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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은 없다. 없는 것은 다 만든다”

 

 

없는 것은 없다. 없는 것은 다 만든다”
‘청계미니박람회’ 청계천 골목의 ‘만능창조력’ 재연
이주현 기자
▲ 청계천미니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입정동 들머리에 선 작가 전용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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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게 없다’. 청계천을 두고 흔히들 말한다. 그런데 사실, ‘없는 것이 없다’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곳에선 ‘없는 건 만든다’.

예를 들어 볼까? 머리심는 주사기, 성형턱 고정기, 돼지똥 정수장치, 황태 두드리는 프레스, 레일 바이크, 사극 드라마에 쓰이는 소품, 호두과자 박스, 아이스크림 교반기, 대장세척 분배기, 파이프 청소기, 카지노 룰렛, 각종 볼트와 너트, 모형 탱크까지. 한때는 청와대 경호원들의 부탁을 받고 ‘휴대폰총’을 만들기도 했다.


[특집화보]<청계천 새물맞이>

▲ 플라잉시티가 디자인한 공장 간판들.

머리심는 주사기, 성형턱 고정기, 돼지똥 정수장치, 레일 바이크…
“없는 게 없다” 청계천 옆 을지로3~4가

행정구역상으론 입정동이라고 부르는 을지 3~4가. 이곳은 손님이 만들어달라고 하는 기계를 특수제작해주는 소규모 금속·주물·기계공장이 몰려 있는 곳이다. 청계천 복원공사로 환해진 청계로와 을지로 사이, 좁다란 골목에 들어가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폭이 1m 조금 넘는 골목 양편으로 서너평짜리 가게들이 손글씨 간판을 이마에 달고 있다. 자전거나 수레가 입구에 묶여 있고, 윙~하며 돌아가는 절삭기 소음이 요란하다. 골목 중간중간엔 용접 불꽃이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공장이 몰려 있는 이 거리를 ‘산업점포 블록’라고도 부르고 어떤 이들은 ‘도심 부적격산업 밀집지’라고도 부른다. 도시를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그룹 ‘플라잉시티’는 이곳을 ‘금속가공공방’이라고 표현한다.

지난 27일 입정동 한켠에선 ‘플라잉시티’가 벌이는 전시 ‘청계미니박람회’가 한창이었다. 박람회라고 하면 인간의 생활과 산업, 문명에 소요되는 물건들을 모아 전시하고 홍보하며 거래를 부추기는 자리. ‘청계미니박람회’ 역시 청계천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모아놓고 그 제작 원리가 어떠한지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를 설명하는 전시회였다.

▲ 드라마 <무인시대>에 나온 무기를 만들기 위한 나무틀.

“카타로그만 가져와. ‘똑같이’ 만들어줄 수 있어”
플라잉시티 입정동에서 ‘청계미니박람회’로 재연

“모든 도면은 다 머릿속에 있어” “카타로그만 가져와. ‘똑같이’ 만들어줄 수 있어.” “사람도 만드는 데 기계를 못 만들겠어?” “다른 주물가게에 그거 넘어가면 안돼. 그럼 새끼치니까.”

청계금속가공공방의 장인들이 내뱉는 말들 속엔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나온다. 주로 청계천을 찾는 사람들은 외국제품을 똑같이 ‘복제’하여 돈을 벌거나 자신이 꿈꿔온 도구나 기계를 탄생시키기 위해 기술적인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다. 또는 대학에서 실험용기계 등을 주문하러 오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와서 ‘이러저러한 게 필요하다’라고 말하면 공장주인들은 머릿속에 먼저 도면을 그려본다. 발명이 어려우면 기존의 기계를 개량해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가령 수십년 동안 모나미볼펜을 제작해오던 영진정밀이란 업체는 어느날 한 의료기기상으로부터 레이저 핸드피스(레이저기구를 손으로 잡고 시술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조기구)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볼펜 앞머리 부분을 생산했던 경험을 살려 영진정밀은 레이저핸드피스를 만들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런가하면 삼광정밀은 보일러부품을 이용하여 의료기기인 대장세척분배기를 고안해 특허를 얻었다. 지난해엔 미국산 제품을 개량해 후진클러치장치를 단 레일바이크(레일 위를 달리는 자전거)를 만들기도 했다.

▲ 볼펜을 생산하던 영진정밀에서 만든 레이저핸드피스. 개량 과정이 담겨있다.

‘플라잉시티’를 이끄는 작가 전용석씨는 청계금속가공공방은 크게 6가지 업종으로 나뉜다고 설명한다. △금속·목재 등 원자재를 취급하는 업체와 △금속제품을 찍어내는 목형 업체 △플라스틱 제품을 떠내는 금속 주물 업체 △만들어진 제품을 광내고 갈아내는 ‘빠우’ △용접기술 없이 이음매를 만들지 않고 금속제품의 모양을 만들어내는 ‘시보리’ △기계제작업인 정밀 등이다. 자르기, 뚫기, 파기, 돌리기, 찍기 같은 단순노동의 결합체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정교하고 엄밀한 작업이 요구되는 일이다. 그래서 ‘플라잉시티’는 이들을 ‘금속의 연금술사’라고 표현한다.

▲ 입정동 골목 풍경. 손글씨 간판을 달고 있는 소규모 가게들이 몰려있다.

전용석씨는 내년엔 ‘미니박람회’가 아니라 보다 많은 업체들이 참가하는 ‘박람회’를 꾸려보는 것이 소원이다. 2년전 청계고가를 철거할 무렵부터 입정동을 드나들었던 그는 이곳에서 금속의 힘과 수공업기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창작을 업으로 삼는 예술가로서, 창조적 생산을 해내는 사람들과 뭔가 궁합이 맞았던 듯하다. 그는 하루종일 쇳가루·기름밥을 먹어가며 살아가는 입정동 사람들과 세상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가 되고 싶다고 했다. 제조업과 예술이 청계천 미니 박람회에서 만나고 있었다.

입정동 전시회는 1일까지 열리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선 이들 작품의 일부를 감상할 수 있다. 플라잉시티 홈페이지 ‘청계천미니박람회’(www.flyingcity.org)코너도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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