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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노스케의 단편집

 류노스케의 단편집(라생문, 코, 두자춘, 밀차, 덤불속아쿠타가와 , 지옥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지음/ 진웅기 옮김

출판사 : 범우사

2009년 1월 27일 00시 35분


설 연휴를 맞아 두 권의 책을 읽기로 하였다. 한권은 강신준 교수의 자본의 이해와 한권은 원숭이는 왜 철학 교사가 될 수 없을까라는 제목의 청소년 용 철학 교양 서적이다. 연휴의 첫날인 금요일부터 욕심을 내어 강신준 교수의 자본의 이해를 읽었다. 자본의 이해는 일요일 까지 욕심으로 다 읽었다. 그러나 외부 손님들이 많이 들락거리는 설에 철학 책은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휴대가 불편하다. 오랜 만에 들른 집에서 범우 문고의 작은 문고판 책을 발견했다. 라생문은 익히 어느 강연에서 죽음에 대한 짧은 단편임을 알고 있었으며 도서관에서 단편으로 읽은 기억이 있었으나 그 나생문을 쓴 작가의 단편을 모은 문고 판이 색이 바래 집에 있다니 참으로 이놈의 눈이라는 것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 맞지 않은가? 이 문고판 작은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왔다. 누나가 아주 오래전에 사놓은 책이다.

어찌 되었든 라생문은 건너뛰고 수 페이지 분량의 짧은 단편들은 하나씩 읽어 갔다.

설날 큰집엘 가면 장가도 안 간 노총각에 대한 눈총이 예삿일이 아니다. 그럴라 치면 어느 곳에서 어떤 포즈로 있어야 할 지 안절부절 해진다. 큰집 작은방 한 구석에 둥지를 틀고 손바닥 만 한 문고판을 펼쳐들고 라생문을 건너뛰고 코라는 단편 소설부터 읽기 시작했다.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 큰 코를 가진 스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을 드러낸다.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조카들에게 둘러싸여 피식 피식 웃으며 책을 넘긴다.

두자춘, 밀차, 덤불속을 읽으면서 이외수가 생각났다. 그래도 이외수는 상상력이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지만 류노스케의 소설은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딪고 있다. 간결한 문체와 속도 있는 이야기 전개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세 번이나 부자로 살았지만 인간에 대한 실망으로 귀농한 두자춘 그리고 이를 일깨운 모성의 이야기, 밀차를 타고 싶은 소년의 호기심과 낯선 곳을 향하는 두려움을 생생하게 그린 밀차, 덤불속 죽음을 둘러싸고 보여주는 각자의 다채로운 진술이 황당한 덤불속, 그리고 마지막, 지옥 병풍을 그리는 화가 요시히데의 이야기인 지옥변, 모두 대단한 작품들이다.


36세의 나이로 신경쇠약에 빠져 자살을 한 작가 류노스케~

지옥병풍을 그리라는 영주의 명을 받은 요시히데는 지옥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괴상망측한 일을 다한다. 자기가 직접 보고서야 그릴 수 있다며 지옥을 현실에 연출한다. 온갖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마 요시히데의 악몽이 류노스케에게도 보이지 않았을까?


마지막 지옥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수레 위에서 불에 타 죽은 여인의 모습을 그려야 하지만 그리지 못하고 영주에게 부탁을 한다. 그리고 영주는 그 화가의 딸을 수레에 실어 불을 지른 다음 화가의 눈앞에서 화가에게 지옥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화가는 그림을 완성하고 이틀 후 자기의 집에서 생을 마감한다. 지옥 그대로의 모습이다.


얼마 전 있었던 용산 철거민들의 죽음이 떠오른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류노스케는 현실의 생지옥을 본 것일까? 궁금해졌다. 자살이라는 그의 이력이 요시히데의 자살과 일치하는 듯 하다. 작은 한권의 책이 26일 설날 하루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새 배를 하면서도 음식을 먹으면서도 나는 류노스케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였다.

오랜만에 본 소설~ 이런 단편은 정말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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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경향신문 기획기사 김상봉 교수의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공화국을 꿈꾸며](2)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上)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 ㆍ경제가치 아닌 ‘국가적 이상’ 공유해야 참 공화국

    박명림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지난번에 주신 글은 다른 무엇보다 정치와 인간의 삶에 대한 선생님의 기본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제겐 참 좋았습니다. 말씀하신 내용들 모두 저 역시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어서 편지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가졌던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지고 저도 선생님께 소신껏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사사화, 역근대화, 근본화, 파당화를 한마디로 표현해서 민주주의의 자기파괴로 이해했습니다. 그 네 가지 질병이 문제인 까닭은 우리가 그동안 그토록 어렵게 성취한 시민적 자유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생각하는 동안에 ‘미네르바’가 체포되고 구속되었는데, 저는 이 사건이야말로 현 정부가 자유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테러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맘대로 못하는 나라에 무슨 자유가 있으며 의견이 다른 사람을 구속하는 나라에 무슨 민주주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민주주의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선생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한국 사회에 공공성의 원리가 존재하지 않고, 이 나라가 엄밀한 의미에서 공화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 정치가 키케로가 원로원 의원들을 상대로 내란 음모에 대한 신속한 대책을 설득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세사레 마카리의 그림. 경향신문 자료사진


자유민주 부정한 ‘미네르바 구속’
하지만 공화국이란 무엇입니까? 원래 이 낱말은 로마인들이 나라를 가리켜 부른 이름입니다. 라틴어로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는 ‘공공적인 것’(public thing)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푸블리카라는 형용사는 포풀루스(populus), 즉 인민(people)이라는 명사에서 만들어진 낱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레스 푸블리카를 레스 포풀리(res populi)라고 풀이했는데, 이 말은 ‘인민의 것’(people’s thing)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민이란 계급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고 나라 구성원 전체로서 겨레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나라가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모두의 것’일 때 그것은 참된 공화국인 것입니다.

키케로는 공화국을 처음 고전적으로 정의한 사람인데 그에 따르면 인민이란 “합의된 법과 공공 이익에 의해 결속된 다중의 공동체”인 바, 나라가 그런 인민 모두의 것이요, 모두를 위한 것일 때 그것은 공화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법치와 공공성이야말로 공화국의 기준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국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민주국가가 자동적으로 공화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많은 나라에서 공화국은 군주국의 반대말로 이해되고, 민주국가와 거의 같은 말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민주국가냐 군주국가냐 하는 것은 국가의 통치형태에 관한 문제로서, 국가의 실질적 온전함을 판단하기 위해 그것이 공화국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키케로의 ‘공화국’ 필사본. 경향신문 자료사진


고전적 이론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법치와 공공성의 원리가 지켜진다면 군주국가도, 과두제 국가도 민주국가도 모두 공화국입니다. 반대로 그 원리가 실종되면 아무리 형식적으로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국가라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닙니다. 그래서 공화국과 민주국가의 관계에 대해 때때로 철학자들은 역설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는데, 독일의 철학자였던 칸트는 공화국과 가장 거리가 먼 정치체제가 민주국가요, 거꾸로 군주국가야말로 진정한 공화국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좋은 정치체제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른바 자유선거에 의한 민주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자기 나라를 (인민) 공화국이라 부르는 것을 단지 위선적인 말장난이라 치부할 수 없으며, 거꾸로 우리가 형식적으로 민주화를 이루었다 해서 마치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안이한 생각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법과 공공성’ 살아있어야 공화국
그런데 한국의 민주주의의 위기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국가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전혀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민주정이냐 과두정이냐 아니면 군주정이냐 하는 것은 나라의 통치형태를 구분하는 이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선출하면 그것이 민주적 통치형식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양 민주주의의 요람이라 할 고대 그리스인들의 구분기준으로 보자면 선거를 통해 국가권력을 위임하는 국가형태는 민중이 권력에 참여하는 민주정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과두정 곧 소수에 의한 지배체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필연적으로 극소수의 재력가들만이 생업을 밀쳐두고 선거에 뛰어들 수 있으므로, 절대 다수 민중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선거 통한 권력위임은 과두정
하지만 선거가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 민주주의적인 제도이겠습니까?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정치형태를 추구했던 아테네인들에 따르면 그것은 추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권력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원도 판사도 행정관도 모두 추첨으로 뽑았습니다. 예외적으로 그들이 선거를 통해 뽑았던 공직이 꼭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장군입니다. 그런데 아테네인은 자기들이 선출한 장군들의 명령에 복종했으나, 그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민회에서 가차 없이 탄핵함으로써 장군들의 권력이 민중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테네인들이 가르쳐준 민주주의입니다.

지금 우리처럼 선거로 국가권력을 위임하는 체제는 민주적 지배가 아니라, 소수지배(oligarchy) 곧 소수의 잘난 사람들을 뽑아 나랏일을 맡기는 정치체제인데, 이 체제의 가장 큰 위험은 부자들만이 선거에 나갈 수 있고,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가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국가로 전락하게 되며, 인간의 참된 자유와 자기실현 그리고 온전한 만남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또 다른 무엇보다 자본의 지배는 결코 나라의 공공성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원래 공화국의 반대말은 레스 프리바타(res privata)입니다. 말 그대로 ‘사사로운 것’(private thing)이라는 뜻이지요. 여기서 사적인 것이 무엇이냐면 집안일입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말하는 집안일은 바로 돈 버는 일, 곧 경제였습니다. 영어에서 경제를 뜻하는 이코노미(economy)란 말은 원래 그리스말로 가정관리를 뜻하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를 그냥 영어로 쓴 말인데, 그리스인들에게서도 역시 집안일은 돈 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오이코노미아라고 하든 레스 프리바타라고 하든 돈 버는 일을 사사로운 집안일로 보고, 나랏일과 엄격하게 구별했는데, 이는 돈이 절대로 공공적인 가치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보세’를 공공가치로 오해
앞서 말했듯이 키케로의 고전적 정식에 따르면 공화국은 법치와 공공성에 존립합니다. ‘미네르바’를 죄인으로 잡아 가두는 나라에서 법치를 말하는 것은 가당찮은 사치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도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공화국이 추구해야 할 공공적 가치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하려 합니다. 그런데 키케로가 공화국의 조건으로서 공공적인 가치를 말한 까닭은 우리의 삶에는 개인이나 가정으로는 실현할 수 없고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어떤 공공적이고 일반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겨레에 열려 있는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은 무엇이 국가가 추구해야 할 공공적 가치일 수 없는가 하는 부정적 기준은 명확히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돈을 벌고 부자가 되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국가가 추구할 공공적 가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 이래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는 “잘 살아보세”가 국가가 추구해야 할 공공적 가치인 것처럼 오해되어 왔습니다. 오죽하면 진보정당에서조차 ‘민생정치’가 구호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는 잘 살아 보자는 말을 약간 우아하게 표현한 것이겠지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누군가는 ‘모두가 잘 사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공공적인 가치가 아니겠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산다’는 술어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모두가’라는 보편적 주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니 도리어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그 자체로서는 철저히 사사로운 욕망으로서, 그냥 내버려두면 나의 경제적 이익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경제적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해 필요한 돈이 사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플라톤의 철학을 독점할 수 없으며, 베토벤의 음악을 자기 지갑에 넣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에게 개방된 존재로서 그 자체로서 공공적인 것이요, 모두에게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은 사적 소유의 대상이어서 나의 지갑에 든 돈은 그 자체로서는 나를 위해 좋은 것이지 남을 위해 좋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겨레가 오로지 돈을 벌고 부자되는 것 외에 다른 가치를 알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나라는 야수적인 무한경쟁 속에서 해체되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상태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은 공공성과 양립할 수 없어
누구도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것도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한 겨레가 참된 공화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히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의 공공적인 가치와 보편적인 이상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파편화시키고 분열시키는 사사로운 욕망, 곧 경제적 욕망을 규제하고 승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말하고, 독일인들은 하나됨과 정의와 자유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습니다. 함석헌이 그리도 자주 말했듯이 국민적 이상이야말로 나라의 참된 기초이니, 우리 또한 이제 형식적 민주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연 우리가 더불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 벌고 부자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으니 도대체 어떤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나라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안타까운 물음을 선생님께 떠밀면서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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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人間


사람‘인’과 사이‘간’이 모여 인간이 되었다.

인간 즉, 사람 사이

사람은 사이의 존재다.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이 그 자체다.


사이는 매개고 긴장이고 경계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의 매개고 긴장이고 경계이듯

인간의 삶은 어떤 것의 매개고 긴장이고 경계다.


그러므로 극단은 인간의 어떤 특수한 형태이다.

중심을 위해 극단은 꼭 필요한가?

이것은 나에게 아직 버거운 질문이다.


나는 어떤 것들의 사이에 있는가?

그것이 내가 물어야 질문이다.


국가주의와 무정부주의,

본질과 비본질,

목적론과 비목적론,

객관주의와 상대주의 등등...

 

*철학은 변화속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의 경계선 긋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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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세계사1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 1


저자: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이영주 옮김

출판사:랜덤하우스중앙

날짜:2009.1.6(화)


요즘 태희랑 세계사 연표를 방 벽 한 켠에 그리고 있다.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를 읽고서 연표를 그린다. 46억 년 전 탄생한 지구. 세계사를 읽으면서 정말 화가 났다. 전쟁의 역사, 야만의 역사이다. 인간은 인류가 저지른 만행들을 곧이곧대로 직면하기 싫어서 민족이라는 가면과 종교라는 아편이 필요한 것이 분명하다.

 

민족은 인류의 야만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하고 신앙은 인간이 처참한 인류사를 보고 부끄러워 자멸하지 않도록 맹목에서 벗어나 윤리라는 근본적인 철학적 물음에 답해야 하지 않을까?


셈계의 헤브라이인은 기원전 20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에 정착했다. 헤브라이은 ‘강의 저쪽에서 온자’라는 뜻이고 팔레스타인은 ‘필리스티아인의 토지’라는 의미이다. 당시라도 서로 잘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바빌론 유수를 통하여 헤브라이인은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그 고난 속에 유대교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2009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학살을 계속하고 있다. 어떻게 인간을 합리적 이성의 동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도 야만의 세계사 속에 존재할 곳이 없다.


46억년 지구의 나이 중 빙하기 이후 농업혁명이 일어나 1만년 전 부터가 인간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 속에서 유심히 살펴본 것은 화폐의 역사이다. 화폐 전쟁이라는 책이 있다. 거액의 화폐를 쥐고 세계 역사를 움직이는 진짜 배후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룻밤에 읽는 세계사에도 그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1837~1901년 빅토리아 시대

공업력으로 세계를 압도적으로 선도한 영국은 대불활을 기회로 ‘금융대국’으로 전환하였다.

영국은 종래의 무역 수선의 발상에서 전환하여 대외투자로 이익을 확보하는 ‘금융 대국’의 길을 추구하였다....특히 수상인 디즈레이리는 의회의 승인을 얻지 않고 유대인 금융가인 로스차일드 상회로부터 400만 파운드를 빌려 1875년 재정난에 빠진 이집트이 태수가 프랑스에 매각하려고 하던 수에즈 운하 주식(총 40만 주 가운데 17만7,000주)을 매수하였다. 222p~223p


영국은 프랑스와의 7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를 모두 빼앗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7년 전쟁으로 영국 본국의 채무가 배로 늘어 북미 식민지를 경영하는 비용을 식민지에 대한 본국 수준의 과세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241p


영국은 전쟁 비용 염출에 유대인 금융자본의 협력이 필요하자 1917년 외무장관 벨푸어는 아랍인 거주지인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했다. 320p

위의 예제는 영국의 경우이다. 이 밖에도 무수한 전쟁 비용에 의해 각 국의 국가 채무는 심각한 상황이다. 금융세계화는 어쩌면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카드 돌려막기의 세계적 모습일 것이다. 사람들은 막기가 힘들면 카드를 하나 더 만들면 되지 뭐 하겠지만 도대체 카드는 누가 만들고 어떻게 만들어지는 관심이 없다.


경제 불황이라는 시대에 부채 문제는 국제적 연대를 통하여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한국의 국가부채도 2009년 310조 가량 될 것이라고 한다. 부채 탕감 혹은 부당한 국가 부채에 대한 지불 불이행 운동은 금융 제국에 저항하는 중요한 국제 연대의 고리가 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컴퓨터 옆에 붙어있는 세계사 연표를 흘긋 흘긋 쳐다보며......

세월 앞에 조급해 하지 않으며 그저 내 갈 길을 뚜벅 뚜벅 가리라 가슴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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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行福”(행복)합시다.

2009년 “行福”(행복)합시다.


行福(행복)없는 幸福(행복)없습니다.

모두 行福(행복)합시다~


흔히 행복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뽑습니다. 돈, 명예, 권력 등 모든 수단도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지 행복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幸福(행복)은 복된 좋은 운수 혹은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를 뜻합니다. 이런 행복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요?


문득 행복의 幸(행)자가 행할 行(행)자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어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行福(행복)이라는 것이 있더군요. 삼복의 하나로 스스로 불도를 닦으면서 다른 사람을 이끌어 불도를 믿게 하여 얻은 복이랍니다. 복을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행하면서 만든다는 것이지요!


거꾸로 이야기 하자면 불행은 복을 행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복을 행하지 않음으로 불행하다는 것이지요! 어떤 조건에서든 복을 짓고 행하는 것이 바로 행복의 원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복을 핑계로 어거지로 폭력으로 무언가를 강요하게 되는 것은 일을 행할 때 언제나 살펴야할 가장 경계해야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다 같이 복을 짓고 나누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하며 모두의 行福을 기원해 봅니다.


모두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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