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8/12/20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12/20
    문화바우처 관람 후기
    맑은공기
  2. 2008/12/20
    HOW TO READ 마르크스(1)
    맑은공기

문화바우처 관람 후기

문화바우처! 

아이들에게 감동과 자신감을 선물하다.


*이 글은 문화바우처 후기 공모에 출품한 글입니다. 마감날 함께 일하시는 선생님께서 강권하기도 하고 이런 공모전에 글을 써본적이 없어 재미삼아 한번 써봤습니다. 상은 아차상을 받았습니다. 상금 십만원~ 적은 돈이 아닙니다. 


“오늘은 뮤지컬-점프를 보러 갈 거야!”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뮤지컬이 뭐 예요?”, “점프가 뭐 예요?” 질문을 쏟아냅니다. 어떤 아이들은 지금까지 극장 한번 가보지 못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는 말이 있듯 문화도 해본 사람이 즐길 줄 압니다.


아이들은 정신을 쏙 빼놓는 재미난 공연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집중을 잘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지루할라 치면 공연장을 뛰어다니는가 하면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공연 시작 전 어두워지는 조명이 무서워 선생님을 애타게 부르기도 합니다. 생소한 문화예술 공연에 적응을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보면 참 관람 예의가 없다며 혀를 차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처음 경험하는 문화적 충격에 대한 아이들 나름대로의 저항인 것입니다.


문화 바우처를 이용하여 영화 “도라이 몽”을 보러가게 되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진영이는 초등학교 2학년입니다. 그날은 진영이 어머니도 저희와 함께 극장엘 갔습니다. 진영이는 물론 진영이 어머니도 극장이 처음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여기 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속닥속닥 거리며 영화를 봅니다. 몇 번을 “조용히 해라!”, “가만히 좀 있어라!” 주의를 줘봐야 잠깐입니다. 신이 나서 돌아다니는 아이들에게 “너희 영화가 재미없나 보구나! 다음엔 안 올까?”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안돼요! 선생님 또 와요!” 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들은 너무나 신이 나는 모양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사람들 사는 모습이 모두 그만 그만해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하루 종일 산으로 강으로 놀러 다니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반에서 겨우 한 둘이 영화를 보고 오거나 대도시에서 새로운 걸 경험하고 오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고 그 아이는 몇 날이고 그 이야기를 해주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같은 공동체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들에게는 문화적 소외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다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극장조차 가보지 못한 아이들은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라 이제는 특수한 상황입니다. 컴퓨터가 없어 정보와 게임에 소외되고 문화예술에 소외되어 알게 모르게 벽이 생깁니다. 유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난 뮤지컬이나 만화 영화 같은 경우 소문이 나면 금방 퍼집니다. 본 아이들과 보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가본 아이들과 가보지 못한 아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깁니다.


차상위 계층으로 자활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저는 사회적 일자리형인 방과 후 공부방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55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방과 후 공부방은 주로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등 빈곤 계층 아이들이 많습니다. 문화바우처를 이용한 문화공연예술 체험은 문화예술에 소외된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되고 감동이 되고 자신감이 됩니다. 저도 뮤지컬은 문화바우처를 이용하여 처음 경험해 보았습니다.


어린이 난타와 점프 등을 보면서 어른인 저도 공연에서 보여주는 창의적 상상력에 놀랄 정도니 아이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저를 포함한 선생님들과 공부방 아이들은 문화바우처를 통해 문화예술과 공연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아이들은 빈곤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문화예술 공연 체험을 통해 자기의 꿈과 희망을 키워가기도 합니다.


12월 문화바우처 영화 관람이라고 쓰여 있는 칠판에 아이들이 무슨 영화를 보냐며 묻지만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기다려지나 봅니다.


아이들이 극장에서 조금 떠들고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무서우면 눈을 가리고 재밌으면 신나게 웃고 신기하면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니 조금씩 낯설었던 문화예술 공연에 익숙해져 가는가 봅니다. 이제는 나름대로 보는 눈이 생겨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뮤지컬도 난타도 영화 관람과 연극 공연도 아이들에게는 생소하지만 몇 번 공연 예술을 경험한 것에 힘을 얻어 올해는 공부방 아이들과 작은 연극을 준비하여 공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학교 학예발표회에서 리허설을 하던 날 까불까불하던 1학년 여자아이가 같은 반 아이들 앞에서 연극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사를 잃어버렸습니다. 리허설 전에는 공연을 장난처럼 여기던 아이들이 리어설이 조금 잘못 되고나니 눈이 빛납니다. 서로 충고 하며 도와가며 집중도 잘합니다. 공연을 보고 배우는 것을 넘어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공연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간접적인 무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아이들을 지도하는 나에게도 문화바우처의 여러 문화예술 공연은 이렇듯 새로운 자극이 되고 힘이 되었습니다.


1학년 아이들은 본 공연 때 연극을 잘하여 지역 사회복지 단체가 주관하는 가족 송년회에서도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화공연을 받기만 하다가 직접 공연을 통해 주는 역할로 뿌듯해 하는 아이들을 보니 저절로 힘이 납니다.

이제 문화바우처는 우리의 친근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여건 상 문화공연예술을 쉽게 접근하지 못 하는데 문화바우처가 있어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문화바우처를 기획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다양하고 재미난 공연 기회를 부탁드립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HOW TO READ 마르크스

 HOW TO READ 마르크스


저자 : 피터 오스본  옮긴이 : 고병권, 조원광

날짜 : 2008. 12. 21

출판사 : 웅진 지식하우스


요즘 태희와 함께 아트앤스터디 강의 중 맑스의 초기 저작 읽기를 듣고 있다. 강의에서 강사가 마르크스 입문서로 소개한 책이 “하우투리드마르크스”이다. 완산도서관에서 검색을 했는데 서신도서관에 책이 있음을 확인했다. 서신동이면 너무 멀다. 아무튼 읽고 싶은 책을 빌리지 못하고 또 도서관을 나섰다. 일주일 후 퇴근을 하고 집에 와보니 “와우투리드마르크스”가 책장에 있지 않은가? 태희가 인터넷으로 주문을 한 것이다. 태희는 아직 읽지도 않은 책을 손에 넣고 책장을 넘겼다.


책은 200페이지가 약간 안 되는 분량으로 10개의 쳅터로 구성이 되어있다. 상품, 실천, 역사, 소외, 철학의 가면들, 코뮤니즘, 자본주의의 파괴성, 산노동과 죽은노동, 본원적축적, 여전히 유효한 마르크스가 이 책을 구성하는 테그들이다. 이러한 주제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에서 어떻게 다루었는지 원서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 저자인 오스본이 그에 대해 주석을 다는 방식으로 쓰여 진 책이다. 각 쳅터마다 주석이 다린 주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이 날카롭다. 정말 마르크스의 그 위대한 사유 앞에 주눅이 들정도이다.


내가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건 언제나 마르크스주의 뒤에 다른 것이 붙어 다니는 그런 것들이었다. 교조주의, 수정주의, 구조주의, 무정부주의 등등....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소개한 책을 읽는다는 건 언제나 어떤 거리를 두고 읽는다. 마르크스조차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던가? 고병권은 후기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그에 대한 생산적 독자였으며 마르크스의 사유를 계속 진행 중인 탐구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사유는 완성되지 못한 사유가 아니라 완성에 저항하는 사유다”라고 하였다. “마르크스는 자기 충족적으로 체계화되는 사유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해나갔다.”


동영상 강의와 책을 통해서 나는 다시 마르크스와 만났고 마르크스를 읽는다. 사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난 후 마르크스는 죽은 개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금융위기와 공황이 가시화되자 마르크스는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비롯되는가? 또한 이러한 시대에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니체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대신 “무엇을 진리라고 하는가?”를 파헤쳐야 한다고 했다. 지금 마르크스를 읽는 다는 것은 어떤 새로운 진리의 확보가 아니라 진리로 여긴 것들에 대한 비판과 분석이 아닐까?


마르크스의 책 “자본”에서 처럼 “하우투리드마르크스” 1장은 상품이다. 상품 분석을 통해 마르크스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상품은 그것이 가지는 감각적 특성을 뛰어넘어 초감각적 특성이 되는가? 어떻게 인간의 다양한 욕구가 상품이 가지는 초감각적인 특성인 교환가치에 종속되어버리는가? 어떻게 노동력의 가치는 상품 속에서 은폐되는가? 모든 것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본이며 그것이 무엇을 야기할지 마르크스는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인류학적 가치가 하나의 체제에 포섭되어버리고 모든 질들이 양으로 환원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끔찍한 운동을 마르크스는 예견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마르크스는 파국만을 예견한 것이 아니라 파국을 끝내고 일자(一者)로부터 인간의 욕구를 해방시킬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것은 역사의 필연이 아니라 구성해 내야할 절박함이 아닐까?


책은 마르크스 입문서라기 보다는 마르크스 원서와 함께 읽어나가는 안내서 정도가 좋을 듯 싶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묻는 것은 "당신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마르크스는 “무슨 말을 했나”가 아니라 내가 마르크스를 어떻게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읽을 것인가이다. 이런 물음은 내가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어왔는가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즉, 내가 마르크스를 읽어오는 방법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에 대해 스스로가 생산적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지식이라는 것 혹은 이론이라는 것을 “자기 충족적 체계화”라는 것으로 읽어왔다. 그것은 진리와 변혁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나르시즘”이다. 도대체 나는 마르크스를 왜 읽는가? 바로 이것이 다시 “하우투리드마르크스”가 내게 던진 화두다. 자기 충족적 체계화가 아니라 철학은 프롤레타리아의 머리교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의 심장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이론은 심장을 가져야 한다. 나의 심장은 뛰고 있는가?


이 책이 현 시기 다시 마르크스를 읽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째찍질이 되길 바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