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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6/16
    사랑 성욕 식욕
    한울타리
  2. 2005/06/16
    대우 패망 보고서
    한울타리
  3. 2005/06/16
    웹진에서 퍼온 글
    한울타리
  4. 2005/06/09
    동전의 추억
    한울타리
  5. 2005/06/09
    색안경부터 벗자.
    한울타리
  6. 2005/06/08
    상용차산업 연구용역사업 마무리
    한울타리
  7. 2005/06/08
    고충처리 장기근속자의 처우개선은 노동조합의 임무(1)
    한울타리

사랑 성욕 식욕

“사랑, 마약과 같다” 연인 17쌍 뇌 조사…“연인 보면 도파민 증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상태가 마약을 복용한 사람의 상태와 같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호주 일간지 에이지는 미국 뉴저지주립대학이 발표한 논문 ‘사랑에 빠진 상태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인용해 최근 이같이 보도했다.

연구를 이끈 헬렌 피셔 박사는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자기 절제력을 잃고 때로는 지나친 광기를 보이는 등 비이성적인 행동을 보인다”며 “사랑은 성욕과 식욕보다 강한 욕구”라고 말했다. 피셔 박사 연구팀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뉴저지주립대학의 학생들 중 막 사랑을 시작한 연인 17쌍의 뇌를 정기적으로 조사했다.

 

모두 2500번에 걸쳐 연인들의 뇌 상태를 조사한 결과 사랑에 빠진 이들은 상대방의 사진을 볼 때마다 뇌 활동이 활발해졌고 도파민 수치도 높게 나왔다. 도파민은 신경전달물질로 그 수치가 높으면 자제력을 잃게 된다. 마약으로 잘 알려진 코카인을 복용하면 도파민 수치가 크게 증가한다. 피셔 박사는 “이처럼 사랑의 감정이 강할수록 도파민의 수치가 상승하기 때문에 마약을 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도파민 수치가 높아지는 경험은 중독성이 있어 마약에 중독되는 것처럼 한번 깊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은 이별 뒤에 서둘러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도파민이 지나치게 높아진 상태가 되면 자제력을 잃고 위험한 행동을 하기 쉽다고 한다.

이번 연구를 함께 수행한 의사 로스 브라운은 “사랑의 감정이 지나치면 자기 통제력을 잃어버리거나 상대방에게 집착하고 심지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도파민의 수치가 지나치게 낮으면 파킨슨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며 “사랑의 감정을 적절히 잘 조절한다면 사랑은 뇌의 활동을 크게 발달시켜주는 훌륭한 삶의 활력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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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패망 보고서

김우중 씨가 한국으로 자진 입국을 했다 그와 함께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한국경제를 무너뜨린 장본인 탁월한 경영인 등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오늘자 보도에는 구속수감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그를 경제인들이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라도 작성할 모양이다. 나라경제를 말아먹은 그를 공적(?)을 들먹이며 연로한 그에게 선처를 호소할 거라는데 정몽구 회장도 그자리에 나왔다 한다.

가재는 게편인가?

 

 

"대우패망 예견 보고서, 당시로선 천기누설"
[인터뷰] 98년 '노무라보고서' 낸 고원종 동부증권 부사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14일 귀국한 이후 김씨 공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98년 10월 '대우사태'를 예견한 보고서를 작성해 파문을 몰고 온 고원종 동부증권 부사장이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고 부사장은 지난 98년 10월 노무라증권 조사부 재직 시절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Alarm bells is ringing for Daewoo group)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대우사태를 예견했었다.

<오마이뉴스>는 15일 오후 서울 여의도 동부증권 본사 사무실에서 고 부사장을 만나 대우관련 보고서를 작성하게 된 배경과 김 전 회장 귀국과 관련한 그의 입장을 들어봤다.

당시 보고서가 시장에 불러온 충격은 거의 '쓰나미'급이었다. 이 보고서가 나오면서 당시 시중에 떠돌던 대우 위기설이 본격적으로 수면위에 떠오르게 됐다. 이에 따라 슬슬 시장의 눈치만 살피던 금융권에서도 본격적으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고 부사장은 당시 이 같은 '보고서 파문'에 대해 "이를테면 천기누설 때문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는 "자신감을 갖고 보고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남들보다 많이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라며 "지금도 그런 상황이라면 똑 같이 보고서를 작성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당시 외국계 증권사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보고서 작성이 수월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만일 한국 증권사 소속이었다면 보고서를 썼더라도 윗 선에서 '커트'가 돼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 부사장은 "다만 지금은 98년 당시 대우처럼 바퀴 하나에 의존해 위태롭게 굴러가는 대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며 "보고서 작성이후 한국 기업의 질이 크게 개선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보고서가 나올 당시 한국의 한 대형증권사 투자분석부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비록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글로 옮겨놓았다고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상 누구도 이 같은 보고서를 쉽게 내놓지 못했다"며 "분명한 건 이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부터 각 증권사들도 그제서야 대우 관련 보고서를 하나둘 내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고 부사장은 "요 며칠전부터 하루에도 수십번씩 언론사 등으로부터 김우중 회장 귀국에 대한 소회와 공과에 대한 재평가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고 있다"며 "그러나 전부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내 일을 했을 뿐'이다"고 덧붙였다.

고 부사장은 보고서 파문 이후 ABN암로증권 리서치헤드, SG증권 한국지점장 등 외국계 증권사를 두루 거친 후 지난 2003년부터 동부증권 리서치센터장 및 부사장으로 일해오고 있다.

대우 패망 예견한 '노무라보고서'란?

1998년 10월 29일 노무라증권에서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Alarm bells is ringing for Daewoo group)는 제목을 단 기업 분석보고서를 발표한 이후 시장은 발칵 뒤집혔다. 당시 이 보고서는 대우가 안고 있는 핵심 리스크를 적나라하게 분석해 시장에 큰 파문을 몰고 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대우위기 핵심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했다. 우선 정부에서 채권발행을 규제하면서 더 이상 채권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증자를 통해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끌어모으려 했지만 당시 삼성, LG만으로도 버거웠기에 이마저 쉽지 않았다.

결국 보유중인 자산을 팔아 유동성을 확보해야 했으나 대우가 보유한 자산은 대부분 '3류'에 해당해 이 역시 불가능했다는 것. 물론 이 같은 내용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상 이를 보고서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보고서가 나오면서 당시 시중에 떠돌던 대우 위기설이 수면위에 떠오르게 됐고, 금융권의 자금회수 역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보고서를 작성한 고원종 동부증권 부사장은 당시 이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비난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고 부사장이 과거 삼성투자자문에서 근무한 경력 때문에 이른바 '삼성배후설'이 시장에 퍼진 것. 그러나 고 부사장이 사회 생활의 첫 발을 대우그룹(대우투자금융)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같은 근거없는 '설'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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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에서 퍼온 글

1. 한반도의 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한국역사연구회 웹진


  8.15 해방일. 36년간 일제 통치의 신음에서 벗어난 경사스러운 날이면서 동시에 민족분단의 전조를 드리운 날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한반도 해방이 민족해방 투쟁 세력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 말하자면 우리 민족의 자력에 의해 달성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해방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전적으로 미?소가 이끈 연합국 승리의 결과이자 일본의 패배로 인해 실현된 것이었다. 물론 외세에 의한 해방이 우리 민족의 건국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역사적으로 확인된 바와 같이, 해방 후 전국적으로 등장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등은 우리 민족 스스로에 의한 건국 역량을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해방의 경로는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찾아야만 한다.


일본의 항복


  “1945년 8월 소련군은 조선 북부에서 일본군에 맞서 전투행동을 벌였고, 그들의 승리적인 결과는 온 나라의 운명에 분명한 영향을 주었다. 소련군의 신속하고도 가공할 타격에 의해 도처에서 일본의 군, 경찰 기구가 붕괴되고 식민기관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를 통해 자유와 독립을 향한 조선의 도정에서 주요 장애가 제거되고, 가장 중요한 민족적 과업이 실현되었다”(소련과 조선, 모스크바, 1988, 131쪽)


  이 인용문은 한반도 해방의 관한 러시아측의 견해를 담은 주장이다. 다소간 과장이 섞여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 일본의 항복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미국의 원자폭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주장일 수도 있다. 그만큼 일본의 패전에 관한 진실이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현실이기도 하다. 


  일본과의 지루한 전쟁을 끌고 있던 미국은 일찍부터 소련을 참전시켜 일본을 패배시키고자 하였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사할린 남부 및 그 부속도서의 반환, 쿠릴열도의 소련 할양 등과 같은 참전 대가를 보장 받은 다음 대독전쟁이 끝난 3개월 후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같은 해 5월 독일이 항복하고, 이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지자 일본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막아 전쟁 종결에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고 전후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서, 일본측은 소련의 참전을 자체 생존의 갈림길로 보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소련의 중립화를 시도했던 일본 지도부는 여러 차례에 걸친 소련과의 물밑 접촉에서 전쟁 중재자 역할을 해줄 것을 원했지만 소련은 이를 거부하였다. 크레믈린지도부는 대일전쟁에 참여하여 자국의 이권을 확실하게 확보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사실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이 나라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종용하였다. 그것은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신속히 끝낼 방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1945년 7월 원폭실험에 성공하면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 처방은 수십만의 무고한 인명 희생을 고려하지 않은 조처였다. 미국은 원폭투하로 자국의 전쟁 희생을 감소시키려 했다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원폭을 맞은 일본지도부는 처음 공황 사태에 빠졌지만 항복 의사를 비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8월 9일 소련군이 참전하자 일본의 항전 의지는 급격히 사그라지기 시작하였다. 14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권고한 8.14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날인 15일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항복방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소련의 참전 


  한반도의 해방 과정에서 소련의 역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대일전의 목적과 대한반도 작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련은 일본군국주의의 분쇄와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을 대일전쟁의 기본 목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소련의 구체적인 이해관계는 1904-1905년 노일전쟁 시기 일본에 빼앗긴 남사할린을 되찾고 태평양으로의 자유로운 출구를 확보하며,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협을 제거하는데 있었다. 또한 해방된 만주와 한국이 새로이 미국 등 다른 열강에 종속되거나 소련에 반대한 침략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신속한’ 참전은 이에 대한 연합국과의 약속을 지키는 한편으로 미국의 원폭투하에 일본이 조기 항복할 것을 우려한 스탈린의 결정으로 이루어졌다. 만일 자국의 참전 없이 일본이 미국에 항복할 경우 소련은 이미 약속 받은 이권을 확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도 보장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전장 4천 km가 넘는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면공격을 개시하였다. A.M. 바실리옙스키 원수가 이끄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부의 지휘를 받은 군대들은 자바이칼 전선군, 제1, 2 극동전선군, 태평양함대, 아무르강 적기 소함대로 이루어졌다. 170만명이 넘는 소련군 총병력수는 100만 명에 못미치는 일본 관동군에 비해 압도적인 숫자였다.


  소련군의 북한 진격은 일본 해군기지가 소재한 웅기, 나진, 청진에 대한 폭격과 더불어 개시되었다. 10일 오전 제1극동전선군 소속 제25군 부대는 경흥을 점령하였다. 11일에는 태평양 함대 소속 정찰대원 140명이 별다른 작전 없이 웅기항에 상륙하였고, 그 이튿날 육전대 주력이 도착하여 25군 393 보병사단과 공동으로 이 지역을 장악하였다. 12~13일에는 일본군과의 소규모 전투가 벌인 후 나진을 접수하였다. 주목할 것은 13~16일에 걸쳐 벌어진 청진 전투였는데, 이는 한반도 내 대일 전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작전이었다. 제25군 393 보병사단은 일본 나남 보병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16일 하오 육전대와 공동으로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은 일본군이 해로를 통해 본국으로 퇴각할 수 있음을 경계하여 19일에 어대진, 21일에 원산에 해군을 상륙시켰다. 24일에는 제25군 39보병사단 낙하부대가 평양과 강계에 투하되었다. 소련군의 진격과정에서 청진을 제외하고 큰 전투는 없었으나 도처에서 중소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짧은 기간에 벌어진 교전에서 발생한 소련군 희생자 규모를 살펴보면 전투가 비교적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으로의 진격을 담당한 제25군에서는 모두 4,717명의 희생자가 났다. 그중 전사자는 1,446명에 달했고, 실종자와 부상자는 각각 152명, 3,119명에 이르렀다. 소련군의 북한 내 사상자는 지상군과 해군 모두 합쳐 1,963명이었다. 3년간의 걸친 한국전쟁 기간에 겪은 소련군 인명 피해를 능가하는 사상자가 불과 10일만에 발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초기에 북한이 조선 해방에서 소련의 ‘절대적인’ 역할을 주장한 것도 조선 내 대일전투와 소련군이 입은 피해와 무관하지 않았다.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은 수년간 일본에 대적해온 미군의 역할에 비하면 미미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일본의 저항 의지를 꺾고 항복을 재촉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녔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항복은 1차적으로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일본군의 전력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원폭을 사용한 미국의 군사적 행동에 기인한 것은 틀림없다. 여기에 소련군의 참전은 일본군을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킨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과 김일성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난 지역에서 새로운 국가 형성을 위해 매 지도자들이 수행한 첫 행보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들의 초창기 정치 활동이 향후의 전략적 방향을 결정할 밑그림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귀국 직후 김일성의 활동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먼저 지적할 것은 김일성의 입지에 대한 국내공산주의자들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려진 대로 9월 11일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식민지 시기의 오랜 공백 기간을 뒤로 하고 마침내 재건되었다. 소련이나 김일성의 관여 없이 독자적으로 결성된 조공은 처음에는 해외 공산주의자들을 배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일성만은 예외로 취급하였다. 박헌영 지도부는 아직 귀국하지 않은 김일성을 사실상 조공의 2인자로 앉혔다. 이로써 그의 입지는 귀국 전에 이미 국내공산주의자들에 확인됨 셈이 되었다. 


  해방 후 한 달 여가 지난 9월 19일 원산항에는 소련 화물선 ‘푸가초프호’를 타고온 소련군 복장을 한 70여명의 조선인들이 내렸다. 김일성이 이들을 이끌었고, 항구에서 그를 마중한 인물은 원산시 경무사령관 V. 꾸추모프 대좌와 일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수년간 기다리던 대일 항전에 참여하지 못한 채로 귀국한 김일성으로서는 해방의 감격 못지않게 진한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었다. 이 점은 광복군의 참전이 좌절된 채 쓸쓸하게 귀국한 김구의 심정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의 귀국에 맞춰 서울에서는 ‘김일성장군 환영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은밀히 이루어졌고 떠들썩한 환영 인파도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김일성은 줄곤 마음속에 품어온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취한 제일보는 자신의 동료 부하들을 북한 각지에 파견하는 일이었다. 원래 그들의 임무는 각지에 설치된 소련군 경무사령부를 지원하는 일이었지만 이 보다는 해당 지역의 정세를 파악하고 현지 정치세력들과 접촉하는 일을 맡았다.


  9월 22일 평양에 들어온 김일성은 외부의 노출을 꺼린 채 건국이라는 총체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를 위해 지역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 건설을 서둘렀다. 이 과정에서 김용범(金鎔範), 박정애(朴正愛) 등 평남지역 공산주의지도자들의 협력과 지지를 받았다. 사실 국내적 조직기반이 별로 없었던 김일성으로서는 이들과의 ‘자연스런’ 합작이 향후 정치 행보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귀국 직후 김일성이 북한 전역의 공산주의자들을 즉시 장악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동료 부하들이 각지에 파견되면서 일부 지역에서 현지 토착공산주의자들의 ‘냉대’를 받았던 데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김일성이 공산주의자들 내의 상징적 입지와 소련군 당국의 지원 등에 힘입어 북한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박헌영의 조공은 자신의 영향력을 북한 지역에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던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측은 남북이 미소양군에 의해 분리된 조건을 고려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에 착수하였다. 남과 북은 통치의 주체가 다른데다가 미군이 주둔한 남한 지역에 본거지를 둔 조선공산당 중앙에 의존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13일 평양에서는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열려 조선공산당 직속으로 북부 분국이 창설되었다. 북부분국은 조공 중앙의 지휘를 받는 기관으로 탄생하였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당 창당이었다. 이 과정에서 오기섭(吳琪燮), 정달헌(鄭達憲) 등 일부 국내공산주의자들이 ‘1국 1당’ 원칙을 들어 반발하기도 했으나 명분과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웠다. 김일성은 분국 창설을 주도하였음에도 실제로 책임비서 자리는 김용범에게 양보하였다. 자신이 한 정파의 수뇌보다는 인상보다는 범민족적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던 것이다.      


  분국결성을 결정할 다음날인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는 10만 이상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평양시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일성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을 보인 자리였다. 이 대회는 소련군을 환영하고 새조선 건설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그런데 이 행사에는 일제하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이 나온다는 예고에 따라 수많은 인파들이 운집하였다. 김일성으로서는 자신의 명성이 눈으로 확인된 행사였고, 소련군당국은 그의 대해 더욱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의 정치노선은 조선이 사회주의로 곧바로 이행하는 것보다는 일정한 자본주의적 단계를 거치는 방향으로 자리하였다. 당시 이는 북한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권력’ 수립 노선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노선은 소련측이나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취한 노선과 거의 동일한 입장이었다.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 수립 노선의 실천은 민족주의자들과의 연합을 기초로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일이 우선시되었다. 이때 민족주의세력의 범주에서 친일분자는 당연히 제외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 기준에 맞는 반일민족주의자와 친일파를 엄격히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부 공산주의자들도 그렇거니와 일제 시기 상층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친일적 색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과 반일은 기준은 얼마만큼 ‘능동성’을 발휘했는냐의 여부로 가려지기가 쉬웠다.  


  김일성측이 주목한 통일전선의 주된 대상은 평안도 민족주의자의 ‘대부’ 고당(古堂) 조만식이었다. 조만식은 1920년대 초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여 국산품장려운동을 전개하였고, 1927년에는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기도 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지도자였다. 일제 말기 조만식이 친일행위를 했다는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그 ‘근거’는 훗날 김일성조차도 의심할 만큼 박약한 것이었다. 아무튼 민족주의 진영의 거목이자 대중적 상징성과 명망 있는 인물을 공산측이 놓칠 리가 없었다.  


  민족주의 세력의 명망가를 협력자로 찾고 있었던 소련군 당국과 김일성은 조만식의 위상과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적극적인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였다. 조만식도 공산측과의 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물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합작은 김일성 귀국 이전에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라는 자치기관에 양측이 공동 참여한 것으로 이미 실현된 바 있었다. 조만식은 이 기관의 위원장직을 맡았었다.    


  김일성이 대중앞에 공개적으로 등장하기 전 조만식과의 만남을 통해 깍듯한 예를 갖추고 협력을 요청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조만식 역시 김일성의 항일투쟁 공적이 높이 평가함으로써 양자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김일성은 조만식에게 민족주의세력의 정당 결성를 권유하였고, 조만식은 이를 받아들여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조선민주당 창당은 김일성 동료인 최용건(崔庸健)과 김책(金策)이 직접적인 관여를 할만큼 공산측이 신경을 쓴 사안이었다. 특히 최용건은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당수를 맡기까지 하였다. 조선민주당 일부에서 나온 최용건 중용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그의 오산학교 스승이었던 조만식 자신이 직접 무마하였다. 창당 당시 조선민주당은 “김일성의 주도에 의해 당이 창당되었다”고 공공연히 선언할 만큼 김일성과의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간의 협력적 분위기는 기본적인 정치적 견해와 각종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점차 간극이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면, 조만식은 중앙행정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공산측의 요청을 “분단을 우려하여” 거부하였다. 또한 소작료율 책정에서 공산측은 지주와 소작의 배분을 3:7제로 하자로 한 데 반해 민주당 측은 4:6 내지 5:5제를 주장하면서 갈등적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해방 직후 몇 달 간에 존재한 민공의 합작만을 보면 그해 12월 말에 터진 조선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한반도 정치세력의 결정적인 분열을 예상할 수는 없었다.  

  한반도 운명에 관한 불확실한 정세가 전개되어 가는 가운데 김일성은 점차 활동의 폭을 확대해 갔다. 그는 12월 중순 김일성은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책임비서로  선출되면서 처음으로 공산주의자로서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각 지방당에 대한 분국의 조직적 지도와 상하부의 조직체계가 혼란에 빠진 상황은 김일성 자신이 나서서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 때 이후로 김일성은 사실상 북한의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의 행보는 한편으로 박헌영의 ‘지휘’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해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2. 모스크바 결정과 북한의 변화


  한반도의 비극적인 분단은 해방 직후 미소 양군에 의한 남북 분할 진주에서 시작되었다. 남북에 각각 진주한 미소 양군은 각기 통치 체제를 갖추어 갔지만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한반도 분단이 가시화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해방 후 4개월 동안 미소간에는 한반도의 향후 운명에 관한 어떠한 협의도 진행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이 주장한 신탁통치가 실시될 것이라는 소식에 반탁 분위기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소련측도 인정했듯이,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들은 출판물과 유인물을 통해 주민들 사이에서 조선의 신속한 통합, 독립적인 조선 정부 창설, 타국에 의한 조선 신탁통치 불용 등의 선동을?펼쳤다. 36년간 일제 식민지 통치에 지친 조선인들은 또 다시 열강의 개입과 지배가 아닌 즉각적인 독립을 원했다.


   모스크바 결정과 그 파장


  1945년 12월 16~26일 미?영?소 외상들은 모스크바에서 회동하여 한반도를 포함하여 점령지역의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 때 채택된 한국문제에 대한 4가지 결정 가운데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그것은 독립국가로서 조선의 부활 등을 위한 조선 임시민주정부 수립하는 것과 5년 이내로 조선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후견)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과정에서 소련과 미국은 각각 한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조선)임시정부 수립과 미, 소, 영, 중 4대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 실시를 주요의제로 들고 나왔다. 이 내용으로만 보면 소련측 안이 한국민의 염원에 가까운 것이었다. 소련은 좌파세력이 우위를 점하는 한반도 현실에서 곧장 정부를 수립할 경우 자신에 ‘우호적인’ 정부가 나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반면 미국은 제2차대전시기부터 식민지, 종속국 처리 문제에서 신탁통치안을 제기한 바 있었으며, 이를 통한 ‘미국화’를 추구하였다. 한국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결정은 소련측 방안이 채택된 것이긴 하였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미소간 타협의 산물이었다.  


  모스크바 결정이 한반도에 전해지자 신탁통치를 놓고 정국은 극렬한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는 좌우를 막론하고 거세었다. 우선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파민족주의진영은 곧장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이를 위한 세력 결집에 나섰다. 공산당측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극한 반응을 유보했으나 신탁통치에 대해서는 반대의 기운이 역력하였다. 김일성도 처음에는 “이와 같은 결정은 우리의 주관욕망과 다소 배치되는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고 다소 유감스러운 입장을 표명하였다.


  남과 북 좌익진영의 이러한 분위기를 바꾼 것은 소련군 당국이었다. 소련측은 모스크바 결정이 소련의 주도로 합의되었다는 점, 신탁통치는 조선을 다시 강대국의 통치 속으로 밀어넣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독립국가로 발전하는데 지원과 협력을 의미한다는 점을 들어 좌익세력들을 설득시켰다. 특히, 두 번째 논리는 공산당 지도부의 입장 정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침내 1946년 1월 3일을 기해 남북의 좌익세력은 삼상회의 결정을 전폭 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신탁통치 반대라는 정서적 분위기를 돌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족주의진영은 반탁운동의 분위기를 자체의 세력 확대를 위한 기회로 삼았다. 이 반탁투쟁의 핵심은 우익의 정부수립 방안이었던 김구가 이끈 중경임시정부 추대운동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결정의 공표 후 공산측이 직면한 문제는 신탁통치 조항이 포함됨으로써 남한에서의 반탁 운동을 촉발시켰고, 그 책임이 소련에 전가되었다는데 있었다. 그 때문에 반탁운동은 반소, 반공운동으로까지 전화되어 있었다. 이에 소련 타스(Tass)통신은 1946년 1월 25일  모스크바 결정에 이른 미소간 협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신탁통치의 제안자는 미국임을 폭로하였다. 당시 서울에 온 소련군 장성 스티코프는 기자회견을 열어 모스크바 결정의 ‘본질’을 직접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남한에서 벌어진 반탁운동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소련이 미국측 탁치안과는 달리 “조선인민의 총체적인 부흥 및 조선 독립국가 수립을 지원”한다는 의미를 줄곧 강조하였고, 또한 미국이 사용하던 신탁통치(trusteeship)란 용어 대신에 ‘후견(오뻬까/опека/)’이란 용어를 써서 차별성을 부각시켰지만 효과는 별무였다. 모스크바 결정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미소가 신탁통치에 대한 정의를 정확히 합의하지 않은 것이 문제로 드러난 셈이다. 소련은 미국의 신탁통치와는 다른 개념을 사용했지만, 그 차이는 사전에 논의되지 않았던 것이 것이다.

  남한의 우익세력들은 반탁운동을 통해 자신의 미약했던 조직력을 결집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찾아온 ‘호기’를 놓치려하지 않았다. 반탁운동은 한편으로 친일세력들을 애국자로 둔갑시켜주는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했다. 


한민족의 정신적 분열과 북한의 변화


  미소가 합의한 모스크바 결정의 실행은 이후의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방안의 실천이 논의되기도 전부터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른바 탁치정국은 남한의 좌우세력을 극단의 대립으로 몰고 가 민족과 공산 양진영의 협력은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보였다. 양측의 대립을 해소할 어떠한 움직임도 나타나지 못할 만큼 갈등의 골은 깊이 파였다. 심지어 양진영간에는 테러와 같은 폭력사태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남한과 달리 북한에서의 반탁운동은 대규모적이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해방 직후 북한에서 좌우연립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조만식과 그가 당수로 있던 대부분의 민주당 지방 조직들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연대지지 서명을 거부하였다. 여러 도시들에서는 신탁통치 반대 및 공산당과 소련군에 대한 저항을 호소하는 삐라가 뿌려지고, 일부 지역에서는 소규모나마 반탁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소련군 당국은 이러한 움직임에 단호하게 대처함으로써 신속하게 상황을 종료시키려고 시도하였다. 반면 공산측은 조만식에게 누차에 걸친 모스크바 결정지지 요청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꺾기보다는 강요된 퇴장을 선택하였다.


  북한의 반탁 움직임은 사실상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다. 우익세력의 조직적 역량이 크지 않았을 뿐더러 조성된 정세에 대한 대대적인 해설 사업을 통해 대중의 이탈을 막는 등의 신속한 조치들이 취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스크바 결정이 끼친 영향은 그것이 가져온 갈등과 대립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이후 소련군 당국과 공산당지도부는 보다 완고한 정책 노선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전 그들의 공적(公敵)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로 한정하고 이외의 계층들은 광범위한 ‘통일전선’에 포함되었다면, 모스크바 결정 이후에는 반탁세력들이 또다른 공적으로 추가되었다.


  공산측의 입장에서 이 결정은 새로운 조선 건설에 있어서 진보적인 대안이었다. 따라서 반탁세력을 반민주주의자로 규정할만큼 그에 대한 반대 입장은 용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후 그들의 주장은 모스크바 결정의 지지와 그 정확한 실행에 집중되었고, 자신들의 기반을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북한의 개혁적 변화를 도모하였다. 이같은 노선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또한 소련과의 합의를 사보타지했던 미국과 마찬가지로 분단을 강화시키는 역기능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의 역사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미소의 패권적 전략에 모두 전가하였다. 물론 두 국가의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가 분단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때 우리 민족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말하지만 때로 그것은 강조를 위해 동원된다. 만일 좌우를 막론한 모든 정치세력이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동일한 태도, 말하자면 찬성과 반대 중 어느 한쪽에 쏠렸더라면 분단의 동기는 크게 약화되지 않았을까. 이는 물론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민족구성원 속에 이해관계를 초월한 정치이념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36년간 일제 통치하에서 친일과 그 반대편의 모순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당시 한반도 거주민들의 ‘대다수’가 현명한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아쉬움은 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우리와 같이 미소의 분할점령을 맞고도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국가를 선택한 유럽의 작은 국가인 오스트리아 좌우세력들의 결행이 부러운 까닭이다.      





3. 토착 질서를 뒤흔든 ‘혁명’, 토지개혁


  토지개혁, 그 필요성과 계기는


  8.15 해방 후 절대 다수의 농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문제는 토지개혁을 통한 일제시대의 모순된 토지소유관계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북한에서 더욱 첨예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북한 인구의 80%는 농민이었고, 그 중 80%는 소작농과 빈농이었다. 더욱이 전체 농가의 4%에 해당되는 지주들이 부침땅 면적의 58.2%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업에서의 봉건적인 질서 타파는 사회경제적 개혁 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며, 모든 정치 세력은 절차와 방식의 차이는 있었지만 토지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시기였다. 토지개혁은 전국가적, 민족적 차원의 과제였기 때문에 남북으로 분리된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 전국적 차원의 정부 수립 이후에 가능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는 각 인민위원회의 지도하에 토지 소작료 율을 60~70%에서 30%로 줄이는 이른바 3:7제를 임시적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 한국문제 결정(앞의 글 참조)으로 조만식 등 민주당 우파 수뇌부가 퇴장하고, 좌우세력이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등 한반도 정세가 긴박해지자 공산측은 북한을 정치, 경제적으로 강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른바 북한의 민주적 근거지를 강화시켜 전한반도 차원의 혁명을 수행한다는 ‘민주기지론’의 발상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그 출발은 북한 최초의 중앙권력 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임위)의 수립이었다.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임위는 좌우세력의 대표들로 구성되었지만 공산측이 확고한 주도권을 쥔 채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바로 북임위는 출범과 함께 토지개혁을 자신의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논란과 시행


  1945년 말부터 공산측은 토지개혁 실시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지속하였다. 초창기에 공산측에 의해 구상된 토지개혁안들은 지주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지주의 토지 몰수 범위를 40정보 이상을 소유한 자로 규정한다든지, 동유럽 국가의 실례를 적용하여 유상몰수를 실시하고 몰수된 토지는 인민위원회의 관리하에 20년간 분할 상환 방식으로 농민들에게 넘기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이 보다 엄격한 법령안에 따르더라도 조선인 지주 소유 토지의 몰수 규모는 10정보 이하를 소유하는 지주의 경우 5정보 초과분을, 10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는 전체 토지를 몰수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초기 토지개혁 구상은 상당히 온건한 방향에서 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 결정으로 인한 정세 변동은 북한만의, 그것도 매우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예고하였다. 1946년 2월 21일자로 작성된 법령안은 5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 토지를 몰수할 필요가 있으며, 몰수된 토지는 국유화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토지국유화에 대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농민 대표들도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은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이 법령은 일본인토지 소유와 조선인지주들의 토지소유 및 소작제를 철폐하고 몰수된 토지를 농민의 소유로 넘기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토지개혁 법령안은 북한 내부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를테면, 2월 24~26일 간에 열린 농민대회 분과 회의에서는 다수의 찬성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가혹성’이 지적되었다. 3월 5일 법령 공포일에 열린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회의에서조차 일부 비공산계 위원들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토지개혁 법령이 봉건제도의 철폐에 맞추어졌고 자본주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법안은 채택되었다. 


  한 가지 쟁점은 ‘토지의 국유화’ 주장이 어떻게 해서 갑작스럽게 ‘농민의 소유’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는 북한과 소련지도부가 농민들의 보다 많은 지지를 받기 위해 그들의 토지소유 욕구를 고려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농민의 토지 소유를 규정한 동구국가들의 개혁 경험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법령은 토지의 개인 소유를 허용하였으나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경리를 억제할 목적으로 토지의 매매, 저당, 소작을 금하도록 하였다. 


토지개혁은 3월 7일부터 4월 1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토지개혁을 실무적으로 담당한 것은 농촌에서 빈농과 농업노동자 중심으로 조직된 농민위원회였다. 농민들 스스로 개혁의 주체로 나서도록 한 것이었다. 당시 북한 전체 토지 면적은 182만 98 정보였는데, 그중 55.4%에 해당되는 100만 8,178정보가 몰수되었다. 몰수된 토지는 고용농민, 토지 없는 농민, 토지 적은 농민, 이주한 지주 등에게 평균 1.35정보씩 분배되었다. 즉, 총 농업호수 112만 가운데 토지분배를 받은 농가 수는 72만호로 약 70%가량이 토지개혁의 혜택을 받았다. 몰수된 토지 가운데 일부 - 18,935정보(1.9%) - 는 인민위원회가 직접 관리하게 되어 장래 국영농장 형성의 기초를 이루었다. 소작제가 철폐된 대신 농민들은 ‘현물세법’에 따라 수확 농작물의 25%를 납부하여 인민위원회 재정의 밑거름을 이루었다. 


‘혁명’의 영향  


  북한의 토지개혁은 의도한대로 농촌에서의 봉건적 관계를 철폐할 계기를 만들었지만 반면에 지나치게 급진적 성격을 띠었다. 애초 일본인 지주나 친일 지주들의 토지만을 몰수하려던 것이 5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모든 지주로까지 그 범위가 넓혀지면서 상당한 반발을 사기에 이르렀다. 7만 호의 지주 가운데 4천 호만이 농민과 동등하게 토지를 분여 받는 것에 동의한 사실을 고려할 때, 이들의 거부감은 예고된 것이었다.


  지주와 민주당 출신 일부 인민위원회 위원들은 업무 수행을 거부했고 평양과 함흥 등지의 학생들은 동맹시위를 도모하였다. 반대세력은 테러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최용건 암살 미수 사건, 강양욱 家에 대한 테러 등은 우익반대세력의 북한 지도부에 대한 대표적인 물리적 저항이었다. 하지만 우익세력들의 저항은 사태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들의 힘은 분산적이었고 소련군과 북한 공산당에 대적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했다. 따라서 이들의 선택은 ‘잠재적인’ 반대자로 남아 기회를 엿보거나(한국전쟁 시기 수많은 민주당원들이 남쪽 편으로 돌아선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남한으로 도피하여 철저한 반공교두보 확보에 나섰다. 토지개혁이 실시된 1946년도 남한으로의 도피자 수는 다른 연도에 비해 훨씬 많았다는 것은 이 개혁이 끼친 사회적 파급력을 입증해 주었다.


  토지개혁의 결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공산당의 입지는 상당히 강화되었으며, 다른 유산계층들로부터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향후 ‘민주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발판이 마련되었다. 특히 토지개혁은 북한의 지도자로서 김일성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토지개혁 법령 발표 이전에 1개월 이상 지방을 순회하면서 농촌사정을 살필 정도로 커다란 관심을 쏟았다. 토지개혁의 전 과정과 그것의 성과는 김일성의 이름과 직접 결부되었고, 이는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해방 후 시행된 최초의 민주개혁 조치이자 동시에 식민지 질서로부터 북한 사회의 근본을 뒤바꾸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구질서의 수혜자들이 대거 물러나고 새로운 지배세력의 기반을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 또한 공산측의 입장에서 토지개혁은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토지개혁은 여기에서 직접 피해를 당한 지주세력과 그들의 영향하에 놓여 있던 다양한 계층들에게 북한체제에 대한 경계심과 이질감을 심어주어 애초 북한지도부가 의도했던 광범위한 사회계층이 결합된 민족통일전선이 실현되지 못하고, 한반도 차원의 좌우대립을 고착화시키는 하나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도 간과하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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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추억

예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항상 물건을 사고 남으면 잔돈을 어김없이 챙겨서

집에있는 작은 저금통에 항상 넣곤 했습니다.

생활화가 되어서 무의식 적으로 집안에 굴러다니는 돈 혹은 친구들과 함께

음식이나 용품을 사고남은 동전들을 달라고 요청해서 모았습니다.

몇백원이는 십원이든  서스름 없이 생기는 동전들을 모으다 보니

조그만 저금통에서 이젠 큰 저금통을 몇개씩 써야했습니다.

때론 어머니가 장을 보시고 탁자위에 영수증과 함께 잔돈몇개가 있을때면

어김없이 갔다가 저금통에 쏙~ 넣는 바람에 어머니가 급하게 물건을 빠트리고

안사서 잔돈이 필요할때쯤이면 "벌써 그새 넣었니!!" 하시면서 한숨을 쉬시곤

하셨죠 또한 친한 친구들은 의례적으로 널러오면 자신의 지갑에서 십원짜리

잔돈들이 굴러다니면 저에게 주곤 했습니다.  때론 교환도 했죠~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지폐나 카드, 전자 결제등으로 동전의 소중함을 많이

느끼지 못하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지 그 작은 동전하나의 귀중함을 일깨워

주고싶기에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옛 어른들의 말씀중에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저희집 가훈이기도 합니다.

작은것을 소중히 여기고 또한 모으는 기쁨에서 더큰 즐거움을 맛볼 수 있지요

요즘은 그 동전 하나가 얼마나 이쁘고 귀여운지 알 수 없답니다.

십원짜리 하나도 그냥 놔둘 수 없는 저이기에....한두푼 모아서...

큰 자산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일하는 책상위에 굴러다니는 동전이 있으시다면  여러분도 실천해 보세요. 아마 하루에 담배한값 사는 비용, 커피한잔 뽑아 먹는 비용도 이젠 저축하는 습관으로 바뀌지 않을까여? 경제가 어렵다고들 하네요, 요즘은 20대의 소비계층의 지출도 줄었다고 하네요, 무엇보다 생활습관과 돈을 지출하는 방법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저축하는 습관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저축하는 하루 되세여 ^^

박은주님의 글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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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안경부터 벗자.

 

이치에 맞다 생각되어 옮겨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싸움닭’을 키우는 현장정파운동?
하부영(현대자동차노동조합 전 부위원장)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 대해 비난을 퍼붓고 욕을 해댄다는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간 적이 있다. 수소문을 해서 찾아보니 입사한 지 3년도 안된,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고등학교도 다니지 않을 적 발생했던 1998년 현대자동차 투쟁을 두고 나를 비난하며, "맛이 갔다", "개량주의자다", "회사 편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옮기고 다녔다.

"당신이 나를 알아?"


만나자마자 "당신이 나를 알아?"하니 우물쭈물하다 "잘 모르는데요"라고 답변 하길래, "나도 당신을 잘 몰라. 그런데 왜 아는 척 하고 다녀"라고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요즘에는 운동에 입문하여 처음 배우는 게 인물평이다. 자기들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나쁜 사람이고 맛이 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우월성을 부각시키며 사람에 대한 오해를 키우는 것이다.
학습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하고 이 사회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모순을 깨우치기보다는 왜곡과 편견을 먼저 가르치고 배우는 모양이다. 이걸 우리는 현장에서 '색안경부터 씌운다'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눈을 뜨도록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의식을 주입한다. 리모콘만 누르면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기계 같은 행동대원만 양산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착각 속에서 일으킨 행동의 결과는 대단히 위험스럽다. 자기들 편에 서지 않으면 모두가 적이다. 진실과 정의도 구분할 필요 없이 무조건 줄을 서야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데 협조하지 않으면 경계하고 제거해야 할 적이 되어버리니 이건 운동판이 아니고 전쟁터로 변질되었다.
그들이 가르친 이분법적 사고와 흑백논리는 모두 적과 아를 편가르고, 독선적이며 강제력이 숨어 있기에, 그들 중 누가 권력을 차지한다해도 이는 독점이며 독재가 된다. 그리고 투쟁을 만들어 낼 실력도 없어 무능력한 밑천만 드러날 뿐 아니라,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누가 그들을 영혼이 빼앗긴 인간병기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상대를 전부 제거하면 그 칼끝은 곧 가르친 자들의 가슴을 향해 날아 올 것이다.

믿고 따를 지도자가 없다


하루는 '특근거부' 문제로 현장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회사측의 노동탄압에 강력한 투쟁으로 본 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어느 현장조직의 대자보가 붙어 있었고, 조합원들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조합원 대중의 여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투쟁방침이 아니라 강경한 목소리가 현장을 지배해 가는 분위기였다. 어쨌거나 결국 현장의 대의원들이 모여 논의를 했지만 특근거부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예정대로 근무를 했다. 그런데 월요일 출근을 해보니 대자보를 부착한 현장조직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했다. 그만큼 강력한 특근거부 목소리를 냈다면 당연히 그들 현장조직 소속은 출근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지적이었다.
조합원 대중은 활동가들의 일관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도 현장에서 하는 주장과 행동이 다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는 대자보를 작성하여 지침을 내리는 사람과 현장노동자들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거라고들 했다. 즉 현장조직의 운동도 구상은 학출(대학생 출신)이 하고, 실행은 현장노동자가 하는 분업화 현상이 대중투쟁의 역동성을 거슬러 오르는 모습으로 나타난 사례인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특근거부 사례는 현장에서 발생한 작은 사건이지만, 더 넓게 보면 연맹의 정파도 이와 비슷하고 민주노총의 정파간 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 등 진보운동 진영 또한 명확하게 자기 책임을 지기보다는 발을 빼고 남의 탓으로 돌리기에 명수다. 무슨 사안이 생기면 핏대 올리며 논쟁을 하지만 여전히 결과는 없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기에 대중들은 믿고 따를 지도자가 없다.

옳고 그름보다 정파의 이해득실이 우선


민주노동당 정책실에 근무하다 사직한 어느 당직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의 모든 이슈에 대해서 "이것이 어느 정파에 유리하냐"는 주판알이 튕겨지고, "부유세와 조세개혁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과 기본 원칙조차 없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정파간 갈등에 몰두하며 구체적 대응 능력을 상실한 당의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당시 민주노동당 인터넷 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사람 하나 경질하는데 민주노동당의 운명이 걸린 것처럼 피를 토하는 논리를 펼쳐졌지만, 결국 정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편협함과 대중 설득력을 잃은 주장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대립하는 양편 모두 중심과 균형을 놓치고 있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 참여여부를 놓고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라는 내홍을 겪고, 4월 임시국회에 상정된 비정규직 확대 개악안 저지를 위한 총파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현 집행부의 반대편에 섰던, '대화보다 투쟁'을 주장하던 사람들에게서 "총파업이 제대로 성공하면 이수호만 키워주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의 정책도, 민주노총의 총파업 성사여부도 정파의 이해득실이 최우선의 판단기준이 되고 있는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현실을 대변해주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우리 스스로 내부를 돌아보아도 제정신이 아니다. 이 사회의 진보와 변혁을 위해 함께 운동하는 '동지'는 간 데 없고 살벌하고 황량한 '적과 아'만 존재한다.
운동권 내부에 즐겁고 행복하며 아름다운 미래의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설 땅은 자꾸 좁아진다. 그리고 그 위에 상대만 보면 깃털을 세우고 쪼아대려고 달려드는, '싸움닭'이 칭송을 받는 무인시대 활극이 펼쳐지고 있다.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주장은 '반전평화'이고, '평등과 연대'라고 하지만 정파간에는 전쟁을 선포하고 '상대를 죽여야 산다'는 약육강식이 우선하는 판이다. 현재의 정파들에게는 평화와 연대정신을 말할 자격이 없다. 연대하여 힘을 모으기보다는 트집을 잡고 흠집을 내어 분리하고 분열하는 데서 진보운동의 위기가 온 것이다.

대중과 괴리된 소영웅주의자들의 객기


우리 진보운동진영은 대중에 대한 믿음을 너무 빨리 거두거나 가볍게 여겼다. 그들의 조급증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검증되지 못하는 이론이나 이념을 들고 와서 대중들에게 어거지로 먹이다가 고개를 돌리거나 먹기를 거부하면, 대중을 탓하고 원망하며 떠나는 게 고작이었다.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혁명적인 노선을 들고 왔던 NL계의 김영환이나 PD계의 사노맹 역시 대중에 대한 책임감도 진실한 해명도 없이 가장 급격하게 변신해 버렸다. 이러한 행동은 세상을 너무 가볍게 보는 일부 급진적인 소영웅주의자들의 객기였으며, 운동과 대중에 대한 무책임의 표본이라는 생각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천신만고의 고생을 감내하며 이루어낸 것이 1987년까지의 민주화 투쟁이었다면, 후배들은 그 성과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1988년부터 수면위로 올라 온 후배들은 노력의 합당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배들이 쌓아올린 대중들의 신뢰와 믿음을, 노선투쟁으로 밀어내고 현장을 장악했다. 각자가 키워 온 '골방 학습조'를 이끌고 숫자의 우위를 확보하여 현장조직을 건설하고 장악했다. 그들이 현장에 보여준 모습은 내부 권력투쟁의 치열함과 비겁함이었고 현장노동자들에게 운동에 대한 절망과 환멸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운동권의 전망을 상실케 할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토록 목숨을 걸고 이루려던 운동의 대의에 대한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며, 어떠한 해명이나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수많은 이들이 현장을 떠나갔다. 현장출신들이 노동운동 탄압에 항거하며 구속과 해고, 징계를 무릅쓰고 투쟁할 때, 학출의 일부는 학교로 또는 관리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경력을 팔아 보수정당의 품으로 안겼다.
갈 곳이 노동현장밖에 없는 현장출신들이 화려한 입신출세의 모습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역시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였다. 이때부터 현장노동자들은 학출과 지식인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있다. 언제 또 다른 논리로 다가와, 개인의 사적이익을 실현하는 도구와 대상으로 이용할지 모르기에, 신뢰는 금이 갔고 불신이 증폭되었다. 그들의 객기는 노동현장에 수많은 상처와 함께 파벌을 조성했고, 썩어빠진 뿌리와 씨앗을 남기고 갔다. 조금 가혹하게 비판을 하는 것 같지만, 열심히 투쟁하고 고생한 것을 인정하는 것과 행동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한 때는 운동 발전에 기여했으나…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분단국가에서, 서슬퍼런 군사독재와 국가보안법이라는 감시체제 아래서 진보운동은 공론의 장을 통해 풍부하고 다양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며 대중과 함께 발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보였다. 사상의 자유가 제한된 지하공간에서 접한 한정된 이념서적과 노선정립은 한계를 안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에 기초하여 검증되지 못한 이념과 노선은 관념에 치우쳤다. 현장과 대중에게 접목시키는 데 설득력을 상실했고, 대중이 믿고 따를만한 지도노선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현장의 정파들이 학생운동 중심의 단순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수준을 뛰어 넘어 과학적 사상에 기초한 사회변혁운동을 성장, 발전시킨 공로는 긍정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NL과 PD로 대표되는 한국사회변혁운동의 방향과 실천노선을 구체화, 풍부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자주통일과 계급투쟁의 성격과 과제를 두고 대립한 측면도 있지만, 노선과 이론을 크게 발전시킨 기여를 했다. 따라서 우리는 정파가 운동발전의 과정상 긍정적인 측면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외환위기 사태 이후 변화된 조건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파이건 올바른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체제가 변화하고 착취의 방법이 비정규직을 이용하는 것으로 달라졌을 뿐 노동자·서민의 삶은 더욱 가난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에도, 현존하는 정파는 혼돈과 혼란만 거듭할 뿐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면 권력과 출세의 도구로 전락한 정파에 줄을 서고 있는 현장조직간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여 진보운동의 최대위기를 키우고 있다. 현존 정파가 '사적 권력추구'라는 천박성을 벗지 못하는 한 그들에게 전망은 없다.
정파운동에 위기가 도래한 것은 관념성, 파벌성, 무능력성이라는 세 가지의 현상으로 진단할 수 있다. 첫째, 현실적으로 검증되지 못한 모호한 기존 이론을 관념적, 교조적으로 도입하는 문제점을 노출했다. 한국사회의 현실을 사실에 기초하여 풍부하고 다양하게 조망하기보다 파벌과 분파가 가진 논리를 무리하게 확산시켜 대립의 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통에 불필요한 노선투쟁과 소모적이고 분열적인 논란만을 격화시켰다.
둘째,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부정적인 논쟁으로 노선에만 따르는 이기적인 파벌화와 줄세우기를 낳았다. 토론과 대화를 통한 노선대립은 선의의 경쟁을 통해 대안과 정책을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정파운동은 같은 운동권들이 서로를 질시하며 정파적 이해에 따라 불필요한 논란과 대립을 만들어 오히려 갈등을 키웠다.
셋째, 학생운동 출신들의 노동운동 진출은 현장 출신들이 노동운동 주체로 성장하는 데 기여하고 일정한 이론적 기반이 형성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이론과 노선 중심의 관념성은 사회의 관리체제 변화에 따라 대중운동의 새로운 발전 전망을 열어주고 제시하는 설득력을 상실했으며 무능력만 노출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 세 가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정파운동이라는 파벌과 줄세우기의 낡은 시스템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천박한 재벌과 반대편에서 똑같이 구는 상대하는 운동권의 천박한 논리수준으로는 결코 대안을 성장시키지 못하며, 대중의 지지도는 더욱 낮아지고 존립기반 자체를 위협당할 것이다.

기본은 상대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


민주노총을 중심에 놓고 권력 각축을 벌이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들도 각자의 장점도 있지만 단점과 한계도 분명해졌다. 공통된 한계점은 여전히 집행권력 장악을 중심에 두고 패권주의와 줄세우기 그리고 정책대안보다는 숫자로 승부를 가리려 한다는 점이다. 또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전개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모두 한계를 드러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정파와 현장조직들의 파벌주의가 운동발전에 폐해를 가져온다 해도 당장 해소되거나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세력간의 지나친 대립관계를 '제로섬게임'으로 인식해야하고 무조건적인 줄서기나 개인적 권력추구와 야합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현실 실천의 경험과 전체운동의 발전을 중심에 놓고 각 세력이 지니는 문제의식의 장단점을 종합하여 전체운동이 직면한 근본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립과 대결 중심의 이분법적 운동논리는 분화와 분열만 만들어 왔다.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내리먹이는 운동방식에 대중들은 환멸을 느끼고 있다. 이젠 사소한 차이에 대해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죽고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살아 갈 수 있는 공존전략과 모아 나가는 '플러스게임'만이 운동을 새롭게 발전시킬 유일한 대안이다.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도자'인가 '지배자'인가


정파간의 적대적 대립관계는 현장의 분화와 분열의 폐해를 가져왔다는 게 '노동운동의 위기'와 관련한 논쟁에서도 수 차례 지적되고 있다. 이는 단결투쟁의 기본원리에도 전혀 맞지 않음 또한 검증되고 있기에 노동운동이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는 세력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은 줄을 서고 있지만 대안이 되지 못하면 대오는 이탈하여 새로운 희망을 찾아 갈 것이다.
진보운동과 노동운동은 대전환기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음에도 그런 상황에서 정파가 현실적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해버린 것이란 걸 직시해야 한다. 보스와 가신 중심의 낡은 정파시스템은 새로운 흐름과 변화에 밀려날 수밖에 없다.
대중은 구시대 정파의 이념적 노예가 아니다. 대중은 말과 글로 표현하는데 서투를 지 모르지만 평생을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살아 왔기에 직관과 본능으로 지도자와 지배자를 구분할 줄 안다. 때로는 기나긴 고통의 세월도 참고 견디며 후일을 기약할 줄도 알고, 결정적 시기에 분노와 저항을 표출하며 투쟁에 나설 줄도 안다는 것을 인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대중들은 누가 대중을 중심에 두고 운동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허구와 기만으로 포장한 거창한 이념과 이론도 필요 없다. 대중보다 먼저 솔선수범하는 자는 지도자요, 대중들 위에서 군림하려는 자는 지배자이다. 대중에게 지도자는 존경의 대상이지만 지배자는 타도의 대상이다. 새로운 흐름이란 대중을 신처럼 생각하며 실천하는 운동 본래의 모습이다. 대중은 운동과 반동을 구분할 줄 안다.

출처: 『노동사회』2005년 6월호, 통권 100호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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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용차산업 연구용역사업 마무리

상용차산업 연구 용역사업 마무리


고용안정과 경쟁력 확보위해 용역결과 경영에 반영해야 한다.

 

다임러와 합작무산에 따른 별도합의서에 의하여 연구용역사업을 진행하여 최근 마무리 되어 총괄보고서 및 요약보고서 2부분으로 총 200부를 발간하여 배포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연구용역사업은 고용안정 확보와 경영부분 개입력을 높이기 위하여 세계 상용차산업의 흐름과 전망, 합작 무산 이후 현대차에서 해외공장 진출을 노리고 있는 중국자동차 산업, 국내 상용차 현황 및 전망, 전주공장 경영평가, 해외공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전략 등 부분별로 진행하였다. 사측 연구팀은 이와는 별개의 현장혁신을 내용으로 하는 연구사업을 진행했다.

 

전주공장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집중투자 요구 할 것


현재 일반적인 자동차산업 자료 중 상용차산업을 특화해서 나온 자료가 전무한 상태이다. 이에 따라 세계 및 국내 상용차산업의 통계 및 전망 등 현황 파악과 함께 기술개발 방향에 대한 자료 확보, 전주공장 장기 발전계획에 대한 경영진단이 필요했다. 이는 조합원의 고용안정을 위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전주공장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 집중투자 요구와 함께 회사의 경영방침에 대한 개입력을 높여 견제하기 위함이다. 해외공장 부분 또한 현 단협으로는 어떠한 견제 장치가 없어 노동조합의 대응방향에 대한 연구용역팀의 결과를 가지고 이미 05년 단체교섭 전주본부 요구안으로 상정 일정부분 수용되어 단체협약 개정 요구안 확정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노동조합은 연구용역사업의 결과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이를 토대로 연구개발에 대한 집중투자 등을 요구할 것이며, 보고서 내용을 요약하여 현장에 홍보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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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처리 장기근속자의 처우개선은 노동조합의 임무

고충처리 장기근속자 처우개선은 노동조합의 임무

 

산재 장애등급자 150여명 등 수 많은 고충처리자 있다.


노동조합은 장기근속자 및 고충처리자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다. 이미 전주공장의 산재 장애등급자가 150여명이나 된다. 여기에 개인사고 및 질병에 의한 문제로 고충을 호소하는 조합원 또한 많다. 노동조합이 이러한 고충처리를 외면한다면 해당 조합원 스스로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처절하게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장기근속자 처우개선 및 고충처리자 문제를 노동조합에서 소수의 문제라고 배타시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노력을 다해 고충 해소하는 것이 조합원을 보호하는 길이자 권익향상을 위한 노동조합 본연의 임무중 하나이다.

 

조합원의 고통 외면하며 신입사원 충원만 요구할 것인가.


노동조합이 고충처리자 및 장기근속자 처우개선을 하기위해서는 먼저 현장의 동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조합원 고충을 처리하고자 노력을 했지만 그때마다 현장의 이해관계로 해소하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반대에 부딪혀 1년 동안 현장배치를 시키지 못한 일도 있었다. 또한 고충해소를 위해 신설공정에 있어 업무의 특성과 고충을 고려하여 노동조합 자체적으로 전환배치를 추진하려다 막힌 적도 있다. 아니 기존사원 충원까지 반대하면서 신입사원 충원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연감소 인원 충원 배치 노동조합 입장 명확하다.


최근 자연감소 인원에 대하여 전환배치를 통한 정규직 충원으로 해소 시켰다. 노동조합에서 자연감고 인원에 대한 충원요구는 단협사항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부서배치는 배치결과만 회사로부터 통보를 받는다. 해당 선거구 대의원 또한 회사로부터 통보를 받는다. 이는 단협 사항이 아니라 통상관례 이다. 이번 트럭 생관의 인원충원 배치는 바로 해당 선거구 대의원에게 통보하는 관례를 회사측이 무시한 것으로 노동조합은 공식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위해 바로잡을 것이다. 그러나 전환배치에 대한 도를 넘어선 여러가지 편견과 조건에 대한 문제제기는 인정할 수 없다. 적어도 대의원 및 활동가라면 선거구 조합원을 설득 시키고 전체를 아우르는 활동을 해야 한다. 말로만 하는 장기근속자 및 고충처리자 처우개선은 걷어치우고 실질적으로 고충처리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모두가 머리를 맞대어 대안을 만들고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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