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학살은 왜 '광주'에서 일어났을까?

 

 

 

학살은 왜 '광주'에서 일어났을까?
[김욱 칼럼] 드라마 <5공>과 다시 짚어보는 세가지 의문점
텍스트만보기   김욱(wkimline) 기자   
▲ 드라마 <제5공화국> 가운데 한 장면.
ⓒ2005 MBC-TV
MBC 다큐드라마 <제5공화국>이 고통스럽게 25년 전 광주학살을 상기시킨다. 이 다큐드라마는 특별히 광주학살을 교과서 속 역사로만 알고 있던 신세대들에게 충격을 준 것 같다. 그러나 다큐드라마가 아닌 생존자가 직접 경험적 사실을 증언한다 해도 사태의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 증언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적 검열장치를 통과해 `해석’되기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역사,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견해에 불과하다”(<김정일 코드>)고 말한 것은 광주학살에 대해서도 온전히 맞는 말이다. ‘5월 광주’는 지금도 부정 혹은 미화된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억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당신은 ‘5월 광주’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다음의 ‘이데올로기적 질문’을 통해 한번 확인해보기 바란다.

진상규명의 핵심은 발포명령자가 아닌 18-19일의 만행

질문1: 5ㆍ18 진상규명의 핵심은 21일 오후1시 도청 앞 발포명령자인가?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말한다. 물론 21일의 도청 앞 발포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20일 저녁 광주역 앞 발포에서 이미 2명의 희생자가 있었다)됐으므로 그것이 가장 중요한 규명대상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핵심을 21일의 발포명령자로 규정하는 순간 광주학살의 쟁점은 18~19일에 자행된 학살만행이 왜 일어났을까 하는 근원적 차원에서 도청 앞 발포가 신군부 측의 주장대로 ‘자위권 발동’인가 아닌가 하는 피상적 차원으로 이동해 버린다. 이런 접근 방식은 우리 정치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반인륜적 범죄문제를 비극이지만 경험해본 정치적 범죄문제로 그 역사적 이미지를 대체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은 “계엄군이 시민의 가슴에 대검을 찌르는 참혹한 장면…그것은 왜곡의 극치다”, “5·19 이전까지 계엄군 및 시민 쌍방간에는 어떠한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계엄군은 착검을 하지 않았다”(<오마이뉴스>, 2005. 6. 16)며 MBC 다큐드라마 내용 중 20~21일의 사실적인 발포묘사보다는 18~19일의 ‘은유적’인 총검살해묘사를 더욱 완강히 문제 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억지논리적 사연이 어찌됐든 이는 마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야기는 거짓말이다’는 선전을 듣는 것 같다. 당시 현장에서 전 과정을 직접 취재한 전 동아일보 기자 김영택은 18~19 양일간 생사불명으로 트럭에 실려 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제외한다 해도 ‘신원이 확인된’ 최초의 사망자는 19일 광주공원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맞아죽은 김안부(당시 36세)이고, “당시 검시과정에서 대검으로 유방이 찔려 숨진 여고생이 있었다”고 확인하고 있다. 이렇게 19일 오후가 되자 급기야는 넘치는 시신을 채 처리하지도 못한다.

“오후 6시쯤 대인동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무등경기장 스탠드 아래쪽에는 10여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날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 죽은 사람들이었다.”(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그렇기에 반드시 역사의 핵심 쟁점을 18~19일의 학살만행에 맞춰야 한다. 광주의 봉기는 18~19일 공수부대가 시위와 아무 상관없는 무고한 양민들을 상대로 끔찍한 학살만행을 자행(자세한 증언은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 참조)하자 이에 맞서 목숨을 건 저항으로 시작된 것이다. 즉 그것은 과잉‘진압’이 아닌 문자 그대로 살육이었다! 21일의 도청 앞 대치와 발포, 그리고 이후의 무장투쟁은 전두환 군부가 자행한 학살만행의 필연적 결과였을 뿐이다.

'광주'는 '공포'를 위해 특별히 선택되었을 것

▲ 전두환 전 대통령
ⓒ2003 권우성
질문2: 18~19일의 학살만행은 왜 광주라는 특정 지역에서 일어났을까? 잘 대답하기 바란다. 이 대답에서부터 진정한 역사 이데올로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대답은 아주 쉽다. 우연이다. 전국적인 민주화운동과정 속에서 어디에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시공을 초월한 비극이 우연히 광주에서 일어난 것뿐이라는 것이다. 광주학살은 지역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여기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역사의 미화 혹은 자위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우연이 아닌 의도적 만행이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의도적 만행임을 의심한다는 말은 광주라는 지역을 ‘공포’를 위해 특별히 선택했을 것으로 의심한다는 의미다. 광주라는 지역이 정말 선택된 것이라면 광주학살은 천인공노할 ‘지역패권주의문제’가 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에 이를 의심한다.

① 공수부대가 ‘경상도를 제외(!)’한 서울, 대전, 전주, 광주에만 투입되었으며, 서울에 배치됐던 제11여단은 18일, 제3여단은 19일 광주에 증파되기로 작전계획이 미리 짜여져 있었던 사실

② 18일 오후3시 공수부대가 아직은 본격적으로 광주시내에 투입되지 않은 시간에 정호용이 최웅에게 출동을 명령하면서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느니 심지어는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뉘앙스의 유언비어가 나돈다”는 둥 광주학살의 사전각본을 그대로 발설한 사실

③ 도청이 시민군에 접수된 ‘단 하루 뒤(!)’인 5월 22일 계엄사는 즉각적인 중간발표를 통해 감금돼 있던 김대중에게 “국민에 대한 선동을 통해 변칙적인 혁명사태를 불러일으킨" 내란음모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결국 사형선고까지 받게 한 사실 등이다.(더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김대중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참조)

5.18은 전국적인 기념일이 될 수 없었다

질문3: 이후 5ㆍ18은 왜 전국적인 기념일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동문서답만이 존재한다. 예컨대 고려대 교수 최장집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광주민주항쟁은 보편적인 민주화를 지향하는 모든 사회 세력과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고 대변함으로써 민주 대 반민주라는 대립축을 설정케 했던 역사적 계기였다”고 모범적인 대답을 한다.

왜 모범적인가? 그의 대답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대로 광주학살에서 지역문제를 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민주 대 반민주…역사적 계기였다”라는 최장집의 기술은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분석한 사회과학적 언설이 아니라 ‘그렇게 돼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적인 기도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관계에 대한 표현을 빌려 당위를 말하는 것은 일종의 동문서답이다.

나는 ‘5월 광주’를 영남패권주의 군사파쇼세력에 의해 자행된 호남 민중들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만행과 이에 맞선 저항투쟁이었으며 악성적인 지역구도가 고착화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세상에는 오직 계급모순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진보주의자가 있다면 이는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불온한 시선만이 5ㆍ18은 왜 전국적인 기념일이 되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 기도문이 아닌 사회과학적인 대답을 줄 것이다.

나는 박정희의 지역차별이 얼마나 심했든, 전두환 쿠데타의 성격이 무엇이었든 5ㆍ18이 실제로 최장집의 기도문과 같은 것이었다면 광주학살은 이후 최악의 지역문제로 고착화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광주학살 이후에 호남은 ‘김대중의 정당’을 통해 철저히 저항했고 영남 패권주의하의 우리 사회는 3당합당과 각종의 투표행위와 치욕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전두환의 정당’에 지지표시를 함으로써 5ㆍ18을 전두환 일당과 대한민국 간의 소통의 한계가 아니라 호남과 비호남(특별히 호남과 영남) 간의 소통의 한계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원죄의식에도 불구하고 ‘5월 광주’를 전국적으로 기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지금도 전두환은 전 국가원수 자격으로 대통령취임식에 초대되며 때때로 청와대에서 만찬을 즐기고, 전두환의 민정당을 계승한 한나라당은 건재하고, 전두환을 사랑한다는 ‘전사모’가 발호하며, 전두환의 아들은 호의호식하며 “청와대 문을 열고 들어간 업보가 이렇게 가혹할 줄은 정말 몰랐다”(<오마이뉴스>, 2005. 6. 20)고 어릿광대 같은 투정을 한다. 그들의 막강한 지지세력(참고로 호남에는 거의 없다)이 만들어내고 있는 요지경 속 우리 정치의 업보다.

누구나 의심하지만 모두가 덮어두려는 ‘5ㆍ18과 영남패권주의’ 과거사의 진실을 철저히 드러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호남과 영남 간의 왜곡된 이데올로기 대립이 아닌 ‘전두환의 추억’과 대한민국 국민 간의 정의로운 대립이 있을 때에만 지역문제는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무조건 덮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극우적 역사관에는 분노하면서도 ‘5ㆍ18과 영남패권주의’ 과거사는 무조건 덮는 것만이 ‘지역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한국인들은 설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200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