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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정보문화진흥원의 정보화로 가는 길, 아름다운 e세상, 그리고 따뜻한 디지털 세상으로 불리는 월간지에 2년간 기고했던 글들

[아름다운 e세상] '품행제로' 쾌륜주행(快輪走行)의 두발 바퀴 찬가

'품행제로' 쾌륜주행(快輪走行)의 두발 바퀴 찬가 : 스잔의 롤러에서 아마존 세그웨이까지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CyberMarx.Org) 난 요즘 킥보드를 탄다. 소유자는 물론 내 아들이다. 하지만, 타는 시간이나 횟수로 따지 면 내꺼나 매한가지다. 쉽게 높이 조절이 되고 어지간한 무게는 견디게 만들어져 가능한 일 이다. 한발로 세게 차고 다른 발로 균형잡는 그 맛이 남다르고, 경사진 내리막을 달리는 속 도감이 좋아서 탄다. 어느새 이 두발 쾌륜이 없으면 생활이 무료할 정도가 됐다. 자전거를 처음 접했던 때처럼 처음엔 넘어질까 겁나고 균형잡는 것도 힘들지만 누구나 곧 이 물건에 쉽게 적응한다. 킥보드에 익숙해지면 다음엔 길의 생리를 배운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길이 가진 다양한 결을 느끼게 된다. 길의 굴곡, 턱, 웅덩이, 장애물, 경사, 재질 등 순조로운 주행을 위해 이 모든 것에 대한 주의력은 필수다. 당연히 자주 달릴수록 사사로운 길의 질감까지 눈에 들어오고 그 각각이 주행코스에 포함된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이 두발 쾌륜은 길에 대한 감각 변화는 물론이고 개인 습성도 변화시킨다. 매일 수백여 미터 앞에 놓인 우편함을 뒤지러 가거나 동전 세탁을 하러 언덕진 곳을 내려가거나 이웃집 에 놀러 가거나 할 때마다 이미 내 손은 킥보드의 핸들을 잡는다. 기분이 꿀꿀해질 때도 이걸 끌고 동네 한바퀴면 그 순간 자유롭다. 무공해 두발의 운송장치와는 인연이 많다. 몇 백원에 빌린 자전거로 온종일 발 굴리던 여 의도 앞 광장, 그리고 영화 <품행제로>에서 80년대 중반 가수 김승진의 '스잔'이 울려퍼지 던 탈선의 주무대 '롤러장'은 순진했던 중딩과 날날이 고딩 시절에 또래들과 줄곧 찾던 마음 의 고향이기도 했다. 이제와 보면 당시 제도 이탈과 탈선에 희희낙락했던 시절이라 두발 물 건의 묘미를 제대로 느껴보진 못했던 것 같다. 30대 중반을 넘기며 이제사 아들의 킥보드에 서 쾌륜의 맛을 찾은 것이다. 국내에선 '바퀴신발'같은 기발한 물건도 나왔지만, 내겐 남다른 충격 경험이 직접적으로 두발 장난감에 크게 매료된 동기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첫화면에 가보면 큰 두발 바퀴를 가진 이상한 장난감이 판매된다. 6백여만원을 호가하는 이 비싼 장난감의 이름은 '세그웨이 인간 운송기'(Segway Human Transporter)다. 이전까지 무심하다 한번은 우연히 대학 캠퍼 스에서 두 젊은 남녀가 이 이상스런 기계를 몰고가는 것을 실제 목격하곤 그 경이로움에 입 이 얼어붙던 적이 있었다. 자가충전식 배터리를 가진 이 장난감은 꼭 미래 어느 도시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은색의 차가운 디자인에 잔잔한 기계음을 토해내며 내 옆을 스르르 지나쳤 다. 세그웨이에 비하면 킥보드는 턱없이 원시적이었지만 이 일로 어느새 두발 가진 장난감 들에 마음이 쏙 빠질 수밖에 없게 됐다. 타다보니 킥보드는 영락없이 초창기 인터넷 접속의 짜릿한 기분을 상기시킨다. 스케이팅 보드를 잘 타 미국 아이들의 우상이 된 토니 호크(Tony Hawk)나 '스타' 게임을 잘 해 영웅 이 된 프로 게이머에게서 드는 정서상의 차이란 크게 없어 보인다. 내 스스로도 요샌 킥보 드 타고 우편함을 들려 편지를 확인하고 오면 마치 회선을 이용해 전자우편을 받는 기분이 든다. 익숙해지며 느끼는 재미나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지나며 느끼는 아기자기한 속도감 이나 그 까닭에 드는 자유스러운 기분 등이 서로 엇비슷하게 일치한다. 이런 기분이 부자간 30년 세월의 간극을 쉽게 타넘듯, 인터넷을 사용하며 세대간 차이와 장벽을 쉽게 무너뜨렸 던 요인인 듯 하다. 근데 하나 문제가 생겼다. 아들과의 30년 세월 간극은 우습게 무너졌는데 오히려 주위 어 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내가 사는 동네의 미국인들이야 내 노는 꼴이 전혀 문제될 것 없 지만, 역시 걸리는 것은 동류 한인들이었다. 아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거 어른도 탈 수 있는 거요?"나 "살 빼러 운동하시나 보죠?"나 "그래서 살이 빠지나"다. 내 나이에 놀고 있는 것으 로 봐주질 않는다. 이 정도면 과분한 평가다. 모르는 이들의 시선은 더욱 혹독하다. 뭐 씹은 듯 쳐다보거나 정신나간 사람 취급하듯 혀까지 찬다. 상식의 권위로 보면 내 행위는 'X팔린' 짓이다. 구태의 불편한 응시를 대하면 자연히 내 자유는 움츠러든다. 거침없이 다니던 대로와 대 낮을 피해 밤에 타거나 집 주위만 돌거나 하는 일이 빈번해진다. 세대간 장벽은 극복해도 동류 세대의 편견을 극복 못한 현실의 아이러니다. 새롭게 부상하는 기술과 문화 도입기에 이런 일은 흔하다. 분명 사고와 행동에서 더 큰 자유로움이 수용되야 함에도 불구하고 처음 부터 구태의 잣대로 새로운 것에 모멸감을 안겨주려는 태도가 존재한다. 낯선 것들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선입견은 정작 이로운 것들을 주눅들게 한다. 예컨대, 인 터넷상의 음악 파일공유나 게시판 문화 등은 새로운 자유의 문화와 기술이다. 이에 대한 적 대의 시선은 열심히 킥보드를 끄는 내 모습에 처음부터 혀를 차는 태도랑 하등 다를 것 없 다. 있는 그대로 봐주려 않는다. 소수, 주변, 개인, 자유, 공유 등의 낱말은 아직도 사회 체제 의 부작용이다. 뭐든 옛 틀에 사지를 꼭꼭 집어넣으려 든다. 현실의 권위에 눌려 킥보드를 타기 위해 박쥐가 된 내 꼴처럼 언제 어디서 나랑 비슷한 처지의 주눅든 인터넷 기술과 문화가 현실 무대 뒤로 쓸쓸히 퇴장 당할 지 모르는 일이다. 덜컥 그런 생각에 이르니 낮이고 밤이고 대로변에서 'X팔림'을 무릅쓰고 자빠져도 꿋꿋이 킥보드를 발로 밀고 다닐 배짱이 절로 난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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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배려의 미덕에서 정보 소외 퇴치를

배려의 미덕에서 정보 소외 퇴치를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미국에 몇 년 지내면서 중요한 교훈을 하나 얻은 것이 있다. 화폐경제의 법칙에 모든 것 을 철저히 가두면서도 무일푼의 거지도 움칠 구멍을 항상 만들어둔다는 사실이다. '빵'하고 터질 계급간 적대의 파국을 막기 위해 항상 '쉬익-'하고 김빠지게 만드는 화해의 묘한 배출 구를 마련한다. 삶과 문화의 밑바닥까지 속속 배어있는 융통성과 배려의 숨구멍들이 사회적 약자의 분노와 소외를 막는 좋은 장치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보자. 강연, 공연, 학술대회 등은 여러 가격 등급이 존재한다. 대개 학생과 저임 금 생활자는 할인 혜택을 주는 것이 기본이요, 입장료를 지불할 수 없다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어떻게든 마련돼 있다. 아이들이 참여하는 각종 문화 행사 프로그램들도 마 찬가지다. 저임금 생활자를 위한 장학금들이 적지만 항상 존재한다. 잘사는 가정의 교육자본 에 비교할 순 없어도 원한다면 최소한의 과외활동이 무료로 제공된다. 형식이건 진심이건 배제보다 기회의 균등을 돕는 규칙이 있다. 뉴스 정보도 마찬가지다. 보통 전국 신문이나 지역 독점 신문보다 차라리 지역 생활 정보 지가 지역소식에 더 자상하고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공짜 공연·파티·모 임·영화 등 수없이 많은 정보와 소식을 접할 수 있다. 결국 1300원씩 주고 <뉴욕타임스> 나 등 전국지를 사서 보지않더라도 매주 나오는 생활 정보지와 지역 어디 에나 배포되는 학교의 일간지, 시민·문화 단체 소식지 등을 집어보면 어지간한 지역 사정 은 빤해진다. 신문을 구독해 볼 수 없는 여유의 사람들에게 또 다른 대안매체들이 여럿 존 재하고 있는 셈이다. 지역 도서관들은 물론이고 대학 도서관에는 지역주민들 누구나 출입하고 자유롭게 이용한 다. 이들을 위해 마련된 컴퓨터들에서 인터넷과 정보 검색은 기본이다. 신원확인만 되면 대 출도 자유롭다. 지역 도서관을 통해 아이들의 시청각 자료를 무료로 대출하는 혜택을 누릴 수도 있다. 비디오 대여가 힘든 가정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다. 한편 일반 가정은 미취학 아 동들을 주로 유료 놀이방에 보내지만, 최저 생계비 기준에나 미치는 가난한 가정의 어린아 이들을 위해 일년간 유치원 이전 과정(Pre-K)을 마련해 각종 교육 활동과 무료 급식을 제 공한다. 이렇듯 사회적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문화적 혜택의 숨구멍들이 여기저기 마련돼 있다. 예서 미국이란 나라의 사회적 복지 수준을 재거나 비교해 부러워하자는 의도는 전혀 없 다. 필자가 느끼기엔 오히려 미국은 상품화되고 너무나도 자본주의적인 사회이지 유럽식 복 지국가들처럼 절대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구조적이고 정책을 통해 적극 배려하는 나 라는 아니다. 이곳에서 상품 시장의 논리는 혹독하고 잔인하다. 이 안에선 한푼의 에누리도 없을 뿐더러 약자의 배려도 없다. 없으면 박탈되고 차별받고 숨죽이고 배제되고 흐느껴야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영리하게도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핀을 가지고 있다. 금방이라도 분노 가 표출될 수 있는 분위기가 적어도 무마되는 데는 미국 지역 사회 나름의 문화 소외와 정 보 소외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이를 보살펴주는 최후의 보루는 지역 사회의 비영 리 단체들과 기관들이다. 이제까지 살펴봤던 배려의 미덕은 오직 이곳들에서만 살아있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 필자가 미국 대학의 도서관에서 놀란 사실은 부랑자같은 허름한 차림 의 수많은 민간인들이 컴퓨터 앞에 잔뜩 꾸부려 앉아 인터넷 검색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 을 봤을 때다. 누군가 그들을 구리거나 지저분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 를 배려하는 최소한의 규칙이 조금이라도 잡혀있다면 그런 불평은 서서히 잦아들기 마련이 다. 정보 소외의 문제도 정부나 자치단체의 통큰 투자로 만사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결국 이를 푸는 첫걸음은 약자와 소외된 자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형식 적 장치들을 조금씩이라도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마치 이는 언제부터인가 노약자를 위해 버스와 지하철에 자그만 좌석을 마련하는 배려의 사회적 룰을 세우는 것과 비슷하다. 사회 곳곳에 약자에 대한 배려의 미덕이 스며있다면 사 회가 그리 삭막하지 않다. 예를 들어, 원칙을 가지고 소수의 장학금을 마련하거나 공짜로 입 장을 시켜도 사실 학원, 극장, 공연장은 그리 크게 손해보지 않는다. 예닐곱 등급으로 좌석 을 구분해 입장권을 팔아먹어도 최소한 배려의 장치가 존재한다면 현실이 그리 서글프진 않 을 것이다. 박물관, 놀이동산, 학교 도서관, 서점 등도 마찬가지다. 지역사회의 자산인 학교 도서관 등을 지역주민들이 공유하면 당연 자원관리의 효율성을 높아진다. 소자본의 동네 서 점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지역 서점들도 단지 주민들에게 책을 파는 곳이란 이미지를 벗어 나 어린이들의 책읽기 공간이자 지역 주민들간에 소통을 돕고 지역의 능력있는 작가를 발굴 하는 공간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박물관, 놀이동산, 동물원 등도 특별한 날엔 어린이들의 무료 입장에 인색하지 않고 이들을 위한 저렴한 학습 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지역민들과 깊숙이 연계할 필요가 있다. 배려의 미덕은 말 그대로 강제가 아닌 자발의 영역이다. 그리고 설사 이를 행하더라도 몽 땅 경제적 비용과 손해로 처리되지 않는다. 거대 기업들의 기부나 문화 사업마냥 결국은 베 푼 쪽에 최대의 마케팅 효과를 가져다준다. 정부 각급 단체, 교육 기관, 문화 공간 등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의 숨구멍들을 지금부터라도 틔우기 시작한다면 문화와 정보 소외 해결의 단서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베푼 자신들을 역선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배려의 장치들은 현실적으로 정부의 복지정책이 미약할 때 사회적 약자에게 줄 수 있는 희망의 활력이기에 그 가치가 크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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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정보 접근의 건강 비법: 각자의 링크들을 다양화하기

정보 접근의 건강 비법: 각자의 링크들을 다양화하기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지난 해 요맘 때일까? 농구로 살을 털어내던 기억이 난다. 그도 무리해선지 허리가 짱하 며 갑자기 쓰러져 얼마간 일절 운동을 삼갔다. 그리곤 어렵사리 내쫓은 군살들이 얼씨구나 하고 내 몸, 특히 배에 집중해 다시 자리를 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몸 의 위기가 다시 찾아오며 시작한 것이 조깅이다. 그런데, 이 운동은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랑 상관은 없지만, 열심히 해서 '네모' 가슴 등 기하학적 몸을 만드는 뿌듯함도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자리를 맴맴 돌기만 한 다. 투자 시간에 비해 살이 확 빠져나가는 느낌도 적다. 그럼에도 잃는 것만큼 득도 크다. 나같이 15여년을 넘게 니코틴을 갈아 마셔 호흡 계통이 엉망인 골초들에겐 조깅은 회생의 광천수와 같다. 게다가 무슨 큰 기량이 없어도 주위 눈치볼 일없다. 갈 수 있는 길만 있다면 어디든 간다. 튼튼한 다리만 있으면 비싼 도구를 동반할 필요도 없다. 배 나온 조깅 초보가 독자들에게 '건강비법'입네하고 어설픈 구라를 풀려고 이리 조깅의 장광설을 띄운 게 아니다. 뛰며 걷는 조깅을 하다보니 직업상 깨친 게 하나 있어서다. 몸을 다스리려는 조깅 습관과 인터넷을 이용해 정보 능력을 키우려는 현대인의 정서 구조가 꼭 닮았다는 점이다. 현대인의 정보 취사 방식은 온과 오프(on/off) 모두에서 원하는 정보원에 연결하는 링크 (links)의 과정이다. 링크 선택과 방식에 따라 정보 효율은 달라진다. 이에 대해 조깅 환경은 비유적으로 많은 것을 알려준다. 어느 길을 자신의 조깅 코스로 삼느냐에 따라 장기적으로 는 심폐 등 신체 기능, 정서상의 치유, 예상치 않은 지인들과의 만남 등 효과가 틀리다. 강 변, 캠퍼스, 산길, 아파트 등 동네 주위, 시내 거리 등 달릴 장소 선택의 경우수는 무수히 많 다. 선택한 코스에 따라 벌어지는 조깅의 스타일도 많은 것을 얘기한다. 천천히 그리고 빨리 걷는 사람, 천천히 그리고 빨리 뛰는 사람, 애들을 싣고 밀며 뛰는 사람, 개를 끌고 뛰고 걷 는 사람, 연신 옆사람과 잡담하는 사람, 홀로 혹은 같이 뛰며 걷는 사람, 헤드폰을 끼고 연 신 라디오를 듣는 사람, 윗통을 벗고 뛰는 사람, 살 태우려 뛰는 사람, 살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 나온 사람, 조깅 코스의 경치에 반해 나온 사람, 등등. 어떤 코스를 끼고 각자 목적을 갖고 걷고 달리는 고유의 개성은 정보와 지식을 취사 선택하여 흡수하는 각각의 링크 방식 과 비슷하다. 문제는 현대인의 정보 링크가 한번 구축되면 바꾸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이미 개인 정 서에 따라 그 링크가 선호되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정보 습득의 링크 가짓수는 늘지만 원하 는 것만을 집중해 선호하는 경향을 지닌다. 한번 조깅 코스가 정해지고 습관이 들면 익숙해 져 조깅 방식을 바꾸기가 힘들긴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정보 편식마냥 동일 거리 동일 코스 의 시간 단축에 대한 집착만 생긴다. 필자 개인의 온/오프 정보 링크를 살펴보자. 우선 인터넷에서 거의 매일 습관적으로 찾는 사이트는 <한겨레신문>, 영국 진보지 <가디언>, 주간지 <빌리지보이스>, 월간지 <먼쓸리 리뷰>, 인터넷 시사지 <살롱> 등이다. 현실에선 일간지 <뉴욕타임스>, <파이넌셜타임스>, 주간지 <네이션>, <오스틴크로니클>, <비지니스위크>, 월간지 <비지니스 2.0>, <와이어드 >, 격월간지 <뉴레프트리뷰>를 구독하고 있다. 가만보면 편향성이 두드러진다. 직업상 읽는 인터넷 관련 정보지를 빼면 정치 시사지가 전부다. 따져보니 과거 10여년간 내 정보 링크는 전혀 변한 게 없다. 오직 비슷한 취향의 정보 링크만 온/오프 모두에서 늘었다. 동일 코스에선 거의 변화가 없는 조깅의 특성은 이와 비슷하다. 같은 배경의 코스를 맴돌 며 얻는 자극은 극히 미미하다. 의도치않게 조깅 상대의 노출에 맞닥뜨리는 등 음란 정보의 유혹에 시달리거나, 개에게 물리고 개똥을 밟는 등 스팸의 덫에 치이거나, 말동무를 만나 의 외의 정보를 얻거나, 반대쪽에서 뛰는 이성과 감정적 교감을 갖는 것 등을 빼면 큰 변화와 자극은 없다. 오직 익숙한 환경의 반복과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날씨의 변화뿐이다. '데일리 미(daily me)', '협송(narrow-casting)', '원클릭(one-click)' 기술 등은 인터넷 이용 자들이 보길 원하는 정보를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디지털 기법이다. 취향과 기호에 부합한다 는 명목으로 이러한 맞춤형 정보기술들은 개인의 조깅 코스를 한 곳에 붙잡아두려 한다. {리퍼블릭닷컴(republic.com)}이란 책의 저자인 카스 선스타인(Cass Sunstein)같은 이는 맞 춤기술에 지배될수록 민주주의의 다양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기업이 제 공하는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정보 서비스에 길들여진 소비자는 점점 현실의 다양한 층위를 두루 살필 능력이 떨어진다고 본다. 개인용 맞춤기술이 주는 사고의 협소화가 사회적 관심 사의 보편적 공유를 막는다는 논리다. 10여년이 넘게 내 정보 링크들에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진단이 지나친 비약이 아 님을 일깨운다. 저마다의 코스가 한번 정해지면 바꾸기가 힘들고, 한 곳에서 뛰고 걷다보면 새로운 우발적 경험을 얻기가 힘들어진다. 시쳇말로 환경이 자신을 좀먹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보 습득의 방식도 문제다. 과체중 비만형이 오직 살빼려는 욕심에 무작정 급하게 뛰다간 탈이 난다. 준비 운동 없이 뛰어도 문제다. 이는 과욕이 지나쳐 정보에 체하고 허우 적대는 꼴이다. 그래서, 정보 습득의 유연성을 위해 각자가 지닌 온/오프 정보 링크망의 질적 점검이 필 요하다. 혹 편식이 심해 너무 한가지 '맞춤' 정보에 목을 매는 것은 아닌지, 다시 말해 달려 도 꼭 한곳만 고집하는 것은 아닌지를 봐야 한다. 조깅처럼 마음먹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현대의 정보 링크다. 질적으로 고급의 링크에 머리를 대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링크를 발굴하고 다변화하는 일도 중요하다. 링크의 편식으로 정신의 비만까지 불러 야 쓰겠는가. (아름다운 e세상, 200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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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자유로운 풍경이 우리 인터넷을 살린다

자유로운 풍경이 우리 인터넷을 살린다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얼마전 새 정부 출범에 맞춰 정통부의 대국민 캐치프레이즈 공모가 난 적이 있다. 공모 내용은 언제 어디서나 초고속 접속이 가능한 우리 인터넷의 강점을 잘 살릴 것을 주문했다. 이게 정말 딱이다 싶었던 적격이 없었던 모양인지 심사 결과 대상은 없었다. 당시 필자도 몇 자 끄적이다 보내길 포기한 것들이 있다. '자유로운 풍경이 우리 인터넷을 살린다'와 '생 긴대로 냅둬라, 우리 인터넷' 이 둘을 놓고 고심했다. 심사에 올랐다면 대상감은 고사하고 그대로 구겨질 처지였지만. 생긴대로의 자유로움이 뭘까 고민하면 최근 텍사스주 오스틴시에서 열린 한 정보문화 관 련 행사가 퍼뜩 생각난다. 무엇보다 '자유소프트웨어재단'의 리처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강연이 머리에 스친다. 내겐 정보 자유의 철학을 외치는 그의 거친 입보다는 자유스런 발에서 그 멋대로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3년전 국내에 초청되어 강연한 후 두번 째 보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무격식이다. 덥수룩한 수염, 멋대로 튀어나온 배, 벗어제낀 신발, 망가진 히피가 따로 없다. 공석에서 서양인들이 여간해선 내놓지않는 발을 시원스레 내놓고 강연 내내 서서 이를 꼼지락거리며 거친 입담을 늘어놓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 전했다. 스톨먼의 발치 밑에 있던 나를 포함해 어느 청중도 그의 발냄새가 구리다고 박차고 나가는 이가 없다. 그의 말에 주목하려들지 누구 하나 발을 문제삼지 않는다. 오히려 청중은 예정 시간보다 2시간을 더 머무르는 진지함을 보여줬다. 그의 강의에 유난히도 동성애자들이 많았던 것도 새롭다. 누군가 자기 옆에 게이가 앉았 다고 수군거리는 이는 전혀 없다. 갑자기 홍석천이 떠오른다. 인터넷 방송으로 최근 방황과 재기를 꿈꾼다는 그의 모습에서 안스러움이 느껴진다. 한 사람의 '커밍아웃'을 왕따시키는 우리 사회의 위선과 폭력에 섬뜩하다. 그저 생긴대로 봐주지 않고 기득권에서 나오는 독선 과 아집으로 모든 것을 재려는 광기가 느껴진다. 이어 다른 방에서는 문신의 수준으로 보건 대 조폭의 우두머리쯤으로 보이는 이와 젖비린내 날 정도의 어린 사람이 강연을 한다. 그들 의 외모와 지위는 여전히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자유분망한 외모가 그들의 정보업계 종 사 경력에 빛을 더한다. 과거 몇 년전부터 시작해 요즘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미 젊은이들의 하위문화의 한 형태 로 '혀찢기'(tongue splitting)란 것이 있다. 문신이나 피어싱(piercing)이야 이미 보편화됐다. 하지만 혀를 가르는 행위는 좀처럼 따라잡기 어려운 문화 현상이다. 잘못하면 언어 능력을 상실하거나 미각을 잃을 정도라니 섬뜩하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열광한다. 혀찢 기의 근원 파악이 어렵지만 뱀을 모방해 그 혀를 형상화한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거나 이 극단의 문화 현상으로 충격받은 윤리주의자들이 곧바로 법석을 피웠지만 표현의 자유를 존 중하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합법적인 시술에 의해 혀를 가른다면 인정못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스톨먼의 발만큼이나 문화 현실의 자유로움이 지켜진다. 혀찢기와 같은 신체 변형 행위를 변두리의 극단적 문화 양식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이의 인정이 현실의 풍요에 기여한 측면도 이미 존재한다. 소위 디지털 아방가르드 행위 예술에 신체 변형은 중요한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올랑(Olan)은 70년대부터 수십번의 성형수술을 재현하며 자본주의판 아름다움의 물신성을 조롱했다. 호주의 스텔락(Stelarc)은 신체 확장의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며 자신의 피부를 바늘로 뚫어 실에 의존한 공중 부양 을 시도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문화의 토양은 90년대 스텔락 자신의 팔과 다리의 신경과 근 육에 반응하는 제3의 사이보그 팔과 다리 시연으로 발전한다. 또한 사이버네틱스 연구자 영 국의 케빈 워익(Kevin Warwick)같은 이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신체 반응의 신호를 컴퓨터 에 전송하는 칩을 팔의 신경망 안으로 이식하는 실험을 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초창기 극 단의 신체 변형 문화가 디지털 아방가르드 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단서가 된 셈이다. 스톨먼을 보러온 게이 청중들, 그의 구린 발, 혀찢기 등의 신체변형 문화가 가진 공통 분 모는 지칠줄 모르는 자유로움에 있다. 이들은 천편일률의 잣대로 억누름이 없이 그저 생긴 대로 놔두면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는 습성이 있다. 새로운 디지털 문화의 발전을 개척하는 힘은 이런 막생겨먹은 개성을 잘 북돋아주는 노력에 달려있다. 반면 홍석천에 드리운 사회 의 그늘, 인터넷 누드게재 교사 징계, 동성애자 사이트 폐쇄, 인터넷 실명제 거론 등은 권위 와 통제의 살벌한 칼날들이다. 자유로움은 고사하고 인터넷의 자유로운 토양조차 가차없이 목을 친다. 네티즌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개입이 대선의 당락에 큰 영향을 준 것처럼, 진정한 자유의 역동성이 가득해야 인터넷이 무럭무럭 자란다. 그저 초고속 통신망 깔아놓고 시민들 앉을자 리 마련했다고 뚝딱 만사 해결될 것도 아니요, 국제행사 한다고 길거리 노점상들 때려잡듯 인터넷에 윤리를 세우고 질서확립 한다고 외친다해서 더더욱 될 일도 아니다. 윤리와 통제 의 규격에 설사 맞지않아 다소 삐져나오더라도 그대로 놔두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 자유 로운 환경이 결국은 인터넷 발전에 큰 밑천이 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올해 공석이 된 정통부 캐치프레이즈 공모 대상을 그래서 내맘대로 '자유로운 풍경이 우 리 인터넷을 살린다'로 정한다. 많은 돈들여 정보 복지 구현하는 것도 중요하고 밖에서 비치 는 우리의 정보 경쟁력의 규모도 중요하지만 네티즌들에게 활동과 행동의 자유로움을 온전 히 부여하는 일만큼 근본이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혼쾌히 스톨먼 식 구린 발에 취할 그 때가 오길 기대해 본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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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옛 것과 새 것의 지루박

옛 것과 새 것의 지루박 이광석 뉴미디어평론가 요즘 미국은 무선 와이파이(Wi-Fi) 인터넷 붐으로 요란하다. 공항, 공공 건물, 학교, 식당, 까페, 가정 등 할 것 없이 죄다 무선 인터넷에 몰린다. 아직은 많은 이들의 정보 접근이 차 단된 상황에서 노천까페에 앉아 은색의 노트북을 가지고 무선 인터넷을 하는 것이 신분 과 시의 문화적 표현처럼 보인다. 노트북은 물론이고 적어도 십만원은 줘야 하는 무선 카드를 구입할 정도의 여유 계층은 그리 많지 않다. 명색이 '뉴미디어'를 한다는 명분으로 뒤질세라 필자도 이에 동승해 얼마전 무선카드를 구 입했다. 까페에서 남들처럼 폼나게 인터넷을 하려는 이유보단 그저 도서관에 들어오는 무선 인터넷 인입선의 혜택을 좀 보고 싶었다. 아무래도 인터넷 포트를 찾아 헤매거나 낯선 사람 과 포트를 나눠 쓰려고 쑥스럽게 마주하기보다 어디든 자유롭게 자리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내겐 데스크탑처럼 한 곳에 고정돼 6년 정도 버틴 시커먼 노트북이 하나 딱 있다. 이 덩 치 큰 컴퓨터는 갈수록 빨라지는 하드/스프트웨어 갱신 주기를 따라잡는 것과 무관한 터다. 그 와중에 최신의 감당못할 무선카드를 산 것이다. 그러니 이 카드가 내 노트북에 경기를 일으켰던 것은 당연했다. 컴퓨터 오작동에 자료까지 모두 날리고 급기야 전체 하드 포맷까 지 해야하는 쓴맛을 봤다. 낡은 것이 새 것의 부하를 감당못했던 결과다. 한번도 못써본 그 카드는 결국 날쌔고 최신의 컴퓨터를 지닌 후배에게 선심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내 와이 파이의 꿈은 새 컴퓨터를 장만할 때까지 보류됐다. 그 일로 나는 잘난 카드에 못미치는 낡 은 내 컴퓨터를 탓했다. 새 것의 충격에 엉망이 된 컴퓨터에 난 다시 낡은 옛 운영 소프트웨어를 깔기 시작했다. 한번 맛이 간 컴퓨터는 처음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보다못해 미친 척하고 컴퓨터 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운영 프로그램의 버전을 한두 단계 정도 더 높였더니 이게 웬일인가. 오히려 내 컴퓨터에 맞는 최적의 시스템으로 거듭났다. 낡은 컴퓨터의 한계 능력에 움츠려 운영소프트웨어 갱신을 두려워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낡은 것이 새 것을 만나 더 큰 능 력을 얻었다. 낡은 컴퓨터가 이제 쓸만한 물건이 돼 몇 년 끄떡없어 보인다. 이렇게 컴퓨터와 씨름하던 중 한 충격적 소식에 마음이 쏠렸다. AOL 타임워너 그룹의 총 수였던 스테판 케이스가 주주들의 압력으로 사퇴한다는 발표였다. 불과 3년전 미디어재벌 타임워너는 신경제의 상징이던 아메리카온라인(AOL)의 디지털 혁신의 비전을 믿고 인수 제 의를 받아들였다. 당시 언론들은 구시대의 기업이 한창 주가를 올리던 AOL에 인수된 것을 마치 신경제의 승리인양 추켜세웠다. 아뿔사, 합병 당시 풍선마냥 잔뜩 거품과 바람으로 부 풀려진 신경제 기업들의 속내를 알았다면 그런 거래의 성사는 아예 없었을 것이다. 합병 후 잇따른 AOL의 사업부문 성장률 하락, 광고 수입 저조 등 기업 실적이 바닥을 치면서 주주 들의 분노를 자아낼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씁쓸하게도 재임 시절 몇 차례에 걸쳐 고가에 자신의 주식들을 거의 다 팔아치웠던 케이스의 놀라운 판단력만이 그의 성공 경영으로 남을 듯 하다. 18년전 미국 온라인 문화를 꽃피웠던 피자헛 점장 출신 케이스의 AOL 성공 신화가 그의 초라한 뒷모습에 여지없이 쭈그러든다. 인터넷 경제의 자양분을 받으려했던 타임워너에 이 제 AOL 사업부문은 전체 사업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됐다. 사업 내용 이상으로 대우받 던 온라인 기업이 시장 변화로 무너지면서 합병기업의 다른 사업 부문들까지 뒤흔들어 놓았 다. 새 것이 옛 것에 심한 과부하를 일으키는 꼴이다. 무선카드가 내 낡은 컴퓨터를 다 헤집 어놓은 것 마냥, 거품의 신경제 기업이 구기업의 몰골을 험하게 망가뜨려 놓았다. 다행히도 타임워너 사업부문의 꾸준한 선전이 AOL의 사업 실패를 보상하고 있는 듯 보 인다. 이른바 디지털 케이블사업 등 업데이트된 문화상품들로 시장 점유를 꾸준히 늘린 결 과라 한다. 환경 변화에 맞춘 자체 갱신의 노력이 돗보인다. 마치 내 낡은 컴퓨터에 궁합이 맞는 새 소프트웨어의 발견처럼 말이다. 이번 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케이스의 뒷모습이 요즘 노천카페의 분위기를 한껏 띄우 는, 아직 설익은 무선카드처럼 생경하다. 지금까지 겉보기에 세련되고 새롭다 싶던 것이 낡 은 것을 홀대하거나 이에 들어와 사방 흠집까지 내는 경우가 흔했다. 새 것에 바라는 기대 치가 클수록 이를 적용하다 당했던 고통이 컸던 듯 싶다. 자신의 수용 한계를 따져보는 지 혜도 필요하다. 신경제 몰락 이후 AOL 케이스와 무선카드로 지칭되는 새 것의 지나친 욕망이 지난 몇 년간 치이고 무너지며 많이 퇴색해왔다. 이젠 누구나 아주 세련된 새 것보다 욕심없이 존재 하는 유무형의 자산에 맞는 것들에서 선택하고 응용하려 한다. 지속적 내부 혁신과 갱신으 로 얻은 타임워너 사업 성장이나 내 낡은 컴퓨터에 새로운 소프트웨어로 새 생명을 얻은 것 이나 다들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살핀 덕에 얻은 이익이다. 새 것에 끌려다니지 않는 옛 것 도 중요하지만, 옛 것을 키우는 새 것의 발견도 공히 중요하다. 새 것에 숨은 독과 가치를 구분하는 옛 것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굳이 비유하자면, 지루박에 맞춰 옛 것은 새 것을 잡고 끌고 땡기며 부단한 스탭을 밟을 필요가 있다. 새 것에 이끌려 스탭이 엉키거나 불륜에 패가하기 전에 옛 것은 함께 움직이는 기본 4박자 스탭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내 낡은 컴퓨터가 살고 신경제의 허황된 꿈도 아예 접고 지루박도 스포츠댄스가 된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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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e세상] 아제이젤 대 와이파이

아제이젤 대 와이파이 이광석(뉴미디어평론가) 얼마전 날도 춥고 몸도 으실해 의례 만성중독으로 복용하는 타이레놀 두 알 꿀꺽 털어 입에 넣고 이불 뒤집어쓴 채 시간을 죽일 양으로 철지난 비디오를 들춰봤다. 감기를 놀래켜 내쫓는 데야 스산한 공포 영화가 제일이라 싶어 녹화해둔 비디오 테이프들 중 하나를 무심코 집어들었 다.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 덴젤 워싱턴 주연의 <다크엔젤 (원제: Fallen)>이라. 어지간해서는 영화를 절대 '리바이블' 하지않는 나쁜 습관에다가 돌아서면 쉽게 까먹는 짧은 기억력 수준을 고려할 때 한 서너해 흐른 지금의 내 머리 속에는 이 영화가 그 흔한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 로 짐작컨대 그저 조잡스런 줄거리의 헐리웃 흥행 실패작으로 가물거렸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번째 대하는 영화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다크 엔젤>은 처음 에 기억했던 것처럼 주인공이 사악한 악마와 사투하는 공포 특급 영화가 절대 아니었다. 이제 보니 '인터넷', 특히 무선 인터넷에 바치는 처절한 헌사용 영화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이 혼 미한 상태에 진통제 약기운이 돌아 사물이 빗겨 보였던 까닭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의 악역은 눈에 보이지않고 사람의 몸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아제이젤'(Azazel)이 란 무서운 악마다. 영화의 뼈만 추리자면 존 홉스(워싱턴 역) 형사가 변사체 사건들을 조사하면 서 구약에 등장하는 아제이젤이란 악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를 없애려 나서지만 오히려 자신 의 목숨을 잃을 뻔하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인간대 악마의 종교극이란 상황 설정만으로 보면 다소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아제이젤의 모습과 그 특성을 바라보면 영화 내용 은 180도 달라진다. 유대 사전을 훑어보니 원래 아제이젤은 천상에서 ㅤㅉㅗㅈ겨난 타락 천사라 한다. 예수를 유혹했던 광야의 사탄이 아제이젤이란 얘기도 있다. 이 악마는 인간세에 내려와 남자들에겐 무기를 만드 는 법과 기술과 과학을, 여자들에게는 타인을 유혹하는 화장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인류에게 천 상의 비밀을 가르쳐 인간들의 죄를 유도했던 골치덩이 타락천사였던 셈이다. 물론 영화에선 아 제이젤의 이런 특성이 표현되지 못하고 흉악한 사탄의 이미지로 줄곧 등장한다. 그렇지만 감독 호블릿은 재치가 있었다. 그는 인간들간의 '접촉'(wired)에 따라 한 신체에서 다른 신체로 옮겨 타고 다니는 '사악한 정령'(disinformation)으로 아제이젤을 그린다. 대개 영화 평론가들은 이런 아제이젤의 모습을 보고 감독이 신체적 접촉에 의한 에이즈 감염의 위험을 표현하려 했다는 뜬 금없는 해석을 내린다. 호블릿 감독은 홉스 형사의 추적을 조롱하며 하나의 신체가 쓰려져도 계속해서 옮겨 다니는 아제이젤의 공간 초월과 이동 능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영화의 절정은 홉스 형사가 아 제이젤을 죽일 수 있는 법을 깨닫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했을 때다. 홉스 형사는 신체 접촉에 의해서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아제이젤을 없애는 방법으로 깊은 산중에서 악마의 숙주를 없 애고 그 후 자신의 숨을 끊는다면 숙주를 잃은 아제이젤이 자연 소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나 름의 결론을 얻는다. 그러나, 홉스의 목숨을 내건 도박에도 불구하고 아제이젤은 근처를 거닐던 들고양이의 몸에 깃들어 유유히 사라진다. 어떻게? '접촉없이'(wireless). 홉스는 접촉없이도 아 제이젤이 대기를 타고 비행하는 능력을 지녔으리란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감독 호블릿은 아제 이젤의 와이어드적 속성을 와이어리스로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내 눈에 영화 <다크 엔젤>이 억압의 권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거대한 힘, 무 선 인터넷의 형상화로 비춰지는 이유다. 아제이젤의 초월 능력은 마치 권력의 파장(홉스 형사의 공권력)을 벗어나 인터넷을 흐르며 생성 소멸하는 역정보나 반정보의 속성과 닮아있다. 본래 아 제이젤이 인간을 꾀어 천상 기술을 전도했던 사악한 악마였던 내력도 이를 정확히 거든다. 사 악한 악의 속성을 자유로운 정보의 원천으로 보는 것이 부담스런 비유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 제이젤의 종국적 힘은 홉스 형사가 다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무너뜨릴 수 없었던 '와이어리스' 이동 기법에서 나온다. 그래서일까, 와이어리스에 집착한 호블릿 감독이 다음 작품으로 라디오 주파수 대역으로 과거와 현재의 시간성을 연결하는 <프리퀀시(Frequency)>란 영화를 만든 것 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는 맹랑한 발상이 든다. 지난 30여년을 거치면서 멀티미디어를 가능케한 디지털, 항시 접속을 도운 패킷 스위칭, 그리 고 이제 공간이동의 기동성을 가져올 와이어리스가 텔레컴 혁명을 주도할 것이란 미래학자 네 그로폰테의 전망이 전혀 낯설지 않다. 아제이젤이 천상에서 훔쳐 인간세에 퍼뜨린 비술이 다름 아닌 '와이파이'(Wi-Fi)란 무선 랜(근거리통신망) 기술로 밝혀진 것이 근 3여년전의 일이다. 와 이파이는 하이파이 오디오처럼 편하고 쉽게 쓸 수 있는 무선 기술의 대중성을 겨냥하여 개발됐 다. 그 말뜻만큼이나 와이파이는 대역폭이 미치는 지역에 컴퓨터와 랜카드만 있으면 어디서든 빠르게 인터넷에 접속하고 개인들간의 일대일 상호 연결을 가능하게 해준다. 기동성의 장점말 고도 와이파이는 인터넷 접속을 일정한 공간내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다. 기술의 민주적 성격이 성장의 촉진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제이젤이 사멸하는 듯 싶었지만 죽은 인간의 신체로부터 고양이의 몸까지 날아 이동하며 보여줬던 무선 능력은, 무선 라우터와 랜카드 하나로 주위에 큰 장애물만 없다면 일정 거리내 컴퓨터 장치들의 정보 접속을 보장하는 와이파이의 민주적 기술로 등장한다. 라우터 송출장치 로 근처의 이웃들이 함께 인터넷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이 게릴라식 공유 시스템은 오히려 아 제이젤의 힘을 기술적으로 능가하는 지도 모른다. 이 무선 와이파이 네트워크는 주거지가 밀집 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자발적으로 상업서비스가 제공하는 서비스 대 역을 확장해 이웃과 함께 공유하거나, 보다 의식적으로는 이를 마을이나 지역 사회로 확대하는 경향도 늘고 있다. 경제적 차이로 발생하는 정보 접근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한 방식으로 와 이파이 네트워크의 공유가 적극 모색되기도 한다. 결국 홑이불 속에서 감기몸살로 발발 떨던 내게 호블릿이 그린 아제이젤의 승리는 마치 와이 파이에 불어오는 희망의 메시지처럼 머리를 개운하게 만든다. 주파수 권력의 공백 지대인 2.4/5 기가 헤르쯔의 새로운 대역에 자리 튼 와이파이가 아제이젤의 사악한 천성은 전적으로 접고 가 공할 정보 이동 능력만 섭렵해 장차 인터넷의 개방성을 한층 넓히는 기술로 자리잡길 새해 소 망으로 빌어 본다. (아름다운 e세상, 200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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