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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중에서

123-125쪽


한편 죽은 자는 어떨까? 죽은 자와의 사이에 ‘합의’가 성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장례식에서 죽은 자를 애도한다. 이것은 근대의 풍습이 아니라 원시시대부터 있었다. 비코(Giovanni Battista Vico, 1668~1744)는 이미 18세기에 “장례가 없는 사회는 없다”고 지적했는데, 그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 있는 자를 원망해 재앙을 불러온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장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을 믿지 않더라도 장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장례의 목적은 죽은 자를 제외한 사회적 관계의 체계를 재확립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과 행방불명된 사람의 차이를 생각하면 분명해진다. 행방불명이 된 사람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없는 관계 체계를 반들 수 없다. 예컨대 남편이 행방불명일 때 아내는 재혼할 수 없다. 남편이 돌아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단순히 생물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인 승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장례는 죽은 자를 정리하고 ,그가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행해진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영혼으로 머물며 산 자를 원망한다는 생각은 그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은 특별히 그 죽은 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부재 때문에 불안정해진 공동체를 재확립하기 위해서고, 그 사람을 잊고 추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전사자를 추모하고 있다. 또한 가토 노리히로라는 문예 비평가는 먼저 일본의 전사자를 애도하고, 그런 연후에 일본에 침략으로 죽은 아시아의 사자들을 애도해야 한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전후 일본인의 자기분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도한다’는 것은 마치 죽은 자와의 사이에서 ‘합의’가 성립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가 ‘타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은 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자는 어떠한 현실의 대상도 아니다. 죽은 자는 자신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산 자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밝히는 기회며, 혹은 산 자가 그에게는 이미 현존하지 않는 죽은 자에 대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죽은 자에 대한 의무 역시 안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변하는 법이 없다. 여기에서는 그대가 진 빚을 그의 탓으로 돌릴 변명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는 신실한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떠한 현실도 아니다. 그는 그대를 붙잡기 위해 무엇 하나, 정말이지 무엇 하나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마약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변했다고 한다면, 그 경우 적어도 산 자가 변했음에 틀림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랑의 기술”, 『키에르케고르 저작집』)


이것은 죽은 자가 바로 ‘타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은 자와 교섭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와 죽은 자의 관계가 변한다면 그것은 단지 뭔가 변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애도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변하겠는가? 단지 그로써 산 자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뿐이고,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157-169쪽


(일본이 저지른 태평양 전쟁에 대하여)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때 전쟁책임을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옥중에 있었던 비전향 공산당원들이다.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을 심화함에 따라 비전향자들은 그만큼 신성화된다. 진지하게 책임을 생각할수록 전향하지 않은 당 지도자는 위대해진다. 전후에 일본공산당이 가졌던 권위는 여기에 있었다. 이것이 전후의 정치와 사상을 왜곡시켰다.

이에 대해 오다기리 히데오는 「문학에서의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문학에서 전쟁책임이란 다른 무엇보다 우선 우리 자신의 문제다. 우리 자신의 자기비판에서부터 이 문제는 시작된다. 자유의 세계에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중의 우리가 어땠는가를 스스로 추궁하고 검토하며 비판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 10년 동안 일본문학의 놀랄 만한 타락과 퇴폐에 대한 우리 자신의 책임을 밝혀나가고자 한다.


이 성명에 대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그들은 공산당 계열의 문학자였다. 더군다나 전쟁 전에 전향하고 전쟁 중에는 소극적․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반성은 무엇보다도 당을 배반했다는 것에 있다. 이 때 ‘전쟁책임’은 ‘전향’에 대한 책임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완수된다. 혹은 그들의 '상처‘는 그것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그리고 그들은 공산당원으로서 이미 반성을 표명했기 때문에 ’반성‘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규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대량의 전향자를 낳았던 공산당의 현실인식 및 조직적 체질에 대한 반성은 없다.


(...)


(비전향=선, 전향=악이라는 도덕적 구별에 대해) 마루야마 마사오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공산당 -- 더 정확하게는 비전향 공산주의자가 전쟁책임의 문제에 대해 가장 꺼림칙하지 않은 입장에 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이 모든 탄압과 박해를 견디며 파시즘과 전쟁에 대항해온 용기와 지조를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쓰루미 슌스케가 비공산주의자는 전쟁책임을 지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공산당을 포함한 합의 의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 것은 정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거론하려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전위 정당으로서의, 혹은 그 지도자로서의 정치적 책임의 문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름 아닌 공산주의자 자신의 발상에서 이 양자의 구별이 종종 혼란을 일으키고, 명백하게 정치적 지도의 차원에서 추궁되어야 할 문제가 어느새 공산당원의 ‘분투하는 모습’으로 해소되어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당면한 물음은 공산당은 애당초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이겼는가 졌는가 하는 것이다. 정치적 책임은 결과에 대한 준엄한 책임이며, 더욱이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해서 공산당의 입장은 일반 대중과 달리 단순한 피해자도 아니고 더더구나 방관자도 아니며 바로 가장 능동적인 정치적 적수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것과 일본의 전쟁 돌입이 설마 구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패장은 비록 그 자신이 아무리 최후까지 버텼다 하더라도 여전히 패장이며, 예상외로 적의 포격이 치열했다거나 그 수법의 잔인함, 아군 진영의 배신자 등을 이유로 들어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전략과 전술은 바로 그러한 일체의 요소를 내다보고 세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을 가혹한 요구하고 한다면 처음부터 전위당의 간판 따위는 내걸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죽어도 나팔을 놓지는 않았습니다’라는 식으로 저항을 자찬하기 전에 국민들에게는 일본 정치의 지도권을 파시즘에 넘겨준 점에 대해, 이웃 나라들에 대해서는 침략전쟁 방지에 실패한 점에 대해, 각각 당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하고 유효한 반파시즘 및 반제국주의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던 이유를 솔직 대담하고 과학적 검토를 덧붙여 그 결과를 공표하는 것이 지당하다. 공산당이 독자적인 입장에서 전쟁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공산당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고 통일전선의 기초를 강고히 하는 데도 적지 않게 공헌할 것이다.

(「전쟁책임론의 맹점」, 『전쟁과 전후 사이』)

 

(...)

그러나 마루야마는 공산당의 전쟁책임을 말할 때, 어디까지나 비전향자에 대한 도덕적 경의를 버리지는 않았다. 전쟁 중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방관자로서 보냈던 마루야마는 ‘비전향’ 지도자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앞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요시모토 다카아키다.


(...)

나의 욕구로부터는 전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료하다. 그것은 일본 근대사회의 구조를 총체적인 비전으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텔리겐차 사이에서 일어난 사고변환을 가리킨다. 따라서 일본 사회의 열악한 조건에 대한 상상적인 타협, 굴복, 굴절 외에 우성유전의 총체인 전통에 대한 사상적 무관심과 굴복은 전향 문제의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다.

(「전향론」)

 

요시모토 다카이키는 이론과 현실의 어긋남을 무시하고 이론에 집착하는 ‘비전향’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고바야시 다키지, 미야모토 겐지 등의) 이러한 비전향은 본질적인 비전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와 대조적인 의미를 지닌 전향의 한 형태였고, 전향론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전향은 현실적 동향 및 대중적 동향과 접촉 없이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사이클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요시모토 다카이키는 여기에서 그때까지 도덕적으로 보였던 내용을 인식의 관점에서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전향자가 존경받는 것은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시모토와 같은 전쟁세대에게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전쟁에서 죽을지 모르는 운명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옥중 생활 17년 같은 일은 그에게는 그다지 충격이 아니었다. 그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최대한 열심히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놓인 상황을 인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좌익적인 담론이 두절된 시대에 자랐고, 다가올 죽음에 대비해 어떻게든 그것에 의미 부여를 하려고 했던 학생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전쟁 중에 대동아공영권(아이사의 식민지 해방)을 믿은 파시스트였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이 시기 대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내용일 것이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에게 용서하기 힘들었던 것은 자신의 무지였다. 앞에서 나는 무지에 책임이 있는가 하는 것을 논했다. 전쟁세대들은 우리는 몰랐다, 배우지 못했다, 속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시모토는 무지에도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무지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책임을 지면 되는가?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도덕성에 대한이 비판은 그 자체가 극히 윤리적이라는 사실이다. 요시모토는 미야모토 겐지와 같은 ‘비전향’을 전향의 한 형태로 봤을 때, 실은 ‘본질적인 비전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향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 이후 ‘현실적 동향 및 대중적 동향’과 함께 말 그대로 전향한 사람들이 그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요시모토 다카아키를 떠받드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경박하게 전향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서 전후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봉건유제’에 대한 대결 의지가 사라져버린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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