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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간단하다.
자폐성 장애학생이 통합반(원적반) 영어 수업 시간에 소란을 피워, 비장애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했다.
영어 교사는 특수교사를 불렀고, 특수교사는 장애학생을 지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특수교사는 어머님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말을 잘 듣질 않으니, 학교에 열흘 동안 오지 않게 하려는데, 동의하느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알겠다'고 했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 행동을 일으켰다고 해서 집으로 보내 학교에 열흘 동안 오지 마라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특수교사에게 따져 물었고, 특수교사는 해당 상황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이런 특수교사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학교엘 찾아갔다.
교장과 교감, 특수교사 2명, 부모님과 그리고 나.
특수교사 해명 요지는, '지난 번 아이가 문제 행동을 일으켰을 때, 4일 동안 학교오는 것을 금지시키고 나니, 그 문제 행동이 줄어들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거듭 문제 행동을 일으켰기에, 학교오는 것을 금지시켰고, 분명히 어머님도 동의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교사의 이런 판단, 즉 학교 오는 것을 금지시키니깐 아이가 좋아졌다는 것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으셨고, 때문에 그 자리는 약간 언성이 올라갔고, 서로 각자의 입장만을 제시하는 식으로 흘렀다.
우쨌든, 결론은,
어머니가 원치 않는 방식임을 미처 알지 못했으며, 그 점에서 있어서 소통이 충분치 않았고, 어머니가 서운하게 생각하게 된 점에 대해, 교사로서 사과드린다는 식으로 상황은 매듭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나로선 앞의 글에서 썼듯이 통합교육과 장애학생의 현싱이란 점의 차원에서도 고민을 다시 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방문을 통해 특수교사의 교육적 행위를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만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특수교사는 그 행위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고 나와 다시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님의 이해가 적절치 못한 대목이 있다는 내용이 주되었고 소통에 있어서 충분치 못했다는 식의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행위의 의도, 즉 '교육 행위'였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나 역시, 그것이 '교육 행위'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다만, 교육 행위라고 해서 학교를 보내지 않는 것이, 설령 그것이 장애학생에게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적절했는가 라는 점이다.
나로선 '적절치 못했다'고 주장한 반면, 교사들은 적절성 여부보다는 오히려 '이후에 장애학생에 대한 개입의 소극성'을 주로 이야기하였다.
맞다. 이런 일 터지면, 어느 교사라 하더라도 해당 아이에 대한 교육적 행위를 실행하기가 쉽진 않다. 부모님들은 대체로 학교 내에서 조용히 있는 것이 별 문제 없이 학교 다니는 것이고, 따라서 교사들은 가급적이면 문제 여지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 일도 결국, 통합교육이 잘 되지 않는 아이를 통합시킨다고 원적반에 보내었고, 그것이 사단이 되어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들은 가급적이면 특수학급에 아이를 돌볼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3학년까지 보낼 수 있다. 그리 되면 통합교육인가? 아니면 반통합교육인가?
어렵다.
다만, 나로선 여전히 학교에 보내지 않는 행위를 교육적 행위라는 교사들의 의견에는 이해가 가지만, 동의는 하질 않는다. 그것은 '차별'이기 때문이다.
"모든 요구가 권리 주장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실현 가능한지 인간 생활에 근본적이고 긴요한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 존엄성을 도무지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라 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것이 인권의 대상이 된다."(류은숙, 인권을 외치다, 푸른숲,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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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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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동안 둘째 녀석의 학교 교장과 싸우고 나서 해결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몇 번 땡땡이 쳤다고 성적표에 나와있어서, 붙잡아 놓고 사실여부를 물어 봤더니 안 그랬대요. 다른 것은 모르지만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 정정을 요구했죠. 장황한 편지를 쓰고…장작불님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그 편지 내용의 한 구절이 생각 나내요. 이런저런 이야기 가운데, “우리는 [나와 아내] 한국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학교를 땡땡이 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반대로 선생이 학생한테 “학교 오지마”하는 것은 저로서는 상상이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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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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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쓰게 된 배경을 좀 더 설명하자면둘째 녀석의 반에 이름이 비슷한 베트남 학생이 한 명 있는데, 선생들 중 몇 명이 그 둘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결석했다는 기록은 선생이 학생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들을 구별되는 개인으로 보는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점과 우리는 학교를 땡땡이 치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또 둘째를 그렇게 가르쳤지 때문에 둘째가 절대 땡땡이 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점을 강조했죠. 근데 둘째가 학교 결석을 허용하지 않는 부모를 두려워서 거짓말을 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지요.
저희들에게는 바로 이 점이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던 점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염려했던 점은 상황이 선생은 둘째를 “자신에게 불리한 경우 거짓말을 하는 학생”으로 낙인 찍고, 둘째는 반면 개인으로서 요구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 즉 다른 이와 구별되는 주체로 대해지고 다루어지는 것을 방기한 선생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상황으로 발전할 수가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선생과 학생간 이런 감정이 불거지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인간 존엄성을 도무지 유지할 수 없는 것, 그것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라 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것이 인권의 대상이 된다.”라는 인용문에서 이야기되는 기본권리는, 그 권리를 상대가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그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을 비참하게 (특히 나이가 어릴 경우) 만드는 권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런 비참한 감정은 혐오로 표출되지 않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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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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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곳, 사람끼리 관계 맺는 공간, 어디에서든지 마찬가지겠지만, 학교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중의 하나는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유토피아님이 편지를 쓴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타당한 문제제기라 여겨집니다. 물론 둘째가 자신으로서는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고 넘어갔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유토피아님의 문제제기로 인해, 개인적으로는 나름의 정당성을 확인했을 것이니 다행스러운 일 아니었나 합니다. 얼마 살진 않았지만, 타자에게 신뢰를 받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나마 쌓은 신뢰를 유지하는 일은, 더욱 어렵더군요. 물론 신뢰를 잃기란 유리 깨기보다 쉽더군요. ^^; 아마 둘째녀석의 담임도 그런 상황 앞에 섰던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기 있고 현명하게 수습했다면 오히려 신뢰를 잃어버릴 상황이긴 했어도 신뢰를 쌓을 수 있었겠지만, 비겁하게 미봉하려 들었다면, 둘째는 오히려 '혐오'감을 느끼는, 그런 상황과 만나기도 했을테지요... 전자이기를 바래봅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