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사회적 기업-일자리 논쟁에 더해서.

체게바라님의 [비정규직 만들자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에 관련된 글.

중요한 쟁점이고 토론 과정이 의미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사실 제가 빈곤, 사회복지나 이쪽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때때로 관심가지는 수준이라서 인식이 그리 구체적이지는 못합니다. 요즘 對국회투쟁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정신없네요, 잠깐 짬내서 씁니다.

체게바라님 글에 트랙백을 건 글이지만, 밑에 댓글 주신 손님분과도 토론입니다.

보육, 간병 등 주체들의 문제제기의 성격

일단, 손님께.
제가 보기에 간병(의료), 보육 등에서 영역을 분명히하라는 요구는 노조의 조직이기주의 같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현재 진행되는 자활사업 전반이 저임금-불안정노동자를 양산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철폐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조건을 인정한다는 점, 또 한편으로는 △자활사업이 노동권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개조되어야한다고 보지만 직접적인 해당분야의 운동주체가 아니기 때문에(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말을 아낄 수밖에 없는 조건 등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발언의 당사자들이 아니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제까지 논의를 진행하던 맥락에서 보면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예상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보육, 간병 등의 일자리를 저임금-불안정노동으로 고착시킬 우려가 다분한 현재의 정책에 대해서 관련주체들의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저는 관련주체들이 자기 문제를 중심으로 제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보육, 간병에 관심가질 주체, 투쟁 당사자도 없을 뿐더러 다른 직종에 대해서는 말하기 쉽지 않은 조건이 있기 때문입니다.(제가 너무 후하게 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암튼 현실의 논쟁에서는 그렇게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영역구분' 자체가 그 조직들이 주장하는 핵심은 아닐 듯하여서 말입니다.)

사회단체와 노동조합의 분리가 가지는 문제

다만 말씀하신 내용 중에서 사회단체와 노동조합의 일종의 '역할분담'에 대한 비판은 많이 동감합니다. 특히 노조 차원에서는 해당 분야의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중심으로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넘어서야한다고 봅니다.(그러나 이들 주체들은 적어도 '조합원으로 가입한', 혹은 '이미 채용된' 노동자들을 위해서만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아주 편협한 의미에서 실리주의는 넘어서고 있다고 봅니다. 역시 후한 평가인가요? ^^;) 따라서 노조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재생산영역의 전화에 대해서, 구체적인 고민을 진행할 필요도 물론 있는데, 이것은 현존하는 형태의 노동조합으로는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보다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운동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런 방식으로 조직이 전화될 필요가 있을 것같습니다.

그러나 보육교사회가 보육노조로 전화하면서 가졌던 문제의식을 저는 단순히 기각할 수만은 없다고 보는데, (제 나름대로 거칠게 요약하면) '당사자들의 현실에 노동조건 개선을 병행하지 않고서는 보육 자체를 전화시키는 보육운동도 불가능하다'는, 기존의 보육교사회운동에 대한 평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육을 쟁점으로 하는 일반적인 의미에 '사회운동'을 진행하기에는 보육교사회라는 형태가 어쩌면 더 유효할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노동조합 형태로 전화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을 단순히 퇴행이라고 말할 수 없는 조건이 또한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각각의 운동형태/양식이 가지는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냐하는 것이겠죠.
** 여기서 사회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구별이라는 것은 (노동자운동도 사회운동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매우 부적절하고 맘에 안드는 용법이지만, 편의상 그냥 사용하겠습니다.
 


사회운동의 실천적 무능력에 대한 지적도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역할분담'이 아니라, 운동의 방식에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사회운동-노동자운동 주체들이 '융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고 각자의 운동이 가진 고유성이 소거될 수는 없겠지만요.)  다만 재생산노동의 사회-국가 책임에 관해서는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쟁점이 있겠죠. 저는 국가 책임과 동시에 노동자-민중통제를 제기해야한다고 보는데, 이 '국가책임'이라는 것은 저도 여전히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공공성이라는 쟁점

이것은 '사회공공성' 담론에 대한 쟁점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사회공공성'이라는 주장이 국가책임만 주장해서는 코포라티즘의 다른 판본이 되기 쉽상일 것이라는 점에서 노동자-민중통제를 적극적으로 요구해야한다고 봅니다. (이것도 한계적일 수는 있을 것이라 고민입니다.--이 고민이 이 논쟁에 가장 심층의 쟁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 다만, 현실에서는 예를 들어 △ 지자체의 사회복지운영위에 대한 개입, △ 각 사회복지기관('시설'들만이 아니라)에 대한 지역 노동자-빈민의 실질적 통제 등등이 제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역시 제 전문분야가 아니라 ^^;;)

여기서 체게바라님의 문제제기와도 연결되는데요,
코포라티즘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빈곤화가 심각하게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정세 하에서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기초생존권 보장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것이 저도 고민입니다.

베네수엘라의 사례 ; 민중연합기관(?)

다만, 시사적인 사례로 베네수엘라 사례를 볼 수 있을 것같습니다.

관련된 링크들 (앞의 세개는 NeoScrum님의 블로그, 뒤의 한개는 참세상 기사)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레닌인가?
▷ 바리오 아덴뜨로에 가다
▷ 라 베가 맛보기 - 3
▷ [손호철의 남미이야기](3) - 민중참여모델     
 대안수퍼마켓, 대안학교, 대안방송국... 대중 참여가 혁명 동력
 “혁명을 만드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민중이다”


글 들은 보시면 되겠는데, 핵심적으로는 활동가들이 지역공동체에 들어가서 의료, 교육, 언론(방송), 생산과 유통까지 사업을 하는데, 이런 활동들이 빈곤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생존을 가능하도록 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의식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사업을 하는 지역적인 민중기관을 창설하는 것이죠. 그 결과로 이러한 사업에 참여하는 주민들의 공동체가 강화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급진화하고 주체화된다는 이야기죠.

차베스 이후에는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혁명은 이들 공동체의 민중들이 스스로 수행한다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업단위와 공동체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운영되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죠.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다고 해서 운영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런 점에서 저는 이런 모델을 손호철 교수가 '민중참여모델'이라고 보는 것에는 비판적입니다. 민중이 주체가 되는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운동의 지향을 더 적합하게 설명할 수 있지요, 참여는 이미 남이 갈아놓은 판에 적극적으로 들어가준다는 의미니까말이죠. 게다가 '참여정부'와 '참여연대'까지 연상되는군요.)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으로 지역의 反빈곤운동

베네수엘라의 방식이 남한에서 그대로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방향에 있어서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에서 빈곤층의 생존권을 확보하는 사회운동의 방식이란 것이 단지 '생계'를 보완하는 방식이 아니라, 진정한 '자활'이기 위해서는 단어의 의미( "스스로 살아감")이 강한 의미에서 적용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정부가 지원하는 저임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고통의 원인을 인식하고 투쟁하는 과정으로 나가야하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생존권을 쟁취"해야할 것 아닙니까. 그 빈곤의 원인이 신자유주의일진데 그것을 제거하는 운동없이 빈곤이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당장은 재원이 마련되기 때문에 이걸 받아서 사업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 유리하게 판단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건 너무 실용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그런 돈을 공짜로 푸는 이유는 없고, 사업적 목적하에 이루어지는 데, 그것은 이미 누차 지적된 대로 노동연계복지의 고유한 문제점 외에도 이러한 분야에 사적 자본이 진출할 수 있는 시장공간을 창출하고, 인구증가율둔화 속에서 장기적으로 여성노동력을 노동시장에 진출시키는 등의 구체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개별 행위자 입장에서는 선의로 사회적 기업을 구성하고 운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수준에서는 정부가 목적하는 사업계획을 대리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선한 결과까지 담보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물론 자활현장 현실의 어려움을 말씀하신다면 제가 할 말은 별로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자활기관을 만들고 운영해온 운동들이 의미없다는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현실의 프로그램이 이렇게 구성되어야한다는 구체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역에서 빈곤층을 조직하는 운동이 이렇게 되어야하지 않겠냐는 추상적인 의견일 뿐이니까 말이죠. 그러나 그 '방향'이 어쩌면 결정적일 수도 있지 않냐고 보는 입장인 거죠.

(다만 이런 방향--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의 조직화) 관점--을 전제한다면 어쩌면 학교 청소용역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또다른 의미에서 '실용적으로' 의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청소 노동자들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고통받는 비정규직노동자로 자신을 인식하도록 조직하고--실제로 그런 노동자가 되는 것이니까--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주체로 조직하려는 노력을 병행한다면 말이죠. 그러나 이 경우에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조직이 장기적으로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요구를 정부를 상대로 전개해야한다는 어려움이 발생할 것입니다. 또 사회적 기업이라는 조직형태가 이러한 '운동'을 할 수 있는 지역차원의 사회운동 기관이 될 수 있을지 확신하기도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그것이 '기업'보다는 '조합'적인 형태라고 하더라도 조합원의 배타적 이해를 위한 것이라면 기업과 별로 다를 바 없을 것같습니다. 다만 사회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연합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조직이라면 다른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겠죠.)

차이와 토론

그렇다고 제가 '정책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정책담당자'도 아닐 뿐더러 지역단위의 비정규직 조직사업 담당자거든요.) 다만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다른 분들과 다를 수는 있겠죠. 주로 제가 언급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청소용역노동자들, 시설관리노동자들, 민간위탁 환경미화원들, 지자체 상용직, 일용직, 이런 분들이 제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서도 강조점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만나는 사람, 관심의 차이로 인한 인식 '차이' 이상으로 토론할 거리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쓰는 건데요, 핵심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정세가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있다는 시대인식, 이에 반대하는 노동자운동-사회운동이 대안일 것이라는 점, 이런 원칙들에 입각해서 토론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을 공유한다면 각각의 상황에서 공통의 인식도 상호교통 속에서 만들어 갈 수 있겠죠.


** 삼성 이야기는 자본측이 이 판에 그런 식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맥락에서 말한 것이니까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