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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중에서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존재의 깊은 어둠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그리스적/유럽적 철학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적 정신이 보여주는 존재의 슬픔에 대한 감수성이 아무리 예민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적 정신 속에서 눈물과 슬픔은 아름다움 속에서 지양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모든 눈물은 함께 모여 아름다운 시내와 숭고한 바다를 이루기 위해 흐르는 것인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피가 까닭도 없이 흘렀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말라버렸던가! 그렇듯 시인이 아름다운 수정 항아리에 담아낼 수 있는 눈물은 인간이 흘린 눈물의 억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하물며 황소와 개미와 나무의 슬픔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인간이 흘린 눈물의 억만분의 일이라도 아름다운 형상 속에 담아내는 시인들이 있음에 대해 우리는 고마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철학자가 시인의 눈으로 인간의 눈물을 파악하려 할 때, 그는 어김없이 인간의 슬픔을 모독하게 된다. (...) 마치 화가가 세상의 모든 색깔을 화폭 위에 불러모아 전체로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듯이 이들 철학자들은 존재의 모든 모순과 슬픔을 총체성의 개념 속에서 지양하고 해소하려 하였다. 시인이 고통을 아름다운 형상에 담아 노래할 때, 그는 적어도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을 위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철학자가 시인의 흉내를 내면서 인간의 슬픔과 존재의 어둠을 하나요 모두인 청체성의 이념 속에서 해소하려 할 때, 그는 오직 자기와 남을 모두 속일 수 있을 뿐이다.

 

(...)

 

철학은 물음이다. 그리고 모든 물음은 정신의 동요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종류의 동요인가? 우리의 철학자에 따르면 그것은 존재의 근원적 "도덕성"에 대한 동요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먹고 먹히는 세계에 대한 어떤 도덕적 동요이다. 모든 슬픔은 슬픔의 부정을 자기 속에 본질적 계기로 갖는 것이므로, 우리가 슬픔에 참여할 때 우리는 언제나 슬픔을 부정하게 된다. 그것이 절망적 현실에 대한 도덕적 동요와 거부감, 즉 모든 눈물과 모든 슬픔을 거부하는 우리의 양심이다. 이렇게 하여 철학은 모든 지음받은 것들의 눈물과 슬픔 앞에서 참을 수 없이 일렁이며 동요하는 우리의 양심의 소리, 양심의 논리를 따르는 생각의 여행길이 된다. 박동환은 이 길을 가리켜 "양심으로 내려가는 것"이라 불렀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려가는 것"이다. 낮아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양심이다. 생각하면 양심이란 굳이 철학에서가 아니라도 흔하디 흔한 상투어이다. 그러나 양심을 말하는 것은 쉬워도 내려가 낮아지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 내려가 낮아지지 않은 정신이 추구하는 양심은 십중팔구 독선에 떨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타자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게 마련이다.

생각하면, 서양철학은 양심적이다. 오늘날 땅 위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해 눈뜨게 된 것은 서양정신의 선물이다 .그런 한에서 양심을 말하는 것은 진부한 상투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서양철학이 양심적인 것은, 아름다움이 선을 포함하는 한도 내에서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서양의 양심은 마비되고 침묵한다. 그리하여 비할 데 없이 숭고하고 순결한 영혼을 가진 철학자들이 범해서는 안 될 오류를 범한다. 절대자의 지ㅏ리에 선의 이데아를 놓았던 플라톤이, 단지 장애아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태연히 영아살해를 승인하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어떤 종류의 자연적 지배도 인정하지 않았던 루소가 놀랍게도 여자는 자연적으로 "남성이라는 존재에 복종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일찍부터 부정(不正)에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플라톤과 루소에게서 볼 수 없는 양심의 일관성, "양심의 진리"를 다른 철학자에게서 볼 수 없는 양심의 일관성, "양심의 진리"를 다른 철학자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약자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말을 하지 않고 책을 끝맺는 철학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모두 서양정신이 양심은 알았지만 내려가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들은 높이 치솟은 정신의 숭고를 알기는 했으나 "양심으로 내려가는 것"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양심과 야만의 싸움의 과정이었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직 인간의 정신이 높이가 아니라 내려가 낮아지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때, 참된 의미에서 양심은 꽃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심으로 내려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오직 낮은 곳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그렇게 양심으로 내려가는 길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 365 ~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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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의 동일성과 자기정체성을 순수히 내재적으로 정립해오지 못했다. 내적인 공동체 구성의 논리에서 이미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자유와 자율성의 실현을 그 이상으로 삼아왔고, 대외적 관계에서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단 한 번도 이질적 문화 ,적대적 세력에 의해 전면적으로 정복당해 본 적이 없는 서양의 역사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든 자율성과 주체성을 추구하고 실현해온 역사는 아니었다. 게다가 개항 이후 식민지 경험과 역사의 단절은 우리의 역사를 내재적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파악하려는 시도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서구 문명과의 만남 이후 주체적인 자기부정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극복하기 전에 외세에 의해 부정당했다. 모든 주체적 변혁은 좌절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외세에 의해 철저히  수동적으로 규정되고 부정되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

 

스스로를 내재적으로 정립하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서양적 자율성과 주체성이 자기의식의 유일한 전범이요 원형이라면, 그리하여 우리 역시 주체적 겨레로서 자기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서양적 자기의식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양문명의 불완전한 모방자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초라해 보일 때, 우리의 가난을 신뢰하고 우리의 부끄러움 앞에 정직하자. 그리고 모든 전해들은 철학의 오염에서 벗어나 근원적 물음 앞에 마주서자. 도대체 우리는 언제 우리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서 정립하게 되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자기를 반성적으로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할 때이다. 우리는 주체적 자기의식을 통해 자신을 근원적으로 정립하고 자기를 능동적으로 규정함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의식과 자기 규정은 오직 나의 자기반성 속에서만 발생한다. 따라서 자기의식을 통한 자기정립의 모든 비밀은 바로 이 의식의 자기반성에 놓여 있다.

그러나 나의 자기반성이란 무엇인가?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은 그것을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타자적 관계로 이해했다. 나는 그 자체로서 나 자신에 대하여 타자이다. 내가 남이 아니라 나 자신과 타자적인 관계 속에 있을 때, 그것이 반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때 타자를 무엇으로 이해하는가? 그것은 내가 나에게 인시적 대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내가 나에게 '그것'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여기서 자기의식성의 타자성은 나의 나 자신에 대한 비인격적 대상성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모든 오류가 시작된다.

칸트든 헤겔이든 의식의 자기반성을 본질적으로 의식의 자기규정으로 이해한 점에서 독일관념론의 자기의식 이론은 근본적 오류속에 빠져 있다. 즉 그들은 모두 자기반성을 능동적 주체인 내가 수동적 객체인 나를 의식하고 규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자기반성을 설명할 때, 자기의식은 나의 나 자신에 대한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과 인식적 관계를 맺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가 나를 의식할 때 나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나를 타자적으로 의식하되 물건이 아니라 인격적 주체로서 의식한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그들은 내가 나를 대상적으로 의식한다는 이유만으로, 의식되는 나를 3인칭의 '그것'으로 사물화시켰다. 그리하여 자기 의식에 의해 개방되고 지탱되는 세계에는 오직 주체인 '나'와 객체인 '그것'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 이외에는 신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자애로운 신이 나의 삶에 심술궂은 간섭을 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능동적인 주체로 군림할 수 있다.

 

(...)

 

이 모든 오류는 그들이 의식의 자기반성을 자기규정이라고 생각한 데 기인한다. 그러나 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나 앞에 마주서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내가 마주한 나는 결코 사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물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반성 속에서 나와 마주설 때, 마주서는 나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라 '너'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마주선 사물을 향해 '그것'이라 부른다. 그러나 내 앞에 마주선 인격은 '그것'이 아니라 '너'이다. 그리하여 나의 자기반성이란 나를 내가 대산적으로 규정하는 자기규정의 행위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말 건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자기규정이 아니라 자기와의 대화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규정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자로 마주서는 한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자립적인 너로서 대립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너와의 관계, 너와의 대화 속에서만 나를 실현한다.

내가 너와 관계할 때, 나는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능동적이듯 너 또한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의 수동성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 이전에 나의 너에 대한 의존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가 나의 수동성과 의존성을 배제한 채 나의 자기의식의 진리를 해명하려 한다면 우리는 자기의식의 본질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자립적인 너를 나 속에 품을 때에만 내가 된다. 나는 너에 의해 침투되어야 하며 또한 너 속에서 나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나와 너의 이러한 상호이행 속에서 내가 나르 상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된 나르 실현하지 못한다.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내재적으로 자기의 동일성을 정립하고 자기를 ㄸ환 내저적으로 부정하려는 사람은 결코 참된 의미의 자기에 이를 수 없다. 오직 너를 위해 자기를 양도하는 자만이 기르고 너로 인해 자기를 상실하는 자만이 진정한 자기, 참된 나에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이 란 나와 그것의 상호이행이 아니라 나와 너의 상호이행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내가 너 속에서 나를 상실하고 나 속에서 너를 품고 너와 대립하는 것은 내가 나 속에서 나 아닌 너를, 자립적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함이다. 자기의 동일성이 파괴될까 두려워 자기 속에 너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 너 속에서 나를 상실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자기 속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려 한다. 그러나 너를 사랑할 줄도 모르며 너로 인해 나를 상실할 서양적 자기의식은 병든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자기도취와 나르시시즘에 뿌리박고 있는 서양정신은 영원한 처녀신 아테네처럼 품위와 단정함을 지킬 수는 있겠지만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고 어떤 새로운 생명도 출산할 수 없는 불임의 지혜이다. 그리하여 서양 문화는 아무리 우아해 보인다 하더라도 타자를 이용하고 소비할 뿐, 참된 의미에서 타자를 잉태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불임의 문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임신 중이다 .임신은 오직 너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너를 나 속에 품게 된 나는 홀로 있을 때의 안정과 균형을 상실한다. 너를 나 속에 품은 정신의 동요는 임신한 정신의 입덧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아무리 어지럽게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생명, 새로운 역사의 탄생을 예고하는 가슴의 울렁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에게 느끼는 낯설음과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우리 의식의 철저한 부정성을 기꺼이 긍정하자. 이 모든 혼란과 고통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모든 이들이 견뎌야 할 입덧이므로.

 

- 374 ~ 37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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