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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 미래 기술의 필살기 - 인터페이스의 기술, 청소년 문화, 모바일 기동성에 달려

2009년 1월호





미래 기술의 필살기 - 인터페이스의 기술, 청소년 문화, 모바일 기동성에 달려


이광석


지나간 흔적에 대해 꼼꼼하게 관찰하지 않고, 다짜고짜 미래를 가늠한다는 것은 가히 점집에서나 일어날 일이다. 새해 토종비결을 보듯 미래 기술의 향배를 살필 순 없는 노릇이다. 운의 영역에 머무는 사주나 토종비결과 달리, 경제와 사회의 영역은 이미 지나갔던 과거의 흔적들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한다. 
필자는 올해 첫 호 지면을 통해 앞으로 창창할 디지털 기술의 영역을 짚어보려 한다. 이미 지난 한 해 열두 꼭지에 걸쳐 디지털 기술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이를 근거로 필자가 주목하는 영역은 다음과 같다. 인터페이스의 기술, 청소년 문화, 그리고 모바일 기동성. 점집 용어로 말하자면 셋을 살리면 대박이요, 억누르면 쪽박이다. 


인터페이스 기술에 문화가 바뀐다

인터페이스 기술과 관련해선 이미 휴대폰의 진화를 통해 언급한 적이 있다. 키패드에서 터치스크린형으로의 기술 전개는 새로운 인터페이스의 진화를 알리는 서곡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는 단순히 이제까지 키패드에 기댄 엄지족들의 멸종을 알리는 것만이 아니다. 새로운 터치스크린형은 디지털 문화 혹은 모바일 문화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다. ‘위젯’(Widgets)으로 알려진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이 개발돼 끊임없이 휴대폰에 들러붙으면서 시장에 수많은 벤처들이 들고 날 것이다. 시장은 문화와 상호 조응한다. 이에 따라 휴대폰을 쓰는 유저는 걸으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연결하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탄생할지도 모른다. 올 4월에 개방형 체제인 아이폰과 구글폰 등이 밀려와 국내의 터치폰들에 합세하면, 명실공히 ‘위젯족’이 등장하는 날이 머지않을 것이다.

인 터페이스의 응용은 게임에서도 돋보인다. 닌텐도 위(Wii)게임은 유저와 게임 간 인터페이스를 뒤바꾼다. 전통적으로 게임기 조이스틱의 의미가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른 디지털 캐릭터의 반응을 주는 데 있었다면, 이제는 팔과 몸의 움직임에 캐릭터가 반응하는 것으로 발달한다. 캐릭터들의 보다 완벽한 운동의 실제감을 주는 방식으로 인터페이스가 개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이용자 그래픽 환경에만 신경을 써왔던 소니나 마이크로소프트를 떠올리면 닌텐도의 감각은 크게 앞서있다. 또한 위를 이용한 건강 체형 유지, 위 캐릭터로 만드는 아바타 등은 닌텐도 위를 사실상 대중 문화의 위치로 등극시킨다. UCC 동영상에는 닌텐도 위로 만든 수많은 위 아바타들이 등장해, 위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필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했던, 기술과 문화와의 교배 혹은 잡종이 시장 지배력의 관건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청소년 문화를 잘 살펴라

기술과 문화의 교배 혹은 잡종이 성공하기 위해 가장 소구력있는 집단은 역시 청소년층이다. 닌텐도 위와 휴대폰 문화를 좌우하는 층도 역시 청소년이다. 기발하고 재기발랄한 감성을 지닌 청소년은 디지털 정보의 자유로운 특성과 많이 닮아있다. 패러디, 답글, UCC 문화, 블로깅, 인터넷폐인 문화, 새로운 디지털 문화의 형성 가운데에 청소년이 존재한다. 중독의 부작용도 존재하나, 기술에 대한 감수성을 지니고 맨 앞 전위에 서 있는 그룹 역시 그들이다. 기업들의 사활은 이들에 대한 파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저작권과 관련해 지적한 것처럼, 단순히 이들의 파일교환 행위들을 불법화하는 것보다 이들의 문화를 먼저 파악하고 그에 맞춰 반응할 필요가 있다. 누리꾼 문화를 보라. 제약으로부터 멀수록 창작 과잉과 풍부한 상상력이 발휘된다. 미래 문화산업의 관건은 이들의 정보 이용 패턴을  살피는 융통성과 상식에 근거한 저작권 행사에 달려 있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스탠포드 법대 레식 교수는 현대의 디지털 문화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RO (Read Only) 문화’요, 다른 하나는 ‘RW (Read & Write) 문화’다. 말그대로 ‘RO’는 ‘읽기전용 문화’요, RW는 ‘변용가능 문화’다. 물론 그는 후자로부터 창작이 꽃을 피운다고 본다. ‘RW’를 보듬어 안아야 시장의 미래가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RW’문화의 핵심에 청소년층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단순히 강압의 논리로 시장의 룰을 세우기보단, 청소년들의 ‘RW문화’가 어찌 변해나가는지에 대한 추이를 살피는 노력이 선행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애플사의 아이튠이 미국 최대의 음악서비스 제공업자가 된 바탕에는, 그들 스스로 젊은 층의 ‘RW 문화’를 간파하고 이들의 문화를 시장의 영역으로 끌고 왔다는 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미래 디지털 시장의 성패는 이들 문화에 대한 이해로부터 가능하다.    


모바일 기동성은 미래 기술의 근간이다

마지막으로 모바일 기동성이다. 넷북, PMP,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휴대폰 등 매체의 시연은 안방을 넘어섰다. 한때 전화도 붙박이였고, 아직 텔레비전만 해도 가족들이 저녁시간을 함께 보내는 매체 수단으로 남아있다. 이제 가족의 여가 시간은 밖에서 보다 많이 소비된다. 그러다 보니 시간에 쫓기는 직장인들과 맞벌이들에게는,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고 아는 이들과 소통하며 나름대로 혼자 거리에서 오락을 즐길 수 있는 모바일 장비들이 필수품으로 등장한다. 어디서든 휴대폰 장비를 이용해 버스 안에서 DMB방송을 보거나, 모르는 길을 내비게이션으로 찾고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휴대폰이나 넷북으로 근처 와이브로나 모바일 인터넷을 이용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하게 된다. RFID와 같은 위치추적용 칩은, 기동성을 잘 살린 기술로 상대의 위치를 찾아주는 데 효과적이다. 심각한 프라이버시 문제를 지니지만, 아동이나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장치로는 적격이다. 이렇듯 ‘움직이는 중’에 소통하는 개인 디지털 장비의 세상이다. 미래 개인 미디어 시장은 움직이는 중에 주파수를 잘 잡아내고 유저들이 원하는 정보를 잘 처리하는 장비에 손이 갈 것임이 분명하다. 걸어가는 중에 문자는 물론, 이메일을 보내고 인터넷 검색하고 음악을 듣고 파워포인트로 발제를 준비하며 하루 일정을 점검하고 날씨를 확인하고 뉴스 브리핑 서비스를 받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다. 이미 아이폰은 작은 기기 하나로 이 모든 것을 구현하고 있다. 

이제까지 지적한 인터페이스, 청소년 문화, 그리고 모바일 기동성은 미래 기술의 필살기다. 이 셋은 적어도 디지털 소비형 기술과 관련해 업계에서 가장 민감하게 신경을 써야 될 부분이요, 성장 영역이다. 이 중의 어느 하나라도 개발될 기술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쉽게 스러질 것이요, 이 셋을 적절히 배합한다면 운수대통의 ‘명’을 지닐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 방식은 청소년들의 섬세함을 배려하면서, 모바일 기동성으로 말미암은 위험성을 고려해 이뤄져야 함은 기본이다. 전자는 ‘RW문화’의 폭넓은 적용으로 구현돼야 할 부분이고, 후자는 프라이버시 보호의 원칙이 기술 디자인에 반영돼야 함을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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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12 디지털 콘텐츠 저작권의 대안적 라이선스 모델이 뜬다

2008년 12월호

이광석 



연 초에 필자가 연재를 시작하면서 누누이 강조했던 것은, 한 사회의 기술은 문화와의 접점 속에서 발전하며 이를 배제하곤 어떤 기술도 시장에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은 종종 무시된다. 개인 파일교환(P2P)의 초기 형태였던, 냅스터나 소리바다 시절에만 해도 이용자들은 불법의 악성 유저들에다 음반 매출 하락의 원인제공자로 도매금됐다. 당시 업계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유저 문화에 반응한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저가의 제한없는 MP3 다운로드 서비스를 벌이고 있지만, 당시에 음반업계는 유저들을 범죄자로 모는 데 급급했다. 유저들의 변화하는 정서를 읽는데 그 반응이 늦은 사례다. 이는 구태의연한 저작권의 잣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디지털 정보 이용의 방식과 태도에 대한 앞선 통찰이 필요함을 말한다.

디지털이 물질 재화의 논리와 다르다는 점은 이젠 상식이다. 무한히 복제할 수 있고 한 번 퍼지면 제어 불가능하고 타인의 이용이 자신의 이용을 전혀 거스르지 않는다는 점은 정보재의 특성 중 기본 사항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과거 물질재의 논리로 정보재에 재산권을 행사하려 함은 이치에 닿지 않는 해괴한 일이다. 저작권에는 보호기간이 있고 보호 범위가 있고 그것의 제한 항목이 존재한다. 물질재처럼 영구적인 사적 점유와 다르게, 한시적 법의 규약을 통해 창작자의 권리를 보장한다. 물론 그 기간이 만료된 저작물들은 공적 영역에 들어가 제2, 제3의 창작자에게 자유롭게 유통될 운명에 처한다. 인류의 지적 자원으로부터 창작자의 저작물이 혜택과 영감을 얻듯, 받은 영감을 다시 인류에 되돌려 주는 것이 저작권의 직무다.

현실은 다르다. 저작권이라는 저자의 최소 보상권리는 인류에 공헌할 지식의 저장고로써 기능함을 원칙으로 놓아야 하지만, 지나치게 사적 재산권 행사의 장이 되고 있다. 저작권을 제한한다고 마련한 ‘공정한 이용’ 혹은 ‘저작권의 제한’도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이처럼 현실 제도와 법이 변화된 디지털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선 대안적 라이선스 모델인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CCL)를 내놓았다. 국내에도 법학자들의 소개로 이 CCL이 보급되고 있고, 국내 자체로 개발된 ‘정보공유 라이선스 2.0’도  이와 비슷한 취지로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다. CCL이나 국내의 정보공유 라이선스는 정보와 미디어 콘텐츠의 무리한 사유화와 불공정의 관행에 제동을 걸기 위한 또 다른 공정 시장 기제라 보면 된다. 이는 제3의 창작자에게 저작물의 변경과 사적 이용의 자유를 크게 신장시킨다. 요새와 같은 다양성과 창작 과잉의 시대에 걸맞는, 저작물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 모델인 셈이다.

무엇보다 인터넷 유저에 의해 수도 없이 만들어지는 UCC,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통해서 생산되는 유저들의 글과 이미지에 주목해야 한다. 이에 대한 마땅한 권리보호 기제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유저들의 UCC 등에 포털업체가 그 저작 권리를 내세우는 형국이 되선 곤란하다. 사실상 CCL 등을 통해 유저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 이용의 공적인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미래의 문화 풍요와 직결된다. 기술을 사용하는 유저들의 패턴 변화를 읽고 그 흐름을 따르는 자가 바로 시장의 고수가 됨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현행 저작권도 그 길을 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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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11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디지털 리더 기술

2008년 11월호


이광석


한때 종이책과 신문이 역사와 함께 사라질 것이란 예언이 있었다. 한창 디지털기술이 사회 곳곳에 영향을 주면서 그에 열광하던 시절에 나돌던 얘기다. 허나 여전히 종이로 만들어진 책은 잘 팔리고, 종이신문은 아직 그럭저럭 판매부수를 유지한다.   

미래 첨단 기술을 엿볼 수 있었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우린 미래 신문의 모습을 맛볼 수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직장인이 읽고 있던 전자 리더형 신문은 아직도 눈앞에 삼삼하다. 직장인이 보던 전자신문이 그날 톱뉴스를 업데이트하면서, 쫓기던 톰 크루즈의 얼굴과 관련 기사가 그 신문의 화면 위로 포개지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최근에는 미국 대선 후보들의 책들이 인쇄본 없이 전자책으로만 출판되는 경향도 있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전자책을 구입해 보고 필요한 부분은 각자 알아서 인쇄해보라는 얘기다. 인쇄된 책의 옵션으로만 머물렀던 전자책이, 이젠 인쇄본 없이도 존재한다. 독자가 누리는 손끝에 감기는 종이의 질감을 디지털 기술이 발전해도 대체하지 못하지만, 점점 더 인쇄본보단 전자 문서의 상태로 글을 읽는 빈도 또한 느는 것도 사실이다.

전자책을 읽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 필요하다. 그것이 전자책 리더기의 몫이다. 종이책을 대체하는 읽기전용 리더기가 주춤하다, 최근 여러 기업들에서 앞다퉈 신모델들을 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렉스 기술 (iRex Technologies)의 디지털 리더기와 플라스틱 로직(The Plastic Logic)의 e-리더기 등이 현재 전자 신문 리더기 시장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복사용지 크기에 휨이 강한, 아주 얇은 크기의 이 리더기들은 보통 1기가 바이트의 메모리 카드에 2만여 장의 신문 내용을 축적할 수 있다. 게다가 다양한 형식의 미디어 확장자 모드(html, pdf, 혹은 파워포인트 형식)를 지원한다.

현재 전자 리더기 기술의 향배는 디스플레이 기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잉크사(E Ink)가 현재 그 부분에서 앞서나가고 있으며, 소니사의 ‘이리더’(eReader), 아마존닷컴의 ‘킨들’(Kindle)과 같은 전자북 리더기에 이 기술이 쓰이고 있다. 전자잉크의 기술은 흑백의 정확한 문체를 기본으로 하는 전자 식자 디자인이다. 아직까지 이러한 전자신문과 전자북을 위한 리더기들은 가격이 싸지 않다. 게다가 대체재적 성격을 지닌 일반 미니 노트북과 각종 휴대용 통신기기의 출시로, 리더기들의 기술적 특성이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전자신문 리더기가 살려면 지금보다 가볍고 유연하게 구겨서 주머니나 가방에 넣을 수 있는 모델들이 나와야 할 것이다. 물론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온 것같은 실시간 뉴스 업데이트가 가능한 무선 지원도 필수 사항이다.

전 자북 리더기도 사실상 새로운 논리가 필요하다. 특히 아동용 서적의 전자화는 다른 서적보다 빠르게 진척돼야 할 부분이다. 터치스크린으로 상호작용하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 설명을 눌러 찾고, 컬러판의 시원한 삽화 이미지들이 움직이고, 쉽고 부담없이 보고 구입할 수 있는 아동용 전자북과 그에 발맞춘 리더기가 개발될 필요가 있다. 전자북 리더기가 살 길은 종이책이 갖고 있는 질감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진 기술적 장점을 극대화하는 길이다. 아직까지 리더기가 GPS 내비게이션과 같은 액세서리만큼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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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10

2008년 10월호

이광석 


얼 마 전 구글이 자신의 웹 브라우저인 크롬(Chrome) 시험판을 공식 배포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의 브라우저 시장 독점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브라우저의 기능이 기본적으로 정보 검색을 통해 원하는 곳에 당도하는 길잡이라 본다면, 인터넷에서 우리의 갈 길을 결정하는 검색 구글의 브라우저 시장 진출은 이미 내정된 일인지도 모른다. 이는 또 다른 웹브라우저인 파이어폭스가 일부 인터넷 유저의 인기를 꾸준히 얻으며 MS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찰나에 벌어진 일이다.
전통적 산업 부문과 달리 새로운 기술 영역은 아직도 시장 경쟁의 기회가 존재한다. 현재 전 세계 웹브라우저 시장에서 MS가 아직 7할이 조금 넘는 선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있다. 그러나 파이어폭스가 서서히 MS의 시장 지배력을 갉아먹고, 맥 유저는 꾸준히 매킨토시 전용의 프로그램 사파리를 쓰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구글의 크롬이 웹브라우저 시장 경쟁에 합세한 것이다.

90년대 초 월드와이드웹(WWW)이라는 그래픽 인터페이스 사용자(GUI) 환경은 인터넷을 대중화시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웹을 검색하는 데 모자이크라는 브라우저가 처음 상용화되고, 그 후속판으로 넷스케이프사의 네비게이터가 만들어지면서 인터넷 ‘서핑’의 개념이 생기고 그 이용자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초창기만 해도 웹브라우저 시장은 넷스케이프의 네비게이터가 지배적이었다. 허나 MS가 윈도 시스템의 독점을 이용해 자사의 익스플로러를 자동 설치하게 만듦으로써, 브라우저 시장에서 넷스케이프를 영영 퇴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MS에 멍들고 쓰러진 넷스케이프는 가만히 자멸하진 않았다. 자신의 소스 코드를 일반 유저에게 공개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소스 코드들은 유저들 스스로 버그를 찾고 지속적으로 개발돼 파이어폭스를 낳았다. 넷스케이프의 화려한 재기인 셈이다.

그럼에도 전 세계 브라우저 시장의 진화는 한국 사회의 모습과는 다른 이방의 것으로 비춰진다. 유저의 99%가 MS 브라우저, 익스플로러에 매달려 있는 대한민국은 전 세계 웹브라우저 기술의 진화와 무관하다는 얘기다. 관공서, 정부기관, 은행 등 어지간한 웹페이지는 소위 익스플로러에 ‘최적화’돼 있다. 사실상 ‘최적화’는 다양한 브라우저들이 막힘없이 가능할 때 그 의미가 제대로 살아난다. 우리의 ‘최적화’는 하나의 다국적기업에 길들여진 불구화된 모습이다. 유저들이 다른 브라우저를 써본들 불편하고 제대로 화면을 보여주지 못해 답답하니 익스플로러로 다시 되돌리기 일쑤다.

외국에 몇 년 이상 체류한 덕으로 필자는 파이어폭스를 한동안 잘 애용했다. 미국 내 대학들의 도서관, 공공기관, 기업 사이트 모두는 앞서 언급한 모든 브라우저에서 웹페이지를 여는 데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요즘 유저는 파이어폭스를 더 선호하는 추세다. 정체불명의 MS 최적화는 외국인들이 국내 사이트를 찾을 때에도 그 발길을 돌리게 만든다. 오죽했으면 필자가 국내 귀국 이후로 파이어폭스 쓰기를 포기했겠는가. 브라우저의 선택은 유저의 몫이어야 하고, 이는 앞으로 출시될 크롬과 같은 새로운 세대의 브라우저를 껴안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개선될 사항이다. 향후 어쩔 수 없이 국내의 ‘최적화’를 다시 모든 브라우저에 맞게 범용화해야 하는 때가 닥치면, 그 손실과 비용은 더욱 커질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국내 정부기관들에서부터 그 ‘최적화’논리를 접고, 브라우저의 ‘범용화’를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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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09 휴대폰 인터페이스의 진화, 키패드에서 터치스크린으로

2008년 9월호 이광석 



휴 대하며 통화하는 통신의 기능을 벗어나 휴대폰은 다양한 기술을 흡수하고 통합하는 추세다. 지난호에 휴대폰 진화의 대강을 살펴보았던 것처럼, 기술 진화의 끝을 가늠키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휴대폰에 있어 컨버전스(기술 융합)라 하면, 카메라 기능, 음성 녹음, 오디오 재생, 비디오 녹화, 게임기, 텔레비전 시청, 개인 휴대용 단말기(PDA) 등 한때 따로 존재하던 기술과 기능이 기존의 통화 기능에 합해지고 첨가되는 상황을 지칭한다. 휴대폰 하나에, 흩어지고 분산됐던 기능들이 합쳐지고 작아지면서 그 기술이 향상되는 속도와 방향은 실제 짐작조차 힘들다.

휴대폰 기술 가운데 유저와 기기 간의 친화력을 돕는 인터페이스의 진화에도 끝이 없다. 유선전화의 시대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돌리는 다이얼은 한 번 실수에 다시 이를 돌리는 수고를 감내하면서 살아야 했다. 동네 공중전화와 가정용 전화가 서서히 다이얼에서 키패드로 대체되면서, 이는 현재까지 가장 흔히 쓰고 편리한 인터페이스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무선 휴대폰은 유선전화의 키패드 방식을 그대로 자신의 유산으로 받아들였다. 블랙베리 휴대폰은 누르는 확장 키패드와 이메일 기능으로 그 전성기를 누렸던 사례다.

휴대폰의 키패드는 엄지 손가락의 질감을 통해 원하는 키를 잡아내는 정확성을 부여해, 단숨에 문자를 찍어 보내는 데 수월하다. 하지만 키패드는 최근 각광받는 터치스크린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키패드 확장의 가능성을 따라잡진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출시된 아이폰 2.0과 국내에서 생산된 휴대폰의 터치스크린에는 다양한 국제어 확장 기능을 유저 입맛에 따라 선택할 수 있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순간 기능 이동이 원활한 장점이 있다. 누르는 키패드에서 손끝으로 펼치는 터치스크린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를 맞는 휴대폰 인터페이스 진화로 봐야 한다. 키패드는 명령 구조가 연결돼 있어서 원하는 곳을 찾아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터치스크린은 넘나듦이 자유롭다. 예컨대, 터치스크린은 화면이동과 스크롤링을 화살표 키로 움직이기보단 단순히 손끝을 위아래로 끌어올리고 내리는 것만으로 쉽게 가능하다. 화면의 줌인과 줌아웃이 엄지와 검지를 원하는 곳에 대고 오므리고 벌리는 것만으로 자유자재로 이뤄진다. 자동차에 탑재된 위치정보시스템(GPS)이나 더블클릭 명령을 이용한 구글 지도에도 이와 같은 기능을 도입한 지 오래다. 휴대폰 스크린의 한 곳에 화면을 잡아끌고 당기고 밀어내고 하면서, 멀티 화면 검색도 가능하다. 이도 키패드 화면에서 불가능한 것들이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서 바로 이메일을 보내는 것도 터치스크린만의 장점이다. 물론 키패드에 비해 정확도가 떨어진다. 자판 에러 발생률이 30~40%에 이르는 것을 보면 터치스크린도 한계가 있긴 하다.

최근 일본에선 동공의 움직임에 따라 스크린의 화면이 반응하는 휴대폰 인터페이스를 개발 중이라고 한다. 손가락이나 펜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단계에서 시선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진화의 단계까지 온 것이다. 무엇보다 키패드에서 터치스크린의 진화는 인터넷의 하이퍼링크만큼 유저에게 작은 기기를 통해 정보를 검색하는 자유로운 넘나듦을 선사해주고 있다. 기술적으로 아날로그 폰의 시대를 훨씬 지났지만, 그 인터페이스에서 있어선 이제서야 디지털 시대의 서막을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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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08 와이파이, 와이맥스, 그리고 와이브로 - 사라져가는 공유 정신

2008년 8월호 이광석


한 국에 종종 들르면 인터넷을 쓸 데가 마땅치 않아 전에 다니던 대학의 캠퍼스를 찾곤 한다. 한국이라는 인터넷 초강국에서 학생들은 10년 전 내가 미국 유학을 가기 전과 다름없이 아직도 랜선을 연결해 컴퓨터를 쓰는 모습이 더 흔하다. 무선인터넷을 쓸라치면 어김없이 KT의 네스팟 유료 서비스 화면이 뜨기 일쑤다. 한국의 초고속망을 부러워하는 미국에서도 캠퍼스 어디서든 무선인터넷에 연결된다. 물론 이 경우 학생 신분일 경우만 가능하다. 드넓은 잔디 위나 어느 후미진 벤치에 앉아서도 인터넷에 접속된다. 캠퍼스 길바닥에서 인터넷으로 피자를 주문한 적도 있다. 카페, 음식점, 커피숍, 술집, 공원에서 누구든 무료 인터넷이 가능하다. 그리고 보면 어디서든 차별없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가능성은 기술 능력이기보단 사회적 포용성의 차이인 듯하다. 

작년 에 싱가포르를 다녀왔다.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는 방문객 자격으로 그럭저럭 인터넷을 쓸 수 있었지만, 호텔에선 비싼 요금으로 서비스를 제공했다. 커피숍 어디라도 가면 무료로 인터넷을 쓰겠다싶어 돌아다녔지만 어디나 유료 서비스만 즐비했다. 한국보다 상황이 나아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국내 몇몇 커피숍에서는 자체 와이파이(Wi-Fi) 인터넷을 무료로 제공하는 곳이 눈에 띄었다.
미 국 호텔방에서 인터넷을 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체크인 로비 공간에선 무료로 와이파이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도 일종의 서비스 차원에서 이뤄진다. 필자가 사는 집에도 와이파이 라우터가 있다. 일반 케이블회사로부터 인터넷 서비스를 받으면서 자체 무선 라우터를 사서 장착해 무선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가정들은 이런 식으로 와이파이 네트워크를 활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옆집과 자신의 와이파이 대역을 함께 나눠 쓰기도 한다.

와이파이는 철저히 공유의 철학에 기반한다. 무선랜 카드와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서든 차별없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고 주파수만 잡히면 서로들 나눠쓴다. 하지만 기업들이 이 틈을 그냥 놔두질 않는다. 좀더 고품질로 기업들이 이 분야에 진출하고, 최근에는 와이맥스(WiMAX)라는 기술이 와이파이를 보완해 나옴으로써 시민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와이파이의 미래가 불투명해 보인다. 와이파이의 전파가 고작해야 50m에서 200m 정도 미치는 데 반해 와이맥스는 도심에서 1, 2km, 장애물이 없는 경우에는 45km까지 미친다 한다. 게다가 한 번 전송량도 와이맥스가 두 배 정도 빠르다. 국내에선 모바일 와이맥스, 즉 노트북, 휴대폰, PDA 등 이동형 단말기를 통해 달리는 중에도 인터넷에 접속하는 ‘와이브로’ 기술까지 개발했다.    

미국에선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오스틴 등이 와이파이의 천국으로 꼽힌다. 이 도시들이 천국인 이유는 시민단체들과 시당국이 무료로 시민들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핫스팟(와이파이 안테나 반경이 미치는 구역)을 계속해서 구축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도 그렇지만 국내에서도 좀더 확대된 반경과 품질로 무선인터넷 시장이 언제든 통신기업들에 의해 평정될 날이 올 것이다. 와이맥스나 와이브로가 그리 반겨지지 않는 까닭이다. 와이브로가 한국의 정보통신업계에 새로운 ‘먹거리’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시민들을 위한 와이파이의 자유정신이 사라질까 두려운 것도 같은 이유다. 세련되고 쉽게 연결되고 쾌속의 상업서비스에 몰표를 던질 것인가, 아니면 느리지만 누구나 무임승차할 수 있는 무선 서비스를 살리면서 갈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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