다. 울산저널에 의해 배후로 지목된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공개적으로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를 규탄하고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를 철회하라는 입장을 밝힌 사람들이다. 

 

2016년 3월 21일 저와 조돈희 선배는 울산저널 대표를 만났다. 조돈희 선배의 울산저널 입장 글 이후 대표가 연락이 와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 울산저널 대표는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두 세력이 있다. 하나는 전 편집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심스럽기 때문에 누구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밝혔다(최병승, [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 위원의 “배후세력 규정”에 대한 나의 입장] 중에서)


노동조합 분회장 대신 다른 지역의 활동가(구 사회당 당원)의 조언을 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 노동계에서 처음 나왔던 알바노조 울산지부의 성명서 역시 노동조합 분회장과 일체의 사실 확인이나 협의 없이 나왔다. 알고 보니 윤00씨가 알바노조에 가입한 이중 조합원이었다고 한다. 신문사는 정규직으로 근로계약을 맺은 윤00씨가 알바노조의 조합원의 자격이 되는지는 뒤로 한다 해도 구 사회당 계열이 주도한 알바노조와 관련자들이 지금의 분란을 촉발시킨 것이라 짐작케 한다. 그들은 정당원과 총선 선거운동원, 노동조합 활동가, 지역단체 활동가라는 여러 이름으로 자신들의 배후 행위를 감추고 있다(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 [윤00씨를 징계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들] 중에서)

“울산저널 김00 이사는 4월 4일 현대차지부 김○식 동지에게 “어제 회의에서 양준석과 최병승이 울산저널을 음해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 울산저널 김00 이사는 4월 21일 해고 철회로 복직한 윤태우 기자에게 폭언·폭행을 행사 하는 과정에서 “너는 미끼야 미끼. 양준석이 최병승이한테 내가 3주전에 얘기했다. 내 반드시 양준석이하고 최병승이 둘이 울산바닥에 떠난다고 경고했어. 3주 전부터 납작 엎드려 있지? 지금 너를 풀어준 이유가 뭔지 알아? 걔들 잡으려는 미끼야. 조만간에 양준석이 최병승이 너 다 아웃될 거야, 울산에서”라고 말했다(울산저널 대책위,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 사건 경과] 중에서)


최병승 동지는 자신의 입장 글에서 “울산저널의 ‘배후 규정’은 마치 자본의 외부세력 이데올로기와 다르지 않다. 아니 진보적 가치를 앞세워 현 상황을 비판하는 지역 동지들을 ‘마녀사냥’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맞는 말이다. 울산저널의 배후·음모론은 비판을 ‘마녀사냥’하는 것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울산저널 내부와 울산지역의 토론과 논쟁을 파괴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것, 회사를 망하게 하려고 프락치 행위를 하고 있는 윤태우 기자를 고립시켜 축출하고 진보의 이름으로 울산저널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울산저널 경영기획위원회는 2016년 3월26일 <울해협 하창민 의장 명의의 글에 대하여>란 글에서 “울산저널을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기업과 동일하게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기업과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윤태우 기자의 부당해고에 대해서 비판하고 항의하는 것이며 또한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부르주아 정치의 수단인 배후·음모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울산저널이 직접 마련하고 또한 자부심이 있었던 모범 단체협약을 스스로가 위반하며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부당정직을 자행했으며 직장 내 따돌림과 괴롭힘, 쌍욕과 집단적인 폭력을 사용 해 투쟁하는 주체인 윤태우 기자의 존엄을 파괴한 울산저널의 행위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기업”이 노동자를 탄압하는 수단과 방법에 있어 도대체 무엇이 다른지 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윤태우 기자의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부당정직에 맞선 투쟁을 오로지 배후·음모론으로 보는 울산저널의 관점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기업”이 노동자 투쟁을 탄압하기 위해 유포하는 “외부세력” 혹은 “배후세력” 이데올로기와 무엇이 다른지 답해야 할 것이다. 난 울산저널 경영진의 배후·음모론의 “배후”가 부르주아 정치가 아니길 바란다. 

 

김00은 다음과 같이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조돈희 동지에게 퍼부으며 주먹으로 칠 듯이 협박했다. “야이 개자식아”, “십새끼야 야이 개새끼야”, “개자식아 십새끼야 아이고 요 걸 진짜”, “씨발놈이 한 대 터지고 …”, “임마 이 미친놈아 이 새끼 이거 씨발놈 좆까고 자 빠졌네”, “이 씨발 놈이 진짜”, “니들은 하나 같이 지가 해놓고 말 안했다고 한데이 니 치 매 걸렸냐?”, “이 씨발놈들아 이 더러운 개새끼야”, “니가 양아치야 야이 개새끼야 나이 처먹었으면 어른이 돼야지 늙은이가 되고 자빠졌냐 이 미친놈아 개자식 씨발놈이 아이고 확 죽일 수도 없고”, “씨발놈 좆같은 새끼가 니들 수백 명이 와봐 내 눈 깜작하나 미친놈아 아 이고 나이 처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 “이 새끼 미친놈 아이가? 또라이 아이가 지 정신 아니가?”, “어 씨발놈이 진짜 좆같네”, “이 개새끼가 진짜 좆같네”, “나이 처먹었으면 나이 값 해 나이 값 인마 이 개자식은 진짜”, “앞으로 니 조심해 진짜 죽는 수가 있어 개새끼”, “개자식 좆같은 소리 하고 있네” … 조돈희 동지는 직접 몰매를 맞지 않았을 뿐 김00, 배00, 이00 세 명으로부터 온갖 욕설을 동원한 간접몰매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00은 조돈희 동지에게 “왜 울산저널이 입찰비리를 저질렀다는 말을 김**에게 했다고 대답하지 못하냐?”며 다그쳤고, 김00이 욕질과 함께 조돈희 동지를 치려는 듯이 소리치며 날뛰고 있는데도 이00은 명상 폼을 잡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배00과 이00은 참다못한 조돈희 동지가 김00과 충돌하기 직전에야 김00을 말렸다.(울산저널 대책위,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폭언 폭행 사건 경과] 중에서)

 

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난 울산저널 경영진과 조돈희 울산이주민센터 소장이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동지적 관계로, 서로 존중하는 선후배로 우정을 쌓아왔다는 걸 알고 있다. 울산저널을 망하게 하려는 배후세력에 맞서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은 20년 동안 쌓아온 우정조차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며 즉각 폐기처분할 정도로 광기에 가깝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조돈희 소장을 모욕하고 또 모욕했다. 조돈희 소장은 가장 먼저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에 항의하고 윤태우 기자의 투쟁에 연대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현대중공업 해고자로 정년을 맞은 조돈희 소장은 울산저널 경영진과의 20년 우정을 넘어 해고자 윤태우 기자의 손을 잡아줬다. 해고자는 해고자의 마음을 가장 먼저 아는 법이다. 

동지가 오류를 범하고 또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한 가장 깊은 신뢰는 침묵하거나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동지적 비판과 동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조돈희 소장은 동지적 비판과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20년 우정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울산저널 경영진은 자신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삼았고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렇게 울산저널 살리기 운동은 종교적 색채를 띠어 갔다. 이 광기 속에 조돈희 울산이주민센터 소장조차 개입할 여지는 없었고 그도 쌍욕과 집단적 위력을 사용해 침묵을 강제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다. 인간관계의 폐허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것이 울산저널 경영진이 징징 되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진보 코스프레의 민낯”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이 정치다


“울산저널 투쟁이 길어질수록 울산지역 노동계와 시민사회계는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울산 노동 시민 사회계는 울산저널 경영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울산저널의 경영진이 벌이는 횡포를 멈출 수 있다. 애초 울산 시민사회계가 시민주주신문 울산저널을 만들었고, 그들이 수백 명에 달하는 주주다. 울산저널 투쟁은 울산 노동계와 시민사회계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나타내는 지표다(윤태우 기자, [울산 노동계 단상] 중에서)


윤태우 기자의 위 질문은 대공장 정규직 남성 중심의 민주노총 운동, 울산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자 뼈아픈 성찰의 대상이어야 한다. 속 시끄러운 일에 침묵하면서 조금씩 비겁함을 나눠가진 나를 비롯한 울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지 않는가? 운동의 건강한 지표를 보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부끄러움을 안다는 건 아직 심장이 서류뭉치처럼 딱딱하게 굳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낮은 곳에서의 비판적 호소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이 남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심장이 사막화되어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들, 왕년에 민주노총에서 한 자리가 차지했던 자들이 부르주아 정당으로 기어들어갔다는 소식을 일하다 휴게시간에 접했다. 난 민조노총 운동의 상층부에 자갈밭처럼 깔려 있는 이 자들보다 윤태우 기자의 호소에 화답하는 것이 백배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투쟁은 젊은 세대의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은 젊은 세대의 것이었고 그들에게 낡고 부패한 한국노총은 타도의 대상이었다. 낡고 부패한 한국노총에 맞서 그들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이었고 스스로를 민주주의로 조직했으며 전 계급적인 요구를 중심으로 전투적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한 때 노동운동의 성지라 불렸던 울산은 지금 거대한 반혁명의 진지로 굳어진지 오래다. 민주노조운동의 흔적만이 낡은 형식으로 굳어져 있다. 투쟁의 젊은 세대들에게 민주노총이 과거 한국노총처럼 타도의 대상으로 기울어져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윤태우 기자의 질문에 화답할 필요가 있다.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었고 노동자 민주주의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활력 있는 비판과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울산 노동운동 내부에서는 공개적인 비판과 논쟁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복잡하고 민감한 사안에는 회피와 침묵이 최선이 되었다. 비판은 비난으로 받아들여지고 고슴도치처럼 적대감정만 키웠다. 그렇게 비판과 토론, 실천과 검증, 권위의 구성은 사라진지 오래고 오직 자본가계급과 협력하는 자들의 권력의 배분을 위한 협잡과 거래가 있을 뿐이다. 토론이 사라진 조직은 이미 죽은 조직이다. 비판과 토론이 억압되고 위계적 질서와 관료적 명령이 결합 된 울산노동운동은 오늘, 자본가계급의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됐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언론 울산저널의 부당노동행위, 배후·음모론은 특별할 것도, 충격적일 것도 없는 타락하고 부패한 울산노동운동의 일부분이며 그 자양분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울산저널 경영진은 독자와 주주들에게는 진보 코스프레로 징징되고 한 편에서는 배후·음모론과 물리적인 위력을 사용해 울산지역의 비판을 잠재우고 침묵을 강제하려 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며 싸우고 있다. 그들은 해고자고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알며 혁명적 전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운동의 위계는 없다. 윤태우 기자의 인간선언에 화답하고 울산저널 경영진의 부당노동행위, 배후·음모론에 맞서 싸우는 일은 우선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될 것이며 관료적 명령과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폭력의 언어를 우정과 연대의 언어, 노래와 춤과 웃음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에 최적화 된 정치적 언어로 구성되는 것이 노동자민주주의였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우정과 연대의 언어, 노래와 춤과 웃음의 언어로 구성되는 혁명적 전망이며 오직 이 긍정적인 정치적 힘만이 이 운동의 지속성을 강화할 수 있다. 

관료적 명령이 통제하는 울산의 부르주아 노동운동을 노동자민주주의로 대체하기 위한 투쟁은 윤태우 기자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울산노동운동의 건강한 지표를 다시 세워내는 일일 것이다. 인간관계의 폐허로부터 단절하자! 다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묻자! “진실”은 스스로 행동함으로써 검증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요구다. 
부당노동행위·폭언·폭행에 대해 울산저널 경영진은 공개 사과하라.
책임자를 처벌하라. 



[각주1] 난 울산저널 경영진의 모욕감을 이해할 수 있다. 윤태우 기자와는 다른 입장이다. 난 울산저널 경영진이 살아온 인생 전체가 조롱거리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도 존중받아야 할 빛나는 시기가 있었다. 난 지금 울산저널 경영진의 말과 행위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들이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인생 전체가 조롱의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윤태우 기자만큼이나 울산저널 경영진도 상처가 깊다고 생각한다. 다만 난 울산저널 경영진이 모욕감을 느꼈다면 분노의 화신이 되도록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비춰 지금의 말과 행위를 되돌아보는 것, 행위를 잠시 멈추고 성찰하며 사과할 일이 있다면 사과할 수 있는 자기 힘을 갖는 것,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오류로부터 배우는 운동가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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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3 20:01 2017/04/1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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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12 10:37

[쟁점] 기본 소득 : 진보의 꿈이 신자유주의의 현실을 충족시키다

존 클라크 | 유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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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인 존 클라크는 온타리오 반빈곤 연합(Ontario Coalition Against Poverty, OCAP)에서 오랫동안 빈곤퇴치 운동을 해온 활동가이다. 


지금까지 기본소득 개념의 역사를 보면 제안은 많이 됐지만 현실화되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제 변화의 시기에 다가서고 있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기본소득 시범사업을 협의 중이다.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의회는 기본소득을 시험해보기로 합의했다. 핀란드,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서도 시범사업이 임박했다.

 

제안되고 있는 기본소득의 형태들은 그 폭이 매우 넓으며, 보통 서로 완전히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로도, 삶을 개선하고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관심이 있는 모델들과 자본주의의 착취 능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모델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범주에 속하는 모델들 사이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소득을 제공하는 ‘보편적 보조금‘이 있고, 어느 정도의 자산수입조사를 수반하는 ‘네거티브 소득세‘ 개념도 있다. 재분배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진영에서 나온 기본소득 제안들은 빈곤과 불평등을 줄이며, 관료주의의 침투를 완화하고자 한다. 위의 온타리오 시범사업 제안은 여기에 속한다. 더욱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목표를 염두에 둔 모델들도 있다. 이 모델들은 기본소득을 통해 일과 소득 사이의 연관성을 끊고 고용주들이 가진 경제적 강제력을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한다. 보통 이러한 아이디어는 아무 조건 없이 안정적이고 적절한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급격한 기술변화 및 ‘노동 없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이 광범위한 무급노동을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논의가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진보적 기본소득 개념들의 공통점은 그 제도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설명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는데 비해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적 기본소득 개념들의 결점들을 더 살펴보고 대안적인 방식을 제시하기 전에,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매달린 칼과 같은 기본소득의 신자유주의 버전을 더 진지하게 고찰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버전
 

찰스 머레이의 매우 반동적 아이디어는 기본소득에 대한 매우 불길한 제안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기본소득 제도는 두 가지 기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의무적으로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대신 연 1만 달러라는 대단찮은 금액이 보편적으로 지급된다. 둘째, 그는 기본소득이 시행되면 다른 모든 복지성 급여제도가 해체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캐나다의 우익 기관인 프레이저 연구소(Fraser Institute)는 최근 블로그를 통해 복지성 급여의 수준이 저임금 노동력의 공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머레이와 동일한 지점을 강조했다.


신자유주의 의제를 강화하는 오늘날의 정부들이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면, 나는 여기에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째, 정당성이라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 특히 기본소득은 ‘진보적‘으로 보이는 포장에 싸여 제공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들을 곧 공통선의 양을 재는 것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온타리오 자유당은 국제적으로 가장 눈에 띈다. 이 당이 사람들을 더 심한 빈곤으로 내모는 동안 기본소득 시범사업 협의는 “보다 나은 방법”이라는 헛된 약속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거짓 논의를 시행할 수 있게 했다 세계은행과 IMF는 긴축 정책과 그 충격에 대한 반발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 점에서 IMF의 경제학자들이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제를 발전시키면서도 진보적인 모습으로 포장할 수 있다. ‘빈곤 감소’라는 신화 이래 세계 자본주의 정책에 있어 가장 좋은 방법 일 수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설계자들이 관심을 두는 것으로 생각되는 기본소득의 두 번째 요소는 가장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기반으로 더욱 탄력적인 노동력을 창출하면서 경제적 압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빈곤법의 전통에서 나온 소득지원제도는 엄격한 규제와 도덕적인 통제를 강조했다. 끔찍한 수준의 부작용과 함께, 이는 전례 없는 규모로 사람들을 저임금 노동으로 몰아넣는 데 매우 유용했다. 이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할 때다. 불안정한 고용시장에서 사람들이 빈약한 임금과 빈약한 복지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경우가 더 잦아질수록, 보다 얌전한 복지제도는 그들을 가장 나쁜 일자리로 더욱 효과적으로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주택을 유지할 수 있을만한 빈약한 소득을 제공하는 사소한 법률 하나가 사람들이 항시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하는데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일종의 추가 임금(wage top up)으로 주어질 기본소득이 고용주들에게 굉장한 지원이 되는 것은 당연히 이 점과 연결되어 있다. 지급액이 빈약하다면 저임금 노동자의 공급은 줄어들지 않겠지만, 이는 고용주들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하거나 임금을 올려줘야 할 의무를 면해주는 보조금으로 기능할 것이다.
 

셋째,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의 가장 큰 장점은, 불충분하며 점점 줄어드는 화폐지급을 받는 이 사람들을 시장 고객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기본소득은 언제나 사회기반시설을 강화하는 최선의 방법은 결코 되지 못할 것이지만, 긴축과 민영화 의제를 강화한다는 맥락에서 재앙적인 처방이다. 이는 사회복지의 상품화에 관한 것이다. 기본소득 지급에 정말 조건이 붙지 않고 그 액수가 꽤 클 수도 있지만, 불충분한 수단과 아주 적은 권리를 가지고 민영화된 옛 사회기반시설에서 상품을 구입해야 한다면 훨씬 더 가난해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본소득의 진보적 지지자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실제로 기본소득 제도와 그 희망을 실현할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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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말했듯이, 대개 기본소득의 재분배 혹은 개혁적 모델들의 제안은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덜 두는 반면, 호감을 키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진보적인 기본소득의 길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판단을 본 적이 없다. 어떤 특정한 기본소득 모델이 채택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정의롭고 공정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본소득을 신뢰할 수 있는 해법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한다.


첫째, 고용주들은 그들의 협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노동자 과잉공급을 반가워하지만 실업문제에 대한 총체적 방기는 사회불안을 가져오기 때문에 소득지원제도가 생겨났다. 고용주들의 마지못한 양보로 제공되었지만, 소득지원 정책들의 필요성은 입증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행되어온 복지성 급여제도는 항상 고용주의 힘이 약화되는 걸 최소화하도록 가능한 한 불충분하게 만들어졌다. 폭넓게 제공되는, 혹은 심지어 보편적이고 적당한 화폐지급은 그 균형을 다른 편으로 크게 기울일 것이다. 이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전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얻어낸 양보가 철회되었다. 노동조합은 약해졌고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되었으며 저임금 노동이 크게 증가했다. 소득지원제도의 약화는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실업자를 위한 혜택뿐만 아니라 다른 제도도, 특히 장애인을 위한 제도들이 악화되어 가장 나쁜 일자리를 위해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회에서 힘의 균형을 바꾸었고, 우리는 대대적인 방어적 투쟁을 하게 되었다. 노동조합과 운동이 우위에 있지 않은 매우 불리한 현 상황을 감안할 때, 현 상황에서 이득을 얻는 자들이 전후 경제호황 시대에 시행된 것만큼이나 전면적인 재분배 사회개혁 제도를 수용할 것이라고 어떻게 가정할 수 있나? 이것을 실현할 계획은 과연 무엇인가?


셋째, 가장 반동적인 사업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우파 정부와 정당들이 기본소득을 고려하고 있으며, 사회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저임금 노동자가 되도록 하는 방식에 중점을 두면서 빈약한 금액을 지급하는 시범사업을 수립하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의 변종이 아닌 진보적 기본소득이라는 상상을 날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관계없이, “노동 없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복지성 급여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일자리에서 쫓겨난 대중들은 급여를 제공받아야 할 것이며, 자본가들은 테슬라 자동차 사장 엘론 머스크처럼 분별 있고 유일하게 합리적인 해결책인 기본소득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미래를 위한 책임 있는 준비를 상상하는 것은 이윤 창출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에 부당한 신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환경재앙에 직면해도 송유관 건설을 중단하지 않는 자본가들이 기술대체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깊이 고민할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가 없다. 포스트-자본주의적 자본주의는 없고 이를 유발할 사회 정책의 혁신도 없다.


최근에 내가 ‘기본소득’ 토론의 패널로 나갔을 때 사회자가 내게 반론을 제기했다. 그녀는 기본소득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아니라고 수긍했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대담한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물었다. 정당한 질문이지만, 우리가 반대하는 것에 대해 현실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여전히 꼭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그것에 일부 진지한 측면들이 있다 해도 말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기가 많은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착취 수준은 높아졌으며 노동계급 운동이 약해졌다. 우리의 요구와 열망은 매우 중요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쟁취할 수 있는가이다. 기본소득으로 경도하고 있는 좌익들의 경향에서 불안한 점은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현실과 그것에 저항할 필요성을 우회하는 사회 정책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영국 노동당과 기본소득


영국 노동당의 제레미 코빈를 둘러싸고 국제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상당한 흥분이 일어났다. 그의 가까운 동맹자이자 노동당의 예비 재무장관 후보인 존 맥도넬은 긴축 합의 파기를 담은 정책의 일환으로 기본소득 채택에 관심을 기울였다. 좌파 사민주의자인 맥도넬은 진보적 기본소득을 위한 ‘최상의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말한 ‘대담한 전망’이 보편적인 화폐지급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하는지 혹은 다른 목적에 헌신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신자유주의에 직면하여 우리가 노동자들과 지역사회의 필요에 기초하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항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목적과 요구들을 생각해서 제기해야 한다고 해보자. 내 생각에 그 때 만일 우리가 보편적인 화폐지급처럼 제한적이며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스스로를 팔아넘기는 짓이다. 기본소득이라는 전망은 뭐든지 팔아먹으려고 하는 부정한 사회의 고객이 되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엄청나게 확장된 무상 의료와 교통 제도를 위해 싸우는 것은 얼마나 대담하고 의미 있는 일인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대부분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주택을 창출하고 확장해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보편적 보육과 많은 종류의 지역사회 서비스처럼 관심을 기울여야할 것들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국가 관료제의 고위관료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힘을 빼앗고, 노동계급이 의존하고 있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기존 소득지원에 있어서 우리는 빈약한 수준의 혜택, 관료주의적 방해,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찌든 도덕적 통제를 잠깐이라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실업자․빈민․장애인이 ‘수치심의 절차’를 통과해야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의 실제 요구에 부합하는 최대한의 재정지원혜택과 프로그램, 생활임금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있다. 이처럼 확장된 서비스에 필요한 비용은 다른 노동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은행 그리고 그 소유주들의 세금 부담을 늘리고 부유세를 징수하도록 압박해서 마련해야 한다.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고 개선하려는 투쟁은 생활임금, 노동현장의 권리, 산업재해 노동자를 위한 실질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노동자 투쟁과 연결되어야한다. 이 외에도 자원 고갈, 오염, 생태적 재앙을 불러오는 ‘기업의 결정들’에 맞서보자.


나는 우리 운동이 신자유주의 질서와 이를 창출한 자본주의 체제와 타협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이 전면적인 개혁 수단이라는 그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기본소득 개념은 체제와 화해하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타협조차 불가능하다. 정부가 사회정책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기본소득 모델은 ‘노동시장의 폭정‘을 끝내기는커녕 더 끔찍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긴축과 민영화 의제는 착취 앞에서 가능한 한 사람들을 힘없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소득지원제도를 필요로 한다. 그 이름을 ‘기본소득’이라고 바꿔 부른다 한들 변하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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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2 10:37 2017/04/1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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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10 21:25

[국제] 피델 카스트로의 정치적 유산

(null)빌 밴 오큰(Bill Van Auken)
옮긴이|이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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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11월 25일), 20세기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인 피델 카스트로가 죽었다. 이 소식은 그가 남긴 모순적인 역사적 유산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들만큼이나 폭넓은 대중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카스트로는 권좌에서 물러난 지 10년 만에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반세기 가까이 그는 “종신대통령”이자 집권 공산당의 제1 서기 및 쿠바군 총사령관이었다. 카스트로는 권력의 많은 부분을 현재 85세인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이양했다.
 

카스트로의 통치는 그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골몰했던 아이젠하워에서 조지 W. 부시에 이르는 미국 대통령 10인의 임기를 합친 것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을 위해 1961년 CIA가 조종한 피그만 침공을 비롯하여 수백 번이 넘는 암살 시도와 사상 최장기 경제 봉쇄 등 갖은 수단을 다 썼지만 실패했다.
 

카스트로의 기나긴 정치이력은 많은 면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통치에 라틴아메리카에 전형적인 군사 독재의 성격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정치적인 경쟁자와 반대세력들에게 무자비한 면을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정하기 어려운 개인적 카리스마와 인간적인 면모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쿠바의 억압받는 대중들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넓은 층의 지식인들과 급진적인 청년들의 지지를 얻었다.
 

카스트로의 죽음에 대한 미국 언론의 반응은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신문들은 “잔혹한 독재자”라는 비난 사설을 실었다. 방송들은 쿠바 국민 대부분이 보인 침울하고 진지한 추모 분위기보다 마이애미에 있는 리틀 아바나 거리에서 쿠바 우익 망명자 수 백 명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권좌에서 내려온 지 십년이 지났음에도 카스트로는 쿠바에서 예전보단 덜 하지만 여전히 큰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는 카스트로가 주도한 1959년 쿠바 혁명이 이 나라의 극빈층에게 명백한 사회 환경의 개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는 쿠바와 인구 및 국내총생산 규모가 비슷한 이웃나라 도미니카를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쿠바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도미니카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쿠바의 평균 수명은 79세로 도미니카의 73세보다 6세 많고, 영아 사망률은 도미니카의 약 6분의 1이다. 쿠바의 문맹률과 영아 사망률은 미국보다도 낮다.
 

카스트로의 정치적 억압성을 강조하는 미국 언론의 논평들은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미국은 한 세기 내내 무수히 많은 독재정권들을 지원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만 이런 정권들은 수 십 만 명의 죽음을 불러왔다. 카스트로와 카스트로주의는 이런 참담한 유혈의 역사가 빚은 산물이었다.
 

카스트로의 정치적 성공은 1898년 스페인-미국전쟁의 승리로 쿠바가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이래 미국 제국주의가 수십 년 동안 자행한 수탈과 억압의 결과였다. 미국은 이른바 플랫수정조항을 통해 쿠바 내정에 간섭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관티나모 만을 점령하여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미국이 지원한 바티스타 독재정권

 

쿠바 혁명 전, 미국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적극 지원했다. 바티스타는 외국 기업, 국내 토착 지배층 및 마피아의 이해를 대변하는 흉폭한 독재정권을 이끌었다. 이 세력들은 쿠바를 도박과 성매매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고문은 일상이었고,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조차 바티스타 정부가 20,000명 이상의 쿠바인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말했다.
 

악랄한 정권이었지만 이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정부는 도미니카의 트루히요, 아이티의 뒤발리에, 니카라과의 소모사 등이 저지른 유사한 범죄행위를 지지했다.
 

민주적 수단을 통해 기존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한 사람들은 폭력으로 제거되었다. 예를 들어 1954년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이 CIA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 결과 중남미 전역에서 대중적인 반미정서가 들끓었다.
 

스페인계 지주 가정에서 태어난 카스트로는 민족주의적 학생운동의 온상인 아바나 대학에서 정치의식에 눈을 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년 카스트로는 스페인의 파시스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e Antonio Primo de Rivera)와 이탈리아 총통 베네디토 무솔리니를 숭배했다고 한다.
 

학생시절인 1948년 콜롬비아 보고타를 여행한 것도 그의 정치의식을 형성시킨 중요한 경험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 지역에서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보고타에서 미대륙 국가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미주기구’를 건설하고자 했다. 카스트로의 보고타 여행 동안 벌어진 자유당 대통령 후보 호르헤 가이탄 암살 사건은 ‘보고타 폭동(Bogatazo)’으로 알려진 대중 봉기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이 콜롬비아 수도의 상당부분이 파괴되고 사망자는 3000명에 이르렀다.
 

카스트로 스스로 인정하듯이 장교출신의 아르헨티나 권력자 후안 페론도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페론의 포퓰리즘과 반미주의, 빈민 복지 정책을 찬양했다.
 

카스트로는 20대부터 쿠바 소부르주아에 기반 한 반공산주의 경향의 민족주의 정당 인민정통당(Partido Ortodoxo)에 가입하여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1952년 인민정통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출마했던 카스트로는 1년 뒤 무장투쟁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어 몬카다 군병영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 비참한 실패로 끝난 이 봉기로 2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
 

짧은 수감생활 이후 망명을 떠난 카스트로는 1956년 말 무장한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로 돌아왔다. 정부군과 첫 교전에서 다수의 병력을 잃었지만, 쿠바 부르주아와 미국 정부는 이미 바티스트의 통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불과 2년 만에 권력은 카스트로의 게릴라 조직 <7월 26일 운동>의 수중에 떨어졌다.
 

봉기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보였을 때 카스트로는 폭넓은 국제적 지지를 받았다. 새로운 정권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있었다. 그는 바티스타 정권의 전복이 “기뻤다”고 썼다.
 

본래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에 대한 어떠한 공감대도 부정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해외 자본을 보호하고 새로운 민간 투자를 환영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미 제국주의와 합의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쿠바 노동자와 농민들은 혁명에서 성과를 바라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자국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나라에 가장 온건한 사회 개량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미국의 지배그룹은 바티스타의 실각을 짧게 축하한 뒤 새 정부가 예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카스트로가 진정으로 쿠바 사회를 변화시키고 가난한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렸다. 미국은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왔다.
 

제한된 수준의 토지 개혁에 대한 응답으로 미국 정부는 쿠바로부터 설탕 수입을 줄이고 석유 수입을 금지하여 쿠바 경제의 숨통을 졸랐다.
 

카스트로는 이에 대해 먼저 미국 재산을, 그 다음에 쿠바인 소유 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는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쿠바의 스탈린주의 정당 인민사회당(PSP)의 힘을 빌렸다. 이 당은 바티스타를 지지하며 카스트로의 게릴라 운동을 탄압한 전력으로 불신을 받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카스트로가 갖지 못한 정치 조직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카스트로는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와 피억업 국가들을 휩쓴 광범위한 부르주아 민족주의 및 반제국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 운동은 알제리의 벤 벨라, 이집트의 나세르, 가나의 은크루마, 콩고의 루뭄바 같은 주요 인물들을 낳았다. 카스트로와 마찬가지로 그들 대부분은 자기 이익을 위해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이용했다.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는 카스트로의 선언과 친소련 정책은 확실히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소련 관료체제가 혁명 지도자들을 말살하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또한 러시아 10월 혁명이 43년이나 지난 1960년에도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결과이기도 하다.
 

쿠바 민중들의 치솟는 기대와 미국 제국주의의 완강한 반응은 카스트로를 왼쪽으로 밀어갔다. 하지만 그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쿠바 사회의 개혁에 힘쓰던 초기에 그의 정치지향은 항상 실용적이었다.
 

결국 카스트로는 소련 스탈린주의와 파우스트적인 거래를 맺게 되었다. 소련 정부는 막대한 원조와 무역 보조금을 제공하는 대신, 미국 제국주의와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데 쿠바를 협상카드로 이용했다.
 

1991년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의 최종적 배신인 소련의 해체는 쿠바를 절망적인 사회·경제적인 위기 속으로 떨어뜨렸다. 카스트로 정부는 해외자본 투자를 점차 개방하고 베네수엘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서 이를 벌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경제 위기로 원조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미국과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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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은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이 다시 설치되고 올해(2016년) 3월 오바마가 쿠바를 방문하는 등 미국과 쿠바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쿠바의 값싼 노동력과 전망 좋은 시장을 이용해야 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이 나라에 중국 및 유럽의 라이벌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쿠바 지배층은 미국 자본의 유입을 중국과 유사한 길을 가는 동안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할 수단으로 보고 있다. 쿠바 엘리트는 사회 불평등이 급속히 심화되는 상황 아래 쿠바 노동계급을 희생양으로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이 생애 마지막 십년 동안 카스트로를 괴롭힌 것은 분명하다. 이 시기 동안, 카스트로는 쿠바 언론에 “피델의 성찰”이라는 칼럼을 통해 정기적으로 발언을 계속해왔다. 이론적인 통찰은 거의 제시하지 못하는 이 글들은 성실한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의 사고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칭찬할 만한 일은 카스트로가 죽을 때까지 미국 제국주의가 대표하는 모든 것을 경멸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권” 수사학을 구사하면서도 제국주의 전쟁과 무인폭격기에 의한 암살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버락 오바마의 위선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오바마의 쿠바 방문 직후, 카스트로는 자신이 쓴 마지막 칼럼들 중 하나에서 미국 대통령이 아바나에서 한 연설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 우리는 민중의 노력과 지성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과 물질적인 부를 생산할 수 있다. 아무것이나 던져주는 제국은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썼다.
 

하지만 오바마의 쿠바 방문과 미국 제국주의와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움직임은 중간계급 세력이 주도한 다른 모든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 및 민족해방 투쟁처럼 카스트로 혁명이 최종적인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결국 카스트로 혁명은 제국주의적인 억압에서 생겨난 쿠바의 역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실패했으며, 예전에 그것이 반대했던 신식민주의적인 관계를 부활시키고 있다.
 

단지 냉소적인 사람만이 카스트로의 생애에서 영웅성과 비극성을, 무엇보다 쿠바 민중들의 오랜 투쟁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트로의 유산은 쿠바 내로만 한정해서 평가할 수 없고, 그의 정치가 국제적으로,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야만 한다.
 

유럽과 북미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와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소규모 게릴라부대의 우두머리에서 국가의 권력을 잡은 카스트로를 노동계급의 의식적이고 독립적인 정치적 개입도, 마르크스주의 혁명정당의 건설도 필요 없는 사회주의로 가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치켜세웠다. 카스트로 혁명의 신화와 특히 그의 정치적 동료 체 게바라가 전파한 게릴라 이론은 모든 주변부 지역에서 혁명의 모델로 떠받들어졌다.

 

파블로 수정주의의 역할

 

이러한 잘못된 관점의 가장 눈에 띄는 지지자들로 제 4인터내셔널에 등장한 파블로 수정주의 경향이 있다. 이 조직은 유럽의 에른스트 만델과 미국의 조지프 핸슨이 주도했고, 이후 아르헨티나의 나후엘 모레노가 결합했다. 이들은 카스트로의 성공은 소부르주아가 이끄는 소농에 기반을 둔 무장 게릴라들이 “태생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natural Marxists)”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객관적 상황은 수동적인 방관자로 위축된 노동계급과 함께 이들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몰아갈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노동자 권력기관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의 국유화가 쿠바에 “노동자국가”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쿠바 혁명 훨씬 이전에 레온 트로츠키는 소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시도되는 손쉬운 국유화와 사회주의 혁명을 동일시하는 관점을 명확히 거부했다. 1938년에 작성된 제 4인터내셔널 설립 문서 「이행강령」은 “지극히 예외적 상황(전쟁, 전쟁에서의 패배, 금융붕괴, 대중의 혁명적 압력 등) 하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을 포함한 소부르주아 정당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정도보다 더 나아가 자본가계급과 단절할 이론적 가능성을 미리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건을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와 구분했다.
 

1939년 (히틀러와 협정을 맺은) 폴란드 침공 과정에서 스탈린 체제가 수행한 몰수조치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 “우리의 주요한 정치적 기준은 이 지역 저 지역에서 소유관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계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들이 과거의 투쟁성과를 보존하고 새로운 성과를 쟁취할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제 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는 파블로주의에 맞서 완강히 투쟁하면서, 카스트로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새로운 길이 아니라, 옛 식민지 세계의 많은 곳들에서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의 보다 급진적 변형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카스트로주의에 대한 파블로의 미화가 마르크스로부터 기원한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적·이론적 개념 전체에 대한 부정이며, 또한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의해 국제적으로 집결된 혁명적 중핵을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 진영 속으로 해소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 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는 원칙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쿠바를 지지하면서도 쿠바에 대한 분석을 제국주의 시대에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역할에 대한 더 큰 틀의 평가 속에 위치 지웠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을 옹호하며, 제 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는 1961년 이렇게 썼다. “이런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추켜세우는 것은 트로츠키주의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보인 배신행위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제국주의와 노동자 농민 사이에 완충막이 되었다. 소련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을 가능성은 제국주의자들과 더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심지어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지도자들 중 보다 급진적인 부위들이 제국주의 국가의 재산을 공격하고 더 많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들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통해 정치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가난한 농민들을 소비에트 건설로 이끌며, 국제적인 사회주의 혁명과 연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트로츠키주의자는 어떤 경우에도 이 문제들을 민족주의 지도부를 사회주의자로 만드는 희망과 바꿔치기해서는 안 된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과제이다.”
 

이러한 경고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비극적으로 입증되었다. 여기서 파블로주의자들이 고취한 이론들은 급진적인 청년과 젊은 노동자들의 한 세대를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계급을 조직하는 투쟁에서 수천 명의 희생을 요구한 자멸적인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는 노동자 운동을 잘못된 방향으로 오도하고, 파시스트적인 군사 독재로 가는 길을 닦도록 도왔다.
 

그 첫 번째 예로 이러한 이론들은 볼리비아에서 게바라 본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광부들 및 여타 볼리비아 노동계급의 전투적인 투쟁들을 무시하고 농민들의 가장 낙후하고 억압받는 층에서 게릴라를 모집하려는 헛된 노력의 결과 그는 고립되고 굶주리다 1967년 10월 CIA와 볼리비아 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게바라의 운명은 카스트로주의와 파블로 수정주의가 주변부 전체에서 불러올 재앙적 결과들에 대한 비극적인 전조였다. 아르헨티나에서도 게릴라주의에 대한 숭배는 1969년 코르도바의 대규모 파업으로 폭발한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을 약화시키고 혼란을 주는 역할을 했다.
 

카스트로는 소비에트 블록의 고객이자 자국 체제를 안정시키려고 애쓰는 현실정치가로 행세하면서 다른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 정부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이 정부들은 그를 모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복시키려는 대상이었다. 1971년 카스트로는 칠레를 방문해 아옌데의 “사회주의로 의회적인 길 (parliamentary road to socialism)”을 찬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그 나라의 파시스트들과 군대는 노동계급을 분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페루와 에콰도르의 군사정부를 반제국주의자로 칭찬했으며, 심지어 1968년 학생들을 학살한 멕시코의 부패한 집권정당 제도혁명당도 끌어안았다.
 

카스트로 정책과 그를 미화한 정치적 경향들이 미친 전반적인 영향은 주변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지금 제국주의 강대국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은 쿠바와 다른 나라들에서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카스트로의 죽음을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역사는 그 나라 민중과 세계에 이 한 사람의 개인이 미친 거대한 영향을 기록하고 판단할 것”이라는 위선적인 성명을 발표하며, “쿠바 국민은 미국이 우방이자 협력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큰소리쳤다.
 

반면 대통령 선출자 트럼프는 “거의 60년 동안 자국 국민을 억압해온 잔혹한 독재자의 죽음”을 축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은행과 기업들이 쿠바에 쉽게 쿠바에 침투할 수 있도록 오바마가 제정한 법안들을 폐지하겠다는 트럼프의 위협이 실제로 실행될지에 대해서는 추측이 분분하다.
 

제국주의의 대표자들이 반동적 목적으로 카스트로의 죽음을 이용하려 하는 동안, 노동자들과 청년의 새로운 세대에게 카스트로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제 4인터내셔널 국제 위원회가 발전시킨 선견지명적인 비판에 대한 연구는 미래의 혁명 투쟁과 그것을 지도할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준비시키는 데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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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0 21:25 2017/04/1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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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04 10:15

촛불 속 우리가 주목하는 목소리 (2)

광장정치의 시대, 페미니즘 의제 고민하기

<페미니즘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하라 - 박근혜 퇴진정국과 그 이후> 토론회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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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2016년 12월 23일,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에 활발히 참여했던 <강남역 10번출구>, <박.하.女.행(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 <불꽃페미액션>,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의 주최로 “페미니즘,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하라” 토론회가 열렸다. 주최 측의 발제와 함께 토론자로는 페미니스트 정치덕후라고 자신을 소개한 권김현영, 이현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대표,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토론으로 함께 했다. 좁은 토론장에도 불구하고 약 70여 명의 청중들이 토론회에 참가했다.


2015년 여름, 소위 메르스 갤러리를 시작으로 소라넷 폐지를 위한 활동, 2016년 5월의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에 대한 온오프라인에서의 활동들, 낙태죄 폐지 시위 등 지난 2년간의 일련의 흐름 속에서 촛불집회 내 페미존이 탄생할 수 있었다. 페미존은 정권비판에 있어 성차별적 방식들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 개인/그룹이 함께 움직이는 하나의 구역이다. 페미존은 11월 12일 ‘페미당당’에서 게시한 혐오없는 집회를 제안하는 웹자보에 ‘강남역 10번출구’,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가 호응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여러 페미니스트 개인/그룹이 함께하게 되었다. 12월 23일의 토론회는 페미존의 활동에서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성차별적 콘텐츠를 비판하는 활동을 넘어, 페미니즘 정치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대한 논의를 여는 자리였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의 발제문은 ‘여성 대통령’이라는 상징을 둘러싼 여야 간의 대결 속에서 박근혜 스스로 구축한 카르텔이 어떻게 은폐되는지에 대해 지적했다. ‘여성대통령’의 상징 뒤에 숨은 카르텔의 성격과 동력을 제대로 분석, 비판하고 단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대선에는 박근혜를 둘러싼 ‘여성대통령’이라는 상징이 난무했음에도 정작 페미니즘 정치는 의제화되지 못했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지적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도 역시 이전 개발, 성장주의는 지속되었고, ‘스스로의 시민자격 유지’가 생존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적 리더십에 대한 향수와 비(非)시민에 대한 혐오 강화로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개발, 성장주의와 다른 패러다임의 페미니즘 정치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대선에서 페미니즘 의제는 대두되지 못했다. 단지, ‘노동자’라는 계급적 위치 앞에서 ‘여성’의 위치는 삭제되거나, 박근혜 대선캠프의 경우처럼 정치적 위기 돌파의 도구로서만 존재했다. 나영은 발제문에서 2012년 대선과정을 톺아보며, 페미니즘 정치의 패러다임과 의제가 새롭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이지원은 촛불집회 내에서 박근혜와 최순실에 대한 비판이 여성에 대한 비하로 이뤄지고 있는 점에 대해 문제제기했다. 광장이 여성 비하를 통한 희화화와 조롱을 하는 동안 정작 시민들의 공론장에서 다뤄졌어야 할 내용들은 특검이나 헌법재판소 같은 곳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또한 ‘여성혐오’적 비판에 대한 분노와 민주당을 포괄하는 소위 “운동권” 혐오의 정서가 현재 워마드에서 보이는 박근혜 퇴진정국에 비판적인 태도를 낳은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지원은 한 편으로는 페미존과 같이 촛불집회에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다른 편으로는 워마드로 대표되는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정치에서 이들 간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졌다.


<박.하.女.행>의 조이다혜는 페미존의 그간 활동과 성과를 중심으로 발제하였다. 정권비판이 박근혜와 부역자들을 ‘여성’으로 격하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촛불집회의 성차별적 발언은 페미존이 촉발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페미존으로 모인 사람들은 ‘여성의 실패가 아니라 박근혜의 실패다’,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함께 갈 수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또한 집회 도중 성차별적 발언이나 피켓을 보면 다 같이 항의하는 구호를 외쳤다. 시비와 폭력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페미자경단을 꾸리고 집회 내 성폭력 매뉴얼도 만들었다. 무대에서의 성차별적 발언에 대해서는 발언 정정이나 사과를 요청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페미존은 1)박근혜 퇴진, 2)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공론장에서 여성에 대한 성차별, 성폭력에 항의, 3)서로의 안전 보장이라는 목표 하에 31개의 단체가 적어도 한 번 이상 페미존에 함께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페미존에 참여한 사람들 스스로 성차별적 상황과 경험을 발언하고, 정치적 요구를 외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자신들의 주 활동 공간에서의 성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공론화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또한 촛불집회 내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었고, 성평등한 집회 문화의 기준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물론 아직도 친박 대 민주주의자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문제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을 ‘친박페미’라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럼에도 정치적 올바름의 공론화가 페미니스트들의 집단화, 세력화를 통해 이뤄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발제는 마무리 되었다.

 

페미니즘과 광장의 정치


발제 이후 이어진 토론에서는 현재 페미니즘 정치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김현미 토론자는 과거 이명박 정권 당시, 여성가족부 폐지와 관련한 페미니스트들의 대응과 현재의 상황을 대비하면서 페미니즘의 정치적 장이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지 지적했다. 지금까지 여성 정치의 상(像)과 발전 측정 지표는 주요 자리에의 여성 진출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 과거, 여성가족부는 성주류화의 통로이자 그러한 여성가족부의 폐지는 여성정책의 후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가족부나 여성정책이 페미니즘 의제를 풀 수 있는 통로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또한 여성단체 대표의 국회진출, 여성의 정부진출과 같은 대리정치에 대한 기대 역시 별로 없다. 과거에는 국회의원 중 여성비율 등 대표자의 여성비율이 주요한 여성의 역량성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그런 위치는 중요한 변화를 이뤄내기 어려운 남성들이 끼워준 자리에 그치기 쉬웠다. 따라서 기존의 여성가족부, 주요한 자리에의 여성 진출은 더 이상 주요한 페미니즘 정치의 비전이라고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토론에서 여러 번 제기되었듯이 페미니즘 정치의 공간은 대리정치가 아닌 직접정치이자 온/오프라인의 광장 정치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년 여 간의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페미니스트들의 직접행동들(소라넷 폐지를 위한 온,오프라인의 활동들, 강남역 10번 출구의 추모와 촛불집회,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활동 등)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벌어졌다. 페미니즘이 다시 시동을 거는 시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기다. 역설적으로 “여성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시기에 페미니즘 정치는 온/오프라인과 광장에서 직접 행동하는 사람들로부터 다시 동력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촛불집회의 ‘페미존’은 위와 같은 직접정치, 광장정치로의 이동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광장의 정치, 누구의 목소리로 대표되고 있는가?


탄핵정국에서 페미니스트들은 광장으로 나왔으나 촛불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가시화되기 어려웠다. 이는 결국 현재 탄핵 정국에서의 논의가 ‘누구’의 목소리로 이야기되고 있는가의 문제와 맞닿아있다. 권김현영 토론자의 만민공동회의 사례는 이와 관관련해 흥미로운 지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권김현영 토론자는 1898년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의 예를 통해 현재 탄핵 정국에서 광장정치의 의미에 대해 지적했다. 1898년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열린 4월부터 10월까지의 광장은 매우 다양한 참여자와 의제가 분출하는 장이었다. 기생과 백정들도 ‘우리도 시민이다’라고 시민권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1899년 덕수궁 앞에서는 양반 여성들을 중심으로 “축첩제도를 폐지하라”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만민공동회의 경우와 같이 광장정치는 다양한 의제를 제기하며 기존의 정치 체제를 흔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장의 다양한 의제가 협소해질 때 그 가능성이 축소될 수 있다는 점도 논의되었다. 현재 광장의 논의는 ‘국민’의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단일화되고 있다. 김현미 토론자는 박근혜 퇴진 정국에서 집단적 대동단결을 외치며 민생과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단일화되었을 때, 향후 중요한 정치 개혁의 핵심이 되어야 할 재벌, 대형교회와 깡패집단, 여러 엘리트 계급의 권력이 해체될 수 없음을 우려했다. 소위 좌파나 진보진영 역시 ‘시민혁명’, ‘시민불복종’이라며 현재 퇴진 정국을 환영하고는 있으나, 새로운 의제, 아젠다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임을 지적했다. 즉, 광장의 의제가 단일한 ‘국민’의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으로 축소되었을 때, 광장은 기존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다양한 의제의 가능성을 상실한 채, 정권에 대한 반대로만 앙상해지는 것이다.


현재 광장 의제에 대한 평가는 페미니스트 정치가 제기해야 하는 의제와 문제의식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현재 토론자는 지금까지 페미존의 운영을 돌아보며, 그렇다면 지금 페미존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즉 어떤 의제를 제시할 것인지가 더욱 심도 깊게 논의되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지금까지 페미존은 주로 ‘여성혐오’에 기반한 정권 비판에 문제제기하는 활동들을 해왔고 이는 SNS에서 나타난 페미니즘 전략을 잇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촛불 광장에서의 페미니즘 전략이 SNS라는 공간에서의 전략과 동일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 고민해볼 것을 제안했다. 예를 들어 촛불집회 사회와 발언에서의 성차별적 측면에 대한 SNS 상의 비판이 있었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당시 온라인 상의 비판이 이어지자 박근혜정권퇴진행동이라는 조직적 주최 단위에서는 사과했으나 그러한 사과가 광장에서 문제의식이 효과적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이후 SNS에서의 역풍은 이를 방증했다. 즉 아무리 현재 정국에서 정권비판 과정에서의 여성비하적 측면을 지적하더라도, 박근혜 정권 비판이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환원된는 것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이슈를 제기하고, 어떻게 ‘여성혐오’를 이야기해야 할지 다시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현재 토론자는 이에 덧붙여 ‘낙태죄’ 폐지를 하나의 의제로 제안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간의 차이


차이에 대응하는 것은 촛불광장에서만은 아니다. 소위 ‘여성’들 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역시 토론회에서 중요 논의지점 중 하나였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활동하는 이지원씨는 발제에서 워마드라는 커뮤니티의 ‘여성’들과 어떤 관계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제시했다. 워마드에서 추천수가 높은 게시글 중에는 박근혜를 ‘햇님’으로 부르며, ‘사실 남자 대통령에 비해 못한 것도 없다’, ‘현재 상황도 박근혜의 잘못이라기보다 자기 이익만 챙긴 남성 보좌진 때문이다’, ‘그래도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추진했다’등의 평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지원씨는 이를 “여성성에 대한 비하로 구성된 비판담론에 대한 거부감”, “민주당을 포괄하는 진보운동권 혐오”가 강력하게 작동한 현상이라고 본다.


위와 같은 방식의 대응은 젠더 근본주의적 태도에 기반한 것으로 읽힌다. 여성이라는 범주는 단일하지 않고, 계급과 인종 등과 맞물려서 작동한다. 그러나 성별이라는 기준만으로 대응할 때, 여성들 간의 계급적 차이, 인종적 차이 등은 간과되기 쉽다. 따라서 촛불집회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워마드와 촛불집회 내의 페미존 간의 차이는 한 편으로는 성별과 계급, 인종 등과 같은 다양한 범주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억압에 대한 동의 여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현미 토론자는 워마드의 대응 역시 페미니즘 정치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 하나로서, 일종의 미러링처럼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질문한다. 즉, 페미니즘 진영 역시 장소, 층위, 이데올로기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마치 카드를 여러 개 가지고 있어야 혐오와 반동의 흐름에 한 번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비해 권김현영 토론자는 ‘정치적 입장 차이를 두고 논쟁할 수 있는 것이 진보’임을 지적하며 더욱 적극적인 논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젠더 근본주의적 관점이 두드러지는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하면서 위와 같은 논의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양한 범주가 맞물려서 작동하는 억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억압의 교차성에 대한 토론의 확대가 페미니즘 정치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닫히는 광장에서 또 다른 길을 내다


2016년 11월부터 이어진 박근혜 퇴진 촛불은 압도적인 규모를 통해 박근혜 탄핵안 가결을 이끌어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가 가진 의제의 확장성은 그다지 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퇴진 촛불을 통해서 열린 광장은 다양한 목소리와 의제가 공유되고 논쟁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점차 정권퇴진, 탄핵 인용을 중심으로 닫히고 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의 눈과 귀는 헌법재판소라는 사법적 기관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선 후보 간의 경쟁력을 중심으로 논의가 더욱 협소해지고 있다.


이러한 광장에서 끊임없이 박근혜 비판의 성차별적, ‘여성혐오’적 요소에 문제제기했던 페미존의 활동은 정권퇴진으로 협소해지는 광장에 다른 결의 논의의 장을 열었다. 그리고 참가자 각자의 공간에서 성차별에 목소리를 내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장이 되었다. 이 날 토론회는 이러한 광장정치의 힘이 앞으로 페미니즘 정치의 비전이 될 수 있다는 방향성을 공유하는 자리로서 의미있는 자리였다. 기존 집회의 ‘여성혐오적’ 문화에 문제제기하는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식과 페미니즘 정치 의제가 필요함을 공유한 자리였다. 논의의 장을 연 첫 번째 토론회는 끝났지만 이후 이어질 새로운 페미니즘 정치의 가능성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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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4 10:15 2017/04/0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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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7/04/03 13:20

촛불 속 우리가 주목하는 목소리 (1)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며 150일 동안 계속된 광장에서 “박근혜 퇴진”이라는 목소리가 가장 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물결 속에 한 가지 목소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화시위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여성혐오 발언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든 박근혜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박근혜만 물러난다면 만사가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사드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있었고, 반체제 사상에 대한 탄압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며, 노동탄압에 분노하는 목소리도 있었고,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목소리고 있었다. 청소년들의 목소리도 있었고, 차벽을 넘어 더욱 근본적인 변혁으로 나아가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박근혜 일개인에 대한 감정을 넘어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더욱 큰 목소리로 표출되고 그것들에 의해 광장의 시선은 더욱 뿌리 깊은 문제들까지 뻗어나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광장에서는 박근혜 퇴진, 박근혜 탄핵이라는 큰 목소리에 묻혀 그러한 목소리들이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있다.  

장기투쟁사업장들이 모인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은 청와대로 행진하는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 광장 속의 여성차별과 여성혐오에 항의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집회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목소리와 운동을 만들어갔다.

붉은글씨는 이러한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이번 광장에서 경청해서 들어야할, 결코 묻혀서는 안 되는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의 콜트콜텍 이인근 지회장의 이야기와 촛불정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지난 12월 23일 열린 <페미니즘 새로운 민주주의를 상상하라 - 박근혜 퇴진정국과 그 이후> 토론회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정리하는 기사를 붉은글씨에 실어 띄어본다. [편집자]

 

지난 2월 유난히 찬바람에 몸이 에이던 날씨에 광화문 서울정부종합청사에서 박근혜 퇴진투쟁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탄압 민생파탄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농성장을 방문했다. 거리가 멀다고,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연대를 자주 못했던 곳이 정부청사에 다 모여서 농성장을 만들었다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지고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나오면서부터 현재까지 줄기차게 외쳤던 대통령의 퇴진, 너무도 많이 외쳐서 낡고 닳아버린.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너무나 유의미한 대통령의 퇴진과 관련하여 시국 농성을 벌인다니,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는지 그들의 역할이 너무도 궁금하고 함께하고 싶었던 마음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10개의 사업장이 공동의 거점에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인터뷰가 될까 걱정도 했는데 너무도 쉽게 응해주셔서 편한 마음으로 한편으론 잘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했다.

이 추운 날 농성장에 반나절 있으면서 밥도 얻어먹고 쌍화차까지 후식으로 얻어먹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너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동지들이라 4시간을 했는데도 부족했다. 이것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근혜를 끌어내리겠다고 전국 각지에서 서울 광화문 서울종합청사 바깥 찬 땅바닥에 모여 앉았으니 얼마나 할 것이 많겠는가?


더 이상 아픔과 고통을 강요하지 마라!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 정말로 살고 싶다!


이렇게 외치는 이들이 매일 저녁 6시에 서울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문화제를 한다. 오며 가며 동지들이 연대의 정신을 보여 주길 바란다.


이번 인터뷰는 이인근 콜트콜텍 지회장과 대담을 나누었다.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에 있는 모든 투쟁 단위의 의견을 다 싣지 못했음을 미리 알린다.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에는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동양시멘트지부, 하이디스지회, 진우삼사, 사회보장정보원분회, 티브로드비정규직지부, 하이텍알씨디코리아분회, KTX 열차승무원지부, 콜트콜텍지회, 세종호텔노동조합,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까지 11개 지부가 함께하고 있었으나, 최근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가 나가면서 10개 지부만 남았다.

 

이미진 : 11개의 사업장이 각자 흩어져 있다가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으로 모인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인근 : 각자 흩어져서 싸우지 말고 투쟁사업장들이 공동의 거점을 마련해서 싸우자는 취지로 공동투쟁을 2015년도에 시작했죠. 전국에 있는 투쟁사업장 전국순회를 하면서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했고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 현대차비정규직지회가 들어왔습니다. 매월 하루는 대정부 투쟁을 하고, 각 단사별로 집중해야 하는 날에 같이 가서 문화제를 하고, 조합원의 친밀감을 높이기 위해 수련회도 하고, 1년간의 품앗이 투쟁을 진행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습니다. 기회는 지금이다, 각자의 집중 투쟁을 잠시 접고 박근혜 퇴진투쟁에 집중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작년 11월부터 광화문 정부청사 앞 시국농성이 시작됐습니다.


이미진 :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매주 주말마다 일어났습니다.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모이는 촛불정국에 대해 해고자 원직복직을 위해 장기간 투쟁한 동지들은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이인근 : 권력이 만들어놓은 평화적인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벽이라는 것이 대법원 판결을 통해 불법이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이 불법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촛불 시민은 그 속에서 평화시위라고 이야기 하지만 어떻게 보면 공권력이 만들어 놓은 선 안에서 우리끼리 놀다 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재벌총수들도 공범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촛불에서는 노동 의제가 없습니다. 박근혜 퇴진과 주변 인물의 구속에 대해 외칠 뿐입니다. 또한 재벌총수들의 뇌물공여로 인해 고통 받는 노동자들은 전혀 배려 받지 못했습니다.

박근혜의 태도를 보면 1, 2차 담화를 발표하면서 특검, 검찰의 조사를 충실히 받겠다고 했으나 촛불집회 인원이 100만 명이 넘는 2016년 11월12일 기점으로 박근혜의 태도가 확 바뀌었습니다.

국민에 대한 분노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박근혜 정권은 이미 인지했다고 생각 합니다. 처음 100만 이상 모였을 때 만약에 차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행동을 촛불이 했다면 박근혜가 지금처럼 강공모드로 갈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촛불집회를 가보면 시민혁명이라는 깃발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혁명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출혈 없이 이뤄질 수 없고 평화적인 혁명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싸움이 필요하지요. 4.19때 공권력의 발포가 있었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덜하더라도 그 못지않은 투쟁이 뒷받침돼야 박근혜가 스스로 사퇴를 하고 하야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이 뒤에 들어선 정부 역시도 국민에 대해 무서움을 알고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처럼 평화적으로 가다보면 내내 다음 정권이 들어선다 하더라도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겠지요.

 

이미진 : 4‧19, 5‧18의 처절한 투쟁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민주주의’가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촛불혁명이라고 일컬어질 만큼의 파급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런 평화적인 것에 갇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인근 : 그동안 우리가 살면서 평화라는 것에 대한 세뇌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투쟁에서 공권력과의 마찰이 꾸준히 이어져왔고, 자본과 권력, 보수언론에서는 폭력이라고 규정해왔습니다. 그래서 폭력이라고, 시위가 아니라 불법 행위라고 인식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보다 민주주의를 훨씬 더 오래 했고 더 안착이 된 서구 유럽 역시 시위를 격렬하게 합니다. 이미 자본과 권력이 심어놓은 테두리 안에서 만성화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 질서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국가가 정하는 것이고 가진 자들이 정하는 것입니다.

 

이미진 : ‘평화’나 ‘질서’는 국민을 국가나 자본이 관리하기 편하게 하는 수단인 것 같습니다.

 

이인근 : 옥죄기 위한 하나의 프레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닐까요? 언론이나 교육에서 그들이 만들어놓은 것만 배우다 보니 의심할 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질서를 지킨다는 것은 시위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답답합니다. 촛불 집회 가면 촛불 들고 콘서트 구경하고 청와대 걸어갔다 내려오고 그걸로 끝나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정을 저지른 권력자들을 보면 촛불에 대한 위기감이 하나도 없고 시간 끌기만 하고 있습니다. 사실 국회에서 탄핵가결을 시킨 것도 국민의 힘인데 사실상 지지부진되면서 국민의 힘은 온데간데없고 그 공은 정치꾼들이 가져가 버렸습니다.

국민들 스스로가 나는 노동자이고 지금 내가 하는 노동이 그리고 노동의 대가가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깨우쳐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이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에 신경 쓸 틈이 없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신경 써야 되는데  엄한데 신경을 쓰게끔 국가나 자본이 만들었기에 이승만 때부터 내려온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일을 해도 깨진 독에 물붓기인데 그 깨진 독을 바꿀 생각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진 : 정치적 무관심 자체가 국가와 자본이 조장하는 것 아닐까요? ‘너희들은 돈만 벌어 나머지는 우리가 할게.’라는 식으로 하는데 국민들을 실험용 쥐처럼 만든 것 같아요.

 

이인근 : 지금은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 자본의 축척의 시기라고 이야기하면서 노동자들을 억누르고 기업에게 특혜를 많이 줬죠. 그렇게 거대재벌이 형성된 것이고 국가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자본들은 거대해졌습니다.

 

이미진 : 박근혜 스스로 내려올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준 것 같은데 언론에서 하는 것을 보니 쉽사리 내려오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인근 : 안 내려오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검조사도, 헌재 조사도 안 받으려 하고 변호인들은 판결 늦추려 증인들 무더기로 신청하고 있지요. 국무대행을 하고 있는 황교안 총리가 자기 정책을 다 하고 있고, 심지어 세월호 7시간 관련해서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네요. 허나 헌재 소장 하나가 임기 끝나서 나가고 3.14로 임기 만료로 나가는 상황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헌재도 미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진 : 정리하자면, 평화라는 프레임을 인지하고 스스로 깨 부시지 않으면 광장의 요구를 온전히 쟁취하기 어렵고 노동자  착취를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 것을 지키려는 행동자체를 국가나 자본이 용납하지 않고 언론에서는 폭력으로 규정합니다. 그걸 끊지 않는다면 우린 계속 지금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이인근 : 평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평한 삶을 영위할 때 그때 유지 되는 것이지요, 지금과 같은 양극화 상황에서 평화가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내가 뺏긴 것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이미 권력이라는 것이 다 강자 편에 있기 때문이죠.

법으로 해야 한다고 부추기는데, 법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원래 시위라는 것이 뭔가를 쟁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잖습니까. 무언가를 강자로부터 쟁취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게 어떻게 평화적일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평화적으로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처럼 보입니다.

분노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너무 체념을 하다 보니 분노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미진 : 공투단에서 박근혜 퇴진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상황에서 각 사업장의 의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이인근 : 어찌됐든 올해는 대선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대선관련해서 투쟁사업장의 문제, 노동에 관련된 의제를 가지고 투쟁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공투단은 단순히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이 아닌 노동법 전면 재개정을 요구하려고 합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노동탄압을 완전히 철폐하자는 요구를 대선투쟁으로 할 겁니다.

2월7일 총연맹 대의원대회에서 정치방안을 이야기한다는데, 사실 민주노총에서 그런 것을 논의할 시기가 아난 것 같습니다. 후보를 내세운다 해서 될 것도 아니고, 이 국면을 투쟁으로 돌파해서 그동안 탄압받아 왔던 공무원노조, 전교조가 노동3권을 온전히 쟁취할 수 있는 그런 투쟁들을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래저래 아쉬운 생각만 듭니다.

 

이미진 : 그렇게 되다보면 가장 고통 받는 것은 노동자계급 본인들입니다.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문제도,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에 있는 사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인근 :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당사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현대․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이 갑을오토텍 같은 경우를 겪었다면 총연맹이나 금속노조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겠죠. 현대․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이 동조파업을 해준다면 지금까지 끌고 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노동자투쟁은 자본한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은 지들끼리 뭉쳐서 싸우는데 우리는 각개전투하고 있습니다.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고충을 이해를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는 힘들어서 어떻게 해? 라고 하지만 뒤를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방치 할 순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백날 비정규직철폐 외치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차지부에서 부딪혀주면 비정규직지회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나의 이권문제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고, 그런 문제가 내부에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지도부에서 교육을 하고 단호한 결단으로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하는데 안 하게 되죠. 결국 조합원 핑계대면서 말이죠.

 

이미진 : 관료화가 된 것 같습니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쳤으나 공허한 메아리 같은 것이 아닌 것이 아닌가요?

 

이인근 : 자기네들이야 월급 나오는데 힘들게 조직하고 경찰서 불려나가는 그러한 일들이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관료화, 관성화가 되어버렸습니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쳤으나 공허한 메아리 같은 것이 아닐까요?

박근혜가 당선이 되고 노동계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쳐왔지만 주기적으로 민주노총에서 전국의 상근자들을 주1회 정도 서울 집회 박아놨어도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총파업 한번 하려면 교육해야 한다며 시간 다 보내고 실제로 뻥파업만 난무합니다.

계급으로서 노동자가 아닌 자본주의적 노동자가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혹은 자본주의에 포섭된 노동자라고 해야 할까요? 내 싸움이 아니면 손해를 안 보려 하고, 관심도 없다보니 노동운동에 발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발전이 없으니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없고, 자본가들은 노동자 탄압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것을 고안해 놓는데 노동자들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미진 : 노동운동이 정체가 되어버린 상황이고 타개할 국면도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하고 계신 이유가 뭘까요?

 

이인근 : 싸워야 하니까요. 만약에 여기서 그만두고 다른 생업을 찾아갈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이런 나쁜 짓을 저지른 자본가는 옳은 놈이 되어버리고 우리는 패배자가 되어버리는 게 싫습니다. 역사는 승자가 쓴다고 하죠. 언론을 통해 자신이 옳았다고 선전할 것이고 부당함에 맞서 싸운 노동자들은 잘 되고 있는 공장을 말아먹은 파렴치한이 되어버리죠. 그게 싫습니다. 노동자계급성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물러나기가 싫습니다. 용서하기가 싫습니다. 자본가한테 면죄부를 주고 싶지가 않습니다. 어쨌든 자본가들이 저지른 못된 짓거리들 이런 것들을 자기 스스로 느끼게 하고 싶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제 와서 돈 더 받으면 뭐합니까. 단지 자신이 행한 짓거리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자기 자식들도 이런 짓을 하지 않고 노동자가 경영자의 파트너라는 인식까지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자기들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만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투쟁하는 사람들 보면 삶, 생계를 위해서 투쟁을 어쩔 수 없이 접는 경우가 많지요. 그 것을 뛰어넘는 투쟁하는 사람들의 개인의 대단한 결의가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노동자들이 많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생계문제로 중간에 포기해버리고 그렇게 하다 보니 자본가들은 가만히 있으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가들은 손해 볼 것이 없지요. 사실 노조, 상급단체에서 일정부분 보완을 해줘야 하는데 민주노총이나 타 연맹이 그러한 부분을 못해주고 있습니다.

 

이미진 : 어떨 때는 일상적인 삶을 누리면서 살고 싶을 텐데. 자본이 그렇게 살지 못하게 내버려두질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웃음을 보려면 더 열심히 싸우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인근 : 이것 하나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을 하다가 너무 힘들고 부당해서 노조를 만들고 이 싸움의 정당함을 외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많은 사업장내에서 가정과 운동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지요. 투쟁을 접고 가정을 지킨다고 가서 다른 곳으로 취직했을 때 그곳에서 발생되는 부당함을 감내할 수 있을까요. 또다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언제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 수 있겠습니까.
사실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못했을까요? 가입을 하면 노조에서 알아서 해주겠지, 사측과 노조와 협조를 해서 조금 더 낳은 월급과 노동환경을 만들어 주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노조에 가입했을까요? 너무 힘들고 부당해서 노조를 만들었고, 노조는 저임금과 부당함을 조금 완화시켜줄 것이라 기대를 하고 활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걸 하기 위해선 어떠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미진 : 이미 노조는 관성화가 되어있고 싸움을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을 왜 해야 할까요? 그리고 민주노조 사수란 것이 필요할까요?

 

이인근 : 별다른 대안이 없으니까!(일동 웃음) 이율배반적인 이야기일순 있겠지만 ‘노동자는 하나’라는 이야기 속에 ‘노동자는 다수다’라는 뜻이 있기도 합니다. 또다시 노동자는 하나로 만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진 : 신생 노조를 만들고 있거나 노조 안에서 끊임없이 탄압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인근 : 결국 원론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노동자로서 권리와 노동자로서 가져야할 당당함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자본들의 입맛에 맞는 로봇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그런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음 좋겠습니다. 그리고 불평등한 분배의 고리를 끊자! 그것이 나를 위해서 내 자식을 위해서도 옳은 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가장 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불평하지 말고 행동해라!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에서는 후원계좌를 열어두고 있다. CMS를 통해 신청하는 것이 좋으나 여기서는 직접 후원을 할 수 있는 계좌번호를 안내한다. 현재 10개의 사업장 중 후원계좌를 갖고 있는 곳이 네 곳밖에 되지 않는다. 한 곳만 선택하기 어렵다면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계좌로 후원하면 된다. 이들이 차디찬 땅바닥이 아닌 따스한 집에서 일상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그리고 노동자가 있어야 할 곳인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후원을 요청한다. 올해는 원직복직과 비정규직철폐가 한걸음씩 이뤄지길 바란다.

투쟁사업장 공동투쟁 후원계좌 : SC 제일은행(정주현) 363-20-087056
동양시멘트지부 후원계좌 : 농협(강선이) 351-0821-4078-13
콜트콜텍 후원계좌 : 외환은행(이은성) 620-216112-480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후원계좌 : 농협(권택숙) 301-0056-6137-11
하이디스지회 후원계좌 : 농협(민주노총 이천여주양평지부) 301-0183-658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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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3 13:20 2017/04/0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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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6/10/04 12:00

브렉시트와 유럽 계급투쟁

홍수천



* 지난 9월 8일 발행된 <붉은글씨> 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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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즉 영국의 유럽연합 EU 탈퇴는 노동자계급과 계급투쟁에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이로운가 해로운가?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계급투쟁과는 상관없는 일, 노동자계급의 쟁점이 아닌 일인가? 이것은 아주 원초적이고 단순한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회피하는 그 어떤 브렉시트 논평이나 해설, 평가도 무가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 전제이다.


따라서 그 질문에 답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한 마디로 브렉시트는 노동자계급과 계급투쟁에 해악이다. 브렉시트의 승리로, 즉 국민투표가 ‘탈퇴’로 결정 나면서 영국의, 나아가 전체 유럽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 그리고 진보적 운동 전반에 난관이 조성되었다. 브렉시트 승리로 가장 패배를 입은 것은 “잔류” 지지를 호소했던 ‘기성정치권’(보수당과 노동당 양대 정당 중심의 제도정치권)이 아니라 사실상 노동자계급이다. 개별적으로 잔류를 지지했느냐 탈퇴를 지지했느냐와 상관없이 계급으로서 말이다. 생존권과 사회적 권리의 후퇴 등 당면 수준에서도 손실이고 중장기적인 계급투쟁 진로에서도 퇴행적인 길이, 덫과 함정으로 빠지는 길이 닦여졌다.  

 

1. 브렉시트와 노동자계급


우선, 영국의 수백만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과 계급의식에 타격이 되고 있다. 마가릿 대처 총리 이래 계속되어 온 영국 지배계급의 신자유주의 공격으로 황폐화된 구 공업 지역의 노동자들이 특히 이 타격의 제물이 되고 있다. 이 지역의 브렉시트 찬성파 상당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허구적 편견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원주민’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저임금, 복지 축소를 가져온 주범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이민자들의 영국 유입을 막을 수 있도록 유럽연합을 탈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은 영국판 조중동 찌라시라고 할 수 있는 데일리메일, 더선, 데일리익스프레스 같은 억만장자 소유 일간지들이 수 십 년 동안 줄기차게 퍼트려 온 악선동인데, 이번에 국민투표를 통해 이 거짓이 ‘근거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미 국민투표 이후 반이민 인종주의적 증오범죄가 거리와 노동현장에서 속출하고 있다. 브렉시트 승리로 극우 영국독립당(UKIP)이 득세하면서 인종주의적 포퓰리즘이 창궐할 기세를 보이고 있고, 이제 고립을 끝낸 소규모 파시스트 그룹들에 의한 폭력도 다시 부활할 조짐이다.


이주 노동,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장기적으로 국제적 공감과 연대를 촉진하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인데 이제 브렉시트의 승리로 유럽 대륙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영국에 오는 것이나 반대로 영국의 노동자가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 일하는 것이나 모두 결정적으로 가로막힐 상황이다.


국민투표 후 보수당 캐머런 총리가 사임했지만, EU 탈퇴 과정은 철저히 보수당 정부의 수중에서 진행될 것인데, 저들은 브렉시트 이행 과정에서 이민을 제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남유럽이나 동유럽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피해 온 난민들에 대해서도 공격이 집중될 것이다.


캐머런을 계승해서 테레사 메이나 보리스 존슨이나 누가 총리가 되든 보수당 정부는 ‘기성정치권’에 대한 민중들의 치솟는 반감을 달래기 위해 당장은 발톱을 감추겠지만, 곧 그 동안 영국과 EU의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하여 EU 법률과 조례로 명문화시켜 놓은 권리들(노동시간 단축, 야간노동 제한, 임신 출산 유급휴가, 비정규직 고용의제 등)을 폐기시키기 위한 공세에 착수할 것이다. 동시에 교육 및 의료 서비스의 민영화도 박차를 가할 것이다.


적어도 2년은 걸릴 EU 집행위와의 브렉시트 협상 과정이 영국과 EU 양측 간에 적대적인 난타전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데 이 과정에서 영국과 EU 전체의 경제위기 또한 가중될 것이다. 2008년 이래의 공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빈민들에게 또 다시 타격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의 EU에 이르기까지 40여년에 걸쳐 구축된 생산·교환의 국제 연결망이 국경 통제 및 관세 부과가 재개됨으로 인해 뒤흔들리면서 EU가 서로 경쟁하는 정치·경제 단위들로 파편화되고 와해되는 위험성도 대두되고 있다.   


한편, 브렉시트는 유럽의 노동운동을 단일한 공동행동의 틀로 통합하기 위한 기간의 노력들을 분산, 해체시키는 또 하나의 중대한 요인이다. 와해의 위기에 직면한 것은 단지 유럽만이 아니다. 영국(UK, United Kingdom) 자신도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분리독립 국민투표 가능성이 다시 제기되고 있고, 이것은 영국 노동계급운동을 파편화 시킬 가능성이 크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사이의 국경 통제가 재개될 조짐이 일고 있고, 이렇게 되면 영국에 절대로 포함되어 있길 원치 않는 북아일랜드의 피억압 민족주의 소수파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영국의 청년층 또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안 그래도 임시직 저임금 일자리에 비싼 등록금과 주거비로 인한 평생 채무노예로 굴러 떨어질 위기에 있는 청년들에게 그 동안 유럽으로 자유롭게 이동해서 일할 수 있던 권리마저 위협함으로써 그 나마 남아 있던 처지 개선의 여지도 봉쇄해 버린 것이다.


국민투표 결과가 가져온 당장의 악영향만으로도 ‘탈퇴운동’(Vote Leave) 진영의 핵심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참주선동적인지가 폭로되었다. 탈퇴운동 진영의 장밋빛 선동과는 달리,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전 세계에 걸쳐 수조 달러에 달하는 주식 가치 증발과 파운드화 급락, ‘네거티브’로 강등된 영국의 신용등급 전망 등은 브렉시트가 가져올 경제적 악영향에 대한 경고가 한낱 유언비어가 아니었음을 가리킨다. 이 상황은 정부 재정에 강력한 부정적 효과를 미칠 것이고, 보수당 정부는 이를 빌미로 올해 말쯤에는 훨씬 더 혹독한 긴축 및 공공서비스 감축 공세에 나설 것이다.


또한 탈퇴운동 진영은 광신적으로 ‘영국 주권 회수’ 캠페인을 펼쳤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의 최근 단계에 와서는 어떤 민족국가도 경제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으며 경제 ‘주권’을 사실상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객관적 현실이다. 모든 국가가 상호의존적이고 경제적으로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에 뒤이어 나타난 경제적 대혼란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계경제야말로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글로벌 실체로서 민족국가에 우선하며 민족국가 위에 군림하고 있다. 금융 시장, 증권 채권 시장은 그 어떤 주권국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사실은 탈퇴운동의 지도적 이데올로그들 스스로도 과거에 거듭 주장해 온 바이다. 

 

이들 탈퇴운동 진영과는 다른 각도에서지만, ‘좌파적 탈퇴’(Left Exit ; Lexit)를 주장한 일부 반자본주의 좌파들의 경우 영국의 탈퇴와 EU의 해체는 기업주들과 금융자본가들이 강력히 반대하는 걸로 봐서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대기업을 해체해서 소기업들로 쪼개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뒷걸음질 치는 것으로, 당장의 득실에서 보더라도 일자리를 잃게 하고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축소시키며 물가 상승을 가져오는 등 당면 수준에서도 노동자 민중들에게 생존권적 손실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주의자와 노동자계급은 거대기업들의 사회화를 요구한다. 이들 모두를 단일한 단위로 통합시켜 이윤이 아닌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민주적 계획이 가능하도록 대기업의 몰수 국유화를 위해 투쟁한다.


EU가 고립된 자본주의 민족국가들로 해체 또는 와해되는 것은 국제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전진이 아니라 후퇴일 수밖에 없으며 결코 ‘좋은 일’일 수가 없다. 토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제통합 과정은 전진적인 추동력이다. 비민주적인 EU 정치기구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과 통합된 초민족적 경제단위의 해체를 환영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의 기치 아래 정치 · 경제적 통합 과정의 선두에 서서 싸워야 하는 입장이다.


대자본은 세계화를 선호하지만 결코 민족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때문에 탈퇴운동 진영의 정치인 보리스 존슨이나 미국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 같은,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노리고 민족주의와 배외주의에 호소하는 극우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게도 줄을 댄다. 오늘 전 세계적으로 반동적 참주선동가들이 대중의 불신과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성정치권 엘리트들을 두들기면서 기세를 올리고 있다. 내수 지향 중소 사업주들 및 하층 중간계급 대중이 국제경제의 발전과 반대로 가고 있는 원초적 민족주의나 외국인 혐오 사상들이 널리 전파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EU 탈퇴 캠페인을 주도해 온 영국독립당 같은 극우 세력의 경우도 바로 이 같은 사상에 체계적으로 호소하여 노동당의 주요 근거지인 북부 공업지역에 파고 들어가 이 당의 노동계급 기반을 공략한 사례이다.

 

2.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 : ‘탈퇴’ 승리의 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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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브렉시트가 노동자계급에 ‘좋은 일’일 수가 없고 계급투쟁에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 오는 반동적인 해악이라면 어째서 상당수 노동자들이 ‘탈퇴’에 찬성한 것인가? 습관적으로 보수당에 표를 찍고 노조에도 가입하지 않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노동당에 표를 찍는 노동자들 중에서도 브렉시트에 찬성한 비율이 작지 않다. 이를 근거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대도시의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주의) 엘리트에 대한 노동자 서민들의 반란으로 묘사하는 논평들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노동당의 핵심 기반인 잉글랜드 내륙 구 공업지대의 노동자들과 영세 소도시 서민들이 그 동안 런던 등 대도시의 세계화 지향 엘리트에 대해 품고 있던 반감과 분노가 이번에 ‘반란’으로 표출되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이것은 탈퇴파 진영의 선봉대를 이루었던 극우 영국독립당과 반이민·반난민 인종주의적 증오를 부채질하는 데 앞장 선 억만장자 소유 일간지들의 데마고그에 놀아나는 평가이다. 실제 투표 구성을 보더라도 이러한 평가는 현실에 대한 총체적 왜곡이다. 양대 정당인 노동당과 보수당 모두 EU 잔류가 공식 입장인데, 노동당 투표자들은 약 65%가,  보수당 투표자들은 40%가 당의 공식 입장을 지지했다. 잔류 찬성 비율이 보수당 지지자들 보다 노동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 투표자들의 유의미한 수가 이 반동적인 브렉시트 정책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여기에는 영국공산당(CPB)과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사회주의당(SP) 등이 렉시트 캠페인을 통해 브렉시트에 ‘좌파적’ 포장을 입혀준 것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CPB와 SP는 심지어 이민이 정말로 문제이고 폴란드 노동자들과의 경쟁이 실제로 임금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하는 위험한 불장난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CPB는 모종의 이민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SP의 국제 조직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위원회’ CWI 는 국민투표 결과를 놓고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면서, 이 승리가 제레미 코빈의 총선 승리로 이어질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SWP는 올바르게 ‘국경 개방’(Open Border) 요구를 내걸고 있었지만, 이제 열려 있던 국경을 폐쇄하는 브렉시트에 찬성하라고 노동자들에게 촉구했다! 국민투표 결과가 가져온 파장 속에서 SWP는 그들 “승리”의 자명한 결과(?) 때문에 반인종주의 캠페인을 새롭게 갱신해서 해야 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탈퇴’에 투표한 것은 EU에 남아 있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이익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나? 아니다. 또는 이민에 대한 그들의 공포가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탈퇴에 투표한 것인가? 아니다. 공포는 현실인 것이 맞지만, 그 공포의 원인은 전적으로 상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에서 유행했던 “우리 조국의 자주성 되찾기”, “주권”, “독립” 같은 담론들에 설득력을 부여했는가? 한 마디로 주체적 힘의 상실, 즉 내 주변의 세상을 내가 만들어 가는 권능을 잃어버린 상황이 그러한 담론들에 중독성을 부여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한 때 가졌던 힘,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해 준 그 힘은 살아갈 만한 월급의 안정된 일자리, 주거에 대한 사회적 보장, 확대되는 공공서비스 같은 것으로부터 나왔다. 이 모든 것을 파괴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영국 자본가계급이다. 민영화, 외주화, 구조조정, 신자유주의 등 그 모든 것의 선두에 서서 자본의 위기 전가를 위한 ‘노동자 죽이기’의 최첨단 기법을 개척한 영국 지배계급 말이다.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지키기 위한 제대로 된 투쟁이 부재한 상황, 노동조합과 노동당이 이러한 투쟁을 만들 의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없다는 것이 확인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실업자와 노년층 그리고 쇠락한 옛 공업도시의 노동자들, 주민들이 자신들의 황폐화된 공동체를 가져온 주범으로 지목한 “기성정치권(Establishment)", 즉 중앙 정치인들과 ‘전문가들’과 관료들에게 분개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노동조합의 쇠락도 관련된 주요 요인이다. 현재 조합원 수는 1980년대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노동조합의 전투성 상실과 함께 이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일자리 축소, 노동조건 저하, 복지 감축에 맞선 효과적인 단체행동의 경험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영국 독립당의 극우 포퓰리즘 선동이 사람들에게 먹혀든 것도 이런 상황에서였다.


존슨 같은 엘리트 보수당 정치인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이들 패라지 같은 데마고그들은 할 수 있었다. 국민건강보험 기금의 고갈 위기, 아무리 기다려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공공주택 배정, 문 닫는 학교들, 저임금의 만연 등의 사회적 고통에 대해 이들이 좌파적으로 들리는 참주선동을 사용하여 이 모든 책임을 이주노동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확인된 셈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EU에서 잇달아 터져 나온 위기들이다. 먼저 금융위기, 이어서 회원국들의 재정위기, 부채위기, 유로존의 약소 회원국들한테 강요된 긴축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해의 ‘난민위기’ 등, 이러한 EU의 위기들이 “유럽”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의혹을 가중시키는 데 기여했다. 유럽에 대해 스트레스를 느끼고 유럽을 멀리하고 싶은 이 같은 충동에 인종주의, 배외주의의 기름을 퍼붓고 불을 지른 것이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에서 극우 포퓰리스트 참주선동이 한 일이다. 물론, 브렉시트 찬반 양 진영의 정치인들도 영국 자본주의가 2008년의 그 혹독한 위기를 발생시킨 주범이라는 사실을 투표자 대중들이 잊게 하는 데 일조했다. 위기 와중에서 임금과 복지를 대폭 삭감하고 긴축을 강요, 실시한 것은 EU가 아니라 영국 사장들이고 영국 정부들(보수당 정부와 노동당 정부 모두)이었다. 브뤼셀로부터의 어떠한 압력에도 완전히 자유로웠던 영국의 자본가계급, 영국의 자본가 국가가 바로 자본의 위기 전가를 위한 노동자 민중 죽이기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망각되고 있는 것이다.

 

3. 유럽에서 일국적 운동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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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독립당 당수 나이젤 패라지


브렉시트가 이제 현실화 되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은 어떠한 대안을 가지고 싸울 것인가? 2007-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뒤이은 장기 불황 속에서 유럽 각국의 지배계급은 ‘긴축’을 내걸고 과거 노동자들이 쟁취한 성과물들을 되빼앗기 위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이 공격에 그냥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에서 강력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고, 그리스에서 이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유럽연합은 자본의 유럽이자 주요 제국주의 블록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운동이 존재하는 계급투쟁 무대이기도 했다. 이 계급투쟁 무대는 고립된 영국에서와 비할 때 역관계가 확실히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한 무대이다.


영국을 비롯하여 전체 유럽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했다. 그러나 ‘혁명적 좌파’를 자처했던 세력들, ‘반자본주의 좌파’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개량주의자들이 지배계급 분파들의 꽁무니를 좇고 그들의 정책을 추수하는 것처럼 ‘반자본주의 좌파’는 개량주의자들의 꽁무니를 좇고 있다. 누구의 꽁무니를, 어느 경향의 개량주의 꽁무니를 좇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데서만 다를 뿐이다. ‘사회적 유럽’을 주창하는 개량주의자들을 추수하는 좌파들은 개량주의 프로그램에 기초하여 평화공존 상태로 모든 조류들을 포함하는 ‘범좌파 정당’ 건설을 지지했다.


유럽 좌파당들과 민중주의 세력들이 이러한 범좌파 정당 건설을 포기하자 다수의 ‘반자본주의 좌파’ 그룹들은 EU 탈퇴 쪽으로 이동했다. 개량주의자들이 EU 탈퇴가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을 통한 개량주의 프로그램의 실현을 용이하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하자 ‘반자본주의 좌파들’은 EU 탈퇴가 “사회주의로 가는 보다 용이한 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국제적 시스템이 아니라 민족국가들의 집합이며, 따라서 국제주의는 결국 일국 계급투쟁들의 집합일 뿐이다.


‘사회적 유럽’ 주창자들과 EU 탈퇴 주창자들은 두 가지 핵심 문제에서 많은 부분 일치를 보이고 있다. 양측 다 현실에서 개량주의 프로그램을 추수하고 있다. 또한 혁명적 권력 장악 프로그램을 위한 투쟁, 사회주의 유럽합중국 수립을 위한 투쟁은 현재로선 아직 일정에 오르지 않았다고 양측 다 똑같이 주장한다. 그들이 그러한 투쟁을 노골적으로 거부하지 않을 경우에조차도 사회주의 유럽을 위한 투쟁은 다소간에 먼 미래의 과제로 바라본다. 오직 EU를 개혁하는 프로그램만이, 또는 일국적 지형 위에서 더 나은 조건으로 투쟁하는 것만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영국에서처럼 유럽 전체에서 반동적 민족주의의 성장을 허용하고 있는 최대의 요인은, 긴축을 끝장내고 반이민·반난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일국 단위 노동자운동들이 보여 온 취약함과 무기력함이다. 자본주의가 2차 대전 이래 그 가장 심각한 공황과 침체의 시기로 들어간 상황에서 유럽의 노동자운동·좌파운동이 오히려 각국의 국경 내 일국적 운동으로 후퇴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이러한 약점에 대한 예외가, 특히 그리스,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 중요하게 있었지만, 여기서들조차 일국적 한계로 인해 투쟁이 손상 받고, 전진하고 못하고 주저앉곤 했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연대의 표시가 아니라, 각국 정부들이 강요하고 있는 긴축과 노동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한 전 유럽 노동자들의 통일된 공동투쟁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EU 당국, 즉 EU 집행위원회, 중앙은행 등이 타격 받을 수 있지, 민족별 분할을 조장하는 것은 이것들과 투쟁하는 데서 절대적으로 틀린 방식이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끝으로 독일 정부들이 강행하고 있는 사회복지 삭감, 임금 감축, 의료·안전·노동시간에 대한 규제 ‘개혁’, 교육 및 의료 공공서비스 민영화 등을 중단시킬 수 있다면, 단지 ‘사회적’ 유럽이 아니라 사회주의 유럽을 위한 전체 대륙 규모 투쟁이 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 긴축과 반이민·반난민 공격, 그리고 브렉시트 이행 과정에서 노동권을 비롯한 사회적 권리들에 대한 공격 등에 맞선 반격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친 노동자 공동행동이 필요하다.


이 통일적인 공동행동은 단일한 ‘노동자 유럽’의 깃발을, 즉 난민들을 비롯하여 거기서 일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국경이 활짝 열려 있는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의 깃발을 들어 올려야 한다. 그러한 유럽은 일자리와 학교와 병원의 부족으로 청년들이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해야 했던 나라들과 지역들에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서로 만나서 돕고 싶은 진정으로 자발적인 소망이 될 것이다. 


모든 유럽 국가의 노동자들 간에 능동적인 연대는 긴축과 인종주의, 착취와 전쟁 없는 대륙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프랑스, 그리스에서와 같은 투쟁을 일국 단위의 국경을 넘어 전 유럽 혁명으로 확산시킴으로써 그러한 목표를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영국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이 브렉시트에 반대해야 하는 근본 이유이다.

 

 4. 브렉시트와 노동당 · 노동운동


이러한 대안적인 투쟁 목표와 과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그 전에 먼저 브렉시트를 둘러싼 논쟁에서 노동운동 및 좌파 제 세력이 취한 입장과 논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41년 전에도 영국에서는 이번과 같은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있었다. 1975년 당시에 보수당은 압도적으로 유럽 잔류에 찬성하는 ‘유럽’ 당이었고, 노동당은 그 평당원들 대다수가 ‘유럽’에 적대적이었다. 당시 영국의 강력한 전투적 노조운동은 ‘유럽공동시장’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했다. 영국공산당(CPGB)과 노동당 트리뷴그룹 같은 사회주의적 좌파들과 노동조합 좌파 지도부들 모두가 이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 1200만 조합원과 전국적 규모의 전투적 현장위원회 운동이 있는 영국이, 더욱이 막 보수당 정부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참인데 그런 영국이 무슨 유럽으로부터의 교훈 같은 게 필요하겠냐는 대단한 확신이 노동운동과 좌파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반유럽주의는 이러한 확신의 일부였다. 게다가 당시 영국의 ‘1등 독식(First Past the Post)’ 선거제도로 인해 의회 다수파로서 노동당 정부가 (당시 대륙의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통례였던) 연립정부 구성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단독으로 계속 연임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대세처럼 보였던 상황도 그러한 확신에 한몫 했다. 이러한 전망과 확신은 노동당을 비롯한 영국 노동운동 ‘주류’의 개량주의 전략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근거로 동원되곤 했다.


오늘,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노동당과 모든 주요 노동조합들은 확고히 EU 잔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제 세가 극히 쪼그라든 공산당과 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당, 그리고 철도해상운송노조 RMT 만이 과거 1975년 입장을 고수하여 ‘좌파적 탈퇴’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1975년 이래 영국은 (그 빅브라더 미국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본산이었다. 영국 지배계급은 민영화와 긴축정책의 개척자이자 선도적 실행자였다. 1975년에는 잔류든 탈퇴든 어느 쪽이 계급투쟁에 유리한 무대일 것이냐는 관점에서 볼 때 둘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는 동일한 조건이었다. 오늘 그 무대는 훨씬 넓고, 보다 강력한 동맹군들이 존재한다. 프랑스의 2016년 운동, 즉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노동 ‘개혁’ 시도에 맞선 대대적인 노동자 민중의 저항운동이 오늘의 조건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노동법 개악안은 설사 그것이 수정 완화 없이 통으로 통과된다 하더라도 영국의 현행 노동법과 비교한다면 그것의 가장 온건한 버전을 넘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에 영국 노동운동이 겪은 전략적 패배 이후로 프랑스의 2016년 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정치파업 운동은 영국 노조 지도부들한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있다.


노동당을 비롯한 영국 노동운동 ‘주류’가 친(親) EU 입장으로 바뀐 것은 1980년대 초중반의 노동자 투쟁들(자동차 노동자들, 철강 노동자들, 탄광 노동자들, 인쇄 노동자들, 항만 부두 노동자들의 투쟁들)이 패배하고서였다. 이때부터 그들에게 EU는 달리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전에 ‘사회주의’를 향한 영국 노동운동의 전진을 막아설 ‘사장들의 클럽’처럼 보이던 것이 이제는 대처의 신자유주의 공격 이전의 노동조건이 거기서는 아직 펄펄 살아 있는 곳으로, 나아가 그러한 대처리즘 이전 상태로 영국을 되돌려 줄 수도 있을 근거지 같은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총리가 되면서 보수당의 18년 집권을 끝내고 정권 교체를 이뤘지만, ‘제3의 길, 뉴 레이버(New Labour)’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대처리즘을 계승, 지속했다. 토니 블레어와 그 후임 뉴 레이버 총리들 하에서 노동당의 친 EU 입장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어 왔지만, 더 이상 EU는 대처리즘 이전의 노동조건을 복구시키기 위한 거점으로서가 아니라 자본 세계화의 무대로서 의미가 부여되었다. 따라서 EU의 노동권 관련 일부 진보적 법조항들을 영국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노동당 정부도 대처 이래의 보수당 정부가 하던 대로 영국 기업주들의 편에 서서 강경한 반대 입장을 취함으로써 영국은 계속 이 노동권 조항이 ‘면제’ 되는 국가로 남아 있었다.


수 만 명의 평당원과 지지자들의 열정적인 선거운동에 힘입어 예상을 깨고 노동당 대표로 지난해 선출된 노동당 좌파 제레미 코빈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EU 탈퇴 노선을 고수했는데 이제 ‘잔류’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노동당의 ‘유럽 안의 영국’ 캠페인(잔류 캠페인)을 지지하게 되어서 “자랑스럽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비판적 입장을 밝히는 것 또한 빼놓지 않았다.


“우리는 EU가 노동인민을 위해 작동할 수 있도록 진보적 개혁을 위한 전 유럽에 걸친 연대 연합 건설에 나설 결의가 되어 있다. 노동당은 EU가 21세기 유럽에서 무역과 협력을 위한 최상의 틀이라고 보고, 영국이 EU 회원국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을 지지한다. 또한 유럽의회의 일관된 인권 옹호 입장에 대해서도 물론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EU의 의사결정 체계가 EU 인민들에게 보다 더 책임지는 체계로 되도록 만들고, 일자리와 성장을 EU 정책의 핵심 의제로 올려놓음으로써 진정한 사회적 유럽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민영화 압력을 끝장내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


코빈이 노동당 다수 우파의 친 EU 입장으로 빠져버리지 않으면서 기존 노동당 좌파의 브렉시트 노선을 폐기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EU 탈퇴가 영국에서나 여타 유럽 나라들에서나 노동자들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본 것도 옳다. 또한 그가 EU에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도 옳다. 그러나 EU의 정치 기구가 개혁될 수 있다고 믿는 것,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유럽 경제의 올바른 발전을 계획할 수 있는 기구로, 노동자의 권리 보장과 환경 보호를 위한 기구로, 노동자계급이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구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일국 개량주의 프로그램 못지않게 공상적이다.


이 과제들을 위해서는 혁명적 변화가 요구된다. 목표와 수단 모두에서 혁명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냥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이 아니라 사회주의 유럽이라는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이 목표를 이룰 수단, 즉 전 유럽의 노동자들이 금융자본가들과 기업주들의 정치권력을 분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수단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해야 한다.

 

5. 브렉시트와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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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혁명적 좌파를 자임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과제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좌파의 양대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사회주의당(SP)은 40여 년 전에 채택한 입장을 지금까지도 철석 같이 고수하고 있다. 두 조직의 탈퇴 입장은 그 내용에서 큰 차이가 없으므로 대표적으로 SWP의 탈퇴 입장을 검토해보자.


SWP는 조직의 리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긴 논설로 브렉시트 찬성 캠페인에 착수했다. 그 글로 표현된 SWP 입장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영국 지배계급의 문제가 모두 EU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는 점이다. EU의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 특징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내용은 다 정확하며 틀린 지점 하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제시된 특징들 모두가 다름 아닌 영국에도 그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절 무시하고 있다. 정말이지, 공공서비스 민영화와 사회복지 감축 같은 정책을 EU가 채택하기 훨씬 전에 이미 선도적으로 실시한 것이 바로 마가릿 대처의 영국 아닌가. 대처 당시만 해도 아직 EU 기구들은 사회헌장(Social Charter) 통과에 애쓰던 중이었다. 대처 총리 하에서 영국은 그 헌장의 사회적 권리 조항들을 대부분 빼고 최소화시키기 위해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하다가 나중에는 사회헌장 조인에서 빠져버렸다.


물론 EU도 자신의 사회적 ‘약속’을 2008년 대불황 이후 단계적으로 감축시켰다. 그럼에도 영국에 비해 유럽 대륙의 노동운동이 가진 더 큰 조직력과 투쟁력, 더 확대된 노동조합 권리들과 더 높은 전투성 때문에 아직은 EU 어느 나라에서도 영국에서처럼 사회적 권리들이 철저히 잠식당하지는 않았다. 영국의 자본가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유럽의 사회적 권리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나, 탈퇴운동(Vote Leave) 진영이 이 사회적 권리들의 폐지를 자신의 요구조항 일순위에 올려놓은 것이나 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더욱이 EU와 그 기구들은 국제 자본의 유일 집행기관이 아니다. 세계은행(World Bank)과 IMF, WTO 등은 모두 국제 자본의 집행기관으로서 동일한 목적을 위해 복무하며, 영국이 EU에 남아 있든 떠나든 자본의 경호실장으로서 제 역할들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할 것이다. 그렇다면 브렉시트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노동자계급을 위해 투쟁 조건을 더 낫게 해 줄 것인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잔류냐 탈퇴냐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SWP는 브렉시트 캠페인이 이민자들을 겨냥한 인종주의와 배외주의를 확산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결국 대책 없이 이 위험을 부채질하고 있다. EU를 “그 출발부터 자본주의적인 프로젝트로서 미국 제국주의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고, 문제 많은 그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 버전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로부터 명백한 결론은 EU를 거부하는 것이다. 잔류 지지자들은 이러한 분석을 논박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입장을 폐기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그런데 이 얘기는 EU 이전에 영국 얘기 아닌가. 정확히 같은 내용이 다름 아닌 영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마 가장 빠른 논박이리라! 영국은 그 출발부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자본가들의 프로젝트였고, 미국의 후원 덕에 세계 강대국으로 살아남았으며, 미국 지배계급과 더불어 신자유주의를 고안해낸 원조이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영국을 ‘거부’한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EU든 영국이든 자본가 국가를 ‘수락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가 아니다. 지금 쟁점은 EU 잔류냐 탈퇴냐 중에 어느 쪽이 국내외의 계급투쟁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할 것이냐 이다.


SWP는 영국이 EU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 논리 근거를 전 유럽에 걸쳐 계급투쟁이 불균등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에서 찾는다.


“전략적으로 볼 때 문제는 1980년대 이래, 특히 유로존 위기의 결과로 전 유럽 차원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건설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분쇄하는 것은 일국적 수준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전체 EU 수준에서 통합 조정된 운동에 의존하여 성공적인 저항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이 저항을 무한정 지연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불균등·결합 발전 과정을 놓고 볼 때 투쟁은 일국적 수준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고, 그러고 나서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변증법적으로 볼 때 국제주의가 전진하기 위해서는 일국적 수준에서 돌파가 먼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변증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체 EU 수준에서 통합 조정된 운동에 의존하여 성공적인 저항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전략이 선도적 일국 투쟁을 배제하는 전 유럽 동시다발 투쟁을 상정하는 전략인가? SWP는 마치 그 전략이 어느 일국에서 무언가가 성취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먼저 전 유럽 수준의 운동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자생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구도를 그리는 전략인 것처럼 몰아간다. 반면에 일국 수준에서의 성공은 “일반화 될 수 있다”고 쉽게 단언한다.


물론, 예컨대 긴축에 맞선 투쟁이 다른 나라들에 앞서 한 나라에서 먼저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한 나라 내에서도 그러한 투쟁이 다른 지역에 앞서 어느 한 지역에서 먼저 시작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지금 걸려 있는 문제는, 그러한 투쟁이 다른 나라들로 보다 쉽게 확산되고 일반화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나라들이 모두 같은 경제적·법제도적 틀 안에 있는 것이 더 유리한지, 아니면 각 나라들이 투표를 해서 그러한 틀에서 분리해 나오는 것이 더 유리한지의 문제이다. 


SWP는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일국에서의’ 계급투쟁을 위한 전략적 처방을 내놓는다. 영국 노동자들은 EU에서보다 “독립적인” 영국에서 더 잘 그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최근 역사는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지난 세기에 계급투쟁의 고조기들(1917~21년, 1930년대 중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은 거의 한 결 같이 투쟁의 이념과 방법들이 국제적으로 교차하면서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일어났다. 한편, 영국의 거대한 계급투쟁들(1926년, 1984~85년)은 대륙과 별개로 떨어져서 일어났다. 이것은 맞다. 그러나 그 투쟁들은 또한 거대한 패배를 가져왔다.


SWP는 2012~15년에 그리스가 EU 트로이카에 반기를 들고 대항한 사례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EU 탈퇴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고의적인 혼동이다. 시리자(급진좌파연합) 정부가 좌파 반긴축 정부로서 국가부채 지불 중단, 복지 삭감 중단을 밀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절박한 필요를 마치 브렉시트처럼 ‘자발적으로’ 스스로 원해서 하는, 협상을 통한 탈퇴의 과정인 양 멋대로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시리자 정부는 트로이카에 반항했어야 하지만, 그러나 이 반항은 EU로부터 그리스를 축출하려는 기도에 대한 능동적인 반대 투쟁과 병행하는 것이었어야 했다. 그리스의 축출은 사실상 그리스를 경제봉쇄 하에 몰아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반대로 그리스가 ‘그렉시트’를 단행했다면, 이 경제봉쇄의 정치적 책임을 EU 지배자들한테가 아닌 다른 애먼 데로 돌려놓는, 그리스가 스스로 책임을 옴팡 뒤집어쓰는 꼴이 될 것이었다.


단지 그리스에서만이 아니라 EU 전역에서 긴축을 종식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 전 유럽 노동자들로부터의 연대를 호소하는 투쟁으로 나아갔어야 했고, 이것은 그리스 노동운동을 전 대륙 규모 저항운동의 선봉에 가져다 놓았을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연대를 위한 슬로건에는 자본가들이 이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요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국제적으로 통합 조정되고 상호 상승하는 노동자 행동에 의해 이 요구가 실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국제적 노동자 공동행동 속에서라면 보다 강력하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성취한 사례가 보다 약한 노동운동 쪽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것이 능히 가능했을 것이다.


SWP는 EU가 그리스 인민들을 협박하고 고통으로 내몬 것을 두고 EU의 제국주의적 본질이 드러난 증거라고 지적한다. 이것 또한 맞는 얘기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EU를 지배하는 국가들은 어떠한가? 영국을 포함하여 독일, 프랑스 제국주의들은 EU 제국주의와 별개인가? 갚을 수 없는 부채의 덫 속으로 그리스를 몰아넣은 것이 바로 이들 국가의 은행들, 금융자본가들, 신용평가기관들이 아닌가. 남유럽에 대한 이들 착취자들의 지배는 만약 EU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덜 제국주의적이었을까? 영국 제국주의, 독일 제국주의, 프랑스 제국주의는 EU 이전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마찬가지 경우로, 신자유주의는 EU가 없었다면 보다 질적으로 약했을까? 


EU를 탈퇴해도 미국과 초국적 기구들과 글로벌 금융시장은 제 자리에서 그대로 변함없이 동일하게 움직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국가들의 현실적 독자성은 ‘탈퇴’를 통해 조금도 나아질 것이 없으며 민족국가 내에서의 계급투쟁을 위한 조건도 더 나아질 게 없다.


결국 ‘브렉시트’는 유럽 노동자들의 통일된 공동투쟁을 위한 객관적 토대(서로 연동된 경제, 낮아진 국경 장벽, 공통의 법제도적 틀)를 축소시키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전 유럽 규모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에 대한 전 유럽 규모의 저항운동을 요구하는 것이지, 이러한 저항을 위한 기회를 끊어놓을 일국 국경 뒤로의 후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6. 유럽 계급투쟁 : 전망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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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와 함께 서로 경쟁하는 독일·영국·프랑스 제국주의들 간의 끊임없는 긴장과 대립 갈등으로 EU 위기, 유럽 위기는 더욱 심화할 것이고, 유럽의 불안정은 더 커질 것이며, EU 국가들 간에 뿐만 아니라 국가 내부의 모순도 첨예화할 것이다.


이른바 ‘유럽 프로젝트의 위기’, 즉 모든 나라에서 긴축의 지속과 정치·경제적으로 EU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독일의 공세적 행보로 인해 유럽 각 지배계급들 내에 민족주의적 해결책을 택하는 분파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이들 지배계급 분파는 소부르주아지와 중간층의 지지를 끌어내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민족주의 세력, 우익 포퓰리즘 세력, 인종주의 세력, 극우 또는 파시스트 세력이 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난민들이나 그리스 등 남유럽 인민들을 위해서는 한 푼도 내 줄 수 없다고 한다. 프랑스의 국민전선 같은 세력은 스스로를 ‘프랑스 노동자’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데마고그를 펼친다. 이민자들, 특히 무슬림 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이 이 모든 세력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핵심 특징이다. 이들 정당 및 운동들 다수가 유럽 이민자들을 공격하는 선봉대로 나서고 있는데, 언제든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도 경제위기의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공격 선봉대로 나설 것이다.


EU에서의 현 정치 위기는 유럽의 만성적 정체, 불균등의 증대, 불황의 도래 등으로 인해 훨씬 더 첨예해질 것이다. 독일 및 독일의 경제 사이클에 매여 있는 나라들은 EU/유로존에서 경제적 지위를 강화시킬 수 있었는데 이 반대급부로 남유럽 및 동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만성적인 사회적·경제적 쇠퇴를 가져왔다.


독일 제국주의와 영국 제국주의는 산업 또는 금융에서 아직 국제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역사적 강대국들 중 프랑스 제국주의(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말할 것도 없고)는 EU의 경제위기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수 십 년 동안 프랑스 정부는 독일의 대등한 ‘파트너’로 행세했지만, 이제는 ‘대등함’을 주장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이제 프랑스 지배계급은 잃어버린 지반을 벌충하고자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독일의 ‘어젠다 2010’ 같은 노동 ‘개혁’을 강요하고 있다. 만일 이 노동 개악안을 막지 못하면, 프랑스 노동자계급에게 전략적 패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프랑스 자본주의를 부활시킬지는 의문이다.


현 위기는 유럽 사민주의 당들이 주로 내걸었던 ‘사회적 유럽’ 계획이 공허한 깃발로 전락했음을 드러냈다. 이른바 유럽연합의 ‘가치들’도 마찬가지다. 난민 위기 동안 메르켈, 융커, 슐츠가 저 ‘유럽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 지도자들에게 호소한 것들은 모두 노골적인 경멸로 거부당했다. 독일의 힘의 한계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또한 드러낸 것이다.


정치위기가 얼마나 첨예한 상황인지 이제 경제위기에 의해 한층 더 부각될 것이다. 최근에 경제위기는 남유럽을 타격하여 대대적인 저항과 격변을 낳았다. 이제 그것은 또한 프랑스, 독일, 영국 등 핵심 유럽 나라들에 도달하고 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지만. 다가오는 경제적 대혼란은 유럽 위기에 기름을 부을 것이다.


명백하게도 유럽 정부들 간의 분열 및 각국 지배계급 내의 모순의 발현으로 인해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에 의한 공동의 반격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료 주도의 노동조합 및 대중적 개량주의 정당들(사민주의나 스탈린주의 전통의 정당들)이 부르주아 지배를 위한 안정화 요소로 기능하면서 이러한 반격의 기회가 계속 유실되고 있다.  


따라서 2007-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의 기간과는 달리, 현재의 위기로부터 득세하고 있는 것은 이제 반동적,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세력들이다. 이것은 지난 시기에 겪은 중요한 패배들의 결과이다. 또한 ‘전통적’ 노동운동의 지속적인 쇠퇴의 결과이자, 노동조합운동의 약화 및 권위 실추의 결과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역사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의존하고 있는 당들, 대중적 개량주의 당들의 퇴락의 결과이다.


이로써 유럽 노동자계급은 약화된 지위로 그리고 ‘유럽 세력’으로서는 거의 마비된 상태에서 현 위기를 맞고 있다. 물론, 그리스에서 연금 개혁에 맞선 방어적 투쟁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 투쟁은 옥시 Oxi 의 배신 및 제2차 시리자 정부의 취임으로 그리스 노동자계급이 겪은 전략적 패배 속에서 수행되고 있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 그리스에서의 패배는 유럽의 현 노동자계급 지도부들이 벌인 일련의 배신의 고점이었다. 시리자 지도부가 다른 나라 개량주의자들보다 특히 더 나빠서가 아니라, 시리자의 부상, 그리고 그와 함께 열렸던 준혁명적 정세가 권력의 문제, 노동자정부의 문제를 제기했고, 위기에 대한 혁명적 해결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이 패배는 그리스에서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반동적 귀결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패배는 새로운 계급투쟁 분출이 다음 시기에 배제된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새로운 공격 물결이 2017년 대선 후에 예상되고 있는데, 이것은 다시 대규모 저항운동을 촉발시킬 것이다. 이것은 이미 현재 올랑드 정부의 노동 ‘개혁’에 맞선 운동 속에서 부분적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이 운동은 계속 확대되고 있고, 청년층과 노동자계급 간의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동시에 개량주의 지도부들에 의한 배신과 사보타지가 다시 노동자계급의 자신감과 투쟁력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


유럽 위기가 지속하는 동안 내내 관료적으로 통제된 노동조합과 대중적 개량주의 사민당들은 계속 우향우 해왔다. 프랑스에서 올랑드 사회당 정부처럼 모종의 도전을 약속하고 출범했을 때조차도 그들은 급속히 지배계급에 투항하여 자신의 노동계급 기반을 배신했다.


현 위기 하에서 개량주의 지도부들은 ‘자국’ 정부, 자국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추구했다. 모든 주요 정치 문제들에서 그들은 반대투쟁을 수행하길 거절했다. 증대되고 있는 제국주의적 개입과 군사주의에 직면하여 그들은 잘해야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 대부분은 나토를 지지했고, 중동, 아프리카,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국’ 국가의 개입을 지지했다. 그들의 소수파는 평화주의적 반대 입장을 취했지만, 어떠한 대중운동 조직화도 없었다. 정말이지 ‘테러와의 전쟁’ 당시 그들은 민주적 권리의 유린을 지지했고, 반무슬림 인종주의에 공모했으며, 자국 지배계급과의 ‘신성’ 동맹을 체결했다. 심지어는 최근 프랑스에서처럼 테러 사태를 빌미로 한 계엄령 선포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난민 위기’ 동안 그들은 모든 이민자들, 모든 난민들과의 연대에 나서서 유럽 국경 장벽을 허물어야 할 판에 오히려 메르켈의 ‘통제된’ 이민 정책을 지지했고 심지어 오스트리아 사민당 정부처럼 국경 봉쇄의 선봉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노동운동과 사민주의 당들의 사회배외주의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을 더 한층 분열시키고 있다. 난민들, 이주 노동자들, 청년들이 그 첫 희생자이다. 영국 정부, 또는 독일 정부, 또는 프랑스 정부가 ‘먼 곳에 있는’ EU의 브뤼셀 관료들에 비해 어쨌든 차악이라는 착각에 빠져 자기 운명을 ‘자국’ 자본의 운명에 붙들어 매어놓은 민족주의적 해결책으로 노동대중들이 빠져들도록 사실상 부추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레미 코빈이 영국 노동당의 대표로 선출된 것은 이러한 추세를 거스르는 중요한 예외였다. 수 십 만 명의 당원 및 지지자들이 당을 좌지우지해 온 우파 당관료들 및 의원들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이조차도 당의 우파 및 영국 부르주아지와의 단호한 단절 없이는, 그리고 당 관료 기구의 지배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단지 일시적인 승리로 그칠 것이다.


시리자의 배신, 스페인에서 좌파 민중주의 정당 포데모스의 우향우, 그리고 유럽 좌파당들의 갈지자 행보는 개량주의와 케인스주의가 어디서나 노동자계급에게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의 핵심 슬로건은 ‘사회적 유럽, 민주적 유럽, 생태적 유럽, 페미니즘적 유럽, 반인종주의적 유럽’이다. 달리 말하면, 금융자본의 지배를 소위 ‘봉쇄’할 것이라는 사회적 시장에 기초하여 개혁된 유럽연합이 그들의 기치이다. 이 정책의 파산은 최근에 수백만 사람들이 목도했다. 오직 소수의 개량주의자들, 또는 시리자정부의 바루파키스 같은 ‘괴짜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이 프로그램을 부활시켜 죽은 시체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 한다.


역설적으로 유럽 개량주의의 주류는 다른 시체, 이미 오래 전에 매장된 ‘독립적인 민족국가’라는 시체에서 구원을 찾고 있다. “자본주의 EU를 개혁하는 것이 유효하지 않다면, 왜 우리가 우리 ‘자국 국가’를 재장악해선 안 된다는 것인가?”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은 어느 민족이든 유럽연합을 탈퇴할 권리를 인정하고 방어할 것이지만(주창하지는 않더라도), 또 EU가 개혁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다수의 ‘독립적인’ 자본주의 국가들로 회귀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공상적이고 반동적인 생각을 거부한다. ‘독립적인’ 민족국가 하에 ‘독립적인’ 민족 통화와 은행을 갖는, 그리고 국경 통제를 하고 대륙 전체적으로 이동의 자유를 폐지하는 이 모든 조치들은 철저히 반동적이고, 전 유럽에 걸쳐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의 통일된 공동투쟁에 더 한 층의 장애물을 놓을 것이다.


자본주의 EU에 대한 이러한 반동적인 대답에 대응하여 노동자계급은 유럽 전역에 민주적·사회적 권리의 확장을 위한, 국경 개방과 긴축 폐기를 위한 공동의 투쟁으로, 전쟁과 제국주의적 개입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맞불을 놓아야 한다. 통일된 전 유럽 규모의 행동을 촉구하고, 노동조합과 노동자 대중정당들에게 ‘자국’ 부르주아지와 단절하고, 위와 같은 투쟁들에 수백만 조합원, 당원들을 동원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일단 그 같은 투쟁이 대중파업과 점거 등의 형태로 대중적 성격을 띠게 되면 그 투쟁들은 권력의 문제를 다시 일정에 올려놓을 것이다. 2015년 중반까지 그리스에서처럼 다시 한 번 노동자정부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2014~15년 그리스의 준혁명적 상황은 지배계급과 단절하여 노동자 민중들을 위한 비상 프로그램에 나서는 정부를 요구하였다. 노동자 통제 하에 대기업과 은행에 대한 몰수 국유화를 단행하고 인민의 필요에 부응하는 민주적 계획을 실시하는 등 비상 프로그램의 실행에 나서는 정부 말이다. 이러한 노동자정부는 오직 노동자평의회 같은 소비에트 유형의 투쟁기관들에 바탕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스 계급투쟁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같은 혁명적 프로그램은 한 나라에서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독일 경제도 다른 유럽 나라들과의 고리가 끊어진다면 엄청난 경제 파탄과 혼란이 상황을 압도해 버릴 것이다. 이 상황에서 고립되고 봉쇄된 일국 노동자정부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유럽 노동자계급은 대륙을 크고 작은 자본주의 민족국가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모자이크 같은 것으로 돌려놓는 것에서는 어떠한 대안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노동자계급은, 그리고 한 나라에서 수립되는 그 어느 노동자정부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전체 유럽을 재조직하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것은 전체 대륙을 ‘노동자 유럽’의 깃발 아래 하나로 단결시키고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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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12:00 2016/10/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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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 2016/07/04 13:06

[간담회] "위장도급 분쇄! 정규직 전환 쟁취!" "투쟁의 원칙과 전망에 대하여"

- 동양시멘트지부 투쟁 승리를 위한 간담회

삼척에 소재한 삼표동양시멘트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은 20년 넘게 위장도급으로 옥외광산에서 석회석을 발파·채굴하는 위험한 작업을 하면서도 정규직의 절반도 못되는 임금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동양시멘트 하청노동자들은 2014년 5월 17일 강원영동지역노조에 집단으로 가입하여 동양시멘트지부를 결성했다. 노조 건설 이후 노동부에 위장도급 진정을 내어 2개 위장도급 업체 25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작년 2월 모두 위장도급 판정을 받았고, ‘입사 때부터 정규직’이라는 묵시적 근로계약관계도 인정받았다. 동양시멘트는 곧바로 2개 위장도급 업체를 계약해지하는 방식으로 101명의 하청노동자들을 부당해고했다. 

2015년 8월 해고자들이 일하던 49광구에서 선전전 도중 사측과 사소한 충돌이 벌어져 지부장, 총무차장 총 2인이 구속되었다. 그 사이 삼표가 동양시멘트를 인수했고 남은 조합원들은 삼표 본사 앞에 농성장을 꾸리고 상경투쟁과 지역투쟁을 병행하며 힘겹게 투쟁했다. 그러나 삼표 자본은 자회사로 고용해준다고 쓰레기 안을 제시하며 조합원들을 흔들었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를 인정받았지만, 삼표 자본의 쓰레기 안을 받고 27명이 노조를 집단 탈퇴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실제로는 20% 임금을 더 받고 하청업체로 다시 돌아간 것이었다. 그마저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투쟁하는 조합원수는 23명으로 줄었다.

2016년 1월 김경래 수석부지부장을 비롯한 조합원 5명이 추가로 법정 구속되었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조합 탈퇴자는 집행유예, 벌금 판결을 받고 투쟁하는 노동자만 노린 노골적인 사법탄압이었다. 남은 조합원들은 이후에도 계속 투쟁을 이어갔고, 4월 26일 7명의 조합원들은 전원 석방되었다. <붉은글씨>는 동양시멘트 투쟁이 500일에 다가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 투쟁의 승리를 위해 김경래 수석부지부장과 연대 동지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참석 

김경래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동양시멘트지부 수석부지부장)
조한경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사무처장)
강종숙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투쟁승리를 위한 지원대책위원회
이경문 (사회자, 붉은글씨 회원)
신정현, 한송우 (연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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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동양시멘트지부가 세워진지도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민주노조를 건설해야겠다고 다짐한 계기가 있었나요?

김경래: 꼭 민주노조라기보다도, 노동조합이 앞으로 계속 민주노조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사회자: 민주노조를 건설하고 나서 김경래 동지의 삶에서 변화한 것은 무엇인가요? 민주노조 활동에서 배우고 느끼는 점이 어떤 것인가요? 

김경래: 노동조합 하면서 달라진 게 있지요. 그동안 살아왔던 역사관과 노동자의 역사관이 부딪치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사회자: 위장도급, 묵시적 근로계약관계 판정을 받았을 때의 상황과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세요. 특히 강종숙 동지는 특수고용노동자로서 이를 바라보는 느낌이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김경래: 그 당시에는 기분이 좋았어요. 며칠 동안 기뻤습니다. 하지만 법에 명시되어있다고 내치는 이상한 나라에 살다 보니 참 답답합니다.


강종숙: ‘중규직’, ‘무기계약직’이란 말이 코스콤 비정규직 투쟁에서 처음 나왔고, 그 이후로 그게 ‘선례’가 되면서 저 정도는 싸워야 잘되면 무기계약직이고 주동자는 복직되지 못하는 이런 것들이 일종의 ‘선’이 돼 버린 것 같아요. 그 이후는 말할 것도 없이 더 비참했습니다. 계속 밀리고 지면서 지도부는 싸울 의사가 없었고, 말로는 비정규직 철폐라고 하면서 뒤에 가서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였다는 말이 비정규직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입에서조차 노골적으로 나왔고 때로는 ‘비정규직 철폐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자들도 많았죠. 최근 예를 보면 현대차 비정규직을 볼 수 있는데,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나와도 자본이 버티면 우리 내부에서 슬금슬금, 좀 지나면 아주 노골적으로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온갖 추악한 짓을 해도 민주노총 내부에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탄압받고 배제되는 그런 지경을 쭉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 것을 바라볼수록 특수고용직이 노동자로 인정받는 것이 더욱 멀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노동자’인 비정규직도 김경래 동지가 말씀하듯이, 중노위에서 다 승리해도 자본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고, 더 큰 문제는 무시하는 과정에서 우리 내부에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노동자들 등에 칼을 꽂아도 그게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나마 동양은 칼 꽂고 가버렸으니 어찌 보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투쟁도 그랬고 현대차비정규직도 그랬고 등에 칼 꽂는 것뿐만 아니라 난도질을 해도 민주노총이라는 우산 아래서 버젓이 완장 차고 활보할 수 있는 지경까지 온 것이 우리 운동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

 

# 동양시멘트지부 투쟁 전개 과정
 

사회자: 2015년 11월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판정을 받은 직후, 조합원들이 대거 이탈하였을 때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해주세요.

김경래: 2015년 7월 즈음이었어요. 노조 만들고 투쟁하기 전 생각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민주노조가 어떤 것인지 충분히 공부하지 못하고 그냥 정규직만 되면 된다는 상황이었습니다. ‘민주노조 상관없다. 정규직만 되면 된다. 돈만 더 받고 복직해야겠다.’ 이런 얘기하면서 한국노총에 갈 수도 있다는 얘기도 있었고요. 거기서 힘을 모으지 못하고 노동조합의 어떤 목표를 정확히 하지 못하고, 분위기에 타서 다 숨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도 그 당시에, 7월에 갈등을 많이 느꼈습니다. 어쨌든 나도 지도부였지만 그런 생각들이 보이지 않게 작용했죠. 


2015년 8월에 상경투쟁을 시작하면서 사측이랑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고, 그 과정에서 ‘자회사 복직’ 쓰레기 안이 나온 것이죠. 교섭 과정에서 회사는 노동조합 내부의 의견 차이를 간파했고, 서로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더 이상 교섭이 안 되었던 거죠. 

제가 볼 때는 조합원 동지들은 교섭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평소에 안 나오다가 교섭 때면 나오고, 그런 상황을 제가 반대했지요. 그 과정에서 사측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지능적으로 총회 소집을 요구하면서 민주노조 깃발을 가져가려고 했었어요. 지부장이 감옥에 가있는 상황에서 제가 강력히 반대했고, 완강히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사측으로 넘어간 후배들한테 맞기도 하면서요. 하여튼 민주노조 깃발 지키는 것이 되게 힘듭니다.


조한경: 사실 집단탈퇴와 관련해서 탈퇴했던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당시 중앙노동위원회의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 판정 전에도 계속 있었지요. 노동조합을 설립하게 된 취지라든가 이해관계가 약간 차이들이 있었죠. 그게 지도부에서 나타난 것이 지역노조위원장 탈퇴, 사퇴였고, 이런 과정에서 두 가지 부분들이 대립점이 있었습니다. 하청을 인정하고, 하청업체와 교섭하면서 임금인상과 정규직에 비등한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활동을 계속 유지해 나가자는 입장들이 있었고요. 그와 반대로 불법파견 문제를 제기하면서 직접 고용쟁취 투쟁들을 벌어 나가야 한다, 그다음에 그런 소지들이 시멘트업계에서는 노골적으로 있었던 관행이라 현장에서 다분히 정리된 뒤에 투쟁을 하자, 그런 부분들이 이미 노동조합이 설립된 2014년 5월 17일 이후부터 내부 다툼들이 있었던 부분들이고요. 여기에 매각 단계와 해고되는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집단 탈퇴 전에도 이미 대다수 조합원 사이에는 직접고용, 불법 위장도급 철폐투쟁을 매개로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입장들이 노골적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중노위에서 노동조합이 이길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노위 이후 자회사 안을 던짐으로써 노골적으로 갈등이 드러나게 된 것이죠. 전부터 그런 갈등은 있었죠.


사실은 두 가지 문제가 고민이 되요. 노동조합 운동 일반이 노동조건 개선, 임금인상과 같은 투쟁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흐름들이 있는데 과연 이것이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들인가? 그리고 ‘정규직 전환’ 문제도 정규직이 된다하더라도 임금 노예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최종목표가 될 수 있는가? 이런 것에 대해 전체 운동 차원에서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노동조합 설립 이후 노동조합 활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고, 두 번째는 김경래 동지가 얘기했듯이, 사측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니라 총회를 소집하자고 요구를 해왔었어요. 왜냐하면 노동조합의 의결 정족수 이상인 과반수가 서명을 해서 총회소집을 요구해서 노동조합의 투쟁 기조를 바꾸고 그에 따라 안을 받자고 했었어요. 수석부지부장이 총회소집에 대해 완강하게 거부하고 내부에서 투쟁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그러지 않았다면 총회를 소집해서 과반수가 투쟁 기조를 바꾸고 자회사 쓰레기 안을 받아들였으면, 사실 조합원들의 이탈은 없었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의 투쟁 또한 있을 수 없었겠지요.

고민되는 것은 노조 내의 민주주의가 정확하게 원칙과 계급적 입장을 관철해 나가지 못하는 부분들로 작용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계속 수용해야 하느냐 고민이 그 이후에 생기기 시작했어요. 다수결 그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잖아요. 아무튼, 이탈은 아까 강종숙 동지가 얘기했지만 사측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끝까지 노조 내부에서 총회소집을 요구하고 기조 변화를 요구하고 투쟁을 접을 것을 요구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차라리 탈퇴하고 나간 것이 현재 투쟁에 있어서는 그나마 다행이지요. 내부에는 ‘임금 받고 그만두자’는 주장이  끊임없이 존재하고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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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숙: 노조민주주의 관련해서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투쟁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던 상황인데, 재능교육은 특수한 경우죠. 우리는 노동조합이 10년 이상 가까이 지속되었던 상황이고 동양은 없었던 건데, 동양은 그래서 그 측면에서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노동조합 민주주의라는 것을 다수결로만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만이 이길 수밖에 없어요.

재능교육 같은 경우도 2007년 투쟁 시작할 때 어쨌든 공식 의결단위 절차를 다 거쳤어요. 중앙위원회 열어서 표결까지 가서 싸웠는데 우리 쪽이 졌지요. 표로는 게임도 안 됐어요. 재능교육지부 총회에 부쳐서 당시 이현숙 집행부의 부정투표가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가 졌어요. 정상적인 선거를 했으면 질 수가 없었는데, 저들은 나름의 협박도 하고 ‘우리는 안 싸울 것이니, 반대표 던진 너희들이 나가 싸워라.’ 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타난 결과는 우리가 졌어요. 그리고 규약에 쓰여 있는 대로 중앙위원회에서 승인이 났고. 그것을 막아 나선 것이 우리였던 것이죠. 당시 저는 중앙위원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재능지부 현장에 있던 조합원들이랑 제가 대표자로 있는 학습지노조 서울경기남부지역본부 전체 운영위원회를 열어서 우리 본부는 싸운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학습지노조와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에서는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이 됐죠.


이게 돌이켜보면 ‘민주노조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과거 한국노총이 장악하고 있는 어용노조들 내부에서는 표결은 어림도 없었죠. 물론 87년에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노동조합들에서는 달랐겠지만, 그렇지 않은 노조들은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어용세력들 때문에 아무 방법도 없었고, 민주노조로 가려고 하면 잡아서 집단린치하고 산에 끌고 가고 … 이렇게 지난한 과정에서 핵심은, 노동자계급을 위한 투쟁원칙 이런 것이 딱 성문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투쟁의 중요한 고비마다 ‘원칙’이 과연 무엇인가 실천적으로 입증되어 왔던 것 같아요. 동양의 경우도 그 당시에 사측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총회를 요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총회를 거부하는 것이 맞다’고 봤습니다. 설사 총회가 열리더라도 분리해서 싸우면 된다.

우리는 일방적이었죠. ‘8대2, 9대1’ 이 수준이었는데도 싸웠어요. 노조민주주의는 절대로 다수결이 아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조기구 자체가 보수화되고 관료화되는 상황에서 다수결로는 이길 수 없는 구조가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 그럼 결국 ‘투쟁파’들이 감수하고 싸워야죠. 대가는 크죠. 자본으로부터의 봉쇄, 국가기관에 의한 구속, 노조 내부에서조차 ‘그 사람들은 완전히 깡패다.’라는 악선동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리가 진정으로 처음 분노해서 일어났던 원초적인 요구들을 관철시키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한경: 만약에 상상을 해보면 2월 13일 동양시멘트 투쟁은 위장도급 판결 후 해고가 되지 않았다면 투쟁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정부기관의 판정이 노조한테는 상당히 유리하게 났죠. 하지만 업체 자체는 매각과정에 있었고, 하청업체 도급계약 해지를 통해 ‘해고’라는 조건을 부여했고, 그러다 보니 어떻게 보면 투쟁하겠다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훨씬 수월하게 투쟁을 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매각이나 교섭도 되지 않고 회사 측 안을 던지지도 않고 하다가 매각인수가 확정되면서부터 노조가 조직력에서 요동치기 시작했죠. 그걸 제외하면 노조로서는 해볼 만한 투쟁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동양시멘트는 손 떼고 떠날 자본이었고 그쪽 대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애꿎은 고용노동부나 시청을 상대로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풀려고 했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정규직 전환, 비정규직 ‘철폐’와 ‘차별 철폐’ 이런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교육이 상당히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11월에 삼표가 던진 안으로 조합원들이 와르르 무너진 것이죠. 투쟁에서 조직과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는 원칙 자체를 변경해도 된다, 투쟁 수위를 낮춰도 된다, 이런 입장들이 외부에서도 다양하게 주입됐습니다. 가끔씩 왔던 사람들도 그런 얘기를 노골적으로 했고, 진정과 관련해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자체만 유지되면 투쟁을 접고 가도 된다, 그런 부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겁니다. 결국 23명까지 남았는데 회사에서도 16명 정도 남을 것이라고 예측했었죠. 우리가 봤을 때도 이 사람들은 갈 것이다, 총회요구 전에도 그 정도 남아있으리라 어느 정도 예측은 했었죠.

김경래: 아까 조한경 동지가 얘기했듯이 그런 것들에 대해 교육 자료라는 것이 부족했던 것이 안타깝습니다. 자본주의적 의식 체계 속에 살고 있는 조합원들의 의식적인 부분들을 깨는 작업을 해야 했는데 잘하지 못했거든요.
 

# 수석부지부장으로서 바라본 동양시멘트지부 투쟁


사회자: 2016년 1월부터 4월까지 약 93일간 수감 생활을 하셨는데, 구속 당시의 심경과 수감 생활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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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래: 저는 일정 부분 각오하고 투쟁을 했습니다. 그날도 들어가지 않을까 하고 모든 휴대폰이랑 지갑이랑 다 동료들한테 전하고 … 언젠가는 감내해야 할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기 때문에, 하필이면 한창 추울 때 이 정권이 … 여하튼 각오는 했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솔직하게 좋았습니다. 밖에서 너무 고생했었고, 그 안에서는 고생할 일이 없잖아요. 안에서 욕심났던 것은 그동안 못 했던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처음 두 달간은 종일 읽었는데 그 다음부터 재판을 하기 시작했으니까 재판 끝나면 읽고 그랬습니다. 일 년 정도 살지 않겠느냐 마음을 먹었는데, 죽기를 각오하면 살지 않겠느냐 하는 말처럼 석 달 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여튼 동지들이 너무 잠을 못 자고 전국 돌아다니면서 CMS 조직하고 그런 것을 볼 때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침 선전전 할 시간에 저는 밥 먹고 있는 게 미안하기도 했고. 마음먹고 가서 그러는지 몰라도 집사람도 몇 개월 지나니까 마음의 정리를 하더라고요. “일 년 정도 살지 않겠느냐? 지부장이랑 못 나오지 않겠느냐?”하면서 … 감옥 안에서 93일이 금방 지나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옥 안에서 흰 머리가 엄청났습니다.

사회자: 출소 전후로 수석부지부장으로서 공백기를 가졌는데, 답답한 지점은 무엇인지? 향후 동양시멘트지부의 투쟁을 어떻게 펼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나 계획이 있는지?


김경래: 전투력이든가 하는 건 동지들이 나보다 많이 뛰어났다고 생각해요. 동지들의 생각이 저를 능가하는 생각이 있더라고요. 감옥에 있던 3개월은 저한테는 소중한 시기였습니다. 전투력을 다시 되살리는 차분하게 생각하는 시기였고, 공백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오자마자 바로 그다음 날부터 결합해서 공백기라기보다 어떤 나의 힘을 만드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싸워야겠다. 싸움의 주체가 무엇인가? 어떤 놈이랑 싸워야 하는가?’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죠. 답답한 것은 사람들이 위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투쟁할 수 있는 동지들은 힘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데, 동지들이랑 대화를 해보니 우리끼리 서로의 투쟁을 제한하고 그러니까 그게 답답한 것이죠. 위축되어 있을 것이 아니라 ‘자본이 쫄아서 우리를 잡아넣은 것이다. 그냥 놔두면 우리가 계속 투쟁하고 난리 날 것 같아서 우리를 잡아넣은 것이다’라고 생각해야한다고 봅니다. 어쨌든 감옥에 갔었지만 그 투쟁 같은 경우는 우리의 승리라고 봐요. 비겁하게 잡아넣어서 우리가 이긴 것이라고 봅니다.  

조한경: 상황 자체는 사실은 4월에 49광구 투쟁부터 계속 묻혔죠. 결정적으로는 회사관리자들이 현수막 철거하는 상황에서 폭행 건이 있었고, 그 투쟁 이후에 계속 소송 들어오고 이렇게 되면서 강원본부에서 중간에 결합한 저로서는 구속 자체가 황당했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 정도 형을 살 정도로 투쟁을 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았는데, 93일을 살아야 할 만큼 투쟁을 하진 못 했던 부분이 많았죠. 특히 지부장 관련한 상황을 보면 8월 3일에 회사 측에서 시비 걸고 경찰에서 연행하고 검찰에서 구속영장 청구하고 법원에서 영장 바로 발부해서 8월 6일 구속 확정되기까지 일사천리로 쭉쭉 진행되었습니다. 8월 지부장이 구속된 이후부터 올해 1월 13일 남은 5명의 동지들이 법정구속 되기 전까지 시기 시기별로 많은 투쟁을 배치했죠. 집회도 매월 지역본부 차원에서 집중결의대회도 했고, 노숙 상경투쟁도 있었고, 삼포 회장 정도원 집 앞으로도 갔었고, 23명 중 구속된 동지들 제외하고 매일 노숙투쟁… 사실 대외적으로 동양투쟁이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죠. 

사회자: 강종숙 동지는 노숙농성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나요? 노숙농성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경험에서 얻은 교훈 같은 건 없으신가요?

강종숙: 노숙농성만 가지고는 답이 안 나오죠. 아까 잘 말씀하셨는데 자본이 공격을 하려면 그들도 돈이 듭니다. 우리도 돈이 들지만 저들도 돈을 많이 써야하죠. 구속시키면 엄청 저항을 하는구나, 느끼도록 하는 투쟁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도원 회장 집 가처분 상황과 이후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투쟁하게 되면 대가가 따르기 마련인데, 우리는 구속이든 손배가압류, 벌금이든 주로 몸으로 때우는 쪽으로 돈이 들지만 자본가들 역시 그만큼 돈이 나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만큼 탄압을 했는데도 우리가 변함이 없거나 더 세게 투쟁하면 당황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자본가들입니다. 물론 그 지점을 넘어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동양 동지들이 노숙농성을 계속 이어 갔는데 제가 아쉬운 것은 이마빌딩 관리자들도 그렇고, 거기 나오는 경찰들도 그렇고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항상 ‘이것들이 무슨 짓을 할까’ 긴장돼 있어야 정도원 회장이든 삼표 직원이든 마음 편하게 출퇴근을 못하게 됩니다. 


재능교육 투쟁하면서 7년 동안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박성훈 회장 집 앞에 갔습니다. 박성훈도 어느 시점에서는 압박을 받게 되는데 동네주민들이 이제 박성훈에 대한 욕을 하죠. 주민들이 다 친할 수 없으니까요. 가진 놈들은 안 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열구가 있었어요. 저도 거기 가면 가만히 있는데 누가 와서 박성훈 욕하고 가고, 어지간하게 지긋지긋해야 그런 것이 생겨요. 한두 번 가서 그런 것이 생기지 않죠. 어쨌든 종합해보면 노숙농성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밖에 자본이 제일 괴로워할 만한 것 우리가 큰 뭔가를 하긴 쉽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고 하다보면 저놈들이 뭘로 가장 괴로워하는지 보여요. 그걸 집중적으로 잡고 흔들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고, 우리도 노숙농성 하는 과정에서 몇 번 씩 철거를 당하고 하면서 나아졌어요. 철거를 당하면 반짝 나아져요. 대신 다시 농성장을 차리려면 힘이 듭니다. 우린 천막은 고사하고, 깔판 하나도 깔지 못하고 몰려 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있으면 환장하고 있는 것은 자본가들이죠. ‘안 끝나네.’라는 느낌. 이미 감옥 갔다 왔기 때문에 쉽게 두 번, 세 번 구속 안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구속을 계기로 해서 조금 더 사측과 경찰이 괴로울 만한 투쟁을 벌여나가면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 동양시멘트지부 투쟁의 전망
 

사회자: 동양시멘트지부 투쟁은 다른 사업장 투쟁과 어떤 점이 다르다고 보시나요? 앞으로 어떻게 나아갔으면 하는지?

강종숙: 투쟁을 하다 보면 시작된 이유가 다 있습니다. 보통 크게 보면 해고라든지 아니면 노동조합이 있었던 곳이라면 단체협약 파기라든지. 학습지의 경우도 불안정하지만 어쨌든 단체협약이 있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법적이든 물리력이든 단체협약을 강제할 만한 힘은 없었던 노동조합이었는데 2007년 당시 정말 노동조합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단체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싸웠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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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요구는 그 당시 우리 힘을 반영해서 단체협약 전체가 아닌 수수료(임금) 제도 전면 개정이었습니다. 굉장히 방어적인 요구였죠. 자본이랑 싸우고, 노동조합 내부의 어용이랑 싸우고 … 투쟁이 진행되면서 본질은 바뀌지 않았는데 점점 더 내부랑 싸우는 일이 많아졌어요. 자본이랑 싸우는 것은 기본이었고. 자본은 계속 탄압하고 건드렸어요. 손배가압류, 구속, 철거, 매일 벌어지는 용역깡패랑 충돌 … 이런 것들 때문에 자본과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서 내부에서는 계속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부의 회의를 통한 결정도 있었지만 조합원들의 힘으로만 싸웠던 것이 아니고 연대 동지의 힘으로 싸웠던 상황이었어요. 제가 위원장이어서 초기 4~5년 동안 집회 때 발언을 거의 저만 했어요. 제가 재능교육 소속도 아니었는데 재능교육지부 간부들도 집회 때 발언을 거의 안 하려고 해서 제가 발언을 하면서 대회사 등등 선제적으로 회의 결정 사항이든지 계속 외부로 공표를 했죠. 재능자본이 귀를 쫑긋이 들고 듣고 있으니까 귀에 못이 박이도록 얘기해서 못을 박았습니다.

“단체협약 원상회복, 해고자 전원복직” 거기에 자본은 치고 들어오죠. 다 보이거든요. 높은 데서 보고 있으니 농성할 때 보면 어떤 사람인지 견적이 나오죠. 사람 성향들을 잘 알기 때문에 어느 시기에 어떤 안을 던지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예측이 얼추 맞아요. 그렇게 해서 자본은 내부를 계속 흔드는 겁니다. 동양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봐요. 지리멸렬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싸움이 필요합니다. 노숙농성 하면서 자본이 가장 괴로운 것을 해야 합니다. 저는 10년을 노숙농성을 했는데, 단 한 번도 정시에 시작해서 정시에 끝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피켓을 들 때 서 있던 자리는 용역깡패 대장이 와도 한 번도 제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았습니다. 학습지 대교 투쟁 때부터 이제 그런 것들을 고수하고 지키고, 자본한테 우리 요구는 뭐다 못을 박아놨으니, 행동이든 요구사항이든 자본가들은 이러한 지점들을 ‘자기견적서’에 넣을 수밖에 없어요. 저놈을 솎아내려면 어쨌든 여기까지는 해야겠구나, 라는 인식을 주는 것이죠. 김경래 동지가 말했던 것처럼 예를 들어 노동조합 깃발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게 노동조합 회의석상이든 집회발언이든 해야 된다고 봐요. 자본가들이 들을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우리 요구는 노동조합 깃발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노동조합 깃발 들고 들어간다.’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단체협약 원상회복! 절대 개별복직 하지 않는다, 재능교육 종탑어용세력들은 단체협약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노숙농성, 구속 불사하면서 싸울 마음이 없었던 것이죠. 저들은 마지막에 정말 그 요구가 필요해서 합의한 게 아닙니다. 지난 삼 년 동안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자본과 연대 동지, 상급단체, 그리고 조합원 내부에서 … 우리 요구는 거의 항상 최소한의 요구죠. 늘 밀리고 있는데 가장 절박한 최소의 요구, 끊임없이 원안을 고수하고 싸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원안 고수하고 싸울 때, 연대 단위나 원안 고수하는 조합원들이 지지하는 안을 다수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야금야금 넋 놓고 바라보면 어느 순간에 그 반대의 경우가 천지가 돼요. 처음에 밀고 들어올 때 간을 보죠.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개떼 같이 들어와서 흔들어대요. 투쟁하는 노동자의 편인 척하면서 실상은 자본가의 앞잡이라든가, 내부를 흔드는 자들이 다수가 되지 못하게 정확하게 중심을 잡아가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내부가 안 흔들리면 그런 놈이 안 들어옵니다. 처음에 붙으려고 하다가도 회의 진행되는 것을 보면 들어오려고 하는 마음이 안 생기죠. 그래서 항상 치열하게 내부에서 싸워야 합니다. 밖에서 집회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안 고수가 절대다수는 아니라 해도 결국 처음에 요구했던 원안에 한참 못 미치는 말도 안 되는 안을 들고 와서 마지막에 개별로 복직해버리면 아무 의미 없거든요. 자본은 항상 투쟁하는 대오로 들어온 사람들을 최소한으로 만들어 놔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투쟁에서도 그런 측면에서 마지막 남은 3인이랑 합의할 때, 복직해서 너희들 뭐 할 것인지 노동조합 할 것인지 등등 합의할 때 마지막까지 쟁점사항이었고 자본이 궁금해 했어요.

종탑어용세력들이 계속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사측에서 교섭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얘기했었어요. 너네 3인과 합의할 수 없는 이유가 종탑 측이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놓고 말이죠. 그래서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속 흔들리기 때문에. 자본만 흔들면 버틸 텐데, 연대부터 남아 있는 23명이 끝까지 가면 좋은데, 이건 이상적인 것이고 현실에서는 계속 흔들릴 텐데, 23명 모두를 중심 잡기 위해서 노력해야지요. 그 동지들을 모아서 똘똘 뭉쳐 결집시켜 나가야 어느 정도 끝까지 원안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동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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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경: 우리가 지금 ‘이긴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들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단지 나만, 우리 조합원만 정규직이 되면 끝나는 것인지, 복직하고 나면 계속 정규직 임금 노예로 살 것인지, 이런 고민들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 또 지금 현 시기에 있어 고민해야 할 지점은 여러 연대 단위와 함께하면서 7월 9일이면 500일인데, 그동안 우리가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작년 12월에 반 이상의 조합원들이 탈퇴했을 때, 그 사람들이 애초에 주장했던 것이 무엇이냐?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임금 몇 퍼센트 인상과 하청업체의 삶을 계속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공론화되고 다툼이 있어야 하지, 계속 놓아두면 고름만 커지고 나중에 수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단호한 부분들이 필요합니다. 투쟁의 원칙 자체가 훼손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하기로 했으면 밀고 갔으면 합니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가장 껄끄러운 것은 정도원 회장의 집이든 정도원 회장이 다니는 교회든 최병길 사장 집이든, 필요하면 96시간, 144시간 등의 투쟁 배치가 필요합니다. 연대 단위는 외곽에서 이벤트와 퍼포먼스 중심으로 투쟁을 배치하는 데, 조합원 동지들은 거점농성장을 어떻게 만들고 투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사람들 모아서 한 번 반짝하는 것이 아닌 농성장을 중심으로 적들이 가장 껄끄러운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결코 무리한 선도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해왔던 부분들에 하나둘씩 좀 더 만들어 가는 고민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경래: 조합원 동지들이 회의, 간담회, 토론회를 통해서 계속 고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같이 계속 모여서 얘기하고 토론하면 나아지고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마지막으로 투쟁 주체가 연대 단위에게, 연대 단위가 주체에게 한마디씩 해주시고, <붉은 글씨> 독자들과 투쟁하는 노동자 동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간단히 해주시죠.

한송우: 이 싸움이 결코 간단히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원칙을 지키고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갔으면 합니다. 옆에서 함께하겠습니다.

신정현: 오늘 말씀하는 것을 듣고 상황 일부를 알게 되었는데 강종숙 동지도 말씀하셨지만, 자본과, 연대 단위, 조합원 내부 세 가지에 대해서 치열한 토론을 통해서 합의점을 찾아나가면 어차피 법률적 싸움은 이기고 있고, 시간과의 싸움인데 견뎌 나가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김경래: 어쨌든 연대 동지들이 많은 관심 가지고 계신데, 조합원들이 주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가 가장 고민입니다. 동지들의 역할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변치 않는 원칙을 사수하고 가야지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고 원칙을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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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4 13:06 2016/07/04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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