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통진당 사태를 계기로 등장한 주요 쟁점에 대하여
고민택
통진당 사태가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보수우익세력의 정치적 의도와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전에 통진당 내 당권파와 신당권파가 벌이고 있는 사생결단 식의 이전투구가 그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러한 어우러짐으로부터 발생하고 있는 쟁점들이 마구 뒤섞여 노동자계급에게도 일정한 혼란과 혼선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진당 ‘진상조사위원회’가 밝힌 ‘총체적 부실, 부정 선거’를 둘러싼 통진당 내부의 ‘진실 게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당권파와 신당권파는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련의 행위들이 지금 노동자계급 전체를 수렁으로 빠뜨리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염원했던, 지금도 염원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뜻을 짓밟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뒤돌아보고 있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단순히 자세가 잘못됐거나 정치적으로 미숙한 것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가 취하고 있는 의회/개량주의 노선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 터져 나온 것에 불과하다. 즉 이미 곪아 있던 것이 터진 것이며, 가까운 장래에 불거질 문제가 앞당겨 등장한 것뿐이다.
그로 인해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만큼이나 수많은 쟁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동안 밖에서는 대강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그들 자신들의 입을 통해, 심지어 어떤 것은 지배계급의 보도를 통해 속속들이 들춰지고 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누가 실세라는 보도를 접해야 하는 노동자계급의 심정은 참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흥미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지배계급이 의도하는 것이자, 통진당 내 당권파와 신당권파가 노동자계급의 분노와 비판을 비껴가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 노동자계급에게는 ‘진실 게임’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진실은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이 진실은 통진당이 더는 노동자계급 내에서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를 몇 가지 주요 쟁점을 중심으로 밝히고자 한다.
‘민주주의’
지금 보수세력은 통진당만이 아니라 전체 피지배계급을 대상으로 민주주의를 앞세워 부르주아 정치 체제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라는 사상 공세를 전방위적으로 펼치고 있다. 지금 벌이고 있는 이데올로기 공세는 어느 면에서는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사건을 매개로 한 공세보다도 훨씬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천안함이나 연평도 사건 당시에는 이명박 정권이 아무리 위세를 떨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어도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 사건 직후에 치러진 선거 결과를 보더라도 효과를 본 게 별로 없었다. 현장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위축이나 냉소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실관계야 어찌됐든 그것들은 반MB 투쟁의 한 요소가 되기조차 했다.
그러나 지금 보수세력이 통진당을 향해 벌이는 이데올로기, 사상 공세는 간단히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 이유는 보수세력의 공세가 진공 속에서 교과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어이없게도 통진당이 제공하고 있는 ‘부실, 부정’ 선거, ‘민주적 절차 무시’, ‘폭력사태’,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벌이는 사생결단식 이전투구’ 등과 같은 눈앞에서 생생히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 정황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보수세력이 ‘도덕성’, ‘정당성’, ‘국민의 눈높이’, ‘상식’ 등과 같은 관념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들이대며 마음껏 공세의 무기로 동원해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같은 관념들은 오히려 이전에는 ‘진보진영’이 보수세력을 향해 투쟁할 때 취한 ‘진보진영’의 무기 역할을 했던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절대로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도덕적’ 공세를 ‘진보진영’이 당하는 형국이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공세가 단지 보수세력에 의해서만 가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대체적으로 보수세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과 태도를 취했던 ‘광의의 진보진영’에 속했던 자유주의 인사(이데올로그)들은 물론 직접적인 ‘진보진영’ 내의 논객들까지 공세에 가세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당권파와 비당권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전투구, 사생결단식의 투쟁이 노선투쟁이 아니라 당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관계로 자유주의 인사(이데올로그)들이 개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저들이 실은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나 당파성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아니 그것들을 오히려 부정하거나 나아가 적대시 했던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 점에서는 저들만이 아니라 통진당 내 당권파나 비당권파 주요 인사들도 한통속이 되어 그래왔다. 그러니 저들의 가세가 전혀 이상하게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보수세력의 공세를 포함한 저들의 가세가 노동자계급에게도 적지 않은 공세(부담)로 다가오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 민주주의를 말하는 자들이, 통진당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원인이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 가졌던 습성과 관행을 ‘진보진영’이 아직도 버리지 못한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 ‘진보진영’은 민주적 진화가 덜 된 집단이라는 취급을 당하고 있다. ‘진보가 민주를 파괴’하고 있다는 주장이 광의의 ‘진보진영’에 속한 저명한 학자의 입에서 버젓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저들의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으며 올바른 분석이나 판단도 아니다. 독재정권 시절에 운동한 모든 세력이나 개인을 그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순전히 그들의 주관적 편견과 왜곡에 불과하다.
실상은 정반대다. 독재정권 시절에 투쟁했던 사람들이야말로 동시대 어느 집단보다도 더욱 더 철저히 민주적 훈련을 쌓아왔다. 지금 통진당(구당권파든, 신당권파든)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운동했을 당시의 습성과 잔영이 남아서가 아니다. 그 뒤 그들 운동이 노선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즉 피지배계급으로부터 벗어나 지배계급의 한 부분으로 변신하는 속에서 오히려 지배계급의 행태를 쫓고 닮아가면서 생긴 문제다. 아직은 완전한 지배계급의 일원이 되지 못한 불충분함 때문에 미숙한 모습과 행태를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신당권파가 구당권파에 비해 더 민주적인 것도 아니다. 비록 구당권파가 신당권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마나 더 패권적이고 얼마나 더 비민주적이냐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동시에 신당권파가 구당권파를 비판하기 위해 내세우는 기준과 논리가 실은 부르주아들의 논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상황이 바뀌면 신당권파와 구당권파의 위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나아가 아무리 통진당 문제가 지금 심각하다고 해도 기존 보수정당이 더 민주적인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한국에서 아직도 상대적으로 가장 민주적인 집단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이 절대적으로는 아무리 관료화되고 비민주적인 요소가 스며있고 그 정도와 속도가 커지고 있다 해도 아직 이 사실까지 달라진 정도는 아니다. 한국의 기존 부르주아 정당, 특히 기업집단 심지어 학교나 종교 집단조차도 어디 노동조합에 비교나 할 수 있는가? 그들 조직의 주류 집단이야말로 썩어도 한 참 썩었다. 그들이 겉으로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절차성이나 민주적 방식이라는 것도 지고지선 한 것을 그들이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미 내부 권력관계에 철저히 물들고 종속된 것으로부터 취할 수밖에 없는 박제화되고 제도화된 죽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본질적 의미에서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모습이다. 특히 어떤 것이 더 민주적이고, 덜 민주적이냐는 문제를 재는 기준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그 잣대가 될 수도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란 본질에서 부르주아 독재(체제)를 일컫는 것일 뿐이다. 대리주의(저들이 지고지선 한 가치로 여기는 대의제 민주주의), 1인 1표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야 말로 노동자계급을 철저히 해체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종북(주의)’, ‘주사파’
지금 한창 ‘종북’, ‘주사파’에 대한 공세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고 있다. 기존에는 물론 지금도 이것들은 (극우)보수세력이 국가보안법과 국정원, 검찰, 경찰 등 국가 폭력장치, 기구 등을 앞세워 한국의 좌파민족주의 세력(특히 이른바 NL 주사파)을 탄압하는 데 사용하는 단골 메뉴다. 그러다가 지난 민주노동당 분당시기에 ‘진보정당’ 내부에서도 이 문제가 전면화 되었다. 당시 분당을 주도한 세력이 ‘범NL’을 향해 패권주의와 ‘종북(주의)’를 제기하면서 비로소 운동진영 안에서도 ‘종북(주의)’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제를 삼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이런 것이다. 이 문제는 그 전에도 운동진영 내에서 운동노선을 둘러싼 주요 쟁점으로 있어왔으며 그에 따른 대립과 투쟁도 줄곧 이어졌다. 이 점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정치현실 때문에 ‘종북(주의)’ 문제를 수면 위에서, 즉 부르주아 사법 체제 속에서 논쟁하는 것은 불가능했거나 우회(비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가 이러한 금기(?) 내지 암묵적 묵인을 깨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것은 국가탄압을 인정한다는 적극적 입장에서는 아니다. 국가탄압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비공개’ 차원에서의 논쟁이나 문제제기에 가두지 않겠다는 차원에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정황이 존재한다.
당시 민주노동당 분당파(노심조, 진보신당)는 그 직전 있었던 대선에서의 참패 원인을 ‘범NL’ 세력의 전횡(패권주의)과 노선(민족주의) 때문으로 바라봤다. 따라서 그를 그대로 두고는 민주노동당이 ‘합법의회주의정당’ 내지 ‘대중적진보정당’으로의 발전을 계속해서 이루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랬음에도 ‘노심조’는 물론 심지어 ‘노심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비판적인 유시민(국참당)까지도 민주노동당과 함께 통진당을 결성했다. 그것도 두 세력을 모두 합해도 한참 소수 세력인 상황에서 단행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부르주아 정치인(정치세력)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들에게 노선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생존이 노선에 훨씬 앞선다. 통진당 결성시 ‘종북’ 문제는 어렵지 않게(?) 타협을 이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이(‘노심조’, 유시민)이 부르주아 정치에서 차지하는 대중적 인기를 앞세운 것이다. 그들은 이미 부르주아 정치 안에서 유력한 정치인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구당권파의 세력을 역으로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충분히 판단했을 수 있다. ‘경기동부연합’이 지금 정도 일 줄을 절대 몰라서가 아니다. 신당권파도 지금은 사태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을 속으로는 후회할 게 뻔하다. 겉으로 어떤 명분을 내세운다고 해도 말이다.
통진당 내에서는 ‘종북(주의)’는 이번 사태와 직접적인 관련도 없으며 쟁점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를 일으킨, 적어도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당권파(경기동부연합)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종북(주의)’, ‘주사파’가 전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지배계급이 한편으로는 통진당을 타격함으로써 야권연대를 흔드는 정치적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차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 노동자계급 및 혁명진영을 함께 공격하기 위한 맥락에서 이슈를 만들고 주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연말 대선을 앞두고 ‘진보진영’이 들고 나올, 보수세력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공약과 의제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다. 나아가 민주당이 좌 쪽으로의 이끌리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에서다. 그 뿐이 아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요구, 혁명진영이 제출하는 급진적 주장을 훼손하고 차단하기 위함이다. 신당권파 입장에서는 굳이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일이 시급하다고 해도 보수세력의 일방적 공세를 적극적으로 차단하기는커녕 소극적 차원에서나마 방어조차 하고 있지 않는 것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보수세력의 공세가 무차별적인데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종북(주의)’, ‘주사파’ 문제는 내부적으로 가져가야 하는 노선투쟁 문제다. 결코 지배계급에 의한 일방적 탄압이나 공세를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종북(주의)’를 비판, 부정한다고 해서 국가탄압을 등한시 한다면 그 탄압의 칼날은 결국 노동자계급을 향해 날아올 게 분명하다. ‘종북(주의)’, ‘주사파’ 문제는 오직 노동자계급과 혁명진영의 투쟁과 성장에 의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종북(주의)’는 단지 그것이 잘못된 이데올로기이거나 노선 때문이어서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추상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알다시피 민족주의 세력은, 특히 노동자투쟁에서 언제나 계급타협적인 태도와 입장을 취하고 있다. 노동조합 안에서도 계급협조적 자세를 보이면서 노동자에게 오히려 양보와 타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투쟁시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전투성 문제에서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일 뿐인 ‘비폭력’을 앞세우고 있다. 가장 결정적으로 정치적 차원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부정하고 있다. ‘민주대연합/야권연대’를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다. 민족주의 세력이 ‘북’에 대해 갖는 태도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정작 이와 같은 중요한 문제를 보지 못하거나 대응할 수 없다. 신당권파가 민족주의를 향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단지 ‘북’에 대한 그들의 태도일 뿐 그 못지않게 중요한, 아니 직접적, 일상적. 현실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당권파도 그 점에서는 민족주의 세력과 다른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적으로 가져가야 할 노선투쟁 문제라고 해서 반드시 모든 것을 ‘비공개’적으로 진행해야 할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 혁명세력은 이미 국가탄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강령과 정치적 입장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활동하고 있으며 투쟁하고 있다. ‘종북(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혁명진영은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투쟁해왔다. 단지 그러한 비판과 투쟁이 신당권파처럼 국가탄압 문제를 회피, 부차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결과를 낳는 것을 등한시 하거나 의도하지 않을 뿐이다. 혁명진영이 신당권파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북’에 대한 태도만이 아니라 현실계급투쟁과 정치전략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보이고 있는 계급타협적 태도와 행태를 가차 없이 비판한다는 것이다.
‘진성당원제’
구당권파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번져 나가자 사태 해결(수습)을 위한 방안으로 ‘당원총투표’를 주장하고 나왔다. 또한 ‘혁신비대위’가 꾸려진 뒤에는 그에 맞서기 위한 차원에서 ‘당원비대위’를 별도로 출범시켰다. 이것들은 모두 ‘진성당원제’에 그 근간을 두고 있으며 그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사실 이번에 문제를 일으킨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 ‘당원총투표’ 방식을 채택한 것도 ‘진성당원제’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패권주의 문제도 ‘진성당원제’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범NL’이 다수파로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중에서도 특히 ‘경기동부연합’이 다수파로서의 일반적 지위, 우위를 넘어 패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도 ‘진보진영(정당)’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성당원제’를 앞세운 데 있다. ‘당원의 힘’에 기초한다는 형식이 주는 그 정당성을 통해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구당권파가 당원의 명예 보호와 당원에게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통진당이 결성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도 ‘진성당원제’라는 공통분모가 작용을 했다. 유시민의 국참당도 ‘진성당원제’를 취하고 있었다. 유시민 자신이 과거 민주당과 결별했던 한 이유도 ‘진성당원제’에 기초한 정당을 만들고자 했던 것도 주요한 한 이유였다. 구당권파가 ‘당원총투표’를 들고 나왔을 때 유시민은 ‘당원총투표’ 그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다만 ‘당원 명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기갑 비대위원장이 한 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타협책으로 ‘당원 50%, 국민50%’ 의견 반영 방안을 내비쳤던 것도 구당권파가 주장하는 ‘당원총투표’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기가 어려웠던 데 있다. 물론 이 제안은 양쪽 모두로부터 기각 당해 실현되지 못했다.
보수세력 일부도, 비록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투표 과정에서 ‘부실과 부정’이 발생한 것을 강하게 문제 삼으면서도, 아래로부터의 ‘당원총투표’를 통한 ‘비례대표’ 선출 방식 그 자체는, 기존 보수정당들로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앞선 민주적 제도와 방식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들도 한국의 기존 보수정당들이 당원에 기초하지 않거나 노선에 의하지 않고, 즉 노선에 의해 훈련되고 조직된 당원에 중심을 둔 정치(정당)활동을 하지 않고 일반 국민여론조사에 지나치게 기대거나 의존하는 것은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로 빠지는 것이라고 비판해 온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러면 과연 ‘진보정당’이 취하고 있는 ‘진성당원제’는 위 보수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는 바 정도의 의미를 살리면서 실제로 그렇게 구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그동안 ‘진보정당’은 자신들의 조직원, 즉 ‘진성당원’들을 어떻게 훈련하고 조직했는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 당원을 모집했는가? 적어도 민주노동당은 노동조합에 기초한, 민주노총 산하 노동자를 중심으로 건설된 당이다. 비록 민주노동당이 의회/개량주의 정당이긴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노동자 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범NL’ 세력이 민주노동당에 대거 입당하면서 당의 성격과 노선은 노동자 당에서 부르주아 노동자 당으로 더욱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그들 세력만의 탓이 결코 아니다. 민주노동당 창당을 앞서 주도했던 이른바 PD 세력들도 ‘범NL’ 세력이 대거 입당하기 전에 이미 민주노동당을 부르주아 노동자 당으로 이끌고 있었다. ‘범NL’이 합류함으로써 그 같은 상황이 더욱 탄력을 받았을 뿐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산하 각급 산별노조 및 대공장, 공공부문 사업장 등의 노조지도부도 거기에 적극 동참했다. 이들은 삼각동맹을 이뤄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당원으로 가입시키면서 그들 당원들을 투쟁과 정치의 주체로 성장, 발전시키지 않고 당비를 내는 물적 토대로만 여겼다. 더 나아가 부르주아 선거 때 표를 찍는 유권자로서만 대하면서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원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자연스럽게 민주노동당 내 정파들은 오직 당원, 더 정확하게는 자기 정파 숫자 늘이기 경쟁에만 매달렸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을 통해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모든 것을 수로 결정짓는 풍토가 완전히 굳어졌다. 이로써 ‘진성당원제’는 당원의 자발적, 능동적 참여와 활동에 기반 한, 즉 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당 활동을 이끌어가는 ‘민주적 제도’로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원들을 정파의 부속물이 되게 하는 ‘괴물’로 변질되었다.
전 세계 모든 의회/개량주의 정당들은 기본적으로 정치(투쟁)와 경제(투쟁)를 분리시켜 경제투쟁은 노동조합이, (제도)정치투쟁은 당이 담당하는 이른바 양날개 전략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의 물적, 인적 수혈에 의존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상층지도부가 당의 간부로, 의원단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형성된다. 노동조합 관료화, 당의 관료화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형성된 관료화는 이제 개별 당원들에게는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굳건한 성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과 당의 관료화가 진행될수록 그에 비례해 당원들은 더욱 비정치화, 탈계급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에 따라 조합주의가 당연히 기승을 부리게 된다. 조합주의가 단지 노동조합이 갖는 한계 그 자체에 의해서 필연적,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구체적, 실질적 과정과 결부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미 비정치화, 탈정치화 된 당원들은 당의 모든 결정을 당 관료들에게 위탁하거나 의존하게 된다. 대리주의가 온존하고 만연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 ‘비례대표’ 선출을 위한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부실과 부정’도 그 연장에서 터진 것이다. 그동안 이번과 같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이것이 ‘경기동부연합’이 말하는 관행이고 ‘진성당원제’다. 앞서 말했듯이 신당권파(특히 지금은 신당권파로 분류되는 ‘범NL’에 속한 나머지 세력)도 그러한 관행을 만드는데 같이 했으며 그 자신들이 바로 그 관행의 수혜자였다. 다만 ‘경기동부연합’이 기존 관행에 비춰도 너무 무리수(황당한 짓거리)를 저지른 것이 화근이 된 것 뿐이다.
‘국민정당화’, ‘노동중심성’
통진당 사태가 ‘신/구 당권파’ 사이의 당권 장악을 둘러싼 단순한(?) 권력투쟁에서 최근 들어서는 ‘노선투쟁’으로까지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 같은 조짐도 ‘신/구 당권파’가 각각 권력투쟁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노선투쟁’을 끼워 넣고 있는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다. 두 세력 모두 ‘분당’을 각오하거나 주도하려는 의사나 의지가 없어 전면적인 ‘노선투쟁’으로 제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노선투쟁’이 반드시 ‘분당’으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특히 현재 통진당 내 ‘신/구 당권파’ 모두는 ‘분당’을 무릅쓴 ‘노선투쟁’을 벌일 정도로 두 세력 사이에 노선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나아가 설령 일부 그런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당’이 각자에게 어떤 유리한 결과를 가져 오리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두 세력 모두 통진당을 국민정당화하는 것을 ‘전략적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으며, 노동중심성과 관련해서는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전술적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두 세력 모두 각각의 입장에서 국민정당과 노동중심성을 매개로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이것이 마치 두 세력이 ‘노선투쟁’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두 세력이 말하는 국민정당화와 노동중심성에 어떤 ‘노선적 차이’가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낳고 있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통진당 바깥의 상황이다. 우선 가장 최근의 일로 민주노총 중집은 통진당에 대한 ‘조건부 지지철회’를 결정하면서 통진당에게 노동중심성을 회복, 강화할 것을 강하게 주문, 압박한 것을 들 수 있다. 민주노총 중집의 이 같은 태도는 정직하지 않다. 아니 자기배반(모순)적 행위다. 민주노총 자신이 ‘민주대연합/야권연대’를 반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앞장서 추진하고자 탄생한 통진당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야권연대와 노동중심성은 양립할 수 없다. 야권연대는 국민정당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이자 사다리다. 야권연대를 전제로 한 노동중심성이란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정치적 독립성과 독자성을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이번 4. 11 총선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부르주아 정당과 ‘정책협약’을 맺는 데에서 압력행사를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주도권을 부르주아 정당에게 넘긴(맡긴) 채 유권자 압력집단으로 남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나아가 민주노총이 통진당을 향해 노동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은 통진당 내 민주노총 지분(자리)을 늘려달라는 요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통진당 당권파가 민주노총 내 ‘국민파’(범NL)를 역으로 비판하고 나올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으로 현재 민주노총 내 ‘비/반통진당’ 계열에 속한 활동가들도 역시 노동중심성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국민파와 같이 의회/개량주의 노선을 택하면서도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처럼 노동자계급에 기반 한 수권정당(부르주아 지배정당)을 추구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이점에서 ‘민주대연합/야권연대’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물론 현실에서 이들은 그 같은 비판이나마 일관되고 끈질기게 하고 있지 않다. 이들 역시 야권연대를 전면,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민주노동당이 이미 본래적 의미의 노동중심성에서 벗어나 충분히 우경화되었던 때에도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을 국민파 못지않게 옹호했다. 이들이 지금 통진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을 문제 삼는 것은 한편으로는 통진당이 국참당과 통합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의회/개량주의 정당을 만들기 위한 때문이며, 이를 위해 노동중심성을 들고 나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노동중심성은 단지 형식적 차원의 조직적 독립성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현재대로라면 그것으로는 ‘도로민노당’을 넘어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로민노당’ 정도라도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울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들 또한 이미 역사적으로 민주노총 안에서 노동중심성을 국민파가 말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과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다른 부류는 의회/개량주의 노선에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현장활동가들이다. 이들은 나름으로는 노동중심성에 대한 진정성과 건강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한계는 있다. 이들은 아직 사회주의정당 건설에 주체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세력(정파)이 안고 있는 문제와는 별개로 또는 그것을 핑계로 협소한 ‘전투적조합주의’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지 않다. 동시에 노동중심성과 노동자주의를 혼돈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들 활동가들은 현실에서는 의회/개량주의 세력들보다 정치적으로 뒤쳐진 채 사업장 문제에 갇혀 있다. 의회/개량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중심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국적 차원에서 사회주의정당과 사회주의 강령을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회주의 세력(정파)이 지지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누구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그럴 때만이 지금 통진당 사태를 계기로 다시 등장한 노동중심성 문제를 올바로 해결할 수 있다. 어쨌든 통진당 바깥의 이런 상황으로 인해 지금 통진당 내부에서 불거지고 있는 노동중심성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라 있다.
다른 하나는 통진당 내 실정이다. 먼저 당권파가 현재 수세에 몰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앞에서 말한 ‘진성당원제’와 연동하여 국민정당화 문제를 새삼 꺼내들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논리와 정황은 이렇다.
통합진보당은 출범 당시 전통적 진보 노선이 주류였던 민주노동당과, 자유주의 개혁 성향의 국민참여당, 북유럽 사민주의가 다수인 진보신당 탈당그룹이 결합했다. 현재 신당권파로 통칭되는 세력을 보면 유시민 전 대표를 비롯한 참여계와, 과거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하 국민파) 성향으로 분류되는 민주노총 고위관료 출신들이 일련의 '재구성'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국민파', 즉 민주노총의 관료 출신들은,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자신들의 당내 지분이 크지 않다는 사실에 지속적인 불만을 나타내왔다. 이에 더해 심상정·노회찬 의원 등의 사민주의 정치세력과 '인천연합'으로 대표되는 개량노선이 신당권파에 가세하고 있다. 요컨대 진보정당의 국민정당화를 추진해 온 세력들이 총선 이후 하나의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국민적 여론을 등에 업고 '구 당권파'를 겨누고 나선 것이다. 당의 최고 의사결정의 권한을 '당원'에 두고 있는 진성당원제는, 명망가정치의 확대와 당 고위층의 관료화 경향을 막는 장치였다. 또한 당지도부와 공직 후보들을 국민 여론조사로 뽑게 되면, 진보정당의 정치인들 역시 자연스럽게 여론주도층인 중간층을 수렴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유시민 대표는 지난 10일 전국운영위에서 애국가 제창을 포함한 국민의례를 당 행사에 도입해야 한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문제가 지난 19대 총선에서 당 득표율에 악영향을 미쳤고 "국민과 이념적 장벽이 없이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근거다.<민중의소리, 문형구 기자 기사 중 발췌 인용>
이 같은 분석이 크게 틀리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제는 위 논리와 정황대로라면 마치 당권파는 국민정당화에 반대하고 있는 것처럼 다가오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거듭 말했듯이 당권파 역시, 아니 당권파야말로 국민정당화의 원조다. ‘진성당원제’(당권파가 말하는 노동중심성)와 ‘국민정당화’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대연합/야권연대’ 노선(전략)이야말로 국민정당으로 가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다. 거기에서 ‘진성당원제’의 역할은 국민정당화를 막는 장치가 아니라 다수파가 당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신당권파도 최근 박원석 당선자를 위원장으로 하는 “통진당 새로나기 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면서 당권파와의 ‘노선투쟁’을 불사하려는 전의를 보이고 있다. 신당권파는 당권파의 대응이 ‘진상조사’ 차원을 넘어 국면을 ‘노선문제’로 전환시키려고 나오자 이에 맞불을 놓을 겸, 이번 기회에 국민정당화의 기틀과 주도권을 자신들이 쥐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정당이라는 것도 누가 주도권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그 경로와 양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원석 당선자의 말에서 알 수 있는 신당권파의 의중은 다음과 같다.
당 공식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문제와 관련, “하나의 문화로 관행으로 정착돼왔던 문제인데 국민들이 불편해하고 또 그로 인해서 통합진보당의 국가관 같은 것이 집단적으로 의심을 받는 상황이라면 그 문제를 바꾸기는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 “대중적 진보정당으로, 선명한 민생정당으로, 미래지향적 현대정당으로서의 가치 노선을 재정립해야 한다”며 “이 문제는 당내 진보의 가치에 대한 이견과 논란 문제다. 남북관계나 한미관계에 대해서도 국민의 눈높이에서 당이 변화하는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너무 과거의 관점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 점을 숙고하겠다”, “특위 혁신 방향은 △당내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통해 패권주의와 정파주의를 넘어선 혁신적, 민주적 당 운영을 확립 방안 △선명한 민생정당, 다양한 진보의 가치에 조응하는 미래지향적 현대정당을 위한 당의 가치, 비전, 정책노선 재정립 △붕괴된 노동 지지 기반과 노동정치 복구하기 위한 방안 마련 △유연하고 개방적인 대국민 소통능력 제고 등”, “노동계를 비롯해 당의 근간이 되는 대중조직, 시민사회, 전문가 그룹 등 각계각층의 의견그룹을 만나 통합진보당의 진로와 혁신방향에 관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고 반영할 것”, “당의 혁신에 관해 당원과 국민의 의견을 묻고 듣는 공개토론회를 개최하고, 이 과정에서 진보시즌2 등 진보정당을 다시 살리고자 하는 시민사회의 흐름과도 적극 연계 협력할 것”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신당권파는 당권파에 비해서도 더 노골적으로, 다만 그 각도와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국민정당화를 하겠다고 역설하고 있다. 즉 신당권파도 당권파 역시 국민정당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보면서 다만 당권파가 보이고 있는 약점(허점)을 파고들어 이 기회에 역시 자신들이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상황(약점)을 만회 내지 역전시키고자 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당권파가 수세에 몰리면서 노동중심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신당권파는 당권파에 대한 보수세력의 공격과 공세가 이루어지는 정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두 세력 모두 자신들의 행위가 노동자계급을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우려하지 않고 있다.
이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통진당은 이미 노동자계급의 이해와는 상관이 없는 부르주아 내 한 정당에 불과하다. 사실 이 점은 지난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그 싹을 키워왔다. 적어도 민주노동당 분당 시점에서 정리했어야 할 문제였다. 아니 분당 이후 ‘진보대통합/민주대통합’을 놓고 헛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라도 그랬어야 했다. 아무리 늦어도 야권연대가 기승을 부리고, 통진당이 결성될 때에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결별했어야 마땅한 문제였다. 그랬더라면 통진당 사태가 터져 나왔을 때 지금처럼 지배계급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앞장서 주도적으로 통진당을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심판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지배계급이 감히 지금과 같은 행태를 부리지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세, 정치, 대안 구심이 형성되어 있었다면 굳이 민주노총이 ‘조건부 철회’나 ‘제2 정치세력화’를 말하지 않더라도 벌써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이 힘차게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정리되고 있지 않다. 그 핵심적 이유는 통진당 이후에 대한 정치적 대안이 불투명하고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이 여전히 통진당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면서 단호하게 결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진당 바깥의, 진보신당은 물론이고 의회/개량주의 노선에 비판적인 활동가를 포함해 사회주의 세력의 행동이 굼뜨고 있기 때문이다. 야권연대에 대당할 수 있는, 통진당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광범위하게, 본격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출범시켜야 한다.
최근 댓글 목록