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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노동운동의 위기'가 몇가지 사건을 통해서 가시화되면서 올해 상반기에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것이 상층조직들의 위기가 아니라 현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은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하는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이다. 정규직 노동자들과 사내하청 방식으로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 좌파적인 집행부라고 하는 이상욱 집행부마저도 애초의 기대에 한참 미달하는 합의안을 비정규직을 위한 것이라고 들고 나왔다.
 
여기서 당연해보이기 때문에 주목하지 않았던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왜 남한 노동운동의 핵심부대는 자동차 공장들인가? 그리고 위기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이를 통한 노동자운동의 분할을 통해 시작되는가?
 

이 책을 읽는 것이 놀라운 독서경험인 것은, 이렇게 남한의 노동운동사의 특수한 역사를 세계체계의 변화와 함께하는 세계 노동자운동의 일반적 경향 속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의 힘>은 노동운동을 하고 있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보아야할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제시하는 수많은 쟁점을 모두 언급하거나 소개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몇가지를 언급하자.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20세기의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예를 통해서 노동자운동의 세계적 동학을 이해할 수 있다. 실버는 "자본이 가는 곳에 갈등이 따라간다"고 말한다. 생산의 재배치에 따라서 노동자 집단이 형성되고 투쟁이 시작된다. 실제로 2세기, 세계의 전투적인 노동자 투쟁은 자동차 공업의 이동에 따라서 미국->서유럽->남유럽->제3세계(남아공, 브라질, 한국)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순서는 중국이 될 것이며, 중국에서 일어날 거대한 노동소요는 노동정치만이 아니라 중국과 세계의 운명에도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노동자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정치적 변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노동소요가 민족국가의 정치변동에 주는 영향은 새로운 투쟁의 주체들이 해당 국가의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지 통합되어 있는지도 영향을 준다. 그리고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투쟁이 집중되는 지역이 정치 중심지와 가까운지 여부도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이에 따라 북유럽과 남유럽, 남한과 브라질의 경우를 비교할 수 있다. 우연성에 기반한 물질성의 요소들을 사고해야한다.)
 
노동자들의 작업장 교섭력은 포드주의 생산 덕분에, 그리고 이후에 도입된 JIT(Just In Time:적시생산시스템) 때문에 오히려 증대했다.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라인을 멈출 수 있었다. 자본의 대응은 생산을 공간적으로 이동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이동에 따라 갈등도 이동했으며 기술혁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일본의 경우다. 이 경우는 완성차 핵심 노동자들에 대한 종신고용의 보장과 광범위한 하청계열화에 의해서 갈등이 예방된다.(이중적 린생산) 다른 국가에서도 이런 방식은 모방되었지만 핵심노동자들에 대한 '종신고용' 보장없이는 효과가 없었다.(인색한 린생산) 이 전략의 성공은 하청 체계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는데, 일본 외에는 이런 조건을 창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60년대까지는 농촌지역 노동예비군과 주로 상근남성노동자들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여성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별다른 저항없이 하청체계를 관리했고, 그 이후에는 이 체계를 동남아시아로 확대했다.)
 
저자는 따라서 세계자동차산업의 주요추세가 이중적 린생산으로 나가는 한, 미래에 발생할 자동차 노동자들의 주요한 소요는 하청체계의 하층 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이들의 강력한 불만이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과 병행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 상층 노동자들은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갖고 있지만 불만은 훨씬 작은 듯하고 또한 불만은 높지만 구조적 힘은 적은 하층 노동자들과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격리되어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분할은 중심-주변의 지리적 분할에 조응하고 종족성, 거주지, 시민권의 차이와 중첩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세계노동정치에도 중요한 함의를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남한의 노동자운동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일정한 양보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비타협적 탄압'이라는 현대자동차 사측의 입장은 (불완전하더라도) 이중적 린생산을 지향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작업장 교섭력의 문제나, 노동자들이 가지는 불만에 대한 진단도 일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한 노동자운동의 약화는 단지 자동차 산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의 주력인 자동차산업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약화는 전체 노동자운동에 파급된다. 생산의 (중국으로의) 공간적 이동을 통한 '산업공동화'와 함께 벌어지는 '정규직-비정규직 분할'은 이렇게 해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이런 난점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면,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들 또한 우리만의 것은 아닐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럼 21세기에도 자동차 산업이 계속 노동소요를 몰고 다니는 선도산업일 것인가? 여전히 노동소요를 동반하겠지만 20세기와 같은 파금력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소요를 피해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부문간에도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새로운 선도산업'을 검토한다. 반도체산업, 운수산업 등이다. 이러한 비교를 위해서는 자동차 산업 이전, 즉 19세기의 선도산업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바로 섬유산업인데, 여기서 저자는 중요한 비교지점을 보여준다. 자동차산업만큼 작업장 교섭력을 갖지 못했던 섬유노동자들은 (비록 자동차노동자들처럼 실질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또한 그 때문에) 강력한 전투성을 보여주었다. 부족한 작업장 교섭력을 '연합적 힘'으로 극복해야했기 때문에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연대성을 보여주었다. 많지는 않지만, 이들이 성공한 경우도 민족해방 운동과 결합하는 등을 통해 연합적 힘을 배가시킬 때 가능했다.
 
반도체 산업과 같이 21세기에 선도산업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20세기의 자동차 산업보다는 19세기의 섬유산업과 유사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그렇다면 새롭게 형성되는 노동자운동은 지역을 근간으로 연합적 힘을 확보할 수 있어야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한편, 남한에서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전투적인 투쟁이 가지는 의미를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사고해볼 수 있다.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전투적인 투쟁을 시작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이 구축한 연합적 힘은 80년대 자동차노동자들의 강력한 구조적 힘과 결합하여 폭발적인 투쟁과 성과를 만들어냈다.)
 
자동차 산업 이후, 새로운 부문의 노동자운동에서 주목할 업종은 운수부문과 도시의 시설관리부문이다. (우연찮게 이 두 부문 모두가 현재 민주노총 안에서는 공공연맹이 포괄하고 있는 업종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생산의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운수/물류의 중요성을 증대시킨다. 이 부문은 지역적 재배치를 의식적으로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가진다. 이러한 강력한 구조적 힘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문제는 이 운동이 전체 노동자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가 된다.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까지 대변하면서 노동자운동을 진전시킬 것인가 혹은 적절한 양보에 타협할 것인가는 이들이 가진 힘에 비추어 중요한 운동적 쟁점이다. 현실에서는 당장 진행되는 운수산업부문의 조직적 재편과 관련된 쟁점이 연관된다. 운수부문의 노동자만 별도로 뭉치자는 입장과 보다 광범위한 공공부문으로 뭉치자는 입장이 구체적인 쟁점으로 형성되고 있는데, 운수/물류 부문 노동자들이 가지는 구조적 힘의 향방은 노동정치 전반과 관련하여 중요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남한의 국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운수의 전략적 중요성을 '동북아 중심국가 - 동북아 물류허브'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한편, 남한의 민족주의적 좌파는 민족적 발전전략 속에서 남북철도 연결을 통한 TKR-TSR 구축이라는 전망을 제시하는 데, 이는 남한의 국가가 가지는 발전 전략과 일치한다. '민주노동자전국회의'의 일부는 '통일운동의 활성화에는 운수산별노조가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가지는 데 이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는 국가에 대한 타협성, 코포라티즘 성향을 생각한다면 운수/물류 부문이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은 노동자운동이 아닌 국가에 활용될 우려가 크다.)
 
한편, 도시의 시설관리노동자들도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차지한다. 도시가 쉽게 이동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도 구조적 힘을 가진다. 특히 금융화된 '세계도시'에서 그렇다.(관련해서는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사스키아 사센  참고) 그러나 이는 충분히 지역에 근거한 연합적 힘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LA에서 SEIU가 진행했던 "건물관리인을 위한 정의" 켐페인-조직화 전략은 이들의 힘을 보여준다.(영화 '빵과 장미'에 생생하게 그려졌던 그 운동이다.) 
 
남한에서도 특히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주력은 이러한 도시의 시설관리노동자들로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연맹의 조합원 10만명 중 비정규직 조합원이 약 1만명 정도 된다고 추정할 때, 이 중에서 최소한 7500명 이상은 지방자치단체나 공기업 또는 민간기업에 고용된 공공시설환경관리분야의 노동자들이다.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내 환경미화원, 도로보수원 등과 시설관리노조 조합원. 민주노총에 직가입된 각 지역일반노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한편, 이런 상황은 이 부문의 노동자들이 지역에 강하게 기반한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아직 부족하지만 지역일반노조나 지역공공서비스노조의 사례가 그것을 예증하고 있기도 하다.
 
실버는 책의 끝 부분에서 "이 책에서 수행한 분석은 전후의 세계적인 사회협약들이 노동에게도 자본에게도 안정된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특히 단순히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노동운동의 우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협약이 해결책이 아니며, 좌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여기에 현재의 논쟁 구도 속에서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구성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은 물론, 운동의 노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가는 시도 모두를 요구한다. (백승욱 선생은 옮긴이 후기에서, 지역적-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연합적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복수의 보편성에 대한 사유와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책의 어느 부분을 읽는다고 해도, 이 책은 다른 세계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어제 오늘 참세상 뉴스,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노동기사를 보면서 드는 의문, 바로 지금 방금 누군가와 논쟁한 운동의 쟁점과 연결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노동운동의 조건이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저자들이 그 보편성을 탁월하게 추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남한 노동운동의 전투성에 대한 과장된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처한 물질적 조건을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하게 '보편적인' 구절 중 하나인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자. 이 말은 당위적이거나 예의 하는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소요가 세계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한 분석에 입각한, 구체적인 진술이다.
 
"...따라서 21세기 초에 세계의 노동자들이 마주한 궁극적인 도전은 단순히 노동자들 자신의 착취와 배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윤을 만인의 생계에 종속시키는 국제체제를 향해 나아가는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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