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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 프레이리, <페다고지> 발췌독

타인(혹은 다른 생물)을 완전히 지배하는데서 느끼는 쾌감은 사디즘적 충동의 본질이다. 이 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사디즘의 목적은 사람을 사물로, 활력 있는 것을 무기력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통제를 받게 되면 살아 있는 것은 자유라는 삶의 한 가지 본질적 요소를 잃어버린다.

- 에리히 프롬, [인간의 마음] 中

 

사디즘적 사랑은 왜곡된 사랑이며, 삶의 사랑이 아니라 죽음의 사랑이다. 따라서 사디즘은 억압자 의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자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시체에 성적 충동을 느끼는 성 도착증)의 세계관에 해당한다. 억압자의 의식은 생명의 큰 특징인 활력과 창조력을 찾으려는 충동을 포기하고 지배를 추구하므로 결국 생명을 죽이게 된다. 게다가 억압자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과학과 기술을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작과 억제를 통해 억압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대상이자 '사물'이 된 피억압자는 오로지 억압자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의도도 가질 수 없다.

(74-5쪽)

 

 

은행 저금식 교육은 인간을 대상으로 보는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프롬이 말하는 '바이오필리'(biophily; 생명체에 대한 사랑)를 촉진하지 못하고 대신 그 대립물인 '네크로필리'를 낳는다.

(97쪽)

 

 

은행 저금식 교육관은 (아울러 모든 것을 이분화하는 이것의 경향도) 교육자의 행위를 두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 단계에서 교육자는 서재나 연구실에서 강의를 준비하면서 인식 대상을 인식한다. 둘째 단계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그 대상에 관해 설명한다. 이때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교사가 설명한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암기하는 것이다. 또한 하갱들은 어떤 인식 행위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 행위의 목적이 되는 그 대상은 교사와 학생들 양측의 비판적 성찰을 야기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교사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와 지식의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참된 지식도, 참된 문화도 실현할 수 없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102쪽)

 

 

문제제기식 교육은 억압자의 이익에 기여하지도 않고 또 기여할 수도 없다. 억압적 질서는 피억압자가 "왜?"라는 의문을 품는 것을 허용하지 낳는다. 문제제기식 교육을 제도적인 방식으로 실행하는 것은 혁명적 사회가 되어야만 가능하지만, 혁명 지도부가 그 교육 방법을 싱행하는 데반드시 완전한 권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혁명 과정에서, 나중에 참된 혁명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도에서 당장 편리하다는 이유로 지도부가 잠정적으로라도 은행 저금식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육은 처음부터 혁명적 -- 다시 말해 대화적 -- 이어야만 한다.

(110쪽)

 

 

동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할 수 없으며, 스스로 목적을 설정할 수 없고,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세계에 '침잠해' 살아가며, 전적으로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일'도 '오늘'도 없다. 그래서 동물은 탈역사적이다. 동물의 탈역사적인 삶은 '세계'속에서 완전한 의미로 나타나지 못한다. 동물에게 세계는 그 자신을 '자아'와 분리시켜 주는 '비아'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는, 역사적인 것으로, '즉자존재'에게는 단지 배경일 뿐이다. 동물에게 위험이란 성찰로 인식되는 자극이 아니라 신호로써 인지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동물에게는 의사결정 반응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동물은 자신을 헌신하지 못한다. 탈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동물은 삶을 '걸고' 행동할 수 없다. 또한 '삶을 걸지' 않기 때문에 동물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수 없으며, 삶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구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또한 동물은 자신의 '배경' 세계를 문화와 역사까지 포함하는 유의미하고 상징적인 세계로 확장할 수 없기 때문에, 삶에 의해 자신이 파괴되리라는 것도 알수 없다. 그 결과 동물은 자신을 '동물화'하기 위해 외부 세계를 동물화하지 못하며, 그렇다고 스스로 '탈동물화'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숲에서도 동물은 동물원에서처럼 '즉자존재'에 머문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처한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맞춰 행동하며, 세계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세계에 변화 작용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독보적 존재를 세계에 투입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달리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재는 역사적이다. 동물은 탈시간적이고 단조롭고 통일적인 '배경' 속에서 삶을 살아가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하고 변화시키면서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동물에게 '여기'는 단지 낯익은 서식지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 '여기'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역사적 공간도 의미한다.

(125-6쪽)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피억압자가 혁명 과정에 참여하면서 변혁 주체로서의 역할을 점점 자각해 가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절반은 자기 자신이고 절반은 억압자의 성격을 내면화한 모호한 존재로서 혁명에 참여한다면 -- 더구나 억압 상황에서 비롯된 그 모호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 내가 보기에 그들은 권력을 획득했다고 상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실존적 이중성은 분파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관료제를 정착시킴으로써 혁명을 침해하게 될 수도 있다. 피억압자가 혁명 과정에서 그러한 모호함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 그들은 혁명주의가 아니라 보복주의로서 혁명 과정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혁명을 해방의 길이 아니라 지배의 수단으로 꿈꾸게 될 것이다.

(164쪽)

 

 

민중과의 대화는 양보도 아니고, 선물도 아니며,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책략은 더더욱 아니다. 대화는 세계를 '이름짓기' 위한 사람들 간의 만남이며, 참된 인간화를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다. 가조 페트로비치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자유로운 행동이란 오직 인간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동만을 가리킨다. ... 자유의 적극적인 조건은 필연성의 한계를 알고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의식하는 것이다. ... 자유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은 개인의 자유가 더 큰 폭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유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일 수 없다.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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