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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발췌독

교육기회를 평등화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바람직한 일이며, 실현 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을 의무취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학교는 근대화된 무산계급의 세계적 종교가 되고 있고 과학기술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구제해 줄 것을 약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약속이 결코 실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국가는 학교를 이용하여 전 국민을 각기 등급화된 면허장과 결합된 등급 지어진 교육과정 속에 의무로서 끌어들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지난날의 성인식의 의례나 성직자 계급을 승진시켜 나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근대국가는 자국의 교육자의 판단을 선의의 결석학생지도관이나 최직조건을 통해 국민에게 강요해 왔으며, 그것은 마치 스페인의 국왕들이 신학자들의판단을 중남미의 정복자나 종교재판을 통해 피정복민족이나 국민에게 강요했던 것과 꼭 같은 것이다.

(27쪽)

 

 

현재 학교는 교육을 위한 재정을 대부분 독점하고 있다. 학교교육에서 받는 데 드는 것보다도 비용이 들지 않는 반복연습에 의한 교수법은 이미 부유하게 되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자(의무교육을 받지 않고 홈스쿨을 할 수 있는 자)나 현지훈련을 받기 위해 나간 군대나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자만을 위한 특권이 되고 있다. 미국이 교육의 탈학교화를 서서히 진행하는 계획을 추진할  경우 처음에는 이와 같은 반복연습에 의한 훈련에 대해 배당되는 인재나 자금이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일생 중 어느 때나 수백을 헤아리는 기능 중 어느 것인가를 선출해서, 그것도 공비에 의해 배우게 된다면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조금밖에 되지 않으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나이든 사람들에게 어느 기능센터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교육구매카드(바우처제도를 말한 듯 함)를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것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출생했을 때 부여하는 교육의 허가증 또는 '교육신용카드'의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매년 주어지고 있는 보조금은 젊었을 때 쓰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교육구입권리증entitlement'을 비축해 놓고 나중에 사용할수 있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대개 학교에서보다 더 잘, 더 빨리, 더 싸게, 그리고 달갑지 않은 부작용을 더 줄이며 자기에게 편리할 때 가장 수요가 많은 기능을 습득할수 있게 될 것이다.

(32-3쪽)

 

 

기능 교수자의 성패는 학습자에게 표준적인 반응을 발전시키게 하는 환경을 정비하는 것에 달려있다. 교육의 지도자, 즉 교육자는 학습을 조성할 수 있기에 알맞은 친구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미해결 문제를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개인들을 만나게 해 준다. 기껏해야 그는 아동들에게 문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해 주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을 확실하게 해주기만 하면 아동들은 그와 같은 동기에서 같은 시간, 같은 문맥 속에서 같은 문제를 탐구하려고 하는 상대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8쪽)

 

 

가장 근본적으로 학교에 대치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현재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해 같은 관심과 그것에 관한 학습 의욕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생각할 기회를 평등하게 주는 서비스망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쪽)

 

 

나는 최근 한 학년 진급하는 것에 반대하는 항의운동을 조직한 일단의 중학생들에게 이야기를 걸어 본 일이 있었다. 그들의 슬로건은 '모방'이 아니고 '참가'였다. 그들은 이러한 일이 오히려 교육을 더 적게 받으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데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 100년 전 칼 마르크스가 아동노동을 금지하려고 했던 고타강령 중의 한 구절에 반대했던 저항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이 제안에 반대한 것은 젊은이를 위한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젊은 사람을 위한 교육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노동의 최대의 성과란 노동에서 얻는 교육이며, 또 일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타인을 교육하기 위한 이니셔티브를 갖는 기회라고 한다면, 교육적 의미에 있어 현대사회의 소외는 경제상의 소외보다도 한층 더 나쁜 것이다.

(47쪽)

 

 

학교에서 습득하여 마침내는 제도화되어 버린 가치는 수량화된 가치를 뜻한다. 학교는 인간의 상상력을 포함해서, 아니 인간 그 자체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측정될 수 잇는 세계로 젊은이들을 인도해 들어간다.

그러나 사실, 사람의 성장은 측정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련된 자기주장의 성장이며, 어떻나 척도나 교육과정을 가지고서도 측정할수 없는 것이며, 타인의 업적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습은 상상력이 풍부한 노력에 의해서만 타인과 경쟁할 수 있으며, 또 타인이 도달한 것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간 길에 도달할수 있는 것이다. 내가 존중하는 학습은 측정할수 없는 재창조를 말한다.

(74쪽)

 

 

학교는 학교교육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학교교육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신념을 결합시킨다. 그 기대는 소비자의 의견으로 나타나고 신념은 의례로 나타난다. 학교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적하물 숭배'(조상의 영혼이 배로 돌아와 백인들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신앙)가 예배의식의 한 여태로 나타난 것이다 .적하물 숭배는 나에게 1940년대의 멜라네시아군도 전체에 걸쳐 행해졌던 하나의 제식을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열광적인 신자들에게, 만약에 그들이 옷을 입고 있지 않은 맨몸에 검은 넥타이를 매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기선을 타고 나타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냉장고, 바지, 재봉틀 등을 운반해 준다고 믿게 했던 제식이었다. (...)

인간은 자신의 구세주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기술자가 되어버린 것이며, 인류가 번영하고 있는 한 진보하는 공학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과학이 가져다주는 무한한 보상이 약속된다는 것이다.

(82-4쪽)

 

 

만약 우리들이 가치 있는 지시근 특정한 사정 하에서 소비자에게 강제 해도 상관없는 상품이라는 전제에 도전하지 않으면, 사회는 점점 사악하고 그릇된 학교와 정보를 전면적으로 관리하는 자에 의해 지배당할 섯이다. 교육적 치료자는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그들의 학생에게 더 많은 약을 먹이고, 학생은 교사로부터의 압력이나 증명서를 따내기 위한 경쟁으로부터 구제되기 위해 더 많은 약을 먹게 될 것이다. 더 많은 관료들은 감히 교사로서의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학교교사의 말은 이미 광고 종사자들에 의해 원용되었다. 지금 장군이나 경찰관은 교육자를 가장해서 자신의 직업에 위엄을 주고자 한다. 학교화된 사회에서 쟁을 하는 일이나 국민을 억압하는 일도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교육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이라는 양식의 교육적인 싸움은 사람들에게 끝없는 진보라는 것이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가르치는 유일한 방법으로 더욱 정당화될 것이다.

(90쪽)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처음 봤을 때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 학교는 끊임없이 신임장을 갱신하는 자에 한해서만 방되고 있다. 학교는 근대적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몸에 익히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이동하는 데 필요하다면 고속도로를 위해 현재 부담하고 있는 정도의 연간 지출은 필수적이라는 인상을 고속도로에서 받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앞에서 고속도로는 자가용에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이 허울 좋은 공익사업임을 폭로했다 .학교도 마찬가지로 학습은 교과과정을 배운 결과라는 것을 허울 좋게 보이기 위한 가정에 입각하고 있다.

고속도로는 기동성에 대한 욕망과 필요를 자가용차의 수요로 전환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학교는 사람들이 성장하고 학습하려고 하는 자연적인 경향을 교수의 수요로 전환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성장하도록 만들어진다는 것은 제도된 상품을 구하는 일보다도 좀더 많이 자발적인 활동 의욕을 상실하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는 제도 스펙트럼 상에서 고속도로나 자가용차보다 더 우측에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도 제도 스펙트럼의 우단에 있는 총괄적 보호수용소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학교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포기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자살을 하게 만든다.

(10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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