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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운동 기존질서 엎으려는 ‘국제적 저항’

68을 논하지 않고 현대 서구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68운동 기존질서 엎으려는 ‘국제적 저항’
문화혁명이었나 과격주의자들의 발작이었나
세대반란이었나 카니발이었나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서
따로 또 같이 일어난 ‘저항의 지도’를 되짚어본다
한겨레 오철우 기자
▲ 68운동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지음. 정대성 옮김. 들녘코기토 펴냄. 1만2000원
서구사회를 이해하는 열쇠말 가운데 ‘68세대’가 있다. 1968년 절정에 달했던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참여했고 그에 감화받았던 세대다. 세대로 계산하면 벌써 40여년 전 일이니, 어찌보면 한 세대 이상이 지난 아득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68운동’에 대한 분석은 다 끝나지 않는다. “이제껏 세계혁명은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그리고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 실패로 끝났지만 둘 다 세계를 바꾸어놓았다”(이매뉴얼 월러스틴)라는 평가가 있듯이, 그 거대함은 한 세대의 시간만으로 다 어루만질 수 없기에 말이다.

독일 역사학자 잉그리트 길혀-홀타이(빌레펠트대학 교수)가 쓴 <68운동>은 해일처럼 몰아쳐 서구사회의 정신과 제도를 뒤흔들었던 1968년 운동의 기승전결을 되짚으며 분석한 책이다. 비교적 적은 분량에 68운동의 핵심을 빠르게 정리한 이 책은 68운동이 자양분을 준 지금의 서구 시민사회와 저항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만하다.

68운동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지은이 길혀-홀타이 교수가 열거했듯이 ‘학생봉기’, ‘세대반란’, ‘문화혁명’, ‘세계체제 혁명’으로, 또는 ‘카니발’이나 ‘과격주의자들의 발작’으로 이해됐다. 저항하는 젊음의 열병 같은 축제였을까, 정신문명의 새로운 자각이었을까. 한 나라 안의 격동이었을까, 세계 차원의 새 살 움틈이었을까. 평가자들마다 다른 시선들은 그 때마다 다른 이름을 만들어냈다. 지은이는 여기에 또하나의 이름을 얹는 것일까.

길혀-훌타이 교수의 분석은 이전의 68운동 분석들과는 다르게 독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 독특함은 68운동이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같은 여러 나라에서 ‘기존 권위에 대한 전사회적 대항의 기획’이라는 닮은꼴로 일어난 국제적 운동이었을 강조하는 대목에 담겨 있다. 지은이는 각 나라마다 ‘따로 또 같이’ 일어난 ‘저항의 지도’를 역사비교의 방법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저항의 과제는 어느 나라에서건 언제나 ‘참여 확대’와 ‘의식 개혁’이라는 두 가지로 압축됐다.

국제베트남회의, 혁명을 배태

1968년 앞뒤의 시절에 서구사회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책의 첫 장면은 베트남혁명을 지지하여 1968년 2월 독일에서 열린 ‘국제베트남회의’ 안의 긴장과 활기다. 여기에 참여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의 신좌파 대표들은 구좌파과는 뚜렷히 구분된 새 세대들이었다. 68운동의 중심이었다. 회의 뒤에 1만5천여명이 참여한 다국적 평화행진은 68운동이 바로 이들을 잇는 국제적 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상징 사건으로 묘사된다.

신좌파 지식인의 새로운 인식은 현실사회주의인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분명한 반기였다. 무력한 선배 좌파들은 새 세대 좌파들한테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만 했다. 반자본의 목소리에 더해 사회주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쏟아졌다. 권위와 관료주의는 배격됐다. 또한 신좌파는 실존주의와 심리분석을 그들의 사상 지평에 과감히 끌어들였고, 집단 해방과 더불어 개인 해방을 부르짖었다. 개인의 생활세계, 가족, 성적 관계는 강조됐다.

▲ 비틀즈의 1967년 새 앨범 <페퍼 상사의 외로운 마음 클럽 밴드>의 표지.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 앨범은 히피 문화의 영향이 깊게 베인 작품으로, 당시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자들이 벌인 펜타곤 앞 시위의 모습과 닮아 미국 68운동의 시위문화에 종종 인용됐다. 사진 <68운동> 102쪽에서.
신좌파와 대항문화의 새로운 자각엔 여러 요소들이 접합됐다. 체 게바라와 호치민은 영웅으로 떠올랐고, 히피, 록, 비틀즈, 밥 딜런은 이들의 문화가 됐다. 자유분방한 하위문화는 찬양됐다. 사르트르, 마르쿠제, 프란츠 파농의 책들은 이들의 필독서였다. 대학 캠퍼스에선 대학과 교수사회의 권위에 반발하는 자율과 자치, 평의회의 깃발이 점거농성과 시위 속에서 세워졌다. 차별에 반대하는 흑인과 노동자들이 함께했다. 코뮌 형태의 대안적 집단 생활공동체의 창설이 실험됐다. ‘조직보다 직접행동’을 내세운 그들은 갖가지 깜짝 시위를 동원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 미국 민주사회학생연맹, 독일 사회주의학생연맹, 프랑스 혁명적 공산주의청년 같은 신좌파들이 있었다.

참여와 저항의식, 보물로 남겨

지은이는 68운동의 붕괴 과정에서도 닮은꼴을 발견한다. 조직과 폭력의 문제는 붕괴를 촉진했다. “68운동은 조직문제와 대결하는 가운데, 경쟁하는 집단이나 정당, 분파, 하부문화 속으로 용해된다. 나아가 68운동은 폭력문제와 대결하며 분열되고 지지를 잃는다. 행동의 급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폭력문제가 조직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더 첨예하게 만든 것이다.”(154쪽) 예컨대, 미국 민주사회학생연명은 폭력시위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내부논쟁을 벌이다 분열해 1969~70년 해산했으며 무장투쟁을 주장한 일부 그룹은 지하로 들어갔다. 한편으로는 붕괴과정에서 “68운동은 그 신성화나 악마화에 관계없이 공히 일상의 정치투쟁을 위해 도구화됐다.”(175쪽)

68운동은 무엇을 남겼고, 68세대는 무엇으로 남았는가. 68운동이 품은 ‘저항의 구상’은 얼마나 실현됐는지를 따져볼 때,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실패와 부분적인 성공’으로 비쳐질 만하다.

신좌파 그룹은 기존 조직에 복귀해 다시금 개인을 집단에 종속함으로써, 자기 결정과 개인 해방을 목표로 삼은 68운동의 반권위주의를 포기하기도 했다. 또 68운동의 정서는 대안적 대항문화의 환경에서 계속됐지만 동시에 그것은 여러 차례 단순화해 때때로 하부문화의 우상화를 낳기도 했다. 68운동의 후계로 등장한 여성운동과 대안운동, 생태운동 같은 운동은 68운동이 그린 구체적 유토피아와 비교할 때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전 사회적 대항의 구상을 펼쳐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값진 경험은 기억의 공동체에 남았다. 지은이는 68운동의 영향이 조직적으로 계승되진 못했지만 서구사회에 의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고 평가한다. “68운동은 이런 의식 전환이 무관심의 타파와 활발한 사회 ‘참여’, 그리고 상품사회와 소비사회에 대한 비타협과 거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나아가 68운동이 선전한 이행 전략은 ‘개인’에서 시작하고, 사회 참여를 통한 개인의 변화가 ‘다른’ 사회를 낳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178쪽) 기존 질서 전체에 맞서는 ‘대항의 구상’을 지닌 것으로는 “최후의 사회운동”이었던 68운동이 남긴 보물은 참여와 저항의 의식이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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