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기쁜 재회.


풍동에, 다녀왔다. 거진 6개월만의 방문?

풍동철대위가 승리 보고 대회를 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채남병 위원장님은,

내게 승리라는 '선물'을 하게 되어 기쁘다고 하셨다.

나야말로 기쁘다. 올해 안에 풍동의 승리를 볼 수 있어서.

활동 초기에 만난 현장이 승리를 했다니, 정말 기쁠 수밖에.



풍동에 처음 간 건, 총선이 있었던 4월 15일.

 

3월엔 대통령 탄핵 사태가 있었고, 세상은 미쳐돌아가는 듯했다.

총선 날, 미친 세상과는 상관없이 일상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카메라를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선택했던 현장이 풍동 철거촌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노숙 투쟁 중이던 장애인들의 집회였다.

 

(첫 방문 후에 썼던 기사 : 그 많던 풍동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첫 만남이 있은 열흘 쯤 뒤던가, 풍동에 침탈이 들어왔고, 침탈 직후에 다시 찾아갔었다. 그러다 5월 초,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진 대대적인 침탈이 있었고, 그 날은 오후 내내, 저녁까지 풍동 골리앗 앞에 있었다. 애초에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위원장님은 위험하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다. 별 수 없이 바깥에서만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거렸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주변엔 덩치 큰 용역들 뿐. H빔을 단 포크레인이 골리앗을 두드려팼고, 철대위 분들은 정말이지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포크레인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돌을 던지고.. 그런데 용역들은 고립된 공간인 골리앗 안으로 화염병을 던져 넣고 있었다. 그건 안에 있는 사람들더러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작은 카메라 한 대 들고, 추위에 떨고 있던 난, 용역들의 위협에 또 한 번 떨어야 했다. 두려움과 무력함. 그 날을 생각하면 그렇게 막막했던 기억 뿐이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쉬운대로 내 촬영본을 편집해 올렸는데, 다음날, 풍동 골리앗 안에서 촬영한 소스를 얻었다.

결과적으로 내 촬영본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되어버렸지만. ^^

골리앗 안에서의 촬영본은 참혹함 그 자체였고,

(http://media.jinbo.net/news/view.php?board=public_access&id=1024&page=3)

사이트에 올리자마자 연대하던 여러 사람들이 소스를 퍼나르면서 반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주류 방송사에서도 빨리빨리 움직여줬다.

 

수많은 언론에서 관심을 기울였고,

풍동은 미디어를 통해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한 행복한 사례로 남게 됐다.

어느 누구도 풍동을 쉽게 건드릴 수 없었고,

수차례의 협상 끝에 결국은 요구했던 가수용과 영구임대주택 입주권을 쟁취했다.

 

(참세상에서 올린 기사 및 영상은 풍동 철대위 언론보도 페이지의 제일 위에 모여 있다.

 http://raracult.lin4u.com/nobreak/press.php)

 

그 과정에서, 내가 한 역할은 따지고 보면 참 미미했다. 기존에 열심히 연대하던 분들의 힘이 컸다. 그럼에도, 채남병 위원장님을 비롯해서 처음부터 매번 만나고 인사하고 이야기나눴던 몇몇 분들은, 내게 너무 고마워들 하신다.

나는 외려 그 분들이 고마운데 말이다.

 

골리앗 마당에 도착하자마자 소사 김상원 부위원장 아저씨랑 눈이 마주쳤는데,

아저씬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나를 때리려 했다! ㅡ.ㅡ

김상원 아저씨는, 처음 봤을 때 무쟈게 무서운 인상이었다.

게다가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는 태도를 깔고 말씀을 하시는데 정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풍동에 가기 전에 철거민 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간 덕에, 아주 다행스럽게도 아저씨의 질문에 적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찾아가면서 신뢰를 얻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찌나 이뻐 하시는지.. ㅡ.ㅡ

소사 쪽도 붙고 있다는데, 꼭 한 번 오란다. 아....휴......

성락경 아저씨도, 조직부장 할머니도, 김 총무님도.. 뭐 다들 여전하셨다..

규찰 나섰다가 용역들에게 정신 잃도록 얻어터졌던 아저씨도,

아주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셨다.

그 분만 해도, 김상원 아저씨 못지않게 나를, 내 카메라를 믿지 못 해 인터뷰 한 번 하기가 무서웠던 분인데, 지금은 나만 보면 고맙다고 웃으신다.

 

그건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내가 노력했던 과정들, 그리고 결과적으로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는 느낌.


 

풍동 분들은, '투쟁'이라는 걸 통해서 '연대'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고 있었고,

자신들도 언제든, 어떤 문제에든 '연대'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난 그 분들을 쉽게 좋아할 수 있었다.

함께 하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 거기서 힘을 얻고, 또 싸워나가고, 그 과정 속에 단단해지고.

 

채남병 위원장님, 그 분이 늘 앞에 서 있었다.


 

참 수줍은 사람. 어쩌면 위원장이라는 직책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줍고, 긴장도 잘 하는 분.

 

처음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가 기억난다.

도무지 내 눈은 쳐다보지도 못 하고,

경직된 채로 문건을 그냥 줄줄줄줄 읽으면서도, 종이 든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서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변화의 폭은 놀랍도록 컸다.

다음엔 내 눈을 보셨고, 다음엔 말도 자연스러워졌다.

기자회견 때는 가감없이 스스로의 감정을 표출하면서도 중요한 말씀을 잘도 하셨다.

괜히 내가 뿌듯할 정도로..

 

소주 한 잔 건네시는데, 흔쾌히 받았다. 그래봤자 입술만 적시는 나지만.

위원장님은 조만간 옥살이를 하게 될 거다.

어차피 다 아는 거, 그냥 인생대학 간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어떻게 사실 거예요? 하고 물으니, 인생대학 다녀온 후엔 지역 일반노조 건설에 힘을 보탤 거란다.

 

내가 요즘 답답한 문제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길 했더니,

어차피 이 체제 하에서는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다, 고 하신다.

가난한 자들이, '체제 전복'과 '혁명'을 얘기하며 같이 웃었다.

 

풍동을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지만, 동시에 다른 철거촌을 찾아가지 못 했던 죄스러움이 참 크다.

오늘만 해도 상도2동 철거민(작년 사제총 논란이 일었던, 그 건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출소한 지 1달 되었단다), 소사 철거민, 월곡동 철거민, 청와대 앞에서 벌써 석 달 넘게 자리잡고 투쟁 중인 철거민.. 많은 분들을 만났고, 그 분들은 하나 같이 '한 번 찾아오라' 했다.

 

그 마음 안다.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정말 미안하다.

 

나는 '네'가 아니라 '노력할께요'라고 얼버무렸다.

그럴 수밖에 없어서 슬펐다.

그 자리에서 난 믿음을 드릴 수가 없었다.

 

이주노동자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민수씨랑도 오랜만에 인사했다.

 

풍동 가는 길은 참말이지 멀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마을 버스를 타고서야 겨우 도착하는 곳.

그래도 가길 잘 했다.

 

입주날에도 꼭 오라고들 하시는데, 가봐야지...

심지어는 그 후에도 놀러오라고 하시는데,

 

^^

고맙습니다...

승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