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난번에 이재영 동지의 ‘다함께’ 비판을 반박한 글에 대해서 이번에는 정다신씨(이하 존칭 생략)가 반박 글(“비민주적 ‘다함께’, 트로츠키 더럽힌다”)을 올렸다. 이재영이 “‘다함께’가 신당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들”이라는 글에서 ‘다함께’의 신당 비판에 대해 진정으로 반박은 하지 않고 ‘다함께’에 대한 중상과 핵심 쟁점과 무관한 지엽말단으로 도망갔듯이 정다신도 마찬가지다.
이재영의 딴소리가 레닌주의 당 이론과 민주집중제였다면, 정다신은 국가자본주의론으로 곁가지를 쳐 요령부득의 비방을 시도하고 있다. 진정한 쟁점을 회피하고 감정적 비난을 하는 것도 비슷하다.
정다신은 내용은 빈약하고 분량은 매우 긴 글을 통해 나를 비판했지만, 나는 되도록 간략히 그의 비판에 답하고자 한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사실도 틀리고 근거도 부실한 비방에 대해 길게 대응할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당장 다가오는 이명박의 반동에 맞선 투쟁을 준비하고, 심상정 비대위와 신당파의 우경적 개량주의 지향에 맞서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안 읽은 게 뭐가 문제냐고?
먼저, ‘관련된 책과 글을 하나도 안 읽었다면서 캘리니코스의 당 이론을 비판하는 이재영의 용기가 놀랍다’는 나의 주장에 대해 정다신은 “이명박 정권을 비판한다고 이명박의 자서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 무슨 동문서답인가?
나는 무언가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토론의 기본을 확인했다. 이명박의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 정책이 어떤 배경에서 제안됐고 그 정책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정책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럴 때 더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폭로와 비판이 가능하다.
나는 신당파도 비판하기 위해서 그들의 문건, 인터뷰, 관련 기사, 전력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주장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석했다. 무언가를 잘 조사, 분석, 탐구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비판하면 그 비판은 내용이 부실하고 설득력 없는 빗나간 것이기 십상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사례는 누구보다 정다신 자신이다. 정다신은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충분한 조사도 이해도 없이 어디서 주워들은 대개 잘못된 정보들을 가지고 앞뒤도 안 맞는 비판을 늘어놓고 있다. 아마도 인터넷에 떠도는 근거 없고 무책임한 댓글들에 의존한 글쓰기의 폐해인 듯싶다.
이번 글에만도 수두룩한 증거가 있는데 먼저 한 가지만 지적하겠다. 정다신은 남한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역사가 “영국으로 유학간 신학도(가) … 개인적 환경적 요인으로 선택한 한 이론”에서 시작됐다고 썼는데 남한 국제사회주의자들 중에는 “영국으로 유학간 신학도”가 없다.
아마도 그는 최일붕 동지를 언급하려 한 듯한데, 최일붕 동지는 신학도가 아닌 언어학도였고 영국이 아니라 미국 유학을 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서 토니 클리프의 국제사회주의 경향이 아니라 에르네스트 만델의 제4인터내셔널 경향을 접했다.
이것은 ‘비판하려는 상대방의 글을 하나도 안 읽어도, 잘 몰라도 비판할 수 있으며 그게 뭐 문제냐’는 그의 용기가 낳은 ‘아니면 말고’식 사례이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정다신의 무지
이제 그가 이번 글에서 핵심적으로 붙잡고 늘어진 국가자본주의론을 살펴보자. 그는 ‘다함께’가 ‘사회주의와 혁명’ 같은 “교조주의적, 원리주의적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민중과 역사에 대한 가장 큰 ‘죄악’”이며 국가자본주의론이 그런 ‘죄악’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 사회주의 체제를 모종의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트로츠키 사상에 가장 배치되는 것”이며 이 때문에 “어마어마한 오류를 낳은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국가자본주의론의 역사적 기원과 핵심 주장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역사와 실천의 검증을 이겨내지 못했고 따라서 “오류”인지 분석하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재영과 함께 ‘안 읽어도, 잘 몰라도 비판할 수 있다 학파’인 그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다만 “구 사회주의 국가 체제는 어느 면에서도 자본주의 체제와 아무런 유사점이 없다”고 선언한다. 또, “불평등(원문 그대로 - 아마도 ‘평등’의 오타인 듯)과 번영, 자유가 없었다고, 현실 사회주의 사회를 모종의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진보의 발전을 가로막는 행위”라고 선포할 뿐이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그에게 사회주의는 ‘평등, 자유’ 같은 가치와는 무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회주의로부터 이런 알맹이들을 빼면 남는 것은 국유화와 계획경제 같은 껍데기다. 그리고 이런 껍데기에 집착하는 그에게 ‘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유사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껍데기만 본다면 그는 박정희의 포항제철, 한국통신 ‘국유화’와 ‘경제 계획’이 ‘구 사회주의권’의 그것과 가지는 유사성을 해명해야 한다. 엥겔스는 사회주의를 ‘국유화’ 같은 껍데기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비스마르크의 담배 전매도 사회주의냐”고 비웃었다.
반면, ‘자유와 평등’ 같은 알맹이의 부재 문제로 접근한다면 우리는 ‘구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 사이에 수많은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둘 모두에서 권력은 노동자, 민중에게 있지 않았고 소수 지배자들인 국가관료나 자본가들에게 있었다.
따라서 둘 모두에서 노동자, 민중은 스스로 자신들이 사회와 생산을 통제하지 못했고 소수 관료나 자본가들이 통제권을 가졌다. 둘 모두에서 관료나 자본가 지배계급과 노동자․민중 사이에 어마어마한 불평등이 존재했다. 둘 모두에서 노동자․민중은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 사이의 형식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 모두가 소수 관료나 자본가가 노동자․민중을 억압․착취하는 계급 사회라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국가자본주의론의 창시자인 토니 클리프는 이미 1948년부터 소련과 동유럽 나라들이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 평등을 추구하는 맑스주의의 진정한 정신에 입각해, 그런 사회를 모종의 ‘사회주의’라고 보는 통념을 거부했다.
단지 소련군 탱크가 밀고 들어와 소련식 국유화와 명령경제를 실시한다는 이유로 그 사회를 사회주의로 보기를 거부한 것이다.
토니 클리프는 “혁명적 정당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가기구를 분쇄하지도 않았고,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도 없었던 그 나라들이 노동자 국가라면, 맑스주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물었다.
이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맑스주의의 정수에 비춰본 태도였다. 자구가 아닌 정신을 중요시하며 트로츠키의 사상을 살펴보면 그도 이런 위대한 전통에 서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반스탈린 투쟁에 앞장섰으며, ≪배반당한 혁명≫에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선구적인 맑스주의적 분석을 시도했고 말년에는 스탈린파 지배관료들을 타도할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론은 정다신의 주장처럼 “트로츠키 사상에 가장 배치되는 것”이거나 “트로츠키의 이름조차 더럽히(는)” 것이기는커녕 트로츠키의 진정한 사회주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혁명적 패전주의
국가자본주의론 덕분에 국제사회주의자들은 양자택일을 강요받은 냉전기에 관료 지배계급이 통치하는 소련의 동구권과 사적 자본가들이 통치하는 미국의 서방 모두에 혁명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마치 레닌과 볼셰비키가 1차 대전 때 독일과 러시아 모두에 반대해 혁명적 패전주의 입장을 취했듯이 말이다.
미국, 서방 제국에 대한 반대 때문에 소련군 탱크가 헝가리․체코 민중 저항을 짓밟는 것을 지지하거나, 소련, 동방 제국에 대한 반대 때문에 미제국주의의 베트남 학살을 눈감는 양쪽의 오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전통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에서도 국제사회주의자들은 남북한 국가와 체제 중 어느 하나를 지지하지 않고 둘 모두에 혁명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남한의 시장자본주의도 북한의 국가자본주의도 우리의 대안이 아니다. 우리는 남북한 모두에서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 변혁을 지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들처럼 북한 국가를 지지하며 관료 지배자들의 탈북자 억압, 개성공단 노동자 착취에 침묵하지 않는다. 반면 일부 개량주의자들처럼 남한 국가에 충성하기 위해 친북 좌파에 대한 국가보안법 마녀사냥에 동조하지도 않는다. 예컨대 신당파의 조승수 씨는 자신을 “종남주의자”라고 했는데 솔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정치와 전통을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정다신의 왜곡와 무지는 읽기가 괴롭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이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했다)”거나 “1차 베트남전에서 … 제국주의 침략 전쟁 반대를 거부했다”는 주장은 악의적 왜곡이 아니라면 형편없는 무지의 발로이다.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무지에 기초한 그의 나머지 온갖 왜곡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안 읽어도, 잘 몰라도 비판할 수 있다 학파’다운 주장과 왜곡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왜곡과 진정한 논점
정다신의 무지와 왜곡 두 가지만 더 지적하겠다. 그는 “(다함께) 사이트에는 게시판조차 없(다)”며 “다함께 안에 ‘민주적인 토론’이 … 있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고 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인터넷 자유게시판이 민주주의의 척도가 됐는지 모르겠다.
나는 온라인에서 책임지지도 않는 익명의 댓글들을 민주주의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는 <맞불> 기사마다 기자별로 이메일이 공개돼 있을 뿐 아니라, 회원들은 직접 만나서 함께 활동하고 부대끼며 민주적이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일상으로 한다.
거리와 학교, 작업장에서 공개적으로 실천하고 토론하는 것보다, 골방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방식이겠지만 말이다.
정다신은 온갖 욕설과 성인 광고, 익명의 무책임한 댓글과 중상들로 넘쳐나는 각종 자유게시판들을 지켜보면서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길 바란다.’
정다신은 “강남지역위원회로 불법적으로 주소지를 대규모로 옮겨 접수한 그 부분은 은근슬쩍 넘겨 버렸(다)”며 나를 비판했다. ‘안 읽어도, 잘 몰라도 비판할 수 있다 학파’의 주특기가 또 발동한 것이다.
‘강남지역위 사건’이란 존재하지도 않는다. “불법” 주소지 이전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당규 위반조차 없었다. 당시에는 당규상 주소나 직장과 상관없이 원하는 지역위에 속할 수 있던 때였다. 당시 학생위원회로 조직돼 있던 ‘다함께’ 회원들은 중앙당과 협의 하에 강남 지역으로 이전했다.
‘강남지역위 사건’ 이라며 마치 대단히 부정이 있었던 것처럼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를 반복해서 명예를 훼손하고 결국 기정사실화시키는 수법은 실로 악질적이기 짝이 없다.
마지막으로, 정다신은 내가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개량이네 우경화네를 남발”했다며 “함부로 출세주의, 개량주의를 뒤집어씌우지 말라!”고 흥분한다.
나는 ‘구 사회주의권’의 실패에 절망해 변혁의 전망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개혁을 선택한 사람들을 이해한다. 나는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들의 처지와 조건을 개선하는 개혁도 지지하며 이를 위한 개혁 지지자들과 공동 투쟁도 언제든지 환영해 왔다.
그리고 그들을 단지 ‘개량’이나 ‘우경화’라고 딱지 붙이고 비난한 바는 없다. 나는 다만 지금의 구체적 맥락에서 신당파와 심상정 비대위의 방향이 왜 문제인지를 구체적인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비판했던 것이다.
정다신은 흥분하거나 감정적 비난, 딴소리 하기에 매달릴 게 아니라 ‘다함께’가 수많은 기사와 글, 팸플릿을 통해 신당파에게 가한 비판에 대해 구체적 반박을 내놓아야 한다.
'종북주의 청산'을 위해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들을 공격하는 게 과연 배신적 태도가 아닌지,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없이 북한 국가와의 선긋기만 강조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운동권 정당', '가두집회 만능주의' 등을 비판하며 대중 투쟁․행동을 중심에 두지 말자는 것이 과연 우경화가 아닌지,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당이 문제'였다며 정규직-비정규직 단결 투쟁이 아니라 정규직 노조의 투쟁 자제와 양보를 수반하는 ‘사회연대전략’을 말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조직 노동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신당파의 시도가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이 추구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등에 대해 말이다.
또, 이명박의 사유화, 비정규직 확대에 맞서 민주노총이 파업과 투쟁을 준비하는 데 '민주노총당'을 부정하는 게 과연 옳은지, 이랜드노조의 처절한 매출 타격 투쟁, 태안 주민의 분노에 찬 상경 투쟁 등이 벌어지는 데 '데모당', '운동권당'을 거부하는 게 바람직한지 답해야 한다.
사족: <레디앙>은 ‘다함께’에 대한 비판 기사는 글의 질과 무관하게 홈페이지 대문에 띄우고 사진까지 몇 개 넣어서 키워주면서, 내가 보낸 반박 기사는 작게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있다. 아무리 편집권은 인정하더라도 공정한 태도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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