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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5/08/29

광주전남공공서비스노조 투쟁승리 공공연맹 결의대회

※ 광주전남공공서비스노조 동지들이 쓴 지난 24일 투쟁 기사입니다. 정말 이날 비 엄청오더군요. (집회가 끝나니까 비도 그침 -.-;) 이 투쟁도 얼마전에 올린 경북 칠곡 환경미화원(대구경북공공서비스노조 http://blog.jinbo.net/rudnf/?cid=4&pid=13)들의 투쟁과 같이 공공서비스의 민간위탁, 외주용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는 전국학생연대회의 동지들과 간담회도 진행했는데 유익하고 뜻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올리죠.

 

2005년 8월 24일 수요일, 광주전남공공서비스노조는 하루 전일파업투쟁을 실시하였다. 아침 일찍 시청 앞에 모여 광주지역일반노조 `희망원` 동지들과 함께하며 아침출근투쟁을 시작으로, 도청과 서구청으로 이어지는 집회와 도보행진을 실시하였다.
 
어제에 이어 우리는 시청 앞 거리에서 피켓과 프랑을 펼쳐들고 시청 앞을 지나는 광주시민들을 향해 우리들의 요구와 주장을 알렸고, 선전물을 통한 거리 선전전을 했다. 시청 앞 아침출근투쟁을 마치고, 조합원들 모두 연맹 사무실로 들어가 함께 프랑과 피켓을 만들면서 이후에 있을 집회와 선전전을 준비하였다.
 
오후 2시, 노동조합 투쟁승리를 위한 공공연맹 결의대회를 위해 상무관 앞엔 공공연맹 소속의 사회보험노조, 광주시립예술단지부, 광주지역일반노조 전남케이블방송tv, 민주노총, 광주전남현장연대 등 많은 동지들이 함께하였다.
 
상무관 앞에 모인 조합원들과 연대단위 동지들은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옷을 입고 박준영도지사와 도청의 말도 안돼는 행정을 규탄하는 항의집회를 가졌다.
 
도청 앞 항의집회를 마치고 도청에서부터 서구청까지 가두 행진을 하면서 길거리 선전전을 펼쳤다. 도청을 지나 금남로를 거쳐 양동시장에서 우리는 멀리서 연대하러 온 전국학생연대회의 학생동지들과 합류하여 서구청까지 함께 행진하면서 길거리 선전전을 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빗속에서도 동지들의 투쟁의지는 수그러들 줄 몰랐으며, 서구청 앞에 도착한 후에도 수진환경 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서구청 항의집회가 이어졌다.
 
서구청 마무리 집회에선 전국학생연대회의 학생동지들의 연대사와 공연이 이어졌고, <민간위탁/ 환경오염/ 용역전환/ 시설비리/ 산업재해/ 노동탄압/ 공공성 파괴/ 비정규직/ 여성차별> 등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와 같은 글귀가 적힌 붉은프랑을 모두 함께 찢으면서 전일파업투쟁을 마무리 하였다.
 
끝으로,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공공연맹 결의대회에 참가한 동지들은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할 것을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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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신민노회 수련회에서 몇가지 메모

지난 주말에 있었던 체신민주노동자회 수련회.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서 몇가지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들이 있다.
 
 
* 김진숙 지도위원 강의 중, 다 듣지는 못하고 군데군데만 들었지만 몇가지 메모
 
o 문화적 행동과 물질적 조건
남성 노동자들이 집에서 말이 없는 이유는 그들의 노동의 성격이 단순노동으로서 어떤 의미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의 공장에서 하루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노동자들의 문화적 행동들과 그들의 작업장, 노동의 물질적 성격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o 비정규노동자운동의 목표는 무엇인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목표가 노동해방이 아니라 오직 정규직화. 비정규직은 정규직화에 몰입하는데, 그 자체가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전망을 정치적으로 것으로까지 밝혀가지 못하고 정규직화에 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렇게 되면 사측의 선별적인 정규직화 시도에 곧장 조직이 무너지는 등 단결이 약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노동해방 이념의 중요성은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에도 마찬가지로 강조되어야한다는 점. 그렇다면 정규직화 요구에 몰입하고 정작 정규직화 된 이후에는 운동적 전망을 상실하는 경우들을 볼 때, 또 일부가 정규직화된다고 해서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기 난망하다는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에 있어서도 정규직화 요구를 넘어서는 요구를 정리해야한다.
 
o 한일 FTA와 노무현정권의 노사관계 로드맵의 관련성.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한일 FTA에서 일본의 요구사항과 노사관계로드맵의 내용이 같다는 지적이다. 몇몇 자료를 찾아보니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그 내용적 유사성에 대한 내용들이 있다. 노사관계로드맵이 추진되는 정세적 이유중에 중요한 요인이 세계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들 투쟁을 연결해야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노동기본권 쟁취투쟁과 세계화 반대투쟁을 단락시키고 대중운동을 급진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 그밖의 발제, 대화들에서.
 
o 어용세력의 전문가주의
어용세력은 교섭의 전문가주의를 내세우면서 조합원을 대상화시키고 권력을 유지한다. 이 전문가주의는 관료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관료적 권력을 유지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지식독점을 전제하는 데 지식이 권력이 된다. 이러한 지식독점을 통한 권력 독점은 부르조아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해서 행사하는 것인데 노조 조직 안에서 노조관료들이 이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주의는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민주노조 운동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경계해야한다. 지식의 보편적 확산, 민주화가 중요한 과제이다. 지적노동, 육체노동의 분할을 철폐하는 것은 노동자 조직 안에서부터 진행되어야한다.
 
o 허구적인 자격증제도
집배원 채용에 워드자격증 등 정보통신 관련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집배원 업무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수 없는 이들 자격증 강요는 자격제도라는 것이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 점은 '학교와 계급재생산 '의 저자가 지적한 바 있다. 노동자계급 자녀들은 이를 '간파'하기 때문에 자격증을 무용한 것으로 취급한다는 언급과 함께 말이다. http://blog.jinbo.net/rudnf/?cid=2&pid=10)
 
o 현장조직의 임무
현장 조직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집권인가 현장의 민주화인가? 그것이 대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어떤 시기에는 선택의 문제로 드러날 때가 많다. 많은 대공장노조에서 집권을 통한 민주화라는 프로젝트는 현장조직을 선거조직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아직 어용세력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는 체신노조와 같은 곳에서는 집권 프로젝트을 떠난 현장민주화의 전망을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선거에 몰입해서는 안되며, 선거조직으로 전락한 다른 현장조직들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어떤 구체적인 실천들이 여기에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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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홈페이지?

 
'러시아에 관한 명상'이라는 곡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 노래 가사를 하나 검색하다가 발견한 사이트.
 
새벽의 홈페이지 혹은 팬페이지.
 
93년 공연의 전체 실황도 있고 가사도 전부 있는데, 음질은 너무 좋지 않아서 듣기 힘들다.

저 평등의 땅에
 
 
저 하늘 아래. 미움을 받은 별처럼.
저 바다 깊이. 비늘 잃은 물고기처럼.
큰 상처입어. 더욱 하얀 살로.
갓 피어나는. 내일을 위해.
그 낡고 낡은. 허물을 벗고.
잠 깨어나는. 그 꿈을 위해.
.....
 
우리. 노동자의. 긍지와 눈물을 모아.
저 넓디 넓은. 평등의 땅 위에 뿌리리.
우리의 긍지. 우리의 눈물.
평등의 땅에. 맘껏 뿌리리.
......
 
평둥의 땅에. 맘껏 뿌리리.
 
홈페이지의 코멘트 : http://dawn.logosia.com/204-dawn.html
 
 
참 좋아하는 노래였는데 부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다는 점이 부끄럽다. dimitri형 소개 덕분에 '윤선애씨 어디 계세요"라는 타이틀의 비라이센스(?) 음반' mp3p에 넣어서 열심히 듣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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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이해관] 강성은 언제나 변혁적인가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컬럼. 생각해볼만한 글이라 옮김.
 
전투적 경제주의가 처하게 되는 딜레마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좌파의 정체성을 거기서 찾으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전투적 경제주의의 문제설정에 빠져있을 경우에는 협조주의 노선과 거울대당하게 되는 데, 사회적 합의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좌파들이 올 상반기 내내 몰입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장칼럼>
강성은 언제나 변혁적인가 
 
“협조주의 노선은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 아닌 결과”
 
증시에 공시된 바에 따르면, 지난해 KT의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5,130만원이다. 이 금액에는 각종 복지혜택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면, 동일업무를 하는 KT의 하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체로 월 180만원 정도의 임금을 받고 있다. 이 금액은 통신수리공에게 필수적인 통신요금, 차량유지비 등의 비용이 포함된 액수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계산하면, 대체로 KT의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비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3배가 된다. 순수노동시장의 논리로 얘기하자면,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울타리가 제거된 채 노동시장에 내동댕이쳐질 때 임금이 1/3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는 현 KT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에 노동력 시장가격의 2배 정도의 초과이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이해관
· 1963년생  · KT 해고자
· 전 KT노조 부위원장
·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노동대학 기획위원(현)
 

물론 이 초과이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사실상 유선통신시장에서 독점적 성격을 띠고 있는 KT의 독점이윤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비자로부터 얻은 초과이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하도급 업체와의 불공정 계약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에도 못 미치는 초과착취 임금에 기초한 것이다.
 
민영화 이후 KT는 공기업 시절과는 달리 독점적 지위를 적극적인 수익 창출의 기회로 활용하면서 엄청난 돈벌이를 하고 있다. 매출은 10조원을 훌쩍 넘어섰고 당기순이익은 꾸준히 1조원대를 유지하며 2조원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민영화 이후 KT 정규직의 임금인상은 KT의 막대한 이익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2~3%에 머물고 있다. 민영화를 위한 해외매각이 시작된 1998년 1억5천만원에 불과했던 1인당 매출이 2003년 3억원을 넘어섰음을 감안하면 KT의 초과이윤 배분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은 매우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고용안정이 먼저냐, 임금인상이 먼저냐
 
이러한 낮은 임금인상에 대해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만이 적지 않다. 소위 ‘민주파’ 활동가들은 ‘이러한 낮은 임금인상률은 사측의 협조세력에 불과한 무기력한 노동조합 때문’이라며 ‘강력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활동가들의 주장에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정 정도 동의를 표한다. 실제로 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발전에 비하면 임금인상이 형편없다고 느낀다. 특히 안정적인 고용보장이 전혀 작동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로서는 당장의 임금인상이 절실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다. KT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임금에 노동시장에서의 시장가격보다 2배 이상의 초과이윤이 포함되어 있음을 모르지 않다. 그래서 회사 발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인상에 대해 불만을 갖지만, 동시에 KT라는 기업이 제공하는 울타리가 아니면 현재의 임금수준이 유지될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특히 케이블TV, 초고속인터넷 등 새로운 유선통신 분야의 등장으로 통신수리공이 부족했던 2000년대 초반까지와는 달리 지금은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통신수리공들의 임금은 계속 하락하는 추세다. 이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격차를 더욱 확대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격차의 확대는 고스란히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구조조정 압박으로 작용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줄어든다. 초과이윤의 대부분을 자본이 챙기는 셈이다. 이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만은 높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의 시장가격과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간의 격차가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불만이 투쟁으로 폭발하지 않는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노동자들은 두 가지 노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나는 강력한 노동조합을 통해 회사의 성장에 걸맞는 임금인상을 쟁취하는 노선, 이른바 ‘강성’ 노선이다. 이는 독점으로 KT가 확보한 초과이윤 배분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을 늘리자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력의 시장가격과의 차이 속에서 정규직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임금인상 등을 자제하며 회사 경영에 협조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KT의 초과이윤 창출에 적극 협조하자는 노선인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협조주의’ 노선이 우세해진다.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하락하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거의 동결 수준이어도 격차는 확대되며, 격차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KT의 초과이윤 가운데 정규직 노동자의 몫을 투쟁으로 확보하자는 강성노선의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 결과 노조는 점점 협조주의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왔다.
 
'강성' 노선과 '협조주의' 노선은 동전의 양면
 
그런데 많은 활동가들은 거꾸로 현장에서 협조주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이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강성’ 투쟁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협조주의 세력의 강화는 위기의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아니다.
 
대기업 노조에서 외형상 매우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노선의 차이는 실제로는 초과이윤을 배분받는 방식 및 배분의 양과 관련된 전술적 차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두 노선의 외관상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두 노선은 현재 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딜레마의 즉자적 반영에 불과하다.
 
협조주의 노선이든 강성 노선이든 두 입장 어느 것도 독점 대기업의 초과이윤의 원천인 독점이윤,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하청 노동자간의 차별구조 그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는 한 지금의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명백하지 않은가!
 
이미 KT의 구조조정 압박은 기업 내적인 데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KT는 여전히 돈을 잘 벌고 있고 부도날 위험도 전혀 없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하락은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임금격차를 계속 확대시키고 있고, 이는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의 강력한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응하는 노동운동은 기업 내 초과이윤 분배 차원을 조금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노동시장에 대한 그 어떤 운동적 개입도 하지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이 사회적 영역으로부터 압박해 들어오는데, 그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이 기업 내적인 초과이윤 분배에 머문다면 승부는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노조원들은 강성 노선이든 협조주의 노선이든 노조가 지금 노동자의 삶의 딜레마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이 차이가 굉장한 차이인 것처럼 주장한다. ‘강성=변혁적’이라는 생각이 굳어져 있다. 그래서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을 협조주의 세력 탓으로 돌리고 정작 자신의 운동노선이 초과이윤 내에 갇혀 있음을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 초과이윤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 분배 방식에서 강성이냐 아니면 협조주의냐의 차이를 절대적인 차이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강성=변혁세력’임을 자위한다.
 
초과이윤에 안주하는 노동운동과 초과이윤을 문제삼는 시민운동
 
최근 민영화 이후 KT의 경영이 공공성을 외면하는 데 대해 시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KT의 초과이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KT가 막대한 이윤에도 불구하고 요금인하를 하지 않는 데 대해 문제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종량제 도입 반대, 사회 공공성을 위한 적절한 공공투자 확대 요구, 주주가치 중심의 고배당 비판 등 여러 각도에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제기의 핵심은 공적 기업인 KT의 초과이윤을 주주들의 사적 소유 대상으로 할 게 아니라 사회화 하라는 요구이다.
 
여기서 필자는 과연 어떤 운동이 더 진보적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초과이윤에 안주하는 노동운동과 초과이윤을 문제제기하는 시민사회 중 과연 누가 진보적인가! 노동자가 하는 운동이라고 다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노동운동의 진보성이 인정되는 것은 노동자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착취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노동자들이야말로 가장 착취당하는 존재이기에 자본주의 사회를 가장 철저하게 변혁시켜야 하는 역사적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동자들이 하는 운동이어서 진보적인 게 아니라 노동운동이 보편적 인간해방이라는 역사적으로 부여된 사명을 수행할 때 진보적인 것이다.
 
노동운동의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협조주의 세력의 발호 때문도 아니다. 노동운동이 근본적인 자기성찰을 게을리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초과이윤 확보 방식을 둘러싸고 전술적 차이만을 절대화 했을 뿐, 사회 보편적인 관점에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분할지배전략에 맞서 노동운동의 대응을 모색하지 못한 우리 스스로의 책임이다.
 
스스로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독점 대기업의 필터를 통해 바라보는데 익숙해진 우리 활동가들의 한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충실히 실천하는 데서 변혁성을 찾기보다는 협조주의 세력과 대립에서 변혁성을 자위한 우리의 소심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우리 노동운동 활동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업의 울타리 내에서 ‘강성=변혁적’이라고 자족하는 게 아니라, 사회변혁을 추구하기 위해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노동운동을 재구성하려는 진지한 자기성찰이다.
 
 
이해관 전 KT노조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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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나쁜 과학 - 근본적으로 위험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


나쁜 과학 - 근본적으로 위험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
매완 호 지음, 이혜경 옮김 / 당대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 중에서 나중에 엉터리라는 것을 알고 분노한 일이 많이 있다. 그런 와중에도 굳건하게 믿음을 유지한 내용들도 있는데 물리, 화학, 생물 등 주로 자연과학과 관련된 학과목 내용이다. 자연과학이라는 것도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알튀세르와 쿤으로부터 배웠지만, 적어도 중고등학교 자연과학 과목에서 가르칠 정도의 기초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수십년 믿어온 '공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엉터리라는 것을 또 한번 발견할 게 될 때 황당함이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에 대해서, 그리고 이를 지탱하고 있는 생물학의 편견들에 대해서 말하는 이 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물학과 생명공학에 대한 '상식'을 깬다. 이 '상식'들을 깨는 과정에서 유전자조작 생명공학이 약속한다고 하는 '멋진 신세계'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우선 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을 다시 살펴보자.
 

다음 세대에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생물의 생식세포는 체세포 기관을 통해서 복사되는 만큼 체세포의 유전자 변화는 당연하게도 생식세포에 영향을 주고 다음 세대에 유전된다. 생명체는 외부 환경에 의해서 끊임없이 유전자 자체의 변화를 겪기 때문에, 이 말은 곧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말이다. 어찌보면 대단히 상식적인 내용인데도 '획득형질은 유전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이 진리라고 반복되는 것은 도그마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생명체 형태의 기본적인 내용은 모두 유전자 안에 있기 때문에 유전자만 적절하게 분석한다면 생명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유전자는 다양한 외부환경에 반응하면서 전혀 다르게 작동하기 때문에 동일한 유전자가 동일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혹은 다른 유전자와 상호작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유전자의 영향으로 인해 특성은 발현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유전자는 무엇인가?
 
생물학에 대한 편견들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임은 물론 역으로 그것에 의해 강화된다.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대해서 이렇게 흥미로운 예도 없을 것이다. '우리 유전자 안에 있다'는 주장은 과학이자 이데올로기로서 나타나고,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을 가능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전제가 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유전자 결정론', '사회 생물학'과 같은 사이비 과학들이 최첨단 유전자 공학 생명공학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중에게 수용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유전자 조작과 인간복제를 상업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한다. 이데올로기와 과학과 자본의 고려가 동시에 작동하고 서로를 강화한다. 저명한 분자유전학자들은 이미 생명공학기업의 투자를 받거나 이사로 활동하는 등 긴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데, 이들은 또한 앞장서서 유전자 결정론을 선전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이데올로기는 기괴한 것이다. 농업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유전자 조작농산물은 유전자 전이를 통해서 잡초의 제초제 내성을 길러주고 결국 농약으로 인해서 생산을 파괴한다. 사소한 기후 변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농사를 망치게 된다. 세균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항생제는 박테리아에 대한 유전자 조작 과정에서 박테리아의 항생제 내성을 확산하여 '슈퍼 박테리아'를 만들게 된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포함된 조직된 DNA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인체에 흡수될 수 있다. 이런 DNA에는 불임유전자와 같은 것도 있다. 유전자 전이를 쉽게 하기 위한 프로모터는 수평적 유전자 전이를 가능하는 한편, 이종 간 질병 확산이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최근의 조류독감 파동은 이런 직접적인 결과일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파괴적인데,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는 우생학을 합리화한다. 유전자 안에 있다면, 열등한 유전자를 찾아내어 박멸해야할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비만 유전자'나 '범죄 유전자'를 찾아서 유전자 치료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박멸(!)하기 위한 우생학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유전자는 '환경 속에서' 발현하기 때문에 동일한 유전자가 동일한 결과를 산출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방식은 정치적으로도 해악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유전병을 방지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박탈한다. 모든 것이 이미 유전자 안에 있다면 여성은 단지 유전자에 기입된 것을 발현하기 위한 인큐베이터에 불과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편견은 이미 제국주의 시대에 확립된 유전학이 가지는 관념, 모든 것을 지도, 통솔하는 유전자와 이에 따르는 재생산 세포라는 식의 구분, 자본-노동자의 구도를 본 딴 유전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이해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 산업은 제3세계에 대한 유전자 착취도 발명해냈다. 전통사회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진 작물들은 그것을 '발견'한 초국적 기업의 특허품이 된다. 그리고 제3세계는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시험장이 되면서 전통농업의 재생산 기반은 파괴되고 초국적 기업에 완전히 종속된다. 유전자 다양성의 파괴, 농약의존으로 인해 곧 농민들의 몰락을 부추길 뿐이다.
 
최근의 쟁점이 되는 인간복제 문제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서 생각할 지점들을 찾을 수 있다. 인간복제 시도는 성공할 수 없는데, 이미 고유한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복제(동물복제)는 체세포의 핵을 난자에 이식하여 이를 착상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미 체세포의 핵에 있는 유전자는 성체의 성장과정에서 배아상태의 것과 같지 않고 변형되어 있다. 따라서 전혀 '같은' 유전자를 확보할 수 없다. 또한 체세포 유전자는 발생초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공가능성이 극히 낮다. 수백개의 난자를 확보하여 진행한다고 해도, 출산에 성공하는 확률도 낮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낮다. 복제양 '둘리'의 경우 300여개의 수정란을 조직함을 통해서 성공했다. 더 성장하더라도 이미 '늙어서 태어난' 것처럼 일찍 노화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복제의 문제는 인간 정신의 동일성이 복제된다는 오해와 같은 것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문제의 모든 결과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젝의 언급이 사고실험으로서 모순을 사고하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사실에 대한 무지와 정치적 쟁점에 대한 무시로 인해 해악적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나쁜 클론을 두려워 하는가?Who's afraid of the Big Bad Clone? http://blog.jinbo.net/taiji0920/?pid=623)
 
저자는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의 이런 수많은 쟁점들이 상호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무엇보다 장점은, 따로 따로 사고하기 쉬운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의 여러 쟁점, 문제들이 자본의 이해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밝혀준다는 점이다. 인간복제로부터 제3세계 유전자 착취, 우생학, 초국적 제약회사의 횡포, 곡물 메이저들의 착취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최근 뜸하던 황우석 교수는 개 한 마리를 복제한 이벤트로 다시 언론을 탓다. 이 책을 통해서 사실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다면 이제 황우석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 시도가 가지는 위험과 성공 불가능성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개 복제가 결국 오로지 여론조작을 위한 부질없는 시도이며, 거대한 실망을 낳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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