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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냉정대처 일본이 한수위

다시 한번 역사 인식의 부재... 그 나이 먹도록 뭘 배웠는지... 나이는 똥구녕으로 먹었는지...ㅠ.ㅠ

 

 

 

<조영남 "냉정대처 일본이 한수위">
[연합뉴스 2005-04-24 12:42]
포토
MC 임성훈,
8년만에 KBS 복귀
에릭, 본능적으로 멋을 아는
메트로섹슈얼
문근영, "'올드보이' 유지태,
도전해볼거예요"
문성근 “한사람의
시민이었을 뿐"
(도쿄=연합뉴스) 신지홍 특파원 = 일본 우파성향의 산케이(産經)신문이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을 펴낸 가수 조영남씨와 회견한 기사를 24일 실었다.

책의 일본어 번역을 계기로 일본을 찾은 조씨는 회견에서 "사물을 보는 관점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며 출간 이유를 밝혔다.

그는 2차대전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가본 소감에서 "속았다는 생각이었다. 일반 신사와 다르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에서 신사참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 대단한 장소로 세뇌됐었다"고 말했다.

또 "일본인은 자신의 선조가 아무리 심한 일을 했어도 선조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참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반면 우리는 범죄자로 취급하니까 합사와 참배는 괘씸하다고 말하는 것"이라며 "하나의 사물을 놓고 지배한 쪽과 당한 쪽은 서로의 입장을 진짜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덧붙였다.

조씨는 독도 및 교과서문제와 관련, "냉정히 대처하는 일본을 보면 일본쪽이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shin17

shin@yna.co.kr (끝) <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무 단 전 재-재 배 포 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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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 &quot;'올드보이' 도전?

근영아, 예쁘게 다 큰 담에 도전해라.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다코타 패닝, 숨바꼭질에서 청승맞은 연기하는거 보면 괴롭다. 예술도 좋은데 개인적으로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i am sam에서 Lucy 수준으로 나오는게 좋을 것 같다. 당분간!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Lucy in the Sky with Diamonds...Lucy in the Sky with Diamonds...ah~~

 

덜떨어진 샘도 비틀즈가 해산한건 요꼬 때문이 아니라고 이해하는데 우리 초딩들은 왜 이리 개념이 없을까

 

 

 

문근영, "'올드보이' 유지태, 도전해볼거예요"
[마이데일리 = 강승훈 기자]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다는 문근영(18)은 영화 '올드보이'에서 유지태가 맡았던 이우진 역할에 매력을 느꼈다고 밝혔다.

영화 '댄서의 순정'의 조선족 댄서 장채린으로 분해 열연한 문근영은 기존 작품인 '가을동화', '장화홍련', '어린신부' 등을 통해 순수함과 어두움 그리고 발랄한 캐릭터를 소화했다면서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올드보이'의 이우진 같은 역할에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배역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이우진이 악역이기는 하지만 악함을 표현하면서도 내면적인 미묘한 감정을 잘 살린 것이 원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문근영은 "'어린신부'와 '댄서의 순정'처럼 따뜻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영화를 많이 하기를 희망한다"고 은근한 욕심도 내비쳤다.

문근영은 "사람들이 '장화홍련'을 보면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에서 쾌감을 느껴 이후로는 어두운 역할만 찾게 됐다"고 말한 후 "하지만 '어린신부'를 통해서 사람들의 웃음 소리를 듣고 행복함에 젖어서 따뜻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덧붙여 그녀는 하고 싶은 배역도 많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그때 그때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댄서의 순정'은 오는 28일 개봉 예정.

[영화 '댄서의 순정'에서 장채린으로 분해 열연한 영화배우 문근영. 사진 = 한혁승 기자 hanfoto@mydaily.co.kr]

(강승훈 기자 tarophine@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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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데일리안 ‘대통령 저격 만평’ 놓고 옥신각신

베리타스의 힘? 이 인간 진짜 보수인가? 그럴리가 있나? 대한민국에 보수가 과연 있나?

대한민국 보수 자처하는 인간들은 정신적 조국인 미국 가서도 그 알량한 affirmative action, 완전히 철폐하자고 설래바리치고 다닐 인간들이다. 대한민국 보수?의 지향 미국은 1950년대 초코렛 얻어먹던 당시의 미국이다. 거기서 정체됐다. 우리는 그래도 외형상politically correctness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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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데일리안 ‘대통령 저격 만평’ 놓고 옥신각신
“저급하다, 사과하라”에 사과그림 게재 조롱…보수매체 시장 갈등 시각도
2005-04-24 16:50 김현 (guist10@dailyseop.com)기자
노무현 대통령 저격 패러디에 대한 사과 문제를 두고 보수 인터넷 매체인 독립신문과 데일리안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일고 있다.

데일리안의 한 논객이 23일 컬럼에서 “독립신문이 패러디 사건에 대해 사과하라”고 주장하자 독립신문이 ‘고결한 중도보수께 드린다’며 과일 사과 한 알을 내밀며 비꼰 것이다.

컬럼과 사진으로 오간 두 사이트의 공방을 지켜 본 네티즌들의 의견은 보수매체 시장경쟁 공방으로 이어지고 있다.

갈등의 발단은 데일리안 사이트에서 ‘베리타스의 힘’이라는 필명으로 고정칼럼을 쓰고 있는 논객의 칼럼에서 시작됐다.

데일리안 “언론 자유 보장받는 한 페어플레이 해야”

그는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 사형당한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의 예를 들며 “독립신문의 노 대통령 저격 패러디는 얼핏 ‘본 회퍼’의 히틀러 암살 기도를 연상케 하며 동시에 노 대통령에 대한 독립신문의 증오와 적개심의 단면을 보여 준다”며 “문제는 노 대통령이 히틀러와 비견될 만큼 악한 사람이냐는 것인데 독립신문은 ‘그렇다!’ 라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필자가 볼 때 아직은 속단”이라고 말했다.

▲ 독립신문에 게재된 ‘사과’ 만평.  
그는 또 “보수우익은 노 대통령의 국가경영 방식에 반대하여 그를 격렬하게 비판하며, 그의 경박하고 방정맞은 통치스타일을 비웃고 혐오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류 공공의 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노무현의 외교기조와 대북관이 매우 위험스럽게 보이며, 그래서 이 나라가 혹시 김정일의 적화야욕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지만 그게 너무 지나치면 자칫 강박증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패러디의 자유를 허용하는 노무현 정부와 페어플레이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물리적으로 방해하거나 봉쇄하지 않으며 이 나라는 아직까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며 “따라서 우리는 노 정권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할 수 있지만 모함이나 저주, 직설적인 인신공격은 ‘더티 플레이’이므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은 민주적인 방식에 의하여 정권을 잡았고 허락된 야망을 실현하고 있으며 우리가 볼 때는 매우 못마땅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국민들이 그것을 허용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는 또 “그런 의미에서 독립신문의 노무현 ´저격 패러디´는 유감스런 해프닝이며 행동이 수반된 것은 아니지만 선동적 요소가 엿보인다”며 “패러디가 일부 보수우익들에게는 통쾌감을 주었을지 모르나 국민 대다수에게 혐오감을 주었으며 자칫 극우집단의 히스테리로 보여질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보수우익 전체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독립신문 “고결한 중도보수께 사과 (한 알) 드립니다”

컬럼의 결론은 독립신문이 직접 사과를 하라는 것.

그는 KBS 정연주 사장이 박근혜 대표의 ‘알몸 패러디’를 사과한 것을 예로 들면서 “만약 좌파 찌라시들이 박근혜에 대한 ´저격 패러디´를 했다면 독립신문이 제일 앞장서서 비난했을 것”이라고 말한 뒤 “솔직히 이번 ‘저격 패러디’는 ‘알몸 패러디’보다 훨씬 더 강도가 심했으며 독립신문의 신혜식은 이번에 물의를 빚은 것에 대하여 정중하게 사과하라”고 주장했다.

독립신문은 여기에 과일 사과를 내미는 만평 사진으로 한껏 비꼰 사과의 뜻을 전달했다.

이 신문은 ‘스나이퍼 패러디 사과드립니다’ 라는 제목의 만평을 실어 “데일리안 베리타스님께 드립니다. 고결하신 중도보수님께 심려를 끼쳐...”라며 사과를 내밀면서 “세파에 거칠어진 두 손으로 드립니다”라고 밝혔다.

독립신문은 또 게시판에 이같은 데일리안의 칼럼을 올리면서 독자들의 의견을 물었다.

네티즌들은 “데일리안은 독립신문 패러디에 대해 그동안 침묵하더니 사건이 마무리 단계에 드러 가니깐 사과하라고 하네”(아이디 저격) “경찰이 수사할때 그런글을 올리면 좋았을거 같았는데 그때는 침묵하더니 데일리안이 그런 컬럼을 오늘 올린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음..)는 글을 올렸다.

두 보수 인터넷 매체의 분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 나왔다.

‘국민’ 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은 “데일리안과 독립신문은 같은 편에 서 있는 우파 신문으로 알고 있는데 이 무슨 망발을 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볼 때 반성해야 할 측은 데일리안”이라고 말했고 아이디 ‘똥닙변소’는 독립신문을 향해 “까놓고 얘기해서 니들 스스로에겐 당장 방문자 늘어서 좋겠지만 전체 우익진영엔 엄청난 독이란거 알고 있니? 니들은 우익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폐기 되어야 할 쓰레기 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그 밖에도 “독립신문은 너희 같은 인터넷 찌라시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우익의 성지”(까불지마) “데일리안은 울고 싶은 독립신문의 뺨을 때린 꼴”(거북이) “독립신문 편드는 척하면서 데일리안과 독립신문을 은근히 이간시키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요즘 노빠들이 우익들을 이간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감시원) 라는 글이 올라왔다.

보수 인터넷매체 시장 점유 갈등 드러내

이같은 두 사이트의 갈등을 촉발시킨 데일리안의 칼럼은 최근 독립신문이 자사 영향력을 홍보하는 기사를 연달아 내보낸 직후에 나온 것이어서 보수 인터넷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는 두 매체의 신경전이 가시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독립신문은 21일 기사에서 한 인터넷 순위조사 사이트를 인용해 ‘독립신문의 독자가 10만명을 넘었다’고 보도했으며 다음 날 기사에서는 “이른바 ´보수´라고 불리는 자유진영 사이트들이 방문자집계순위에서 약진을 보이고 있다”면서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의 사이트와 프리존만을 언급하고 데일리안에 대한 얘기는 빼놓았다.

‘이게 뭡니까’는 “독립신문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지 않습니까. 아니면 독립신문이 랭킹이 높고 열혈 지지자가 많아서 단순한 경쟁상대로만 보입니까”라고 물은 뒤 “최근 우파사이트 순위는 거의 대부분 낮게 나오고 있는데 데일리안만 최근에 한달 사이 300등이나 오른 게 좌파들과 손잡은 건 아닌지 의심이 된다”며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네티즌은 “독립신문이 최근 랭킹과 관련, 은근히 데일리안의 신빙성을 까는 듯해서 기분이 나빠서 뒤늦게 뒷북치는 주장을 펼치는 건가요”라고 묻기도 했다.

독립신문은 지난해 초 보수 인터넷 매체의 후발주자인 데일리안의 창간 당시 ‘건전한 보수진영을 위한 새 인터넷신문의 창간’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으며 데일리안은 지난해 11월 신혜식 독립신문 대표가 국가보안법 사수 시위를 벌이다 구속됐을 당시 이 소식을 상세히 보도하는 등 업계의 우의(?)를 과시해왔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 김현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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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우발적 행동을 떼강도라니” vs 조선 “그게 강도 아닌가”

재밌는 것은 아래 리플이다. 아래 초딩들이 쓰래기같은 리플 많이 붙였다. 그래서 절도가 아니란 말인가! 뭐 이런 내용이다. 두 신문의 기사 쟁점은 단순한 동시절도냐 조직절도냐 하는 것이다(솔직히 좆선도 좀 쟁점을 헤매는 것 같다). 이런 기사 하나 읽고도 기본적인 독해를 못하니 학교에서 대체 뭘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오로지 암기만 하니 독해 및 상상이 불가능하다. 우리 옛날에 단순 암기 학력고사 공부할 때 보다는 요즘 많이 나아졌다고 들었는데...    물론 각종 포탈에 부러 그렇게 리플다는 쓰래기들도 있기는 하지

 

 

집합범-다수인이 동일한 방향에서 같은 목표를 향해 공동으로 작용하는 범죄로 범죄구성요건이 군중범죄이다. 절도에 해당없다.

 

합동범-2인 이상이 현장에서 공동하여 범행하는 경우’로 좆선이 요렇게 우기고 있다.

 

동시범-공동의 의사가 없는 경우에 2인 이상이 죄를 범했더라도 공동정범이 될 수 없다. 바로 요케이스 답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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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우발적 행동을 떼강도라니” vs 조선 “그게 강도 아닌가”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5-04-2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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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이 연기자-매니저에
끌려다니는 상황"
지난 21일자 조선일보의 <중학생 수백명 '편의점 습격사건'> 제하의 보도를 놓고 조선과 오마이뉴스가 공방을 펼치고 있다.

조선일보는 기사에서 사건의 요지를 이렇게 전했다.

"지난 4일 정오 무렵 경기 수원시 인계동 수원문화회관 인근의 한 24시간 편의점. 일일체험 학습의 하나로 문화회관을 둘러본 K중학교 학생 400여명이 점심 식사 후 편의점으로 몰려와 진열장에서 껌과 음료수, 과자, 로션 크림, 헤어젤 등을 닥치는 대로 집은 채 돈을 내지않고 가게문을 나섰다"면서 "당시 점장과 아르바이트 직원 등 2명이 '학생들, 뭐하는 거야!'라며 제지했지만,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20일 이 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당시 근처 광장에 1·2·3학년 학생 1600여명이 모여 있었고, 이 중 400여명이 편의점에 몰려와 300만원 이상의 물건을 그냥 갖고 나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오마이뉴스는 같은 날 이 기사에 대한 반박기사를 실었다. 오마이뉴스가 문제제기한 핵심은 조선이 학생들을 떼강도로 몰고 있다는 것.

오마이뉴스는 반박기사에서 K중학교 김 모 교사의 주장을 빌려 "(한꺼번에 물건을 사려는 학생들이 몰려) 물건을 계산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자 한 학생이 짜증을 내다못해 그냥 물건을 들고 나왔고, 군중심리에 휘말린 학생들이 하나둘 따라하면서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고 전했다.

의도적인 강도행위가 아니라 한두명의 학생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절도를 나머지 수백명의 학생들이 군중심리에 의해 따라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오마이뉴스의 반박기사에 대해 첫 반론은 조선이 아니라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부터 나왔다. 오마이뉴스는 22일 저녁 <조선일보 보도면 왜곡이라고 주장해도 되나>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내용은 "사실접근에서 중요한 부분은 학생들의 우발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물건을 그냥 들고 나갔다는데 있다"면서 집단절도 행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도 23일 장문의 반박기사를 조선닷컴에 실었다. 조선은 "오마이뉴스에 묻고싶다"면서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계산대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으면 기다리지 않고 그냥 물건을 들고 나가도 되는 것인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돈을 내 계산하고 물건을 가지고 나오거나, 그 대기시간을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상점을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앞서 절도행위 자체에 주목한 반박기사와 비슷한 주장을 폈다.

조선은 또 '습격사건'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에 대해 "두 눈을 뜨고 멀쩡히 서 있는 편의점 주인에게, 수백명의 학생들이 가게에서 돈을 내지 않고 물건을 가져가는 행위는 분명 '습격'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조선은 또 <조선일보 보도면 왜곡이라고 주장해도 되나>라는 제목도 문제삼았다. 조선은 "'조선일보 보도면 왜곡'이라는 말부터가, 본질보다는 특정 매체를 흠집내려는 의도의 표현이기 때문에 제목부터가 오마이뉴스의 편향된 시각을 보이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조선닷컴의 기사에 대해 오마이뉴스도 같은 날 곧바로 제하의 재반박 기사를 실었다. 오마이뉴스는 "학생들이 절도죄를 저지른 것은 분명하다"고 전제하면서 "그러나 '조직적 범죄냐, 우발적 범죄냐'에 대해서는 '양형(量刑)'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었으며 <조선> 기사는 과정을 생략한 채 (집단절도의) 결과만을 보여줌으로써 400여 명의 학생들을 '조직폭력배'나 '떼강도'로 몰아세우지 않았나?"고 지적했다.

오마이뉴스는 이 사실을 전한 다른 언론사의 보도를 들어 조선 기사가 학생들을 과도하게 ‘범죄집단화’하고 있다는 주장도 폈다. 오마이뉴스는 “누군가 돈을 내지 않고 그냥 가게문을 나서자 뒤따라 물건을 든 채 편의점을 빠져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는 연합뉴스의 보도를 인용해 "이만큼이라도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전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오마이뉴스>도 <조선> 기사에 문제를 제기할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마이뉴스는 또 조선일보 사주의 탈세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신문사주가 탈세를 저지르고도 버젓이 세상을 활보하는 현실에 납득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며 "세상이 꼭 '법대로'만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면, 갈 길이 먼 학생들을 몰아세우는 게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라고 주장했다.

이호석(arisan@dailyseop.com)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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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의료체계?

오늘 데일리서프에 오른 또다른 기사다(오늘 진보누리에는 특이 사항 없는 것 같다).

 

영어도 영어려니와 내가 알기로는 미국 의료 문제는 그 시스템 자체에 있다. 미국지사 정산을 하다보니 정말 사실인데 미국 건강의료보험은 국가사회 공보험이 아니다. 철저히 개인 자력으로 부담한다. 영어를 잘해도 돈없으면 병원에서 죽음이다.

미국 의사 협회에서 의료건강 공보험 시스템같은 좌경사회주의 체제 도입을 반대한 결과란다. 학부 졸업후 4년이나 메디칼 스쿨에서 돈쳐들이고 공부했는데 의사란 것들의 인식 수준이 이렇게 저열하다(Ph.D 꿈도 꾸지마라). 산재,고용,건강,국민연금 해서 4대 공적부조 복지시스템은 이 열악한 코리아에서도 인정되는 것이다. 미국 의사들 인식대로 사회가 굴러간다면 왜 미국이 '요람에서무덤까지'의 국가 영국과 국교 단절 안하는지 모르겠다. 전형적인 빨갱이 국가 아닌가!(물론 코리아에도 사민당, 노동당 등 좌파가 정권잡은 서유럽 국가들과의 왜 단교를 주장 안하는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의 저열한 인식의 수구꼴통 또라이들 그득그득하다. 1년에 책 한권도 안읽고 오로지 조중동만 보는!)

 

필요에 따라 실용적으로 땜빵식으로 만들어진 미국의 복지 시스템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조쥐부쉬가 집권하자마자 수십년간의 기존 정착 복지 시스템이 하나씩 후퇴하고 있다. 이게 바로 철학의 부재에 기인한 것이다(실용주의는 철학이 아니다. 개똥철학이 진짜 철학이냐?). 그 큰 나라 미국의 구찌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야만적 복지 시스템에 대한 유럽 지식인들의 비판에 더해서 언젠가 나도 첨언해야겠다. 아울러 코리아 국민연금 제도에 대해서도 자리가 나면 터치해야겠다.

 

ps. 지난 대선 이후 '우리가 찍은 후보가 이번에도 안됐다'라고 밝혔던 코리아 의사 협회의 공식 발표가 떠오른다. 그치들 시각에 아무 댓가없이 퍼주는 국경없는의사회 또라이들은 뭐냐? 노벨상 받으면 돈이 나와 밥이 나와?!

 



“영어 못하면 죽어야 하나”..뉴욕 한인들 울분 토로
2005-04-22 08:17 뉴욕 = 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미국 뉴욕의 플러싱에서 건축일을 하던 문철선씨는 지난해 여름 축구시합 도중 뇌출혈 증세를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한달만에 숨졌다.

위급한 상태였던 문씨가 고통을 겪으면서도 집중적인 치료를 받지 못한 데는 미국 의료시스템 및 의료보험 제도를 잘 알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많은 이민자 단체들은 의사소통의 부재를 문제로 지적했다.

뉴욕이민자연맹을 비롯한 뉴욕지역의 이민자 옹호단체들은 21일 병원들이 통역서비스 제공의무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문씨의 경우처럼 피해를 겪는 사례가 많았다면서 뉴욕시내 4개 병원을 제소했다. 제소된 병원은 문씨가 치료를 받았던 플러싱, 자메이카 병원을 비롯해 브루크데일 대학병원과 세인트 빈센트 스테이튼 아일랜드 병원 등이다.

이들에 제출한 소장에는 뉴욕한인봉사센터를 비롯한 이민자 단체들이 지난 2년간 수집한 병원들의 통역 서비스 부실 사례가 지적돼 있다고 뉴욕 타임스가 전했다. 타임스는 이 사례들은 대부분 한국어 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의 경우라고 설명했다.

한인봉사센터 김광석 회장은 "문씨의 경우 우리에게 미리 연락했더라도 통역서비스를 받아 의사에게 증세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었을테고 그랬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김 회장은 "뉴욕주 규정은 병원이 사용인구 2% 이상인 언어의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민자들이 병원 응급실에서 겪은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나옐리'라는 여성은 두차례의 자궁외 임신으로 나팔관을 제거했지만 수술에서 회복된 뒤에야 자신이 다시는 임신할 수 없는 처지가 됐음을 알게 됐다.

건축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급히 절단수술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통역이 없어 자신의 7살난 사촌을 통해 의사와 의견을 교환하는 장면도 이민자 옹호단체 조사원들에게 목격됐다. 소장은 "당시 소년은 '의사들이 자르겠다고 하는 것이 발인지 발가락인지 모르겠다'고 말했고 환자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고 밝혔다.

자신을 'N'이라고 밝힌 45세의 한 한국여성은 강도에게 벽돌로 머리를 얻어맞아 플러싱 병원에서 30바늘을 꿰매고 며칠뒤 후속 치료를 위해 이 병원을 다시 찾았으나 병원측은 "치료를 받으려면 사진이 있는 신분증과 95달러를 내야 한다"는 내용이 영어로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돈도 없고 강도에게 빼앗겨 신분증도 없던 이 여성은 자신의 처지를 설명도 하지 못한채 절망감에 빠졌으나 그후 한인봉사센터의 도움을 받아 '뉴욕범죄피해자기금'에서 나온 치료비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민자 옹호단체들의 제소에 대해 엘리엇 스피처 뉴욕주 법무장관의 대변인은 이미 이들 병원의 통역 서비스 부실문제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면서 "우리는 영어가 능숙하지 못한 환자들의 의료적 필요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대단히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뉴욕한인봉사센터 김 회장은 "이번 소송에서 병원측의 법규 위반 판결이 내려지게 되면 문씨와 같은 개별 피해자들은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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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김일성이 김좌진 장군을 죽였다에 대해 펌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재미있는 역사이야기가 올라와서 함 퍼본다.  작년초 현대 계열사  사장이 문화일보 짱에 오른지 왜 이리 스탠스가 무너지는지 모르겠다. 언론 그자체도 물론 자본이지만 경영하던 인간들(예컨대 mba출신들)은 가급적 아니 절대! 언론이나 정치같은데 관여 안했으면 좋겠다. 내내 profit만 생각했는데 justice 개념이 있을까? 대표적인 인사가 조쥐부쉬다. 국제 환경 기준에서 탈퇴, 제국주의  침략 전쟁, 국제 형사재판소에서 탈퇴... 오히려 부쉬는 경영학 텍스트에서 배운대로 철저히 자국 단기 이익에 급급해 잘하고 있는거다. 물론 경영이라는 것이 눈앞의 단기적 이익에만 얽매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한민국 천민 자본주의 재벌만큼 다른 자본도 대게 그렇다. mba 천국이라는 미국의 엔론사 분식회계 부정비리 사건을 보라. 

 

축소확대  

김좌진 장군을 김일성이 죽였다고?
문화일보의 어이없는 역사왜곡
2005-04-21 16:27 이호석 (arisan@dailyseop.com)기자
21일 문화일보 '오후여담' 칼럼에 이신우 논설위원이 재미있는 글을 썼다. 제목은 '김일성'.

청산리 전투 대승에 빛나는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배후가 ‘북한의 전직 수령 김일성’인데 이러한 공산주의 빨치산 김일성의 독립운동을 인정한다면 원한의 죽음을 당한 독립군과 김좌진 장군의 존재는 부정당할 수밖에 없다면서 장군이 지하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게 주내용이다.

그러나 이 위원의 이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용감한 주장이다.

▲ 이호석 기자 
학계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김 장군을 암살한 이는 박상실이라는 사람이고 이 사람의 배후에 김봉환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 김봉환이 암살의 배후임이 진작에 밝혀진 바 있다.

김봉환이 한때 김일성(金一星)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적이 있어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과 혼동이 있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으로 판명된 것이다.

물론 암살범들은 모두 한인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김일성 전 주석이 배후가 아닌 것은 분명하거니와 암살의 전후 배경을 살펴보면 일제에 매수된 김봉환이 만주 공산당 조직에 거짓정보를 제공하고 이에 당 조직이 속아 김 장군의 암살명령을 내리게 됐다는 게 지금까지 드러난 연구성과다.

지난 95년 7월 25일자 중앙일보는 김 장군 암살의 전모를 상세히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중앙일보는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라는 시리즈물의 37번째 순서로 김 장군 암살의 배후를 다뤘다.

중앙일보는 이 기사에서 김 장군의 장례식 때 대변인으로 활동했던 이강훈씨(전 광복회장)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 장군의 암살범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화요파)의 박상실이며 그 배후는 박의 상부조직에 있었던 김봉환이라고 보도했다.

김봉환은 김장군의 암살이 있기 직전에 일경에 체포됐다가 풀려났는데 이 과정에서 일제에 매수돼 결국 조직에 김 장군이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올리고 여기에 만주총국이 속아 결국 김장군 암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중앙일보는 이 김봉환은 김일성과는 다른 인물이며 결국 김일성 전 주석이 김 장군의 암살 배후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명백히 밝혔다.

김 전 주석이 암살범 배후가 아니라는 것은 최근에 빚어진 문화관광부 선정 문화인물 논란과 관련해서도 확인된다.

문광부는 지난 3월의 문화인물로 일제시대 사회주의 여류소설가 강경애(1906~1944)를 선정했다. 그런데 월간조선 2월호는 “강씨가 김좌진 암살을 사주한 김봉환의 동거녀였고 김과 함께 암살을 공모하기까지 했다”고 폭로했다.

작가 이이녕씨 역시 이강훈, 정환일, 임기송 등 김 장군의 측근들을 인터뷰해 펴낸 '일제하 36년-독립운동실록'에서 “강경애와 김봉환 두 사람이 일본 하얼빈영사관 경찰부 소속 마쓰시마 형사에게 회유당해 박상실을 사주, 김 장군을 암살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문화일보는 불과 3개월여 전에 있은 김 장군 배후논란에도 아랑곳없이 김 전 주석을 암살배후라는 용감한 주장을 한 셈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며 문화일보의 주장처럼 김 전 주석의 항일운동을 인정한다고 해서 김 장군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 생애에 걸쳐 공산주의-민족주의 세력의 공동전선 구축에 노력한 김 장군이 기꺼워할 일이 아닌가 싶다. 이래도 문화일보는 아직 지하에서 김 장군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지.

ⓒ 데일리서프라이즈 < 이호석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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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류)파리 68혁명(네이버 즐 펌)

 

 

 

 

파리의 68혁명(1968년 5월혁명)

 

 

68혁명의 발생배경


지난날의 세대간의 갈등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항으로 상정되었으나 1960년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 걸치 기성세대의 모든 것에 대한 도전으로서 다시 말해 반체제로서 나타났다.

68년을 기점을 세계적으로 저항운동이 집중된 이유는 동서세계의 냉전으로 인한 획일적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대가, 미국의 베트남 침략이나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의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후의 경제번영과 자유를 누리며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대학교육체제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육제도에서의 지식교수는 억압적 성격을 띄고 있었고 그 결과 지식의 수익자는 노동자원으로서 사회속에 통합되거나 혹은 경제 사회체제의 결합에 봉사하는 기술산업요원으로 편입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한 학생들은 대학이 지닌 모순이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했다.


1) 대학 내의 문제



당시 프랑스 대학이 과도한 양적인 팽창으로 인한 문제를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자 그 부작용은 학생들에 의해 폭발하게 된다. 68혁명 당시의 학생들은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로서 196년 23만명이던 것이 68년이 되면 2배 이상 증가하여 60만명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대학당국의 시설과 교수법에서의 대처는 미흡했다. 초대형 강의, 비좁은 건물, 구태의연한 강의내용과 평가제도, 암기와 주입식에 의존하는 전통적 교수법, 기숙사 시설 대학교원수의 절대부족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졸업 후 사회 진출에 대한 불안감도 크게 작용했다. 학생수의 급격한 증대는 많은 졸업생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곧 고학력 실업자가 양산되는 요인이 되었다.


2) 드골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드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구원자였고 그후 프랑스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며 미제국주의의 허구를 지적하고 나토를 탈퇴하는 등 대미종속을 탈피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지만 60년대말 사회의 다양한 욕구와 변화를 충족시키는 정책을 펴내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의존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을 펴는 부작용을 낳았다.


3) 2차대전 후의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사회구조적 변동과 소비사회의 도래


무제한적인 소비와 이윤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거부반응을 꼽을 수 있다. 혁명 와중에 나타난 문구들을 보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인종차별 등을 고발하는 내용이 많으며 강대국 중심의 패권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역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개과정


당시 프랑스에서는 68년까지의 10년동안 인문과학 계열의 대학생은 3.5배, 사회과학 계열의 대학생은 4배 증가한 상태였으나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대학과 사회 모두 역부족이었다. 대학의 면적은 같은 기간 동안 겨우 2배 증가했을 뿐이며 불투명한 진로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또 전쟁과 공황을 겪지 않은 세대들은 부모 세대의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대학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불만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 공습에 항의하기 위해 American Express Bank를 습겨하다 체포된 급진파 학생 6명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3월 22일 다니엘 콩방디를 비롯한 8명의 학생이 낭태르 대학 학부장의 집무실을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점거 6일만에 경찰에 의해 캠퍼스는 봉쇄되고 강사들과 학생들은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 낭테르 대학 폐쇄에 반발한 학생들은 5월 3일 소르본에서 시위를 계속한다 10일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치하다 경찰과 유혈충돌이 일어난다 .그 이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학생들보다 2주정도 늦은 13일 총파업으로 노동자들이 시위에 적극 가담하고 공장을 점거하고 연속적으로 총파업에 돌입해 천만명의 노동자가 파업하는 등 사회가 마비되는 상황에 이른다. 27일 CGT등에서는 임금의 10%인상등을 담고 있는 '그르넬 협약'을 맺지만 그 후에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되다 29일 드골실종사건을 계기로 드골지지시위가 있다. 이후 6월 5일 시위는 막을 내리고 드골정권은 6월에 총선을 실시하여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이듬해 국민투표에서 진 드골은 대통령을 사임한다.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는 68년의 상황에서 반자본의 기치 아래 학생과 노동자가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과 청년 노동자는 프랑스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학연대를 실현해 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학생들과 청년 노동자들이 정치적 좌파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로 통합되기 이전의 학생들은 객관적 거리에서 현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따라서 이들은 관료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의 병폐를 간파하고 이와의 단절을 요구하고 있었다. 청년노동자들 역시 노조지도부를 불신하고 있었고 경제주의적인 타성에만 젖어있는 기성노동자들과 구분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노조 지도부는 정부와의 협상을 위해 5월 22일부터 학생과의 연대를 단절한다. 5월 27일 '그르넬 협약'체결을 공포한 후 연대는 와해된다. 하지만 '그르넬 협약'은 일선 노동자들로부터 거부당하고 파업은 계속된다.


특징


5월 혁명의 특징은 일상 생활에서의 문화적 저항과 정치적 저항이 융해되어 표출되었다는 데에 있다.

69의 노동자들과 학생들은 드골의 경제개발정책과 식민지 정책에 반대했다. 즉 소회된 노동의 거부와 제 3세계 수탈의 거부가 68을 이은 두 개의 이념이었다. 68혁명은 자본주의적 노동을 사회주의적 노동을 반 소외의 관점에서 동시에 문제삼았던 인류역사상 최초의 투쟁이었다. 자본주의 경제가 만들어낸 발전, 그 경제적 진보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소외되지 않은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표현되어 있다.

이런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혁명은 노동에서 출발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햐려 했던 전통적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는 달리 일상의 삶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통제의 권력에 지나지않는 국가권력 장악을 거부하고 삶의 복구와 확장, 즉 더 나은 삶을 추구했다.

즉 물질적 행복의 추구를 넘어서 자아의 실현이라는 질적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또 5월 혁명은 프랑스사회의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인간관계를 보다 평등한 인간관계로 바꾸어 놓는 계기로 작용했다. 일상수준에서의 관습과 인습의 엄청난 변화가 이를 말해준다. 68 이후 이성간의 동거와 피임기구의 판매가 자유롭게 되고 사제간의 경어 사용이 폐지된다.

"혁명을 생각할때면 섹스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라는 슬로건에서는 혁명가들이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하고 싶어하는가가 아니라 혁명가들이 무엇을 하고 그 일을 할 때 어떻게 느끼는 가를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의 해방과 사회적 해방이 병행되었다.

68년은 산업사회의 계급갈등에 기반한 노동운동과 후기산업사회의 탈계급적인 새로운 사회운동이 혼재하여 나타났다. 전통적 노동운동을 넘어 환경운동, 여성운동, 정보운동, 반핵운동 등의 다양한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지배계급은 공산당과의 협력을 통해 68을 선거로 봉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개혁조치들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업의 감축, 노동자의 경영참가에 따른 공장의 공동관리, 학생 참여에 따른 학교의 공동관리 등이 그것이다.

68혁명의 모두에게 발언권이 주어지고 모두가 토론을 했다. 60년대를 통해 절제와 억압에 기초를 둔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저항하여 육체적 쾌락과 성의 자유가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며 영화와 출판물에 있어서도 성과 폭력이 일반화되었으며 마약과 환각제가 공공연하게 되었다. 이는 전통적 문화와 공리주의적 가치관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혁명세대는 성의 자유와 함께 이를 공개적인 담론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기존세대의 가치관이 가지는 허구성과 위선을 폭로할 수 있었다. 이전에 금지되었던 것을 행하는 것 그 자체가 기존 가치관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68혁명으로 인해 섹스, 마약, 동성애 같은 모든 금지가 풀리게 되었다. 결국 68세대는 개인적 해방과 함께 사회적 해방을 완성했다. 68혁명은 프랑스 사회에 새로운 가치, 새로운 고민,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삶의 방식을 부여했다. 공장에서든 정치에서든 교육에서든 방송에서든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은 무너지고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대화에 근거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68혁명 이후 프랑스에서는 여성의 지위상승과 여성운동이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인다. 여성운동가들의 저서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이후 낙태와 피임을 합법화시키는데에 또 의료보험의 대상이 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5월에 맛본 자유의 장기적 파급효과를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그 폭발을 간단히 잊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시에 드러났던 사회적 모순들이 자진해서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은 순종시키기 위한 제약과 사회적 지서를 강력히 거부함으로써 자신들과 전세계 사람들에게 인류의 존엄을 확인시켰다.

68혁명은 상상할수조차 없었던 산업화된 국가에서의 혁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권위와 명성의 상징이었던 드골을 1969년 4월 27일 은퇴시켰다. 또한 권력구조를 능률화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참여의 외관을 부여하는 일군의 개혁이 도입되었으며 종국에는 1981년 사회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68혁명은 대학교육의 대중화, 성의 혁명을 통한 여권의 성장, 엘리트 문화의 대중화라는 성과를 얻었다.



68혁명의 정치적 의미


1)애국주의와 국제주의


5월 투쟁의 목표로 했던 비전은 어떠한 국가경계도 인정하지 않았다. "국경을 타도하라"는 구호는 대중적 감정을 표현했다. 전단과 포스터들을 통해 쁘띠적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조직적 켐페인이 수행되었다. 이 켐페인은 즉각적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던 세계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5월 사태에 참가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학생폭동이 강화됨에 따라 파리의 외국인 학생 기숙사는 가장 급진적인 구성원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기숙사들의 민주적 재조직이 요구되었고 고향과 프랑스내에서 모두 해방운동을 지원해 줄 것이 요청되었다.

2개국어로 된 포스터들은 아랍인과 유대인같이 겉으로 보기에 적대적인 집단들이 "당신들의 공동의 적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노동자들의 일자이레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인종주의자의 공격을 빈번히 받았던 프랑스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6월의 기간동안 동지로 받아들여졌다. 총파업은 분열된 노동자들을 변화시켰다 .경영자 측이 이민자들을 구사대로 동원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절대다수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참여했다.

저항자들의 국제주의와는 달리 정부는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파리에 오고자 시도했던 많은 젊은이들에 대해 프랑스 국경을 봉쇄했다. 국외추방은 프랑스에서 외국활동가들을 제거하는데 이용되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국경철폐를 위한 행동위원회가 파리에서 건설되어 유럽인들이 혁명을 대륙전체로 확산시킬 것을 촉구했다. 행동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반향이 있었다.


2) 권위주의와 자주관리


총파업의 참여자들 중에는 많은 수의 전문가들, 기술자들, 생산라인 밖의 사무실 요원과 서비스 요원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단결된 노동계급은 이전까지의 분절되고 부분적이었던 생산관을 통합할 수 있었다. 지식의 구획과 그에 상응하는 특권화된 전문가와 경영자에 대한 필요는 희망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공공연히 논박되었다.

1968년 프랑스 노동자들은 단순히 자본주의 파이의 더 많은 몫을 분배받기 위해 파업을 계속한 것은 아니었다. 그르넬협약에 대한 그들의 압도적 거부, 지주관리에 대한 많은 제안들, 소유권 폐지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들이 그것이다 총파업기간중 많은 공장들을 점거했으며 경영진 없이 노동자들의 자주관리로 제품을 생산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강자에 대한 복종으로 더 많은 재화를 얻고자 하는 대신 그들의 직무와 삶에 대한 스스로의 통제를 원하는 프랑스 노동자의 깊은 열망을 나타내준다. 자주관리는 프랑스의 집중화 권위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자율과 직접 참여에 기반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해 주었다. 자주관리는 소비사회의 수동성과는 대조적으로 능동적 참여를 요구했다. 자주관리는 지식의 구획과는 대조적으로 집단구성과 개인적 기술들의 공유를 요구했다. 그르넬 협약을 거부하고 파업을 계속한 기층노동자들은 좀더 많은 임금이나 좀 더 좋은 작업조건이 아니라 더 이상 복종적인 도구가 되지 않겠다는 동기에서 파업을 지속하였다. 즉 이들은 생산현장에서의 권력관계 재편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이 자주관리를 통해 자율적으로 공장을 운영해갔다. 이런 자주관리는 대학에서 기원한 것으로 대학의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은 이른바 '직접민주주의'와 '참여하는 데모크라시'를 내세워 대학관리위원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대학의 결정권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6월 혁명의 세계사적 의의


프랑스 혁명은 꼬뮌을 추구한 프롤레타리아의 패배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이 패배는 이후의 역사에서 보면 계급간의 싸움에 있어 서전에 불과하다. 5월의 노동자투쟁은 학생의 카드제시로 시작하여 드골의 또다른 카드제시로 끝났다. 그러나 5월혁명에서 승리한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전후 제국주의의 경제적 세계체제의 막바지에서 프랑스자본주의가 부딪친 문제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그것을 둘러 싼 대립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했다고 보기 힘들게 한다.

5월혁명은 선진자본주의국 내부의 진정한 투쟁이 공장점거반란으로 들고 일어선 노동자대중과 지배계급·국가권력사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대중 내부의 혁명파와 질서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예리하게 폭로했다. 즉 노동자에게 자기 자신들 속의 질서파, 조합적·회의적 개량파를 무력화하지 않고서는 지배계급·국가권력에게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 주었다.

또하나 혁명의 전위에게 요구되는 것은 부르조아적 노동자당과 싸울수 있어야 하며 조합주의적인 켐페인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


일반적 의미에서의 혁명 즉 사회변혁적이고 또 저이체제의 변화를 가져오는 혁명으로서 68혁명은 결코 성공한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 아니 처음부터 68혁명은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68은 분명 그 이전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를 단절시키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성문화와 가족제도 대중문화의 측면에서 변화의 모습들을 더욱 많이, 그리고 선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68혁명의 성격중 일부이다.

그러나 68을 재평가함에 있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은 '계급성'을 끊임없이 확인시켰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1848년의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부르주아 혁명 이래로 프랑스에 있어서 120년만에 노동자중심성, 반자본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명백히 계급적인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혹자들이 지나치게 68의 일상성에 침잠한 나머지 보고 있지 못하는 부분이 아니었는가 한다.

68세대들이 이제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68혁명을 주도했던 세대. 그러나 사실 정권을 잡은 68세대들은 이미 그 때의 주역들과는 많이 멀어져 제도권으로 편입해간 인물들이 아닌가.

우리가 볼 것은 지금의 그 사람들이 아니라 그때 그사람들이 외쳤던 말들을 현재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쳤던 부르주아 혁명은 68년에 재전위되면서 프랑스를 주목케 했다. 다시한번 대혁명의 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지금. 다시 우리는 '실업자 운동'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 본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바로 이곳에서 혁명의 꿈은 아직 접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까치, 1997.

요미우리 신문사,『20세기의 드라마 3』,새로운 사람들.

월러스틴, 『반체제운동』, 창작과 비평사

편집부 편, 『프랑스 5월 혁명』, 백산서당.

"1968: 거부된 과거, 감추어진 미래", 신진욱 외, 『학회평론』11호, 1995.

"68혁명 이후 한세대", 카피레프트 모임, 『읽을 거리』2호, 1998.

노동자연대 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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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여고생 충격 유머

전에 딴지일보ddanzi.com에서 본 유머인데 지금 찾을 수가 없다. 한 순진한 여고생이 충격먹는 내용인데 기억을 복원해보면 다음과 같다(나도 어릴 때 이런 경험이 있었던 것 같다. 고딩 때는 아니고...).

 

여학생 Q: 상담 선생님, 저는 ㅎㅎ여고 2학년 학생입니다. 얼마전에 친구 집에 가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포르노라는 것을 봤어요. 너무 충격이 커서 지금도 밥도 잘 못먹고 있어요. 짐승같은 그 모습이 사람이 너무 불결한 것 같아요. 그때 그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막 매스껍고 그래요.

우리 부모님 앞에서도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우리 엄마 아빠가 그런 짓을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엄마 아빠도 이상하게 보이고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어떻하죠, 선생님?

 

 

상담선생님 A: 학생, 걱정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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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엄마랑은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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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의 해산... 그리고

http://www.youtube.com/watch?v=-6G7MkBMVxE&search=beatles

http://www.youtube.com/watch?v=Xra3UKhbG1o&search=beatles

[MV] The Beatles - Get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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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 Back (Rooftop Concert) - The Bea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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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les - Get Back (Let It Be...Naked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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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초장부터 결성이 아니라 해산을 논하나? 하겠다. 원래 그런게 재밌는거다. 비틀즈의 경우도 해산이 쏠쏠하다. 중심축인 John과 Paul의 갈등이 비틀즈를 사상 유례없이 만개하게 하였다.

 

John과 Paul은 비틀즈의 정식 데뷔 4년전인 58년도에 처음 만났다. 당시 John의 카리스마 밴드에 Paul이 가입했쥐. 존이 참 고민을 많이 했단다. 내가 이 밴드에서 왕인데 이 얼굴 Elvis 비슷하게 잘생기고 노래도 잘하고 더구나 15살부터 작곡을 하던 이 노마를 밴드에 넣을 것인가... 받으면 팀이 강화될꺼 같구 반면에 나의 아성에 개길꺼 같구....

 

바로 그거다. 비틀즈는 John과 Paul의 경쟁 긴장관계 속에서 사상 유례없이 꽃펴왔다.

결국 John은 Paul을 받았으며 Paul을 쫓아 John도 열심히 작곡하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상 최고의 작곡 컴비인 Lennon-McCartney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둘의 최초의 갈등은 1965년 말. 롤링스톤지 평가 멘트대로 '아마도 가장 위대한 앨범일지도 모르는' Rubber Soul 앨범 시절 처음 표면화된다. 역사에 길이 남을 기타 리프곡인 John의 작곡 Day Tripper를 싱글 A면으로 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Paul의 작곡 We can work it out이 역시 A면 가오로 급부상하였다. 팽팽한 양측의 세싸움 결과 더블 A사이드 싱글로 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2곡이 모두 1위하였고 미국에서는 We can work it out이 1위, Day Tripper가 빌보드 5위를 차지했다. 2곡 모두 Rubber Soul 앨범 전체를 규정하는 걸작들이다. 좌우간 이렇게 신경전이 불거졌다.

 

1966년의 '롹 역사상 가장 실험/혁명적인 앨범' Revolver에서는 멜로디 메이커로서의 Paul의 재능과 더욱 깊히 자아를 성찰하는 John의 개성의 차가 더욱 두드러졌다.

 

공연을 완전히 중단한 후

1967년 '비틀즈의 농축된 재능이 만들어낸 불가사의'인 Sgt. Pepper~ 앨범을 만든다. 이 앨범의 피날레 곡인 A day in the Life는 비틀즈 최고의 걸작곡으로 평가되는 노래로 John과 Paul의 합동작인데 이는 작곡을 같이 한게 아니라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두곡을 기술적으로 합친 것에 불과했다. 이후 매니져인 Brian Epstein이 overdose로 죽는다. 이 때부터 워커홀릭인 Paul의 독주가 시작된다. 반면 게으른 John은 Yoko 주위를 겉돈다.

 

1968년 '비틀즈의 섬광이 극치에 달한 더블 앨범' white album에서 이제 이들의 결속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Rubber Soul/Revolver 2장을 합친 듯 30곡의 명곡을 쏟아냈지만 그 곡들은 각 멤버의 솔로곡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멤버는 단지 세션 연주가의 역할에 불과했다. (앨범 작업을 하는 동안 맨날 싸워댔는데 정작 팀을 떠나겠다고 한 것은 드러머 Ringo였다).

 

69년 공연을 다시 재개하기 위해 시작한 Get Back 프로젝트를 통해 멤버들간의 관계는 오히려 완전히 파탄났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Paul의 Get Back의 꿈은 결국 해산하도록 내버려둬라Let it be가 되었다. 결국 공연도 못하고 런던 애플 옥상에서 게릴라 콘서트 비슷하게 하는걸로 대체되었다. 69.1.30 옥상 공연은 팀의 마지막 결속의 활동이다. 그런만큼 최상의 컨디션 상태 연주를 보여주었다.

 

69년 중순 이제 아주 내놓은 제목의 Ballad of John n Yoko라는 싱글을 녹음하는데 오히려 John, Paul 둘이만 만나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고 녹음했다. 이곡이 노래로써는 둘간의 실질적인 마지막 협력이리라...(나중에 John은 자신의 솔로곡 Give Peace a Chance에서 그 고마움의 표시로 작곡 크레딧을 Lennon-McCartney로 달았다).

 

1969년말 '해산 직전이라고는 그룹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걸작' Abbey Road가 폴의 주도로 제작되었다. 비틀즈의 실질적 마지막 앨범이다. 서로 마지막이라고 스스로 느낀 만큼 멤버들이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앨범의 B면은 하나의 opereta를 창조했다. 반면 이에 대해 존은 서로 다른 곡을 하나로 묶은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좌우간 앨범으로는 실질적인 마지막 작품으로 마지막 곡 제목도 공교롭게 the end이다(그러나 실제 마지막 곡은 히든트랙 Her Majasty이다)

 

1970년 방치되던 Get Back 프로젝트의 잔여물이 앨범 Let it be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멤버들 중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고 방치되던 것이었다. Get back은 포기되고 걸맞게 Let it be로 명명되었다. 형식적인 마지막 앨범이다. 이 앨범의 수록곡중 비틀즈가 공식적으로 마지막으로 녹음한 George Harrison 작곡의 I ME MINE은 그나마 존이 참가하지도 않았다. 역시 앨범 수록곡 중 The long n winding road는 비틀즈의 마지막 싱글로 70년 20번째 빌보드 1위곡이다. 마치 비틀즈의 역정을 정리하는 듯 하다. 공식적인 마지막 노래이다. 그랬다.

 

 

ps.

비틀즈의 5대 명반에 대한 찬사는 침이 마를만큼 해도 모자라지 않다. 물론 전작 초기4장 앨범도 롹큰롤 폼을 규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5대명반은 마스터 피스들이다. 도저히 버릴 곡들이라고는 없는, 마치 히트곡 모음집을 연상케하는 Rubber Soul (65)/ Revolver (66) 그리고 그와 비슷한 두장짜리 더블 앨범 white album(68), 개인적으로 꺼리나 67년 Sgt.Pepper 앨범은 당시 녹음 테크놀로지를 총동원한 시의적절함이 있었으며 실질적 마지막 앨범 abbey road(69)는 opreta 도입을 통해 음악적으로도 진보적이었다.

 

최근 스톤즈를 좀 들어봤다. 롤링스톤즈의 명반으로 이하의 것들을 뽑는다.

 

    AFTERMATH  1966
    Between the Buttons 1967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1967  
    BEGGARS BANQUET  1968
    LET IT BLEED -   1969
    Sticky Fingers -   1971   
    Exile on Main St. - 1972

 

어떻게 비틀즈와 비교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과거 스톤즈 곡들중 엄청 뛰어난 레퍼토리들은 satisfaction, get off my cloud, paint it black, jumpin jack flash, sympathy for devil, honky tonk woman, gimme shelter, brown sugar 등 몇곡 안된다. 위의 앨범들 중에도 후진 곡들 많이 있다. 비틀즈처럼 전곡이 다 뛰어난 음반 만들기가 그렇게 힘든거다.

 

롤링 스톤즈의 최고 명반으로는 스톤즈판 2장짜리 white album으로 평가받는 Exile on Main St.을 친다. 음... 충분히 그 가치를 대접받을 만한 명반이다.

 

개인적으로 롤링 스톤즈 앨범 중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1967 좋아한다. 비틀즈의 Sgt.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사아키델릭 앨범 모방작 아류라고 엄청 욕먹었던 앨범이지만 앨범 그 자체로는 잘 만든 작품이다. 스톤즈로서는 새로운 참신한 시도이다.

 

롤링스톤즈의 최고 명반을 LET IT BLEED 69년작이라고 생각한다. Get Yer Ya-Ya`S Out! 1970년 실황앨범과 같이 들으면 좋다. monkey man같은 곡 스타일은 Cream 지향적 연주이다.

 


Rolling Stones / Let It Bleed
01   Let It Bleed 
02   Love In Vain 
03   Midnight Rambler 
04   Gimmie Shelter 
05   You Got The Silver 
06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 
07   Live With Me 
08   Monkey Man 
09   Country Honk 

Rolling Stones / Get Yer Ya-Ya`S Out! (Live)
01   Jumpin` Jack Flash 
02   Carol 
03   Stray Cat Blues 
04   Love In Vain 
05   Midnight Rambler 
06   Sympathy For The Devil 
07   Live With Me 
08   Little Queenie 
09   Honky Tonk Women 
10   Street Fighting Man 

 

이 앨범은 레온 러셀, 알 쿠퍼, 라이 쿠더, 지미 밀러 등 롤링 스톤즈 앨범 사상 가장 화려한 게스트들이 등장하는 수작이다.
또 하나의 롤링 스톤즈다운 명곡으로 기억될 'Gimme Shelter'에서는 소울적인 뉘앙스도 감지되고 있는데, 코러스 부분에서 이들은 살인과 능욕, 그리고 사랑 등을 매우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라이 쿠더가 만돌린을 연주하고 있는 'Love In Vain', 피들 연주가 시골적인 풍경을 잘 표현해주는 'Country Honk', 키쓰 리처드의 베이스와 레온 러셀의 피아노, 그리고 바비 키스(Bobby Keys)의 테너 색소폰 연주 등을 들을 수 있는 경쾌한 'Live With Me' -레온 러셀의 혼 어레인지도 좋다-, 이안 스튜어트의 피아노가 사이드 곳곳에서 빛을 발하며 키스의 슬라이드 기타 솔로 역시 구수하게 다가오는 타이틀곡 'Let It Bleed', 브라이언 존스가 퍼커션을 연주한 폭력적인 남녀차별주의적 송가 'Midnight Rambler' -리듬이 점차적으로 빨라지며 흥분도를 더하는 것이 인상적-, 키쓰 리처드가 보컬과 기타를 함께 맡고 있는 'You Got The Silver', 탬버린과 비브라폰 등을 삽입하고 있는 재즈적 업템포의 'Monkey Man', 그리고 CF에 삽입되어 익숙한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Version 2)'에서는 알 쿠퍼가 피아노부터 프렌치 혼, 오르간까지 도맡아 연주하고 있으며 런던 바흐 성가대까지 가세시키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한편 이 앨범이 공개될 즈음 이미 비틀즈는 와해와 해체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롤링 스톤즈는 세계 최고의 로큰롤 밴드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 앨범을 끝으로 브라이언 존스가 그룹을 떠난다. 그는 멤버들과의, 더 정확히는 믹 재거 및 키스와의 음악적 견해 차이가 두드러져 결국 팀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는 밴드를 탈퇴한지 불과 한 달만에 죽고 말아 주변을 가슴아프게 하기도 했다. 


첫 포문을 여는 전미 챠트 1위 곡 brown Suger는 이들의 라이브시 항상 마지막을 장식하는 명곡으로(이들의 공연을 보면 이 곡이 나올 때 가장 화려한 스테이지가 연출된다) Keith Richards의 발군의 리듬기타 베킹을 중심으로 어쿠스틱 기타, 섹스폰, 피아노가 혼연일체를 이루며 흥겨운 로큰롤을 만들어 낸다. 이어지는 sway는 brown sugar보다 템포가 한층 느려지긴 했지만 흑인 블루스의 향취가 그윽한 곡으로 특히 곡 후반부 Mick Taylor의 발군의 기타 솔로를 들을 수 있다. Pearl Jam 의 alive의 후반부 기타솔로와 비견될 만하다. Rolling Stones의 곡치고는 너무나 아름다운(사실은 Rolling Stones이기 때문에 가능한) 록발라드 wild horses는 필자가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이다. 노을이 비껴가는 저녁하늘을 바라보며 느끼는 이유 모를 서글픔이 밀려오는 듯한 여운을 주는 곡이랄까. 공격적이고 거칠 것만 같은, 록 역사상 최고의 보컬 연출자 Mick Jagger의 보컬 역량을 이 곡에서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이어지는 또 다른 명곡 can’t you here me knocking은 록큰롤풍으로 흐르다가 곡 중반부부터 B. keyes의 흐느적거리는 섹스폰이 재즈적 빚깔이 내는가 싶더니 이내 Mick Taylor의 진득한 블루스 기타톤이 끼어든다. 기타와 섹스폰이 섞여 마치 서로를 애무하는 듯한 모양새로 곡을 마친다. 이 곡 중반부를 들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성적 무드를 연상케 하는 곡이다. 이어지는 곡 you gotta move는 블루스 풍의 한층 느려지고 단순해진 사운드의 곡으로 뭔가에 도취된 듯한 보컬과 슬라이더 기타가 절묘한 어우러짐을 연출해 낸다. 분위기를 또 다시 바꿔 이어지는 btich는 터프하고 거칠 것 없는 전형적인 Rolling Stones표 음악이다. 보컬, 관악기, 슬라이더 기타, 그리고 타악기가 이렇게 촘촘히 잘 짜여지면서 익사이팅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Rolling Stones가 왜 록큰롤의 천재인가를 말해준다. Mick Jagger의 호소력 짙은 보컬이 돋보이는 l got the blues는 브라스의 반복적인 멜로디라인이 가히 일품으로 곡 중간 Billy Preston의 하몬드 오르간 연주는 곡을 더욱 맛깔스럽게 만들어 준다. 거장 Ry Cooder가 참여해 멋드러진 슬라이더 기타 연주를 선보인 sister morphine은 일설에 의하면 당시 Mick Jagger와 연인으로 마약에 찌들어 있던 Marianne Faithful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라 한다. 상큼한 컨트리풍의 곡 dead flower는 이 앨범 전체를 지배하던 흑인 블루스 필이 완전히 가신 곡으로 블루스에 거부감을 느끼는 국내 팬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을 듯 한 곡이다. 곡이 경쾌하고 부담이 없다. 마지막 곡 moonlight mile은 Stones팬들에게 she’s rainbow나 2000 light years from home과 함께 이들 최고의 사이키델릭록으로 받드는 곡이다. 특히 후반부의 웅장한 스케일의 현악연주는 아트록과 클레식의 느낌마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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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성폭력 피해 장애여성, ‘항거불능 상태’ 증명해야”라고 또 삽질

대충 마초 법관들 개념없는건 알지만...

 

왜 항거불능을 입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협의지만 폭행 협박 입증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나아가 항거불능 판단하는데 있어 사후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고려한다.

 

행위 당시만 판단하면 되는거 아닌가!

 

흥분하고 신음소리내고 하는거 왜 고려하지 않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관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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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 "장애여성,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다” 
  
 
 김삼권 기자 quanny@jinbo.net 
 
 법원이 미성년 정신지체 장애여성을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 대해 잇따라 무죄를 선고해 논란이 일고 있다.


법원, “성폭력 피해 장애여성, ‘항거불능 상태’ 증명해야”


부산고등법원 형사2부는 20일, 99년부터 03년까지 동거녀의 딸(99년 당시 14세)을 8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김 모 씨에 대해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에 있지 않았다”며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선고에서 역시 재판부는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에관한법률(성폭력특별법) 제8조를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성폭력특별법 제8조는 “신체장애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에 있음을 이용하여 여자를 간음하거나 사람에 대하여 추행한 자는 형법 제 297조(강간) 또는 제 298조(강제추행)에 정한형으로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성폭력특별법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였다는 것이 입증돼야 한다”며 ‘항거불능 상태’에 대해 “이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자기방어를 전혀 할 수 없는 심신 상실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판부는 “피해자가 정신지체 장애인이지만 초등학교 3-4학년의 지능이 있고, 학습능력만 떨어질 뿐 사회적 성숙도는 다른 학생과 비슷하기 때문에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피해자에 대한 정신감정결과를 언급하며 “윗사람의 성행위 요구에 대해 충분히 반항하거나 싫다는 의사를 표현할 능력이 떨어짐으로써 성폭행을 쉽게 당할 수 있다는 것이지 자기방어를 전혀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장애여성 특수성 고려되지 않은 무지의 소치”


법원의 이번 선고에 대해 여성단체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 부산여성장애인연대, 부산여성단체연합 등 여성·장애인 관련 단체들은 “이번 결정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신희원 한국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법원의 이번 판결에 대해 “무지의 소치이자 장애여성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라며 “법원이 성폭력특별법 제 8조, ‘항거불능 상태’를 고무줄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법원이 정신지체 장애여성의 경우에는 건강한 신체 상태를, 반대로 신체 장애여성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이유를 들며 ‘항거불능 상태’를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있다”며 “이 조항은 장애인의 특수성을 고려한 조항이 아닌 독소조항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신 소장은 또 “성폭력특별법에 정신지체 장애인이 ‘항거불능 상태’라는 것이 명시되거나, ‘항거불능 상태’에 대한 언급을 삭제해야 한다”며 성폭력특별법 개정 필요성을 지적했다.


신희원 소장은 법원이 이번 결정의 근거로 이용한 정신감정에 대해서도 “국가기관인 보건복지부의 판단에 근거해 이미 정신지체장애 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법원은 또 다른 진단을 요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한국여성장애인연합회를 비롯한 장애여성 단체들은 21일 이번 결정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힐 계획이다.  
 
  
 
  
 
 2005년04월20일 22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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