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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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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과 낮>을 보러 들어가다가 우연히 후배를 만났다. 3일 연속 10년 전 기억들과 대면했다. 사람들과 소원해지면서 자연히 영화판 이야기들과 멀어지는 듯하다가도 불쑥불쑥 예기치 않은 자리에서 흠뻑 빠져들게 된다. 영화 하고 싶어지면 다시 돌아오세요.. 그 '다시'라는 말이 어색했다. 내겐 단지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을 뿐이니까. 그 시절과 결부된 그리움이 있을 따름이지 미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아주 가끔이지만, 단 3일만 선택을 미뤘어도 영화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2004년 3월 초가 떠오르는 정도? 참 많이 달라졌겠지만, 궁핍하고 힘든 건 마찬가지였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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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던져준 초대권을 가지고 반 고흐전을 보러 갔다. 예상했지만, 이건 뭐 전시장이 아니라 도떼기 시장이다. 애초에 여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는. 심지어 앞에 선 사람들에 가려 작품의 아우라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고흐의 작품에서 강렬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니. 12000원 입장료에 값하는 감상을 위해서는 하루 입장객 수 제한 같은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부터, 여러가지 의미에서 유난히 규모에 집착하는 이 땅의 척박함에 대해서도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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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메일을 쓰지 못 한 건, 바빠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피차 마음 편한 일이므로 부정하지 않을 뿐. 다만 익숙한, 그의 움츠린 어깨가 떠올라 미안한 마음은 든다. 일주일에 한 번 메일 쓰기, 라는 공식에 누구도 길들여지지 않기를 바랬다. 그건 한계가 명확했던 그 한 달 반이면 족했다. 한 때, 지금은 켜지도 않는 엠에센 메신저에 결박되어 버린 적이 있었다. 거기서 겨우겨우 벗어났을 때 나는 살 것 같았다. 다시 그런 류의 습관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 언제라도 받아줄 마음이 있었던 내 대화명이 화석처럼 굳어버리고, 그의 대화명은 점 하나로 바뀌어 사라져 버린 뒤, 내 가슴에 불던 스산한 바람을 기억한다. 며칠 간 계속 되던 배앓이에 당신 어머니가 했다는 말. 네 머리 위로 나쁜 바람이 불고 있구나. 그 바람이 당신에게 향하길 원치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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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니 토드>를 조용한 새벽에 봤다. 그리스 비극과 닮았다. 사랑과 질투와 복수와 파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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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에는 눈이 시원한 샷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밤인데도 낮 같은 파리의 여름은 불면의 세계였다. 경계가 없는, 그리하여 애초에 탈출이 불가능한... 관계란 그렇게 답답하고 또 답답한 것이었던가? 그 수컷과 암컷들을 보고 있으니, 일요일 한낮의 주주클럽과 뭐가 다를까 싶어졌다. 덩달아, 지나가는 개들마다 쫓아가 똥꼬 냄새를 맡던 발정난 수캐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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