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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권교육 단상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장애이해교육'이니 '장애인식개선교육' 등에서 대체로 이루어지는 교육 내용은, 아니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수준은 '장애인을 도와줘야 한다. 배려해야 한다'는 식의 도덕적 훈계의 확인이다.

 

사실, 이런 교육은 기존의 관점/태도를 더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낳기 어렵다. 오히려, 왜 도와줘야 하는가? 왜 장애인을 배려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아래 글은, 인권교육센터 '들'의 상임활동가인 한낱님이 쓴 글이다. '장애인을 도와줘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장애인과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는가' '장애친화적인 환경을 어떤 식으로 구성할 것인가' 하는 관점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장애인인권교육과는 차별적이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근본적인 문제와 마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인권교육은 '도발적'일 필요가 있다. 도발적이라 함은 기존에 견지하는 관념에 대해 정면으로 묻고 스스로 자기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권'의 출발도, 이런 '도발'과 '감행'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한낱님의 말처럼 '인권이 나와 상관없다고 여긴다면, 그저 남의 이야기라면, 그것은 도덕 이야기이고, 하나마나한 소리에 불과하게 된다'

 

따라서 남는 과제는, '도대체 장애인의 인권과 당신의 인권이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우리 각자가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성글더라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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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몸’으로 통하다

대안학교 청소년들과 함께 장애인권 공감하기

한낱
 
"청소년들과 함께 '장애인권교육' 해본 적 있어요?”

그동안 청소년들과 함께 '청소년인권교육'을 해 본 경험은 꽤 있다. 장애인권 활동가나 장애인 당사자 분들과 '장애인권교육'을 해본 경험도 꽤 있다. 자기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뿜어져 나오는 인권의 목소리는 명쾌하면서도 우렁차다. 그런데, 비장애 청소년들이 대다수 모인 자리에서 장애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권이 내 얘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로 남아 버릴 때, 그것은 인권교육이 아닌 도덕 교육으로 흐르기 쉽다.

어떻게 내용을 구성해야하나 혼자 난감해하다가 장애 인권단체 활동가 몇몇에게 조언을 구했다. 청소년들과 함께 장애 인권 교육을 진행했던 경험담을 쭉 듣게 되었다. 그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 역시 나의 고민과 맞닿아 있었다. 대부분 초․중․고등학교에서 진행되는 장애 관련 교육은 ‘장애이해교육'인데, ‘몸이 불편한 장애인 친구를 잘 도와주어야 한다, 특별히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청소년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

'학생들이 서로를 돕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시작 아닌가?' 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조금만 질문의 방식을 달리하면, 인권의 시선과 도덕의 시선이 가진 근본적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비장애인은 도움을 주는 주체로, 장애인은 도움을 받는 대상으로 고정되는가?' 거리에 나온 장애인을 보면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사실상 장애/장애인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장애인을 도와주어야 한다,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입장만을 되풀이 한다. 이러한 껍데기 도덕을 깨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주체이며 같이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느끼고 생각해보는 것이 장애인권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나아가 '장애인은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장애 친화적으로 구성되지 못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소수자/약자화 된다는 것'을 이야기해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

어떤 식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 ‘몸’을 매개로 청소년들과 소통해보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몸’이 나의 경험, 상처, 기억이 담겨있는 공간이듯, 장애인에게도 ‘몸’은 그러한 공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장애가 불우하고, 불행한 족쇄가 아니라 나와 같은 혹은 나와는 조금 다른 경험과 기억이 담긴 ‘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장애인권 문제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하면서.

날개 달기 - 자화상, 내가 보는 나

자화상 그리기를 하려면, 나와 만나는 시간이 열려야 한다. 준비해간 몇 가지 사진자료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몸'하면 떠오르는 느낌이 뭐냐고 묻자 '야하다, 더럽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내 몸을 봐도 그런 느낌이 드나? 왜 우리는 '몸' 하면, 누군가의 벗은 몸, 그것도 잘 빠진 몸매의 남성과 여성을 떠올리게 될까?" 질문을 던지며 현대 여성 화가 제니 사빌의 자화상을 보여 주었다. "이런 자화상 본 적 있어요?"

 
위 사진:[제니 사빌의 자화상]


다소 충격을 받은 듯 한 친구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어떻게 저런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일 수 있냐'는 투의 야유. 곧이어 "거울을 자주 보나요? 내 모습을 뚫어지게 본 적 있나요?"라고 묻자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공포를 느낀다고 대답한 친구도 있었고, 위로를 받는다고 대답한 친구도 있었다. 여러 아마추어 혹은 프로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들을 쭉 보여주고, 마지막으로는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여주며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위 사진:[프리다 칼로의 자화상들]


프리다 칼로는 18살 때 전차 사고를 겪고, 대부분의 신체가 부서지는 경험을 한다. 그 때 병원 천장에 거울을 붙여놓고 자신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 퇴원 후에도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자화상의 느낌들이 모두 다르다.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림의 색감도 구도도 달라지는 것……. 졸고 있던 친구들도 일어나 이야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몇몇 여성 친구들은 상당한 감정이입을 했다. 프리다 칼로 자화상에 대한 느낌들을 먼저 나누고, 프리다 칼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사연이 담긴,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담긴 자화상을 그려보기로 했다.

더불어 날갯짓- '도움 주기'에서 '함께 살기'로

친구들의 그림 실력에도 놀랐지만, 자신을 표현해내는 방식도 놀라웠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잘려진 머리카락과 다시 자란 머리카락을 동시에 그려 놓고, 어렸을 적 머리를 잘렸던 기억에 대한 상처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 어떤 친구는 화면 가득 자신의 감정에 따라 다른 색깔로 빛나는 눈을 그려 놓았다. 거리 화가가 그린 캐리커처 느낌으로 나른한 자신과 에너지를 얻은 자신의 모습 두 가지를 그린 친구도 있었다. 도화지를 네모 칸으로 모두 분절시켜놓고, 자신의 각각의 신체 부위를 하나 씩 그려 넣은 후, 각각의 사연을 발표해준 친구도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집 떠난 파란 강아지로 그린 친구도, 코스프레 복장을 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의 그림을 보면서 서로 질문하기도 하고, 그림의 느낌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위 사진:[청소년들이 그린 자화상]


자화상 감상을 나눈 후, 바로 장애여성들이 그린 자화상과 장애 여성 사진전에 전시되었던 사진 한 컷을 보여주었다. 내가 내 몸을 느끼고 사유하듯, 장애 여성도 자신의 몸을 느끼고 사유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위 사진:[출처: 장애인권교육네트워크]


장애,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을 묻자, ‘휠체어, 목발’과 같은 보장구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도움 받는 모습, 구걸하는 모습 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왜 우리는 그런 모습만을 떠올리게 되는 걸까?",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애가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라고 묻자 몇몇 친구들은 당황스러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랑한다면 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고 대답한 친구들이 많았다. 어떤 친구는 "누군가의 상반신만 사랑하거나 하반신만 사랑할 수도 있는 걸까?"라고 묻기도 했다. 장애인에게 장애는 분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장애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라는 대화를 나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연애를 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가는 극장에 갈 때, 식당에 들어갈 때도 진입로가 없어서 벽에 부딪혀야 하는 지극히도 ‘불편한 현실’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위 사진:[사진출처: 경향신문]


스웨덴 장애 여성과 한국 장애 여성의 하루를 비교한 그림을 보면서도 친구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장애인들이 살아가기 힘든 것 같아요." 등과 같은 이야기를 던졌다. "스웨덴보다 한국이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심한 이유는 뭘까?"를 질문했고, 그것이 장애 친화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뭔가 부족한 존재,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남게 되는 것과 연관된 문제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머리를 맞대어

프랑스의 공익 광고를 보고 나서 나눈 대화들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휠체어 중심, 수화 중심, 점자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된다. 광고를 보고 나서 한 친구가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제가 지금 보다 훨씬 편해질 것 같아요." 청각 장애를 가진 친구의 감수성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다. 장애 인권 수업이라고 해서 장애를 가진 친구를 의도적으로 더 발표시키거나, 그 친구를 신경 써서 수업하는 것은 오히려 장애 당사자 친구에게 부담감을 갖게 한다. 자연스럽게 ‘함께’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종종 이 친구는 작은 활약들을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교육을 정리하며 스웨덴에서는 외국 이민자들이 장애인으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친구들이 다들 놀라워했다. 통역 지원과 언어 학습 지원을 위해 장애인으로 분류된다는 점, 이와 같은 사회에서 장애는 우리 사회처럼 족쇄가 아니라 정당하게 편의를 제공받아야 하는 어떤 것이라는 이야기도 더불어 나눴다.

'장애인에게 내가 무엇을 해줘야 하는가'에서 '장애인과 함께 살기 위해 무엇이 변해야 하는가'로 문제의식을 '약간은' 이동할 수 있었던 시간. 언제나 그렇듯 인권교육이란 변화를 일굴 수 있는 작은 날갯짓에 불과하다. 이 작고 우연적인 계기를 자기 삶의 돌풍으로 만드는 것은 참여자의 몫. 인권교육에서 중요한 건, 역시 '무엇을 매개로 서로 공감할 것인가'를 잡아내는 일이란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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