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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특집기획] 대공장 노조운동은 아직도 노동계급 운동의 중심인가

 

 

올해 금속 대공장의 임단협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무쟁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완성차 공장들과 더불어 민주노조 운동의 주축을 이루던 공기업노조와 조선소노조들은 이미 오래 전에 어용이 장악했다. 현재 대규모 작업장들 중 민주노조 진명, 정확하게 말해 민주노총 소속으로 남아있는 것은 완성차공장 노조들 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민주노조라는 완성차 대공장노조들이 해고자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보이고 있는 태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런 현실 때문에 수 년 전부터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노동귀족이라는 질타가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장 운동의 모습은 전혀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있다.
[The Focus]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대공장 노동운동을 진단해보는 기획을 준비했다. [편집자]

연재순서
⑴ 대공장 노조운동은 아직도 노동계급 운동의 중심인가?
⑵ 복수노조와 주간연속2교대제는 대공장 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⑶ 사회주의자들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대공장 운동의 보수화라는 문제는 꽤 오래된 얘기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보여준 대공장 노동자들의 높은 단결력과 투쟁력은 다른 부분들에 비해 노동조건의 급속한 개선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전노협 투쟁에 대한 대기업 노조협의회들의 방관 등을 지적하며 대공장 노동자들의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90년대 후반까지는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의 중심이자 전 사회적 투쟁의 전위부대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98·99년 대공장 노동자들은 비록 많은 한계를 보이긴 했으나 전 사회적인 구조조정에 맞서 가장 선두에 나서서 투쟁했다.
그러나 IMF 사태와 구조조정 이후 소위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대공장 정규직과 나머지 노동자들의 이해 차이는 매우 커졌다. 사회전반에 고용불안과 저임금 노동이 확산된 반면 자동차·조선·전자·철강 등 수출산업의 대자본들은 호황을 누렸고, 이에 따라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금도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거의 사라진 대신 비정규직·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투쟁과 촛불투쟁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건 투쟁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이런 투쟁들을 방관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해 노동귀족이라는 비판이 보수언론 뿐 아니라 진보진영에서조차 쏟아져 나오는 형편이다.


노동귀족?


하지만 노동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그래도 여전히 노동귀족이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독일의 사회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1885년 영국 노동운동의 보수화를 설명하기 위해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영국 노동운동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공장 노동자들과 대형노동조합에 소속된 숙련공들은 “15년 이상이나 고용주들이 그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도 고용주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으며 “노동자계급 중 귀족을 이루고 있다” 는 것이었다.
엥겔스 식으로 말하면 남한의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 역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98·99년 사이 구조조정 시기를 제외하면 20여 년 동안 노동조건이 후퇴한 적이 거의 없다. 자동차·조선 등 민주노조운동의 주축을 이루는 금속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은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며, 이들 산업에서 정규직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임금은 6~7천만 원에 이른다.
물론 법정노동시간에 기초한 기본급은 130~150만 원 정도에 불과하므로 6~7천의 연봉을 받기 위해서는 주 40시간의 법정노동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 현대·기아 등 완성차 공장을 기준으로 할 때 대공장 노동자들이 그런 고임금을 받기 위해서는 평일 8시간에 2시간 잔업을 하고 주말 특근 14시간을 해야 한다. 그 결과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의 평균노동시간은 현재 주당 60시간 이상에 이른다.
그런데 이런 장시간 노동은 대공장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다. 공무원과 교사 등 일부 직종을 제외하면 모든 산업에서 남한 노동자들 대다수는 여전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OECD의 2010년도 통계연감에 따르면 남한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노동시간은 2256시간(주당 약 45시간)으로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다. 작년 2월 통계청은 주당 54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가 674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2351만 명)의 28.7%를 차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평균 노동시간을 줄여주고 있는 것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저임금 단시간 노동자들로 보인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주당 26시간 이하로 일하는 단시간 노동자들이 220만 명이나 되고, 그 중 주당 17시간 이하로 일하는 노동자도 96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단시간 노동자들은 대부분 저임금 노동자들로 더 많은 시간 일하더라도 안정된 직장에서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싶어 한다. 물론 주당 50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150만 원 정도 밖에 못받는 노동자들도 대단히 많다. 이에 비하면 연봉 6~7천만 원은 장시간 노동을 감안한다 해도 대졸 정규직 초봉이 2600만 원 정도 되는 남한 사회에서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이 걸개그림처럼 강건한 남성노동자로 표상된 대공장 노동투사들이 억압
받는 모든 계층들의 투쟁을 이끌며 선두에 선다는 것이 90년대 운동의 일반
적인 인식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인식이 지금도 유효할까?

법제도적인 보장이 아니라 개별자본과 협약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금속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관계에 있으며, 비정규직노동자들의 4대 보험 가입률이 절반도 안될 정도로 낮은 남한의 복지수준에서 병원비· 학자금 지원, 명절휴가비, 주택융자 등 교사·공무원에 버금가는 수준의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다.
전반적인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시대에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누리는 이러한 지위가 특권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규직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선채용할 것을 단협 요구에 넣은 현대차 노조의 예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신의 지위를 대물림하고자 하는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욕구는 이를 반영하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은 이제 벗어나고 싶은 계급적 굴레가 아니라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특권적인 지위인 것이다.
물질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사회적·정치적 의식도 중산층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사회· 노동· 정치 문제보다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재테크와 노후 전망에 더 관심이 많다. 노동조합은 계급투쟁의 기관이 아니라 안정된 생활을 지켜주는 울타리로 여겨지고 있다.
촛불투쟁 때처럼 사회적 동요가 확산되고 있는 시기에도 투쟁의 기운은 대공장의 벽을 넘지 못했다. 대개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대공장 노동자들은 촛불투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현실은 공장 내부 운동질서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위 현장사안이 아닌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노조체계로 움직이는 데 익숙한 활동가들은 노조가 대여한 버스를 타고 오는 형식적 참여 이외에 자기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과거 투쟁에 있어 일반 조합원들을 동원하는 중추이자 노조 집행부가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일 때 아래로부터 비판자로 기능하던 대공장 현장조직들은 점차 대중투쟁의 구심이라기보다 공장 내부에 형성된 내부 정치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런 내부 정치시스템은 사측과의 관계에서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을 누가 많이 가져오는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 시스템에서 유사정당적인 역할을 하게 된 대공장 현장조직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노조 집행부에 올라가기 위해 조합원들의 실리적 욕구와 충돌하는 활동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실리주의를 표방하든 전투파를 표방하든 그 차이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가장 전투적인 활동가들은 해고와 구속으로 공장 밖으로 밀려나고 있지만 대공장 운동질서는 이를 방어하거나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2002년에 현대중공업 노조의 어용 집행부는 해고된 조합원들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했다. 해고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합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 모든 대공장으로 확대되고 있다.
외관상 가장 전투적인 외피를 쓰고 있는 현장조직들과 집행부마저 투쟁과정에서 해고된 활동가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투파라는 <금속노동자의 힘>이 집권한 기아자동차노조는 이번 단협에서도 해고자 문제 해결에 전혀 의지를 보이고 있지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보수성이 가장 극심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무엇보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문제이다. 금속대공장에서 비정규직은 주로 사내하도급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에서 근대적 산업화의 진척과 대공장 생산이 정착되며 사멸한 사내하도급이라는 고용형태는 남한에서 70년대 대공장 건설 시기부터 주요한 고용형태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87년 이전에는 정규직이나 하청이나 노동조건에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정규직과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본격적으로 차이가 나기 시작한 것은 소위 신경영전략이 도입된 90년대 이후부터로 보인다.
남한 자본이 2000년대 들어 세계시장에서 초국적 독과점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정규직노동자들과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 정규직 임금의 60~70%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있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확대에 기반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공장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정규직노동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차별적인 노동조건과 고용 불안정성을 감수하고 있다. 실제로 스스로를 비정규직노동자로 가장 먼저 자각하기 시작한 부위가 대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산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정규직에 대비해 자신들을 비정규직노동자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대중적인 투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03년부터였다. 2003년에서 2005년 사이 현대자동차 아산과 울산, 현대중공업, 금호타이어, 기아자동차 등 금속대공장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조가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2004년 금호타이어와 완성차 공장의 비정규직노조들이 잇따라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내면서 비정규직노조 건설은 철강과 전자 등 제조업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공장에서 건설되었던 비정규직노조들은 결국 노조로 안정화하는데 실패했다. 2005년 불법파견 투쟁이 사실상 패배로 돌아가면서 제조업의 비정규직노조는 대부분 식물노조가 되었으며, 어느 정도 노조로서 활동을 유지하고 있는 현대차의 세 개 비정규직노조(울산·아산·전주)는 모두 조직대상의 과반을 넘지 못하는 소수노조로 존재하고 있다. 조직대상 대부분을 조직하고 있는 유일한 하청노조인 기아차사내하청분회는 독자적인 교섭권과 쟁의권을 갖고 있지 못하다.

 

2008년 조직통합으로 해산된 기아비정규직지회의 파업투쟁 모습

 

 

 

 

 

 

 

 

 

 

 

 

 





남한에서 비정규직노조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보다 정규직노조의 벽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공장 정규직노조들은 예외 없이 사측의 탄압에 노출된 비정규직노조들을 외면했다. 그러나 기아자동차와 현대자동차 등지에서 비정규직노조가 탄압을 뚫고 현장세력으로 생존에 성공하자 정규직노조는 원하청연대회의와 같은 기구를 만들어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원하청연대회의는 그 이름과 달리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의 공동투쟁기구가 아니라 정규직노조가 자신의 교섭권을 이용하여 비정규직노조에 대해 간섭과 통제를 행하는 관리 기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조직력이 취약하고 극심한 탄압에 노출된 비정규직노조들은 정규직노조의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규직노조가 중재한 사측과 정규직, 비정규직의 3자 합의구조는 비정규직노조에게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 정규직 주도의 대리교섭기구일 뿐이었다. 정규직노조는 사측과 비정규직노조 사이에서 브로커 역할을 하며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확대되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기아차비정규직지회의 사례는 이러한 통제의 극단적인 예이다. 화성공장의 사내하청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한 기아차비정규직지회는 당시 조직대상의 과반 이상을 조직하고 있는 유일한 대공장 비정규직노조였다. 2005년 봄부터 정규직노조는 기아차비정규직지회의 의사를 무시하고 정규직노조로의 직가입 캠페인을 시작해 결국 기아차비정규직지회를 붕괴시켰다. 하지만 기아차비정규직지회가 스스로 해산하고 통합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규직노조는 지회자체가 분회로 전환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개별 가입원서를 쓰도록 요구했다.
기존 비정규직지회의 정통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비정규직지회의 조합원으로 인정되었던 2·3차 하청업체 출신 해고자의 조합원 자격문제가 수년째 해결되지 않는 것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1사1조직 관철 이후 사내하청분회로 이름이 바뀐 기아차비정규직지회는 쟁의권과 교섭권을 가지지 못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상급단체 금속노조의 방침인 1사1조직이 실현된 곳은 몇 군데 있지만 기존에 비정규직노조가 존재하고 있던 사업장 중에서 “조직통합”이 된 곳은 기아차 뿐이다. 이는 다른 대공장에서는 비정규직노조가 현장의 불안요소가 될 만큼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아차를 제외한 다른 사업장에서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노조에 대해 여전히 무시와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불법파견정규직화 투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경우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이 확대되던 시기에는 정규직 활동가들로부터 1사1조직 얘기가 살살 흘러나왔지만 점거투쟁이 접히고 노조의 조직력이 급속히 떨어지면서 1사1조직 논의는 다시 쑥 들어간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공장에서 안정적인 교섭구조를 흔드는 불안요소가 발생했을 때, 자본과 정규직노조가 함께 그 요소의 발전을 원천봉쇄하고 필요한 때는 노조를 깨면서 까지 통제에 나서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공장 정규직노조가 자본의 대리자로 기능하며 현장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대공장 투쟁의 부상과 신경영전략

남한에서 대공장 운동의 보수화는 크게 두 번의 계기를 거치며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90년대 초중반 신경영전략에 대한 대응에 실패하면사, 그리고 두 번째로는 98·99년 구조조정 분쇄투쟁이 패배한 영향이 크다.
우리가 흔히 대공장이라고 부르는 대규모 금속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까지 노동운동의 중심은 수도권에 소재한 중소영세사업장이었다. 몇 차례 폭동에 가까운 소요들을 제외하면 조직적인 대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85년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이 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방에 있는 대공장의 경우 80년대 노동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학생출신 활동가들의 현장이전이 상대적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80년대 많은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현장으로 계급적 이전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구로나 인천 등 수도권 사업장에 집중되었다. 지방에 있는 금속대공장으로 현장이전은 거리와 취업절차 등 여러 장벽으로 안해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87년 이전에도 몇몇 대공장에서 노조 건설을 염두에 둔 소모임 활동이 존재한 것은 사실이나 구로·인천 등지의 활동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70년대 국가정책에 의해 추진되어 수출과 자재 수입이 용이한 남부 해안도시에 주로 건설된 금속대공장 노동자들은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억압적 보나파르티즘 체제 하에서 소위 병영통제를 통한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 가혹한 착취에 맞선 노동자들의 집단적 반발이 소요 형태로 터져 나오는 경우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이럴 경우 공권력이 직접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하지만 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함께 대공장 노동운동은 남한 노동운동의 전면에 극적으로 등장했다. 새로운 대공장 운동을 이끈 것은 무엇보다 조선과 자동차공장들이었다. 87년 투쟁을 통해 이들 대공장에서 형성된 공장 질서는 전투적이고 적대적인 투쟁의 장이었다.
산별노조 설립을 금지하는 노동악법으로 말미암아 대공장의 민주노조 운동은 불가피하게 기업별노조의 형태를 띠었다. 이는 이후 지속적으로 대공장 운동의 약점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대공장의 기업별 노조는 총회민주주의라는 직접 민주주의적 의사결정에 기초한 아래로부터 전투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초기 대공장 기업별 노조의 역동적인 힘은 서구에서 관료적 산별체계를 뚫고 현장의 계급적대성에 직접 기초한 투쟁성을 보여주었던 샵 스튜어트 운동이나 공장평의회 운동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2010년 현대중공업 임단협 조인식. 95년부터 무쟁의 사업장이었던 현대중공업은
2002년 이후 어용세력이 계속 집권해 오면서 2002년 해고자 청산, 2009년 임금교섭권

회사 위임 등 파격적인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출처 : 연합뉴스)


이 시기 대공장노조는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 속에서 자본과 단체협약 체결을 강제하며 노동조건의 폭발적 개선을 이루어냈다. 3저 호황으로 생산이 확대되고 있던 대자본들은 새롭게 조직된 노동자들의 요구에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불과 3~4년 사이에 대공장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두 배 이상 올랐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시기에 노동자들의 요구에 하청의 직영화가 들어 있었고, 실제로 그 결과 대공장에서 사내하청이 없어지거나 감소했다는 점이다.
90년대 초반까지 조선과 자동차 산업에서 자본은 민주노조에 현장의 주도력을 빼앗겼다. 조선과 자동차 사업장들은 몇 년 사이에 남한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대공장 노동운동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본은 90년대 중반부터 소위 신경영전략을 통해 대공장 현장권력의 재탈환을 시도했다. 이는 90년대 초반 3저 호황이 끝나는 국면과 맞물려 있었다. 신경영전략은 종래의 노조에 대한 탄압 일변도 노선에서 벗어나 노조활동을 인정하는 대신 현장조합원들을 인적으로 포섭하고 인사고과와 성과급적 임금체계를 통해 개별적 경쟁체제로 유도하려 했다.
예를 들어 단체교섭이 제도화되는 대신 인사·노무 가능을 확충하고 인사고과권을 반장 등 현장관리자에서 부여햐여 이들의 권한을 강화하였으며, 기업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한편 고충처리 등 현장관리자들의 활동을 통해 조합원들을 인간적으로 포섭하고 활동가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 시도했다. 이와 함께 설비투자를 확대하여 자동화를 도입하고 사내하청을 늘려 나갔다.
신경영전략에 대응하여 전투적 활동가들은 현장중심 노선으로 대응했다. 대공장에서 민주노조 건설 시기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으로 결집되어 있던 현장 활동가 조직들이 현장조직으로 재편되어 '현장권력 쟁취'라는 구호 아래 현장투쟁을 강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현장투쟁이 모든 활동의 기초라는 것은 분명했으나 그 자체로는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적 이해를 전투적으로 관철시킨다는 것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려웠다.
강력한 조직력을 가진 대공장 노조는 초기부터 다른 사업장과의 연대에 소극적이었고, 자신의 문제는 자신의 투쟁으로 해결한다는 전투적 실리주의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90년대 초반 전노협이 붕괴할 당시, 현총련, 대노협 등 대기업 노조협의회로 조직되어 있던 대공장 노조는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선진노동자들의 현장중심 노선은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에 일정정도 영합하는 측면이 있었고, 정치운동과 결합하지 못하면서 실제적 이해 이상의 이념적 과제를 설정하거나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측은 투쟁에 피로감을 느낀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실리적 보상으로 파고 들어갔으며 활동가들은 점차 조합원들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현장조직 운동은 특히 자동차 사업장에서 자본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일시적인 효과를 보았지만 구조조정 분쇄 투쟁의 패배 이후 점차 현장조합원들의 보수적인 정서에 물들어갔다. 그 결과 이념과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한 현장조직 운동은 점차 정규직노조 중심으로 형성된 생산의 정치 시스템에 포섭되었다.
신경영 전략의 결과로 사내하청제도가 대공장에 다시 도입되거나 확대되기 시작했지만 현장 조합원 중심의 대응은 이런 사내하도급의 확대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기본급-수당-상여금을 기본으로 하는 성과급적인 임금구조가 확립되었지만 임금인상과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조합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90년대 중반부터 정규직 고용의 확대는 사실상 중단되었으나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용이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에 정규직 고용의 확대를 요구하기 보다는 비정규직 충원을 용인했다.
신경영전략은 특히 조선사업장의 노조 운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라인작업을 하는 자동차 노동자들과 달리 팀 작업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사업장은 현장관리자들의 발언력이 상대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현장관리자들의 포섭에 쉽게 넘어갔다. 또한 수주량에 따라 물량 증감의 폭이 크고 고립적인 작업형태상 비정규직 증가가 눈에 잘 띠지 않기 때문에 물량증감에 따라 하도급의 고용 확대가 자동차에 비해 수월하게 추진되었다. 그 결과 조선사업장에서 사내하도급은 신경영전략 시기를 거치며 급격하게 증가했다.
구조조정 분쇄투쟁 이전에도 조선소에서는 이미 비정규직 비율이 40%를 육박하고 있었다. 현대 중공업을 비롯하여 민주노조가 있던 조선사업장은 대략 신경영전략 시기 이후 무쟁의 사업장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결국 2000년대 들어 어용세력의 득세로 귀결되었다. 조선소에서 어용노조의 지배는 수년 째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그것이 변화할 가능성도 낮다. 어용 집행부들은 노조민주주의를 파괴하며 영구집권을 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저항은 크지 않다.


자본의 구조조정과 대공장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출처 : 울산노동자배움터)


조선소에서 현장권력 파과와 민주노조 붕괴는 신경영전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어용노조가 들어서기 훨씬 전인 90년대 초중반 부터 조선사업장은 이미 무쟁의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동차산업의 경우에도 신경영전략의 결과 90년대 초반부터 사내하청과 용역노동자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조선산업처럼 광범위한 비정규직화가 진행되지 않았으며 어용세력이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하지도 못했다. 자동차 공장 역시 실리주의적 경향이 득세하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회사의 지원을 받는 세력은 집권하기 어려웠다.
이는 라인작업을 하는 완성차의 경우 평조합원의 발언력이 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경영전략이 추진한 팀제 등을 통한 인적 포섭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경영전략은 결국 노동유연화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90년대 들어 소위 신자유주의 담론이 득세하면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코포라티즘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협력적인 노사관계의 틀을 깨고 노동유연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자본의 신경영전략은 이러한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남한정부 역시 이에 발맞추어 90년대 초부터 노동유연화를 법제화하려는 시도에 나섰다. 이는 YS 정권 아래에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통한 노동법 개악으로 나타났다. 조직노동운동은 이러한 노동법 개악시도를 97년 총파업으로 저지했으나 IMF 이후 사회적 압력 속에서 결국 노동법 개악에 합의하고 말았다.
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한 노동법 개악의 성격은 근로기준법등 개별적 노사관계 법률조항의 개악과 집단적 노사관계 법률조항의 개선을 맞바꾸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현실로 등장한 조직노동운동의 존재를 법제도적으로 인정하고 근로기준법 개악을 통해 노동유연화를 제도화하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결과 정리해고제·파견근로제·변형근로제 등 노동유연화 악법이 도입되는 대신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노조의 정치참여 허용·복수노조·근로자 참여제 등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98년 노사정 합의는 조직노동운동의 안정과 노동유연화를 맞바꾸었다는 면에서 90년대 이후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공급측면) 코포라티즘의 변형된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코포라티즘 체계는 민주노총 관료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제도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는 순전히 정부와 자본이 요구하는 합의의 수준이 민주노총에서 가장 우익적인 국민파 관료들마저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을 배제한 합의구조는 코포라티즘 체제의 실제적인 형성과 무관하게 구조조정 투쟁을 거치며 대공장을 중심으로 현장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98년 이후 대공장에 밀려들어온 구조조정 공세는 노동법 개악으로 도입된 유연화 제도들을 다시 현장에 밀어붙이는 과정이었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서기 위해 전투적 집행부를 선출하고 투쟁에 나섰지만 별 성과 없이 패배했다. 구조조정 이후 조선과 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수출제조업에서 사내하청이 크게 늘었다.
하지만 소위 “빅딜” 등 구조조정의 결과로 자동차·조선·철강·전자 등 주요 수출제조업에서 선택과 집중을 이룬 남한의 대자본은 세계시장에서 초국적 독과점체제에 성공적으로 편입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해양조선 등 남한의 조선소들은 세계 조선 산업의 1위에서 7위까지를 독점했다. 현대·기아로 재편된 자동차 자본은 현대와 기아 통합으로 세계 10위권 안으로 들어선 뒤 현재는 5위권 업체로 안착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계시장에서 남한 수출대자본의 승승장구는 정규직을 제외한 다수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기초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대공장 노동자들과 부품사 등 다른 분야의 제조업 노동자들 간의 임금 격차는 더욱 커졌다. 특히 자동차산업에서는 플랫폼 통합·모듈화와 함께 현대모비스와 같은 대형 모듈업체가 등장하면서 완성차 공장-대형 모듈업체-부품업체로 이어지는 위계화·중층화가 한층 강화되고 이로 인해 완성차 자본의 부품업체에 대한 통제력이 강해지면서 부품업체 노동자들과 완성차 정규직노동자들 간의 임금 격차는 크게 차이가 나고 있다.
더욱이 현대모비스는 생산직 전원을 사내하청으로 채우고 있으며 이곳의 노동강도와 저임금은 상상을 초월한다. 기아차의 경우는 아에 특정 차종의 생산을 100% 비정규직공장인 동희오토에 위탁하고 있기도 하다.
제조업에서 전반적인 사내하도급 제도의 확대가 이들 산업에서 이윤의 보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정규직노동자들과 완전히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은 구조조정 이후 이들 산업에서 전체 노동자의 10~50% 정도로 늘어났으나 임금은 정규직의 50~70% 수준에 불과하다.
남한 제조업의 주요 경쟁국들인 미국, 유럽, 일본, 대만, 중국 등에서는 사내하청과 유사한 간접고용을 도입하고 있다하더라도 노동조건의 차이가 남한만큼 크지 않다. 이들의 경우 비정규직 도입은 거의 고용유연화만을 위한 것으로 보이나 남한의 사내하도급은 실제 노동조건의 격차를 강제하고 있다. 남한 수출제조업의 눈부신 성공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초과착취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주요 제조업에서 하청고용비율 (출처 : 한겨레신문)


대공장 노동자 집단의 균질성의 파괴


사내하청을 비롯한 비정규직의 증가는 대공장노동자들의 균질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위 대공장의 전략적 중심성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생산에서 위치와 사회적 파급력 뿐 아니라, 균질적인 노동자 집단의 밀집을 통해 계급의식과 집단적 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는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공장은 더 이상 노동자집단의 균질성을 보장하는 공간이 아니다.
자동화의 진전은 대공업에서 비정규직이 확대될 수 있는 기술적 기초가 되고 있다. 현재 대공업에서 숙련노동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숙련의 정도에 따라서 임금이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임금이 숙련기술에 바탕하고 있다는 모든 주장은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
신경영전략 시기에 자본은 노동집약적인 체제에서 대대적인 설비투자를 통해 노동자들로부터 숙련을 통한 현장통제력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대공장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숙련도는 떨어졌으며 비정규직 고용이 확대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구조조정 이후 플랫폼 통합과 모듈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완성차공장에서는 특히 이런 경향이 강화되었다.
조선산업의 경우 자동차에 비해 상대적으로 숙련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숙련이 필요한 파워그라인더 같은 직종이 오히려 비정규직인 경우도 있다. 조선소에서도 일반 생산직 노동자가 노동에 필요한 기술을 능숙하게 체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1~2년에 불과하다. 물론 조선소에서도 모듈화, 블록대형화 등 자동화가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 대공장에서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숙련차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작업공정이 단순화되고 동질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장에서 노동자들의 균질성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사내하청 뿐 아니라 다양한 고용형태들의 증가로 인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조선사업장의 경우 하청노동자들과 정규직의 비율의 최대 8대 2까지 육박하고, 평균적으로는 6대 4 정도 된다. 그렇다면 사내하청노동자들의 구성은 균질적인가?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조선사업장인 현대중공업의 경우, 공장을 구성하고 있는 고용형태는 아주 복잡하다. 사내하청의 경우에도 일당제와 시급제로 나뉘어 있다. 여기에 이주노동자와 직업훈련원을 나와서 저임금으로 일하고 있는 훈련생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최근에는 과거 고숙련자 중심으로 긴급한 돌발 상황 때 투입되던 물량도급 인원도 크게 늘어나 노동조건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하락한 채 일반 생산 업무에 투입되고 있다. 사내하청을 제외하고도 이주노동자, 훈련생, 물량도급 인원들이 현재 현대중공업에서 각기 수천 명 단위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정규직 비율이 20% 정도로 조선소에 비해 노동자들의 균질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는 자동차 사업장의 경우에도 비정규직노조 결성과 불법파견 판정 이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이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고용형태의 다양화가 추진되고 있다.
자동차 공장에서는 일반적인 사내하청 외에도 외부 납품업체에 계약직으로 고용되어 사내하청 업무에 파견된 경우나 납품업체가 별도의 하청업체를 통해 공장 내에서 작업하는 조건으로 고용하는 2·3차 하청노동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1차와 2·3차 하청노동자의 업무의 차이는 크지 않으며, 보통 업체 사무실이 공장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업체들이 영세하고 1차 하청업체의 형태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집계가 잘 되지 않지만 2·3차 하청노동자들은 1차 하청노동자보다 성과급이 적거나 임단협 적용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시하청 또는 단기계약직이라고 불리는 아르바이트생들은 본래 정규직 노동자의 산재 대체나 신규사원 채용 전에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아르바이트 자리에 가까웠으나, 현재는 정규직을 아예 뽑지 않고 라인을 단기계약직 노동자들로 채운 후 물량이나 공정이 축소·폐쇄되면 해고하는 양태를 취하고 있다.
단기계약직 노동자들과 2·3차 하청노동자들은 1차 하청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비해 임금 및 복지에서 차별받는 것처럼 1차 하청노동자에 비해 차별을 당하고 있으며, 이런 격차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1차 하청노동자와 그보다 더 취약한 노동자들이 중층적으로 생겨나면서 노동자 내부에 계층이 형성되고 있다.
이로 인해 2000년대 들어 대공장의 기업별 노조는 전체 공장 노동자들을 모두 포괄하는 공장위원회적인 성격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는 총회민주주의의 기반이었던 대공장 노동자들의 균질성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과 비정규직의 차이가 오로지 고용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배타적이 되고 있다.


계속되는 호황과 물질적 포섭


99년 이후 자동차, 조선·전자·철강 등 수출제조업의 대자본은 2008년 금융위기 때문에 발생한 짧은 불황기를 제외하면 지속적인 호황을 누려왔다. 2008년 위기는 오히려 세계시장에서 이들 수출대자본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기아는 미국자동차 산업의 몰락과 도요타의 부진을 틈타 6~8위권에서 5위권으로 도약했으며 최근에는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 4위 업체로 올라섰다. 남한자본이 초국적 독과점 체계의 최상위에 있는 조선과 전자에서는 금융위기를 계기로 중간 순위의 추격자들과 격차를 더욱 늘렸다.
이러한 호황을 통해 이들 산업의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호황으로 얻은 이윤의 분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정규직노동자들 뿐이다. 사내하청노동자들과 대공장에 종속된 부품사 노동자들은 호황에 대한 이윤 분배에 거의 동참하지 못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대공장과 중소기업 노동자들 뿐아니라 대공장 내부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계속 커지고 있다. 2003~2005년 대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조설립과 불법파견 판정, 이어진 정규직화 투쟁을 거친 이후 자동차 대공장의 1차 하청노동자들은 고용이 안정되고 임금 등 노동조건이 지속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럼에도 1차하청과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격차는 이전에 비해 거의 줄어들지 않고 있다.
자동차에서 1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은 여전히 정규직노동자들의 60%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청노동자들이 배제되고 있는 복지혜택, 주식 배당 등을 합치면 실제 격차는 더욱 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1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는 이상으로 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내하청에 비해 더욱 열악할 것으로 예상되는 2·3차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파악도 되지 않고 있으며 단기계약직, 훈련생, 이주노동자 등의 노동조건은 완전한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형편이다.
정규직노동자들은 높은 노동조건과 고용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배제한 합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이는 2000년 완전고용합의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조직노동운동의 이해와 노동유연화의 교환은 단위 공장에서 2000년 이후 대부분의 자동차 대공장에서 체결된 완전고용합의로 완성되었다.
완전고용합의는 정규직노조가 생산라인에 하청노동자의 도입을 용인하는 대신 정규직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현대차 정갑득 집행부는 하청도입 비율을 16.9%까지 허용하겠다고 했으나 이는 물론 지켜지지 않을 것이 뻔한 ‘눈가리고 아웅’식의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정리해고제 도입 이후 고용불안을 느낀 정규직조합원들은 완전고용합의에 지지를 보냈다. 이는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하청노동자들의 직영화를 요구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태도이다.
구조조정을 겪은 이후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의 이해와 회사의 이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크게 강화되었다. 신경영전략 시기에 정착된 기본급-수당-상여금이라는 성과급적 임금체계는 이러한 의식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자본은 기본급은 인상하지 않으면서 잔업·특근 수당과 기업 수익에 따른 상여금으로 임금을 인상했다. 현재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에서 기본급이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정도에 불과하다. 자본은 사실상 호황기에는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성과급으로 임금을 올리고 불황기에는 물량이 줄었다는 이유로 잔업·특근을 없애 자연스럽게 임금을 줄이는 양상을 취하고 있다.
이는 자발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정규직노동자들 사이에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현대차 정규직노동자들은 임금이 잔업·특근이 없어지면서 임금이 3분의 1로 줄어들어 큰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이러한 생존권의 하락은 사측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사내 타공장보다 많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귀결되었다. 때문에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의 투쟁력으로 임금을 올리는 것보다는 회사의 이익에 민감하며 현재의 평화적인 노사관계가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임금의 형태로 사측이 지급하는 무상주 역시 이런 의식을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대공장 자본은 우리사주를 통해 매년 급여의 일부를 30주에서 100여 주씩 자사 주식으로 지불하고 있다. 올해 기아자동차 임금협상 잠정합의안은 무쟁의 타결 시 조합원 1인당 80주를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대공장 노동자들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 대에 이르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이익 분배에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무상주 배당을 받지 못함으로써 동일 비율로 임금이 인상된다하더라도 실제로는 벌써 여기서부터 정규직과 수백만 원의 실질적인 임금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작년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출처 : 참세상)


일상적 합의 메커니즘의 완성


신경영전략과 구조조정을 거치며 자동차와 조선 등 대공장에서는 정규직노동자들을 고임금을 통해 물질적으로 포섭하여 노사평화를 추구하면서도 광범위한 사내하도급의 확대를 통해 이윤을 보전하고 세계시장에서 경쟁우위를 유지할 수 있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 속에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대공장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노동자 집단 중 가장 크고 단일한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노사교섭에서 대표권을 행사하며 정규직 외의 노동자 집단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해를 배타적으로 관철시키고 있다.
자동차 산업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일상적 합의구조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대표하고 있다. 87년 이후 90년대까지 대공장의 노사관계는 단체협약 중심이었다. 노조와 합의되지 않은 노동강도 강화 등에 대해 노동자들은 작업중지권, 즉 부분적인 파업권을 행사하여 철회시키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러나 자동차 산업에서 플랫폼·모듈화 등 자동화는 생산물량에 따라 상시적인 작업장 재편을 요구했으며 이에 따라 일상적인 구조조정을 강제했다. 대략 2000년을 고비로 하여 일상적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형태로 기존 단협 중심의 노사관계를 대체하는 일상적 합의구조가 제도화되었다. 이를 통해 자동차 공장에서는 조선소처럼 무노조거나 어용노조가 아니라하더라도 외부적으로 보이는 노사 대립구도와 달리 일상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98년 노사정 합의가 2000년 완전고용합의를 통해 기업단위로 내려왔다면, 이러한 일상적 합의구조는 그것을 단위 사업장의 라인과 부서까지 침투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합의구조가 98년 노동법 개정으로 통과된 “근로자의 참여 및 협력증진에 대한 법률(근로자참가제)”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98년 노동법 개정은 기존의 노사협의회법을 근로자참가제로 개정하면서 30인 이상 사업장에 노사협의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여기에 협의권을 부여해 주었다.
현재 자동차 대공장에서의 단협은 신기술 도입, 신차종 개발, 작업공정 개선, 사업의 확장, 합병, 공장이전 등을 노사공동위원회(현자) 혹은 고용안정위원회(기아)처럼 노사동수로 이루어진 노사공동결정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하도록 규정하고 이 결정에 단협과 동일한 효력을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협의기구들은 모두 근로자참가제를 법적 기초로 99년 이후에 설치된 것들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대공장에서는 작업할당과 노동강도, 배치전환 등의 문제에서 현장의 집단적인 저항을 바탕으로 한 현장활동가의 비공식적인 교섭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양상은 이러한 비공식적인 교섭이 근로자참가제를 법적 기반으로 하여 제도화되고 현장에서 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포섭과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배제가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절차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사공동위원회나 고용안정위원회와 같은 노사협의회에 기초한 합의체계는 단협과 단협 사이에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며 기각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합의의 최종 결정은 노조의 골간체계라고 할 수 있는 대의원 체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사측이 신차투입이나 공장이전 등 생산체계의 변동을 결정할 경우, 먼저 전체 회사 차원의 노사공동위원회(고용안정위원회)에서 큰 틀에서의 대략적인 합의를 이루어 낸다.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 지면 단위 공장의 노사공동소위원회나 고용안정소위원회에 보다 세부적인 의제들이 논의사안으로 내려오고 마지막에는 작업장 대의원들이 생산체계 변동에 따른 노동강도, 인원배치등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노사협의를 하게 된다.
이러한 일상적 합의구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를 갈라 놓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 체계에서 사내하청노동자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정규직 고용보장의 희생양이 되어 있다. 일례로 하나의 라인이 다른 공장으로 이관될 때 자기 선거구 조합원의 고용을 최우선으로 놓을 수밖에 없는 정규직 대의원들은 정규직노동자의 전환배치를 받아들이는 대신 하청노동자를 해고하는데 합의하는 관행이 구조화되어 있다. 때문에 일상화된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공장에서 정규직은 전혀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
이미 비정규직 비중이 50%를 넘나드는 조선사업장의 경우에는 물량 증감에 따라 하청업체를 폐지버리는 방식으로 상시적인 인원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따라서 자동차와 같은 정규직의 상시적인 전환배치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또한 노조가 무력화되어 있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배치가 일어난다 해도 합의를 거치지 않은 개별 통보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의 여파로 물량이 급감하던 2009년 현대중공업은 최초로 정규직 400여 명에 대한 전환배치를 단행했지만 이를 합의가 아닌 개별 통보 형태로 단행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노사협의회가 정례화되어 있고 처우개선 등이 실제로 여기서 논의되고 있다. 노조가 무력한 만큼 조선소에서도 노사협의회를 통한 일상적 합의의 역할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대공장에서 노사협의회에 기초한 이러한 합의구조들은 대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적 의식을 물질적·의식적으로 포섭하는 중요한 제도적 기제가 되고 있다.


대공장노조 중심의 전략은 여전히 유효한가?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활동가들은 정규직노동자들의 보수화 문제에 직면하면서 이를 노조관료의 문제나 고용불안에 의한 이데올로기적 포섭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현실은 현재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자본에 포섭되어 있으며, 자신의 물질적 이해를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해 대단히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적대적인 합의에 수동적인 방관자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대공장 노조는 조합원들의 실리를 위해서 자본과 표면적으로 대립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고용형태의 노동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통해 자본에 대표권을 인정받는 이중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외부적으로는 여타 투쟁에 연대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정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다.
자동차에서 일상적 합의구조는 자동차사업장이 여전히 민주노조의 외피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면적 메커니즘을 통해 자본의 이해에 깊이 포섭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더 이상 대공장의 보수화를 집권세력이 어용라거나 실리주의 세력이기 때문으로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2003년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 투쟁 당시 정규직조합원들이 보여준 태도와 2008년 기아차에서 정규직조합원들이 보여준 비정규직노동자 투쟁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단지 어용의 준동 만으로 이해가기는 어렵다. 오히려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과 여타 노동자들과 공통의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이러한 상황은 과연 여전히 대공장 운동이 노동계급 운동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던지게 한다. 한때 노동운동의 전위로 불리었던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이러한 변질과 대공장 운동질서의 몰락은 자본의 분할포섭 전략에 계급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노조를 통해 자신들의 실리적 이해만을 배타적으로 관철시키려 하는 공장 내부정치, 소위 “생산의 정치”로의 함몰이 가져온 필연적 비극일 수도 있다.
전투적 사회주의자들은 현장사안이 보다 계급적인 사안이라는 사고에 사로잡혀 오히려 이러한 의식을 부추겨 왔다. 정치와 경제의 이분화를 극복하지 못하는 소위 현장 중심의 “생산의 정치”에 대한 집착은 사회적 고립과 노동자들의 사회적 보수화 성향을 강화시켜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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