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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연말이라 이런저런 송년회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자리에서 여성단체 상근하는 동기도 함께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인사동에서 송년 번개 자리.

 

편한 술자리이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여성'(類로서의 여성이나 개인으로서의 여성이나)에 대해서나 '여성문제'에 대해서 정말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역시 이걸 확인한 자리. 특히 몇가지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별칭 부르기 운동

 

이건 딱히 여성문제라고 보긴 힘든 것이지만, 이야기하는 중에 운동단체 안에서 별칭부르기와 관련된 화제가 있었습니다. 전 이제까지 이런 별칭부르기가 그냥 일부 단체들 안에서 '재미있는 대안문화'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더군요. 잘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름(별칭)을 자신과 동료들이 정하는 과정도 그렇고, 호칭에 부여된 자신의 정체성을 주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더군요. 직책과 나이를 떠나서 단체 안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를 호칭 속에서 만들어간다는 점도 인상깊었습니다. 별칭부르기는 나이에 따라 존대말을 쓰는 관행을 폐지하는 것과 병행되는 데, 적극적으로 나이에 따른 위계를 폐지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노조와 같은 조직에서는 <담당--차장-부장-국장-실장-임원 > 등으로 이어지는 관료적 위계가 호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호칭 자체가 위계를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호칭에 반대하는 한 동료를 함께 놀려먹었던 우리 사무실 분위기, 깊이 반성합니다.) 이런 관료적 위계는 활동가 사이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구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권위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본과 권력과 '동등'해지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규노조 교육을 하면서 항상 위원장, 혹은 지부장을 호칭 속에서나 다른 대우에서 존대해야 사측이 노조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교육을 해왔습니다. 위원장이나 지부장은 사장, 기관장과 동급이라는 인상을 주어야한다는 것이죠. 저도 이렇게 교육을 해왔습니다만, 별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됩니다. 노조를 구성하는 동지들간에 호혜-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기존에 자본이 부여한 관계방식(위계와 복종)과 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는 않은지하는 것이죠. 사장, 기관장과 동등해지기 전에 조합원들 상호가 동등해져야하는 것은 아닌가.

 

노조가 조직적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현실적인 유용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미 자본이 부여한 위계가 판을 치고 있고 그것에 노동자들도 익숙한 상황도 있지요. 게다가 노조같은 경우에는 대중기관이라는 점에서 별칭을 쓰게 되면, 조직운영에 있어서 노조가 책임지는 대중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를 호칭이 반영하고 호칭이 다시 관계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이념에 맞게 그것을 개조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과도적이고 절충적인 방식이라도, 현재의 것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다면 방법은 없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노조 등의 대중조직이 적극적으로 운동의 하나로 수용하면서 운동조직을 바꾸어갈 수는 없을까요?  현존하는 대중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수용-적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운동조직이 적극적으로 변용하는 과정으로서 말이죠. 사회운동단체에서 시작해 대중조직으로 확산되면서 조직문화를 바꾸어왔던 이제까지의 많은 시도들을 생각해보면, 의지가 있다면 방법이 없을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동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행'이 지나는 중이라는.. ─_─;; 암튼 '유행'은 아니어야할 것같네요.)

 

(다만 나이를 전제하지 않고도 존중받을 만한 사람에게 상호 존칭을 사용하는 것이나 존대말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는 더 고민이 필요해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교사)와는 관계가 친근하더라도 존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지적 위계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존경과 존중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모두 폐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사회진보연대같은 곳에서는 "~씨"라는 존칭을 붙이는 것이 관행이기도 한데, 서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서적 관계가 증발된 너무 메마른 호칭으로 느껴집니다. 결국 나이, 직책의 위계가 아니라, 호혜-평등하고 우애로운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면서도, 그것이 관계의 무정부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되어야할 듯.)

 

그리고 이런 호칭 문제는 가족 안에서도 문제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익숙하게 쓰여지는 가족관계의 호칭들, 형수, 올케, 며느리 등등 주로 여성과 관련해서 쓰여지는 호칭에 문제가 많더군요. 예를 들어 '올케'는 '오라비의 겨집'이라는 것이 어원이고, '며느리'는 '내 아들에게 딸려 더부살이 하는 이'라는 식으로 편견이 반영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점 놀랍습니다. '집사람', '아내'와 같은 호칭이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부인'이라는 낱말도 문제가 있군요.(놀라움의 연속! 한편으로는 그럼 뭘로 칭해야하는지 오리무중.) 그래서 호칭을 변혁하는 문제, 대안을 만들어가는 문제가 가족 안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지적.

 

이런 호칭들을 바꾸자는 취지에서 여성단체가 진행하고 있는 켐페인입니다.

 

열악한 여성노동권

 

상담사례를 이야기하다가 나온 이야기들도 다소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결혼을 이유로 여성이 당연퇴직하도록 공공연하게 강요하는 회사가 많다는 겁니다. 잘 알려진 어느 유명 제약회사는 여성들이 결혼과 함께 퇴사하게 하는 데, 이런 식으로 매년 엄청난 여성이 강제로 해고된다는 것이죠. 또 다른 어느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있지만, 결혼을 이유로 하는 퇴직에 대해서 어쩌겠냐하는 반응이라고 하고 말이죠. 마치 80년대에 여성에 대해서 25세 정년 폐지 투쟁을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아직도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많은 여성들이 이런 것들을 여전히 '체념'하고 그만둔다는 것이고 싸울 엄두를 두지 못한다는 것. 상담을 했던 여성들의 경우에도 결국 사측의 회유, 압력이나 가족의 만류에 의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고, 적절하게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고 싸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죠.

 

특히 이런 종류의 상담이 노조보다는 여성단체에 가는 것같은데, 이는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신뢰가 가는 집단으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에 놀랐던 이유가, 노조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이런 일에 분노하고 뭔가 해보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소극적인 태도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을 텐데요, 여성들의 경우에는 더 나서기 힘든 조건이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나마 나서려고 해도 노조가 적절한 대안으로 생각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고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할지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한편, 제가 아래에 썼던 "우리은행, 그게 과연 '정규직화'일까"라는 포스트에서 주류여성운동들에 대해서 비판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연, 여노회 등이 우리은행의 조치가 가진 여성차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환영을 표하는 데 대해서 여성단체로서의 역할이라도 충실히하라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여성단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여성민우회같은 경우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제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성명]우리은행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박수는 시기상조) 싸잡아서 여성단체 비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되었다면 사과할 일입니다.

 

은폐와 부풀리기

 

마지막으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노조가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요, '은폐와 부풀리기'라는 평가가 있다고 합니다. 조직 내에서 발생한 문제인 경우에는 '은폐', 자본과의 관계에서나 다른 정파와 관련된 경우 '부풀리기'.

어느 경우에나 다른 조건에 대한 종속변수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이 투쟁 중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해당 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폭로'하고 '활용'하는 것도 좋게만 볼 수는 없다는 지적. 그것이 투쟁과정에서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으로 제기된다고 해도 여전히 가지는 한계가 있다는 점. 특히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은폐'하기 쉽상인 노조들이 말입니다. 이런 운동구조 속에 있는 저도 뭐라 말하기 힘든 일인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죠. 어려운 문제입니다.

 

매번의 사건들이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일반화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하나의 경향으로서, 그것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의 어떤 일을 보면서도 다시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성폭력 문제를 노조 내 정치와 연관시키면서 제기하는 일들을 보면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이번에는) 다른 또 한번조차도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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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끝나고 집에 오면서도 '정말 어려운 일들'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특히 남성의 입장에서는) 어렵기는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나가야할 문제들.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지속적으로 배워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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