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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의 이니셔티브

간만에 진중권 교수의 정치공학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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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  (2005-05-17 17:30:20, Hit : 459, Vote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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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의 이니셔티브
요즘 한나라당이 좀 변하는 모양입니다. 홍준표는 국적법으로 인터넷 스타가 되고, 심지어 정형근 같은 사람마저 북한에 대한 인도적 비료지원을 얘기하는 등,  과거와는 달리 선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과거에는 열린우리당이 아젠다 세팅을 하면, 거기에 들러붙어 반대만 일삼던 수세적 모습에서 자신감을 갖고 완전히 공세로 전환한 듯합니다. 저는 이를 일단 바람직한 현상으로 봅니다.

한나라당 당 소속 모 인사의 참모로 들어가겠다는 후배에게 그런 충고를 해준 적이 있지요. "너희들이 살 길은 열린우리당과 개혁경쟁을 하는 것 뿐이다. 그것을 통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를 희석시켜라." 사실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정책에선 큰 차이가 없고, 존재하는 것은 개혁적이냐, 반개혁적이냐라는 이미지의 차이인데, 개혁을 거스르는 '수구꼴통' 이미지로는 승산이 없지요.

열린우리당은 다수당이 된 후에 충분한 개혁성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개혁'하겠다고 해서 다수의석 주었는데도 '실용' 어쩌구 하면서 어영부영 한나라당과 쇼부나 보다가 이미지만 한나라당스러워지고, 반면 한나라당은 갑자기 웬 개혁(?) 마인드가 들었는지 이니셔티브를 쥐고 아젠다 세팅을 선점하고 나오면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전통적(?) 관계가 뒤바뀐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거죠.

하지만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한나라당 지지층으로 흡수될 것 같지는 않아요. 대부분 부동층으로 떨어져나가 관망세로 돌아섰다고 보는 게 좋을 겁니다. 반면 부동층으로 떨어져나갔던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최근 분위기에 고조되어 다시 한나라당 주위에 결집하는 것이지요. 대개 정치에 관심 없는 대중들은 선거결과를 보고, 그 대세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하지만 이 효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한나라당이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선거 전이나 선거 후나, 한나라당의 내부는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한나라당은 지금 승리에 도취해 있는데, 사태를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선거의 승리로 외려 한나라당 개혁파들의 입지는 줄어들었습니다. 개혁파 '남신정'에 대한 박사모의 공격, 아울러 박근계 대표의 박사모 거들기. 이것은 한나라당의 내부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이거죠. 앞으로 한나라당의 이미지가 '개혁파'가 될 것이냐, '박사모'가 될 것이냐. 선거의 승리가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후자의 길을 걷게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이 경우 당장은 어쩔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한나라당은 전망이 없습니다. 박사모 애들이 당에 들어와 박근혜 친위대가 될 경우,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겁니다. 작은 승리의 축배가 더 큰 패배의 독배가 될 수 있다는 것. 한나라당은 이걸 알아야 합니다.

한때 인터넷은 열린우리당의 전유물이었지요. 최근에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인터넷마저 점령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박사모식 인터넷 점령은 하나마나한 것입니다. 이미 그 폐해를 노사모 말기에 지겹게 겪었거든요. 주의깊게 봐야 할 것은 외려 한나라당의 젊은 의원들이 홈페이지에 글을 올려 네티즌들에게 입장을 알리는 문화입니다. 이게 인터넷 공간에 팽배했던 한나라당에 적대감을 누그러뜨려주리고 있는데, 이게 지금 박사모에게 얻어맞는 형국이라는 점,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한나라당의 강세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요인은 흥행성입니다. 열린우리당은 '노란 마후라'라는 영화를 상영해 대성공을 거두었고, 한나라당은 아직 영화 상영을 안 했거든요. 아무리 좋은 영화라 해도 재개봉은 흥행성이 떨어집니다. 새 영화를 만들어 개봉하면 모를까. 열린우리당에서 새 영화를 내놓을 때까지 인터넷에서는 당분간 '노란 마후라'를 리메이크한 '씨네 한나라사'의 영화를 감상해야 할 겁니다.  

정동영, 김근태 등 열린우리당의 주연 배우들은 정치권을 떠나서 딴 일 하는 동안, 한나라당은 호화 배역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 거기에 이회창의 막간 우정출연. 이 정도면 흥행성이 있지요. 다만 영화를 너무 일찍 미리 개봉함으로써 식상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박근혜가 너무 압도적인 것도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구요. 게다가 박사모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명박 총리'를 주장하는 것 같은데, 이 경우 '박정희-정주영'의 재판 3공화국이 되겠지요.

열린우리당에서는 아마 천천히 정동영, 김근태의 이미지 메이킹을 해나가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 뉴페이스(?)를 들여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야 시나리오가 빵빵해집니다. 정동영-김근태 이건 재미가 좀 없어요. 새로운 블랙호스가 등장할 경우 게임의 재미라는 면에서 한나라당의 흥행성을 가볍게 누를 수 있겠지요. 요즘 인터넷 세대들, 정치도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보는 경향이 있거든요.

한나라당에서는 20대가 보수적으로 변했다고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고대 사건에서 그 일각이 드러났지요. 하지만 거기에는 다른 변수가 있습니다. 지금 20대층은 입으로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말할지라도, 그 몸으로는 도저히 박정희 식으로 살 수 없는 아이들입니다. 외려 3, 40대는 머리로만 진보적이고 몸은 박정희스런 반면, 20대는 머리는 보수적이라도 몸은 진보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현재 학생운동권이 못 맞추는 게 바로 그 부분이죠.

그나저나 열린우리당이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대통령 이하 유모 개혁파 의원까지 줄줄이 영양가 없는 말만 흘리고 다녀서 걱정입니다. 도대체 뭘 해야 될지 모르는 것 같아요. 한나라당이 인터넷 스킨쉽을 강화하고, 의제를 선점하고, 의외로 개혁성을 드러내면서 과거에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사이에 존재했던 차이를 지워가는 가운데, 열린우리당은 거꾸로 '실용' 어쩌구 하며 한나라당을 닮아가고 있으니, 당연히 저 모양 저 꼴이 되는 거죠.

* 진보누리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05-1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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