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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04
    이반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발췌독
    구르는돌
  2. 2010/05/04
    파울루 프레이리, <페다고지> 발췌독
    구르는돌

이반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발췌독

교육기회를 평등화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바람직한 일이며, 실현 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을 의무취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학교는 근대화된 무산계급의 세계적 종교가 되고 있고 과학기술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구제해 줄 것을 약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약속이 결코 실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국가는 학교를 이용하여 전 국민을 각기 등급화된 면허장과 결합된 등급 지어진 교육과정 속에 의무로서 끌어들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지난날의 성인식의 의례나 성직자 계급을 승진시켜 나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근대국가는 자국의 교육자의 판단을 선의의 결석학생지도관이나 최직조건을 통해 국민에게 강요해 왔으며, 그것은 마치 스페인의 국왕들이 신학자들의판단을 중남미의 정복자나 종교재판을 통해 피정복민족이나 국민에게 강요했던 것과 꼭 같은 것이다.

(27쪽)

 

 

현재 학교는 교육을 위한 재정을 대부분 독점하고 있다. 학교교육에서 받는 데 드는 것보다도 비용이 들지 않는 반복연습에 의한 교수법은 이미 부유하게 되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자(의무교육을 받지 않고 홈스쿨을 할 수 있는 자)나 현지훈련을 받기 위해 나간 군대나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자만을 위한 특권이 되고 있다. 미국이 교육의 탈학교화를 서서히 진행하는 계획을 추진할  경우 처음에는 이와 같은 반복연습에 의한 훈련에 대해 배당되는 인재나 자금이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일생 중 어느 때나 수백을 헤아리는 기능 중 어느 것인가를 선출해서, 그것도 공비에 의해 배우게 된다면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조금밖에 되지 않으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나이든 사람들에게 어느 기능센터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교육구매카드(바우처제도를 말한 듯 함)를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것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출생했을 때 부여하는 교육의 허가증 또는 '교육신용카드'의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매년 주어지고 있는 보조금은 젊었을 때 쓰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교육구입권리증entitlement'을 비축해 놓고 나중에 사용할수 있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대개 학교에서보다 더 잘, 더 빨리, 더 싸게, 그리고 달갑지 않은 부작용을 더 줄이며 자기에게 편리할 때 가장 수요가 많은 기능을 습득할수 있게 될 것이다.

(32-3쪽)

 

 

기능 교수자의 성패는 학습자에게 표준적인 반응을 발전시키게 하는 환경을 정비하는 것에 달려있다. 교육의 지도자, 즉 교육자는 학습을 조성할 수 있기에 알맞은 친구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미해결 문제를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개인들을 만나게 해 준다. 기껏해야 그는 아동들에게 문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해 주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을 확실하게 해주기만 하면 아동들은 그와 같은 동기에서 같은 시간, 같은 문맥 속에서 같은 문제를 탐구하려고 하는 상대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8쪽)

 

 

가장 근본적으로 학교에 대치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현재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해 같은 관심과 그것에 관한 학습 의욕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생각할 기회를 평등하게 주는 서비스망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쪽)

 

 

나는 최근 한 학년 진급하는 것에 반대하는 항의운동을 조직한 일단의 중학생들에게 이야기를 걸어 본 일이 있었다. 그들의 슬로건은 '모방'이 아니고 '참가'였다. 그들은 이러한 일이 오히려 교육을 더 적게 받으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데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 100년 전 칼 마르크스가 아동노동을 금지하려고 했던 고타강령 중의 한 구절에 반대했던 저항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이 제안에 반대한 것은 젊은이를 위한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젊은 사람을 위한 교육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노동의 최대의 성과란 노동에서 얻는 교육이며, 또 일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타인을 교육하기 위한 이니셔티브를 갖는 기회라고 한다면, 교육적 의미에 있어 현대사회의 소외는 경제상의 소외보다도 한층 더 나쁜 것이다.

(47쪽)

 

 

학교에서 습득하여 마침내는 제도화되어 버린 가치는 수량화된 가치를 뜻한다. 학교는 인간의 상상력을 포함해서, 아니 인간 그 자체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측정될 수 잇는 세계로 젊은이들을 인도해 들어간다.

그러나 사실, 사람의 성장은 측정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련된 자기주장의 성장이며, 어떻나 척도나 교육과정을 가지고서도 측정할수 없는 것이며, 타인의 업적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습은 상상력이 풍부한 노력에 의해서만 타인과 경쟁할 수 있으며, 또 타인이 도달한 것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간 길에 도달할수 있는 것이다. 내가 존중하는 학습은 측정할수 없는 재창조를 말한다.

(74쪽)

 

 

학교는 학교교육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학교교육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신념을 결합시킨다. 그 기대는 소비자의 의견으로 나타나고 신념은 의례로 나타난다. 학교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적하물 숭배'(조상의 영혼이 배로 돌아와 백인들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신앙)가 예배의식의 한 여태로 나타난 것이다 .적하물 숭배는 나에게 1940년대의 멜라네시아군도 전체에 걸쳐 행해졌던 하나의 제식을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열광적인 신자들에게, 만약에 그들이 옷을 입고 있지 않은 맨몸에 검은 넥타이를 매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기선을 타고 나타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냉장고, 바지, 재봉틀 등을 운반해 준다고 믿게 했던 제식이었다. (...)

인간은 자신의 구세주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기술자가 되어버린 것이며, 인류가 번영하고 있는 한 진보하는 공학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과학이 가져다주는 무한한 보상이 약속된다는 것이다.

(82-4쪽)

 

 

만약 우리들이 가치 있는 지시근 특정한 사정 하에서 소비자에게 강제 해도 상관없는 상품이라는 전제에 도전하지 않으면, 사회는 점점 사악하고 그릇된 학교와 정보를 전면적으로 관리하는 자에 의해 지배당할 섯이다. 교육적 치료자는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그들의 학생에게 더 많은 약을 먹이고, 학생은 교사로부터의 압력이나 증명서를 따내기 위한 경쟁으로부터 구제되기 위해 더 많은 약을 먹게 될 것이다. 더 많은 관료들은 감히 교사로서의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학교교사의 말은 이미 광고 종사자들에 의해 원용되었다. 지금 장군이나 경찰관은 교육자를 가장해서 자신의 직업에 위엄을 주고자 한다. 학교화된 사회에서 쟁을 하는 일이나 국민을 억압하는 일도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교육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이라는 양식의 교육적인 싸움은 사람들에게 끝없는 진보라는 것이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가르치는 유일한 방법으로 더욱 정당화될 것이다.

(90쪽)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처음 봤을 때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 학교는 끊임없이 신임장을 갱신하는 자에 한해서만 방되고 있다. 학교는 근대적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몸에 익히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이동하는 데 필요하다면 고속도로를 위해 현재 부담하고 있는 정도의 연간 지출은 필수적이라는 인상을 고속도로에서 받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앞에서 고속도로는 자가용에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이 허울 좋은 공익사업임을 폭로했다 .학교도 마찬가지로 학습은 교과과정을 배운 결과라는 것을 허울 좋게 보이기 위한 가정에 입각하고 있다.

고속도로는 기동성에 대한 욕망과 필요를 자가용차의 수요로 전환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학교는 사람들이 성장하고 학습하려고 하는 자연적인 경향을 교수의 수요로 전환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성장하도록 만들어진다는 것은 제도된 상품을 구하는 일보다도 좀더 많이 자발적인 활동 의욕을 상실하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는 제도 스펙트럼 상에서 고속도로나 자가용차보다 더 우측에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도 제도 스펙트럼의 우단에 있는 총괄적 보호수용소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학교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포기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자살을 하게 만든다.

(10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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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 프레이리, <페다고지> 발췌독

타인(혹은 다른 생물)을 완전히 지배하는데서 느끼는 쾌감은 사디즘적 충동의 본질이다. 이 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사디즘의 목적은 사람을 사물로, 활력 있는 것을 무기력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통제를 받게 되면 살아 있는 것은 자유라는 삶의 한 가지 본질적 요소를 잃어버린다.

- 에리히 프롬, [인간의 마음] 中

 

사디즘적 사랑은 왜곡된 사랑이며, 삶의 사랑이 아니라 죽음의 사랑이다. 따라서 사디즘은 억압자 의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자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시체에 성적 충동을 느끼는 성 도착증)의 세계관에 해당한다. 억압자의 의식은 생명의 큰 특징인 활력과 창조력을 찾으려는 충동을 포기하고 지배를 추구하므로 결국 생명을 죽이게 된다. 게다가 억압자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과학과 기술을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작과 억제를 통해 억압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대상이자 '사물'이 된 피억압자는 오로지 억압자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의도도 가질 수 없다.

(74-5쪽)

 

 

은행 저금식 교육은 인간을 대상으로 보는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프롬이 말하는 '바이오필리'(biophily; 생명체에 대한 사랑)를 촉진하지 못하고 대신 그 대립물인 '네크로필리'를 낳는다.

(97쪽)

 

 

은행 저금식 교육관은 (아울러 모든 것을 이분화하는 이것의 경향도) 교육자의 행위를 두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 단계에서 교육자는 서재나 연구실에서 강의를 준비하면서 인식 대상을 인식한다. 둘째 단계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그 대상에 관해 설명한다. 이때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교사가 설명한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암기하는 것이다. 또한 하갱들은 어떤 인식 행위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 행위의 목적이 되는 그 대상은 교사와 학생들 양측의 비판적 성찰을 야기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교사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와 지식의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참된 지식도, 참된 문화도 실현할 수 없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102쪽)

 

 

문제제기식 교육은 억압자의 이익에 기여하지도 않고 또 기여할 수도 없다. 억압적 질서는 피억압자가 "왜?"라는 의문을 품는 것을 허용하지 낳는다. 문제제기식 교육을 제도적인 방식으로 실행하는 것은 혁명적 사회가 되어야만 가능하지만, 혁명 지도부가 그 교육 방법을 싱행하는 데반드시 완전한 권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혁명 과정에서, 나중에 참된 혁명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도에서 당장 편리하다는 이유로 지도부가 잠정적으로라도 은행 저금식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육은 처음부터 혁명적 -- 다시 말해 대화적 -- 이어야만 한다.

(110쪽)

 

 

동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할 수 없으며, 스스로 목적을 설정할 수 없고,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세계에 '침잠해' 살아가며, 전적으로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일'도 '오늘'도 없다. 그래서 동물은 탈역사적이다. 동물의 탈역사적인 삶은 '세계'속에서 완전한 의미로 나타나지 못한다. 동물에게 세계는 그 자신을 '자아'와 분리시켜 주는 '비아'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는, 역사적인 것으로, '즉자존재'에게는 단지 배경일 뿐이다. 동물에게 위험이란 성찰로 인식되는 자극이 아니라 신호로써 인지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동물에게는 의사결정 반응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동물은 자신을 헌신하지 못한다. 탈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동물은 삶을 '걸고' 행동할 수 없다. 또한 '삶을 걸지' 않기 때문에 동물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수 없으며, 삶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구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또한 동물은 자신의 '배경' 세계를 문화와 역사까지 포함하는 유의미하고 상징적인 세계로 확장할 수 없기 때문에, 삶에 의해 자신이 파괴되리라는 것도 알수 없다. 그 결과 동물은 자신을 '동물화'하기 위해 외부 세계를 동물화하지 못하며, 그렇다고 스스로 '탈동물화'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숲에서도 동물은 동물원에서처럼 '즉자존재'에 머문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처한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맞춰 행동하며, 세계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세계에 변화 작용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독보적 존재를 세계에 투입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달리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재는 역사적이다. 동물은 탈시간적이고 단조롭고 통일적인 '배경' 속에서 삶을 살아가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하고 변화시키면서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동물에게 '여기'는 단지 낯익은 서식지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 '여기'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역사적 공간도 의미한다.

(125-6쪽)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피억압자가 혁명 과정에 참여하면서 변혁 주체로서의 역할을 점점 자각해 가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절반은 자기 자신이고 절반은 억압자의 성격을 내면화한 모호한 존재로서 혁명에 참여한다면 -- 더구나 억압 상황에서 비롯된 그 모호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 내가 보기에 그들은 권력을 획득했다고 상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실존적 이중성은 분파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관료제를 정착시킴으로써 혁명을 침해하게 될 수도 있다. 피억압자가 혁명 과정에서 그러한 모호함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 그들은 혁명주의가 아니라 보복주의로서 혁명 과정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혁명을 해방의 길이 아니라 지배의 수단으로 꿈꾸게 될 것이다.

(164쪽)

 

 

민중과의 대화는 양보도 아니고, 선물도 아니며,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책략은 더더욱 아니다. 대화는 세계를 '이름짓기' 위한 사람들 간의 만남이며, 참된 인간화를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다. 가조 페트로비치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자유로운 행동이란 오직 인간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동만을 가리킨다. ... 자유의 적극적인 조건은 필연성의 한계를 알고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의식하는 것이다. ... 자유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은 개인의 자유가 더 큰 폭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유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일 수 없다.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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