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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마르크스

 HOW TO READ 마르크스


저자 : 피터 오스본  옮긴이 : 고병권, 조원광

날짜 : 2008. 12. 21

출판사 : 웅진 지식하우스


요즘 태희와 함께 아트앤스터디 강의 중 맑스의 초기 저작 읽기를 듣고 있다. 강의에서 강사가 마르크스 입문서로 소개한 책이 “하우투리드마르크스”이다. 완산도서관에서 검색을 했는데 서신도서관에 책이 있음을 확인했다. 서신동이면 너무 멀다. 아무튼 읽고 싶은 책을 빌리지 못하고 또 도서관을 나섰다. 일주일 후 퇴근을 하고 집에 와보니 “와우투리드마르크스”가 책장에 있지 않은가? 태희가 인터넷으로 주문을 한 것이다. 태희는 아직 읽지도 않은 책을 손에 넣고 책장을 넘겼다.


책은 200페이지가 약간 안 되는 분량으로 10개의 쳅터로 구성이 되어있다. 상품, 실천, 역사, 소외, 철학의 가면들, 코뮤니즘, 자본주의의 파괴성, 산노동과 죽은노동, 본원적축적, 여전히 유효한 마르크스가 이 책을 구성하는 테그들이다. 이러한 주제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어떻게 다루었는지 원서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 저자인 오스본이 그에 대해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쓰여 진 책이다. 각 쳅터마다 주석이 다린 주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이 날카롭다. 정말 마르크스의 그 위대한 사유 앞에 주눅이 들정도이다.


내가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건 언제나 마르크스주의 뒤에 다른 것이 붙어 다니는 그런 것들이었다. 교조주의, 수정주의, 구조주의, 무정부주의 등등....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소개한 책을 읽는다는 건 언제나 어떤 거리를 두고 읽는다. 마르크스조차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던가? 고병권은 후기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그에 대한 생산적 독자였으며 마르크스의 사유를 계속 진행 중인 탐구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사유는 완성되지 못한 사유가 아니라 완성에 저항하는 사유다”라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자기 충족적으로 체계화되는 사유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해나갔다.”


동영상 강의와 책을 통해서 나는 다시 마르크스와 만났고 마르크스를 읽는다. 사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난 후 마르크스는 죽은 개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금융위기와 공황이 가시화되자 마르크스는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비롯되는가? 또한 이러한 시대에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대신 “무엇을 진리라고 하는가?”를 파헤쳐야 한다고 했다. 지금 마르크스를 읽는 다는 것은 어떤 새로운 진리의 확보가 아니라 진리로 여긴 것들에 대한 비판과 분석이 아닐까?


마르크스의 책 “자본”에서 처럼 “하우투리드마르크스” 1장은 상품이다. 상품 분석을 통해 마르크스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상품은 그것이 가지는 감각적 특성을 뛰어넘어 초감각적 특성이 되는가? 어떻게 인간의 다양한 욕구가 상품이 가지는 초감각적인 특성인 교환가치에 종속되어버리는가? 어떻게 노동력의 가치는 상품 속에서 은폐되는가? 모든 것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본이며 그것이 무엇을 야기할지 마르크스는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인류학적 가치가 하나의 체제에 포섭되어버리고 모든 질들이 양으로 환원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끔찍한 운동을 마르크스는 예견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마르크스는 파국만을 예견한 것이 아니라 파국을 끝내고 일자(一者)로부터 인간의 욕구를 해방시킬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것은 역사의 필연이 아니라 구성해 내야할 절박함이 아닐까?


책은 마르크스 입문서라기 보다는 마르크스 원서와 함께 읽어나가는 안내서 정도가 좋을 듯 싶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묻는 것은 "당신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마르크스는 “무슨 말을 했나”가 아니라 내가 마르크스를 어떻게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읽을 것인가이다. 이런 물음은 내가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어왔는가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즉, 내가 마르크스를 읽어오는 방법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에 대해 스스로가 생산적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지식이라는 것 혹은 이론이라는 것을 “자기 충족적 체계화”라는 것으로 읽어왔다. 그것은 진리와 변혁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르시즘”이다. 도대체 나는 마르크스를 왜 읽는가? 바로 이것이 다시 “하우투리드마르크스”가 내게 던진 화두다. 자기 충족적 체계화가 아니라 철학은 프롤레타리아의 머리교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의 심장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이론은 심장을 가져야 한다. 나의 심장은 뛰고 있는가?


이 책이 현 시기 다시 마르크스를 읽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째찍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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