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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8/16
    [독서일기]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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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일기] 경제저격수의 고백
    겨울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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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에 대하여] 걸으면서 생각하기와 뛰고나서 생각하기
    겨울철쭉

[독서일기]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최근에 만난 인터넷 포탈 사이트에서 미디어 관련된 업무를 하는 한 선배에게서 흥미롭지만 섬뜩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젊은 세대에 극우적 정서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단지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정치세력이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무능은 이들을 동원하지 못하고, 따라서 파편적이고 분산되어 있지만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능한' 우파세력이 등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파시즘을 그 지도자들이나 이론가들의 담론이 아니라, 실재 역사 속에서 전개된 사실을 중심으로 고찰한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권력장악'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관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심적으로는 민족의 갱생, 혁신, 정화와 같은 목표가 선언되었지만, 세부적으로는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서 편의적인 공약이 남발되었다.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법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어법이 달랐다.
 
역사적 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저자는 파시즘을 이렇게 요약한다.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양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된다.
 
파시스트들의 주장에 대한 검토보다 역사적 과정에 대한 검토를 우선한 덕분에 우리는 파시즘이 도래한/할 수 있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저자는 그것을 (1) 파시즘의 탄생 (2) 정치제도 안에 뿌리내리기 (3) 권력장악 (4) 권력행사 (5) 파시즘 정권이 급진화나 정상화 중 한가지를 선택하게 되는 장기지속 기간으로 시기구분한다. 저자는 특히 파시즘이 하나의 대중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열정적으로 대중을 동원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급진화'가 필연적이었으며 브레이크없는 폭주기관차가 될 운명이었다고 암시한다.
 
저자의 단계구분을 통해 우리는 실용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데(다소 실용주의가 과한 것이 문제다. 미국적 특성인가?) 어떤 정체에서 파시즘의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이 2위의 대선득표를 한 프랑스의 경우 (2)의 과정에 있다고 볼수 있다. 이 경우 파시스트들은 제도정치 안에 안착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급진적인 담론을 완화한다.
 
앞서 우리나라의 최근 분위기를 언급했지만, 이들은 어떤 조건에서는 하나의 운동으로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는 있다는 점에서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기존의 보수세력이 연합해야하고 제도정치에 안착해야한다. 물론 그러한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 다음은 정세의 문제가 될 것이다.
 
각 과정을 통해서 성공한 파시스트들만이 권력을 잡았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그렇다. 다른 나라의 경우 운동으로서는 존재했지만 유연한 전술을 구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제도정치에 진입하지 못했거나 제도정치에 진입했다라도 이런저런 정세적 요인 때문에 세력을 확대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저자는 파시즘의 득세와 집권은 객관적 조건만이 아니라 정세적인 요인과 함께 해당 인민들의 판단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몇가지 논쟁점이 발생한다. 정치에서 구조와 주체의 문제. 저자는 이 문제를 계속 양자택일의 문제로 인식한다. (경향적으로 주체의 문제로 나간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중이 특정한 판단을 하게 되는 정세는 단지 주체의 의지이거나 우연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저자는 파시즘을 피하기 위한 특정한 정책의 실현가능성을 믿는 것같은데, 그런 점에서도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의 "구조적 인과성, 과잉결정 그리고 적대"를 인용해보자.
우선 과잉결정된 그리고 과소결정된 인과성 개념은 즉각 '구조'와 '정세'의 전통적인 대당을 제거한다. ; 더 낫게 말한다면 그것은 이 두 용어가 상호적임을 제안한다. 그것은 정세를 구조의 한 짧은 국면으로, 또는 구조의 연속적인 단계들간의 이행으로 더 이상 보지 않는데, 구조의 실재성은 정세들의 예측불가능한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정세는 단지 구조의 특정한 전위로 결정된다.
 
저자는 물질적 조건에 우선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계속 유보한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득세할 수 있었던 정세적인 요인은 물질적인 것, 특히 경제적인 요인과 계급투젱의 지형에 있었다.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 어떻게 정치를 과잉결정하는가, 그것이 특정한 정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저자의 유보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 자체를 그것을 충실히 서술하고 있다.
 
또 한편, 저자는 파시즘을 매우 협소한 의미로 사용하며, 프랑코의 스페인이나 2차 대전 이전의 일본까지도 파시즘으로 보기에는 힘들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것들이 열정적인 대중동원형 운동에서 기원하고 그것을 계속 수반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이런 점에서 제3세계의 개발형 독재들을 파시즘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발적 대중운동의 형태를 띄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중을 파시즘과 같은 논리에 따라서 동원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면 파시즘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지배계급이 위로부터 대중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민족적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목표, 외부에 대한 공포를 조직하고 그것을 탄압하는 등 파시즘의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했다.(일본을 제외한 것은 지나치게 서구중심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남한의 군사독재의 경우에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고유한 정치적 동원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이지는 않을지라도 파시즘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파시즘이라는 것이 여러 정세적인 조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저자의 지적처럼 다른 정세에서는 심지어 다른 이름으로, 다른 의식을 가지고 등장할 수 있다. 최근의 유럽에서 처럼 유태인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공격하면서 등장할 수 있다. 밀로세비치처럼 반대당을 노골적으로 금지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의 위협은 현재적이다.
 
특히, 세계화와 경제위기 과정에서 특정한 국가가 더 이상 계급투쟁을 관리하지 못하고 붕괴했을 때가 문제가 된다. (마치 1919년 이후의 이탈리아처럼)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해 좌파적인 대안이 부재할 경우 파시즘은 손쉬운 대안이 된다.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는 가까운 사례이다. 이런 유형의 새로운 '파시스트'들은 세계화의 파괴적인 효과로서 절멸적인 인종갈등 전쟁을 확대하고 이 속에서 또한 확대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시즘은 '대중들에 대한/대중의 공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저자는 파시즘의 대중을 공포를 통해 지배했다고 말한다.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 국가의 무능이라는 공포(파시스트들은 거리의 노골적인 폭력을 통해 이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계급투쟁의 공포, 내부의 적에 대한 공포, 파시스트 자신들에 대한 공포까지. 더구나 보수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과 연합하는 과정에서는 지배자들의 '대중에 대한 공포'가 작동했다는 점, 대중은 자신들의 다른 모습은 파시스트 대중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는 점 등을 유념해보아야한다. 이러한 대중들에 대한/대중의 공포에 대해서는 역시 발리바르의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 반오웰 : 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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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전에 파시즘과 관련된 책의 독서일기를 쓴 적이 있다.
 
 
'우리안의 파시즘' 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파시즘의 역사적인 형태와 정세에 주목해야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점에서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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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경제저격수의 고백


경제 저격수의 고백
존 퍼킨스 지음, 김현정 옮김 / 황금가지
 
표지에 '세계경제의 뒷무대에서 미국이 벌여온 은밀한 전쟁의 기록'라고 쓰여있다.
 
미국의 정부와 정보기관이 제3세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면서 이들 나라를 외채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한 매우 의도적인 작전을 전개했다는 것이 중심내용이다. 저자가 직접 한 일이라고 하는데, 현재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봐서는 다소간의 과장은 몰라도 믿을만한 이야기같다.

대부자본이 남아돌던 발전주의의 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외채 대부를 제3세계에 유리한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잡행했다는 점에서 놀랍다. 전형적인 방식은 이런 것이다. 외채 대부를 제안하고, 이를 '경제발전을 위한' 에너지, 도로 등에 투자하도록 한다. 핵심은 이때 예상되는 에너지, 도로 등의 필요치를 최대한 높게 계산해서 과잉대부를 받도록 하고, 갚을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든다. 이를 약점으로 잡고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등등.
 
이런 종류의 개입을 정보기관이 구체적으로 개입하면서 창안했다는 점(다소 불확실하게 서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놀라운 일이다.
 
이런 방식은 현재도 큰 골격에서는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의 컨설팅 회사가 더욱 번창하고 있으며, 외채 대부가 IMF, IBRD 등을 매개로 더욱 정치화되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최근 공공연맹과 공무원노조 등이 주빌리사우스와 함께 진행한 "물, 에너지 사유화 국제워크샵"(물·에너지 사유화 반대 아시아 노동자·사회운동 선언)를 통해서 들어본 제3세계의 사례는 아주 똑같은 내용이었다. 에너지, 물에 대한 투자를 이를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채를 통해서 하도록 하고, 이후에 사유화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아래 기사를 더 참고할 것.
이를 통해 외채 문제와 금융세계화, 기업인수, 공공성 파괴, 인권침해 등등과 연결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런 측면 외에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구절은 음모이론의 기원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다. 이데올로기론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지적이다.
 
음모론은,
 
1. 현상에 원인에 대한 대중의 무지가 상상을 만들어낸다는점

2. 혹은 진실을 알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 물질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없는 이들(프리메이슨, 유태인 집단)의 음모로 몰아간다는 점

경제저격수의 고백 356쪽
"제국은 기업정치를 지탱하는 대형은행, 기업, 정부가 만든 것이지 음모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이 기업정치를 만들어냈으며 기업정치가 바로 미국인 자신들이다. 그래서 기업정치에 맞서 싸우지 못한다. 그들은 대개 이런 은행, 기업, 정부에서 일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에 기업정치를 직시하기보다 어둠속에 숨어 있는 음모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한다. 그동안 그들을 지탱해온 기업정치를 배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두번째가 중요하다.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무의식 속에서 물질적 이해 때문에 진실을 거부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대중의 상상을 왜곡된 방향으로 고착한다는 것. 따라서 현대에 음모이론이 만연한 원인을 생각할 수 있으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의 다른 측면으로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물질적 이해때문에 현실적 관계에 대해서 상상적 관념, 이데올로기를 갖는다. 비극은 미국의 시민들의 경우(노동자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물질적 이해를 공유한다(혹은 그렇게 믿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어디에서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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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대하여] 걸으면서 생각하기와 뛰고나서 생각하기

오랜만에 만난 윤병우 선배가 말했다.
 
"천천히 걸으면 걸으면서 생각할 수 있는데 뛰면 생각할 수 없고 그뒤에 숨을 고르기에 급급하다"
는 선배의 말.
 
책을 읽을 때도 급하게 읽으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생각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할 수 있다. (그냥 책을 하나씩 '떼는'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려러고, 권수를 늘이려고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빨리 더 많이 라는 소비자본주의의 덕목과도 유사하다.
 
오히려 중요한 책, 몇번이고 읽어야할 책을 그렇게 읽고, 찬찬히 보아야한다. 보면서 자기 머리로 책의 내용을 생각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자신의 것으로 되씹어 소화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뛰듯이 읽어서는 모두 잊혀질 뿐이다.

** 독서일기를 다시 쓰는 것이 이런 점에서 필요하다. 속도보다 제대로된 책을 꼭 제대로 읽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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