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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지난 주말에 내가 소속된 단체의 회원 교육에 참석했었다. 언제나 그렇듯 교육 자체보다 뒷풀이가 더 재미나서 오랜만에 틀에 걸쳐 술을 마셨다.

 

둘째날 교육이 끝나고 뒷풀이 중에 갑자기 얼마 전 대학거부 선언을 한 김예슬씨 얘기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얘길 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동무가 자기는 김예슬의 행동이 감정적으로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물론 그의 말은 대학거부선언이 옳지 못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가 자세하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그 말은 그냥 전적으로 '감정'에 관한 것이었다. 운동권의 감정.

 

내가 추측해 보는 바에 따르면 그가 말하고 싶던 얘기는 이런게 아닐까 싶다. 그 동안 줄곧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비판해 왔던 학생운동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과 무관하게 혼자서 튀는 행동을 한 '개인플레이'는 적절치 못하다, 전체적인 운동 속에서 자신의 고민을 풀어갈 길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개인플레이로는 사실 아무런 변화도 만들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의 말이 있고나서 다른 동무들이, 이해 안될게 뭐가 있냐는 핀잔 비슷한 말도 던졌고, 어떤 분은 그런 개인적인 작은 외침을 '기존의' 운동 세력이 어떻게 답해줄지가 사실 더 중요한 문제 아니겠냐는 아주 '교과서적인' 답변도 하고 그랬다.

 

나 또한 약간의 반발성 멘트로, "나는 감정적으로는 이해된다"고 말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까 이건 뭐 하나마나한 말인 것 같다. 게다가 며칠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문제는 그저 농으로 받아치고 넘어갈 문제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강의석이 국군의날 반대 알몸시위를 했을때도 평화운동 단체들 쪽에서 비슷한 비판을 했었던 것 같다. 사실 난 그때 평화운동 단체들의 입장이 십분 이해됐다. 방금 기사를 검색해보니 강의석이 얼마전엔 '친구의 누나에게'라는 노래도 발표해 가수로 데뷔하셨다는데, 그에게 알몸시위는 그저 이런 '신선한 도전'의 하나일 뿐 이란 생각이 든다. 그의 알몸에선 어떤 진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김예슬씨의 선언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그 동무의 그런 감정은 제작년 촛불시위가 갑자기 터져나왔을때 기존 운동진영의 반응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기존 운동진영의 기획과 관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대중행동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미FTA반대를 주장하면서 늘상 우리가 해 오던 광우병 얘기를 '우리 운동권'을 빼놓고 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 등. 불과 몇년 전까지 학생운동에 몸담고 있었던 그에게는 김예슬씨의 선언도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촛불의 예에서와 같이) 김예슬씨의 선언은 그 자체로 기존 운동진영의 무능을 반영한다. 기존의 학생운동은 줄기차게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비판하고 이러저러하게 개입하려 했지만, 그 노력여하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실패했다. 반면 김예슬씨는 스스로 사회적 평균 이상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와 특권을 포기함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예슬씨가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성과 여부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따질 상황은 전혀 아니다. 그녀의 선언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긴 했지만, 어디까지 그녀도 미약한 개인일 뿐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아직 소리한번 크게 질러보지 못했지만, 우리 주변엔 수많은 제2, 제3의 김예슬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김예슬이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우리 대학의 현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대중의 목소리는 예기치 못한 지점에서 들려온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김예슬씨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가 당황했지만,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하게 대답해야 할 때다. 우리에겐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녀 스스로가 조용히 우리에게 그런 의무감을 재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선언은 강의석과 같은 한판의 쇼가 아니라, 미처 울지 못한 다른 이들을 대신해 먼저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자리를 거부한, 소위 말해, '진정성'이 느껴지는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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