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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정보문화진흥원의 정보화로 가는 길, 아름다운 e세상, 그리고 따뜻한 디지털 세상으로 불리는 월간지에 2년간 기고했던 글들

[아름다운 e세상] 약장수 이동서점 절찬리에 네트 순회 중

약장수 이동서점 절찬리에 네트 순회 중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벌써 올 한해를 접는 때다. 모두들 다가올 내일에 마음이 바쁘지만 아련한 과거의 '추억'에 절로 취하는 계절이다. 내 어린시절 시골 동네에 불현듯 찾아들었던 가장 반가운 손님은 서커 스단과 약장수였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니"던 귀한 그들이라 여장을 푼 천막 근처를 호기심반 두려움반 배회하던 코흘리개 아이들 틈에 영락없이 나도 가세했었다. 이들이 여장을 풀기도 전에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 할 것 없이 일상과 다른 이방인들의 신기한 축제에 대한 기 대감으로 작은 흥분에 휩싸이곤 했다. 서커스단과 약장수는 "OOO 공연을 절찬리에 마치고 지금 막 전국 순회에 돌입"해 피곤도 할 터인데 지칠줄 모르고 '타이탄' 트럭이나 '봉고' 승합차에 단원들 모두를 싣고 벽지와 오지 구석 구석을 누볐다. 이제나 그제나 이들의 공연 중 내 흥미를 끄는 대목은 '차력'이었다. 차력은 서 커스나 약장수의 공통 분모이기도 했다. 목으로 쇠막대 구부리기, 묶인 쇠사슬 끊기, 불 삼키기 와 뿜기, 칼 삼키기, '이빨'로 끌기, 바늘방석 위에 눕기, 유리나 불 위 걷기, 칼 꽂힌 불타는 링 통과하기, 망치로 배 내려치기 등등 살벌하기 그지없는 차력 시연이 내겐 두려움보다는 힘센 이방인들의 종교 의식처럼 보였었다. 물론 식품의약청의 안전기준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의 회 충약, 정력제, 강장제 등 정체불명의 물약들이 연금술사의 신비스런 조제술의 기적처럼 보였음 은 말할 나위없다. 얼마전 낯선 미국땅에서 이 잠자던 추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나의 설레임은 대규모 서커스단 의 행차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용달차만한 조그만 박스트럭 뒷칸에 구하기도 힘든 요상한 책 들을 한가득 싣고 미국의 여러 동네들을 전전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물론 책을 팔기 위해 이 들은 길거리나 동네의 작은 바에서 눈요기 차력쇼를 펼친다.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자율유목 의 차행상'(autonomadic bookmobile)이란 요상한 이름을 가진 이들은, '빈들러스티프' (Bindlestiff) 가족 서커스단과 아우토노미디아 (Autonomedia)란 뉴욕의 작은 독립 출판업자의 합작품이다. 사업 내용으로 따지면, 차력과 함께 약 대신 책을 파는 '약장수 이동서점'이라 부르 는 편이 낫겠다. 거대 서점 체인이 지역마다 복제돼 영세한 소규모 서점을 문닫게 하고, 텔레비전 화면과 헐 리웃 스크린이 서커스를 감상의 추억거리로 내몬 비극적 현실에 이들은 서로 뜻이 맞아 대안의 길을 찾은 셈이다. 95년에 시작한 이들의 이동서점 계획은 서커스장에 펼쳐놓은 길거리 가판 도서로 시작하여, 2인 전담 전국 순회팀이 모는 바퀴달린 이동서점으로 독립하는 눈물겨운 역 정을 거쳤다. 이들의 생명력은 서커스를 통해 '살아있는 것'의 접촉과 감정적 체험을 돕고, 판매 망이 없는 소수 출판사들의 목소리를 모아 직접 전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갸륵한 발상에서 나온 다. 내가 만나본 이동서점의 주인공 2인, 딩글(Okra P. Dingle)씨와 닥터 플러목스(Dr. Henceforth Flummox)양은 겉보기엔 지극히 평범하다. 그러나, 이들이 등장하면 지역 경찰이 긴 장한다. 파는 책들이 선정성과 과격성이란 죄목으로 가끔은 몰수되기도 하고, 둘이 보여주는 차 력쇼가 위험천만해 보이기도 해서다. 두 사람의 가장 힘든 일은 쇼보다 책을 보러 오는 이들과 나누는 대화라고 한다. 배경이 다른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서는 어지 간한 내공으로 감당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이들의 약장수 이동서점은 이제 전국적으로 돌면서 여러 동네의 지역 서점들, 정보 집산지, 모임, 시위 등을 연결하고 정보를 공유하게끔 돕는 촉매자가 됐다. 그들이 싣고 다니는 영세 출 판업자들의 책과 잡지뿐만 아니라 길에서 만난 지역 활동가, 대학가의 운동가, 매매춘 여성, 음 모론 이론가 등이 쓴 아마츄어식 글들도 이들의 차 뒷칸 도서목록에 추가된다. 동네 공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차력쇼는 전자 미디어에 치여 희미해진 인간의 직접적 체험의 감각을 되살리 는 방법이다. 물론 팔리는 책들은 주변과 변두리의 소외된 소수의 목소리들을 찾아 발굴하고 전달하고 공유하는 주요 통로다. 순회 이동서점을 통해 약장수와 책행상의 각각 뜻한 바 목적 이 서로 조화롭게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약장수 이동서점이 내 마음을 끈 것은 이들이 꼭 인터넷의 민주주의적 속성과 닮아있 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게 유목하는'(auto/-nomadic) '발달린 책'(book/-mobile)은 대중매체의 고 압적이고 일방적인 주입의 공중파가 아닌 인터넷에 떠다니는 소수 전자파들에 다름아니다. 똑 같은 거대한 공간에 잘 꾸며진 거대 서점에서 배제된 소수의 책들을 모아서 이에 갈증을 느끼 는 독자들에게 직접 찾아다니며 전달하는 행위는 인터넷 기술이 지향하는 수평적이고 소수 지 향의 대화 소통 방식과 유사하다. 인터넷에선 어느 누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 그리고 서로 비슷한 목소리를 모아 방송국을 만들고 잡지를 꾸미고 모임을 갖는 일이 가능하다. 찬바람 쌩쌩도는 전자 공간에 훈훈한 인간 애를 느끼도록 돕는데 소수의 목소리들이 핵심으로 나선다. 4평 남짓한 이동식 공간에 각종 작 은 목소리를 담고 중간에 모자라는 것은 다시 싣고 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내려주고 하면서 정처없이 부유하는 책들의 이동보따리가 네트를 유목하는 정보와 닮아가는 것이다. 인터넷의 민주적 풍경과 유사하게 약장수 이동서점은 현실 속에서 다양성과 소수적 목소리를 전하는 미 시적 정보로로 기능한다. 우리의 차디찬 현실 속에 약장수 이동서점이 그저 추억거리에 불과하 다면 네트에서만이라도 그와 유사한 목소리가 넘쳐나기를 기대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평생을 씻지않고 살 것 같은 60년대 폭주족 분위기의 범상치않은 외모와 달리 딩글씨와 잠 시나마 나누었던 대화와 악수의 느낌이 유난히 따뜻했던 기억을 정말 잊을 수 없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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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열린 정보정책을 위하여

열린 정보정책을 위하여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한때 우리 사회 현실을 논하면서 사회과학계에 '종속이론'이란 말이 풍미한 적이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의 거대 자본이 자금 원조, 기술 전수, 자본 시장 개입 등 경제적 유인을 통해 제 3세 계 국가들을 종속형 저발전 경제의 나락에 영원히 가둔다는 중심-주변부의 이중 논리였다. 반 대로 선진국들은 제 3세계가 자신의 떡고물을 먹다보면 개혁이 일고 그것이 확산되면 발전이 온다는 '개혁-확산론'이나 '발전이론'에 대한 신화를 퍼뜨렸다. 하지만, 이 둘 다 우리 사회 현실 을 보는 눈에서 일면만을 과장해 우리에겐 잘 맞지 않은 이론으로 넘어간 적이 있다. 산업 경제에서 바야흐로 정보 입국에 접어들었다고 아우성치는 오늘 전설 속에 내려오는 '종 속'의 화두를 다시 따져봐야할 사정이 생겼다. 딱딱한(hard) 기술에서 연성의 말랑말랑한(soft) 기술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선진국에 의한 정보 독식과 북-남간 정보 불균형이 큰 문제로 떠오 르고 있다. 특히 '심리적 독점'(psychological monopolies)으로 먹고 사는 정보 독점은 상대국의 종속을 영구화하는 경향 때문에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한번 인이 배기면 중독이 번져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현대의 기술 종속이다. 마땅히 다른 기술적 선택의 대안이 없는 경우엔 그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현대 독점이 치명적인 연유는 이른바 상대의 중 독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원도우, 워드, 익스플로러 등 하나의 소프트 '제국'에 거의 모든 정부, 공공기 관, 학교 등의 소프트웨어들이 구속되는 현실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종속 현상이다. 신 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정보 중독의 니코틴을 제공하는 기업들은 여전히 호황을 누린다. 중독 에 의한 독점 효과는 좀처럼 기우는 법이 없다. 소프트웨어 비용 지불을 임의로 전기료 징수처 럼 정기적 가입 모델로 바꾸고나서 엠에스 제국은 앉아서 수십억 달러를 정기적으로 챙기는 잇 속을 얻었다. 반면 정보 종속의 굴레에 개발국들 대부분이 더욱 참담한 정보빈국의 지위로 낙 하하고 있다. 산업 시대보다 더 무서운 지적 재산권의 방벽은 선진국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나마 받아먹 으며 나름대로 성장의 기회를 찾는 시도마저 사그리 말려버린다. 그래도 서유럽의 일부 국가들 에서는 정보 후발국에 숨쉴 공간을 틔여주려면 좀 더 느슨한 예외적인 국제 저작권 적용이 필 요하다는 양심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국가 정보정책의 백년대계란 면에서 더 이상 소수 독점 기업에 의한 일국의 정보 독점을 방치해서는 곤란하다는 위기론도 등장한다. 이제 정부가 나서 소프트웨어 시장 경쟁의 기초를 회복해야한다는 각국 정부의 우려섞인 목소리가 드세다. 경쟁 시장의 회복을 위해서는 지금의 '닫힌' 소프트웨어 독점에 가장 큰 대항력인 리눅스(Linux) 운 영체제 등 '열린소스'(open-source) 스프트웨어의 정책적 도입이 시급하다고 본다. 이제까지 정보정책 설계에 열린소스 소프트웨어를 적극 도입하려는 국가로 중국, 영국, 프랑 스, 독일,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25개국이 나서고 있다. 보안 능력, 안전성, 경제적 비용 등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은 열린소스 계열의 프로그램들이 이들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개발, 지원 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정보 독점에 반대하여 중앙 부처뿐만 아니라 하급 단위의 공공 기관들 까지 열린소스 프로그램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페루에서는 한 국회의원이 열린 소스의 정책적 입안을 주도해 영웅으로 떠올랐다. '에드가 빌라누에바'(Edgar Villanueva)라는 이 정치인은 자신의 지역구내 컴퓨터 소프트웨어 구입의 재정난으로 고민하다 열린소스 프로그 램을 대안으로 보고 정책 입안에까지 이른 경우다. 그는 페루 보수 정치권의 반대와 마이크로 소프트의 페루 지국의 압력을 물리치고 공정한 시장 경쟁을 위해 정책적 차원에서 열린소스의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자유시장론을 폈다. 오직 한마리의 사자(lion)가 모든 것을 독식하며 나머 지를 쥐처럼 부리는 불공정 경쟁의 독점체, 즉 '레오폴리'(Leo-polies)가 페루의 건전한 시장에 독약이라는 그의 평가가 먼나라 얘기같지 않다.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의 개방은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자유롭게 이용하고 수정이 가능한 경 쟁과 비배제성의 논리를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해 상업적 소프트웨어는 일반인의 코드 접근의 기회를 박탈한다. 프로그램 갱신은 업자의 몫이고 이를 쓰는 사람은 구입과 갱신 비용을 지불 하며 그저 쓰기만 하면 된다. 경쟁이 없으니 가격 인상이나 불공정 행위나 요구에 이용자는 수 동적 지위로 남는다. 열린소스를 수용한 국가들은 이같은 레오폴리의 독식을 미리 내다봤다. 그 저 수수 방관하다간 소프트웨어 종속에 이를 수 있다는 감이 섰던 것이다. 열린 소스를 위한 70여개에 달하는 입법안, 정부 보고서, 정책 연구는 정보 종속을 막으려는 이들 정부들이 시도 한 대안찾기의 증거다. 또한 리눅스로 대표되는 열린소스 운동이 소수 마니아들의 전리품처럼 여겨지던 컬트의 시대도 이제 갔다는 증거다. 달리 보면 열린소스 외에 레오폴리에 필적할 대 안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정보 독점을 냉혹한 거대 기업들의 신자유주의 모델로 본다면, 열린소스는 이를 제어하는 최 소한의 사회복지 모델과 같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국민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마련된 최소한의 사회복지 정책처럼 열린소스는 정부가 당연히 고려해야할 정보정책의 필수 사안이다. 자유로운 시장 경쟁의 룰을 회복하고 한 국가내 정보기술의 자립적 발전을 위해서도 정부가 나서서 열린 소스 운동을 안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이를 정책적으로 수용한 서유럽이나 남미 국 가들의 앞선 경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몇 년전부터 우리에게도 열린소스 운동의 정책적 도입을 위해 공청회나 입법화 등의 움직임 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흐름이 꾸물거리거나 그저 형식적 의제로 그치지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정부가 나서 열린소스에 대한 민간의 흐름을 국가 정보 정책의 필수 의제로 껴안을 필요가 있 다. 정부 부처와 각급 기관들부터 독점 정보기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리눅스 운영체제 등 소 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쓸 수 있는 경쟁적 시장 환경을 마련하고, 최대한 소프트웨어 코드간 소통이 가능하도록 호환성있는 시스템을 장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방성을 지향 하는 대안적 소프트웨어의 개발도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다가올 우리 사회에서 '종속'과 같 은 빗바랜 용어를 또 한번 유행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름다운 e세상, 20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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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속도와 지체의 미학

속도와 지체의 미학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속도의 쾌감을 제대로 느끼려면 단연 롤러코스터가 압권이다. 바람을 가르며 미친 듯이 돌고 질주하는 롤러코스터에 몸을 한번 맡겨본 사람이라면 속도의 오르가즘이 뭔지 한번쯤은 짜릿하 게 느꼈을 것이다. 인간사에는 꽤 오래전부터 이런 속도-기계들이 상상에서 혹은 현실로 고안 됐다. 속도에 대한 집착은 시간과 공간과 살덩어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 나고 싶은 욕구에 기인한바 크다. 현실의 제약에 대한 초월의 욕망과 상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탐관오리들의 관 할권을 넘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의 축지법, 산을 타넘는 신령님의 공간 이동 지팡 이, 마녀의 빗자루,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 빛의 속도로 시간의 벽을 타넘는 타임머신, 부처님 손바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했던 손오공의 구름, 중력장의 공포를 쾌감으로 반전시키는 번지 점프, 제한 속도를 벗어나 죽을둥 살둥 모르고 달리도록 만든 경주용 자동차들, 영화 '론머맨'이 나 '공각기동대'에서 신체를 버리고 네트에 거하는 데이터 정령들과 목 뒤꼭지나 척추를 인터넷 포트로 연결한 미래형 인간 모습 등등. 이를 가만 보면 속도-기계의 상상력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우선 지팡이, 융단, 빗자루 등 도구를 이용해 가속을 얻던 시절에서 이제는 아예 살덩이를 벗어나 광통신망에 연결 되는 신체 이탈이 크게 늘고 있다. 실제 기계의 유형에서도 인간의 몸과 함께 움직이는 공간 이동의 수송 장치들에서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고속의 신체 이동을 느끼는 가상현실 게임이나 초고속 인터넷 이용으로 바뀌고 있다. 속도의 체감 능력을 점점 극대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한편 장비를 이용하건 신체의 이탈을 유도하건 인간의 속도 욕망을 가로막거나 느림을 유발 하는 현실의 조건 혹은 제약이 늘 있어 왔다. 앞서 본 것처럼 중력, 시간, 공간, 살덩이, 산, 속 도 제한, 부처님 손바닥, 기류 등은 인간의 가속 기계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현실과 상상의 속도 제약의 조건으로 기능한다. 모뎀에 전화선을 연결하던 시대가 엊그제요 모바일과 초고속 인터 넷 유선통신은 기본이고 이제 무선 랜(근거리통신망) 기술 '와이파이'(Wi-Fi)가 얘기되는 오늘 에도 이들과 비슷한 속도의 지연 혹은 간섭이 존재한다. 신체 이탈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공간 이동의 착시를 느끼며 사는 때에 디지털 지연/간섭 현상은 주로 물리적 장벽에 의한 속도 지체에 의해 유발된다. 요즘에야 그렇지 않지만, 애꿎은 텔레비전을 손으로 내려치며 화면을 조정하던 공중파 아날로그 시대에는 전파를 가로막는 각종 악천후가 속도의 적이었다. 디지털 영상 시대에는, 메아리치거나 반복되는 음향들,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 3편'에서의 질 나쁜 유체형 사이보그가 흐물흐물 벽을 뚫고나오듯 바로 전화면이 이후 화면에 양각으로 포개지는 현상들, 화면 픽셀 일부의 모자이크식 흐트러짐과 교정, 음성과 따로 놀거나 하릴없이 멈춰진 영상 등이 속도의 질주에 구멍을 내는 새로운 지체 현상들로 등 장한다. 분명 속도 지체는 완벽한 재현감을 위해서는 해롭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나쁜 것일까? 속 도 지체는 일종의 느림 현상이다. 느림이 없으면 속도의 무한 스릴은 다음의 극한적 상황을 낳 는다. 축지를 잘못 써 홍길동이 그만 형장 입구로 발을 헛딛거나, 산신령이 지팡이를 자주 두드 려 이를 부러뜨리거나, 더 많은 스릴감을 위해 번지점프용 줄을 너무 늘이거나, 과열로 통신이 두절되거나, 경주용 차의 브레이크가 풀리거나 한다면 상황은 치명적이고 위험하다. 이는 우리 식 속도를 표현하는 "빨리빨리"에 반대한 '느림의 미학'이 몇년전부터 등장하는 까닭이기도 하 다. 반대로 "천천히"는 무섭게 질주하는 자본주의 속도-기계들의 비인간성을 제어하는 힘이 된 다. 우리는 느림과 지체를 무시해 속도의 과열 욕망이 빚어낸 깊은 상처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선진국의 형식 논리에 희생당하는 개발국의 국민들, 생산제일주의와 성장 논리에 묵과된 장시 간 노동의 혹사, 마구잡이 개발 논리에 파괴되는 생태계, 벤처 육성이란 단기 명목에 급조된 뻥 튀기 주식과 거품, 앞서 나가는 시장 논리에 홀대당하는 문화 자산 등은 형식, 성장, 개발, 육성, 시장 확대의 수많은 속도전 때문에 생긴 생채기들이었다. 자본주의 속도-기계들에 딴지를 거는 느림은 그래서 인간적이다. 앞만 보지말고 옆과 뒤도 보면서 질주하라는 안전과 다양성에 대한 인간적 주문이 들어 있다. 언제나 당시에는 불완전해 보이고 현실의 한계로만 보이는 것이 쾌속 질주의 쉬어가는 굽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 다. 간섭과 지체로 접속한 영상이 일그러지는 현상은 한 굽이만 지나면 질주의 뒤안길이 될 것 들이다. 미리부터 조바심 치면서 온전하고 완전한 것만을 원한다면 쉬 체하기 마련이다. 속도의 미래 가능성을 따라 움직이면서도 그 가운데 현실이 제한하는 느림의 미학을 즐길 줄 알아야 제어불가능한 속도의 극한을 예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보화 정책도 조금은 혹 더 디 가더라도 뒤쳐지거나 뒤따라오지 못해 소외되는 사람들이 없나 찬찬히 두루 살펴보며 속도 를 내야 충돌없이 잘 진행되는 법이다. 축지쓰다 돌부리에 몇 번 채여 봐야 형장으로 발을 헛 딛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막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e세상, 20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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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길거리 인터넷' 시대

'길거리 인터넷' 시대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불어나는 살을 감당못해 요즘 운동을 시작했다. 서른 중반의 내 나이에 다른 점잖은 종목들 을 제껴놓고 '과격한' 농구를 무리해 붙잡았다. 농구에 치명적인 '짧은' 키까지 겸비하고서 말이 다. 그러면 어떠랴. 공던지며 살을 털어내는데 내 목적이 있으니 뭐 이런 신체적 난관쯤이야 대 수가 못됐다. 무더운 더위에 석달 남짓 용쓰며 이곳저곳 농구장을 전전해 다행히 조금 살빼는 성과를 거둔 것 외에도 공놀이하면서 하나 건진 깨달음이 있었다. 동네 농구가 대안적 인터넷 환경과 쫙 겹 쳐지는 착시가 왔던 것이다. 갖다 붙이자면 '길거리 인터넷'(Street Internet)이라 말할 수 있는 인터넷의 민주적 밑그림을 길거리 농구를 하며 감잡았다. 보통 '길거리'는 집을 벗어나 차들과 사람들이 오가며 서로 마주치는 공적 장소를 지칭하지 만, 형식과 틀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이차적 의미의 쓰임새도 있다. 홀로 동네 농구장에 나가 공 을 던지다보면 난생 처음보는 사람들과 격없이 만나 같이 경기를 하다가 헤어진다. 길거리에선 프로농구처럼 골득점이나 반칙, 도움주기 등의 선수 전적이 죽 흘러 한눈에 타인의 정보를 파 악할 길이 없다. 그저 같이 서로 모여 몸풀다 직감적으로 수준맞는 사람끼리 조를 갈라 짜고 놀이를 한다. 편을 먹는데 공넣는 실력도 짧은 키도 성별도 인종적 차이도 문제가 못된다. 평등 하게 놀이에 임하고 진행하면서 스스로 알아서 제 역할을 찾아간다. 반면 프로농구는 꼭 짜여진 대진표, 프로 선수들의 이적에 오가는 거액의 몸값, 초대형 돔의 실내 구장과 넘쳐나는 관객, 상업 광고와 돈의 흔적들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바깥 대기의 열기나 흙 냄새와는 무관하게 인공적으로 조절된 실내에서 치러지는 프로 경기는 공놀이를 박 제화한다. 간혹가다 키작은 선수의 멋진 기량도 맛볼 수 있지만 역시나 경기의 주도는 전체 평 균키 이상의 선수에 의존한다. 남녀 성별에 따라 가르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대접받는 선수들 만 추려 경기를 하는 것도 그 자유로운 평등성에 위배된다. 그 때 그 때 동네마다 수백수천의 길거리 농구단들이 짜여지면서 수많은 선수들이 서로의 기량을 펼치는 것과 달리, 프로농구는 매년 반복되는 경기에 스타의 이미지만을 재생산한다. '단지 재미로'(Just for fun) 오픈 운영체 제 리눅스(Linux)를 개발했다는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처럼, 길거리 농구는 전업 선수 가 주종을 이루는 프로와 달리 그저 재미삼아 즐기는 놀이가 중심이다. 또한 프로가 중앙화된 거대 경기장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면, 길거리 농구는 동네를 중심으로 지역화되고 분산된 형 태의 자유로운 놀이를 택한다. 물론 구경을 위한 접근에 있어서도 프로는 화폐 지불 능력에 따 라 강제로 간섭권을 발동하나, 길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길거리 농구는 또한 그들만의 영웅을 자생적으로 키워낸다. 상업화된 미 프로농구의 대안으 로 매년 뉴욕 할렘 동네에서 개최되는 길거리 농구대회의 아마추어 선수들처럼, 입소문으로 전 해져 유명해진 길거리 영웅들이 존재한다.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프로 선수들과 달리 이들은 매 사에 대기업의 냉혈한 상업성에 비판적이다. 기업들의 장단에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고 길거 리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출중한 기량의 선수들이다. 이들은 이웃의 수많은 친구들과 경기를 치 르면서 열린 무대를 통해 실력을 갈고닦으며 성장한 길거리의 우상이다. 그 전에도 인터넷에는 영웅들이 있었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를 만들어가는 디지털 엘리트, '디제라티'(Digerati)라는 과분한 명성까지 얻었던 스타들이 존재했다. 마치 프로농구의 전업 선 수들처럼 그들은 고액의 몸값을 받으며 잘 준비한 미래 청사진을 들고 주식 시장을 현혹시켰 다. 이들이 이른바 '신경제'라 지칭했던 구단의 선수들이었다. 한 때 이들은 여론의 우상이었다. 이제까지 이들의 시장 행동과 말한마디는 미래 사회의 생존을 위해 배워야할 덕목과 가치로 받 들여졌다. 마침내 시장에 거품이 빠지자 급조된 상업적 영웅들도 시들해졌다. 정부가 밀고 주식 을 띄우고 여론을 움직여 급조해 만들어낸 이들의 그럴듯한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모범도 우 상도 아닌 것으로 입증됐다. 디제라티는 신경제마냥 주조된 헛된 상업적 영웅상이었던 것이다. 어디든 수시로 벌어지는 길거리 농구처럼 인터넷에도 자유 소통의 장소들이 눈에 점점 많이 띈다. 이제 그런 길거리 인터넷에 상업적 스타 선수들을 밀치고 자유롭고 감성 풍부한 신진 선 수들이 실세로 자리잡고 있다. 얼마전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위를 안타깝게 했 던 파일공유 프로그램 그누텔라(Gnutella)의 공동 개발자 지니 칸(Gene Kan), 아이디어의 자유 를 외쳐온 리처드 스톨만(Richard Stallman), 열린소스 운동의 에릭 레이몬드(Eric Raymond), 리누스 토발즈, 엠피3 파일의 대안으로 오그 보비스(Ogg Vorbis)를 개발한 크리스토퍼 몽고메 리(Christopher Montgomery), 다양한 사회적 공유 프로그램의 국내외 개발자들이 바로 길거리 인터넷의 아마추어 영웅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기업들과 비친화적인데다 언론의 큰 주목을 끌진 못해도 길거리에서 다져 진 실력의 검증으로 성장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며 갈고닦은 실력과 정보 교류로 얻은 능력을 발휘하며 인터넷을 좀더 살맛나고 정이 느껴지는 동네로 바꾸려 한다. 길 거리 농구에서처럼 이 신진의 2세대 영웅들은 인터넷 저잣거리에서 자유로운 룰과 평등한 '열 린' 관계들을 실천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쳐왔다. 이들은 돈으로 주조된 프로 신경제의 주식시장 보다는 땀과 열기로 가득한 길거리에서 민주적인 법칙을 만드는 일에 골몰한다. 프로 신경제의 텃세에도 불구 길거리 인터넷이 점점 번성하는 까닭은 이런 능력있는 아마추어 영웅들의 증가 때문이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장차 길거리 인터넷의 논리가 역으로 프로를 접수하는 사태가 터 무니없는 공상만은 아니리라. 이것이 내가 농구로 뱃살을 털어내면서 인터넷 권력 교체의 미래 까지 꿈꾸었던 정황이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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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어울림의 문화와 소리바다

어울림의 문화와 소리바다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햇수로 벌써 십년이 다 되가는 미국의 유명한 사이버문화 잡지가 하나 있다. <와이어드 Wired>란 이름의 월간지인데, 비록 우파적 기술맹신론의 냄새가 그득하지만 그래도 한 세대를 넘도록 초지일관 정보기술 실험 사례들의 발굴과 그 속에서의 문화 형성을 관찰하는 노력에 절 로 존경이 들만한 잡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십여년의 공력이 <와이어드>의 바깥세상 보는 시 야를 키웠던 모양인지 얼마전 이 잡지의 8월호 특집에 "세계의 게임수도, 서울"이란 제목으로 우리의 정보 현실이 크게 소개된 적이 있다. 속된 말로 요새 한창 '잘나가는' 우리의 대외적 이미지를 감안하면, 서울이 "지구상에서 가장 잘 연결된(wired) 곳"이란 극찬을 받고, <와이어드>발행 처음으로 한국의 정보 문화를 다룬 일 이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줄곧 우상향의 쾌속 곡선을 그리는 국내 경제, 한국의 정보 인프라에 대한 국제 통계 지표들의 후한 점수, 월 드컵 축구에서 보여진 우리의 강렬했던 집단 응원문화 등 최근의 매력적인 인상들이 국제적인 시선 집중의 촉매제로 기능했던 까닭이 크다. 그럼에도 기술론자들의 경전처럼 떠받들여지는 한 유명 잡지가 우리의 온라인 문화를 처음 대서특필한 점은 어쨌거나 예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와이어드>는 우리의 정보문화 성장의 동력을 인구 밀집의 장점에 의한 기간망 설치의 비용 절감 효과, 사회 정보 능력을 보강하는 게임방들의 대중화, 값싼 정보 이용료 등 지리·경제적 장점들에서도 찾지만, 다른 무엇보다 한국인의 독특한 국민성과 연관짓고 있다. 한마디로 한데 뭉치고 어울리고 사교적인 국민성이 '상호작용'(interaction)의 인터넷 문화와 궁합이 잘 맞았다 는 평가다. <와이어드>는 그 구체적인 국내 사례로 온라인 게임문화의 발전을 지적한다. 미국 과 일본 등 게임기 콘솔이 지배하는 문화와 달리 한국에서 유독 피씨(PC)가 게임의 직접적 플 랫폼이 된 이유에는, 개별적인 게임 즐기기보다는 온라인을 통해 한데 어울리고 상호 접속하고 픈 개방된 국민성이 깔려있다는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인다. 상호 역할 분담을 통한 서열이 존 재하지만 그 속에서 스스로의 자율적 통제가 이뤄지는 온라인 역할 게임을 통해 상호 소통하면 서 만들어나가는 문화 형식들이 우리 네티즌들간의 새로운 집단 경험을 키운다고 본다. <와이어드>는 이렇듯 우리의 독특한 온라인 문화를 부러워한다. 이른바 '정보 강국'의 설익은 외관에 비해 우리의 '친사회적'(hypersocial) 문화의 본성에 주목한다. 이 잡지의 연륜과 경험상 끊임없이 개인간 상호 소통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자율성을 키워 스스로의 규칙을 만드는 문 화적 본성이야말로 인터넷의 자유로움과 일치하는 덕목임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잡지의 특 집기사는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을 쫓다보니 정보 현실의 전체적 조망과 평가에서는 실패했다. 우리가 지닌 정보화 수준이 오직 온라인게임을 통해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온라인 게 임 인구 팽창, 게임의 전국민 스포츠화, 세계 초유의 온라인 게임 방송중계, 젊은이들의 자유분 방한 게임방 이용 모습 등 파편화된 이미지들로 수도 서울을 게임천국으로 만든다. 냉정하게 우리의 정보 현실을 찬찬히 살펴보기보단 이국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려 든다. 마치 상호성이나 자유로운 어울림의 온라인 문화가 우리 인터넷 정책과 현실 어디서든 투명하게 관찰될 수 있다 는 오해를 불러오는 것이다. 얼마전 불행하게도 음악파일공유 사이트인 '소리바다'가 법원의 음악복제금지 가처분 결정을 받았다. 기술적으로 소리바다와 같이 인터넷상에서 중앙의 상급 서버나 관리자 없이도 많은 정 보들을 서로 함께 어울려 공유하는 체계를 일대일(P2P) 교환 시스템 구조라 부른다. '소리바다' 도 우리의 온라인 게임문화마냥 친사회적이고 상호 접속을 바라는 문화적 특성아래 성장했다. <와이어드>가 높이 샀던 부분은 바로 소리바다처럼 자유로운 상호성을 강조하는 우리의 온라 인 문화에 맥락이 맞닿아 있다. 그런데, 자유로운 공유와 상호소통의 문화가 한국의 온라인 문 화의 기초라고 추켜세운 이 해외 잡지의 평가에서 그 숨통을 막는 사례들은 전혀 주의를 끌지 못했다. <와이어드>가 적어도 소리바다의 폐쇄와 같은 국내 정보 현실의 후진성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우리의 온라인 문화에 그저 찬사만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지만 잡지가 국내 네티즌들의 친사회적 문화를 막는 빈곤한 우리의 정보 현실 조건을 감잡 았다면, '게임천국'이란 말보단 검열/단속 천국이란 제목으로 바꿔 달 법도 했다는 얘기다. 바다건너 남들의 좋은 평가에 젯밥을 뿌리자는 의도는 절대 없다. 외부인들의 평가를 내 식 으로 고쳐보자는 의도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긍정적 평가가 뭔지 근거를 따져 이에 부응하 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다른 이가 갖지 못한 문화적 장점을 우리가 가졌다면 이를 북 돋지는 못할망정 의도적으로 막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의 인터넷 발전이 친사 회적 어울림의 문화에서 왔다고 보는 한 외국 잡지의 평가에 한발 앞서 우리 현실이 조금이라 도 이런 견해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소리바다의 폐점 휴업은 면했을 일이어서 그렇다. (200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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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혁신과 창의력의 코드, 0+1

혁신과 창의력의 코드, 0+1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구체적인 작동 원리는 몰라도 디지털이 0과 1의 이진 코드의 조합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산다. 따져보면 1이 받쳐주기 전에 홀로 선 0은 '무'(nothing)의 숫자 다. 무는 부정과 없음을 지칭하기보다는 '존재'(being)의 근원을 설명하는 열린 수치다. 그래 서 혹자는 "무가 존재를 배회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즉 겉으로봐선 말 끔한 듯 보이지만 0에는 꿈틀거리는 생명의 배아들이 언제든 뻗쳐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없는 듯 해도 항상 뭔가 생성을 위해 응축되어 있는 상태가 0이다. 그래서, 0은 인 간에 의해 비실재하는 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태에 해당한다. 디지털의 논리는 바로 0이란 무의 가능성에 1의 현실화 조건을 덧붙여 생명을 불어넣는 일과 같다. 그렇게 보면 0은 1을 만나 구체적 화학작용을 수행하고 가능성을 실제화한다. 1 이 없이는 드러날 수 없는 가능태로서의 0은 항상 상대인 1에 의해 조건화하는 위치에 놓인 다. 이것이 1이 0을 살리는 촉매제인 연유다. 그런데, 0과 1이 그저 만난다고 만사가 형통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 여줬다. 바람직한 상황은 이 둘이 어느 하나의 힘에 무게를 두지 않으면서도 힘의 형평을 고려하여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결합할 때다. 그렇지않고 0만 감싸돌고 1을 홀대하면 디지털 현실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에 불과해진다. 반대로 1의 현실 논리로 0의 상상력을 억압하 면 디지털의 가능성은 출구를 잃는다. 보통 전자는 디지털과 기술 지상론을 유포하는데 반 해, 후자는 현실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논리에 기여한다. 1이 분명 0의 현실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0이 자신만의 잘난 논리로 1을 업신여긴다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0이 우위에 선 디지털 조합은 적어도 극단의 현실 무시론으로 빠진 다. '가상'에 집착하는 디지털 예찬론자들이나 중증의 기술결정론자들이 대체로 이런 조합을 즐긴다. 이들은 디지털 기술은 그만의 고유한 논리가 있기에 현실에 의한 개입과 간섭은 부 질없다거나 구질구질한 현실과 다른 가상의 디지털 낙원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부류들이 다. 이러한 0과 1의 쌍에는 디지털이 초래할 정보 불평등, 소외, 감시 등 구체적 현실의 조 건들을 전혀 볼 수 없다. 이 경우엔 끊임없이 0을 뒤흔들어 1이 그 필수이자 전제 조건임을 상기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에 지금까지 디지털 현실의 삐걱거리는 문제들은 대개 0의 가능성을 심하게 억압하는 1의 월권에서 비롯했다. 현실의 권력은 0을 항상 현실의 반영처럼 만들기를 원했다. 거대한 복제기계인 네트에서 성장하는 자율적인 정보공유의 흐름을 구태의연한 저작법을 가지고 통 제하려는 욕구는 대표적인 1의 권력적 속성을 보여준다. 이렇듯 애초부터 1의 짝인 0의 무 한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며 만들어진 디지털 인공물은 당연 김빠진 맥주처럼 생동 감을 잃는다. 여러 등급으로 나눠 '음란'으로 가두고 '외설'로 쪼아버리는 강제력도 1의 욕심 이 지나쳐서다. 1의 욕심이 지나치면 0이 가질 수 있는 디지털의 무한한 경우의 수들은 차 츰 소멸한다. 신경제의 핵심이라고 얘기하는 '혁신'의 과정은 0의 가능성을 북돋아주는 1에서만 나올 수 있다. 실리콘밸리는 1이 어떻게 0에 긍정적으로 개입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 닷 컴기업들이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술로 혁신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도 1의 탄력성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1이 구태의연하면 0의 가능성은 쪼그라드는 것이다. 0이 무한한 창의력을 구 체화하려면 1이 앞장서 길을 터줘야 한다. 한편, 0과 1의 조합은 힘의 우위에서 주기를 타기도 한다. 도입기에는 보통 0이 우세하지 만 정착기에는 1에 의한 현실 강제력이 0의 가능성을 좌우하는 경향이 크다. 지금처럼 디지 털 지형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시기에는 1에 의한 0의 억압이 강해지기 마련이고, 이는 0의 가능태를 일그러뜨리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결국 0이건 1이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억눌리 면 문제가 생긴다. 0의 새로움과 1의 현실 조건이 제대로 적절하게 형평성있게 결합돼야 한 다는 얘기다. 어떤 한 유명한 수학자는 인류의 세 가지 혁혁한 '무'의 지표로, 수학에서 0의 사용, 경제 적 등가교환을 위해 고안된 지폐의 출현, 소멸점을 이용한 원근 재현을 꼽은 적이 있다. 인 간에 의해 구성된 상대적이고 인공적인 세계관의 출현을 예고했던 '없음'의 추상 지표들이 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충분히 디지털 0과 1의 쌍이 네번째 추상적 무의 지표로 추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무한의 자유로운 디지털 조합에 의해 비실재하는 것을 현실화하는 힘이 바로 0과 1의 새로운 무의 지표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추상의 세가지 지표들이 홀로 그 추상적 표현의 기준이 되는데 반해, 디지털 값은 꼭 쌍으로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0과 함께 존재하는 1의 조합값에 따라 현실에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지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그 배 열이나 경중에 따라 현실에 나타나는 모습이 틀려지는 이치는 0이나 1 가운데 어느 하나의 과다주입에 의해 발생한다. 정확한 값은 딱 떨어지지 않더라도, 0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크게 억압하지 않으면서 1의 현실 조건을 습득한 둘의 배합 비율이 적정 수준이라는 것이 핵심이 다. 이것이 디지털 혁신과 창의력의 코드를 제대로 구성하는 법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e세상, 200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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