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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와 시지프스 그리고 오랑시민들에게...

 알베르트 카뮈

 

 

 

카뮈의 부조리 이론을 처음 읽었던 때는 고등학교 시절..

조악한 문고판 번역서에 알기 어렵게 풀어놓은 단어들에 숨막혔던 기억이 난다.

'이방인'과 '페스트' 그리고 '시지프스의 신화'

그러나 때론 삶의 경험이 축적되면 언어의 어려움을 넘어서서 깨달음이 이루어진다.

 

"진실은 모든이에게  지겨운 것이었으며,

 그리고 누구나 할것없이 자신만의 습성을 기르는데 전념할 뿐이었다"

 

난 그의 수많은 철학적 에세이와 소설 중 잘알려진

그 몇권만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러나 까뮈가 말한대로 

나 자신의 습성으로 이해해보자.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우리는 쳇바퀴처럼 맴도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창조적인 일을 한다고 말해도 그의 노동은 결국 언제인가의 반복이다.

때문에 진실은 그렇게 감추어져 지겨운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것은 부조리하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가르트는 끊임없는 회의, 진리를 위한 방법적인 의심의 결과가

나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 말고는 모든게 다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부조리 = 생의 의의를 발견할(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까뮈는 어느 순간 찾아온 부조리에 대해서 익숙했던 모든 것이 전복되지만

결국 이를 직시할 것을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희망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어머니의 죽음앞에 눈물흘릴 수 없고,

우연히 휘말린 친구의 싸움상대인 아랍인을 과잉적으로 살인한 뫼르소

 

쥐의 시체가 쌓여가는 동안에도 일상의 쳇바퀴를 돌다가

어느 순간 '왜?'란 질문에 답을 찾은후 공포와 고통에 대면하였던 오랑시의 구성원들

 

신을 속였다는 이유(누구는 교활하다 하고, 누구는 총명하다 하는)로

굴러떨어질 돌을 다시 밀고 올라가는 운명적 굴레에 놓인 반역자 시지프스

 

절망적인 상황에서 선택은 무엇일까?

단 한번도 자살을 꿈꾸지 않은 자 누구인가?

그럼에도 살아남은 이들은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 서있나?

 

 

어제 뉴스 끝자락에 그동안 몇번을 보았을 단신기사가 있다.

애인과 실연한 20대 청년의 음독자살 기사..

그도 부조리한 삶의 끝자락을 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꿰뚫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비정규직노동자의 울분섞인 목소리를 듣는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않은 임금과 비인간적인 처우 모욕

월차를 쓰겠다는 말을 내뱉았던 죄로 아킬레스건을 끊는 테러를 당한 하청노동자

거리로 내몰린 그들에게 '꼬우면 능력을 키워서 정규직으로 입사해라' 말은 정당한가

경제를 살리기위해서는 노동의 유연성이 필요하고 그 핵심은 비정규직이라는 허위

 

누구는 부조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또 누구는 부조리를 넘어서기 위해 권력이 필요하고, 자신이 쓸어버리겠다고 한다.

또 다른 누구는 어짜피 허무한 세상에서 순간을 즐기며 살자고 말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깨달았고

그 표현은 다를지라도 쳇바퀴를 돌고 있는 굴레에 대해 역겨움을 느꼈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부침은 있으나 그 길에 서있다.

그러나 찾았던 답들은 다 무엇인가.

내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애정을 가지고 합리화 할 것인가.

그리고 그 한계 너머 희망은 과연 나의 상상력과 일치하는가

그 갈림길에서 나는 무엇과 대면할 것인가.

 

 

쉴 새 없다 비명을 지르던  찰라

불쑥 느끼는 권태 몸서리칠 때

나는 시지프스가 손에 쥔 돌멩이

그 부스러기만큼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길은 내 앞에 놓여있고

나는 이 길의 역사를 알고

여기서 내 할일을 되뇌인다.

 

- 2006.02.11.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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