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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의 방법적 차이를 인정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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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들...
    장작불-1
  3. 2006/12/25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해
    장작불-1

운동의 방법적 차이를 인정하는 법?

 

07, 1, 25, 01:31



교육권연대 일일호프를 앞에 두고 빚어진 논란,

운동의 방법적 차이와 역할에 대한 인식



‘일일호프 해보자. 돈을 벌면 좋고, 못 번다 해도 홍보효과 있지 않겠는가’

일일호프 제안의 맥락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동의했다. ‘일이야, 박간사가 알아서 하니깐, 하면 좋지’ 정도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일을 추진했고, 각 단체들이 맡을 금액 등을 분담하였다. 단체 규모 등을 고려하여 차등 분배했고, 분배 금액에 대해 구성원 모두 동의했다. 목표액은 1백만원.


반론이 있었다.

‘돈 1백만원 벌려고 일일호프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차라리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각 단체 분담금을 합쳐서 돈을 내자. 그리고 일일호프 말고 다른 일도 많은데, 굳이 일일호프라는 수단/방법을 택하여, 교육권연대를 홍보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름, 타당한 반론이다. 주장을 거칠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교육권연대의 홍보/활동 차원에서 일일호프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가능하지 않다.’ 이 논란의 핵심을 짚어보자. 


나는,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활동이든지 간에 그 활동 과정과 결과 속에서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하는 활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 활동의 ‘원칙’이라고 한다면, ‘일일호프’라는 수단/방법이 최고나 최선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악은 아니라고, 적어도 ‘원칙’을 배반하거나 거스르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 내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가 되어야 한다.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하는 활동’으로서 일일호프를 준비한다면, 그에 따르는 부수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교육지원법의 내용을 담은 홍보물이라든지 부산지역 부모들의 활동을 담은 영상물/소식지 등이 최소한의 준비일 수 있겠다. 이를 통해 그 자리에 온 장애 학생 부모들이 예의 ‘교육권연대의 필요성을 환기/의식한다면’, 그런 계기가 된다면, 이를 두고, 나는 일거양득이라고 말하겠다. 비록 많은 돈을 번 것은 아니라 해도(많은 돈을 벌면, 더욱 좋겠지만), 돈도 벌고, 구성원/단체 간 결속력도 강화시켰으니 말이다. 만약 이런 준비 없이, 여느 시민사회 단체들이 하는 것처럼, ‘하루 술 먹고 노는 마는’ 식이라면, 이것은 아니 하는 것이 옳다.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성원 간 결속력을 높이기는 커녕, 서로에 대한 실망만을 가득 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실 어떤 단체이든지 간에 이러한 행사를 준비하면서 서로에 대한 존경과 관계의 깊이를 확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서로 실망하면서 행사를 준비하고 소모적으로 치루어낸다.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내가 교육권연대의 홍보/활동 차원에서 일일호프를 하자고 주장한다면, 적어도 저 정도의 준비는 해야 한다. 그것이 내 책임이고, 의무이다. 만약, 해당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교육권연대 구성원 간 결속력을 다지는 계기로서 일일 호프를 활용하지 못하였다면, 그것은 내 역량 부족이고, 기획 실패이다.


반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쪽이 있다. 일일호프보다는 다른 활동 방안/수단을 통해, 교육권연대 활동 홍보를 하자는 것이다. 일일호프를 교육권연대 활동의 근본/원칙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나는 해당 ‘근본/원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말을 길게 하기 어렵다. 다만, 교육권연대의 활동 ‘근본/원칙’에는 해당 일일호프가 ‘그르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며,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 나로서는 예의 선택을 ‘존중’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내가 취해야 할 처신이 있다면, 최대한 깔끔하게 방법적 이견을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 서로 방법적 이견이 다르다고 해서 이후에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들 대다수는 ‘좋은 게 좋다’ 식의 미봉적 선택을 취하며, 나 또한 여기에 따랐다.


‘일일호프의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후 활동을 고려하여 이번에는 분담금을 내도록 할 것이다. 다만 현재 책정된 금액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대목이 있으니, 다소 감한 금액 정도는 낼 용의가 있다’


나는 방법적 이견을 달리한 단체의 해당 제안을 ‘호의’로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방법적 이견’을 확인한 마당에 굳이 아니 내어도 될 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안한 이가 언급하였던 것처럼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사실상 ‘논리적’ 차원이고 인간관계이니 만큼 ‘정서’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사실 내가 ‘호의’로 해석한 대목도 상대방에 대한 내 호의적 정서가 개입해 있다. 만약 상대방이 다른 이였다면, 나와 정서적으로 공감대 형성이 덜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거절’했을 개연성이 높다. ‘방법적 이견이 다른 마당에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다른 계기가 되면, 함께 해 보자’ 정도로 언급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 돈을 두고, 마치 우리를 ‘동정’하는 식으로 이해했을 개연성이 높다. (그래도, 상대방이 주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대부분 일반적 사람이라면 그처럼 ‘거절’을 당했다면, ‘알겠다. 그럼 그리 하시라’고 말하면서 거두어들일 것이다. ‘나는 갑갑할 것, 딱히 없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의 처지 아닌가’ 식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연대하는 구성원으로서 방관자의 위치로 서는 것이다. 이것이 ‘정서의 작용’이며, 대부분 사람이 보이는 평균적 행위이고, 일상의 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나의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평균적인 사람들 대다수는 해당 제안을 ‘불편해 하면서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언급한 바, 우리들은 ‘깔끔하게 방법적 이견을 인정’하여 적어도 이 사안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사안을 매듭짓는 형태가 아니라, 이후 관계를 고려하여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제안을 수용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각각의 심리 동학을 엿보면 어떨까?


일단, 방법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나, 주는 입장에서는 말했듯이, ‘이후에 함께 활동을 계속 할 테니, 그래도 아예 손 놓아 버린다면, 서운함이 더욱 커지 않겠는가. 그러니 모든 금액은 우리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이고, 이 정도의 성의라도 보여주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라고 인식했을 개연성이 높다. 받는 입장에서는 깔끔하고 합리적으로 ‘받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인지도 모르나, 대부분 ‘받는다’. 물론 받으면서도 예의 호의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언급했듯이 ‘아니 받으려다가, 주는 것이니 주는 사람 입장에서 무안해할까봐 받는다’ 식의 생각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또 다른 정서적 서운함을 낳기도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어렵게, 하는 것인데, 왜 이처럼 거칠게 대하는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닌가?’ 라는 식의. 뭐, 내가 독심술가가 아니니 이 정도로 정리하자. 다만 이와 같은 심리적 작용들이 오가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서로 아니 해야 좋을 계약이라는 것이다. 해서 서로 손해 보는 계약이라고나 할까? 서로의 욕망이나 기대를 서로 달성시킬 ‘의지’나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서로 기대하고 있으니, 어찌 관계가 파토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면 ‘돈’을 아예 아니 내는 것이 ‘타당한 처신’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사실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호의’로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지 모른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는 사람과 정서의 공감대가 큰 사람이라면, ‘호의’로 이해하고 ‘감사함’을 표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는 사람과 정서 공감대가 크지 않은 사람이라면, 혹은 얼마간 정서적 불편함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방법적 이견을 달리 한 마당(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켜 버린 사람에 대한 정서)에 그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불편함’을 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속된 말로, ‘미운털’이 이미 박힌 상황에서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그 사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평균적인, 일반적인 인간관계이며,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 정도의 수준과 차원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


교육권연대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일일호프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가능하지 않다(가능하다 해도, 다른 일로서 교육권연대의 활동을 하는 것이 좀 더 낫다)는 상반된 주장을 살펴보면서, 방법적 이견이 다른 상황 앞에서 일반적으로 어떤 식의 관계 흐름이 구성되는가를 정리해보았다.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일일호프이든, 찻집이든지 간에 어느 활동이든 ‘교육권연대 활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의식/환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며, 만약 이와 같이 되지 않는다면, 흔히 볼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해서 서로 상처와 불신만 쌓고 마는 것’이라면, 아니 하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오늘 회의 때, 일일호프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면서, 이 점을 먼저 환기하면서 시작하였다. 그 결과,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다소 다르게, 어느 의미에서 간단하게 ‘하지 말자’고 결론 내렸다. 일을 중심적으로 해야 할 ‘발달부모회’의 입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나는 ‘존중’한다. 전교조나 한울, 그리고 뇌병변이나 참배움터의 경우 당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반면, 발달은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며, 따라서 발달의 선택에 따라 일일호프를 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면 좋고, 아니 해도 그만이다’는 전교조나 타 단체의 입장은,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취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형편이니 말이다. (여기에서 표를 파는 노동은, 일단 차치하자.) 그런데, 일에 대한 실질적 준비, 예컨대 홍보물을 비롯하여 영상물의 제작 등은, 내가 담당해야 할 몫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결국 당일 서빙 문제만이 남은 과제였다. 그처럼 간편하게 ‘과업이 부담스러우니 하지 말자’고 결론 내릴 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단, 방법적 이견을 달리하는 것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존중의 태도를 취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논의는,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다르게, 언급했듯이 퍽 간단하게 ‘하지말자’는 결론으로 끝이 났다. 이유는, 내가 제시한 우려 중의 한 가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 회의에서 ‘하지말자’고 결정한 우리의 판단이 틀렸다거나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로 하여금 고민을 하게 만든 것은 ‘책임과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일일호프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내가 ‘자원봉사자’를 섭외해서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그 정도의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이는 구성원 모두의 공통된 태도이기도 하였다. 즉 일일호프에 대한 매력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과 역할’ 문제는 여전히 나로 하여금 고민을 하게 만든다.


언급했듯이, ‘발달’은 타 단체들에 비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도자 단체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거나 역할을 생성하려 하기보다는, ‘왜, 우리는 이 만큼 하는데, 타 단체는 저것만 하는가’ 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는 발달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며, 어느 단체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발달이 교육권연대 내에서 이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존경과 지지의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며, 충분히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른스러우면서도 품위 있는 태도일 것이다. 문제는, 저 정도의 인식 수준으로는 하나의 조직/단체가 성장하기가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이번 일련의 상황을 통과하면서 내게 들었던 생각의 한 자락이다. 발달이 ‘하지 말자’고 내린 결정의 배경에는, 저 정도의 인식 수준에서 일처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방법적 이견을 달리한 한울의 입장을 존중했듯이, 예의 발달의 입장도 존중한다. 내가 보았을 때, 두 단체의 행위 수준은, ‘일을 추진하는 합리성과 어른스러움’의 차원에서 볼 때,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두 단체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은, 지금까지 누차 언급했던 바이다. 즉 우리들의 대개 수준이 저처럼 어느 의미에서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조악한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우리가 이 사회를 좀 더 낫게 해 보기 위해 사회 운동을 하고 있으니, 어찌 우리 사회가 발전이, 품위가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너무 위악적인 진술인가??? (한 가지 환기하자면, 이런 평가는 퍽 거칠기는 하나 어떻게 하면 좀 더 낫게 하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처럼 구구절절 쓸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이번 사안을 통과하면서 ‘방법적 이견을 달리하는 이들과의 소통’ 문제를, 한편으로는 ‘책임과 역할’ 문제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하였다. 아직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떤 처신이 좀 더 어른스럽고 품위 있는가를 말이다. 만약 내가 일일호프를 ‘강행’했다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을까? 언급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밟았을까? 아니면 최악은 피해갔을까? 글쎄, 내 능력으로 보자면, ‘최악’에 가까웠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아니 한 게 더 나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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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들...

지난 8월달에, 대한항공에서 지적(정신지체, 발달, 정신 등) 장애인 탑승 거부 사건이 있었죠.

 

오늘(28일) 위드뉴스를 보니깐, 국가인권위 진정을 받아들여 '철회'하겠다고 했다고 나오던데요.

 

그런데, 당시 이 사건이 촉발이 되어, 인터넷 다음에서 꽤나 논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반응을 나름대로 분석해서 보고 있는데, '장애인-비장애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분들이 적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지난 6월 즈음에 다음 아고라에서 '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이 있었더군요.

저도 '장애 운동가'랍시고 '비장애인'이라는 말을 썼는데, '왜 일반인/정상인을 일러, 비장애인이라고 해야 하느냐' 라는 문제제기는, 타당성 여부를 떠나 검토할 필요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헤아려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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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비장애인’ 논란을 지켜보며
드는, 몇 가지의 생각들. .


‘장애인’이라는 용어는 1981년 제정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1990년에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될 때, 당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장애자의 ‘자(者)’라는 글자가 ‘놈 자’라 하여 인격을 비하하고 일본식 표기이므로, 이를 ‘사람 인(人)’자로 바꾸어주라고 요구함으로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공식적인 법적 용어로 자리 잡았고, 다수 사람들은 ‘병신’이나 ‘불구자’, ‘비정상인’이 아닌 ‘장애인’으로 호명했다. 물론 ‘장애인’이라는 용어 역시 임의적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존재 규정의 측면에서 볼 때, 진일보했다 할 것이다. 이는 지난날 ‘장애를 가진 사람’을 규정했던 용어와 대비해서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장애인’을 일컬었던 단어를 나열해보자면, ‘병신, 불구, 폐질자, 앉은뱅이, 절름발이, 절뚝박이, 반신불수, 찐따, 쩔뚝이, 난쟁이, 곰배팔이, 외다리, 외발이, 외팔이, 장님, 맹자, 소경, 봉사, 애꾸, 외눈박이, 벙어리, 아자, 귀머거리, 백치, 정신박약아, 정박아, 미치광이, 정신병자, 미친 사람, 조막손, 육손이, 곱추, 꼽추, 곱사등이, 문둥이, 나병환자’ 등 정신/신체적 결손에만 주목한 호명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단어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장애를 가진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범위 내에서 저와 같은 부정적 용어는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 년 전부터 이른바 진보적인 언론 매체를 중심으로 ‘정상-비정상’의 구도를 탈피하고, ‘장애’를 기준으로 ‘장애인-비장애인’이라는 구도로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소수자였던 장애인이 다수자를 규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비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제기되자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일련의 사람들이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동의/공감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곧잘 제시한다. 내용인 즉, 비장애인은 ‘장애’를 기준으로 제시된 용어이고, ‘비(非)’라는 용어가 대체로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일반인’ 혹은 신체/지적 기능에 있어 ‘장애’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여 ‘정상인’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장애인의 반대어/개념은 비장애인이 아니라 일반인 혹은 정상인이라는 것이다. 이들 주장을 호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장애가 없는 자신들을 정의하는데 있어 ‘장애가 없는 상태’에 주목해야지, ‘장애가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정의/언어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장애인과 대비되는 차원이 아니라, 본래적 속성에 주목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이란 인터넷 싸이트에는 ‘아고라’ 라고 불리는 게시판이 있다. 장애인-비장애인 논쟁은 이 게시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민아’라는 아이디를 쓰는 어느 (여)학생이 “‘비장애인’이란 말 쓰라고 강요하지 마세요”라는 글에서 촉발되었는데, 내용인 즉, 장애인 행사(이 말도 쓰고 나니, 이상하다.)에 자원 봉사하러 갔는데, 인사말을 하던 중 ‘저희 같은 정상인.... 어쩌구 저쩌구’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장애인이 인상을 쓰면서 ‘정상인은 잘못된 말이다. 비장애인이 맞는 말이다’ 라고 하여 ‘과연, 그런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장애인이 하라는 대로 했다고 한다.)

‘민아’라는 이의 주장은 ‘정상인/일반인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제시하는 두 가지의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체적/정신적 기능이 정상적인 사람들은 ‘정상인’ 또는 ‘일반인’이고, 신체적/정신적 기능에 ‘장애’가 있는 비정상인 사람들은 ‘장애인’이다. 띠라서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 또는 ‘일반인’이다. 그러므로 ‘정상인/일반인’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② 그리고 장애인을 염두에 두어 배려의 차원에서 비장애인으로 부르거나 혹은 장애인이 일반인을 일러 비장애인이라고 부르기를 원한다고 해서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동정이다 (따라서,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장애인을 동정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①번의 근거는 이후 점검하기로 하고, ②번의 근거는 실제 많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내용이다. 인용문을 보자

“민아님, 당신처럼 정상인과 장애인과 벽을 두는 우리 정상인을 때문에, 그들의 살 권리, 살아갈 용기를 잃는 장애인을 위한 최대의 배려입니다.. 그래도 님아..정상인이라는 말을 굳이 써야겠습니까?” (떠나자, 민아님!! 답변해 주세요) “비장애인이라는 말은 장애인에 대한 자그마한 배려라고 생각하면 좋을듯 싶습니다.”(제트, 말에는 어감이라는게 있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는 호칭사용이 필요한 것입니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몸이 남들보다 약하다는 이유 때문에 열등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정도가 매우 심하다는거죠. 이러한 장애인들의 특성을 이 글쓴 님처럼 비장애인이라는 단어가 국어문법상으로 잘못된 말이고 장애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며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장애인들은 육체의 결함과 함께 정신적 결함도 함께 가지고 있으므로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 이다라는 말은 통용이 안되는 거죠?”(문경지교) “그거 한 가지만 가지고도 굳이 자연 법칙상 10%나 차지하는 신체장애(본인들이 원해서 된 것도 아닌데)를 자존심 상하게 할 거까진 없지 않아요?(ttzkldf)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은 '장애' 즉 이른바 '비정상'이 사회적 표준이 되어 그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관심과 노력이 전제되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에 의해 상처받는 우리의 이웃을 조금 더 생각 했으면 합니다.”(햇빛아래)

인용한 글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주장이 ‘비장애인은 장애인을 배려하기 위해 쓸 수 있는/쓰는 용어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민아’들은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장애인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동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비장애인이라는 우월적 처지에서 장애인을, 이른바 봐준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동정’과 ‘배려’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정상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반감 차원에서 비장애인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사람도 있기도 하다.) 적어도 저 위의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진술들을 통해서는 ‘배려’와 ‘동정’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여기에서 ‘배려’와 ‘동정’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 배려 :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거나 보살펴주는 것
* 동정 :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을, 또는 그런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알아주고 마음 아파하는 것, 또는, 그런 마음으로 도와주는 것

사전적 의미 차원에서 볼 때 위의 진술들은 ‘동정’에 가깝다. ‘배려’가 실천적 의미에 가깝다면, ‘동정’은 어려운 사정을 헤아리고자 함(마음 씀씀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동정’이 나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요는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비장애인이라고 부른다고 할 때, 이 호명의 조건이 장애인에 대한 배려나 동정에서 기인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런데 마음 씀씀이와 실천이 간단하게 분리될 수 있을까? 여기에 ‘동정’과 ‘배려’를 객관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즉 누군가의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를 두고 그것은 ‘동정’이니 ‘배려’이니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한편 장애인의 입장에서 비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은 어떤 내용을 의미할까. 이는 장애여성인 김효진의 글 <장애인 관련 용어에 대한 고찰>에서 적절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사회적 약자로서 범주화되는 장애인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장애를 기준으로 한 장애인 중심의 이분법적 사고”인데, “힘 있는 다수의 의도적인 편가르기나 분리와는 달리” 사회적 약자가 자신을 정체성을 구축하고 저항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

즉 사회적 약자 운동의 차원에서 장애인-비장애인 구도는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약자로서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했던 구체적 경험을 통해 제시하는 것이기에 나름의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 환자로부터 시작하여, 절름발이, 병신, 불구, 장애자, 그리고 비정상인이라는 개념 규정을 '당해왔고', 이는 장애인으로 하여금 자기 존재가 어디인가 결핍되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부정적인 용어들로 이루어져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장애가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장애가 없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장애’의 유무라는 일부의 차이로 인해 ‘병신’이나 ‘불구자’로 언어화 되었다. 하지만 이들 용어는 언급했듯이 장애인 스스로를 규정한 말이 아니라, ‘차이’ 나는 상황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사람들을 그처럼 규정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운동적 실천을 모색했고 그 결과 ‘장애인’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또한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장애를 가지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을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로서 규정했다.

이는 앞서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비장애인’으로 규정화한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표면적으로는 ‘비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쓰지만, 쓰는 의도는 다르다는 말이다.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동정 차원에서 스스로 비장애인으로 규정하여 ‘정상-비정상’이라는 언어 구도에서 비켜서고자 하는 반면, 장애인은 저항적 도구 차원으로 비장애인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각각 일견 타당한 대목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런 물음이 가능하다.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신체적/정신적 장애라는 인간 존재의 하나의 특성에 주목하여 규정화한 것이다. 그런데 비장애인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짝개념으로서만 성립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가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을까.

언급한 두 가지의 근거, ‘약자의 정체성 구축을 위한 저항적 차원으로서 쓴다’는 것과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쓴다’는 것이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두고 ‘비장애인’이라고 부를 만한, 불러야 한다 라는 주장의 필요조건은 되기 어렵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한편 이 두 가지의 주장과는 또 다르게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장애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해결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들의 주장은 앞서 두 가지보다 (과학적 사실에 바탕한다는 점에서) 좀 더 설득력을 지닌다. 다음 글을 보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5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장애인 숫자는 2000년의 145만 여명에서 215만 여명으로 약 70만 여명이 늘어났다. 매년 평균적으로 약 14만 여명이 증가했는데, 이 중 89%가 각종 질환이나 사고 등에 의한 후천적 요인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산업재해로 ‘장애’를 갖는 숫자가 매년 35,000여명이고, 교통사고로 임시 혹은 영구적 장애를 갖는 인원이 매년 100,000여명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노동부, 2002; 건설교통부, 2004). 게다가 이러한 사고 말고도 내외부 신체 기관의 질환 등으로 인해 장애인이 되는 비율이 전체 장애인 중, 약 52%에 이르고 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5년). 이러한 일련의 수치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 중 어느 누구도 ‘장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해준다. 즉 ‘장애’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박용민, 2006)

이 글에 따르면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언제나 ‘장애를 가질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저항적 수단’이거나 ‘배려의 차원’보다는 (과학적 차원에서) 좀 더 설득력이 높은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과학적 사실이 있다 해도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서 장애인의 짝개념으로서 비장애인이지, 이것이 ‘일반인이 아닌 비장애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충분한 근거가 되기에는 미흡하다는 점이다. 즉, 사회적 차원에서 장애 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일러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만약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장애인이 될 노출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면, 이는 ‘비장애인’이기보다는 ‘예비/잠재적 장애인’이라고 표현/언어화하는 것이 좀 더 적절/설득력이 높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인간언어의 특징이 대상/사물 현상을 기술하고 특성을 포착하여 이론화/명제화하는 것이라고 할 때, 비장애인이라는 명제어는 장애인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진위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정리한, 개념의 내포와 외연에 주목해보자)

정리하자면, 비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장애인의 짝개념으로서 쓸 수 있는 말이지, 어느 상황에서나 비장애인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하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어떤 언어 상황 앞에서 장애인이라는 존재가 자리한다면 그 때에는 비장애인이라고 쓸 수 있고 또한 써야 한다고 (심정적으로, 혹은 과학적 이유로) 생각하지만, 장애가 없는 상황에서 비장애인이라고 쓰는 것은 얼마간 어색하다는 것 정도이다.

이 긴 글의 너무 시시한 결론 같다. 이는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장애’라는 용어의 근본적인 한계/부정성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장애인-비장애인’ 구도는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용어 정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적어도 운동적 차원의 방식으로는 썩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일 수 있을까? 어려운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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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해

이 글은, 장애인에 대한 호명 문제를 두고 '장애우'라고 부를 것이냐, 아니면 '장애인'이라고 부를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장애운동사의 관점에서 살펴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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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장애운동사적 의미에 관하여> -



이 글은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한국 사회 장애운동사에서 어떤 의미가 함의되어 있는가를 소략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처음 의도한 것은 '장애인-장애우' 논쟁을 통해 '장애'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그러나 내 역량 부족으로 인해 논쟁 과정을 정리한 수준의 글이 되었다. 그럼에도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식어 가는 이 시점에 문제를 제기한 박지주씨들과 당사자인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정리한 글이 없다는 점에서 이 글의 쓰임이 어느 정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 해 본다.

'장애우' 라는 용어에 관한 문제 제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별 다른 호응을 얻지 못한 채 개인의 '불만' 정도로 치부되었고 연구소 역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애인이동권연대 전 사무국장인 엄태근씨와 지난날 연구소에 적을 두기도 했던 박지주씨가 이동권연대와 연구소의 게시판, 그리고 장애인 뉴스 싸이트 등에 기사를 올려 '장애우'라는 용어의 문제성을 적극적으로 환기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상당수 장애인들이 '장애우'라는 용어가 지닌 문제성에 공감하면서 연구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설득력이 높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으나, 연구소 입장에선 문제 제기의 쟁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를 불러 올 만큼 거친 대목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왜 그들은 장애우라는 말을 유포하는가" 라는 글에서 엄태근씨는 연구소를 일러 "장애인을 주체화하지 않고 대상화"하고 있으며, 연구소와 국가관료를 등치시켜 "장애인들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하여 이 같은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장애우'라는 용어의 타당성 여부라는 논쟁의 공통 지반을 마련하지 못한 채, 연구소와 감정적 대립을 불러왔다. 이동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있던 엄태근씨의 정치적 입지와 거친 문제 제기로 말미암아 장애 운동계에서 장애우 연구소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가 라는 생성적 논의/긴장의 장을 형성하기 보다는, 거칠게 말해 '연구소를 씹고 밟음으로서 이동권연대가 크려고 한다'는 오해와 억측을 불러온 것이다.

이동권연대나 엄태근씨가 실제 이런 의도를 지녔는가 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다시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사실 나로선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지금 연구소의 존재 의미/정체성을 비판하기엔 더러 비약적이란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유인 즉, 이는 이후 연구소의 해명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사회 장애 운동사에서 연구소의 역사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엄태근씨의 문제 제기는 그 의도야 무엇이었든지 간에, '장애우'라는 용어와 연구소의 현재 활동 상황을 혼용하거나 비약함으로서 '장애우' 용어에 대한 논의의 생산성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허나 이를 두고 엄태근씨의 거친 문제제기에만 책임을 두기 어려운 것이,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연구소의 응대 방식도 그 책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소는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해명 과정에서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단체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정체성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불성실하거나 안이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우선, 단체의 지향성을 드러내는데 있어 어떤 단체 이름을 쓰는가 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엄태근씨의 논의에 나 역시 동의한다. 그리고 어느 단체의 표지/이름이란 것은 사회 변동의 차원에서 혹은 단체의 정체성 변동의 산물로서 바뀔 수 있고 또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임을 밝히고 논의를 이어나가 보자.

연구소가 '장애우' 라는 용어에 대해 문제 제기를 받고 처음 해명한 글은 2002년 겨울호 회원소식지에 실려 있다. 그러나 연구소의 소식지라는 무게를 가진 책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실린 '장애우'에 대한 해명은 단순 소박함, 그 자체로 일관하고 있다. "처음 '장애우'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이지만, 아직까지 장애인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열악해서 우리 사회가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풀어가고자 하는 의도이다... 지금은 워낙 많은 곳에서 '장애우'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모두 나올 수는 있지만, 장애인을 지칭하는 단어에 대해 너무 얽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2002년 겨울호 연구소 회원소식지)라는 진술은 이를 보여준다. 이는 '장애우' 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단지 용어에 대한 문제성 정도로 인식했지, 장애인의 정체성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별 달리 주목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런 연구소의 무성의한 태도는 장애인 당사자인 박지주씨들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 대해 박지주씨들은 "사회적 약자가 되는 기준과 그 배려는 누가 하는 것입니까? 또한 더디더라도 함께 가자는 외침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장애우 용어의 지속적 사용은 끊임없이 장애인을 사회적 주변부의 존재로 무언가 계속 받아야하는 비생산적인 보호의 대상으로 낙인하고, 그런 영향으로 정책·제도·인식을 만들어 왜곡된 구조를 양산해 낸다고 봅니다"라고 연구소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언급했듯이 '장애우'라는 용어 사용이 이처럼 문제성을 내장했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 따져 봐야 할 문제다. 하지만 연구소의 이런 무성의함과 안이함이 장애인들의 이와 같은 분노, 혹은 논의 초점을 흐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할 수 있다. 이런 목소리가 거세지자 연구소는 2003년 2월호 함께 걸음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해 해명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 연구소는 지난 소식지에 실었던 '장애우' 용어에 대한 해명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왔다는 점에 대해선 밝히고 있진 않다. 또한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달리 '장애우'라는 용어 비판에 대해, "이 용어를 만들어 낸 동기나 과정,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말로서 '장애우'라는 용어가 생겨난 의미를 해명하고, 되려 이를 제기하는 이들의 태도를 더러 불온시한다. 이는 2003년 4월호 함께 걸음에 실린 "장애우(友)를 사용하는 우(優)를 범하지 말라"라는 글에서 "문제는 내용, 즉 맥락인데 여전히 장애 가진 사람을 대상화시키며 동정의 눈길을 바라보는 관점이지 '장애우' 용어 자체가 시혜적 관점을 부각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반복된다.

물론 이는 '장애우'라는 용어에 대한 박지주씨들의 문제 제기가 <장애우 라는 용어를 하루 빨리 바꾸는 것이 장애인 복지에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연구소의 정체성에 걸맞다> 라는 식의, 본래 맥락과 다른 차원에서 제기된 비판으로 인해 기인된 바가 없지 않다. 예컨대 2월 호에 대한 박지주씨의 반론 글 중에서 "초기 연구소를 만드신 분들이 장애가 있다고 해서 당사자 주의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진술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당사자주의가 무엇인가 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박지주씨는 '이 사회에서 배제 당한 채 살아온 중증장애인들만이 당사자주의에 합당하고, 하기에 우리 목소리는 정당하다'는 식의, 더러 단순한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오해를 불러왔다.

이런 식으로 문제 제기자와 당사자 간의 논점 일탈로 인해 '장애우-장애인' 논쟁의 요체, 즉 '장애우라는 용어를 장애인으로 바꾸는 것은, 오늘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장애인의 삶의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복원하는 데 있어 필요한 사안인가' 라는 논의는 초점화가 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현재까지 두고 본다면 연구소 입장의 최종본인 4월 호에서도 논의의 진척은 안 되고, '장애우' 용어에 대한 거듭된 해명에 이어 결국 문제 제기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무엇이라 부르든지 간에 '취향의 문제다' 라는 식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장애우다 라고 표현한다면 주체성이 결여"된 것이지, 혹은 "나는 장애인이다 라고 말하면 주체적인" 것인지 라고 물으며, "'나는 장애우다'라는 표현이 익숙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틀린 것이 아닙니다. 1인칭으로 사용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장애용어에 대한 선택권은 당사자들에게 있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용어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문제 맥락을 흐리면서 눙쳐 버리는 연구소의 입장은, 적어도 '장애우'라는 용어를 단체 명으로 삼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궁색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초점화 삼고 있고, 또한 삼아야 하는 것은 '장애우' 용어의 틀리고 맞음이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합당한가, 혹은 설득력이 있는가 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장애인-장애우' 논쟁과 관련하여 일련의 과정을 짚어보았다. 그렇다면 이 논쟁이 무엇을 낳았는가를 정리하는 장이 필요하겠으나, 언급했듯이 내 역량 상 이는 어려운 대목이다. 다만 이 논쟁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장을 살피고 난 다음, 무엇을 낳아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소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대체로 다섯 가지 정도의 반응을 보였는데, 첫째는 장애 운동이 여느 사회 운동처럼 내구성도 부족한데 이런 '용어'에 대한 논쟁은 장애계 내에서 분열만 불러오고 소모적이다, 그러니 싸우지 말고 대동단결하자 라는 식의 '좋은 게 좋다'형. 둘째는 장애인을 사용한다고 주체적이고, 장애우를 사용하면 비주체적인가 라는 식의 '논점 흐리기'형. 셋째는 '우(友)'는 운동적 관점이기에 장애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장애우라 부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막가파'형. 넷째는 장애인이란 법적 용어가 존재하고 연구소가 이를 바꾸자고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용어 사용을 사람들의 선택에 맡기고 그것을 존중하자는 '취향선호주의'형. 다섯째는 나는 '장애인'이지 '장애우'가 아님을 조목조목 밝히고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매김하고자 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나, 비록 '병신→불구→장애→?'라는 담론적 변화를 제시하진 못했으나,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지점과 방향을 헤아리는 글도 있긴 했다. 여기에서 '장애인-장애우'논쟁의 의미를 장애운동사의 차원에서 새겨볼 수 있다.

장애인-장애우 논쟁의 최종적 귀결은 표면적인 것만 두고 보아서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단체 이름을 바꾸거나 고수하는 것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중증 장애인들이 자신들을 규정하고 불리는 용어를 거부했다는, 이른바 '장애 담론'의 주체 변화/확장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은, 특히 '장애우'에 관한 문제 제기의 축을 이루고 있는 중증 장애인은 어떤 선택권/결정권도 없이 가족과 국가에 의해 배제/박탈당해왔다. 이는 그들을 호명하는 방식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장애인에 대한 호명은 중세적·봉건적 용어라 할 수 있는 '병신'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전후로 하여 산업 발달로 생겨난 후천적 장애인을 일러 이 사회는 '불구자'라는 용어로서 규정했다. 즉 "불구자라는 용어는 선천적인 장애보다 후천적 장애의 발생이 더 중요해져 가는 사회적 변동의 산물"이며, 이는 비장애인들의 새로운 인식의 결과로서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 같이 후천적 장애/인의 증가는 장애인에 대한 호명을 복잡하게 했으며, 이런 혼란 상은 1980년대 초반 법전과 일상적인 언어에서부터 여실하게 드러난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지칭은 법전으로 명시된 언어는 "불구자·심신장애자·심신박약자·신체 장애자"였고, 언론 매체에 사용된 구체적 용어는 "맹인·장님·소아마비·하반신 불구자·귀머거리·곱추" 등으로서 뒤섞인 채로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장애 운동계의 당사자들의 문제 제기로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장애인'이란 용어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장애인'이란 용어가 비장애인들 혹은 우리 사회의 삶의 자리까지 아주 조금이나마 실질적으로 스며든 것은 불과 몇 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유인 즉슨, 오늘날 장애인의 현실, 이동권과 교육권, 그리고 노동권의 열악함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장애인에 대해 병신·언청이와 같은 낙인(烙印)이 자리잡고 있음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애인'이란 법적 용어가 생긴 지 벌써 20여 년이 지났으나, 우리의 생각이나 행위는 '병신→불구자→장애인'이란 담론 변화와는 무관하거나 동떨어진 채로, 실질적 내용은 여전히 비장애인들로 하여금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부르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 오늘날 장애인이 처한 현실이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애우'라는 용어는 이런 실질적 내용이 부실한 상황에서 운동적 동력을 견인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기에 오늘날 '장애인-장애우' 논쟁은, 비로소 '장애인'이란 호명이 한국 사회에 '보편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즉 그런 장치마저도 거부해도 될 만큼의 운동적 역량을 견인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라고 하겠다. 근자 들어 전국에서 조금씩 생겨나는 중증장애인독립센터는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다만 우리가 좀 더 멀리 지향할 바란, 객관/현상적 지칭인 '장애인'이란 용어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이 사회에서 장애인이란 정체성을 담아내면서도 한 명의 동등한 인간으로서 보편적/실질적 지위를 지향하는 언어를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민중'이란 개념이 이 사회의 변혁 운동에 참여하는 구성원 전체를 일컫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 조건으로서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장애인-장애우' 논쟁이 '맞다, 틀리다', 혹은 '각자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식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와 목소리를 가지고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 지칭은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서 대상에 대한 인식의 폭과 정체성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되살리고 이를 지향한다는 장애 운동을 한다는 연구소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운동의 대상으로 선택'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선택'하는' 지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견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김규항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지금 여기에서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장애 운동의 원칙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언제나 호명의 대상으로 불려왔던, 즉 배제/박탈당해왔던 그 이들의 고통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태도, 신영복 선생의 말을 빌자면 '하방연대(下方連帶)' 바로 그 지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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