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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정보문화진흥원의 정보화로 가는 길, 아름다운 e세상, 그리고 따뜻한 디지털 세상으로 불리는 월간지에 2년간 기고했던 글들

[따뜻한 디지털세상] 08. 07 휴대폰의 끝없는 진화, 어디로?

2008년 7월호

 

이광석




언젠가 필자의 지도교수의 방에서 무전기만한 휴대폰을 본 적이 있다.
거의 골동품 수준의 이것이 1983년 최초 상용화된 모토롤라의 다이나택(DynaTAC) 8000X 모델임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보니 그건 통신정책 전공자인 지도교수만의 유물이었던 셈이다.
거 의 동시에 나온 휴대폰 모델인 노키아 모비라는 라디오 크기에 무게의 압박으로 휴대가 거의 불가능해 자동차 전용으로 출시된 모델이다. 휴대폰을 휴대하기 버거운 시절이었다. 80년대 말 대학 시절에 속칭 삐삐(페이저)를 허리에 차고 다니던 것까지 생각하면, 오늘날의 휴대폰 변화는 거의 혁명에 가깝다.

몇 년 전 네덜란드에서 학생들이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두 손을 핸들에 의지한 채, 작은 키패드를 두드려대며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참으로 격세지감이요, 문화의 차이다. 휴대폰은 통화방식을 바꾸고 문화까지도 바꿨다. 휴대폰으로 대통령을 뽑고, 노동자를 위치추적하고, 은행결제를 하고, 문자메시지, 이메일, 동영상을 보내고, 뉴스를 받아보고, 집회에 사람을 모으고, 텔레비전, 음악, 사진, 게임을 즐기는 세상에 이르렀다. 통신수단의 범위를 넘어 새로운 패션 스타일을 창출하는 도구로도 어필한다. 명품의 브랜드를 걸치면서 과시용으로 팔리기도 한다. 휴대폰이 단지 통신수단의 범위를 넘어 다양한 기능들이 덧붙여지고 콘텐츠가 개발되면서 기업들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돼 가고 있다. 이미 휴대폰은 붙박이 전화통의 숫자를 추월한 지 오래다. 동네사람들이 이장댁의 전화를 빌려쓰던 시대를 불과 사,오십 년 지났을 뿐이다. 이젠 거의 수개월에 한 번씩 새로운 모델들이 쏟아져나오고, 그 디자인과 기능도 세련되고 전체 크기와 무게도 점차 경박단소화한다. 휴대폰의 역사에서 큰 획은 1996년에 모토롤라 스타택(StarTAC)일 것이다. 플립형으로 개발된 이 전화기는 이전까지 디자인을 소홀히 했던 업계의 관심을 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2002년 블랙베리폰은 이메일 기술과 엄지 키보드로 휴대폰의 기능을 크게 확대했다. 그리고 2007년 애플사의 아이폰은 터치스크린을 기본 입력방식으로 선택하고, 매킨토시 운영시스템을 차용해 그 기능성을 늘리고 있다. 게다가 애플이 막아 놓은 애플리케이션 제한을 불법 ‘탈옥(jailbreaking)’해 쓰면, 그 기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조만간 아이폰2.0이 3세대 모바일 기술을 탑재하고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로 진출한다 하니 그도 볼만하다. 이것이 오늘날 휴대폰의 진화 상황이다.

휴대폰 기술이 어디로 갈 것인지, 그 기능이 다른 기술들과 어떻게 상호 소통할지는 가늠하기 힘들다. 가속이 더욱 붙을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그 속에 채워질 콘텐츠다. 언제, 어디서든 휴대하고 생활의 중심이 돼 가는 휴대폰은 현대인에게 텔레비전 이상의 위력을 지닌다. 지난해 한국은행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인의 통신비 사용 지출액이 몇 배를 초과하고 있다고 한다. 기기 구입비가 주는 부담이 크다 하나, 향후 콘텐츠 이용에 따르는 부담 또한 상당할 것이다. 게다가 휴대폰의 콘텐츠 논리가 상업적 방식으로만 굴러간다면, 공익 개념은 앞으로 아예 실종된다. 인터넷처럼 시민이 개입해 콘텐츠를 개발하고 응용해 무료로 교환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야 한다. 휴대폰 기술의 미래는 밝다. 그 응용 가능성도 무한하다. 허나 내용이 부실하고 이를 이용하는 이들의 아이디어가 반영되지 못할 때, 그 기술은 반쪽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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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06 지도 위에 펼쳐지는 인간의 생활상

<2008년 6월호>       이광석


 



필 자는 몇 년 간 지리정보시스템(GIS)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일반 통계 분석 소프트웨어가 이미 많이  개발돼 쓰이고 있지만, 평소 지도를 통해 사람들의 생활상을 실감나게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던 터였다. 단순히 숫자를 나열하는 것보단, 정확한 지리정보를 그래픽을 통해 보여준다면 그 이상 설득력이 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필자가 처음으로 시도했던 기획은, 텍사스 오스틴 도시에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던 공공 ‘무선인터넷’ (Wi-Fi)의 위치와 도시 내 인구통계학적 변수 간의 관계를 지도 위에 포개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그때 사용했던 것이 ‘아크뷰’(ArcView)라는 프로그램이다. 디지털사회에서 지리정보는 각종 정보 서비스에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인터넷 지도검색, 도로상황 실시간 시스템, 휴대폰의 친구찾기 서비스, 지리위치정보시스템(GPS) 등 현대인이 살면서 원하는 곳을 살피는 데 그 유용성이 탁월하다.

단순한 물리적 지형도를 넘어서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과 인간이 맺는 정보의 흐름을 보여주고자 했던 최초 시도는 19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19년 프랑스의 삐에르 듀팽은 문맹률의 지리적 분포와 집중을 보여주기 위해 그 지역 격차를 흑백 농도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표시한 적이 있다. 일종의 ‘카르토그램’(Cartogram)을 도입한 셈이다. 1855년 존 스노우가, 영국 내 콜레라 위치와 그 확산 경로를 지도 위에 점으로 표기해 그 돌림병의 근원지를 막는 데 공헌했다. 

이후 지리정보의 컴퓨터화는 1960년대 중반까지 하버드 컴퓨터 그래픽 시험실 등 지리정보 연구의 산실인 교육기관이나 공공기관의 몫이었다. 허나 1969년을 기점으로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잭과 로라 덴저몬트가 단돈 천백 달러로 환경과학연구소(ESRI)를 세워 지리정보 프로그램 개발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이름 없던 회사가 이젠 전 세계 지리정보 프로그램 매출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독점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필자가 썼던 아크뷰도 바로 ESRI가 개발한 프로그램이다. ESRI는 1992년에 그래픽 사용환경의 아크뷰 1.0 데스크톱 버전을 출시하면서 국내와 전 세계 지리정보 소프트웨어 시장을 석권한다. 아크뷰는 현재 9.X버전까지 출시됐는데, 각종 지리 분석도구들까지 연동되는 그래픽 토털 지리정보 시스템으로 확대되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의 그 지배력은 물론이고, 지리학도들이 공간지리 분석 프로그램을 쓴다하면 대부분 이 ESRI 제품군의 아크뷰를 익힌다고 보면 된다. 

지리정보가 인구통계 수치와 연동이 되면, 지리적 불평등의 문제, 지역 간 상호 연관 관계의 관찰, 질병과 물류, 교통, 네트워크 정보의 흐름 등을 파악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은 지리정보의 세밀화와 보다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 허나 ESRI가 독점력을 이용해 보급판 아크뷰의 가격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올려놓아 일반인의 접근성을 막고 있는 현실이라, 당장 질 좋은 공개소스용 프로그램들의 개발이 아쉬운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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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05 구글, 인간 의식의 독점꾼 혹은 무한한 정보의 친절한 길잡이?

2008년 5월호

이광석 


필자는 5년 전에 한국의 모 일간신문에 구글의 정보검색 독점을 경고한 적이 있다. ‘구글레오폴리’(Google-opoly)란 신조어를 인용해 당시 구글경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글을 썼다. 구글과 모노폴리(독점)를 합쳐 만든 이 개념은, 구글의 시장독점 논리를 경계하는데 적절한 표현이었다.

재작년 여름에 옥스퍼드 대학의 인터넷연구소(OII)에서 런던 정경대(LSE)에 다니는 엘리자벳 쿠버링이란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박사논문으로 구글의 검색 독점화에 대한 정치경제 분석을 한다고 했다. 구글은 필자나 엘리자벳과 같은 이들에겐 장차 신경제를 지배할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겐 성장의 상징으로 읽힌다.

익사이트, 알타비스타, 라이코스, 인포시크, 마젤란, 웹크롤러. 이젠 사라진 검색엔진들의 이름이다. 인터넷 초창기엔 이들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구글은 이 모든 서치엔진을 빠른 시간 내에 평정했다. 1998년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두 학생이 만든 검색 사이트가 불과 몇 년 만에 검색 시장을 석권했고, 이젠 그 사업 반경을 끝없이 넓히고 있다. 구글이란 이름이 ‘구골’(googol)이란 일종의 무한대의 숫자 개념에서 생겨났듯, 구글은 인간이 참고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길을 안내하는 미래 길잡이가 되기를 자처한다. 구글이 지배하는 신경제에선 구글 검색 순위의 꼭대기에 올라야 생존할 수 있다. 세뇌라도 해서 항상 기억에 남길 원하는 수많은 기업들에겐 구글의 검색 로봇은 사활을 책임진 신의 존재가 된다. 구글은 기본 검색기능에서 출발해, 이용자의 특정 물건의 이미지와 가격 정보를 서로 다른 자원으로부터 비교해 찾는 ‘프루글’ 서비스, 위성사진을 통해 특정 장소를 찾아들어가는 ‘구글 지구’ 서비스, 유튜브의 인수 등 지금까지 승승장구의 길을 걷고 있다.  

무 엇보다 구글 지구 서비스를 처음 봤을 때, 이는 유저들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매 클릭 순간에, 어디 첩보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위성사진이 줌인되면서 내가 사는 거리며 주차장에 주차한 자동차, 그리고 집 지붕 위까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적이 있다. 가고자 하는 곳을 찾아주고, 찾고자 하는 정보의 길라잡이로 나서고, 어지간한 관련 이미지 정보의 링크를 보여주고, 미국 정부 문서와 연동해 각종 보고서의 위치를 찾아주는 구글의 서비스는, 인간이 몸과 두뇌로 할 것들을 단순 키워드로 그 길에 이르게 한다. 생각의 시발점과 찾아야 할 정보의 첫 관문에 구글이 점점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구글은 인터넷 검색뿐만 아니라 이동 중에도 어디서나 함께할 수 있는 휴대폰 콘텐츠 시장으로의 진출을 겨냥한다. 이미 애플 아이폰 등 몇몇 휴대폰 업체들과 제휴를 맺고 구글 지도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이 뿐만 아니라 휴대폰을 통해 폭넓게 검색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상할 채비중이다. 애플마냥 단독으로 휴대폰 사업에 뛰어들어 자신의 콘텐츠로 무장한 구글폰이 나올 법도 하다. 그들의 능력이 경이롭긴 하나, 우리의 인식지도를 장악해가는 구글의 힘이 내심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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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04 닌텐도의 장인 정신

2008년 4월호

닌텐도의 장인 정신
화투장 제작에서 게임 콘솔의 글로벌 기업으로
   

 

이광석  


미국 아이들이 지난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장 받고 싶었던 물건이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DS 라이트’였다고 한다.
올 겨울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이 게임기가 동이 났었는데, 볼티모어에 사는 필자의 처남은 우리 애를 위해 이 휴대용 게임기를 사려고 서너 곳을 전전하다 가까스로 이를 구해, 그 인기를 실감한 적이 있다.
게임기가 동이 날 정도로 닌텐도가 지닌 위력이 도대체 뭘까?

최근에 노인의 치매에 좋다하여 닌텐도 게임기를 구입하는 장년층들이 늘고 있다 한다. 아이들의 정서를 망치고 공부의 훼방꾼이 게임이라는 통념을 뒤바꾼 닌텐도, 이들의 힘은 백 년이 넘게 오직 놀이와 게임 사업에 투자한 장인 정신에서 나온다.    
 

닌 텐도 기업의 전사는 18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사지로 야마구치라는 사람은 ‘하나후다’라는 꽃그림이 들어간 48장의 화투 게임을 만든 장본인이다. 곧이어 그는 이를 일본 내에 대중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후사지로는 2002년까지 닌텐도를 이끌었던 히로시 야마구치의 증조 할아버지다. 후사지로가 만든 화투는 일제 통치이래 한국 일상 오락문화를 좀먹게 했다. 만든 당사자야 한국사회에 미칠 오염의 심각성을 알리 만무했겠지만 말이다. 당시 일본 야쿠자들이 화투장을 돈 내기 게임에 쓰면서 입소문을 탔다. 초창기엔 순전히 수공업으로 화투를 직접 제작해 보급하기 시작한다. 1907년 후사지로는 ‘닌텐도 카드게임 회사’를 만들어 화투를 대량생산할 설비를 갖춘다. 나중에 경영권을 승계한 손주 히로시는 1953년에 플라스틱으로 입혀진 내구성 강한 화투장을 만들면서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다. 이를 기반으로 60년대 초 러브호텔, 햇반, 택시운송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려 하나 고배를 마신 후, 히로시는 자신의 본업이 놀이사업임을 깨닫고 게임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컬러 텔레비전용 게임을 시작으로, 80년대 초 비디오 게임기 콘솔 시장을 개척하며 ‘(슈퍼) 닌텐도 오락기(NES)’ 혹은 ‘패미콤(Famicom)’ (일본에선 흔히 그렇게 불렀다, 가족용 컴퓨터의 합성어)을 내놓고 킬러 애플리케이션 (돈 되는 프로그램이라는 뜻) ‘슈퍼마리오형제’로 전 세계 흥행 대박을 친다. 2001년 게임큐브로, 그리고 최근에는 ‘위’(Wii)를 내놓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3,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360과 콘솔 시장을 분할한 상태다. 휴대용 게임기로는, 89년 ‘게임보이’로 시작해 ‘닌텐도DS’를 출시해 경쟁사인 소니의 PSP를 멀리 따돌린 상태다. 게임보이는 러시안 벽돌쌓기 게임인 ‘테트리스’를 사들여 대중의 큰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한다.     

닌텐도의 성공가도엔 그만의 게임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 학부모들의 최대 관심사인 폭력, 특히 피 튀기는 장면의 배제는 다른 게임업체와 다른 모범을 실천했다. 비폭력 게임도 얼마든지 재미가 있다는 것에 덧붙여, 게임도 치매를 막고 두뇌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교육 효과까지 창출해낸다. 미국에서도 소비자단체들의 상대적인 호의를 등에 업고 게임의 긍정적 이미지를 설파하면서, 닌텐도 게임의 교육적 가치와 내용 안정성까지 인정받는 지위에 오른다. 전 세계 비디오게임 콘솔 시장을 소니, 마이크로소프트와 갈라먹고 있지만, 게임과 놀이의 장인 철학을 갖고 꿋꿋이 제 갈 길로 가는 회사가 닌텐도뿐이라면 지나친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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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03 애플이 문화가 될 때, 소니는 ‘스타일’이 되다

2008년 3월호

이광석 


기업 활동에 문화 마케팅이란 개념이 있다.
기업이 단지 소비자를 상품 구매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그들의 대중문화에 개입해 그 흐름을 타고 소비 수요를 창출하는 마케팅 방식을 말한다.
2008년 1월호에서 본 것처럼, 애플은 그 문화 마케팅 개념을 넘어섰다.
애플 스스로가 디지털 문화의 장을 선도하고 소비자들이 자신의 문화로 재생산하는 형국은 기업 마케팅 개념을 초월한다. 이번 호는 소니가 만드는 ‘소니 스타일’을 볼까 한다.
소비문화에 접속하는 정도로 치자면 소니는 애플의 한 수 아래이긴 해도 근 60여 년을 오락·문화 산업에서 잔뼈를 끼우며 나름 문화에 접속하는 데 일가를 이뤘다. 
라 틴어 ‘사운드’(sonus)와 ‘아들의 애칭’(sonny)을 합쳐 만들었다는 ‘소니’는, 1979년 워크맨으로 아날로그 시대의 사운드 문화를 주도하며 급속히 성장했다. 비디오 포맷 베타맥스로 타격을 받는 듯 했지만, 소니는 디지털 시대의 고화질 동영상 포맷, 블루레이 디스크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게다가 89년에 인수한 콜럼비아 픽쳐스의 <스파이더맨> 시리즈 등은 현재 가장 큰 수익원 구실을 한다. 94년에는 닌텐도와 결별해 자체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로 청소년의 영상 문화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엔 엔터테인먼트 PC를 기치로 바이오 시리즈 노트북을 출시하면서 전자제품 영역에서 그들만의 스타일을 세우고 있다. 애플 마니아가 아니라면, 일반 노트북 디자인에선 도시바나 필립스 등 다른 경쟁업체들이 대적하기 힘든 세련됨으로 승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이 시도하는 ‘소니 스타일’로 불리는 매장, 즉 소비 체험장의 물리적 공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애플도 비슷한 매장 전시를 통해 소비자들이 직접 기업의 전자 제품을 사용해볼 수 있는 체험 공간을 미국 전역에 확대하고 있는 추세다. 단순히 가전·전자제품을 파는 국내의 하이마트와 같은 토털 가전·전자제품 체인이 아니라, 기업이 만들어낸 전자제품의 상호 연동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스타일을 보여주고 체험할 수 있는 소니 마니아들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소니나 애플이나 매장이 입지하는 공간은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주요 쇼핑몰인데, 마치 옷이나 액세서리의 전시 공간처럼 전자 제품의 공간 소비를 통해 스스로의 유행과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소니의 또 다른 강점은 게임 타이틀과 영화 콘텐츠를 자사의 세련된 전자 기기에 통합하고 어필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소니가 제작한 게임이나 영화를 블루레이 디스크에 담거나 체험 공간에 응용할 때, 전자 기기에 대한 인지 효과가 증대할 수 있음은 논의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흔히 우리는 삼성과 소니를 비교하곤 한다. 허나 기본적으로 국내 재벌에 부족한 것은 한우물을 파는 집중력이다. 몇 가지 상품의 매출에서 초일류 글로벌기업이 될 순 있어도, 돈이 된다면 문어발식으로 서민의 재래시장 물건까지 먹어버리고 건설, 보험까지 흡수하고 확장하는 재벌의 근시안을 가지고는 진정한 초일류로 도약하긴 멀어 보인다. 소니 스타일이 단순히 브랜드 이미지를 넘어서 문화적 스타일이 되고 액세서리가 된 데는, 전자·오락 영역을 넘지 않고 상도를 지키되 그 속에서 공격적인 기술개발과 디자인 혁신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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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디지털세상] 08. 02 표준은 기술의 진화 과정과 무관

2008년 2월호

블루레이와 HD디브이디 간 포맷전쟁  


뉴미디어평론가 이광석  


하나의 기술이 표준에 이르는 과정에 자연 질서에 흔한 적자생존의 법칙이나 보다 발전된 단계로의 기술 진화의 법칙이 딱히 들어맞지 않는다. 보다 나은 기술이 부족한 기술을 대체하고 여러 기술의 경합에서 최고의 기술이 선택된다면야 이는 상당히 합리적 과정이요, 민주적 선택이라 말할 수 있다. 허나 현실은 다르다.
부족한 기술이 최종 경합에서 이겨, 훨씬 우월한 기술이 사라질 운명에 놓이기도 한다. 합리적이고 똑똑한 것으로만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인간사이듯, 그 진리는 기술 표준에서도 매일반이다.


영 상과 음향을 담는 저장 그릇의 발전사를 봐도 그렇다. 80년대, 일본 소니가 밀었던 베타맥스 버전의 비디오테이프가 미국의 VHS에 밀려 사장된 것은 기술보단 시장과 힘의 논리 때문이었다. 물론 70년대엔 8-트랙 테이프를 대체해 카세트테이프가, 90년대엔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를 컴팩트 디스크가 대신함으로써 음향 저장기술의 발전을 독려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체로 경합하는 기술이 있을 때, 기술의 표준화 과정은 시장에서 힘을 가진 집단들 내부의 힘겨루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상례다. 베타맥스의 사멸이 그렇게 이뤄졌고, 2000년대에 접어들어선 또 다른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태세다. 
차세대 동영상 매체의 포맷 전쟁이, 블루레이와 HD디브이디를 놓고 벌이는 기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베타맥스의 설움을 설욕하고자 소니와 필립스가 블루레이를 밀고, 그 상대편 HD디브이디에는 도시바와 마이크로소프트가 후원자로 버티고 있다. 이제까지 일반 소비자는 9기가바이트(GB)의 디브이디 포맷에 익숙했지만, HD디브이디의 경우 30GB까지, 블루레이는 이중 레이어인 경우 50GB까지 집적이 가능하다. 확실히 차세대 포맷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블루레이가 HD디브이디보다 그 집적량이 많고 두 포맷 간 화질의 차이가 없다면 왜 블루레이로 낙점되지 못할까? 그것이 기술 표준이 갖는 딜레마다.

HD디브이디는 기존의 공정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장점으로, 제조 원가를 낮춰 출고 비용을 현저히 낮춘다. 게다가 HD디브이디 플레이어 또한 가격 부담이 적다. 블루레이는 저장용량이 훨씬 크지만 새로운 제조 공정을 추가해야 하는 부담이 있고 아직까지 비용 부담이 크다. 기술이 좋지만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면 시장에서의 반응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두 포맷 기술을 둘러싸고 당사자들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복잡다단해지는 것도 문제다. 예컨대, 지원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의 자바가 마이크로소프트에, 컴퓨터와 전자업계에선 소니, 필립스, 에이서, 델, 애플 등이 도시바, 후지쯔, 레노보에, 영화 업계에선 월트 디즈니, 라이온게이트, 워너 브라더스 등이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와 유니버셜에 맞서서, 서로 블루레이와 HD디브디이를 옹립하려 애쓴다. 이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경계를 넘는 얌체족도 있다. 지금의 형국은 불투명이요, 그 해결은 한쪽이 기싸움에 월등히 이길 때만 주어진다.

표준은 한 번 정해지면 관계된 이해집단에 내리 이익을 안겨줄 수 있기에 당사자 간에 첨예한 대립을 만든다. 자신의 포맷을 관철시키기 위해 제조업체가 영화 업계에 자금을 대는 경우도 있다한다. 그러고 보면 인류의 진전을 가져온다는 기술의 발전사에 표준만큼 왈패도 없거니와 그 과정은 가히 목불인견이라 심히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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