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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0/26
    [애니] 최종병기그녀(1)
    겨울철쭉
  2. 2007/11/09
    태왕사신기, 영웅의 시대?(2)
    겨울철쭉
  3. 2007/10/18
    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겨울철쭉
  4. 2007/09/12
    런던, 두번째(2)
    겨울철쭉
  5. 2006/12/31
    [독서]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겨울철쭉

[애니] 최종병기그녀



금융위기가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는 시기에, 블로그에 글을 잘 올리지는 않고 있지만 가장 몰두하게 되는 독서는 역시 금융위기와 공황,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관련된 책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하게도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이런 위기와는 상관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최종병기그녀(最終兵器彼女).

자세한 설정을 여기서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세계가 멸망해가는 전쟁통에 "최종병기"가 된 치세와, 그녀의 남자친구 슈지의 이야기다. 한편으로, 여성의 신체를 군사무기로 전유하는 설정에 대해서 페미니즘적 비판이 있기도 하고, 군국주의적인 설정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렇게 비판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정작 "최종병기그녀"가 보여주는 세계는 전혀 가상적이다. 말하자면 전혀 있을법하지 않고, 그래서 일종의 판타지.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매우 현실적이라고, 혹은 현실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

둘이 사랑하던 말던, 아파하던 말던, 세상은 전쟁으로 멸망할 예정이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당연히 희망도 별로 없다. 마지막편에서는, 주인공들이 있던, 후카이도에  마지막 남은 마을마저 폭격과 해일로 사라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금융위기의 시작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뒤메닐-레비나 윤소영선생의 분석처럼 2012/13년 경에 최종적 위기를 경험하게 될까, 혹은 지금일까, 혹은 더 먼 언젠가일까,

여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우리의 주관적 희망과는 무관하게 점점 더 최악으로 상황으로 전개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치세와 슈지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그러나 끝까지 사랑하고 살아남고자 했던 것처럼)

***
너희들이 무슨 점쟁이냐는, 혹은 너희가 뭔데 그렇게 오만하게 예상하냐는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렇게 말하는 운동권들의 심리는 순전히 사태의 진실을 믿고싶지 않은 주관적 희망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무지의 근거가 될 수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니면 어떤 선의에 기반한 희망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세상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도 최후의 희망은 노동자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혹은 구하는 것일테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어떤 준비라도 다 할 것이다. 이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적어도 5년 후의 시각에서 현재를 보아야한다. 매순간 그렇다. 5년후에 지금을 돌아본다면, 그 때 무엇을 했어야한다라고 생각하게 될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상황을 인식하는 우리 모두는 전혀 다른 책임감으로 행동해야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결과가 만들어질지는 전혀 알수 없다.
다만 시간은 그저 '역사의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최종병기그녀"의 시간대, 그 시간대에 살아가는 치세와 슈지의 시간대는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다. 무엇에 최선을 다하는지는 치세와 슈지와는 다르겠지만(이건 연애얘기는 아니니까), 그/녀들의 말처럼, 살아남아야한다.

하지만 어쨋든, 결과가 세상이 망하는 것이거나 혹은 아니거나, 알 수 없으니 우리는 치세와 슈지처럼,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적어도 아직은 그/녀들 보다는 좀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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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 영웅의 시대?

요즘에 태왕사신기를 재밌게 보고 있다. 사실 요즘에 그나마 시간이 있기 때문에 보는 셈인데, 여행을 다녀와서 지난 주에 14회를 처음 본 후에 1회부터 주말내내 찾아봤다는,,;;

나도 영화나 드라마 보는 취향은 그저그래서 일단 판타지 줄거리에, 멜로 라인, 멋진 쌈박질 장면 등이 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CG는 별로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쪽에는 예산을 줄이다가 "싸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태왕 담덕 역의 배용준은,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반할 정도로 멋있게 나온다.

재미있게 보다가 생각나서 몇가지.



신화, 영웅들의 시대

드라마의 배경은 고대. 좀 늦은 시기이기는 하지만 신화적인 시기로 그려진다.(고구려 정도는 이미 역사시대인데..;)

주인공인 태왕 담덕은 '영웅'이다.
그런데, 이 영웅에는 두 가지 정도의 부류가 있다. 전자는 영웅신화나 설화에 등장하는, 탄생-고난-성장-귀환으로 연결되는 일생을 사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타고난" 운명을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승리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고난을 겪어야하고 그 운명을 알아보고 돕는 것들을 만나야한다.

이런 영웅들은 매우 전형적이어서, 어느 민족들의 영웅신화, 설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 홍길동전같은 중세소설에서도 그렇고, 지금 쓰여지는 소설이나 영화들에서도 활용되는 구조.

그런데, 또 다른 영웅들이 있는데,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세익스피어에서도 그렇지만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보자. 이들은 운명의 장난에 따라, 혹은 자신의 기질 때문에 비극적인 상황에 봉착하지만 자신의 고귀함을 지키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된다. 이들은 파멸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고귀함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성격의 영웅은 그 위대함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기 때문에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두 가지의 영웅 성격이 결합할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이나, 영화 '메트릭스'에 네오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튼, 태왕사신기의 영웅인 태왕 담덕은 전자의 성격에 가까운 인물. 그래서 14회 정도부터 시작해서 17회 정도에 이르러서는 고난을 거의 이기고 이제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렇게 되다 보니, 오히려 극적 재미가 반감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극적 재미를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반감하는, 이 드라마의 판타지적인 성격이 관련되어 있다.

기계신(deus ex machina)

14회, 15회를 TV에서 보고 앞 부분을 찾아서 다시 보면서 궁금했던 것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담덕이 어떻게 (신물을 다 찾을 때까지 임시라고는 하지만) 왕위에 오르는가하는 점이었다.

11회. 선왕을 살해한 것으로 의심받던 태왕 담덕은 신당에서 "가우리검"(심장에 칼을 박아넣고 죄를 지은 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하여 재판하는 제도라는 데, 중세시대의 마녀심판과 비슷한 것이다.)을 요구받는다. 심장에 칼을 찔린 담덕은 여기서 심장이 찔린 칼(동명왕검)이 한순간 가루로 변하면서 설아남는다. 그 결과로 짜자잔~ 선왕을 죽였다거나 귀족 자제들을 납치했다는 모든 의혹을 뒤로 하고 왕위 등극.

그 순간 당장 떠오른 것이 진중권 덕분에 유명해진 기계신(deus ex machina)이다.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사건자체의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외부적인 힘 덕분에 모순이 해결되는 상황을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개념. 여기서 동명왕검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렇다보니, 담덕이 왕위를 인정받는 것은 그의 고귀한 인품이나 고난을 헤치는 용기같은 것이라기 보다는(물론 그것들도 제시는 되지만), 판타스틱한 기적에 의한 것이 된다. 이렇게 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서 주인공 영웅을 도울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극적 긴장은 떨어질 수밖에. 4개의 신물을 모두 찾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것이지만, "가우리검" 장면은 특히 심했다.



인물들, 입체적이거나 밋밋한.

이런 상황이다보니, 태왕 담덕은 주인공이지만 점점 재미없고 더 밋밋한 인물이 되어간다. 물론 배용준의 멋진 외모 덕분에 여전히 (극에는 외적으로) 매력적이지만 말이다. 그의 성공은 그의 고귀한 영웅적 자질 때문이라기 보다는 초자연적인 힘들이 이미 닦아준 길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비해서, 오히려 태왕 담덕과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결국 대립하게 되는 기하(문소리)나 연호개(윤태영)가 더 입체적이고 극적인 인물이 된다. 이들에게는 내적인 갈등이 있고 고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처한 운명 속에서 파멸되어간다. (아마 이들의 성품이 좀 더 고귀하게 그려졌더라면 이 드라마의 진정한 영웅은 태왕 담덕보다는 이들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극중 인물들의 사랑에서도 더 가슴을 울리는 것은 기하가 태왕 담덕에게서 멀어져가는 과정, 그리고 파멸을 예상하면서도 (기하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연호개의 경우다. 수지니(이지아)를 둘러싼 태왕 담덕과 처로(이필립)의 미묘한 감정보다도 더 그렇다.

오늘 방영한 17회에서 "(더 멀어지고 파멸하기 전에) 자신을 멈추어 달라"는 기하의 대사나, 지난주(아마 15회?)에서 연호개가 기하에게, "내가 필요없어져 버리더라도, 당신 손으로 내 가슴을 찔러줘요"라고 말하는 연호개의 경우가 더 생생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느낌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드라마는 고대 귀족정 시대를 다룬다. 이것은 영웅들을 묘사하기에 쉬운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귀한 인간들의 귀족적 성품을 두드러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귀족정을 옹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성품의 인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귀족적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것이 '평범'해지는 이 시대에는 고귀하고 위대한 영웅들을 그리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혹은 인간의 위대함을 억압하는 시대.) 그러다보니 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정치판에서 영웅 행세를 하려고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고대민족들의 역사

한편, 이 드라마는 '쥬신'이라는 이름으로 동이족들을 통칭하면서 이들이 같은 민족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 거란 등이 언급된다.

사실은 여기에 왜(倭)도 넣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하지 않는데, 왜를 포함해서 동이족을 지칭할 경우 '내선일체'를 상기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거란, 말갈을 언급하는 것은 이들이 지금은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지 못할 뿐더러 그런 점에서 남한민족보다 열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일본은 '내선일체'를 말할 수 있지만 일본민족보다 열위에 있는 조선민족은 그것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기만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는 백제가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동부지역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설을 채용하지만, 마찬가지 맥락을 갖는 다른 가설, 백제와 왜가 연합왕국이었다는 주장을 인정하는 것같지는 않다. 이것 역시 일본에 대한 미묘한 입장 때문일텐데, 이 드라마가 일본자본의 적극적인 투자, 그리고 일본 수출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일이다. (혹은 그렇기 때문에 왜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 드라마를 보면, 주요 전투장면은 황량한 초원과 사막지역에서 촬영한 것을 알 수 있다. 카자흐스탄의 스텝지역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무대였던 만주에서의 촬영에 대해서 중국정부가 내용상 문제를 들어 불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수입과 방영도 불허할 방침이라고 한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동이족을 통칭하여 '쥬신'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한민족과 연관시키는 이 드라마의 내용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고대사를 두고 각 민족국가들이 벌이는 역사전쟁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만들어진 고대>라는 책에 대한 글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구성된 역사들에 대해서 말이다.

중국의 경우에 특히 실망스러운 것은 그들이 (말로라도) 체제의 성격으로 사회주의를, 그리고 다민족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 민족간의 우애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라면, 오히려 각 민족들의 고유한 역사를 평등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민족적 우애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은 한족(漢族)의 주요 제국을 중심으로 역사를 구성하고, 다른 민족의 역사는 "지방정권"이라는 식으로 폄하하는데, 이는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한족의 패권적 역사관일 뿐이다. 이렇게 되는 데 티벳을 지원하는 미국과 같은 위협, 민족들의 분리독립의 위험이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과연 그것이 다민족 국가로서의 중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에 올바르고--게다가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의문이다.

드라마를 이런 식으로 만드는 한국이나, 그것을 금지하는 중국이나, 또 일본이나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드라마는 앞으로도 재미있게 보겠지만, 극 자체의 재미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질 것같고, 화려한 영상과 몇가지 극적 에피소드가 더 두드러지지 않을까 싶다. 아, 그리고 배용준을 비롯해서 인물들의 비주얼만으로도 아직은 충분히 볼만하고 앞으로도 상당히 그렇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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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그리스, 델피, 디오니소스 극장, 비극을 생각하다.

그리 오래 있지 못한데다가 마지막 여행지인 그리스에서는 무척 아쉬움이 많다. 몇가지 이야기가 있겠지만, 우선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잠깐하자. (그리스 문명, 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인상 등은 다음 글이 가능하다면 쓸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많은 비극에서 등장하는 신탁의 장소인 델피(델포이), 그리고 오늘은 아크로폴리스 옆에 디오니소스 극장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델피

아테네에서 버스를 타고 세시간 정도 걸리는 델피는, 아폴로 신전의 신탁으로 유명하다.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은 곳도 여기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가 죽게 된 것도 델피 신전에 신탁을 받으러가다가 오이디푸스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연작에도 델피가 소재로 사용된다. (모두 신화의 이야기.)

델피에 다가가면서, 아, 그리스인들이 왜 이곳에 신탁의 장소, 아폴로 신전을 지었는지 조금씩 느낄 수 있다. 낮은 구릉들만 있는 평원에 혼자서 우뚝 솟아있는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상 쪽에는 구름까지 끼어있다. 산으로 버스가 오르자, 높은 절벽과 깊은 계곡(물은 없지만)이 펼쳐진다. 마침내 도착한 델피는, 그 장소 자체가 장관이다.



델피를 신성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 만든 신전 이전에 그 산과 계곡이었던 것이다. 자연이 만든 숭고함이다. 절벽에 걸려있는 신전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마치 하늘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신성한 장소라는 곳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늘과 땅의 중간지대. 그리스인들이 이 곳을 신의 말(言)이 내려오는 곳이라고 생각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태양과 이성의 신인 아폴로를 예언의 신으로도 생각해서 신탁을 받았다. 현대의 우리들의 관념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않는 일인데, 예언은 이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폴로는 운명의 신들과는 불화하면서도 예언을 관장한다. 그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미래를 아는 것은 (비록 신탁이라는 종교적 형태로 표현되지만) 알 수 없고 변덕스러운 운명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예측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같다.

하지만, 그러한 신탁이 운명을 어찌하지는 못했던 것같다. 신화의 내용에서, 사람들은 신탁을 듣고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하지만 결국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마는 이야기가 많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도 그런 경우인데, 신탁은 운명의 아이러니를 더욱 강조한다.

오디이푸스는 신탁을 통해서 미래를 알았으면서도, 그리고 그 자신이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으면서도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운명 앞에서 파멸하는 이유는 사소한 기질 상의 단점(길가는 노인--아버지--를 살해한 성급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고귀한 성품(진실을 끝까지 대면하고자하는) 때문이다. 위대한 인간의 파멸은 비극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디오니소스 극장

다음날 오후에 간 아크로폴리스 아래에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다. (같은 티켓으로 입장할 수 있다.) 극장을 찾느라 더운 날씨에 좀 헤메서 기진맥진해서 도착했다. 이렇게 찾은 극장은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정말 감격스럽다. 바로 이곳에서 위대한 비극들--소포클레스, 아이퀼로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이 공연되었던 곳이구나. 별이 빛나는 밤에 여기 객석 어디선가는 아리스토텔레스도 위대한 극작가들도 비극 공연을 관람했겠지.



땡볕 속에서 객석이 잘 보이는 좋은 자리를 잡아 앉는다. 비록 무너진 극장이지만, 수천년 전 공연된 비극의 감동이 남아서 울리는 것같다. 이곳에서 비극경연대회가 열리고, 비극이 초기형태로부터 완숙한 형태(아리스토텔레스가 이제 비극은 완성되었다고 말한)까지 꾸준히 창작되었다.

시간을 견디는 것

비극경연대회는 사라지고, 그리스 문명도 쇠락하고, 돌로 된 극장마저 무너졌지만, 비극은 시간을 견디고 남았다. 지금도 그리스 비극은 세익스피어와 함께 가장 위대한 비극으로 평가받는다. 평가가 문제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주는 감동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 비극들은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윤리적이며 철학적이고, 예술적 감동을 준다. 비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예술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짜는 신파와는 다르지만 더 오래 남는 슬픔을 전하고, 또 단지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을 ‘사고’할 수 있게한다.

알 수 없는 운명과 불화하고 그 때문에 파멸하더라도 위대한 인간들이 위대하다는 점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운명--Fortuna여신--의 것은 그녀에게, 그러나 나의 영혼의 일은 나에게. 아폴로--태양과 이성--도 알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 어떤 미래를 불러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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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두번째

런던에서, 두 번째

 

런던에서 (여행자의 입장에서) 가장 좋고, 부럽기도 한 것은 이 곳의 주요 미술관, 박물관들이 무료라는 것이다. 물론 박물관-미술관이 아닌, 의회 같은 경우에는 투어비를 받기도 하고 웨스트민스터나 세인트폴과 같은 성당들은 입장료를 받지만 말이다. 덕분에 내셔널갤러리, 테이트 브리튼, 데이트 모던 등을 연결해보면 미술사를 조망해볼 수도 있고, 영국박물관을 통해서 문명의 역사를, 자연사박물관, 과학박물관을 통해서 자연과 과학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부러운 이유는, ‘공짜’여서만은 아니다. 이 정도 수준이 되는 전시물들이 있다는 것부터 그렇다. 한편으로는 학문, 과학과 예술이 ‘공공’의 것으로 대중이 언제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열려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일이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과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정념을 고양시킬 수 있다. (사진은, 일단 공룡화석에서 시작하는 자연사박물관.)

 

빅뱅, 지구의 탄생과 공룡시대부터 석기시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로마를 거쳐 다빈치(르네상스)와 미켈란젤로를, 그리고 르누아르와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최초의 증기기관에서 우주선까지 자연과 인류의 역사와 그 성과를 종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다.

 

(물론 나는 ‘구경’은 했지만 그런 ‘기회’를 누렸다고 하기는 힘든데, 수박겉햝기 식의 관광객식 구경일정으로는 전시물의 내용을 확인할 틈도 없이 단지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달쯤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간절히 들었다. 여튼 이번 여행은 주마간산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 갈 수밖에. 하지만 운에 따라 가끔 한 두가지라도 깊이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있기를 바랄 뿐이다.)

 

미술사 ; 추상에서 추상까지


미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보면서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것들을 이야기해보자.

영국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예술은 한편으로는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추상적이라고 할만하다. 대상의 특질 중에서 부각하고 싶은 것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이 이들의 전략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사실과 유사하게 만들 '실력'같은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아래 사진과 같은 람세스2세 두상은 대단히 사실적이다.)




그런 추상의 극단적인 경우가 여러 신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종교이기도 하지만, 현실에 대상이 없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눈에 보이게 표현하는 과정에서는 대상의 어떤 특징은 묘사되는 형상 속에서 '순수하게' 드러난다. 종교적 열망과 세계를 개념화하려는 철학, 그리고 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같은 뿌리에 얽혀있는 것일까?

 

이집트의 경우, 사람 그림은 얼굴은 옆면, 눈은 앞면, 몸통은 정면, 다리는 옆면을 그린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대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쪽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미술은 사실化되었지만 황금비례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그린다는 점에서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 이런 미술의 특징은 그것의 존재 이유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라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미술을 발전시켰다.

 

르네상스 이후에 근대에는 점차 대상과 말그대로 닮은 것을 그리려는 노력이 집요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내셔널 갤러리) 미술사 책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 15세기에 원근법을 도입하는 그림들이나 사실적 묘사가 뛰어난 16, 17세기 미술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내셔널 갤러리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인상파 전시실은 다시 보다 화가가 전달하고자하는 것을 전달하는 것에 충실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대상과 닮은 것은 다음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데, 마네와 고흐 등은 빛을 통해서 그런 느낌들을 전달한다. 대상과 닮지 않았더라도 대상을 더욱 잘 드러내는 빛을 화폭에 담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변화들 덕분에 사진과 영상으로 대상을 담을 수 있는 시대에도 회화가 아직 살아남을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사진이 정확하고, 영상과 서사를 결합시켰던 회화들(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그리스-로마 신화를 표현한 작품들)은 영화가 대체하는 시기에도 말이다.

 

템즈 강을 건너서 데이트 모던에 가면 현대미술을 전시한다. 20세기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품들. 사실 작품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서 이럴 때만큼 영어실력이 아쉬울 때가 없다. 오디오 가이드라도 들으면 좀 더 이해가 될 텐데.(미술관, 박물관들에는 영어와 함께 불어, 이태리어, 독일어, 일본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다. 박물관 미술관에는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넘친다. 얼마 있다가는 중국어 오디어 가이드도 등장할 듯.) 칸딘스키나 피카소 정도를 넘어가면 이해가 너무 힘들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회화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관념, 이념들을 전달하는데 몰두한다는 점. 사진이나 영화와 경쟁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미술계 밖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죄송하지만) 그런 측면은 현대미술에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진다.

  

미술관, 박물관에는 주중에는 수업삼아 단체 관람온 학생들로 넘친다. 이런 기회를 가지면서 성장한 어린이들이 과학과 역사, 예술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가지는 것은 물론, 그것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곳에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직접’ Acting 해볼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테이트모던에서는 이미지를 조작해서 추상적인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보거나, 개념들을 환유적으로 연결해볼 수 있는 장난감도 있다. 예를 들어 카지노 슬롯과 같은 것을 돌리면 무작위로 개념들이 조합되어서, “사과--뒤짚다--이것은 예술이다”라는 식으로 말을 만들면서 상상할 수 있다. 초상화 미술관에서는 자기 초상화를 손으로 조합해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예술과 과학이 먼 곳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해볼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이번 여행에서 테이트 브리튼에서는 Millais의 ‘오필리아’를 꼭 보고 싶었는데 보지 못했다. 오는 27일부터 전시라 지금은 전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림이 들어있는 포스터만 볼 수 있었다. 지구반대편까지 와서 일부러 목표했던 것을 놓칠 때 정말 크게 아쉬울 수 밖에.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

 

이건 이름을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이라기 보다는 World Museun 이라고 해야할 것같다. 세계 곳곳에서 (대부분 약탈행위를 통해서) 가져온 유물들로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하이라이트는 메소포타미아-이집트-그리스 관인데,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지배한 이들 지역의 유물을 제국의 수도에 전시하면서 서양문명의 정당한 계승자로서 자신들을 드러내려고 한 것 같다.

 

원래 있던 곳이 아닌 곳까지 건너온 유물들을 보면, 과연 이집트나 이라크, 그리스에는 무엇이 남았을까하는 생각까지 든다.(그래서 그리스-이집트까지 갈 생각인 나는 기운이 좀 빠지는 일이다.) 핵심적인 것들을 집요하게 모아왔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처럼 좀처럼 가져올 수 없는 것들은 없지만,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기둥과 지붕을 제외하고 가져올 수 있는 조각들은 모조리 가져왔다.

 

물론, 덕분에 유적들이 보존된다거나, 영국이 이들 나라의 유적보호나 박물관에 지원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라크를 지배하고 유적을 약탈해온 영국은, 이제 다시 이라크를 미국과 함께 침공한 상황에서 그런 정당화는 더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비록 얼마전에 패퇴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족국가단위로 분할된 세계체제에서 민족의 역사적 이상을 나타내는 고대 유적들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영국의 약탈이 부당하기는 하지만,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유물들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북경박물관에 진나라의 수도였던 서안에 있던 유물이 있다고 할 때 부당하게 느낄까? 하지만 거리로는 더 가까운 만주에 있는 고구려, 발해 유적이 북경에 있다고 할 때 당신의 느낌은?

 

(다소 포스트콜로니얼리즘적인 시각이라고 해도) 역사적 유적들이 민족사를 구성하고 민족국가를 정당화하는 상징들이 된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 유적을 약탈한 제국주의가 정당화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해야한다. 영국인들은 자신을 세계를 지배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물들을 단지 “옮긴” 것일텐데,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동시에 비판할 필요성.

 

뮤지컬,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런던에서 마지막날 저녁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봤다. 여행을 떠나면서 가지고 있던 몇 개의 로망 중에 첫 번째 것.

 

CD로 보고 들었던 것과는 배우들도 약간씩 다르고 해서 느낌이 같지는 않았지만 훌륭했다. 감동할 준비를 하고 간만큼, 몇몇 장면에서는 펑펑 눈물 흘린 작품.

 

레미제라블은 인물들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는 작품이다. 플롯도 감동을 주지만, 무엇보다 인물 하나 하나가 깊은 인상을 주고 생각하게 한다. 특히 “숭고한” 인물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

 

장발장은 주인공인만큼 가장 그렇다. 자신이 누구인지 고뇌하면서도(What Have I Done?) 다른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자기 대신 누군가가 누명을 쓸 상황이 되자 자신을 밝히고 쫒기는 몸이 된다.(Who am I?) (비록 간접적이라도) 자신의 잘못으로 죽음에 이르는 판틴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해서 코젯(과 그가 사랑하는 마리우스)을 위해 희생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누구에게보다 자신에게 정당하기 위해서 매 순간 위험한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 악역이라는 자베르도 그렇다. 그가 장발장을 집요하게 쫒는 것은 “법과 정의”에 대한 내적인 신념 때문이다.(Star)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이 믿던 “법과 정의”가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선택한다.(Soliloquy) 자신이 믿던 법과 정의가, 정의가 아니라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회피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을 부정하는 선택. 역설적으로 가장 진실된 인물 중 한명.

 

그리고 에포닌이 있다. 그녀는 코젯을 사랑하는 마리우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질투하거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그래서 마리우스가 부탁한 편지를 코젯에게 전하고 오는 길에 시민군의 바리케이트 뒤에서 총에 맞아 죽어간다. 뮤지컬에서 가장 슬픈 장면. 그녀가 부르는 On my own도 잘 알려져있는 감동적인 곡이다.

 

그리고 앙졸라를 비롯한 학생과 시민들. 그들은 혁명을 위해서 싸우고 바리케이트에서 최후를 맞는다.(내가 본 공연에서 앙졸라 역은 흑인배우가 맡았는데, 카리스마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음시대의 혁명은 노동시장 밑바닥의 이주노동자로부터?) 그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바리케이트에 남는데, 광주에서 도청에 남은 시민군을 떠올리게 한다.(Drink with me ; 최후의 전날, 바리케이트에서 술을 나누는 시민, 학생)

 

이들 비극적인 인물들이 불러일으키는 숭고함은, 내가 나 자신에게는 어떻게 충실해야할지, 어떻게 존재를 걸어야할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번 여행 속에서 본 훌륭한 그림들이나 이런 작품에서 느끼는 숭고함은, 쓸쓸한 자유와 함께 이번 여행의 주된 느낌 중 하나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느낌들로 꽉찬 작품.

 

 

이제 아쉬운 런던 일정을 마치고 빠리로 떠나는 유로스타 기차 안이다. 워털루 역에서 빠리 북역까지, 영화에서만 보던 체크무늬 치마를 입은 스코틀랜드 홀리건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내내 시끌벅쩍거리는 2등석 기차 간. 빠리에 영국팀의 축구경기가 있나보다. 막 도버해협을 지하로 건넜다. 이제 프랑스의 끝없는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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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지음 / 한길사


비극과 혁명, 그리고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

결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의 개념화에 입각해서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정치에 대한 비전은 비극적tragique이라는 점을 인정하자...(중략).. 그것은 '대중들'(피지배 계급들, 인민계급들에 속하는 개인들의 잠재적 통일성)이 돌이킬수 없도록 분할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대중들이 두개의심금들, 그들 자신의 가상의두 개의 실존및 조직양식들 사이에서 내재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자.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또그 힘이 단순한 '관념들'의 힘과는 비교될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기능작용에 부합하는 '정상적' 행동과그 핵심에서는 항상 이미 잠재적 반역이 살아있는 그들의 경험의 공동체적,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적 결과들 사이에서 말이다. 그런데 후자의 측면이 전자의 측면보다 우세할 것이라는 어떤 보장도 절대로 없다.그 역도 마찬가지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혁명적 정치가 비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혁명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왜 비극이며, 또 그것은 비관주의 혹은 종말목적론과는 왜 구별되는 것일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보증도 없는 현재의 운동이다.(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를 위한 11개의 테제/발리바르)  따라서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정세의 변화, 대중의 움직임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실패해왔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미망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투쟁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전에 쓴 포스트 <판의 미로, 랜드 앤 프리덤, 카탈로니아 찬가> 에서 언급한 것처럼,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운명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80년 광주에서 도청에 남은 시민군에게서, 1944년의 스페인 반군에게서 발견한다. 이것은 안티고네가 죽음의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파멸에 이르는 운명 앞에서도 진실을 대면하려는 것, 자신이 죽을 운명으로 예언된 전투에 스스로 나서는 아킬레우스와 같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의 의미는 이러한 운명 앞에 선 주체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것에만 있지 않다.저자는  예술형식으로서 그리스 비극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시민의 시대'에 적합한 형태, 폴리스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서사시는 세계(존재)의 총체성을 반영하고 정신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서사시가 보여주었던 질서있고 조화로운- 완전한 삶의 모형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 해체되면서 개인을 자각하는 서정시가 나타난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Sappho는 이때 등장한다. 시인이 자신을 기억 속에서 반성할 때, 자신은 자립적인 정신으로 나타난다.

서사시의 비극성은 죽음과 삶의 비극성도 완전한 삶의 일부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으로 긍정된다. 이에 비해서 서정시의 비극성은 주체의 갈등과 분열에 뿌리를 둔다.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주체(조건과 정념)의 변화에 따라 주체가 타자가 되는 속에서 발생하는 슬픔을 보여준다.(아마도 그것은 시간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순간 안에도 존재하는 주체의 분열과 갈등을 생각해보자.)

(한편, 저자는 비극은 자기연민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극은 정신의 숭고함을 표현하지만, 특히 서정시의 경우에는 나르시시즘이나 자기연민으로 후퇴할 수 있다. 그런 예로 김수영의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를 든다. 우연찮게도, 나는 다른 글(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에서 김수영의 이 시를 비판한 적이 있다.)

자, 이제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비극의 시대. 비극이라는 예술형식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고립된 주체를 공동체의 시민으로 도야하기 위한 예술. 사람들이 함께 비극 공연을 감상하고 광장에서 만날 수 있게 한다. 예술의 형태에 있어서도 코러스와 대화로 구성된 공연방식은 시민들의 교통을 상징한다. 그래서 코러스보다는 대화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코러스가 나타내는) 공동체로의 고양 이전에 시민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보존하는 가운데에서도 서로 마주치고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러한 교통이 비극을 통해 느끼는 슬픔 속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그/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그/녀가 내 속에 들어와 머물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녀의 슬픔이 내 속에서 쉴 때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속에서 타인의 슬픔이 고요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인 것".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모두 고통받았고, 슬픔 속에서 평등하게 서로 만나게 된다.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눈물 속에서 자신의 슬픔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예술인 그리스 비극이 가장 위대한 정치적 예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혁명적 정치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 한, 혁명적 정세를 이유로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지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을 보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점에 대해서는 최원씨의 <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이라는 글 참고) 책의 서문 한 구절을 인용하자.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치는 내가 너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가장 본질적인 계기는 만남이다. 그런 한에서 정치적 예술이란 단순한 저항예술도 아니고 반대로 관변예술도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적으로 만남을 지향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참된 의미에서 타인과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만남은 슬픔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이것에 대한 가장 심오한 증거이다. 그것은 정치적 예술로서 만남의 총체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만남이 오직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정치적 예술은 비극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 25쪽

물론, 경험 속에서는 유사한 슬픔을 공유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다. 만남의 그런 불가능성은 슬픔을 주체 안에 가두어 둘 것이지만, '자기연민'이 아닌 '교통'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처음 인용했던 발리바르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자. 비극적 관점은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과잉결정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사고.  혁명은 "낙관도 비관도 아니고 승리도 패배도 아닌 비극"인 이유.(『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윤소영)

그러나 비극적 관점이 비관적pessimiste 관점은 아니며, 종말목적론적fataliste 관점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든 '계기'에서(모든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모순들 속에 착근된 하나의 가능성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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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 한 권. 슬픔을 정념으로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 책. 따라서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나의 슬픔 때문에/에도 불구하고 타인들-그/녀들과 만날 수 있어야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책. 따라서 마침내 '나'라는 자명하지 않은 주체에 대해서 반성하고 고통의 원인을 인식하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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