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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시대 / 에릭 홉스봄

드디어 다 읽었다. 아.. 뭐.. 읽으면서 궁금한 것도 많았고 생각나는 것도 많았지만 일단 손가락 노동만 해두기로.

 

아래 인용구는 일단, 홉스봄의 열여덟살 마지막 일기 내용이고 그 아래는 여든다섯 자서전의 일부다. 열여덟의 홉스봄은, 스우 타운센드가 쓴 '비밀일기'의 사춘기 소년 아드리안을 떠올리게 한다. ㅎㅎ

 

아, 원제는 interesting times.

 

에릭 존 어니스트 홉스바움. 호리호리하고 젓가락 같고 구부정하고 못생기고 머리는 금발인 열여덟 살 반 먹은 녀석. 이해력이 빠르고 피상적이지만 일반 상식이 대단히 많고 이론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에서 남다른 아이디어도 풍부하다. 거드름을 피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데 문제는 본인도 이것을 믿기 때문에 그만큼 더 위험하고 또 때로는 먹혀들 때가 있다는 것. 사랑에 빠지는 적은 없고 욕정을 승화하는 데 상당한 재주가 있어 보이는데, 자주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이나 예술을 감상하면서 맛보는 희열로 표현되기도 함. 도덕심은 전혀 없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쳤음. 어떤 사람은 그를 몹시 역겨워하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지만 대다수는 그냥 우습게 봄. 혁명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아직까지는 신통한 지도력을 보이지 못했음. 작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자료를 주무를 수 있는 역량과 끈기가 모자람. 태산을 옮겼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만 하지 신념은 없음. 허영과 자만에 빠져 있음. 겁이 많음. 자연을 정말로 사랑함. 독일어를 까먹고 있음. p. 168-169

 

중유럽 사람들 속에서 나는 잉글랜드 사람이었고, 영국에서는 유럽에서 온 이민자였으며, 어디를 가도 유대인이었고 특히 이스라엘에서도 다른 곳에서 유대인이 받았을 법한 왕따를 당했다. ... 심지어 나는 내가 접해본 나라들 안에서 정치적으로 소수파에 머물러 있던 공산주의자들 안에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별종 취급을 받았다. 개인으로서는 이것 때문에 살아가기가 고달팠지만 역사가에게 그것은 각별한 자산이었다. p.668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p. 672

 

생지옥은 미래형이 아닙니다. 그것이 존재한다면 이미 여기 있습니다. 같이 살아 있는 데서 만들어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이 지옥입니다. 그것을 견디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길을 사람들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을 받아들이고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지옥이 거기 있다는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을 때까지요. 두 번째 길은 위험한데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고 알아보고 그것이 이어질 수 있도록 숨통을 터주는 것입니다. p.584(이탈로 칼비노 재인용)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도 이렇게 속삭이는 작은 유령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상에서 마음 편히 지내서는 안 되지." 젊었을 때 내가 그 글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도 비슷한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p.508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사회주의냐 야만주의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사회주의에서 등을 돌린 것을 세계는 다시금 후회할 것이다. p.459

 

20세기 후반의 역사에서 일어난 정말로 기념비적인 사건은 이념도 아니고 학생들의 대학 점거도 아니고 노동자들의 작업복이었던 청바지의 힘찬 진군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p.432

 

역사가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혁명은 혁명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히 많은 말을 통해 그 성격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것은 입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문자가 있는 사회에서는 글을 아는 남녀가 써내는 수많은 글로 나타난다. 이런 기준으로 따졌을 때 1968년 5월 혁명은 학생 혁명에 가까웠으나, 당시 파리 길거리에 나붙었던 벽보를 보았던 사람은 누구나 느꼈겠지만 거기에 적힌 문구로 보자면 혁명치고는 좀 묘한 혁명이었다. p.410

 

1956년의 나라는 사람을 자서전 집필가의 눈이 아니라 역사가의 눈으로 되돌아 보았을 때 물론 당을 떠날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당에 남은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잉글랜드에서 영국 젊은이로 공산주의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져갈 때 중유럽에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내가 공산당에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그저 파시즘하고만 싸운다는 뜻이 아니었다. 세계 혁명을 위해 싸운다는 뜻이었다. ...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1932년 베를린에서 10대 소년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소련을 비판하고 회의한다 하더라도 세계 혁명과 그 거점이 10월 혁명에 대한 희망과 마치 탯줄처럼 단단히 이어져 있던 세대에 들어갔다. 성장한 곳의 풍토와 혁명 운동에 투신한 시기가 남들하고 달랐기 때문에 나는 홀가분하게 공산당을 박차고 나올 수가 없었다. ... 역사가가 아니라 자서전을 쓰는 사람으로 돌아와서 말한다면 개인적 감정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 그래서 나는 남았다. p.357

 

파티잔 커피 하우스 ^^;;; p.348

 

작은 위기가 잇따라 닥치다가 소련 군대의 헝가리 재점령이라는 끔찍한 사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다시 몇 달 동안 뜨거웠지만 결말은 뻔했던 논쟁을 거치면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패배로 곤두박질친 그 악몽 같은 해의 분위기도, 기억도 이제 와서는 아련하기만 하다. 영국 극작가 아널드 웨스커가 쓴 <보리 닭고기 수프>는 공산주의 신념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유대인 노동자 집안의 이야기인데 이 희곡을 보면 '이념을 잃어버리는 아픔과 이념에 매달리는 아픔'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다. p.337

 

소련이 점령한 중유럽에서 살았거나 그곳 현실을 직접 체험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공산주의자로 남는다는 것은 전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시절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우위에 있다는 신념과 확신도 그대로 있었고 공산주의 이념이 이 세상을 바꾸어놓으리라는 믿음도 여전했지만 우리의 희망, 아니 적어도 나의 희망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파국이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진보의 폭풍에 휘말려 날개를 접을 수 없는 '역사의 천사'처럼 불가피한 비극 의식과 맞닿아 있었다. 역설이라면 역설이었지만 예전의 신념을 그래도 쉽게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어렵사리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 시대에 서방 어디에서나 기승을 떨치던 반공주의였다. p.298

 

1980년대 말, 그러니까 체제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동독의 한 극작가는 <원탁의 기사들>이라는 희곡을 썼다.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기사 랜슬롯은 묻는다. "세상 사람들은 성배와 원탁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우리의 정의와 우리의 꿈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 나는 아직도 성배를 믿는 걸까, 하고 그는 자문한다. "모르겠다" 랜슬롯은 말한다. "그런 물음에는 답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아니, 우리는 성배를 영영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배가 아니라 성배를 찾아 나서는 것이라는 아서 왕의 말은 옳지 않은가? "성배를 포기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 어디 포기하는 것이 우리 뿐이겠는가?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20세기에 실제로 그렇게 살다가 간 사람들을 기억조차 하지 않고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p.254

 

여기서 공과 사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것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었다. p.217

 

자전거야말로 구텐베르크 이후로 마르크스가 말한 인간의 가능성을 온전히 구현한 최대의 발명품, 그것도 단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발명품인지도 모른다. p.153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이다. 내 경우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한 세기의 4분의 3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쌓인 지질학적 퇴적물을 벗겨내 그 속에 묻혀 있던 낯선 사람을 드러내거나 찾아내서 다시 뜯어맞추는 것을 뜻한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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