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혹은 우리가 역사를 왜 하는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혹은 우리가 역사를 왜 하는가?

”저는 나라 만들기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총구를 앞세운 전쟁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가 그러한데다가 사회 자체의 약체성이 한국에서의 국민 국가 만들기를 무척이나 폭력적인 과정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나라 만들기 과정에서 1948년8월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건국 그 자체는 겨우 시작이 불과합니다. 어느 정도 그 과정이 일단락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개발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 시대가 열리는 1987년 언저리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러한 장기적이며 과정적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볼 때 일제가 남긴 전체주의적 전시 경제 체제를 해체하고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대한민국이 성립된 것은 출발로서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 책세상, 2006, 제2권, ”대담”, 식민지 유산의 청산과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한 서울대 이영훈 교수의 발언 중에서).

등잔 밑이 어둡다라고 하던가? 나는 대학의 졸업장을 따고 역사를 생업을 한 지 십여 년 ......



등잔 밑이 어둡다라고 하던가? 나는 대학의 졸업장을 따고 역사를 생업을 한 지 십여 년 됐음에도, 역사를 한다는 것은 뭔 의미인지 솔직히 고백하건대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이야 하다보니 좀 익혔다.  연구사적 검토부터 시작하여 일차 자료를 뽑고, 기존의 연구자들이 지적하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고 끝에 한 시대에 대한 총체적인 결론을 내리는 척 조금 해보고… 생업이다 보니 자료와 연구비만 주면 웬만한 역사의 한 부분을 잘 가위질해서 보기 좋은 논문으로 재구성할 자신이 있다. 한데, 그건 옛날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용 (用), 즉 기능이지 체 (體 – 본질)은 아니다. 가위질할 수 있다는 것과, 그 가위질을 연구비를 받으려는 탐심 이외에 도대체 왜 하는지를 본인이 스스로 이해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이야기다. 산 사람들의 일도 바쁜데, 죽은 자들을 왜 무덤에서 불러내고 그 관련으로 글 장난을 일 삼는가? 역사를 왜 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나에게 없지만 적어도 역사의 묘체 (妙體)와 효용 (效用)에 대한 하나의 변명은 준비돼 있다.

 

붓다가 생사 (生死)를 고해 (苦海)로 보고, 마르크스와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같은 뿌리의 근본적 자각을 요즘 말로 표현하여 일차원화 (一次元化)된 인간의 내면까지 스며든 전도된 허위인식, 얼굴이 되고 만 사회적 가면의 이야기를 해왔다. 물론 다른 시각에서 여태까지 인류가 살아온 코스를 낙 (樂)의 증강 과정, 즉 인간 생산 능력의 증가에 따란 소비 능력과 향락 (享樂) 능력의 향상 과정으로 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 소비가 일차원화된 인간의 내면적인 황폐화와 자아 상실을 호도하는 기능을 한다고 반박해도 계급 사회의 통사 (痛史)를 낙사 (樂史)로 볼 사람들은 어차피 그렇게 보게 돼 있다. 그런데, 저들에 대해 나로서 최후의 논거 하나 있다. 인류사에서 폭력이 멈추어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생산 능력이 증가됨에 따라 폭력 능력도 증가될 뿐만 아니라 그 방법마저 교묘해져 폭력도 우민 (愚民)들이 즐겁게 누리는 하나의 소비품이 된다. 2003년, 미국 폭탄들이 바그다드의 허공에서 벌인 불꽃놀이를 텔레비전 앞에서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던 그 수많은 미국인들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를. 매체라는 이름의 연금술사가 새롭게 도살된 인간의 피와 살을 선남선녀를 즐겁게 할 제호 (醍醐), 옛날 불경들이 이야기했던 하늘 신들이 마시는 최상의 맛의 우유로 만든다. 우리가 신이 된 것인가? 악마가 돼가는 것인가?

 

역사는 부정 (不正)한 사회적 관계, 전도된 의식 속에서 만들어지는 고통의 과정이라면, 죽은 이들을 무덤에서 불러낼 만한 정당한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을 것이다. 옛날 말로는 중생으로 하여금 이고득락 (離苦得樂)하게 하려고 그들에게 고통과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길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하는 것이고, 마르크스라는 보살마하살 (菩薩摩訶薩)이 이 세상을 거쳐간 이후의 말로는 계급 사회에서의 지배 관계라는 맥락에서 발생되는 고통과 억압, 그리고 저항을 여실히 보여주고 계급 사회를 벗어나는 길을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제시해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아주 좋게 들려도 구체적으로 가위질하는 그 과정에서는 늘 숱한 문제에 부딪치고 결국 체 (體)를 포기하고 용 (用)만을 요령껏 살리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말이야 쉽지 역사의 속살을 건드리다 보면 억압이 어디에 있고 저항이 어디에 있는지 가끔가다 판단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예컨대 항일 저항 세력으로서 그 사회적 인생을 시작한 김일성은, 인민들을 지배하려는, 또한 지배하고 있는 억압적인 존재가 된 것은 대략 언제부터인가? 주민들에게 숙식 제공을 강요하면서 투쟁하는 유격대라는 ”태생적 조건” 자체 안에서 – 김일성의 유격대가 일제 당국의 보고서에 의거하더라도 상당수의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다고 하지만  – 이미 ”억압성의 씨앗”이 감추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혁명을 포기한 지 오래 된 스탈린주의 국가 소련의 장교가 됐다는 것은 김일성을 결정적으로 ”해방 투사”에서 ”직업적 간부”로 바꾸었다고 봐야 하는가? 만약 우리가 북한 정권의 성격을 그 초기부터 ”지배와 피지배 관계” 맥락에서 파악한다면, 나중에는 견제 내지 숙청 당했지만 초기에는 그 정권에 적극 참여했던 식민지 시대의 거물급 노동 투사 – 예컨대 1929년에 원산 총파업 후원회 위원장을 했던 오기섭 선생 (吳琪燮: 1903-?)이나 평양, 함흥 등지 적색노조 조직자인 정달헌 선생 (鄭達憲:1899-?) – 의 이북에서의 활동을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식민지 조선에서의 일본인 노동자들을 과연 ”지배 그룹”으로 분류해야 하는가, ”피지배 그룹”으로 분류해야 하는가? 그들이 조선인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벌이는 경우들도 종종 있었지만 조선인 동료보다 높은 월급을 받으면서 조선인들을 감독하는 위치에 쉽게 올라갈 수 있는, ”포섭된” 노동자이었다는 것도 엄밀히 식민지 역사의 사실이지 않는가? 즉, 우리가 역사를 ”지배”와 ”저항”, ”고통”이라는 그 본질적 내용으로 본다 해도 어떤 정답도 내리기 곤란한 문제들이 무수히 생긴다. 굳이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으로 빠지고 싶지는 않지만, 생산 수단이 피지배자들의 손으로 돌아가게 만들 세계혁명의 순간 이전까지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세계에서 ”반란”이 체제 속으로 포획되어 새로운 ”억압”을 낳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다.

죽은 자를 불러내는 그 허무한 일에서 애타 (愛他)와 미래 지향의 어떤 뜻을 이루어보려는 일념으로 정진을 시도해도, 추상적인 이념이 그저 이념으로 남은 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얼핏 보면 ”역사하기”가 ”과학하기”보다 한 단계 수월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에게 쓸 모 있는 역사를 만들어주기가 풀리지 않는 고민의 연속이다.

 

그런데, 보수, 극우 신문의 ”대서특필” 덕분에 출판되자마자 화제에 올랐던 <… 재인식> (박지향, 김철, 김일영, 이영훈 등 엮음, 2006)을 펴볼 때에 가장 믿어지기 어려운 부분은, ”재인식”이라는 다분히 성찰적 의미의 단어를 제목에까지 올린 이 책에 ”역사하기”의 의미에 대해 이토록 성찰이 담겨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국제적 기준”에 맞추어 ”일국 사학을 극복해보려는”, 다분히 보수적인 입장에서 최근 한 세기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자는 의도 그 자체를,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이라 해도 죄악시할 필요야 없다. 만약 보수의 보편적인, ”국제적인” 가치가 예컨대 개인의 자율성이나 남녀 평등이라면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 근현대사를 성찰해본다는 것이 의미가 깊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가부장적 색채가 꽤나 짙었던 1980년대의 ”운동권” 을 비판해도 좋고 북한 가족에서의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지속 을 비판해도 얼마든지 좋다.  ”진보”를 자임한다고 해서 비판을 받지 않는 성역이 될 권리가 없는 것이고, 보수가 보편적인 가치로부터의 진보의 이탈을 고발한다면 나부터 열렬한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런데, <…재인식>으로 포장된 그 책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의 ”재인식”의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훤히 보이는 것은, 이 글의 모두(冒頭)에서 인용한 이영훈교수의 발언에서와 같은 역사라는 고통의 과정에 대한 승리한 자로서의 무한한 냉소다. ”그렇다, 나와 내가 속하는 계층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 공동체가 총구를 앞세워 반대자를 학살해가면서 만든 나라다.

그렇다면 왜? 뭐가 문제냐? 자본주의 국가를 피 흘리면서 만드는 게 정상이고, 그 과정에서는 사유재산제와 시장 질서가 확립화됐으니 다행일 뿐이다. 그것이 나의 재산이기도 하니까 말씀이다. 나의 재산이 지켜지는 이 살기 좋은 나라 만들어지기 위해 반세기 동안이나 반대자들이 시체가 되고 노동자들이 불구가 됐다 해도 그건 나하고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나와 나의 계층이 이겼으면 됐지, 이 세상이 이긴 자의 것이다”. 물론 이영훈교수는 그렇게 ”까놓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한데, 그의 발언들의 핵심적인 뜻이자 이 책 편집의 기본적인 뜻은 바로 이와 같은 ”승리자의 개선가 (凱旋歌)”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 개선가의 가사 중에서는 고통이라는 이름의 역사의 내용도 없고 고통을 어떻게 하면 종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도 없고 그 동안 고통을 종식시키려고 몸과 마음을 내던진 이들에 대한 별다른 관심도 없다. 이영훈교수와 그 동료들에게 ”지금 그대로”가 좋은 것이고, 이 좋은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밝히기 위해 ”역사하기”에 나선 것이다.   

   

물론 승리자들이 개선가를 부른다고 해서 밟히고 죽고 없어진 패배자들을 아주 잊어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패배자를 기억해서 불러내야 승리의 가치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지 않는가? 예컨대 <….재인식>을 엮은 이념가 중의 한 명인 박지향 서울대 교수 (서양사)는 우파 쪽에서 여태까지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전평 (全評: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1945년11월5-6일에 결성됨)에 대한 논문을 <…재인식>에 실었는데 (”한국의 노동 운동과 미국, 1945-1950”, 제2권, 103-140쪽), 그 글에서 패배자를 바라보는 승리자의 태도는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여태까지 반세기 이전의 급진적 노동 운동에 대해 ”동지애”를 느낀 나머지 객관성이 얼마든지 흐릴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연구되었던 전평에 대해 이념적 지향성이 다른 연구자가 냉철하게 접근해본다는 것 자체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글을 읽은 뒤의 전반적인 인상은, 박지향교수가 오래 전에 고통스럽게 죽은 전평 활동가들을 ”역사법정”에 세워 놓고 그들의 진술을 별로 경청하지도 않은 채 미리 준비된 공소장을  읽어가면서 그들을 ”혼내주는” 것이었다. 피고인들의 진술을 듣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박지향 교수가 그 논문에서 미 군정 측의 자료를 폭넓게 이용하는 반면, 해방 직후의 좌파적 신문 (<해방일보>, <청년해방일보>, <노력인민> 등)이나 전평 그 자체의 <회의록>  등의 자료를 극히 소수만 인용하고 대부분 외면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혼내준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전평의 비극”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결론 부분 (138-140쪽)에서 박지향교수는 ”정치 우선의 투쟁을 전개시켜 결국 대중들로부터 소외돼 노동운동을 사이비 대한노총에 넘겨버린” 전평의 ”정치 편향적, 좌편향적 노선”을 소리 높여 고발한다. 박지향교수에 의하면 ”그 당시의 대중들이 온건한 사회주의 방향의 경제 질서와 온건한 좌파 경향의 민족주의적 국가”를 원했음에도 전평이 그것보다 훨씬 급진적인 노선으로 치달아 결국 스스로 고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군정 세력이 전평을 일관되게 탄압한 것도 아니고 일정 기간 동안 인정하여 협조했다는 점, 그리고 전평을 탄압한 것이 단순히 반공주의 때문이라기보다는 미국이 좌파적으로 정치화된 노동 운동을 이질시하여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를 우선시하는 미국 식의 자주, 민주적 노동 조합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 전평을 정상적인 조합 연합체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점 등은 박지향교수가 강조하는 요점들이다. 

 

”여러분들을 미군정과 한국 우파가 파멸시킨 것이 아니오, 여러분들이 급진적 좌파 정치에 휘말려 스스로 자신들의 무덤을 팠소!”라고 박지향교수가 외치는 듯하다.  문제는, 서양사가 전공 (!)인 박지향교수가 ”미국식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놀라울 만큼의 좁고 편협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부터 시작된다. 미국의 노동조합들이 과연 경제 투쟁에만 매진해왔던가?  1905년에 결성되어 한 때에 약 10만 여 명의 회원수를 자랑했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제국주의적 살육에 반대해 싸웠던 ”죄”로 경찰력에 의해 와해 당한 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세계의 산업 노동자”)의 대단히 급진적인 활동을 논외로 하더라도, 1930-1940년대에도 – AFL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미국 노동 연맹”)이라는 보수적인 ”경제주의” 조합 조직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 급진적인 노동 운동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사실, 미국 학계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1935년에 미국 국회가 ”와그너 (Wagner)법”이라는 노동자의 조합결성권, 단체협상권, 파업권 등을 확립시킨 노동법을 통과시킨 것이 1930년대 초반에 극에 달했던 급진적인 노동 운동에 대한 일종의 ”유화책” 성격의 양보이었다는 것이다 . 1949년에 숙청이 시작됐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CIO (Congress of Industrial Origanizations: ”산업 조합의 협회”) 산하 조합 중에서 공산당의 당원이 위원장을 맡아 조합 내에서 급진적 활동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 

박지향교수의 귀에 거스를 말씀이지만, 노동 계급이 계급의식으로 무장하여 계급운동을 벌이지 않는 이상 단체협상이나 단체협약 같은 가장 기본적인 노동자의 권리를 지배계급으로부터 얻어내어 지키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미국 노동 계급의 일각에서 계급의식이 현저하게 부족했다 해도 매카시즘의 광풍 이전까지 급진적인 노동 운동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성과를 따내기도 했다. 미국 점령군이 조선에 쳐들어와서 조선인들의 ”정치화된 노조 운동”을 불신하여 탄압한 것은, ”노동 운동의 문화가 달라서”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전평을 ”용공 조직”, ”공산주의자들의 영향하의 조직”으로 파악한 그들은, 자신들의 ”일차적인 목표”를 ”한국에서의 소련 지배권을 저지하고 (…) 우리들의 [한반도]에서의 우월적인 지위를 행사하는” 것으로 정한  이상으로 전평을 탄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지향교수가 그 글에서는 미군정의 ”자유주의적 면모”를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지만, 남의 나라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려는 제국이 그때나 지금이나 ”잠재적인 위협”으로 분류되는 단체나 개인들에 대해서 ”민주적인 수단”만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웬일인지 미국의 배후 개입의 의혹이 짙은 김구 암살이나 여운형 암살 같은 해방 전후사의 굵직한 사건에 대해서는 <….재인식>은 언급조차 애써 피한다. 미 제국이 내세우는 ”민주”와 ”자유”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밝혀진다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일인가?

 

박지향교수의 ”공소장”에서는 전평의 노동 운동가들이 ”감히” 정치영역으로 진출하여 ”민주적이며 자유주의적인” 미국 상전님들의 ”정당한 분노”를 샀다는 것은 그들의 주된 ”죄목”으로 돼 있다. 그런데 전평이 정말로 그렇게까지 ”급진적인” 단체이었던가?  오늘날의 급진파인 나로서 아쉬운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애당초에 소련 스탈린주의자들의 ”혁명단계론”의 강한 영향을 받은 전평은 1945년말부터 ”조선 혁명의 당면 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하여 이 단계의 주된 과제로 ”일제 및 봉건주의 유산의 청산, 민족통일전선에 의한 인민정권의 수립”쯤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 ”인민정권의 수립”과 ”민주주의개혁”의 과정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하의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시설의 국유화와 같은 진보적 개혁도 이루어져야 됐지만, ”친일파”나 ”대자본가”를 제외한 자산계층, 특히 ”양심적인 민족 자본가”로 분류되는 부류에 대한 전평의 태도는 일단 협조적이었다. 일본인 주인이 버리고 떠난 공장이나 친일파 소유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여 관리하는 것을 전평이 환영했지만 조선인 개인 기업에서 노동자들의 ”공장 관리” 시도가 자본가에게 공포감을 주어 자본계층을 ”공동 민주전선”에서 소외시킨다는 것을 애써 경고했다. 전평이 조선인 소유의 개인공장에서의 노동자에 의한 공장 관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일본인이나 친일파 소유의 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이 단독으로 관리하는 것보다는 ”양심적 민족 자본가”를 받아들여 그 자본가와의 공동 관리하는 것을 권고했다 .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하여”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민족 자본”과의 ”통일전선”을 금과옥조로 여겨왔던 스탈린주의적인 보수적 ”점진주의”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  또 현실적으로 ”남조선의 해방”이 노동자의 힘이 아닌 외세인 미군에 의해 이루어지고 외세와 국내 자산계급에 비해 노동운동의 역량이 매우 제한돼 있다는 현실 인식의 반영이기도 했다. ”정치화”돼 있었다는 전평이 이 정도로 ”온건하게” 나가는 것은, 미군정의 당국이나 박지향교수가 그렇게도 위험시하는 조선공산당이 전평에 대해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덕분”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냉전으로 접어들기 전까지는 소련의 입김에 좌우되는 조선공산당이 점령군인 미군을 ”해방군”이자 ”세계 민주 세력”으로 봤다는 것이다 . 역사에서는 가정법이 없다 하지만, 만의 하나에 한반도가 신탁 통치 시기를 거쳐 핀란드나 오스트리아처럼 냉전 시대의 ”중립 지대”가 됐다면 과연 이와 같은 ”온건 지향”의 전평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위협하는 세력이 될 수 있었겠는가? 공산당의 영향을 받아온 프랑스나 이태리의 전후의 노동 운동의 역사 로 봐서는, 전평도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전복하려 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전평의 진정한 비극은, 소련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 노동계급의 조직이 냉전 정치의 과정에서 미 제국에 의해 ”방해물”로 여겨져 제국과 그 지역적인 앞잡이들에 의해 철저하게 궤멸을 당한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 제국에 대한 한 무제한적으로 관대한 박지향교수는 이 자명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그 대신에 고통스러운 최후를 당한 전평 활동가들에게 ”역사 재판의 공소장”을 내미는 것이다.

 

나의 기대가 너무 과했던 것인가? 솔직하게 <…재인식>을 처음 접했을 때에 내가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 책의 공저자들이 바로 절차적인 민주주의라는 차원에서 전평을 비판적으로 해부할 것을 내심 기대했다. 급진파인 나로서 ”우리 쪽”에 대한 부끄러운 이야기가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 개혁”을 표방했던 전평이 아쉽게도 절차적인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에 있어서 꽤나 소홀했다. 전평이 결성됐던 1945년11월5-6일에 일선 노동자들이 보낸 505명의 대표들이 전형위원 19명을 먼저 선출한 뒤에, 그 19명의 전형위원들이 81명의 집행위원들을 뽑은 것이었고, 집행위원들이 위원장 허성택 (許成澤 :1908-1959)을 위시한 여러 상임위원, 즉 최고의 간부들을 뽑았다 . 결성대회 대표-전형위원-집행위원-상임위원… 네 개의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이러한 ”다단계 민주주의”를 사실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로 보기가 힘든 것이다. 특히 ”민주적인 중앙집권주의” 체제하에서 중앙 간부들이 갖고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생각할 때에, 그들이 이처럼 ”간접적인, 매우 간접적인” 투표 방법으로 선출됐다는 것은 해방 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큰 결점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풀 뿌리 민주주의” 문제는, 주로 거시적인 국제 정치 내지 정당 정치, 국가적 차원의 개혁이나 경제 정책 등에 초점을 맞추는 <…재인식>의 공저자들에게 별다른 관심사가 되지 않는 듯하다. 유일하게 해방 이후의 도시의 사회사를 다루는 전상인교수의 논문 (”해방 공간의 사회사”, - 제2권, 141-175쪽)에서는 아직도 계급정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조선인들의 ”전근대성”에 대한 이야기가 꽤 들어가 있어도 (168-173쪽), 계급 정치의 중요한 시도이었던 노조 운동에 대한 이렇다 할만한 언급이 없다. 직장 차원의 민주주의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보이지 않는 대신에, ”거시적으로 본 1950년대의 역사: 남한의 변화를 중심으로"”(제2권, 433-482쪽)라는 글에서 원로 사학자 유영익 연세대 명예교수는 좌파를 원천적으로 배제한 반공체제하의 ”반쪽 민주주의”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집권기의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당 정치의 정착이나 민중들의 정치적인 훈련에 큰 역할을 했다고 역설한다. 물론 제도적 민주주의마저도 압살된 유신 독재나, 민주적인 투표가 처음부터 원천 봉쇄된 북한의 정치 모델  등에 비해서는 이승만 집권기의 정치 제도적 상황은 ”차악”으로 비추어질 여지가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유무 여부는 과연 두 보수적인 정당 (자유당과 민주당) 중에서 – 많은 경우에는 경찰의 감시와 개입을 받는 – 투표에서 민중으로서 ”상대적으로 덜 나쁜” 쪽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으로만 판명되는가? 끝없는 ”궐기 대회”에 학생들을 강제 동원하고 회비 징수를 강제로 하면서 학부모들을 경제적으로 수탈하기까지 했던 이승만 집권기의 그 악명이 높았던 ”학도호국단” 같은 전체주의적인 동원 조직이나, ”국부”, ”영명고매 (英明高邁)하신 민족의 지도자” 이승만을 찬양하고 그 명령에 대한 ”준봉 실현”을 요구했던 그 당시의 신문들의 역겨울 정도로 어용적인 ”지도자 옹호” 사설   등을 생각해본다면 ”이승만 정권기 때의 제도적 민주주의 공고화”라는 학설을 재고해볼 만한 여지 역시 다분히 있다. 가톨릭교회 등 외세를 배경으로 한 만큼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조직들과 일제시대 때 양성된 부르주아, 지식층을 배경으로 한 민주당을 궤멸시킬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이승만은, 어쩌면 ”성공한 민주주의자”라기보다 차라리 ”권력 자원이 약해 결국 성공하지 못한 세계 체제 주변주의 실패한 파시스트”로 보인다.

 

그런데 <…재인식>이라는 이 방대한 논문집에서 이승만 집권기의 학도호국단이 딱 한 번만 (!) 언급되고 만다. 승리자들의 개선가에 어울리지 않는 부분들을 ”재인식”할 마음이 애당초에 없었다고 봐야 하는가? ”재인식”을 내세우는 사람답지 않은 ”침묵”은 학도호국단과 같은 1950년대의 한국 집권층의 ”부끄러운 과거”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예컨대 1959년7월31일의 조봉암의 처형이라는 이승만 정권의 ”법살”이 반(反)이승만 정서가 곧 반미 정서로 발전될 것을 우려했던 미국의 대(對)이승만 절연 (絶緣)을 가져다 주었다는 등 미국의 ”자국 이익에 기반한 한국 민주주의 옹호 정책”이 상당히 자세히 서술돼 있지만 (제2권, 594-606쪽), 민주당이라는 ”민주적 야당”이 조봉암의 ”법살”에 이렇다 할 만한 저항을 한 바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도 찾기가 힘들다. ”제도 야당”의 ”깨끗한 민주주의적 이미지”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그렇게도 간절할 수 있는가?

이승만이나 1950년대 민주당의 ”민주적인” 정치인 (예컨대 ”대한민국을 위해 빨갱이 섬 제주도를 다 태워버려도 된다”고 고함질렀던 조병옥”박사”…)에 대한 보수 학자들의 미련이야 어디까지나 예상할 만도 했다. 대중 독자로서 이 책에서 훨씬 더 충격적인 부분은 물론 일제 시대 때의 일본 지배자와 그 조선 협력자에 대한 ”긍정적인 재인식”이었다. 물론 일제시대에 근대적 지배층으로 부상한 계층의 생물학적, 제도적 후계자들이 지금도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으로서 이 사회에서 군림하고 있다는 것쯤이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그들이 자신의 ”계보”에 대해 이 정도의 ”자긍심”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좀 새롭다. 옛날 같았으면 적어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겉치레로서 민족주의적인 독립운동이라는 ”법통”을 강조했지만, 외국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한국 자본들도 세계 무대에 보다 강력하게 나서는 ”세계화 시대”라서 그런지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재인식>에서는 독립운동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논문은 아예 없다. 그 대신에 일제 시대의 조선총독부와 일본 자본, 그리고 조선의 예속 엘리트라는 ”지배동맹”에 대한 ”재인식”은 놀라울 만큼 ”전향적”이다. 예컨대 평소에 민족주의 그 자체를 그리 좋게 여기지 않는 ”자본주의적 국제주의자”인 이영훈교수는, 해외 독립 운동 등 식민지 시대의 어느 다른 부류의 민족주의자보다도 ”신흥 중산층의 실용적인 민족주의”에 가장 (호의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고 자백한다 (제2권, 629쪽). ”신흥 중산층”이라고 하니 일본인 소유 공장의 조선인 기술자나 의사, 변호사 등이 당장 떠오르겠지만 이영훈교수가 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예컨대 경성방직의 김성수 같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일가가 1920년에 연간 2만 석의 쌀을 수확하여 대부분을 일본을 수출하는 ”호남 제일의 대지주” 김성수, 김연수 형제 가 ”신흥 중산층”이라고?  물론 이영훈교수가 ”친일 예속 재벌” 같은 용어를 아주 싫어하는 것까지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 관계까지 무시하면 문제다. 이영훈교수가 김성수의 모습에서 근대적 한국 민족주의의 내부적인 모순을 찾고자 한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의 강력한 문명에 한없이 경도되지만, 동시에 그만큼이나 강렬하게 조선사람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편으로는 친일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자기를 발견해가는 식으로 근대 민족으로서 한국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이 식민지 시기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2권, 629쪽). 친일적 대지주, 대자본가, 지식인들의 이와 같은 ”자기 분열”, 즉 제국에 대한 흠모와 혐오의 이중주를 보여주면서 이영훈교수와 그 공저자들이 오늘날의 지배계급의 전신인 ”친일파”에 대한 독자들의 거의 본능화된 반감을 씻으려 한다. 물론 그들의 말에 일말의 진리가 없지 않아 있다.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가의 일부가 일본의 부국강병을 흠모할 수 있었던 반면, 일제에 예속돼 있었던 조선 토착 엘리트도 본인들이 스스로 지배민족이 될 수 없었던 이상 지배 민족에 대한 질시와 함께 나름대로의 부르주아 내셔널리즘적 사고를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다. 식민지에 ”협력”과 ”반항” 사이에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이야 이미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것이다 .  문제는, 김성수 같은 자들이 ”민족교육” 등의 여러 분야에다 ”민족주의적 색채”의 투자를 계속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민중의 증오가 해방 직후에 분출됐다가 요즘까지도 이어져가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민족주의적 정서”만을 이유로 들기 어려운 것은, <…재인식>의 공저자들도 인정했듯이 한국에서의 민족주의 등의 ”이념”들이 엘리트적인 색채가 짙어 민초들까지 생각보다 그렇게 빨리 확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2권, 622-625쪽). 민중들의 ”친일파” 혐오증을 부추기는 것은, 감상적인 ”민족주의”보다는 김성수 같은 자들의 치부 (致富)가 소작농과 노동자에 대한 철저하고 무자비한 착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 저들이 남에게 ”황군에 입대하라”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본인들의 일가만큼 철저하게 보호했다는 점 등에 착안하는 일종의 ”계급적 무의식”일 것이다. 그런데, <…재인식>에 실린 식민지 시대의 공업에 관한 논문 (”식민지 시기의 공업화 재론”, 김낙년, 제1권, 188-228쪽)에서는 조선 노동자들의 저임금이 식민지 시대의 조선을 일본과 조선 자본가들의 ”낙토” (樂土)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지만 (202-203쪽) 과연 김성수를 ”민족주의적 부자”로 만든 경성방직의 여공들이 하루에 얼마 받았는지, 그리고 그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파업 등의 투쟁을 어떻게 전개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없다. 자산층, 유식층에 대한, 자산층, 유식층을 위한, 그리고 자산층, 유식층에 의한 ”뉴라이트 사학”에서는 노동자나 빈농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나 같아도 김성수 같은 자들을 ”민족 반역자”로 지정하여 ”민족 정기의 재판”에 세우는 데에 별다른 의미를 발견하지 않는다. 대신에, 저들이 일제와 유착하여 노동자와 소작인들을 어떻게 착취했는지, 자본의 원시 축적 시기의 과(過)착취를 어떤 ”민족” 이데올로기로 어떻게 포장, 호도했는지, 그리고 식민지 시기의 야수적인 자본주의가 1945년의 극우반공 체제하의 ”극단적인 자본주의”로 어떻게 계승됐는지를 비판적으로 해부할 필요는 꼭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대한 어떤 형태의 비판의식도 이 책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일제시대의 ”법치의 체계화와 심화”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열심히 찾아내면서도 그 당시에 만연했던 경찰의 고문 행위를 단 한 줄로만 처리한 (”일제하 법치와 권력”, 이철우, 제1권, 145-187쪽) <…재인식>… 이 책은 오늘날의 승자, 즉 남한의 지배계급의 식민지 때와 그 후의 ”계보”를 거의 긍정 일변도로 ”재인식”하지만, 계급사회 역사의 수레바퀴에 밟혔던 그 수많은 개인들의 신음소리를 철두철미하게 외면한다. 이 책은 민족주의의 ”민족 공동체” 신화를 해체시키고 개인의 복합적인 내면 (예컨대 제국에의 협력과 제국에 대한 혐오의 ”불편한 공존”)을 복원한다고 하지만, 권력과 부, 근대적인 지식이 없는 다수는 이 책의 공저자의 시각으로서는 아마도 ”개인”으로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들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한국 근현대사의 구조화된 고통 – 예컨대 경찰 고문이나 군사주의의 폐단, 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착취 등 – 이라는 저들의 ”승리”의 어두운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 붓다가 고통의 실체와 고통을 없애는 길을 이야기하지 않는 모든 ”말”을 불필요한 것으로 본 것이고, 최근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지배”와 ”착취”라는 계급사회의 본질을 외면하는 사회과학을 ”속류”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류의 ”역사 아닌 역사”는 단순히 불필요하고 속된 것만이 아니다.  이 책의 내용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적 근대성에 내재돼 있는 수많은 모순점들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이 사회의 통치 그룹에 합류한다면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동등한 대화의 가능성이 더욱더 희박해질 것이고, 이 사회의 고질적인 모순들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결국 폭발로 이어지고 말 가능성이 더욱더 커질 것이다. 이 책을 묶은 분들이 과연 이와 같은 종국 (終局)을 원하는가? 주관적으로야 원하지 않겠지만, 짓밟힌 이들에 대한 오만한 무관심은 결국 피의 복수를 부른다는 역사의 진리를 잘 모르고 계시는 모양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