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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유레카 by 손석춘

 

 

박헌영
유레카
“지식인다운 외모와 다소 멋쩍어하는 듯한 미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를 살피는 태도와 침착하고 과묵함. 왠지 무게가 있어 보이는 모습.”

러시아 역사학자 파냐 샤브시나의 ‘추억’이다. 1945년 8월 서울의 소련영사 샤브신의 아내였다. 호의가 묻어나는 회고의 대상은 박헌영이다. 샤브시나는 섬세했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주위를 살피는 태도’라 쓴 글에 오해가 있을까 싶어 괄호치고 덧붙였다. ‘지하활동의 오랜 습관으로 인한 듯.’ 그랬다. 박헌영. 1900년 충청도에서 태어난 그는 3·1운동 가담 뒤 줄곧 지하에서 일제와 싸운 독립투사다.

변절이 일상이던 시절, 동지들을 모아나가던 박헌영은 광주 벽돌공장의 노동자로 8월15일을 맞았다. 그날 오후 이미 서울 종로엔 벽보들이 붙었다. “지하의 박헌영 동무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려라! 우리의 나갈 길을 지도하라!” 실제로 박헌영은 그날 광주를 떠났다. 서울로 왔다. 오랜 숙원이던 조선공산당 재건에 나섰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 불혹과 지천명의 가운데였다.

옹근 60년 전 오늘이다. 박헌영은 혼을 쏟은 원고를 손에 쥐고 있었다. 나갈 길을 지도할 ‘8월테제’다.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지 않았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리켰다. ‘해방공간’을 톺아보면 정계에 거인이 많았다. 여운형과 김구도 그랬다. 두 거목은 남쪽의 우파 손에 스러졌다. 하지만 남과 북에서 두루 평가받는다. 박헌영은 아니다. 남에선 ‘빨갱이 두목’, 북에선 ‘미제 고용간첩 두목’이다.

생게망게한 일 아닌가. 분단 60년을 ‘통일 원년’ 삼으려면, 박헌영을 역사에서 복권해야 옳다. 천박한 정치판을 벗어나 통일의 정치, 큰 정치를 꿈꾼다면 더 그렇다. 1945년 8월에 그랬듯이 ‘지하’의 박헌영을 ‘지상’에 올리는 까닭이다. 다만, 우리 스스로 찾아야 옳다. 오늘 우리의 나갈 길은.

손석춘 논설위원 s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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