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이계삼 저,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곧 있으면 신참 교사가 될 석돌이에게 줄 선물로 산 책인데, 선물 주는 사람이 먼저 읽어보고 소감을 말하면서 건내주는게 예의일 것 같아서 어제 밤 1부만 읽어봤다. 2부의 분량이 더 많기에 서평이랍시고 벌써 몇 마디 떠드는게 좀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1부 내용만으로도 뭔가 저자의 말에 대답하고 싶어지는게 생겨버렸다.

 

일단 내가 다닌 고등학교 얘기 몇 개부터 하고 시작해야 겠다. 그 학교는 대전 최고 명문 고교였다가 90년대 후반부터 대전 서구, 유성구에 신도심이 활성화되면서 쇠락한 학교이다. 특히나 학교 선생님 중에는 동문들도 꽤 있었는데, 자신들의 잘 나가던 옛날을 생각하면서 찌질하게만 보이는 자신의 제자들을 구박하길 밥먹듯 했다.

 

그런데 어느날 영어선생이란 놈이 수업시간에 이런 소리를 한다. 자기 반 학생 부모들 중에 대학 졸업한 사람이 2명 밖에 안된다고... 그러니 얘들 수준이 그 모양 아니냐... 저 서구에 XX고, ○○고에 가면 대졸 이상이 한 반에 2/3 이상이다. 내가 이딴 똥통학교에서 얘들을 가르치다니... 어쩌구 저쩌구..

 

얘들 앞에다두고 이런 저질스러운 소리나 해대는 인간을 선생으로 두고 살았던게 우리네 고딩시절이었다. 내가 보통 악몽을 꾸면 그 중 열에 아홉은 고등학교 시절이 배경이다. 모의고사를 보고서 내 라이벌이 나보다 점수가 더 잘 나올까봐 걱정하고 있다던지.... 그런 꿈 꾸고나면 아침부터 기분이 더럽다. 실제 내 고3시절은 그게 병적인 수준이었고,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자살하지 않은게 다행이란 생각도 '아주 가끔' 한다. ㅋㅋㅋㅋ

 

내가 학창시절에 전교조에 대한 얘기를 들은 고등학교 때 영어선생(앞의 영어선생과 다른 사람이다)이 했던 소리가 전부다. 그 양반은 한때 전교조 조합원이었는데 탈퇴를 하고 수업시간에 전교조의 '전'자도 못들어 본 얘들한테 전교조 욕을 했다. 전교조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가야 하는 얘들 망치는 집단이라고...

 

그 선생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은 또 있다. 체력장을 했던 날이었는데, 그 다음시간이 영어였다. 체력장에서 검사해야 할 항목이 워낙 많기 때문에 체육선생님은 기록을 적는 일을 대충 몇명 아이들 뽑아서 시켰다. (구체적으로 어느 대학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체력장 점수를 입시에 반영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기록을 조작하려 했다. 그런데 이 영어선생이란 작자는 대놓고 좋은대학 가고 싶으면 그런 것 쯤은 좀 올려서 적으라고 당당히 말하는 거였다. 내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그건 나쁜일 아니냐고 했더니, 대학가는게 중요하지 그런게 대수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겐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안 좋다. 이런 나에게 이계삼 선생님의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은 내 고교시절을 더욱 서럽게 느끼게 만드는 책이었다.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네 줄 수 있는 '전교조 선생님' 한 분만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내가 1학년 말에 문/이과 선택할 때 이과 선택했다가 문과로 바꾸겠다고 했을 때, 그 때 내 담임이 했던 "문과 가봤자 취직할데도 없으니까 이과로 가 임마!"같은 말은 듣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모의고사를 보기 전 날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이 막힐 듯 해서 잠도 못 자고 날밤을 샜을 때, 내 얘기를 한 마디라도 더 들어주려 하는 사람 덕분에 난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을 텐데... 그 때 내 얘기를 들어준 것은 상담실에 배치되어 있던 대학원생 학교사회복지사 뿐이었다. 아래 구절을 읽으면서 그 기억이 아프게 떠올랐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과 관련하여 엄청난 오해와 왜곡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이제 교육의 장(場)은 변인들을 조작하여 프로그래밍화한, 이를테면 파블로프가 개를 가두어놓은 실험상자 같은 것이 되었다. 골방에서 친구들과 나누었던 어설픈 인생상담은 점점 비일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교육받은 전문 상담사가 직접 학교를 방문하여 진행하는 상담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대체해가고 있다. 체험학습 -- 체험도 학습하는 것인가 -- 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전문 지도자가 아이들의 체험을 안내하고 조직화한다. 그리하여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 전문적인 '평생교육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공적 영역이건 사적 영역이건, 수없이 교육기관을 전전하며 끝없이 무언가를 배운다.

- 27~8pp

 

내가 학교 상담실을 찾아가서 딱 두번째 만남이 있었을 때, 그 사회복지사는 내게 홀랜드 진로심리검사 용지를 들이밀었다. 내가 미래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긴 했지만, 내가 불안해 했던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그 때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그 사회복지사 뿐이어서 고맙게 생각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난 결국 학교 상담프로그램의 개입 과정에 따라 변화될 '종속변수'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             *             *

 

 

내 고딩때 얘기는 대충 끊고, 책에서 인상깊었던 구절과 이에 대한 간단한 생각들을 정리한다.

 

1부 글 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은 <'좋은 언어'와 관용의 정신>이었다. 제목은 약간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이 글은 논술교육에 관한 글이다.

 

한가지 인상 깊었던 체험은 첨삭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할 무렵에 겪은 일이다. 그때 논제가 대략 '현대문명의 위기에 대한 생태론적인 대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손에 들어온 첫 답안지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 학생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심층샌태주의로 규정하고 머레이 북친의 사회생태론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었는데, 한창 입시준비에 몰두하고 잇을 수험생이 어떻게 머레이 북친과 그 당시 한국에서는 이름조차 낯설었던 호지 여사의 책을 읽었을까, 놀라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장두장 첨삭을 계속하다가 그 감동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어버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북친과 호지의 입장을 논거로 주장을 전개하고 있어기 때문이다. 그 학원의 논술강사가 모의고사를 앞두고 수업해준 내용을 천편일률적으로 옮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더 읽다 보니 생태론의 기본적인 가정, 즉 현대사회의 지속불가능성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이나 이해도 없이 SF영화 같은 감각으로 황당한 가설을 늘어놓는 답도 적지 않았다. 나중에는 몹시 짜증이 났고, 이런 답안을 작성한 학생들의 지적 수준마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첨삭을 마치고 답안지를 들고 그 학원 논술실로 가서 답안지를 작성한 학생들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이들은 그학원의 지역 분점인 강남 D학원생들로,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진학률이 제일 높은 집단이며, 대부분이 이른바 SKY대학 이상으로 진학한다는 거였다. 상당히 놀라웠다.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 논술교육의 본질을 아아챌 수 있었음에도 나는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했다.

- 55~6pp

 

 

논술고사의 파행은 극히 단순한 사실에서 연유한다. 논술고사의 도입 자체가 극히 반교육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기 대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학력고사가 폐지되고 수능시험이 도입된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내신-수능-대학별 고사가 대입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내신과 수능의 오랜 갈등, 사교육의 팽창과 공교육의 위축, 수능의 난이도 논란, 내신의 변별력 논란 속에서 상위권 대학은 대체로 수능과 내신을 기본 요건으로 하면서 논술 및 면접 고사로 변별력을 찾게 되었다. 이 속에서 손 안대고코 풀련느 격으로 다양한 학생선발 방식을 개발하지 않고 우수한 학생을 손 쉽게 독점하려는 대학의 욕심이 깔여 있고,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을 독점한 상류층과 어떻게든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보려는 차상위계층간의 쟁투와 상호타협이 깔려있다. 요컨대 논술고사는 대학입시제도를 둘러싼 제 요소, 제 세력들 간의 혈전의 역사가 잉태한 기괴한 사생아이다. 논술고사는 오직 상위 30퍼센트 이내 학생들을 줄세우기 위해(변별력을 얻기 위해) 도입된,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상위 30퍼센트 '인적 자원'의 등급을 감별해내기 위한 기제일 뿐이다.

아무리 대학 입학고사라 하지만, 논술은 중등교육에서 이루어지며 중등교육의 성과를 측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논술이 중등교육으로 담아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을 담보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변별력' 획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지금 한국 교육의 현실이 이렇다. 내신에서 수능으로, 수능에서 내신으로, 이제는 논술로, 아이들이 대학 입학을 위해 점령해야 할 각개전투의 고지는 계속 늘어난다. 이제 또 무슨 고지가 새로 솟아오를 것인가.

- 62p

  

그러나 진짜 주목해 봐야할 부분은 다음에 있다.

 

인터넷으로 논술강좌를 들은 한 아이와 대화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강사 선생님이, 토론도 그렇고 논술도 그렇고, 중간 지대는 없고 오직 찬/반 두개밖에 없으니깐, 자신의 속생각과는 다르더라도 일단 어느 한 입장을 정해서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 공격해야 하는 거라고, 어떤 주장에 대해 상대방이 '왜'라고 물었을 때 스스로 답변을 갖춰 놓지 못하면 결국 지고 마는 거라고..." 그 아이는 논술과 토론이 몹시 두렵고 공포마저 느껴지는데, 아마도 강사 선생님이 자꾸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 64p

 

위와 비슷한 경우가 내게도 있다. 예전에 이와 관련한 포스팅을 올린적이 있는데, 바로 100분토론과 관련해서다. 08년 말 미네르바가 체포되고 100분토론에서 이를 다룬 것을 인터넷으로 보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을 지나가던 다른 공익 얘가 뭐보냐고 묻길래 100분토론 본다고 말해줬다. 그러더니 그 놈이 하는 말. "누가 이겼어요?" 나는 좀 당황하긴 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야, 토론에 이기고 지는게 어딨어? 다 서로 다른 의견 주고받는 건데..."  그러나 그 놈은 또 말한다. "에이, 그래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그 놈한테 토론이라는 것은 어떤 합의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대화의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스포츠였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의 내용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란한 말빨과 공격적이고 선정적인 언사로 상대의 말문을 막아버리고 청중들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기술'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100분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은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우리사회에 부정적인 효과를 만들어낸 면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런 부정적인 면을 바탕으로 밥그릇 챙긴 대표적인 인물이 진중권이 아닌가 생각도 들고...

 

우리는 이렇게 대화와 토론 조차도 당장의 승자와 패자를 가름해야만 하는 아주 고약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

 

 

 

        *             *             *

 

 

아래도 그냥 인상깊었던 구절.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알 수 없고,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며, 생과 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의 바깥을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계'를 살면서 '저 세계'를 인식해야 한다. 한 개체에게 죽음이란 말하자면, '있음'이 어느 순간 '없음'으로 화(化)하는 것일진대, '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 없이 이 기막한 변화를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생에 집착하고 생을 사랑할 수록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나 또한 저렇게 죽어갈 것이라는 공포가, 함께 자라난다. 결국 이것들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 -- 신앙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인간은 지난 수천년간, 종교(宗敎) --으뜸가는 가르침 -- 라는 이름으로 이 신앙의 체계를 일구어왔다. 이것은 생과 사의 신비에 맞닥뜨린, 인간 존재의 가장 치열한 정신활동의 결과물이다. 놀랍게도 세상 모든 종교들은 하나같이 '저 세계'는 '이 세계'의 앞뒤에 잇닿아 있지 않다고 가르쳤다. '저 세계'는 바로 '지금, 여기'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생산과 노동, 이 모든 억조창생들과의 관계맺음이 결국 '저 세계의 전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의 열쇠는, 영원한 삶은 바로 이 현재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자기가 바로 빵이자 포도주인, 육화된 진리라고 가르쳤다. 그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항상 더불어 빵을 떼었고, 그곳이 곧 하늘나라임을 선포했다. 공자는 가장 그리운 모습을 '불빛 아래 둘러앉아 같이 밥을먹는, 대동(大同)의 사회'로 표현했다. 해월 선생은 사람이 하늘이고, 밥이 하늘이므로 사람은 곧 밥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밥 한그릇에 세상의 이치가 다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빵과 밥이 부족했던, 이른바 낮은 생산력의 징표가 아니라, 인간의 숙명임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일까?

만약 이 진리에 고개 끄덕인다면, 이제 이런 질문들이 생겨난다. 밥을 위한 노동, 밥을 위한 희생, 밥의 나눔, 거기에 깃드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우정과 사랑, 이것 외에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만약, 사람이 밥을 위해 살지 않고 휴대폰과 컴퓨터와 자동차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어떤 세상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발전된 세상'이라고 굳게 믿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는가?

- 70-1pp

 

 

이거 다음 다음 페이지에 어떤 아이가 일기처럼 쓴 글이 인용되어 실려있었는데 대충 내용이 이렇다. 산골마을에 사는 일근이라는 아이가 옆 동네 놀러갔다가 그 동네 춘근이라는 아이랑 싸웠는데 춘근이가 먼저 "야이 씨발놈, 개새끼야, 좆만새끼, 호로자석..." 뭐 이런 욕을 했댄다. 그런데 여기에 대꾸하는 일근이의 욕이라는 것이 고작(??) "야이 참나무야, 대나무야, 밤나무야, 옻나무야..." 이었단다. 이걸 보자니 또 생각난게 있었다. 얼마 전 새로 들어온 공익 얘랑 짱게를 먹으러 갔다가 맘에 안다는 공무원 흉을 같이 보고 있었는데, 그 놈이 갑자기 욕이랍시고 한다는 소리가 "다들 대가리에 뻐큐를 처박아야 돼"였다. 나는 한편으론 처음들어보는 이 프리스타일 욕에 감탄하고, 그 아이의 뛰어난 '창조력'(??)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그 아이의 눈에 일근이 같은 얘가 눈에 띄었다면 그저 밥맛없는 꺼벙이 쯤으로 여겨졌을까? 에휴~~~

 

 

 

 

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발췌 추가)

 


"(...) 여하튼 '디워' 논란이 상당히 재미있는 소재임은 분명해 보였다. '논객'이라는 신종 검투사들과 '네티즌'이라는 관객들이 펼치는 말들의 전투, 혹은 말들의 향연, 말들의 소용돌이, 의미없는 증오와 분란, 행동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별로 없는 동의와 깨달음, 나는 인터넷이 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268p)

 

"지난 2007년 3월, 택시노동자였던 허세욱 선생이 분신하고서 며칠 뒤 운명했던 날, 내가 사는 지역에서 언제나 해오던 한미FTA 반대 선전전에서 그분이 환히 웃고 있는 영정을 들고 거리에 서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 그러나 그런 애틋한 감상은 서둘러 접어야 했다. 이 자리는 절박한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열명도 되지 않는 우리 대오를 바라보았다. 그날, 허세욱 선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거리로 나오지 않았고, 대신 인터넷을 켰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것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고, 대신 방구석에서 인터넷을 하기 때문이다." (269p)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